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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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래인은 약 2500년 전부터 한반도와 중국 등지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들은 야요이 시대를 열었으며, 2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는 일본에서 한반도로 이주했던 왜인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경우도 포함한다. 4세기 말부터 6세기에 걸쳐 야마토 왕권을 섬기는 기술자나 망명자들이 대거 도래했고, 특히 백제의 가야 평정과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백제에서 온 도래인의 수가 증가했다. 이들은 토기 제조법, 옷감 짜는 법, 유학, 불교 등 선진 기술과 문화를 전파하여 야마토 왕권의 정치적, 문화적 발전에 기여했다. 도래인들은 일본의 국가 형성과 사회 문화적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5세기와 6세기에는 말 사육, 철 제련 기술, 문자 체계 등을 도입했다.
야마토 왕권을 섬긴 한반도계 도래인으로는 하타씨(秦氏), 야마토노아야씨(東漢氏), 가와치노후미씨(西文氏)가 대표적이며, 소가노 우마코의 측근이었던 시바노 다쓰토(司馬達等), 구라베노 다쓰나(鞍部多須奈), 다카무코노 겐리(高向玄理),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 간진(鑑真) 등도 도래인 계열이다.
기원전 1천년기에 처음 도래한 도래인들은 일본에 벼농사와 토기를 전파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로 규슈 지역).[1]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는 기원전 800년부터 서기 600년까지 남한반도를 거쳐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의 지속적인 인구 이동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4][5] 약 3천 년 전에 시작된 초기 도래인들은 어업, 사냥, 채집에 주로 의존하는 토착 조몬인들이 살고 있던 열도에 벼농사를 도입했다. 기원전 350년에서 서기 50년 사이의 야요이 시대 중기에 도래인들은 청동 기술을 가져왔다. 형성기인 5세기와 6세기에는 말 사육과 말에 의한 운송, 석기 도자기, 고온 철 제련, 진보된 철제 도구 제조, 그리고 중국 기반의 문자 체계를 가져왔다. 기술적, 문화적 기여 외에도 도래인들은 고분 시대와 아스카 시대 동안 국가 형성 및 사회 문화적 변화에 결정적이었던 유교와 불교의 이념을 대륙에서 가져왔다.[5] 일본 연구자들에 따르면 일본 역사에서 각 주요 시대마다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은 한반도의 인구 집단이 대륙의 서쪽과 북쪽에서 기장과 쌀 농업, 청동 및 철기 유물과 기술, 문화 및 종교의 도래와 유사한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일본 열도에 진보된 대륙의 기술과 문화를 전달하고 이식하는 역할을 했다.[5]
'귀(歸)'는 원래 '돌아간다'는 뜻 외에도 복종하거나 시집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귀화(歸化)'는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어 백성이 되는 것, 복종하는 것, 또는 교화에 따르는 것을 뜻한다. 반면 '도(渡)'는 물을 건넌다는 의미이며, 대륙 간 이동에는 '이(移)'(옮겨감)를 주로 썼다. "이주", "정거(定居, 정착하는 것)", "이민(移民)"은 사람이 적은 곳에 백성을 옮겨 살게 하는 것이고, "천(遷)"은 상하 관계에서의 이동을 가리킨다.[15]
2. 역사
7세기 아스카 시대에는 백제 멸망으로 망명 귀족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그 중에서도 의자왕의 아들 선광은 지토 천황에게서 구다라노코니키시씨(百済王氏)라는 가바네(姓)를 받아 백제계 씨족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9세기 초 편찬된 《신찬성씨록》에는 수도와 그 주변에 거주하는 유력한 성씨의 30%가 도래인이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책에 수록된 1,182개 씨족 중 326개가 도래계 씨족이었으며, 출신지는 한(漢) 163, 백제 104, 고구려 41, 신라 9, 임나 9였다.[10]
2. 1. 고대
고대 일본 조몬 시대 말경, 약 2500년 전부터 한반도와 중국 등지에서 '도래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물길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왔고(육로로는 약 6천 년 전부터 존재),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 2세기~7세기 사이에는 일본에서 한반도로 이주했던 왜인이 다시 일본에 망명 또는 귀환한 경우에도 도래인으로 불렸다. 4세기 말에서 6세기에 걸치는 고훈 시대에는 야마토 왕권을 섬기는 기술자나 망명자로서 한반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래했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한반도에는 백제의 가야 평정과 고구려의 남진이라는 대규모 정치 변동이 있었다. 백제와 제휴하던 야마토 왕권은 백제의 가야 평정에 일조하여 백제를 통한 교역로를 확보했으며, 백제로부터 온 도래인의 숫자도 늘어났다. 이들은 야마토 왕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거나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새로운 토기 제조법, 옷감 짜는 법 등 선진 기술과 유학, 불교 등을 전해 주어 야마토 왕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5세기 후반~6세기에 조선반도에서 이주한 기술자들을 《일본서기》에서는 '고도재기(古渡才伎)'에 대비하여 '금래재기(今来才伎)'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한반도로 건너 온 사례도 있는데, 광주와 전라남도 목포 등지에 분포하는 전방후원분은 야마토 왕권에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져 현지에서 제작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다만 무덤에 매장된 사람의 신원 등에 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다.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는 기원전 800년부터 서기 600년까지 남한반도를 거쳐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의 지속적인 인구 이동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4][5] 도래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열도에 도착했다. 약 3천 년 전에 시작된 초기 도래인들은 어업, 사냥, 채집에 주로 의존하는 토착 조몬인들이 살고 있던 열도에 벼농사를 도입했다. 기원전 350년에서 서기 50년 사이의 야요이 시대 중기에 도래인들은 청동 기술을 가져왔다. 형성기인 5세기와 6세기에는 말 사육과 말에 의한 운송, 석기 도자기, 고온 철 제련, 진보된 철제 도구 제조, 그리고 중국 기반의 문자 체계를 가져왔다. 기술적, 문화적 기여 외에도 도래인들은 고분 시대와 아스카 시대 동안 국가 형성 및 사회 문화적 변화에 결정적이었던 유교와 불교의 이념을 대륙에서 가져왔다. 일본 연구자들에 따르면 일본 역사에서 각 주요 시대마다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은 한반도의 인구 집단이 대륙의 서쪽과 북쪽에서 기장과 쌀 농업, 청동 및 철기 유물과 기술, 문화 및 종교의 도래와 유사한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일본 열도에 진보된 대륙의 기술과 문화를 전달하고 이식하는 역할을 했다.[5]
도래인의 도래 시기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기원전 2세기에서 3세기, 기원전 5세기경 왜의 5왕이 지배하던 시기, 5세기 말 - 6세기, 그리고 7세기이다.[1]
기원전 1천년기에 처음 도래한 도래인들은 일본에 벼농사와 토기를 전파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로 규슈 지역). 《일본서기》와 《고지키》에 따르면, 일본으로의 첫 번째 대규모 도래는 오진 천황 재위 기간에 이루어졌지만, 당시 한반도에는 큰 혼란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 혼란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철기, 관개 기술 등을 도입했다. 그들이 가져온 도구와 기술은 당시까지 존재했던 생산 방식과 노동 패턴에 혁명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말과 마구를 가져와 승마가 행해지게 되었다.
고분 시대와 격동적인 삼국 시대 동안, 한반도 국가에서 일본 열도로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는데, 특히 백제와 가야 연맹에서 많은 이주가 있었다. 이들은 야마토 왕권과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고 경제적, 군사적 동맹을 맺었다. 긴키 지방의 야마토 엘리트, 후쿠오카의 쓰쿠시 엘리트, 오카야마의 키비 엘리트 등 왜(Wa)의 엘리트들은 열도 내에서 사회 정치적 이점을 확립하려 했고,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을 환영하여 반도에서 들여온 물품과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그들을 통합했다.[5]
이 이주민들은 농부, 철 기술자, 말 사육자, 상인, 무역상, 댐 건설자, 장인 등으로 정착하여 일본서기에서 이마키노 테히토(今來才技, "최근에 도착한 숙련된 장인")라는 이름을 얻었다.[5] 한반도에서 온 집단들은 규슈 북부의 후쿠오카에서 내해의 오카야마, 교토-오사카-나라 지역, 도쿄 북쪽의 군마, 그리고 혼슈 북동부의 센다이에 이르기까지 열도의 다양한 지역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형성했다.
552년, 백제 성왕은 야마토 조정에 사신을 보내 불상과 불교 경전을 가져왔고, 불교 문화도 일본에 전해졌다. 불교는 일본에 도입된 후 일본의 주요 종교 중 하나가 되었고, 오늘날 일본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이주민들은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초기에는 규슈에 정착했지만, 4세기에는 야마토 엘리트의 핵심 기반인 나라, 오사카, 교토, 오쓰 지역의 긴키 지방으로 목적지를 옮겼다.
아스카 시대에 접어들면서 쇼토쿠 태자와 소가 마코 등 많은 일본 왕족과 대신들이 불교를 믿고 불교 진흥에 헌신했다. 백제 사람들이 일본으로 간 이유는 일본이 백제에게 장인과 五経博士|오경 박사일본어를 요청했고, 고구려를 피해 도망왔기 때문이다.[6]
야마토 분지는 백제 출신으로 6세기 중반 야마토에서 가장 강력한 씨족으로 부상한 소 가문과 가야 연맹과 백제에 기원을 둔 야마토노아야 씨족과 같은 도래인(渡來人) 뿌리를 가진 강력한 씨족의 본거지였다. 특히 8세기 초, 야마토노아야 씨족의 일원인 다카노 니이가사 여사가 야마토 왕자 시라카베(훗날의 고닌 천황)와 결혼하여 737년 나라에서 야마노베를 낳았고, 그는 781년 간무 천황으로 즉위했다.[5]
제국과 연관된 다른 주목할 만한 도래인 씨족으로는 구다라노 코니키시 씨족과 야마토노후히토 씨족이 있는데, 둘 다 백제 출신이다. 4, 5세기의 다른 대표적인 도래인 집단으로는 하타 씨족과 가와치노후미 씨족이 있다. 이 도래인들은 우수한 기술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일본의 국가 건설에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하타 씨족은 4~5세기경 한반도 신라에서 온 유즈키노 키미의 후손이다(하단이 그들의 기원지일 수 있다). 유즈키노 키미는 127개의 현에서 온 3만에서 4만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규슈로 건너왔다. 그들은 야마토 왕실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관리로 봉사했다. 그의 본부는 원래 교토의 야마보시에 있었지만, 나중에 우즈마사(교토시)로 옮겼다. 일본의 중심지에서 활동과 더불어, 하타의 후손들은 오와리, 미노에서 빗추, 치쿠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확장했다.[1]
7세기에는 백강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의 망명자들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도래인들이 가져온 기술과 문화는 당시 일본의 고도 발전에 기여했다.[1][7] 도래인들은 무기 제조, 직조, 농업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야마토 정권의 군사 및 정치적 사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또한 일본 문화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2]
3세기 말 - 6세기, 고분 시대에는 야마토 왕권을 섬기는 기술자나 망명자로서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도래했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야마토 왕권은 백제와 동맹을 맺기 위해 백제가 바다를 건너 요서 경략을 할 때, 반복해서 출병하는 등 대륙을 침략했으며, 이 사실은 《송서》 백제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래인 중에는 대왕을 중심으로 하는 야마토 왕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자나 문화 발전에 기여한 자[14]가 있었다.
또한 아스카 시대에는 백제에서 귀족들이 일본을 의지하여 도래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백제왕 의자왕의 왕자인 선광은 지토 천황으로부터 백제왕(구다라노코니키시)의 씨성을 하사받아, 백제계 씨족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야마토 조정에서는 우대받아 관인으로 등용된 자도 적지 않았으며, 고닌 6년(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기재된 1182씨 중 326씨가 제번, 즉 도래계 씨족이며, 전체의 3할을 차지하고 있다[10]. 제번의 출신지는 한이 163, 백제가 104, 고려(고구려)가 41, 신라가 9, 임나가 9였다[10].
2. 2.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
고훈 시대 말경(4세기 말에서 6세기)에는 야마토 왕권을 섬기는 기술자나 망명자로서 한반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새로운 토기 제조법, 옷감 짜는 법 등 각종 선진 기술과 함께 국가 운영에 필요한 유학, 불교 등을 전해 주어, 야마토 왕권의 정치적·문화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14] 《일본서기》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에 한반도에서 이주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고도재기(古渡才伎)'에 대비하여 '금래재기(今来才伎)'라고 불렀다.[5]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한반도에는 백제의 가야 평정과 고구려의 남진이라는 대규모의 정치 변동이 있었다. 백제와 제휴하던 야마토 왕권은 백제의 가야 평정에 일조하여 백제를 통한 교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백제로부터 온 도래인의 숫자도 그만큼 늘어났다. 이들 도래인 가운데에는 오키미(大王)를 중심으로 야마토 왕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거나 문화 발전에 기여한 자들도 있었다.
고분 시대와 격동적인 삼국 시대 동안, 한반도 국가, 특히 백제와 가야 연맹에서 일본 열도로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이들은 야마토 왕권과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고 경제적, 군사적 동맹을 맺었다. 긴키 지방의 야마토 엘리트, 후쿠오카의 쓰쿠시 엘리트, 오카야마의 키비 엘리트 등 왜(Wa)의 엘리트들은 열도 내에서 사회 정치적 이점을 확립하려 했고,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을 환영하여 반도에서 들여온 물품과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그들을 통합했다.[5]
이 이주민들은 농부, 철 기술자, 말 사육자, 상인, 무역상, 댐 건설자, 장인 등으로 정착하여 일본서기에서 이마키노 테히토(今來才技, "최근에 도착한 숙련된 장인")라는 이름을 얻었다.[5] 한반도에서 온 집단들은 규슈 북부의 후쿠오카에서 내해의 오카야마, 교토-오사카-나라 지역, 도쿄 북쪽의 군마, 그리고 혼슈 북동부의 센다이에 이르기까지 열도의 다양한 지역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형성했다.
552년, 백제 성왕은 야마토 조정에 사신을 보내 불상과 불교 경전을 가져왔고, 불교 문화도 일본에 전해졌다. 불교는 일본에 도입된 후 일본의 주요 종교 중 하나가 되었고, 오늘날 일본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이주민들은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초기에는 규슈에 정착했지만, 4세기에는 야마토 엘리트의 핵심 기반인 나라, 오사카, 교토, 오쓰 지역의 긴키 지방으로 목적지를 옮겼다.
아스카 시대에 접어들면서 쇼토쿠 태자와 소가 마코 등 많은 일본 왕족과 대신들이 불교를 믿고 불교 진흥에 헌신했다. 백제 사람들이 일본으로 간 이유는 일본이 백제에게 장인과 오경 박사|五経博士일본어를 요청했고, 고구려를 피해 도망왔기 때문이다.[6]
야마토 분지는 백제 출신으로 6세기 중반 야마토에서 가장 강력한 씨족으로 부상한 소 가문과 가야 연맹과 백제에 기원을 둔 야마토노아야 씨족과 같은 도래인(渡來人) 뿌리를 가진 강력한 씨족의 본거지였다. 특히 8세기 초, 야마토노아야 씨족의 일원인 다카노 니이가사 여사가 야마토 왕자 시라카베(훗날의 고닌 천황)와 결혼하여 737년 나라에서 야마노베를 낳았고, 그는 781년 간무 천황으로 즉위했다.[5]
제국과 연관된 다른 주목할 만한 도래인 씨족으로는 구다라노 코니키시 씨족과 야마토노후히토 씨족이 있는데, 둘 다 백제 출신이다. 4, 5세기의 다른 대표적인 도래인 집단으로는 하타 씨족과 가와치노후미 씨족이 있다. 이 도래인들은 우수한 기술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일본의 국가 건설에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하타 씨족은 4~5세기경 한반도 신라에서 온 유즈키노 키미의 후손이다(하단이 그들의 기원지일 수 있다). 유즈키노 키미는 127개의 현에서 온 3만에서 4만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규슈로 건너왔다. 그들은 야마토 왕실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관리로 봉사했다. 그의 본부는 원래 교토의 야마보시에 있었지만, 나중에 우즈마사(교토시)로 옮겼다. 일본의 중심지에서 활동과 더불어, 하타의 후손들은 오와리, 미노에서 빗추, 치쿠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확장했다.[1]
7세기에는 백강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의 망명자들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도래인들이 가져온 기술과 문화는 당시 일본의 고도 발전에 기여했다.[1][7] 도래인들은 무기 제조, 직조, 농업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야마토 정권의 군사 및 정치적 사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또한 일본 문화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2]
아스카 시대에는 백제에서 귀족들이 일본을 의지하여 도래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백제왕 의자왕의 왕자인 선광은 지토 천황으로부터 백제왕(구다라노코니키시)의 씨성을 하사받아, 백제계 씨족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야마토 조정에서는 우대받아 관인으로 등용된 자도 적지 않았으며, 고닌 6년(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기재된 1182씨 중 326씨가 제번, 즉 도래계 씨족이며, 전체의 3할을 차지하고 있다.[10] 제번의 출신지는 한이 163, 백제가 104, 고려(고구려)가 41, 신라가 9, 임나가 9였다.[10]
2. 3. 주요 도래인 계통 씨족
하타씨(秦氏), 야마도노아야씨(東漢氏), 가와치노후미씨(西文氏)는 야마토 왕권을 섬긴 대표적인 한반도계 도래인이다. 이 외에도 소가노 우마코의 측근이었던 시바노 다쓰토(司馬達等)와 구라베노 다쓰나(鞍部多須奈), 다카무코노 겐리(高向玄理),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 간진(鑑真) 등이 도래인 계열로 알려져 있다.
7세기 아스카 시대에는 백제 멸망으로 망명 귀족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 중 의자왕의 왕자 선광은 지토 천황에게서 구다라노코니키시씨(百済王氏)라는 가바네(姓)를 받아 백제계 씨족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9세기 초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는 수도와 그 주변에 거주하는 유력한 성씨의 30%가 도래인이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책에 수록된 1,182개 씨족 중 326개가 도래계 씨족이었으며, 출신지는 한(漢)이 163, 백제 104, 고구려 41, 신라 9, 임나 9였다.[10]
백제 출신으로 6세기 중반 야마토에서 가장 강력한 씨족으로 부상한 소 가문과 가야 연맹과 백제에 기원을 둔 야마토노아야 씨족은 도래인(渡來人) 뿌리를 가진 대표적인 씨족들이다. 특히 8세기 초, 야마토노아야 씨족의 일원인 다카노 니이가사 여사가 야마토 왕자 시라카베(훗날의 고닌 천황)와 결혼하여 737년 나라에서 야마노베를 낳았고, 그는 781년 간무 천황으로 즉위했다.[5]
제국과 연관된 다른 주목할 만한 도래인 씨족으로는 구다라노 코니키시 씨족과 야마토노후히토 씨족이 있는데, 둘 다 백제 출신이다. 4, 5세기의 다른 대표적인 도래인 집단으로는 하타 씨족과 가와치노후미 씨족이 있다.
3. 도래인의 영향
《일본서기》와 《고지키》에 따르면, 일본으로의 첫 번째 대규모 도래는 오진 천황 재위 기간에 이루어졌지만, 당시 한반도에는 큰 혼란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 혼란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철기, 관개 기술 등을 도입했다. 그들이 가져온 도구와 기술은 당시까지 존재했던 생산 방식과 노동 패턴에 혁명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말과 마구를 가져와 승마가 행해지게 되었다.
고분 시대와 격동적인 삼국 시대 동안, 백제와 가야 연맹을 중심으로 한반도 국가에서 일본 열도로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이들은 야마토 왕권과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고 경제적, 군사적 동맹을 맺었다. 긴키 지방의 야마토 엘리트, 후쿠오카의 쓰쿠시 엘리트, 오카야마의 키비 엘리트 등 왜(Wa)의 엘리트들은 열도 내에서 사회 정치적 이점을 확립하려 했고,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을 환영하여 반도에서 들여온 물품과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그들을 통합했다.[5]
이 이주민들은 농부, 철 기술자, 말 사육자, 상인, 무역상, 댐 건설자, 장인 등으로 정착하여 일본서기에서 이마키노 테히토(今來才技, "최근에 도착한 숙련된 장인")라는 이름을 얻었다.[5] 한반도에서 온 집단들은 규슈 북부의 후쿠오카에서 내해의 오카야마, 교토-오사카-나라 지역, 도쿄 북쪽의 군마, 그리고 혼슈 북동부의 센다이에 이르기까지 열도의 다양한 지역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형성했다.
552년, 백제 성왕은 야마토 조정에 사신을 보내 불상과 불교 경전을 가져왔고, 불교 문화도 일본에 전해졌다. 불교는 일본에 도입된 후 일본의 주요 종교 중 하나가 되었고, 오늘날 일본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이주민들은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초기에는 규슈에 정착했지만, 4세기에는 야마토 엘리트의 핵심 기반인 나라, 오사카, 교토, 오쓰 지역의 긴키 지방으로 목적지를 옮겼다.
아스카 시대에 접어들면서 쇼토쿠 태자와 소가 마코 등 많은 일본 왕족과 대신들이 불교를 믿고 불교 진흥에 헌신했다. 백제 사람들이 일본으로 간 이유는 일본이 백제에게 장인과 五経博士|오경 박사일본어를 요청했고, 고구려를 피해 도망왔기 때문이다.[6]
야마토 분지는 백제 출신으로 6세기 중반 야마토에서 가장 강력한 씨족으로 부상한 소 가문과 가야 연맹과 백제에 기원을 둔 야마토노아야 씨족과 같은 도래인(渡來人) 뿌리를 가진 강력한 씨족의 본거지였다. 특히 8세기 초, 야마토노아야 씨족의 일원인 다카노 니이가사 여사가 야마토 왕자 시라카베(훗날의 고닌 천황)와 결혼하여 737년 나라에서 야마노베를 낳았고, 그는 781년 간무 천황으로 즉위했다.[5]
제국과 연관된 다른 주목할 만한 도래인 씨족으로는 구다라노 코니키시 씨족과 야마토노후히토 씨족이 있는데, 둘 다 백제 출신이다. 4, 5세기의 다른 대표적인 도래인 집단으로는 하타 씨족과 가와치노후미 씨족이 있다. 이 도래인들은 우수한 기술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일본의 국가 건설에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하타 씨족은 4~5세기경 한반도 신라에서 온 유즈키노 키미의 후손이다(하단이 그들의 기원지일 수 있다). 유즈키노 키미는 127개의 현에서 온 3만에서 4만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규슈로 건너왔다. 그들은 야마토 왕실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관리로 봉사했다. 그의 본부는 원래 교토의 야마보시에 있었지만, 나중에 우즈마사(교토시)로 옮겼다. 일본의 중심지에서 활동과 더불어, 하타의 후손들은 오와리, 미노에서 빗추, 치쿠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확장했다.[1]
7세기에는 백강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의 망명자들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도래인들이 가져온 기술과 문화는 당시 일본의 고도 발전에 기여했다.[1][7] 도래인들은 무기 제조, 직조, 농업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야마토 정권의 군사 및 정치적 사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또한 일본 문화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2]
3세기 말 - 6세기, 고분 시대에는 야마토 왕권을 섬기는 기술자나 망명자로서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도래했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야마토 왕권은 백제와 동맹을 맺기 위해 백제가 바다를 건너 요서 경략을 할 때, 반복해서 출병하는 등 대륙을 침략했으며, 이 사실은 《송서》 백제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래인 중에는 대왕을 중심으로 하는 야마토 왕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자나 문화 발전에 기여한 자[14]가 있었다.
아스카 시대에는 백제에서 귀족들이 일본을 의지하여 도래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백제왕 의자왕의 왕자인 선광은 지토 천황으로부터 백제왕(구다라노코니키시)의 씨성을 하사받아, 백제계 씨족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야마토 조정에서는 우대받아 관인으로 등용된 자도 적지 않았으며, 고닌 6년(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기재된 1182씨 중 326씨가 제번, 즉 도래계 씨족이며, 전체의 3할을 차지하고 있다[10]. 제번의 출신지는 한이 163, 백제가 104, 고려(고구려)가 41, 신라가 9, 임나가 9였다[10].
4. 용어 논쟁: 귀화인 vs 도래인
"귀화"라는 말은 본래 "군주의 덕에 교화되어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4. 1. 귀화와 도래의 어의
귀(帰)는 원래 歸이며,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 외에도, 복종하고 따르는 것, 시집가는 것 등의 의미를 가진다. 귀화(帰化)는 타국의 국적에 들어가 그 신민이 되는 것, 신복하는 것(사자를 보내 이익과 해로써 알리니, 오(呉)는 반드시 귀화하여 정벌하지 않아도 평정될 것이다) 또는 교화에 복종하여 따르는 것(감덕(感徳)하여 귀화하는 자가 십중 칠, 팔이라)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용된 문구는 각각 使使示以利害、吳必歸化、可不征而定也중국어와 感德而歸化者、十居七八중국어이다. 반면 '도(渡)'라는 용어는 물(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의미이며, 대륙 간의 이동에는 '이(移)'(옮겨가는 것)를 주로 사용했다. "이주". 또한 "정거(定居, 정착하는 것)". "이민(移民)"은 사람이 적은 곳에 백성을 옮겨 살게 하는 것이다. "천(遷)"은 상하 관계에서의 이동을 특별히 가리킨다.
"귀화"라는 어구의 본래 의미는 "군주의 덕에 교화·감화되어, 그 아래에 복종하는 것"(후한서 동회전)으로, 역사학적인 정의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15]。4. 2. 사서에서의 용법
"귀화"라는 어구는 본래 "군주의 덕에 교화·감화되어, 그 아래에 복종하는 것"(후한서 동회전)을 의미한다. 역사학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15]
# 化外|화외중국어의 나라에서, 그 나라 왕의 덕치를 사모하여, 스스로 왕법의 권역 안에 투신하여 왕화에 歸附|귀부중국어하는 것
# 그 나라의 왕도, 일정한 정치적 의사에 기초하여, 이것을 받아들이고, 의류 공급·국군 안치·편관 호적이라는 내민화의 절차를 거쳐, 그 나라의 예·법의 질서에 귀속시키는 일련의 행위 내지 현상
평야 구니오에 따르면, 『일본서기』에서 "귀화", "래귀", "투하", "화래"는 모두 오노즈카라모우쿠, 마우쿠로 읽으며 개념의 차이는 없다.[16] 또한 『고지키』에서는 세 예시 모두 "참도래"라고 기록하며, 마이와타리츠, 마우쿠로 훈독한다.[16]
5. 여러 가설들
2009년 의학자이자 분자인류학자인 사키타니 미츠루(崎谷満)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일본인의 기원을 주장하면서 야요이인들을 한반도가 아닌 중국 남부 장강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2]
한편 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학교 교수는 부산 북구에 있는 한국폴리텍VII대학 부산캠퍼스에서 일본인의 기원은 도래인이며, 도래인은 고대 한국인이라고 주장했고, 현대 일본 학계가 그런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23]
6. 도래인 인구 추정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기원전 800년부터 서기 600년까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이동했다.[4][5] 도래인들은 여러 시기에 걸쳐 일본 열도에 도착했다. 약 3천 년 전, 초기의 도래인들은 벼농사를 일본에 전파했다. 당시 일본 열도에는 어업, 사냥, 채집을 주로 하던 조몬인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350년에서 서기 50년 사이 야요이 시대 중기에 도래인들은 청동 기술을 가져왔다. 5세기와 6세기에는 말 사육과 운송, 석기 도자기, 고온 철 제련, 발달된 철제 도구 제조, 그리고 중국 기반의 문자 체계를 가져왔다. 또한 도래인들은 고분 시대와 아스카 시대에 국가 형성과 사회 문화적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준 유교와 불교 사상을 전파했다.[5] 일본 연구자들은 일본 역사의 각 주요 시대마다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이 대륙의 발전된 기술과 문화를 일본 열도에 전달하고 이식하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5]
이시와타리 신이치로는 센즈카(「천 개의 무덤」) 묘지 연구를 바탕으로 서기 475년부터 600년까지 125년 동안 최소 100만 명의 한반도 출신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5]
815년에 편찬된 책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혼슈의 기나이 지역에 있는 1,182개의 성씨 중 326개가 외래 혈통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이 책은 특히 163개의 성씨가 중국 출신, 104개가 백제, 41개가 고구려, 9개가 신라, 9개가 가야 출신이라고 언급한다.[8][9]
2021년 일본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고분 시대에 정립된 세 가지 주요 조상 구성 요소로 형성되었다. 고분 시대에 유입된 동아시아 조상이 혼합 비율의 거의 70%를 차지하고, 야요이 구성 요소가 15~20%, 나머지는 조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3]
참조
[1]
웹사이트
渡来人
https://www.asuka-to[...]
2023-01-26
[2]
웹사이트
渡来人(とらいじん)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3-02-06
[3]
논문
Ancient genomics reveals tripartite origins of Japanese populations
https://pubmed.ncbi.[...]
2021-09-17
[4]
서적
The archaeology of Japan: from the earliest rice farming villages to the rise of the stat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5]
서적
Archaeology and history of Toraijin: human, technological, and cultural flow from the Korean peninsula to the Japanese archipelago c. 800 BC-AD 600
Archaeopress Archaeology
2022
[6]
문서
森公章「『帰化人と古代国家を読む』、平野前掲書解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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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野邦雄『帰化人と古代国家』吉川弘文館、2007年、p.2
[8]
서적
Shinsen Shōjiroku no Kenkyū (Honbun hen)
Yoshikawa Kōbunkan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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渡来人と赤穂
https://www.the-kans[...]
2022-09-14
[10]
문서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渡来人」
https://kotobank.jp/[...]
[11]
논문
白鳳天平芸術精神史研究序説 : 群像形式と憂欝性の表現を中心として
https://hdl.handle.n[...]
関西大学東西学術研究所
[12]
뉴스
日経サイエンス8月号 「特集ヤポネシア 47都道府県人のゲノムが明かす 日本人の起源」
https://www.nikkei.c[...]
日経サイエンス
[13]
논문
秦氏の性格について
https://doi.org/10.1[...]
法政大学史学会
[14]
문서
5世紀後半~6世紀に朝鮮半島から移住した技術をもった人々を『[[日本書紀]]』では「古渡才伎(こわたりのてひと)」に対して「今来才伎(いまきのてひと)」と呼んでいる。『日本書紀』「雄略紀」によれば今来才伎は[[百済]]から派遣人々である([[雄略天皇]]七年「集聚百済所貢今来才伎於大嶋中」)。
[15]
서적
平野邦雄『帰化人と古代国家』(吉川弘文館 2007年)pp.1-10
[16]
서적
平野邦雄『帰化人と古代国家』(吉川弘文館 2007年) p.2
[17]
문서
Goo 사전
https://dictionary.g[...]
[18]
문서
네이버 국어 사전
https://dict.naver.c[...]
[19]
문서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渡来人」
https://kotobank.jp/[...]
[20]
논문
白鳳天平芸術精神史研究序説 : 群像形式と憂欝性の表現を中心として
関西大学東西学術研究所
[21]
논문
秦氏の性格について
https://doi.org/10.1[...]
法政大学史学会
[22]
서적
新日本人の起源
勉誠出版
[23]
뉴스
https://www.sedaily.[...]
[24]
뉴스
다만 그는 도래인의 기원을 한반도 북쪽으로 설정하고 도래인을 막연히 북방계 민족으로 표현했다.
https://www.s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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