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마제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석마제미는 588년 백제의 와박사로 일본에 파견된 인물이다. 그는 혜총 등 승려, 다라미타, 문가고자, 백미순, 양귀문, 황귀문, 백가, 양고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석마제미를 포함한 백제의 장인들이 이란계 호인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석마제미의 일본 파견은 백제가 고대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백제의 박사 - 왕인
왕인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학문을 가르친 백제의 학자로, 실존 여부와 출신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일본에 문물을 전파한 인물로 숭상받는다. - 백제의 박사 - 고안무
고안무는 백제가 일본에 파견한 오경박사를 지칭하며, 516년 게이타이 천황 시대에 파견되었으나 일본서기 기록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를 통해 파견 전승의 사실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다. - 일본에 거주한 한국인 - 막고
막고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 사신으로, 백제의 대외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역사적 실체에 대한 논란이 있다. - 일본에 거주한 한국인 - 지석영
지석영은 조선 후기의 의학자이자 개화 사상가로, 종두법 도입에 기여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그의 업적이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며, 《우두신설》 등의 저서를 통해 의학 지식을 전파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 6세기 한국 사람 - 영류왕
영류왕은 고구려의 27대 왕으로 당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왕이다. - 6세기 한국 사람 - 김흠순
김흠순은 신라의 왕족이자 장군으로, 김유신의 동생이며 황산벌 전투에서 아들의 죽음으로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여 삼국 통일에 기여한 후 승상에 올랐으나 당나라에 억류되기도 했고, 그의 삶은 여러 작품에서 재조명되었다.
석마제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직책 | 백제의 와박사 |
군주 | 백제 위덕왕 |
군주 칭호 | 국왕 |
국적 | 백제 |
성별 | 남성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매장지 | 미상 |
가족 관계 | |
부모 | 미상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Seok Ma Je Mi |
2. 생애
587년, 모노노배(物部守屋)파가 왜의 정권을 잡으며 불교를 적극 수용하자, 석마제미는 백제의 와박사(瓦博士)로서 왜에 파견되었다.[2] 일본서기에 따르면, 588년에 백제 위덕왕의 명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석마제미를 포함하여 백제가 왜국에 파견한 장인들이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6][7][2]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으며,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 당시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는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 백제가 중국과 밀접한 교류를 했다는 것은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으며,[5] 법흥사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은 이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거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6][7][8]
2. 1. 일본 파견
588년(위덕왕 35년) 일본서기에 따르면, 은솔 수신, 덕솔 개문, 나솔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과 혜총 등 승려, 사공 다라미타,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황귀문, 화공 백가, 양고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2]2. 2. 주요 활동 및 업적
588년 (위덕왕 35년), 와박사로서 일본 건축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2] 그는 불교 수용 초기 단계에 불교 관련 건축물 제작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아스카데라(법흥사) 조영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7][8]일본서기』 스슌 원년 조에는, 588년에 은솔 수신, 덕솔 개문, 나솔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과 혜총 등 승려들, 사공 다라미타,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황귀문, 화공 백가, 양고 등과 함께 일본에 왔다고 전한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백제가 왜국에 공헌한 사공 다라미타,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황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의 장인들은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한다고 보았다.[6][7][2]
백제는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하여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 법흥사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은, 그러한 경로를 거쳐 백제에 이른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거나, 그 자손으로 추정된다.[6][7][8]
3. 인물 배경 및 평가
587년 석마제미는 모노노베(物部守屋)파가 왜의 정권을 잡고 불교를 적극 수용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와박사(瓦博士)로서 왜에 파견되었다.[2] 『일본서기』에 따르면, 588년 (위덕왕 35년)에 은솔 수신, 덕솔 개문, 나솔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과 혜총 등 승려, 사공 다라미타,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황귀문, 화공 백가, 양고 등과 함께 일본에 왔다고 한다.[2]
이들은 백제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 1. 이란계 민족 기원설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가 왜국에 공헌한 사공 다라미타,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황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의 장인들이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6][7][2]。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으며,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해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는 중국 강남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으며[5], 법흥사의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도 그러한 경로를 거쳐 백제에 이른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거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6][7][8]。
4. 역사적 의의
마나문노는 고대 한일 관계에서 백제가 중요한 가교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587년에 그는 백제의 와박사(瓦博士)로서 왜에 파견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기술 전수를 넘어 양국 간 문화 교류 및 상호 이해 증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1]
참조
[1]
서적
ゾロアスター教論集
平河出版社
2001-10-01
[2]
뉴스
欽明朝に来日した百済の医師王有稜陀について
日本医史学会
1983-10
[3]
서적
「鳥羽之表」事件の背景
愛知県立大学
2008
[4]
서적
百済仏教史序説
吉川弘文館
1978-10-01
[5]
서적
正倉院 : 流沙と潮の香の秘密をさぐる
瑠璃書房
1980
[6]
서적
ペルシア文化渡来考―シルクロードから飛鳥へ
岩波書店
1980
[7]
서적
古代の日本とイラン
学生社
1980-01-01
[8]
서적
太良未太
朝日新聞出版
1994-11-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