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피프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새뮤얼 피프스는 1633년 런던에서 태어나 1703년 사망한 영국의 정치가이자 해군 행정가, 그리고 작가이다. 그는 1660년부터 1669년까지 10년간 일기를 썼으며, 이 일기는 17세기 잉글랜드의 사회, 정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피프스는 해군 행정가로서 해군 규정 작성에 힘썼으며, 해군 전문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는 왕립 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아이작 뉴턴의 저서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가 출판될 당시 회장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피프스는 해군성 서기관으로 재직하며 영국 해군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일기에 기록된 여성에 대한 행동은 오늘날 성희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피프스는 1633년 2월 23일 런던 플리트 스트리트의 샐즈베리 코트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 존 피프스(1601–1680)는 재단사였고, 어머니 마가렛 피프스(결혼 전 성씨 키트; 1667년 사망)는 화이트채플의 정육점 주인의 딸이었다. 그의 외삼촌 탈보트 피프스는 1625년 케임브리지의 기록관이자 잠시 국회의원 (MP)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의 사촌인 경 리처드 피프스는 1640년 서드버리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654년 재무부 남작으로 임명되었으며, 1655년에는 아일랜드 대법원장이 되었다.
1655년, 프랑스에서 망명한 위그노의 딸인 14세의 엘리자베스 드 생미셸(Elisabeth de St Michel, 1640–1669)과 결혼했다.[42] 결혼식은 1655년 10월 10일에 종교 의식을 치렀고, 같은 해 12월 1일 세인트 마가렛 교회, 웨스트민스터에서 시민 결혼식을 올렸다. 피프스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피프스는 일기 초기(1660년 1월)에 아내가 임신했을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언급했지만,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일기에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질투심, 불안감, 사소한 걱정, 불화 등이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새뮤얼 피프스는 어릴 때부터 방광 결석으로 고통받았는데, 그의 어머니와 동생 존도 나중에 이 질환을 앓았다. 그는 거의 항상 고통을 느꼈고,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혈뇨 등의 증상도 겪었다. 결혼할 무렵에는 상태가 매우 심각해졌다.
그는 1689년 5월부터 7월까지, 그리고 1690년 6월에 제이콥주의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1689년 57세의 나이로 공직에서 은퇴했다.
피프스는 1660년 1월 1일부터 1669년 5월 31일까지 약 10년간 일기를 작성했다. 이 일기는 토머스 셸턴의 속기법(Tachygraphy|태키그래피영어)으로 작성되었으며, 개인적인 내용을 솔직하게 담고 있어 처음부터 출판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피프스는 11명의 자녀 중 다섯째였지만, 당시 높은 유아 사망률로 인해 곧 생존한 자녀 중에서는 맏이가 되었다. 그는 1633년 3월 3일 세인트 브라이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피프스는 유년 시절 잠시 런던 북쪽에 있는 킹슬랜드에서 간호사 굿와이프 로렌스에게 맡겨져 지내기도 했다.
약 1644년에 피프스는 헌팅던 문법 학교에 다녔고, 그 후 1646년부터 1650년까지 런던의 세인트 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649년 찰스 1세 처형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1650년에 그는 세인트 폴 학교에서 두 개의 장학금을 받았다. 이는 나중에 재무부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조지 다운잉의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머서스 컴퍼니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했다. 10월에 그는 매그달렌 칼리지에 시저(Sizar)로 입학했고, 1651년 3월에 정식으로 옮겨가 1654년에 문학사(B.A.) 학위를 받았다.
3. 결혼 및 가족
1669년 6월부터 10월까지 아내와 함께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로 휴가를 다녀왔다. 그러나 런던으로 돌아온 후 엘리자베스는 병에 걸렸고, 결국 그해 11월 10일 장티푸스로 사망했다.[45] 피프스는 런던 하트 스트리트의 세인트 올라브 교회에 아내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피프스는 아내 사후 재혼하지 않았다. 대신 오랜 기간 그의 집안일을 돌보았던 메리 스키너(Mary Skinner)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피프스의 정부로 여겼으며, 때로는 '피프스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피프스는 유언을 통해 메리 스키너에게 200GBP의 종신 연금과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
피프스는 런던의 재단사 존 피프스(John Pepys, 1601–1680)와 세탁부였던 마가렛 카이트(Margaret Kite, ?–1667)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명의 형제자매 중 다섯째였으나, 많은 형제자매가 유아기에 사망했다. 그의 남동생 톰 피프스(Tom Pepys, 1634–1664)는 재단사였고, 여동생 폴리나 피프스(Paulina Pepys, 1640–1689)는 존 잭슨(John Jackson)과 결혼하여 피프스의 주요 상속자가 된 아들 존 잭슨(John Jackson, 1673–1724)을 낳았다. 또 다른 남동생 존 피프스(John Pepys, 1642–1677)는 형을 따라 해군 행정 분야에서 일했으나 미혼으로 사망했다.[21]
4. 건강 문제
1657년, 피프스는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당시 방광 결석 수술은 특히 고통스럽고 위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피프스는 외과 의사 토머스 홀리에와 상담했고, 1658년 3월 26일, 피프스의 사촌 제인 터너의 집 침실에서 수술이 진행되었다. 이 수술은 "결석 제거"라고 불렸으며, 마취제나 방부제 없이 시행되었다. 환자는 밧줄과 네 명의 건장한 남자에 의해 고정되었고, 외과 의사는 음낭과 항문 사이의 회음부를 따라 약 약 7.62cm 길이로 방광까지 절개했다. 결석은 집게를 사용하여 이 절개 부위를 통해 제거되었다.
피프스의 결석은 성공적으로 제거되었다. 결석은 테니스 공 크기(현대의 잔디 테니스 공보다 약간 작은 리얼 테니스 공 크기)로 묘사될 정도로 이례적으로 컸다. 그는 수술 기념일마다 축하 행사를 열기로 결심했고, 수년간 이를 지켰다.
그러나 수술로 인한 장기적인 영향이 있었다. 그의 방광 절개 부위는 말년에 다시 벌어졌으며, 감기에 걸릴 때마다 방광 통증을 겪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00년 4월, 피프스는 조카 잭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40년 이상 완벽하게 치유되었던 결석 제거 수술 상처가 다시 터지는 희귀한 악으로 고통받아 거의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썼다. 수술로 인해 그가 불임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수술 전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피프스 사망 후 부검 결과, 그의 왼쪽 신장이 완전히 궤양 상태였고, 무게 약 127.57g의 결석 7개가 발견되었다. 그의 방광은 괴저 상태였고, 오래된 수술 상처가 다시 벌어져 있었다.
5. 해군 경력 및 정치 활동
1660년, 왕정복고 이후 후원자 에드워드 몬터규의 추천으로 네이비 보드(Navy Board, 해군 위원회)의 서기(Clerk of the Acts)로 임명되었다.[44] 이 직책은 후대의 해군성 사무차관과는 달리, 당시에는 해군의 총괄 지휘관인 로드 하이 어드미럴(Lord High Admiral)의 비서와 같은 위치였으나, 실질적인 해군 행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였다.[48] 피프스는 네이비 보드에서 상급자들보다 더 유능하고 효율적인 일 처리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때로는 이로 인해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의 동료로는 윌리엄 펜 경, 조지 카터렛 경, 존 메네스 경, 윌리엄 배튼 경 등이 있었다. 피프스는 항해 경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개인 교사에게 산수를 배우고 선박 모형을 활용했으며, 점차 위원회 활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660년 9월에는 치안 판사가 되었고, 1662년에는 트리니티 하우스의 젊은 형제(Younger Brother)로 입회했으며 포츠머스의 자유 시민 자격을 얻었다. 또한 샌드위치 백작을 통해 탕헤르의 영국 식민지 행정에도 관여하여, 1662년 탕헤르 위원회에 합류했고 1665년에는 재무관이 되었다. 1663년에는 노르웨이산 돛대에 대한 3000GBP 규모의 계약을 독자적으로 협상하며 능력을 보여주었다. 1664년에는 왕립 어업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665년에는 왕립 학회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45] 그의 직무는 자금 분배와 계약 체결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포함했는데, 약속 장소인 커피 하우스나 선술집에서 상대방을 만나지 못해 시간을 허비하는 일에 대해 일기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1672년에는 트리니티 하우스의 원로 형제(Elder Brother)가 되었고, 1676-1677년과 1685-1686년에 두 차례 마스터(Master)를 역임했다. 1673년에는 해군 본부[46]의 서기관(Secretary to the Admiralty)[47]으로 승진했으며, 노퍽의 캐슬 라이징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왕립 해군과 상선을 위해 매년 40명의 소년에게 항해술을 가르치는 크라이스트 병원의 왕립 수학 학교 설립에 기여했으며, 1675년에는 이 병원의 이사가 되어 오랫동안 학교 운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699년에는 수학 학교 교장을 해양 지식이 풍부한 인물로 교체하려는 노력이 성공한 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런던 시의 프리먼이 되었다. 또한 천 의류업자 협회의 마스터(1677-1678)로도 활동했다.
1679년 초, 피프스는 하리치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정치적 공격에 직면했다. 그는 해군 건축가 앤서니 딘 경과 함께 프랑스와 내통하여 해군 정보를 유출했다는 반역 혐의로 런던 타워에 투옥되었다. 이 혐의는 샤프츠베리 백작이 꾸민 것으로 여겨지며, 피프스가 비밀 가톨릭 신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결국 그는 해군성 서기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7월에 석방되었으나 관련 소송은 1680년 6월까지 이어졌다.
1679년 탕헤르 위원회에서도 물러났지만, 1683년 다트머스 경을 도와 탕헤르의 영국 식민지를 철수시키는 임무를 위해 다시 파견되었다. 6개월간의 임무 후 스페인을 거쳐 1684년 3월 영국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6월, 다시 찰스 2세의 신임을 얻어 해군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국왕 비서로 임명되었고, 이 직책은 제임스 2세 즉위 후에도 유지되었다. 1684년부터 1686년까지 왕립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사우스 조지아 섬 근처에 있다고 추정되었던 유령 섬인 펩스 섬은 1684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685년부터 1688년까지 그는 다시 해군성 서기관과 하리치 국회의원을 겸임했다. (샌드위치 국회의원으로도 선출되었으나 선거 논란으로 하리치를 선택했다.) 그러나 1688년 명예 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망명하면서 그의 공직 경력도 막을 내렸다. 1689년 1월 하리치 의회 선거에서 패배했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즉위한 지 일주일 후인 2월에 서기직에서 사임하며 공직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피프스는 해군 행정가로서 영국 해군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해군 규정 작성에 힘썼으며, 제2차 영란 전쟁 경험자에게 지급하는 은급(반급 제도) 대상자를 파악하기 위해 만든 명부는 이후 사관 명부의 기초가 되었고 계급 제도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1676년에는 임관 제도 개혁안을 제시하여, 추천받은 승무원 중에서 장래 해군 장교 후보를 선발하는 절차를 제도화함으로써 해군의 전문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49] 1675년에는 재정 절감을 위해 예포 발사 수를 최대 21발로 규정했는데, 이는 이후 국제적인 관례로 자리 잡았다. 로드 하이 어드미럴이 국왕이나 고위 귀족의 명예직에 가까웠던 시기에, 피프스는 실질적인 해군 행정을 총괄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로 인해 "그는 서기관이라기보다 로드 어드미럴이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6. 해군 행정 업적
새뮤얼 피프스는 해군 위원회에서 상위 직책의 동료들보다 더 유능하고 효율적인 일꾼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동료로는 윌리엄 펜 경, 조지 카터렛 경, 존 메네스 경, 윌리엄 배튼 경 등이 있었으나, 피프스는 이들의 무능함이나 다른 업무로 인한 부재 속에서 해군의 실질적인 운영을 도맡아 처리해야 했다. 특히 제2차 네덜란드 전쟁 발발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그의 능력은 더욱 두드러졌다. 왕립 해군의 복잡한 문제와 부족한 재정 속에서도 피프스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하여 해군 운영의 효율성을 높였다.
피프스가 맡았던 해군본부 서기관(Clerk of the Acts)은 후대의 해군성 사무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지만, 당시에는 명목상 해군 최고 사령관인 로드 하이 어드미럴(Lord High Admiral)의 비서와 같은 위치였다. 그러나 로드 하이 어드미럴은 주로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임명되었고, 실질적인 업무는 서기관이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찰스 2세가 직접 로드 하이 어드미럴을 맡았을 때, 피프스는 국왕의 이름으로 해군을 실질적으로 통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로 인해 피프스는 영국 해군 역사상 큰 영향력을 행사한 최초의 서기관으로 기록되었으며, 정적들로부터 "그는 서기관이라기보다 로드 어드미럴이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피프스는 해군 행정가로서 여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해군 규정 작성에 힘썼으며, 이는 후대 영국 해군 운영의 기초가 되었다. 1668년에 끝난 제2차 네덜란드 전쟁의 경험자에게 지급할 은급(반급 제도) 대상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그는 승무 사관과 장교 명부를 만들었다. 이 명부는 이후 영국 해군 사관 명부의 원형이 되었고, 체계적인 계급 제도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49]
또한, 피프스는 1676년에 해군 장교 임관 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 개혁안은 승무원 중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추천장을 받은 사람이 장래 해군 장교로 승진할 수 있는 절차를 제도화한 것으로, 반급 제도와 더불어 해군의 전문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49]
피프스가 제정한 규정 중 현재까지 국제적인 기준으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예는 예포 발사 수 규정이다. 이전까지 예포는 홀수, 조포는 짝수로 발사한다는 관례만 있었을 뿐, 발사 수에 제한이 없어 낭비가 심했다. 왕정 복고 이후 재정난 속에서 해군을 재건해야 했던 영국 정부의 상황에서, 1675년 피프스는 경비 절감의 일환으로 예포의 최대 발사 수를 21발로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때 정해진 발사 수가 이후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 현재까지도 국제적인 관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7. 왕립 학회 활동
새뮤얼 피프스는 1665년 왕립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45] 이후 그는 1684년 12월 1일부터 1686년 11월 30일까지 왕립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과학사에서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는 피프스가 회장으로 있던 기간 동안 출판되었으며, 이 책의 표지에는 당시 회장이었던 피프스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또한 피프스는 뉴턴과 확률 문제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은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이 문제는 오늘날 "뉴턴-펩스 문제"로 불리는데, 내용은 주사위 6개를 굴려 적어도 한 번 6이 나올 확률과 주사위 12개를 굴려 적어도 두 번 6이 나올 확률 중 어느 것이 더 높은지를 묻는 것이었다.[25] 흥미롭게도 최근 연구에 따르면, 뉴턴이 피프스에게 제공한 도박 관련 조언 자체는 결과적으로 옳았지만, 그 조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논리적 근거는 타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8. 은퇴 및 사망
10년 후인 1701년, 그는 런던을 떠나 당시 시골 지역이었던 클래펌으로 이주하여 친구 윌리엄 휴어의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휴어는 해군에서 핍스 밑에서 경력을 시작한 인물이었다.[26] 핍스는 1703년 5월 26일 클래펌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핍스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재산은 미혼이었던 조카 존 잭슨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뜻에 반하여 결혼한 다른 조카 사무엘 잭슨은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핍스의 전 피보호자이자 친구였던 윌리엄 휴어가 유언 집행인을 맡았다.[27] 1724년 존 잭슨이 사망하자 핍스의 재산은 윌리엄 휴어의 조카이자 대녀였던 앤 엣지리에게 넘어갔다.
핍스는 런던의 세인트 올레이브 교회, 하트 스트리트에 그의 아내와 함께 묻혔다.
9. 피프스 도서관 (Pepys Library)
피프스는 평생 동안 애서가였으며 방대한 책, 필사본, 판화 컬렉션을 신중하게 관리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일기를 포함하여 3,000권이 넘는 장서가 있었으며, 모두 꼼꼼하게 목록화되고 색인화되었다. 이는 17세기에 살아남은 가장 중요한 개인 도서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도서관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은 피프스 일기장의 원본 필사본 6권이지만, 다음과 같은 다른 주목할 만한 소장품도 있다.[28]
피프스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장서 보존에 대한 자세한 조항을 마련했다. 그의 조카이자 상속자인 존 잭슨은 1723년에 사망했고, 유언에 따라 장서는 손상되지 않은 채 케임브리지 대학교 매그달렌 칼리지로 옮겨져 피프스 도서관(Pepys Libraryeng)에 보존되었다. 유증에는 모든 원본 책장과 책의 배치에 대한 그의 상세한 지침이 포함되어 있으며, "엄격하게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더 세밀하게 조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일회성 인쇄물 협회(Ephemera Societyeng)의 엠블럼은 피프스의 초상화를 사용하고 그를 "최초의 일반적인 일회성 인쇄물 수집가"로 묘사한다.[30] 피프스가 보존한 두 권의 대형 일회성 인쇄물 앨범이 그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0. 일기
일기는 왕정복고 시기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생생한 1차 사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존 이블린의 일기와 더불어 1660년대의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1667), 런던 대역병(1665), 런던 대화재(1666)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역사가 C. S. 나이튼은 피프스가 "그가 번성했던 대도시의 이 두 재앙에 대한 그의 보도로부터, 피프스의 일기는 국가적인 기념비가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일기의 결정판 편집자인 로버트 레이텀은 역병과 화재에 대한 피프스의 묘사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하며... 연민으로 쓰여졌다"고 언급하며, 피프스가 문학적 효과보다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췄다고 분석했다.[13]
일기에는 공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피프스 자신의 사생활, 특히 여러 여성과의 관계가 거리낌 없이 기록되어 있다.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는 하녀 데보라 윌렛과의 관계로, 1668년 10월 25일 피프스는 윌렛을 껴안고 있다가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발각되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갑자기 다가와서, 내가 손을 그녀의 코트 안으로 넣고 그 소녀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정말로, 내 주된 손은 그녀의 '거기' 안에 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놀라운 곤경에 처했고, 그 소녀도 마찬가지였다..."라고 적었다. 이후 그는 후회했지만, 윌렛이 집에서 해고된 뒤에도 그녀를 계속 쫓아다녔다.[16] 또한 아침에 하녀 메리 머서가 옷을 입혀주는 동안 그녀의 가슴을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피프스는 복원기의 주요 여배우였던 메리 냅과도 교제했을 가능성이 있다. 핍스는 냅을 "꽤 예쁘지만, 가장 훌륭하고, 정신 나간 유머를 가지고 있으며, 내 평생 들었던 것 중 가장 훌륭한 노래를 부른다"고 묘사했으며, 그녀의 남편을 "못된, 우울하고, 질투심이 많은 녀석"이라고 불렀다.[17] 냅은 피프스에게 무대 뒤 정보를 제공하는 등 연극계 소식통 역할을 했다. 둘은 쪽지를 주고받을 때 피프스는 "세련된 디키", 냅은 당시 유행하던 노래 제목인 "바브리 앨런"이라는 애칭을 사용했다.
그는 외설적인 책으로 알려진 L'Escole des Filles|레스콜 데 피유프랑스어를 구입한 경험도 기록했는데, 이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영어권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 책을 "엄청나게 음란한 책"이라고 평가했으며, 읽은 후 불태웠다고 적었다.
피프스가 일기에서 묘사한 여성에 대한 행동 중 상당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성희롱, 성폭행, 심지어 강간으로 간주될 수 있다.[18]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케이트 러브만은 피프스가 일부 여성에게 친절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남성이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믿었다고 분석한다. 러브만은 "[그의 일기에서] 핍스의 '친절', '접촉', '넘어짐'이라는 성적 언어는 그의 관대함과 장난기를 강조하는 반면, 강압과 폭력을 가리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피프스가 피해 여성의 항의를 정당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19]
이 외에도 1661년 2월 25일 일기에는 "쐐기풀 죽"을 먹었다는 소소한 일상 기록도 남아 있다.[50] 피프스는 시력 악화로 인해 1669년 일기 작성을 중단했다. 그의 일기는 후대에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자료로 평가받으며 여러 차례 출판되고 연구되었다.
10. 1. 일기의 출판 역사
존 스미스는 1819년부터 1822년까지 3년간 일기를 평범한 영어로 필사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작업이 거의 완료될 때까지 일기 원고 몇 칸 위의 핍스 서재에 속기 시스템의 열쇠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20] 핍스 도서관에도 보관되어 있는 스미스의 필사본은 1825년 브레이브룩 경이 편집하여 2권으로 출판된 일기의 첫 번째 출판본의 기초가 되었다.
두 번째 필사본은 1875년 마이노스 브라이트에 의해 완성되어 1875년부터 1879년까지 출판되었다.[31] 이 판본은 이전에 출판된 텍스트보다 약 3분의 1 분량이 추가되었지만, 여전히 일기 전체의 약 80%만 포함하고 있었다. 헨리 B. 휘틀리는 이전 판본들을 참고하여 1893년부터 1899년까지 새로운 판을 제작했으며, 이 판은 1926년에 개정되었다. 여기에는 방대한 주석과 색인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 초기 판본들은 편집자가 인쇄하기에 너무 외설적이라고 판단한 구절(주로 핍스의 성적 모험에 관한 내용)을 생략했다. 휘틀리는 자신의 판 서문에서 "인쇄할 수 없는 구절이 몇 개 있다"고 언급하며 이것이 "불필요한 까다로움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생략 표시 없이 누락하거나 단어를 조용히 수정한 경우도 많았다.[32]
로버트 레이텀과 윌리엄 매튜스가 편집하고 필사한 완전하고 검열되지 않은 결정판은 1970년부터 1983년까지 런던의 벨 & 하이먼과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에서 총 9권으로 출판되었다. 별도의 동반 권(Companion volume) 및 색인 권(Index volume)이 함께 출간되었다. 이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단권 요약본도 이용할 수 있다.
10. 2. 일기를 바탕으로 한 각색 작품
1958년, BBC는 피터 샐리스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새뮤얼 피프스의 일기》를 제작했다. 2003년에는 스티브 쿠건이 피프스를 연기한 TV 영화 《새뮤얼 펩스의 사생활》이 BBC2에서 방영되었다.
2004년 영화 《스테이지 뷰티》는 17세기 런던 연극계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제프리 해처의 희곡 《완전한 여성 무대 미인(Compleat Female Stage Beauty)》을 바탕으로 한다. 이 희곡은 여성의 무대 출연이 금지되었던 시대에 여성 역할을 연기했던 배우 에드워드 카이네스턴에 대한 피프스의 일기 내용에서 영감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피프스는 열렬한 연극 팬으로 등장하며, 휴 보네빌이 이 역을 맡았다.
다니엘 메이스는 2014년 BBC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거대한 불》에서 피프스 역을 연기했다. 이 외에도 피프스는 머빈 존스, 마이클 페일린, 마이클 그래엄 콕스, 필립 잭슨 등 여러 배우들이 출연한 다양한 영화 및 텔레비전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BBC 라디오 4는 피프스의 일기를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하여 방송했다. 1990년대에는 빌 나이가 주연을 맡은 《클래식 시리얼(Classic Serial)》로 공연되었으며,[37] 2010년대에는 라디오 잡지 프로그램 《여성의 시간》의 일부로 연재되었다.[38] 피프스의 일기 선집 오디오북은 케네스 브래너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가상의 피프스는 해리 터틀도브의 과학 소설 《다른 육신》(1988년)의 두 번째 장 "그래서 침대로"에서 내레이션을 맡는다. 피프스 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장에는 피프스가 미국의 호모 에렉투스 표본(짐승으로 런던에 수입됨)과 만나 "생명의 변환 이론"을 형성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로 인해 진화론이 19세기가 아닌 17세기에 과학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는 대체 역사를 그린다. 데보라 스위프트의 2017년 소설 《미스터 펩스 만족시키기(Pleasing Mr Pepys)》는 "새뮤얼 피프스의 일기에 기록된 사건들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묘사된다.[39]
참조
[1]
웹사이트
Samuel Pepys FAQ
https://web.archive.[...]
2017-05-28
[2]
웹사이트
- British Armorial Bindings
http://armorial.libr[...]
2015-09-17
[3]
서적
[4]
웹사이트
National Portrait Gallery website: Elizabeth (sic) Pepys
http://www.npg.org.u[...]
2015-09-17
[5]
서적
[6]
웹사이트
Legends of British History: Samuel Pepys
http://www.pepysdiar[...]
2008-12-12
[7]
서적
A Pepys anthology : passages from the diary of Samuel Pepys
Univ. of California Pr.
2000
[8]
웹사이트
BBC – Primary History – Famous People – Samuel Pepys
https://web.archive.[...]
2015-09-17
[9]
간행물
Pepys's servants
http://www.oxforddnb[...]
2004-09-23
[10]
웹사이트
Pepys coded passages
https://web.archive.[...]
2015-09-17
[11]
웹사이트
Samuel Pepys FAQ
https://web.archive.[...]
2015-09-17
[12]
뉴스
Samuel Pepys's other diary on display in new exhibition
https://www.theguard[...]
2015-11-13
[13]
웹사이트
Short biography [of] Pepys
https://web.archive.[...]
Pepys Library website
[14]
문서
"Diary of Samuel Pepys, Sunday, 31 December 1665"
[15]
학술지
Biography of Thomas Greeting
http://flageolets.co[...]
[16]
뉴스
Mystery of Pepys's affair solved
http://news.bbc.co.u[...]
BBC News 24
2006-10-14
[17]
문서
Pepys's Diary entry of 8 December 1665.
[18]
학술지
Women and the History of Samuel Pepys's Diary
https://www.cambridg[...]
2022
[19]
학술지
Women and the History of Samuel Pepys's Diary
https://www.cambridg[...]
2022
[20]
웹사이트
The Diary of Samuel Pepys, M.A., F.R.S., Clerk of the Acts and Secretary to the Admiralty, For the First Time Fully Transcribed from the Shorthand Manuscript in the Pepysian Library, Magdalene College, Cambridge, by the Rev.
https://www.yesterda[...]
2024-01-28
[21]
문서
Latham & Matthews (1970–83), Vol. X – Companion.
[22]
문서
"Diary of Samuel Pepys, Monday, 31 May 1669"
[23]
서적
[24]
웹사이트
The Ingenious Mr Dummer: Rationalizing the Royal Navy in Late Seventeenth-Century England
https://web.archive.[...]
2009-10-02
[25]
웹사이트
Newton-Pepys Problem
http://mathworld.wol[...]
Wolfram MathWorld
2008-06-28
[26]
서적
The Diary of Samuel Pepys: A New and Complete Transcription, Volume 10 (Footnote on Will Hewer)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27]
서적
Will Hewer, The Diary of Samuel Pepys, Samuel Pepys, 1899
https://books.google[...]
[28]
웹사이트
Pepys Library Website
https://web.archive.[...]
2015-09-17
[29]
웹사이트
UCSB English Broadside Ballad Archive
https://web.archive.[...]
2015-09-17
[30]
웹사이트
About the Ephemera Society
http://www.ephemera-[...]
[31]
웹사이트
Samuel Pepys Diary
http://www.pepys.inf[...]
[32]
문서
Introduction in Vol.1 of the Latham/Matthews edn.
[33]
웹사이트
New unabridged diary audiobook in 2015
http://www.pepysdiar[...]
Pepys Diary
2011-08-04
[34]
뉴스
The best of British blogging
https://www.theguard[...]
2003-12-18
[35]
웹사이트
The Twitter feed in Bill Bailey's show
https://www.pepysdia[...]
2021-09-28
[36]
웹사이트
Samuel Pepys
https://twitter.com/[...]
2021-11-10
[37]
서적
The Diary of Samuel Pepys: A Radio 4 Classic Serial (BBC Classic Collection)
BBC Audiobooks Ltd
1995-01-03
[38]
웹사이트
New BBC Pepys radio drama
http://www.pepysdiar[...]
Pepys Diary
2015-09-18
[39]
웹사이트
Pleasing Mr Pepys
http://www.deborahsw[...]
Deborah Swift
2017-08-17
[40]
웹사이트
Samuel Pepys by Claire Tomalin
https://www.penguinr[...]
2021-06-22
[41]
웹사이트
British Armorial Bindings: Pepys, Samuel (1633 -1703)
https://armorial.lib[...]
University of Toronto Libraries
2023-07-31
[42]
문서
清教徒革命
[43]
문서
샌드위치
[44]
문서
해군위원회
[45]
간행물
Pepys; Samuel (1633 - 1703)
2011-12-11
[46]
문서
해군
[47]
문서
해군성 서기관장
[48]
문서
小林
[49]
문서
小林
[50]
서적
ハーブの歴史
株式会社原書房
2015-01-2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