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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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우종원은 1918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했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법무부 검찰과장,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등을 역임했으며, 장면 국무총리 비서실장, 한국조폐공사 사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국회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1981년부터 1997년까지 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가톨릭대학교 객원교수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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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종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선우종원 |
| 원래 이름 | 鮮于宗源 |
| 출생일 | 1918년 2월 17일 |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
| 사망일 | 2014년 3월 8일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
| 정당 | 무소속 |
| 종교 | 천주교 |
| 배우자 | 윤정석 |
| 자녀 | 5남 1녀 차남 선우중호(토목공학자) |
| 경력 | |
| 경력 | 한국조폐공사 사장 |
| 직책 | |
| 직책 | 제9대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사무총장 |
| 직책2 | 제10대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사무총장 |
| 임기 | |
| 임기 | 1971년 7월 30일 ~ 1972년 10월 17일 |
| 임기2 | 1973년 3월 12일 ~ 1976년 3월 12일 |
| 대통령 | |
| 대통령 | 박정희 |
| 대통령2 | 박정희 |
| 학력 | |
| 학력 | 경성제국대학교 대학원 법학석사 |
2. 이력
1918년 2월 17일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으며, 아호는 주암(周巖)이다. 광복 전 평양고보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 사법과 시험에 합격했다. 광복 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법무부 초대 검찰과장,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을 역임했다. 1951년 장면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1960년 한국조폐공사 사장, 1966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1971년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81년부터 1997년 7월까지 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2. 1. 광복 이후 법조 및 공직 생활
1946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1946년 12월)로 임명되어 법조 생활을 시작했다.[1] 1948년에는 법무부 초대 검찰과장을 역임했다.[1] 6.25 전쟁 중에는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으로 활동했다.[1] 1951년 장면(張勉)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으나,[1] 1952년 4월 사퇴했다.[1] 이후 국제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1] 1960년 이승만 정권 붕괴 후 귀국하여 다시 장면 국무총리 비서를 맡았다.[1]1960년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한국조폐공사 사장을 지냈으며,[1] 1966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1] 1971년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사무총장에 임명되었고,[1] 1975년 국회의사당 건립에 기여한 공로로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1]
1981년 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에 취임했으며,[1] 1983년부터 1987년까지 가톨릭대학교 행정학과 객원교수를 지냈다.[1] 1997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역임하고,[1] 1998년 건국공로장을 받았다.[1]
2. 2. 5.16 군사정변 이후
1960년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귀국하여 다시 장면 국무총리의 비서가 되었고, 1960년부터 1961년 5.16 군사정변까지 한국조폐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1]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이 붕괴되면서, 선우종원 또한 조폐공사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3. 학력
4.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 부인 | 윤정석(尹貞錫) | 1919년 4월 4일 | 2002년 | 수필가 |
| 장남 | 선우재호(鮮于在皓) | 1938년 9월 17일 | 기업인 | |
| 장자부 | 이종분(李鐘粉) | |||
| 차남 | 선우중호(鮮于仲皓) | 1940년 11월 28일 | 토목공학자, 前 서울대학교 총장, 前 명지대학교 총장, 前 광주과학기술원 총장 | |
| 차자부 | 한신자(韓信子) | 1943년 4월 21일 | ||
| 딸 | 선우정자(鮮于正子) | 1944년 2월 19일 | 피아노 연주자 | |
| 사위 | 오현택(吳賢澤) | 내과 의사, 의학박사 | ||
| 3남 | 선우찬호(鮮于贊皓) | 1946년 6월 6일 | 특허변호사 | |
| 3자부 | 박종임(朴鐘任) | |||
| 4남 | 선우진호(鮮于進皓) | 1948년 8월 30일 | 컴퓨터 공학자 | |
| 4자부 | 김현실(金賢實) | |||
| 5남 | 선우석호(鮮于奭皓) | 1951년 9월 16일 | 홍익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
| 5자부 | 황인성(黃仁星) | 1955년 7월 24일 |
5. 일화
1961년 1월 1일, 한국조폐공사 사장 시절 선우종원은 윤보선 대통령에게 세배를 갔다. 윤보선은 우표 도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1][2] 같은 해, 선우종원의 비서관 김남의 동생 김상협의 결혼식에 윤보선은 국무총리가 참석한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했다.[1] 선우종원은 인촌 선생 아들의 혼사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며 설득하여 참석시켰다.[3]
5. 1. 윤보선 대통령과의 갈등
1961년 1월 1일, 한국조폐공사 사장 시절 선우종원은 윤보선 대통령에게 세배를 갔다. 세배를 받은 후, 윤보선은 우표 도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1][2] 같은 해, 선우종원의 비서관 김남의 동생 김상협의 결혼식에 윤보선은 국무총리가 참석한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했다.[1] 선우종원은 인촌 선생 아들의 혼사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며 설득하여 참석시켰다.[3]5. 1. 1. 우표 도안 사건
1961년 1월 1일, 한국조폐공사 사장 시절 선우종원은 윤보선 대통령에게 세배를 갔다. 세배를 받은 후, 윤보선 대통령은 소와 색실로 만든 버선이 도안된 우표 두 장을 가져와 도안에 대해 문제삼았다. 1961년은 신축년으로 소의 해였으나, 윤보선 대통령은 소(丑)를 내세워 윤 씨인 자신을 모독하고 버선을 도안해 '보선'이라는 이름을 놀리는 저의가 어디 있느냐며 항의하였다. 선우종원은 윤보선에게 우표 샘플을 올리는 방법과 절차,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1][2]5. 1. 2. 김상협 결혼식 참석 거부 사건
1961년 윤보선은 자신의 비서관 김남의 동생이자 한국조폐공사 직원이었던 김상협의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한국조폐공사 사장이던 선우종원이 윤보선에게 참석을 요청하자, 윤보선은 국무총리도 참석하는지를 물었다.[1] 참석한다는 답변을 듣자 윤보선은 참석을 거부했다. 이에 선우종원은 같은 직장 동료이자 인촌 선생 아들의 결혼식인데 그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며 설득하여, 윤보선은 결국 결혼식에 참석하였다.[3]참조
[1]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
인물과사상사
2006
[2]
서적
격랑 80년:선우종원 회고록
인물연구소
1998
[3]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
인물과사상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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