사회주의 문화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회주의 문화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추구하는 문화 형태로, 사회주의 이념을 반영하고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프롤레트쿨트,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즈다노프 교리 등 다양한 이론과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감정, 욕구, 건축, 문학, 성, 예술,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나타났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문학,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당성 등은 사회주의 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힌다. 사회주의 문화는 여러 공산주의 국가의 문화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김정일의 주체사상처럼 각 국가의 특성에 맞게 발전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사회주의 문화 - 러시아 아방가르드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일어난 다양한 예술 운동의 총칭으로,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혁명 정신과 사회주의 이념을 반영하여 표현의 혁신과 정치적 선전을 추구했으나, 스탈린 체제하의 정치적 억압으로 쇠퇴하였다. - 문화 혁명 - 티무르 르네상스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 티무르 제국에서 일어난 티무르 르네상스는 티무르의 정복 활동 이후 사마르칸트와 헤라트를 중심으로 이슬람 예술과 학문이 융성하며 건축, 미술,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전을 이룬 문화 부흥기이다. - 문화 혁명 - 변증법적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인식론을 종합하고 스탈린에 의해 체계화된 철학으로, 헤겔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여 물질의 우선성을 강조하며,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역사적 유물론, 자본주의 모순, 변증법 법칙 등을 핵심 개념으로 하지만 권위주의적 적용, 사회 복잡성 간과 등의 비판을 받는다. - 마르크스주의 - 마르크스주의 국제 관계 이론
마르크스주의 국제 관계 이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국제 체제 불안정을 심화시킨다고 보며, 유물사관을 통해 국제 체제의 구조와 경제 역할을 강조하고, 다양한 갈래로 발전하여 주류 이론을 비판하며 불평등과 권력 구조 분석 및 사회 정의 실현을 모색한다. - 마르크스주의 - 노동계급
노동계급은 마르크스주의적 정의에 따라 노동력 외에는 판매할 것이 없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며, 사회의 부를 창출하지만 고등교육 접근, 노동 환경, 정치 참여 등 다양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사회주의 문화 | |
---|---|
사회주의 문화 | |
정의 | |
정의 | 사회주의 사회의 예술, 과학, 지식, 문화와 그 사회를 건설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이념과 가치를 반영하는 문화 |
목표 | |
목표 | 새로운 인간의 창조 부르주아 문화의 극복 |
특징 | |
특징 | 계급성 당파성 인민성 국제성 과학성 진보성 |
구성 요소 | |
구성 요소 | 사회주의적 예술 사회주의적 과학 사회주의적 교육 사회주의적 생활 양식 사회주의적 도덕 |
예술 | |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사회주의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며, 예술 작품이 사회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을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 |
과학 | |
사회주의적 과학 | 사회주의적 과학은 사회주의 건설과 인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과학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에 기초 |
교육 | |
사회주의적 교육 | 사회주의적 교육은 사회주의적 가치관과 이념을 청소년들에게 심어주고,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시키는 것을 목표 |
생활 양식 | |
사회주의적 생활 양식 | 사회주의적 생활 양식은 집단주의, 협동, 노동 존중, 검소함 등을 강조하며, 개인주의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판 |
도덕 | |
사회주의적 도덕 | 사회주의적 도덕은 계급적 연대, 사회적 책임감, 애국심 등을 강조하며,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비판 |
2. 역사적 배경
사회주의 문화의 개념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회의 경제적 하부 구조가 문화, 예술, 사상 등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주의 문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 문화와 대비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문화를 의미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과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문화 건설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식을 고양하고, 사회주의적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주도한 프롤레트쿨트 운동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나, 레닌은 프롤레트쿨트의 급진성에 우려를 표하며 재정 지원을 중단했고, 결국 해산되었다.
소련에서는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주도한 '즈다노프 교리'가 사회주의 문화를 대표하게 되었다. 즈다노프는 문화예술을 '정신 개조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혁명적인 문화'를 통해 인간의 의식 개조를 추구했다. 그러나 즈다노프 교리는 형식주의 예술을 탄압하고, 예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이 시기에 탄압을 받았다.
즈다노프 교리는 중국의 문화 대혁명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예술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 1. 프롤레트쿨트 (Алекса́ндр Богда́нов)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Алекса́ндр Богда́нов)가 1917년에 주도하여 조직한 프롤레트쿨트(Пролеткульт)는 사회주의 하부구조에 따른 상부구조 혁명으로서 ‘인간관계의 혁명’을 정의하였다. 이는 일상적인 우정, 사랑 및 기타 감정을 ‘사회주의적’으로 고치는 것을 제일의 활동 목표로 삼았다.[1] 프롤레트쿨트는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정수는 프롤레타리아가 갖고 있는 선진성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1] 보그다노프는 문화 창조의 주체는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며, 이러한 문화 창조는 어떠한 정치적 당의 결속이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1] 따라서 프롤레트쿨트는 당과 독립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1]그러나 레닌은 당시 러시아 대중의 의식이 상당히 낙후한 상태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1] 레닌은 본래 프롤레트쿨트의 활동을 독려하였으나, 러시아 대중에게 너무나도 급진적인 공산주의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정치적 실익에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다.[1] 레닌은 프롤레트쿨트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중단하였고, 1923년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문화·예술 개편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여 프롤레트쿨트를 해산하였다.[1]
2. 2. 즈다노프 교리 (Андре́й Жда́нов)
즈다노프는 독자적인 문화 이론을 내세웠다. '즈다노프 교리'(доктрина Ждановаru)는 문화·예술 풍조를 인간 혁명화(革命化)를 위한 문화적 코드(код)로 등치할 수 있기에 공산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문화를 적극 홍보, 선전해야 하며, 부르주아·자본주의·제국주의·서구 문화를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는 노선이다. 이 노선은 1922년 혁명러시아 미술협회에서 처음 등장한 예술 사조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이론적 발전·보완 형태로 발현했는데, 1934년 전연방 공산당 제1회 작가동맹대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됐다.[1]그는 문화 일체를 정적(精的) 자극이 아닌 물적(物的) 자극으로 정의하였는데, 그 이유는 문화 창조가 의식적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자극으로 되기 위해서는 물적 세계에서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그는 문화예술 활동을 ‘정신 개조를 위한 수단으로서 물적 자극’이라고 간주하였고, 문화예술 활동을 순수한 의미에서 ‘정신의 교환’이라고 취급하는 모든 시도를 주의주의(主意主義)적 반동 행위라고 공격하였다.
즈다노프는 알렉산더 러브(Alexander Love)의 『서유럽 철학사』를 비판적으로 조명하여 질료 자극과 정신 자극을 구분하였다. 즈다노프는 매 역사 단계에서 확인 가능한 한 시대의 경제적 지배 계급 또는 지도 세력이 가진 이데올로기 내용 틀이 해당 역사 단계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여겼으며, 이러한 이데올로기 내용 틀이 한 역사 진행에서 ‘반동’ 또는 ‘진보’를 가름하는 핵심 요소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반동’을 대표하는 특수한 인식론적 개념·내용 구조가 있으며, ‘진보’를 대표하는 특수한 인식론적 개념·내용 구조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반영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논하였다. 그는 유심주의(唯心主義)는 물론이고, 소박론적 기계주의(機械主義)[2] 관점에 대한 반대를 기반으로 하여 문화·예술이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인간 정신 구조를 질적으로 개변시키는지 설명하였고 이 경로에서 ‘진보’를 대표할 수 있는 핵(核)을 코드화하여 전달하는 것이 문화 혁명이라 하였다. 그는 이러한 법칙성을 문화 혁명 이론으로 확립하였다.[3]
그는 이러한 문화 혁명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혁명적인 문화’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사적 유물론적 법칙 안에서 형성되는 매 제반사회단계의 모순성을 인간 개체가 포착하게끔 유도하는 모든 물적 자극을 ‘혁명적인 문화’라고 정의였다. 그리고 문화 창조 행위가 인간이 특정한 의식성을 발현할 수 있게 하는 물질 자극의 일부로 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이것이 현존하는 물질 자극 중 가장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동시에 제일 강한 자극성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화 선전은 인간의 의식성을 조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의식성을 효과적으로 조작하고 조정하기 위한 문화적 코드는 일정한 법칙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보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테크노크라트(Технократия)[4] 노선의 대척점에 선 노선으로 인식되었다.[5]
그의 교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뜻과 맞았다. 첫 번째는 공산주의적 문화를 양성하여 인간의 의식성을 사회주의 사회에 맞게 개조하려는 의도가 일치하였고, 두 번째는 스탈린이 정립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반영주의(反映主義)적 전제와 일치하였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즈다노프의 교리를 문화혁명의 일차적 원칙으로 정하였고 즈다노프는 문화혁명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을 형식주의(形式主義)로 정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라 형식주의는 예술의 코드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경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며, “예술 자체의 미(美)를 형식화한다”는 목표 아래에 대중에게 불필요한 난해함을 강요하는 부르주아 문화예술로 간주된다. 이렇게 하여 소비에트 연방 내 형식주의 예술(아방가르드 예술 등)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예술 활동이 상당한 침체를 맞게 되었다. 1946년 즈다노프는 프랑스 유미주의(唯美主義)가 부르주아 퇴폐주의(décadent) 및 개인주의에 기초한 반혁명 쓰레기 사조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였고, 공산당에서 안나 아흐마토바를 비판하였다. 얼마 안 가 즈다노프 교리에 의한 문화혁명 노선이 소비에트 연방 문화예술계의 주류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후에 진행된 문화예술계의 숙청을 즈다놉시나(ждановщина)라고 한다. 이 시기 수많은 예술인이 탄압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미하일 조센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이 있다.[6]
즈다노프의 교리는 정치 영역에서 사회공학의 첫 도입으로 여겨지며, 체계적인 의미로서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실행된 ‘인간 영혼 개조’(Инженеры человеческих душru)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교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등장한 공산국가의 문화혁명 정책에 영향을 주었으나, 1950년대 말을 전환점으로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이 수정주의를 받아들임으로 즈다노프 교리는 소비에트 연방 및 그 위성 공산권의 문화·예술계에서 점차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1960년대 중국공산당의 문화 대혁명 노선에는 강렬한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예술계의 경우에는 현재까지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7]
3. 주요 특징 및 분야별 분석
사회주의 문화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특징을 보이며, 그 영향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주도한 프롤레트쿨트는 '인간관계 혁명'을 목표로, 일상적인 감정을 '사회주의적'으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레닌은 대중의 의식 수준을 고려하여 프롤레트쿨트를 해산시켰다.[1]
스탈린은 '공산주의적 인간'을 창조하려 했고,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즈다노프 교리'를 통해 문화·예술을 혁명화하려 했다. 즈다노프는 문화예술을 '정신 개조를 위한 물적 자극'으로 정의하고, '혁명적인 문화'를 통해 인간의 의식성을 조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형식주의를 부르주아 문화로 간주하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강조했다.[1]
즈다노프의 교리는 스탈린의 의도와 일치하여 소비에트 연방 문화혁명의 원칙이 되었고, 형식주의 예술은 탄압받았다. 1946년에는 안나 아흐마토바가 비판받았고, 이후 '즈다놉시나'라 불리는 예술계 숙청이 진행되었다. 미하일 조센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이 탄압받았다.[6]
즈다노프 교리는 정치 영역에서 사회공학의 첫 도입으로 여겨지며, '인간 영혼 개조'를 시도했다. 이 교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국가들의 문화 정책에 영향을 주었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소비에트 연방에서 힘을 잃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국의 문화 대혁명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예술계에는 큰 영향을 주었다.[7]
레닌은 보그다노프의 방식에 반대했지만, 사회주의 체제를 다지면서 여러 사회주의 문화가 등장했다. 즈다노프 교리는 소비에트 연방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공산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3. 1. 감정과 욕구
볼셰비키당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감정과 욕구에 영향을 받는 인간을 '자연의 힘에 압도되는 수동적 인간'이라고 보았다. 반면 욕구를 절제하고, 욕구가 "계급 투쟁 진전에 도움이 되는가?"를 따지는 인간을 '유적 존재'(Gattungswesende)라고 불렀다. 이 기준에 따르면 욕구에 지배되는 인간은 수동적이며, 계급 의식이 없는 룸펜일 뿐이다. 볼셰비키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개별 인간'이 아닌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인류(Humanitas)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볼셰비키당은 인간이 가져야 할 진정한 욕구로 '혁명에 대한 부합성'을 제시했다. 이 기준에 맞는 욕구는 '장려되어야 하는 욕구'이고, 그렇지 않은 욕구는 '통제되어야 하는 욕구'였다. 그들은 전자에 대해서는 물질적 보장을, 후자에 대해서는 통제를 강력하게 시행했다.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욕구'(지식욕), '최상의 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욕구'(성취욕)는 무조건적으로 부합성에 속한다. 식욕, 성욕, 수면욕, 물욕 등은 상황에 따라 부합성에 맞으면 장려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통제되었다.
이러한 광범위한 욕구 통제는 "자유는 좋지만, 통제는 더더욱 좋다."라는 레닌의 말로 요약된다. 레닌은 발전된 인간은 욕구를 혁명성에 맞게 스스로 조절할 수 있지만, 낙후된 인간은 욕구에 지배된다고 보았다. 그는 혁명가로서 맑은 정신을 갖추기 위해 지속적인 신체 단련과 소식(小食)이 필요하다고 믿었기에, 운동을 자주 하고 식탐을 멀리했다. 그는 발전된 인간의 삶을 '스파르타식 생활 양식'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이를 따랐다.[8] 레닌의 금욕주의와 통제적 사고에 반발한 레프 트로츠키는 그를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독재자인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9] 볼코고노프는 레닌의 금욕주의에 대해 "레닌은 평생 관념론과 형이상학에 대항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레닌 자신이 철저한 관념론자이자 형이상학자라는 것을 스스로의 인생을 통해 증명하였다."라고 평가했다.
3. 2. 건축
소비에트 연방은 1945년부터 독특한 형태의 패널형 주택 건축 방식을 채택하였고, 1951년부터는 실제 대규모 건설이 진행되었다.[10] 이 시기에 등장한 패널형 아파트 단지는 흐루쇼프가 적극적으로 분배를 주도하여 '흐루쇼프카'라고 불린다. 사회주의 국가의 주된 건축 양식은 개인 주택 위주가 아닌 연립주택 위주였는데, 이는 집단주의를 강조하여 공산주의적 인간을 배양하려는 의도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11]3. 3. 당성 (партийность)
당성(партийностьru)은 공산당 또는 당 산하 청년단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특수한 형태의 계급의식이다.본래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에서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은 자본주의가 자본을 팽창하는 과정에서 내재된 모순을 드러낼 때, 그것을 인식한 피착취자가 자연스럽게 갖는 것이었다.[12] 그러나 레닌은 볼셰비키당에서 이 당성을 언제나 공개적으로 표출하고 계급의 적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하여 혁명 세력은 당에 대한 충성심과 적에 대한 분노를 통해 내부 단결을 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 기간 내내 계급의식이 일반적인 노동계급 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인간에 대해 밝힌 것을 분석하면서, 계급의식이 오로지 특출한 노동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 다수가 이 의식을 가지려면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외부의 주입과 학습, 대규모 토론을 통해서만 계급의식을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13]
그런 의미에서 당성은 공산당의 혁명성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당이 인류 진보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는 당성과 별도로 존재하는 개인성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면서도, 개인성은 그저 사물 일반에 대해 수동적인 정열에 불과하며, 개인성과 당성이 일체가 되었을 때 완벽한 공산주의형의 인간이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3. 4. 문학 (프롤레타리아 문학)
사회주의 문학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라는 형태를 기본으로 하며,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고도 불린다. 1919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다.[14] 사회주의 문학은 '혁명적 낙관주의'에 기초하여 '계급 의식의 발생 → 혁명의 구체적 실천 → 엄중한 시련 → 낙관성에 기초한 극복 → 최종적인 승리'라는 독자적인 이야기를 구성했다.당시 소비에트 연방 내에 존재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을 비롯하여 독일, 프랑스, 미국,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에스파냐, 중국, 일본 등의 사회주의 문학운동 조직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34년 전연방 공산당 제1회 작가동맹대회에서 사회주의 예술의 일반적 형식으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정하였다.[1] 1930년대에는 국제혁명작가동맹을 결성하고 4개 국어로 《국제문학》을 발행하였다. 막심 고리키는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가이다.[14]
3. 5. 성 (性)
레닌은 성에 대한 방종을 경계하며, 부르주아적 성 관념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식을 마비시켜 혁명을 쇠퇴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클라라 체트킨과의 대화에서 당시 유럽의 부르주아적 신념을 가진 근대적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동성애, 극단적인 자유연애주의 및 성개방주의와 연계하여 지도하는 것을 비판했다.[15] 또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논쟁에서 "목이 마르다고 해서 흙탕물을 마실 수는 없다."라며 성욕에 대한 자기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930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성 해방 관련 기관인 제노텔(Женотдел)을 "부르주아 퇴폐주의 성관념을 여성에게 주입하여 공산주의 도덕 형성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초기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 행위를 법으로 금지했지만, 실제로는 성소수자들이 심한 차별을 받았다. 이들은 불결하고 천박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당했으며, 보수적인 성 관념을 가진 대다수의 볼셰비키는 이러한 현상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1933년 스탈린은 남성 동성애를 불법화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남성 동성애 행위는 최대 징역 5년의 처벌을 받았다. 동성애자라는 것이 드러나면 정신 교정 센터로 보내졌다. 여성 동성애는 법 조항은 없었지만, 실질적으로 금기시되었다.[16]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성문화는 보수적인 성격으로 흘러갔으며, 1944년에는 '모성영웅'(Мать-героиня) 제도를 통해 여성에게 사회적 여성성을 간접적으로 주입하였다.
레닌부터 스탈린까지 이어진 볼셰비키당의 성관념은 사회주의 문화에서 성이 인구 생산이라는 목적에서만 작동되어야 한다는 '생산주의' 관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공산 국가는 남녀 모두에게 성에 대한 엄격한 절제를 요구했고, 성매매와 포르노그라피를 강력하게 제재했다.
3. 6. 예술
즈다노프 교리에 따르면, 예술은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수호하고 계급 의식을 고양하는 목표에 종속되어야 한다. 즈다노프는 서구 예술을 '퇴폐적'이라고 비판하고,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1948년 소비에트 연방은 이러한 관점에 따라 예술계에 대대적으로 간섭하였다.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리안,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등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이념을 경시하고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형식주의를 추종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작곡가 동맹에서 제명되고 자아비판을 강요받았으며, 작품 연주도 금지되었다.[6] 이 숙청은 공식적으로 바노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친선'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서방에서 명성을 얻던 예술가들이 주된 대상이었다.
'즈다놉시나'(ждановщина)라고 불리는 이 예술계 숙청으로 수많은 예술인들이 탄압을 받았다.[6] 이는 예술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된 사례로, 한국 현대사에서도 유사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3. 7. 종교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며 반인민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종교가 인간이 미숙하고 모순을 느낄 때 등장하는 것이며, 변증법적 투쟁을 통해 낡은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면 종교성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17][18]블라디미르 레닌은 『사회주의와 종교』에서 종교의 기만성을 비판했다. 그는 종교가 '영원히 평안한 내세'를 내세워 인민의 복종심을 고양시키고, 봉건영주들의 지배를 돕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러시아의 역사를 예로 들며, 동방정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된 국가 법 체계가 인민에게 야만적이었다고 지적하며,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다.[19]
레닌은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을 바탕으로, 과학에 기반한 무신론과 반(反)과학에 기반한 유신론 사이의 투쟁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자당이 종교에 대해 가져야 하는 태도』에서 국가와 종교의 분리, 프롤레타리아 전위당의 인민 무신화(無神化)를 위한 과학과 무신론 보급을 강조했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종교를 믿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종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과학과 무신론 보급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헌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당 차원에서는 포교 행위를 엄단하고 종교인을 무신론자로 전향시키는 노력을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20]
실제로 소련을 비롯한 여러 공산권은 '국가 무신론'이라는 명분으로 종교인을 탄압하고 종교 시설을 파괴했다. 이들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중의 종교 접근을 막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종교의 특징으로 반과학, 반유물론, 반이성을 꼽았다.[21]

4. 사회주의 문화 이론가
사회주의 문화 이론은 여러 인물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1917년 프롤레트쿨트를 조직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레닌은 프롤레트쿨트의 급진적인 성향을 우려하여 지원을 중단했고, 결국 프롤레트쿨트는 해산되었다.[1]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는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즈다노프 교리'를 통해 문화예술을 혁명화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즈다노프는 문화예술이 인간의 정신을 개조하는 수단이라고 보았으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조하고 서구 문화를 비판했다.[1] 그의 교리는 소비에트 연방 뿐만 아니라 다른 공산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 대혁명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화예술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7]
4. 1. 주요 이론가 목록
참조
[1]
서적
Soviet Popular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문서
과거 레닌은 이것을 속류유물론(俗流唯物論)이라고 하였다.
[3]
간행물
사회주의현실주의창작원칙재건국초기의수용과전화
[4]
문서
기술관료와 기술 개발을 정치의 중심에 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선
[5]
서적
The Soviet Century
Verso
[6]
서적
On Stalin's Team
Melbourne University Press
[7]
문서
普通高中《思想政治》课程标准教学要求
[8]
서적
[9]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10]
서적
Сборные крупнопанельные многоэтажные дома
[11]
문서
stalinskiy ampir – Stalin's Empire style or stalinskiy neorenessans – Stalin's Neo-renaissance
[12]
서적
Partiinost' Great Soviet Encyclopedia
Macmillan
[13]
서적
Partiinost' Great Soviet Encyclopedia
Macmillan
[14]
웹사이트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설명
http://www.munhwa.co[...]
[15]
서적
공산주의청년여성이론
함성
[16]
웹사이트
1917 Russian Revolution: The gay community's brief window of freedom
https://www.bbc.co.u[...]
BBC
2019-04-09
[17]
웹사이트
The Essence of Christianity, Chapter 16
http://www.marxists.[...]
[18]
웹사이트
The German Ideology
http://www.marxists.[...]
[19]
서적
Социализм и религия
Новая Жизнь
[20]
서적
A History of Soviet Atheism in Theory, and Practice, and the Believer, vol 1: A History of Marxist-Leninist Atheism and Soviet Anti-Religious Policies
St Martin's Press
[21]
서적
Communism Today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