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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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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풍백화점은 1989년 12월 1일에 개점한 고급 백화점이었으나, 부실 시공과 안전 관리 소홀로 1995년 6월 29일 붕괴되어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백화점은 건설 당시 4층 상가 건물로 허가받았으나, 뇌물을 주고 용도를 변경하여 5층으로 증축하는 과정에서 구조를 약화시키고, 설계 변경을 무시하는 등 부실한 시공이 이루어졌다. 붕괴 전 징후가 있었음에도 영업을 강행했으며, 붕괴 직전 경영진의 부적절한 대처로 인명 피해를 키웠다. 이 사고는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건물 안전 관련 법규 강화와 국민들의 안전 의식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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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 [회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붕괴 사고 후의 삼풍백화점. 사진은 붕괴를 면한 B동 측에서 촬영한 것으로, 건물의 주위를 펜스로 봉쇄하고 있다.
원어Sampoong Department Store
로고
창립1989년 12월 1일
해체1995년 6월 29일
국가대한민국
인물이준
이한상
모기업삼풍건설산업
건축 정보
건물 명칭삼풍백화점
위치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685-3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중앙로 188, 아크로비스타 부지)
상태철거됨
기공1988년 12월 31일
완공1989년 12월 1일
개장1989년 12월 1일
파괴1995년 6월 29일
철거1998년 10월 15일
건축 기간1987년 10월 6일 ~ 1989년 11월 30일
용도백화점
건축가이준
건설사삼풍건설산업
계약자이준
층수지상 5층, 지하 4층
총 면적1만 5,000천평

2. 역사

삼풍백화점은 1989년 12월 1일 개장하였다.[1] 개장 당시에는 대한민국에서 업계 1위의 매출을 자랑하는 고급 백화점이었으며, 서울의 부유층을 주요 타겟으로 삼았다. 건물은 매장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A동과 스포츠 센터 등이 입주한 B동,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콘코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87년 착공 당시 4층 상가 건물로 허가를 받았으나, 이후 백화점으로 용도를 변경하고 5층으로 증축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설계 변경과 부실 공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5층 식당에 온돌을 설치하고 옥상에 무거운 냉각탑을 설치하면서 건물에 과도한 하중이 가해졌다. 냉각탑은 인근 주민들의 항의로 위치를 옮기는 과정에서 롤러를 사용해 건물에 균열을 발생시켰다.

붕괴 며칠 전부터 건물에 금이 가고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등 붕괴 징후가 있었지만,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하였다.[10] 무량판 구조 덕분에 6년간 버텼지만, 결국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57분경 A동 전체가 붕괴되었다.

이 사고로 502명이 사망, 937명이 부상, 6명이 실종되어 총 1,44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2] 이는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인명 피해로 기록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현재 주상 복합 아파트인 아크로비스타가 들어서 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함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재난 및 안전 관리 기본법''' 제정과 중앙119구조본부 설치의 계기가 되었다.

2013년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라나 플라자 붕괴 사고는 건물 붕괴 사고로서 이 사고를 넘는 세계 최다 피해자를 낸 대참사였다.

2. 1. 건설 과정

1987년 삼풍백화점은 착공 당시 4층 상가 건물로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주거용 토지여서 상업용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당시 삼풍건설은 서초구청장 이충우[9]에게 뇌물을 주고 인허가를 받아냈다.

삼풍은 건축 도중 백화점으로 용도를 변경하고 5층으로 증축하려 했으나, 시공사 우성건설은 붕괴 위험을 이유로 거부했다. 결국 삼풍은 우성건설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삼풍건설산업에 건축을 위임했다.

건축 구조 변경 시에는 구조를 강화해야 하지만, 삼풍은 오히려 "L"자형 철근 대신 "ㅡ"자형 철근을 사용하고, 에스컬레이터 설치를 위해 기둥을 25% 절단하는 등 구조를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기둥이 건물의 하중을 견디기 어려워졌다. 붕괴 후 전문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6년을 버틴 것이 기이하다고 평가할 정도로 설계 변경과 부실 시공이 심각했다.

원래 이 건물은 보 없이 기둥으로 건물을 지탱하는 플랫 슬래브 구조(무량판 구조)를 채택했다. 이 공법은 천장을 높게 하고 공간을 넓게 확보할 수 있으며, 공사 기간 단축과 비용 절감의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구조 형식이 난해하고 지진 발생 시 펀칭 파괴의 우려가 있으며, 기둥을 굵게 하지 않으면 중량물을 올릴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4]

당초 설계에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삼풍 측이 불법으로 건물 구조를 변경하면서 건물 내 벽을 철거하여 기둥에 하중이 집중되고 강도가 저하되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면서 하중 불균형이 발생했고, 기둥 보강 없이 직경을 800mm에서 600mm로 줄이고 철근 수도 16개에서 8개로 줄였다. 에스컬레이터 부분 방화 셔터 설치를 위해 기둥의 4분의 1이 철거되어 건물 자체가 구조적으로 강도 부족 상태가 되었다.

당시 한국 건설 업계는 자재 부족으로 모래, 자갈, 시멘트 배합 비율이 기준 미달이었고, 중국산 저질 시멘트가 사용되는 등 조악한 콘크리트 사용 사례가 많았다. 또한, 당초 계획보다 1개 층을 증축하여 3000ton의 무게가 증가했고, 87ton의 냉방 기기가 옥상에 설치되어 건물 전체에 큰 부하가 걸렸다.

2. 2. 붕괴 전 징후

삼풍백화점은 붕괴 며칠 전부터 금이 가고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등 건축물이 기우는 붕괴 징후가 있었다.[10] 1995년 4월경부터 5층 레스토랑가 천장에 균열이 생겼고, 5월에는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고 바닥도 침하했다. 사고 전날에는 5층 직원이 천장의 갈라진 틈을 발견했고, 사고 당일 아침에는 균열이 더 커졌다.

1995년 6월 29일, 5층 직원이 건물의 이상을 보고했고, 정오쯤에는 5층 천장에서 누수가 발생하여 5층 영업을 중단하고 가스 공급과 냉방 장치 전원을 차단했다. 그러나 경영진은 이러한 징후에도 "보수하면 문제없다"며 건물의 상태를 과소평가하고 영업을 계속했다.[11] 오후 5시 40분경, 건물 전체가 침하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1층과 2층을 제외한 전 층의 영업을 중단하고 건물의 네 모서리에 임시 보강용 골격을 세웠으나, 이는 오히려 5층 천장에 막대한 하중을 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 3. 붕괴

왼쪽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57분경, 엘리베이터 타워를 제외한 삼풍백화점 A동 전체가 붕괴되었다.[10] 붕괴 직전, 간부들은 5층만 폐쇄한 채 백화점에서 탈출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붕괴 시점까지 B동에서 건물 보수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다.[11] 이들은 붕괴 시점까지도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원을 확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증언한다.[11]

5층 부분의 기둥 2개가 부러진 것을 기점으로 A동이 붕괴되었고, 20초 정도 만에 모든 층이 붕괴되었다. 건물 전체가 침하하기 시작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일부 손님과 점원은 대피에 성공했지만, 점내에 남아있던 손님과 점원 1,500여 명이 붕괴에 휘말려 깔렸다.

이 사고로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당했으며, 6명이 실종되어 총 1,44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2] 이는 한국 전쟁 다음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인명 피해 규모였다.

3. 붕괴 원인

1989년 12월 1일 개장한 삼풍백화점 붕괴는 부실 설계, 부실 시공, 안전 관리 부실, 그리고 행정 당국의 관리 소홀이라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삼풍백화점은 건설 당시부터 무리한 설계 변경과 하중 계산을 무시했고, 부실 공사로 인해 붕괴 위험을 안고 있었다.[10] 본래 아파트 상가 용도로 계획되었으나, 백화점으로 용도를 변경하면서 4층 건물을 5층으로 억지로 증축하는 과정에서 기둥 둘레를 줄이는 등 안전을 도외시한 공사가 이루어졌다. 5층에 온돌을 설치하고, 옥상에 냉각탑을 설치하면서 건물에 가해지는 무게는 더욱 늘어났다. 특히 냉각탑을 옮기는 과정에서 크레인을 사용하지 않고 롤러를 사용해 건물 전체에 균열이 발생했다.[10]

이러한 부실 공사는 플랫 슬래브 구조의 문제점과 맞물려 붕괴 위험을 더욱 키웠다. 플랫 슬래브 구조는 공간 활용과 공사 기간 단축에 유리하지만, 구조가 난해하고 지진에 취약하며, 기둥이 굵어야 중량물을 올릴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3][4] 삼풍백화점의 경우, 불법 설계 변경으로 기둥에 하중이 집중되었고, 에스컬레이터 설치로 하중 불균형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기둥 직경과 철근 수를 줄이고, 방화 셔터 설치를 위해 기둥의 일부를 절단하는 등 안전을 무시한 시공이 이어졌다. 건설 자재 부족으로 인해 조악한 콘크리트가 사용된 점도 문제였다. 신도시 건설 붐으로 인해 모래, 자갈, 시멘트 배합 비율이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가 많았고, 중국산 저질 시멘트가 사용되기도 했다.

5층 증축 과정에서 무허가 증축, 용도 불법 변경, 온돌 설치, 옥상 냉각탑 설치 등 무리한 증축과 하중 증가가 이어졌다. 특히 옥상 냉각탑을 롤러로 이동시킨 것은 건물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붕괴 며칠 전부터 금이 가고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등 붕괴 징후가 있었지만,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했다.[10] 붕괴 직전까지도 보수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붕괴된 A동이 아닌 B동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1]

이러한 참사는 행정 당국의 관리 소홀도 한몫했다. 삼풍백화점은 착공 당시부터 상업용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주거용 토지에 뇌물을 주고 인허가를 받는 등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3. 1. 부실 설계 및 시공

삼풍백화점은 1987년 착공 당시 4층 상가 건물로 허가받았으나, 상업용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주거용 토지였다. 당시 삼풍건설은 서초구청장 이충우에게 뇌물을 주고 인허가를 받았다.[9] 이후 백화점으로 용도를 변경하고 5층으로 증축하려 했으나, 시공사 우성건설이 붕괴 위험을 이유로 거부하여 계약을 파기하고 삼풍건설산업이 직접 시공했다.

건축 과정에서 삼풍은 구조를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약화시켰다. 'L'자형 철근 대신 'ㅡ'자형 철근을 사용했고, 에스컬레이터 설치를 위해 기둥을 25% 절단하여 건물의 하중을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9] 전문가들은 이런 부실 시공에도 6년간 버틴 것이 기이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1989년 12월 1일 개장한 삼풍백화점은 건설 당시 무리한 설계변경과 하중 계산을 무시했다. 아파트 상가 용도로 계획되었으나 백화점으로 변경하면서 4층에서 5층으로 억지로 증축하며 기둥 둘레를 줄이는 등 부실 공사가 이루어졌다.

5층 식당에 온돌을 설치하여 무게가 가중되었고, 옥상 냉각탑 3대(냉각수 포함 87톤)를 크레인 없이 롤러로 옮겨 건물 전체에 균열이 생겼다.

원래 보를 사용해야 할 곳에 기둥으로 건물을 지탱하는 플랫 슬래브 구조를 채택했는데, 이는 공간 확보와 공사 기간 단축, 비용 절감에는 유리했지만 구조가 난해하고 지진 시 펀칭 파괴 우려가 있으며 기둥이 굵어야 중량물을 올릴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3][4]

불법 설계 변경으로 건물 내 벽이 철거되어 기둥에 하중이 집중되었고, 에스컬레이터 설치로 하중 불균형이 발생했다. 기둥 직경은 800mm에서 600mm로, 철근 수는 16개에서 8개로 줄었고, 방화 셔터 설치를 위해 기둥의 4분의 1이 철거되어 강도가 부족해졌다.

신도시 건설로 자재 부족 상황에서 모래, 자갈, 시멘트 배합 비율이 기준 미달이었고, 중국산 저질 시멘트가 사용되는 등 조악한 콘크리트 사용 사례가 잇따랐다. 5층 증축으로 3,000톤의 무게가 증가했고, 87톤의 냉방 기기가 옥상에 설치되어 건물 전체에 큰 부하가 걸렸다.

5층 증축은 무허가로 시작되었고, 롤러스케이트장으로 신고 후 한식 레스토랑으로 불법 변경되었다. 온돌 설치로 바닥에만 3,000톤의 콘크리트가 사용되었고, 주방 기기, 벽돌 벽, 석정 등으로 하중이 더 늘었다.

옥상 슬래브 두께가 6cm에서 9cm로 변경되었고, 지하에 설치 예정이던 87톤 냉방 기기를 옥상에 설치하여 과도한 하중이 발생했으며, 건축 초기부터 냉방 기기 작동으로 건물 전체에 미세한 진동이 있었다.

1993년 8월, 옥상 냉방 장치를 건물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기면서 크레인 대신 롤러를 사용하여 건물에 더 큰 부하가 가해졌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 쓰레기 매립지로 지반이 연약했다.
  • 철근 대신 석유 캔을 채운 곳이 있었다.
  • 천장과 기둥 접합부에 철근을 구부리지 않아 펀칭 현상이 발생했다.
  • 바닥 철근 위치가 바닥면에서 10cm 위치에 있어 (원래는 5cm) 문제가 되었다.
  • 1994년 무허가 지하 매장 증설 공사로 건물 강도가 더 약해졌다.
  • 같은 해 B동 2층에 대규모 서점이 개업하여 하중이 증가했고, 1995년 3월 B1층으로 이전했다.

3. 2. 안전 관리 부실

삼풍백화점은 붕괴 며칠 전부터 금이 가고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등 붕괴 징후가 있었지만,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하였다.[10]

붕괴 직전, 간부들은 피해를 예상하고도 직원과 고객을 대피시키지 않고 5층만 폐쇄한 채 백화점에서 탈출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사실 삼풍백화점 임원진들은 붕괴 시점까지 백화점 건물 내에서 건물 보수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11] 이들은 붕괴된 A동이 아닌 B동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며, 붕괴 직전까지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원을 확보하느라 바빴다고 증언한다.[11]

1995년 6월 29일, 5층 식당가에서 천장 균열이 보고되었다. 5월부터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고 바닥 침하가 확인되었다. 사고 당일 아침에는 균열이 더 커졌다. 정오쯤 5층 천장에서 누수가 발생하자, 임시 조치로 5층 영업과 가스 공급이 중단되고 냉방 장치 전원이 차단되었다. 오후 3시, 사장이 부른 건축사가 백화점 건물을 조사했고, 오후 4시부터 B동에서 경영진 긴급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보수하면 문제없다"는 의견과 함께 영업을 계속하자는 판단이 나왔다. 경영진은 "영업을 하면서 보수를 계속하면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후 5시 40분경, 건물 전체가 침하하기 시작하자, 1층과 2층을 제외한 전 층의 영업을 중단하고 건물의 네 모서리에 보강용 골격을 세웠지만, 오히려 5층 천장에 막대한 하중이 가해졌다.

결국 오후 5시 55~57분, 엘리베이터 타워를 제외한 삼풍백화점 A동 전체가 붕괴되었다.

3. 3. 행정 당국의 관리 소홀

삼풍백화점은 1987년 착공 당시 4층 상가 건물로 허가를 받았으나, 해당 지역은 상업용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주거용 토지였다. 당시 삼풍건설은 서초구청장 이충우에게 뇌물을 주고 인허가를 받아냈다.[9]

이후 삼풍은 백화점으로 용도를 변경하며 5층으로 증축하려 했으나, 시공사 우성건설이 붕괴 위험을 이유로 거부하자 계약을 파기하고 삼풍건설산업에 건축을 위임했다. 건축 구조 변경 시 구조를 강화해야 하지만, 삼풍은 오히려 "L"자형 철근 대신 "ㅡ"자형 철근을 사용하고 에스컬레이터 설치를 위해 기둥을 25% 절단하는 등 구조를 약화시켰다. 붕괴 후 전문가들은 이 방식으로 6년을 버틴 것이 기이하다고 평가할 정도로 부실 시공이 이루어졌다.

또한, 삼풍 측은 주택 지역에 건물을 건설하려다 무허가 공사로 행정 처분을 받았음에도, 서초구 측에 1300만을 뇌물로 제공하여 불법으로 용도를 변경한 사실이 밝혀졌다.

4. 사고 이후



삼풍백화점은 1989년 12월 1일 개장했지만, 건설 당시부터 무리한 설계 변경과 부실 공사로 인해 붕괴 위험이 있었다.[10]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57분경, 엘리베이터 타워를 제외한 A동 전체가 붕괴되면서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당했으며, 6명이 실종되는 등 한국 전쟁 이후 최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2]

사고 이후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는 추모비가 세워졌고, 붕괴된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현재 주상 복합 아파트인 아크로비스타가 들어서 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함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 사고들을 계기로 '''재난 및 안전 관리 기본법'''이 제정되고 중앙119구조본부가 설치되는 등 안전 관련 시스템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4. 1. 구조 및 수습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KST)경, 삼풍백화점 A동 붕괴 직후부터 대규모 구조 활동이 시작되었다. 붕괴로 인해 건물 내부에 있던 1,500여 명의 고객과 직원들이 잔해에 깔렸다.[2]

하지만, 붕괴 현장 부근에서는 잔해와 함께 흩어진 상품에 대한 약탈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고로 한국 전쟁 다음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는데,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으로 총 1,44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2]

4. 2. 책임 추궁 및 처벌

이준 삼풍건설 회장을 비롯한 삼풍백화점 경영진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2] 이와 더불어, 이충우 전 서초구 구청장, 서초구 전 주택과장, 서울특별시 계장 등은 뇌물 수수, 업무상 횡령, 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체포 및 기소되었다.[2] 이 사고와 관련하여 기소된 인물은 총 25명이다.[2]

4. 3. 사회적 파장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사고 직후, 김영삼 대통령은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을 특별 재해 지역으로 지정하여, 피해자 구호와 복구, 보상에 필요한 행정, 금융, 세제상의 지원을 했다.[5] 이 사고로 인한 보상 총액은 약 4000억에 달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더불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한국 사회의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고들을 계기로 1995년 7월에 '''재난 및 안전 관리 기본법'''이 제정되었고, 소방방재청 직속의 구조 부대인 중앙119구조본부가 설치되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충격의 순간』 시즌 4에서는 사고 후 한국 정부가 긴급히 전국의 고층 건물을 조사한 결과, 재건축이 필요한 건물이 전체의 7분의 1, 수리가 필요한 건물이 전체의 5분의 4에 달했으며, 한국 전체 건물의 98%가 어떤 형태로든 결함을 안고 있었다고 보도했다.[5]

이 사고는 언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KBS, MBC, SBS, YTN 등 주요 방송사들은 구조 장면을 24시간 생중계했으며, 특히 YTN은 사고 발생 10분 만에 현장 영상을 방송하여 가입자가 두 배로 증가하는 등 보도 전문 채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전 세계 매스컴들도 이 사고를 톱뉴스로 보도하며 한국 사회의 안전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렸다.

이 사고는 문화예술계에도 영향을 주어, 2006년에는 이 사고를 소재로 한 영화 《가을로》가 개봉되었고, 2013년에는 드라마 《스캔들》이 제작되었다.[6] 정이현 작가는 이 사고를 주제로 한 단편 소설 《삼풍백화점》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 4. 보상 및 배상

사고로 인한 보상 총액은 약 4000억에 달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을 특별 재해 지역으로 지정하여,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행정·금융·세제상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5. 붕괴 이전 층별 구성

A동중앙광장B동
5층전문 식당가삼풍스포츠맥스, 수영장, 이발소
4층문화, 가정용품, 혼수용품삼풍스포츠맥스
3층남성의류, 캐주얼, 스포츠갤러리, 문화센터, 상가, 업무시설
2층여성의류증권사, 상가
1층잡화, 해외수입브랜드, 화장품약국, 은행, 상가
지하 1층슈퍼마켓, 식품관, 주방용품, 유아용품, 서점
지하 2층지하주차장, 창고
지하 3층지하주차장, 직원식당, 직원 대기실
지하 4층기계실


참조

[1] 웹사이트 韓国・デパート崩壊から19年 死者502人、沈没事故との共通点とは https://www.huffingt[...] BuzzFeed Japan 2014-06-30
[2] 웹사이트 【ビジネス解読】「あそこに行くのは自殺行為」と酷評される韓国「第2ロッテワールド」閑古鳥の惨状 https://www.zakzak.c[...] 産業経済新聞社 2015-02-15
[3] 문서 フラットスラブ工法 https://www.taisei.c[...] 大成建設
[4] 웹사이트 フラットスラブってなに?フラットスラブのメリットとデメリット http://kentiku-kouzo[...]
[5] 문서 [[ナショナルジオグラフィックチャンネル]]『[[衝撃の瞬間]]』第4シーズン第5話『スーパーマーケット崩壊 "Superstore Collapse"』より抜粋 2020-06-29
[6] 웹사이트 韓国ドラマ『スキャンダル』ストーリー https://www.bsfuji.t[...] フジテレビ 2020-04-14
[7] 뉴스 "[순간포착] 처참했던 그날...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20-06-27
[8] 뉴스 502명 목숨 앗아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이상해 "에어컨이 날 살렸다" https://www.donga.co[...] 동아일보&dongA.com 2020-05-27
[9] 문서 대한민국 제 17대 대통령 이명박의 아버지와고는 동명이인이다.이명박의 아버지는 이미 6년 전 사망한 상태였다.
[10] 문서 회장인 이준이 백화점 영업에 치중했기 때문이었다.
[11] Youtube KBS아카이브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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