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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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연타는 7세기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목 제국으로, 철륵의 설 부족과 연타 부족의 연합으로 형성되었다. 605년 서돌궐의 공격을 받아 쇠퇴했으나, 627년 동돌궐에 반기를 들고 독립하여 카간국을 세웠다. 이후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동돌궐에 대항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646년 당나라와 위구르족의 연합 공격으로 멸망했다. 설연타의 지도자로는 이남, 발작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당나라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카간국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설연타는 멸망 후 당나라에 흡수되거나 흩어졌으며, 일부는 돌궐 제2제국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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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연타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설연타 칸국 |
일반 명칭 | 설연타 |
시대 | 중세 |
정치 체제 | 부족 연맹 |
공용어 | 고대 튀르크어 |
수도 | 이흐 후레 |
종교 | 샤머니즘, 텡그리 신앙 |
역사 | |
성립 | 628년 |
해체 | 723년 (제2 튀르크 카간국의 지배 하에) |
이전 | |
이후 | |
기타 | |
중국어 | c: 薛延陀 p: Xuēyántuó w: Hsüeh¹-yen²-tʻo² mi: /ɕɥɛ⁵⁵ jɛn³⁵ tʰwɔ³⁵/ mc: /siᴇt̚ jiᴇn dɑ/ |
2. 역사
설연타는 철륵의 설 부족과 연타 부족이 연합하여 형성된 부족으로, 7세기경부터 설연타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45] 605년 서돌궐의 갈사나 가한(재위 603년경 – 612년)의 공격으로 수백 명이 생매장되는 시련을 겪었으나,[4] 이후 철륵의 여러 부족들과 함께 동돌궐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사궤 가한(재위 612년 – 619년경) 치하의 서돌궐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다시 서돌궐에 복속되기도 했다.
627년, 설연타는 동돌궐에 반기를 들고 회흘(위구르), 발야고(바일르크) 등 다른 철륵 부족들과 연합하여 독립 세력을 구축했다.[14] 628년, 이남(이넬)은 동돌궐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7만여 가구를 이끌고 독립하여 스스로 진주비가가한(眞珠毗伽可汗, 인추 빌게 카간)이라 칭하고 독자적인 카간국을 건설했다.[45] 당나라는 설연타 카간국을 인정하여, 동돌궐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활용했다.
630년 3월 27일, 설연타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음산에서 동돌궐을 격파했고, 일릭 카간은 도주했지만, 그의 부하 카간은 5월 2일에 당나라에 넘겨졌다.[16][17] 이로써 설연타는 동돌궐의 이전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장악했으며, 때로는 당나라에 복종하기도 하고 때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당나라가 지원한 동돌궐의 후임 칸인 킬리비 칸과도 대립했다.
632년, 설연타는 서돌궐의 군대를 격퇴하고, 카를루크를 울룬구르 강과 이르티쉬 강에서 복속시켰으며, 예니세이 키르기스 부족을 복속시키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18]
639년에는 아사나 결사솔이 당나라 수도를 기습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 이후, 설연타에 대한 방벽으로 꼭두각시 동돌궐을 복원하기 위해 오르도스 북쪽의 모든 돌궐족을 추방하여 서쪽의 영토 경쟁에서 그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시도했다.
641년 설연타는 동돌궐과 전쟁을 벌여 대패하기도 하였다.
642년과 643년에는 당 태종과 혼인을 하기 위해 많은 수의 가축을 보냈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혼인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645년, 이남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악정을 펼쳐 민심을 잃고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다 패배하고, 회흘(위구르)에게 살해당했다.
646년 설연타는 위구르족(회흘)과 당나라에 의해 패배하여 멸망했다.[21]
2. 1. 기원과 초기 역사
설연타는 철륵의 설(薛) 부족과 연타(延陀) 부족이 연합하여 형성된 부족이다. 이전에는 신리(薪犁) 부족으로 불렸으나, 7세기경부터 설연타라는 명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45]605년, 설연타는 서돌궐의 갈사나 가한(재위 603년경 – 612년)에게 공격받았다. 이 과정에서 동돌궐에 대한 반란 혐의로 수백 명이 생매장당하는 시련을 겪었다.[4] 이후 철륵의 여러 부족들과 함께 동돌궐에 반기를 들었으나, 사궤 가한(재위 612년 – 619년경) 치하의 서돌궐 세력이 강성해지자 다시 서돌궐에 복속되기도 했다.




2. 2. 설연타 카간국 성립과 발전
627년, 설연타는 동돌궐에 반기를 들고 위구르, 바이르쿠 등 다른 철륵 부족들과 연합하여 독립 세력을 구축했다.[14] 628년, 이남(夷男)은 동돌궐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7만여 가구를 이끌고 독립하여 스스로 진주비가가한(眞珠毗伽可汗)이라 칭하고 독자적인 카간국을 건설했다.[45] 당나라의 교사망이 이남을 진주비가가한으로 임명하고 고도를 하사하자, 이남은 매우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외튀켄 산 아래에 근거지를 세웠다.설연타 카간국은 동쪽으로는 말갈, 서쪽으로는 서돌궐, 남쪽으로는 고비 사막, 북쪽으로는 쿠륜수(현재의 바이칼 호)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다.[45] 설연타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동돌궐에 대항하는 등 국제 정세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630년 3월 27일, 설연타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음산에서 동돌궐을 격파했고, 일릭 카간은 도주했지만, 그의 부하 카간은 5월 2일에 당나라에 넘겨졌다.[16][17] 이로써 설연타는 동돌궐의 영토를 사실상 장악했다.
632년, 설연타는 서돌궐의 군대를 격퇴하고, 카를루크를 울룬구르 강과 이르티쉬 강에서 복속시켰으며, 예니세이 키르기스 부족을 복속시키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18]
2. 3. 당나라와의 관계와 갈등
627년, 음산 이북의 설연타·회흘(위구르)·발야고(바일르크) 등의 제부는 잇달아 반란을 일으켜 동돌궐의 욕곡설(유크크 샤드)을 패주하게 했다. 동돌궐의 힐리가한(재위: 620년 - 630년)은 소가한인 돌리 가한(테리스 카간)을 보내 이를 토벌하게 했으나 패배하여 경기로 도망쳐 돌아갔으므로, 힐리가한은 노하여 돌리 가한을 십수일간 구금했다.[45]628년, 서돌궐에서 통엽호가한(재위: 618년 - 628년)이 살해되자, 서돌궐이 크게 혼란스러워져 을실발의 손자 이남(이넬)은 설연타 부락 7만여 가구를 이끌고 동돌궐에 붙었다. 그러나 동돌궐에서도 힐리가한의 정세가 쇠퇴하여 이남은 그 무리를 이끌고 동돌궐에 반하여 힐리가한을 공격하여 이를 대파했다. 여기서 힐리부 제성이 많이 힐리가한에 반하여 이남에게 귀순하여 함께 주(主)로 추대하려 했으나, 이남은 감히 즉위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당의 태종은 유격장군 교사망을 보내 이남을 진주비가 가한(인추 빌게 카간)으로 하고 고도를 하사했다. 이남은 매우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방물을 공납하고, 아장(牙帳)을 대막 북쪽의 울독군산(우트유켄 산) 아래에 세웠다. 동쪽은 말갈에 이르고, 서쪽은 서돌궐에 이르며, 남쪽은 사막(고비 사막)과 접하고, 북쪽은 구륜수에 이르러 회흘·발야고(발예고)·아첩(에디스)·동라 (톤라)·복골(보크투)·백습 등의 대부락은 모두 부속되었다.[10] 이 설연타 카간국은 당나라 제국에 의해 신속하게 인정받았는데, 이는 당나라의 적대국인 동돌궐 카간국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했다.[14]
630년 3월 27일, 설연타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음산에서 동돌궐을 격파했다. 일릭 카간은 도주했지만, 그의 부하 카간이 5월 2일에 당나라에 넘겨졌다.[16][17] 이로써 설연타는 동돌궐의 이전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장악했으며, 때로는 당나라에 복종하기도 하고 때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당나라가 지원한 동돌궐의 후임 칸인 킬리비 칸 아시나 시모와도 대립했다.
639년에는 당나라 황제에게 폄하당한 아사나 결사솔이 이끄는 돌궐족이 당나라 수도를 기습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 이후, 설연타에 대한 방벽으로 꼭두각시 동돌궐을 복원하기 위해 오르도스 북쪽의 모든 돌궐족을 추방하여 서쪽의 영토 경쟁에서 그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시도했다.
640년 6월, 설연타부는 당에 사신을 보내 구혼했다.
641년 11월, 이남은 아들 대도설에게 동라·복골·회흘·말갈·백습 등 2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백도천에 주둔하게 하고 선양령에 근거하여 이사마의 부를 공격했다. 이사마는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태종은 영국공 이적과 포주 자사 설만철에게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파견했다. 12월, 백도천을 경유하여 청산에 이르러 대도설과 조우하여 이를 수개월 동안 추격했다. 낙진수에 이르자 대도설은 떨쳐낼 수 없음을 알고 10리에 걸쳐 병사를 늘어놓았다. 이적은 기병을 보병으로 바꾸고, 장창 부대를 돌입시켜 설연타부를 궤멸시켰다. 부총관 설만철은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설연타부의 마(馬) 지휘자를 붙잡아 설연타부의 말을 잃게 했다. 이로 인해 설연타부는 대패하여, 대도설은 몸 하나로 도주했다. 이남은 동돌궐(이사마 정권)과 화친을 청하고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642년, 이남은 숙부 사발라니숙사근을 당에 보내 구혼하고 말 3천 마리를 헌상했다. 태종은 이를 허가하여 신흥공주를 맞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설연타부에는 부고가 없었으므로 이남이 급히 휘하 부락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해도 바로 모이지 않았고, 또 사막을 건너는 도중에 물과 풀이 부족하여 말과 양이 많이 죽어 버렸기 때문에 납기에 늦어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태종은 영주로의 행차를 중지하고, 설연타와의 통혼은 취소되었다.
643년 윤달, 이남이 형의 아들 돌리실설(테리스 샤드)을 당에 보내 말 5만, 소 1만, 낙타 1만, 양 10만 마리를 헌상하고 구혼했으므로, 태종은 이를 허가했다.
645년, 이남이 병사하자 이남의 소자인 사엽호의 발착은 그의 형인 돌리실가한(테리스 카간)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이리가균리사다미가한(일리그 큐류그 샤드 이스테미 카간)이 되었다. 발착은 악정을 펼쳤기 때문에 민중이 따르지 않았다. 게다가 발착은 고구려 원정 중에 태종이 부재 중인 당에 침입하여 하주를 약탈했다. 그러나 당의 장군 집실사력에게 정벌당해 그 무리 수만 명이 포로가 되고 발착은 경기로 도주했으나 회흘부에 살해당했다.
646년 8월 1일, 설연타는 위구르족(회흘)과 당나라에 의해 패배했다. 설연타의 두미 칸, 바주오는 위구르족에게 살해당했다. 강하왕, 이도종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설연타 군대를 격파했다. 마지막 설연타 칸, 일특우시 칸 두모지는 항복했다.[21]
2. 4. 멸망 이후
646년 8월 1일, 설연타는 위구르족(회흘)과 당나라에 의해 패배했다. 설연타의 두미 칸 바주오는 위구르족에게 살해당했다. 이도종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설연타 군대를 격파했다. 마지막 설연타 칸, 일특우시 칸 두모지는 항복했다.[21] 그 잔당은 2년 후 9월 15일에 파괴되었다.[22][23] 씨르족은 나중에 후돌궐의 지배자 빌게 카간의 신하인 '[알]티 씨르'(Al) "6 씨르 부족"으로 다시 나타났다.[24][25]3. 지도자
설연타의 부족장은 원래 일킨(俟斤, Irki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야질가한(재위 ?–628?) 이실발 이후에는 가한(Qaγan)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야질가한 을실발(乙失缽) | ?–628? | |
진주비가가한 이남(夷男) | 628–645 | |
힐리구력실설사다미가한 발작(拔灼) | 645–646 | |
이특물실가한 돌마지(咄摩支) | 646 |
3. 1. 돌궐 제2제국 지배하
쿨 추르 비문(Kul-chur inscription)에 따르면, 퀼리 추르(Küli Čur)는 이스바라 빌게 퀼리추르(Ïšbara Bilge Küli Čur, ?–약 723)였다.[46][47]4. 명칭과 어원
'설'(薛)은 초기에 사마천의 사기에 ''신리''(薪犁)로 기록되었으나, 7세기까지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2][3] 골든은 '설'의 옛 튀르크어 형태인 ''Sir''가 산스크리트어 ''Śrī'' ("행운, 상서로움")에서 유래되었다고 제안했다.[4]
'연타'(延陀)의 어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서양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연타를 단명한 설연타 카간국의 두 분파 중 하나인 '타르두쉬(Tarduš)'와 동일시하기도 했다.[5] 세르게이 클랴스토르니는 설연타가 *'시르-얌타르(Sir-Yamtar)'*를 음차한 것이라고 제안했다.[7]
통전은 "전연 모용준 치세 동안, 흉노의 선우 '헬라토우(Helatou, 賀剌頭, '알라트 부족의 지도자')'가 3만 5천 명의 부족을 이끌고 항복했다. 연타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의 후손일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오는 이를 바탕으로 연타 사람들이 알라트 부족의 후손이며, '할라-윤들루그(Hala-Yundluɣ)'로도 알려져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연타라는 이름은 윤들루그(Yundluɣ)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며, 설연타는 '시르-윤들루그(Sir-Yundluɣ)'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9]
5. 풍속
관직, 무기, 풍속은 대체로 돌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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