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돌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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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돌궐은 돌궐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건국된 국가이다. 583년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돌궐이 분열되면서 서돌궐이 성립되었으며, 실크로드를 통치하며 세력을 떨쳤다. 서돌궐은 페르시아, 비잔틴 제국 등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당나라의 서돌궐 원정으로 657년 멸망했다. 이후 당나라는 기미 정책을 통해 서돌궐 지역을 간접 통치했으나, 742년 멸망했다. 서돌궐은 10개의 도시로 나뉘어 통치되었으며, 돌륙과 노실필로 구분되었다. 아프라시아브 벽화는 서돌궐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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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돌궐은 583년 돌궐 제국에서 분열되어 건국된 튀르크 민족 국가로, 수나라와 당나라의 압박, 내부 분열로 멸망과 부흥을 반복하다가 745년 위구르 카간국에 의해 최종 멸망했으며, 돌궐 비문과 같은 문화를 남겼다. - 돌궐 -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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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돌궐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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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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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서돌궐 카간국 |
시대 | 초기 중세 |
지위 | 카간국 (유목 제국) |
존속 기간 | 581년–742년 |
면적 | 약 3,500,000km² (630년) |
수도 | 나베카트 (여름 수도), 수야브 (주요 수도) |
공용어 | 소그드어 (주화, 공용어), 고대 튀르크어 |
종교 | 텡그리 신앙, 불교, 조로아스터교 |
역사 | |
이전 | 에프탈, 제1돌궐 제국 |
사건 시작 | 돌궐 내전, 서돌궐 카간국 건국 (581년) |
사건 종료 | 당나라에 정복됨 (742년) |
이후 | 서방을 진정시키는 총독부, 튀르기스, 오구즈 야브구국, 하자르 카간국, 캉가르 연맹, 토하라 야브구, 제2돌궐 제국 |
정치 | |
주요 인물 | 이스테미, 타르두 (서부 카간국의 야브구) |
지도자 | 니리 카간 (서돌궐 카간국의 카간) |
기타 | |
현재 국가 | 서방을 진정시키는 총독부 튀르기스 오구즈 야브구국 하자르 카간국 캉가르 연맹 토하라 야브구 제2돌궐 제국 |
2. 역사
돌궐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돌궐 제국의 카간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오노크(Onoq, 서돌궐)를 건국하고 실크로드를 통치하며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43]
583년,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돌궐 제국은 서돌궐과 동돌궐로 분열되었다. 중앙아시아 세력을 서돌궐이라고 부른다.[9]
돌궐 부흥 이후, 토문가한의 동생 실점밀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철륵의 여러 부족과 카를룩, 바스밀 등을 통합했다. 실점밀은 파사와 연합하여 에프탈을 공격했고, 이후 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어 페르시아를 공격했다.[10][11]
돌궐과 몽골은 동부와 중앙 스텝을 모두 지배한 두 제국이었다. 돌궐은 동로마 제국, 페르시아, 중국과 접촉한 최초의 스텝 제국이었다. 레프 굴밀료프에 따르면, 부민 카간은 서쪽을 그의 동생 이스타미(553-575)에게 주었다. 이 전투는 554년 봄에 시작되어 큰 저항 없이 세미레치예를 점령했고, 555년까지는 아랄 해에 도달했다. 그들은 흉노족, 우아르, 오굴 등 여러 민족들을 앞세웠는데, 이들은 아바르인들과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돌궐인들은 558년에 볼가 강 너머로 아바르인들을 몰아냈고, 아바르인들은 서쪽 스텝을 가로질러 567년까지 헝가리에 도달했다. 그 후 돌궐인들은 남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12]
이때 에프탈은 타림 분지, 페르가나,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및 메르브를 장악하고 있었고, 페르시아인들은 현재 국경과 거의 같은 지역에 있었다. 호스로 1세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를 맺고 에프탈을 공격했다. 전투는 560년에 시작되었다. 페르시아는 562년에 승리했고, 돌궐은 타슈켄트를 점령했다. 565년 에프탈은 카르시에서 패배하여 박트리아로 후퇴했고, 이곳에는 아랍 정복까지 이 민족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돌궐은 에프탈에 예전에 바치던 공물을 요구했고, 이것이 거절되자 옥수스를 건넜지만, 생각을 바꿔 철수했다. 571년에는 옥수스를 따라 국경이 그어졌고, 페르시아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동쪽으로 확장했으며, 돌궐은 소그드 상인 도시들과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되었다.[13]
약 567년에서 576년 사이에 돌궐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지역을 점령했다. 568년에는 박트리아의 일부를 점령했다.
혜사나 카간(603~611)은 준가리아에서 쫓겨났고, 이후 타르두쉬의 손자 시구이(610~617)에게 패배했다. 시구이는 알타이를 정복하고 타슈켄트를 탈환했으며 이스파한을 약탈했다.[14][15][16]
그의 형제인 통 야브구 카간(618–630)은 타림 분지에서 카스피해까지 지배했으며, 현장을 만났다. 그는 카프카스 남쪽의 페르시아인들과 싸우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기 위해 그의 아들 타르두시 샤드를 보냈는데, 그는 토하리스탄 야브구를 세웠고, 그들은 스스로 투르크 샤히를 인도 동부까지 확장시켰다.
통 야브구 카간 사후, 돌궐은 두루(Dulu)와 누십비(Nushibi) 세력 간의 갈등과 여러 가한들이 등장하면서 영토를 일부 상실하였다. 642년부터 확장하는 당나라가 간섭하기 시작했고, 657년~659년에 돌궐 제국을 멸망시켰다.
당나라의 기미정책 시기(657년 ~ 742년) 서돌궐은 당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 시기 서돌궐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당나라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기미정책을 시행했다.
도호부 | 재임 기간 | 칸 |
---|---|---|
군령도호부 | 657년–662년 | 아사나 미사 |
685년–692년 | 아사나 원경 | |
708년–717년 | 아사나 선 | |
735년–736년 | 아사나 진 | |
몽치도호부 | 657년–667년 | 아사나 부진 |
693년–704년 | 아사나 후사로 | |
704년–708년 | 아사나 화이도 | |
740년–742년 | 아사나 신 |
기미정책 하에서는 아사나 헬루 정벌에 공을 세운 아사나 미사와 아사나 부진 두 사람에 의해 서돌궐 여러 부족이 통괄되었고, 그 두 집안이 대대로 카간 자리를 계승하며 당나라의 반란 진압 등에 참여했다.
장수 연간(692년 - 694년)에 미사(弥射) 집안의 흥석망(興昔亡) 칸이 단절되었고, 741년경에는 보진(歩真) 집안인 십성(十姓) 칸인 아사나 신이 돌궐의 막하달간(바가·탈르칸)에게 살해되면서 서돌궐의 아사나(阿史那)씨 칸이 멸망하고 서돌궐에서는 돌궐 부족이 대두한다. 이후 돌궐 부족은 '''황성(黄姓)'''과 '''흑성(黒姓)'''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다.
대력 연간(766년 – 779년) 이후로는 갈록(葛邏禄) 부족이 성장하여 황성(黄姓)과 흑성(黒姓)의 돌궐 두 성씨는 갈록에 신종하고, 그 외는 회흘에 복속하게 되면서 서돌궐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742년 이리디밀시골돌록비가(이리테미슈·쿠튀르크·빌게, 십성 칸)가 돌궐의 칸을 겸하며 십성(서돌궐)의 칸이 되었다. 그는 흑성 출신으로, 744년까지 칸위를 유지했다. 이후 막하달간(바가·탈르칸)이 740년부터 744년까지 칸위를 이었다.
744년 이후 십성(서돌궐)의 칸위는 이리디밀시골돌록비가, 이발(749년 이후), 등리이로밀시(덴그리·일르미슈, 753년 이후), 아다배라(아타·보이라) 등으로 이어졌으나, 이들의 정확한 재위 기간은 불분명하다.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이리디밀시골돌록비가 (이리테미슈·쿠튀르크·빌게) | 742년 - ? | 흑성 출신, 744년까지 돌궐 칸 겸임 |
막하달간 (바가·탈르칸) | 740년 - 744년 | |
이발 | 749년 - ? | |
등리이로밀시 (덴그리·일르미슈) | 753년 - ? | 흑성 출신 |
아다배라 (아타·보이라) | ? - ? | 흑성 출신 |
2. 1. 돌궐 제국의 분열과 서돌궐의 성립 (552년 ~ 603년)
돌궐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돌궐 제국의 카간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오노크(Onoq, 서돌궐)를 건국하고 실크로드를 통치하며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43]583년,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돌궐 제국은 서돌궐과 동돌궐로 분열되었다. 중앙아시아 세력을 서돌궐이라고 부른다.[9]
돌궐 부흥 이후, 토문가한(부민 카간)의 동생 실점밀(이스타미)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철륵의 여러 부족과 카를룩, 바스밀 등을 통합했다. 실점밀은 파사(페르시아)와 연합하여 에프탈을 공격했고, 이후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어 페르시아를 공격했다.[10][11]
돌궐과 몽골은 동부와 중앙 스텝을 모두 지배한 두 제국이었다. 돌궐은 동로마 제국, 페르시아, 중국과 접촉한 최초의 스텝 제국이었다. 레프 굴밀료프에 따르면, 부민 카간은 서쪽을 그의 동생 이스타미(553-575)에게 주었다. 이 전투는 554년 봄에 시작되어 큰 저항 없이 세미레치예를 점령했고, 555년까지는 아랄 해에 도달했다. 그들은 흉노족, 우아르, 오굴 등 여러 민족들을 앞세웠는데, 이들은 아바르인들과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돌궐인들은 558년에 볼가 강 너머로 아바르인들을 몰아냈고, 아바르인들은 서쪽 스텝을 가로질러 567년까지 헝가리에 도달했다. 그 후 돌궐인들은 남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12]
이때 에프탈은 타림 분지, 페르가나,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및 메르브를 장악하고 있었고, 페르시아인들은 현재 국경과 거의 같은 지역에 있었다. 호스로 1세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를 맺고 에프탈을 공격했다. 전투는 560년에 시작되었다. 페르시아는 562년에 승리했고, 돌궐은 타슈켄트를 점령했다. 565년 에프탈은 카르시에서 패배하여 박트리아로 후퇴했고, 이곳에는 아랍 정복까지 이 민족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돌궐은 에프탈에 예전에 바치던 공물을 요구했고, 이것이 거절되자 옥수스를 건넜지만, 생각을 바꿔 철수했다. 571년에는 옥수스를 따라 국경이 그어졌고, 페르시아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동쪽으로 확장했으며, 돌궐은 소그드 상인 도시들과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되었다.[13]
약 567년에서 576년 사이에 돌궐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지역을 점령했다. 568년에는 박트리아의 일부를 점령했다.
돌궐의 일리카한(재위: 552년)이 유연으로부터 독립하자, 실점밀을 실크 강 지역에 배치하여 서방의 방어와 공략을 맡겼다.
목한카한(재위: 553년 - 572년) 때, 실점밀은 사산조와 협력하여 에프탈 공략에 나서, 567년경에 에프탈을 멸망시켰다.
576년경 실점밀이 죽자, 그의 아들 점궐(玷厥)이 뒤를 이어 달두카한(서면카한)에 임명되어 중앙아시아 통치를 맡았다.
581년, 타토팔 카간(재위: 572년 - 581년)이 병들어 아들 아시나 암라에게 “아파 카간을 피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나라는 아파 카간을 옹립하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귀한 어머니를 둔 암라를 칸으로 삼았다. 아파 카간은 칸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자, 계속 사람을 보내 암라를 모욕했다. 이에 대처하지 못한 암라가 종형인 닐부 카간(爾伏可汗, 니왈 카간) 섭도(摂図)에게 칸의 자리를 양보하고, 제2 칸으로 물러났다. 칸에 오른 섭도는 사발략 카간(재위: 581년 - 587년)이 되어 아파 카간에게 아파 카간의 칭호를 내렸다.
582년 겨울, 수(隋)의 양견(수 문제)는 하간왕 양홍, 상주국 두로적, 두영정, 좌복사 고황, 우복사 우경칙을 원수로 삼아 만리장성을 넘어 정벌에 나섰다. 사발략 카간은 아파 카간, 탐한 카간 등을 이끌고 맞섰으나 패퇴하여 기근과 전염병으로 고통받다 퇴각했다. 사발략 카간은 아파 카간의 성격이 사나운 것을 우려하여 먼저 아파 카간의 영토를 공격,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 이로 인해 아파 카간은 갈 곳을 잃고 서쪽의 달두 카간(達頭可汗)에게 망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달두 카간은 아파 카간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사발략 카간을 공격하게 했다. 이 외에도 탐한 카간과 사발략 카간의 사촌인 지근찰(地勤察) 등이 사발략 카간에게서 이탈하여 아파 카간에게 붙었다. 이로써 아파 카간은 돌궐에서 분리되어 서돌궐을 건국하고 서역 여러 나라를 복속시켰다.
587년, 사발략 카간이 죽고 동돌궐에서 엽호 카간(재위: 587년)이 즉위하자, 수의 지원을 받은 서돌궐이 공격을 받아 아파 카간은 사로잡혔다.

니절처라 카간(재위: 603년경 - 612년) 때, 서돌궐은 그의 실정으로 여러 나라의 반란을 초래했다. 대업 6년(610년), 수의 양제는 니절처라 카간을 사냥에 초대했으나, 니절처라 카간이 응하지 않자, 양제의 노여움을 사서 양제는 니절처라 카간을 폐하고 달두 카간의 손자인 사궤(射匱)를 대칸의 자리에 앉히려 했다. 이에 사궤는 니절처라 카간을 공격하여 대패시켰고, 니절처라 카간은 처자를 버리고 고창 동쪽으로 도망쳤다. 황문시랑 배거는 향씨(向氏)를 보내 니절처라 카간을 타일러 수에 귀순하게 했다. 이후 니절처라 카간은 중국으로 이주하여 수의 고구려 원정 등에 종군하며 수를 위해 일했다.
한편, 서돌궐 본국에서는 대칸이 없어지자, 백성들은 사궤를 칸으로 추대하여 사궤 카간(재위: 612년 - 619년경)으로 삼았다. 사궤 카간은 즉위하자, 한때 반란을 일으켰던 서역 여러 나라를 다시 복속시키기 위해 동쪽으로는 금산(알타이 산맥), 서쪽으로는 바다(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옥문관 서쪽의 여러 나라를 모두 복속시키고 동돌궐과 적대했다. 그리고 칸정(수도)을 구자 북쪽 삼미산(三彌山)에 세웠다.
2. 2. 서돌궐의 전성기와 쇠퇴 (603년 ~ 657년)
583년,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돌궐 제국은 서돌궐 제국과 동돌궐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혜사나 카간(603~611)은 준가리아에서 쫓겨났고, 이후 타르두쉬의 손자 시구이(610~617)에게 패배했다. 시구이는 알타이를 정복하고 타슈켄트를 탈환했으며 이스파한을 약탈했다.[14][15][16]
그의 형제인 통 야브구 카간(618–630)은 타림 분지에서 카스피해까지 지배했으며, 현장을 만났다. 그는 카프카스 남쪽의 페르시아인들과 싸우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기 위해 그의 아들 타르두시 샤드를 보냈는데, 그는 토하리스탄 야브구를 세웠고, 그들은 스스로 투르크 샤히를 인도 동부까지 확장시켰다.
628년 통엽호가한이 숙부에게 살해당하고 가한의 자리를 강탈당했다. 그러나 서돌궐의 백성들은 이에 복종하지 않았고, 노실필부(弩失畢部)는 니숙막갈설(泥孰莫賀設)을 추대하려 했으나, 니숙은 따르지 않았다. 당시 통엽호가한의 아들은 막갈돌의 난을 피해 강거(康居)로 망명해 있었는데, 니숙은 그를 맞이하여 사엽호가한(肆葉護可汗)(재위: 628년 - 632년)으로 삼았다.
630년 막갈돌가한은 당에 혼인을 청했으나, 당 태종(太宗)은 서돌궐의 내란이 진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무렵 서역 여러 나라와 철륵은 예전부터 서돌궐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이 기회를 타고 모두 반란을 일으켰기에 서돌궐 국내는 쇠약해졌다. 사엽호가한은 옛 주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민심을 얻었고, 서쪽의 도륙가한(都陸可汗)과 막갈돌가한의 부하 장수들 대부분이 그에게 복종했다. 그리하여 사엽호가한은 군대를 일으켜 막갈돌가한을 공격하여 대패시켰다. 막갈돌가한은 금산(알타이 산맥)으로 도주하였으나 니숙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서돌궐 백성들은 사엽호가한을 공식적인 대카한으로 삼았다.
632년 사엽호가한은 간신들의 말을 잘 믿어 백성들의 마음이 점점 떠나갔다. 결국, 연기(焉耆)국으로 망명했던 니숙은 돌륙, 노실필 두 부의 장수들과 밀약을 맺고 사엽호가한을 공격했고, 사엽호가한은 강거로 도주했으나 곧 죽었다. 이후 닐숙(泥孰)은 안희에서 咄陸可汗(재위: 632년 - 634년)으로 즉위하였다.
634년, 咄陸可한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 동아설(同娥設)이 일어나 沙鉢羅咥利失可汗(재위: 634년 - 639년)으로 즉위하였다. 沙鉢羅咥利失可한은 여러 부족들에게 복종하지 않아 결국 반란을 일으켰고, 통토둔(統吐屯, 관직)에게 공격받아 군사들이 흩어졌다.
638년 서돌궐 서부의 겹은 욕골설을 세워 을비돌륙가한(재위: 638년 - 653년)으로 삼았다. 을비돌륙가한이 즉위하자 사발라질실가한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고, 양군의 많은 병사들이 죽은 후 각각 철수하였다. 이로 인해(가칭: 이리강 조약) 이리강 서쪽은 을비돌륙가한에게, 이리강 동쪽은 사발라질실가한에게 속하게 되었다.
639년 사발라질실가한의 토둔사리발(투둔 이르테벨: 관직명)이 을비돌륙가한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사발라질실가한은 발한나국으로 달아났으나 죽었다. 노실비 부락의 족장은 사발라질실가한의 동생 가나의 아들인 박포특근을 맞이하여 그를 세워 을비사발라엽호가한(재위: 640년 - 641년)으로 삼았다.
641년 을비사발라엽호가한과 을비돌륙가한은 빈번하게 서로 공격하였다. 얼마 후, 을비돌륙가한은 석국에 토둔(투둔: 관직명)을 파견하여 을비사발라엽호가한을 공격하게 하였다. 을비사발라엽호가한은 붙잡혀 을비돌륙가한에게 보내져 죽임을 당하였다.
같은 해 을비돌육가한(乙毘咄陸可汗)의 부하인 옥리철(屋利啜) 등은 음모를 꾸며 을비돌육가한을 폐위하려 하고, 당(唐)에 사신을 보내 새로운 가한을 세워줄 것을 청원했다. 당 태종(太宗)은 사신을 보내 막가돌을비가한(莫賀咄乙毘可汗)의 아들을 세워 을비사궤가한(乙毘射匱可汗)(재위: 641년 - 651년)으로 삼았다.
을비사궤가한은 즉위하자, 노실필부(弩失畢部)의 군사를 발하여 백수호성(白水胡城)에서 을비돌육가한을 공격했다. 노실필부의 군사가 패했지만, 을비돌육가한은 백성들에게 버림받은 것을 알고 서쪽 토화라국(吐火羅國)으로 망명했다.
649년 2월, 을비사궤가한은 장안(長安)으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혼인을 청했다. 태종은 허락했으나, 5월, 태종이 붕어(崩御)하자, 아사나하루(阿史那賀魯)가 반란을 일으켰고, 을비사궤가한의 부락은 그에 합병되었다.
651년 아사나 허루(阿史那賀魯)는 스스로 사발라 가한(沙鉢羅可汗, 이슈바라 카간)이라 칭하며, 돌록(咄陸)과 노실비(弩失畢)의 십성(十姓)을 다스렸다.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서역 여러 나라의 대부분이 복속하였다.
657년 고종은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예질하(曳咥河) 서쪽에 이르자 아사나 허루는 호록거궐철(胡禄居闕啜) 등 2만여 기병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소정방은 부총관 임아상 등을 거느리고 이와 싸워 아사나 허루의 무리를 크게 패퇴시켰다.
아사나 허루는 아사나 질운과 서녹설(鼠耨設) 밑에 의지하려고 생각하고 석국(石國)의 소돌성(蘇咄城) 근처까지 왔으나, 사람과 말 모두 굶주렸다. 성주 이예달간(伊涅達干, 이넬 탈칸: 관명)은 술과 식량을 가지고 거짓으로 맞이하였다. 아사나 허루 등은 그 계략에 빠져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붙잡혔다. 아사나 허루는 경사(京師)로 압송되었다. 당나라는 그 종족을 나누어 곤릉, 몽지 두 도호부를 설치하고 여러 나라를 예속시키고, 주(州)와 부(府)를 나누어 설치하여 서쪽은 파사(사산조), 안서도호부에 예속시켰다. 이로써 서돌궐은 당의 기미정책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2. 3. 당나라의 기미정책 시기 (657년 ~ 742년)
당나라의 기미정책 시기(657년 ~ 742년) 서돌궐은 당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 시기 서돌궐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당나라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기미정책을 시행했다.도호부 | 재임 기간 | 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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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령도호부 | 657년–662년 | 아사나 미사 |
685년–692년 | 아사나 원경 | |
708년–717년 | 아사나 선 | |
735년–736년 | 아사나 진 | |
몽치도호부 | 657년–667년 | 아사나 부진 |
693년–704년 | 아사나 후사로 | |
704년–708년 | 아사나 화이도 | |
740년–742년 | 아사나 신 |
기미정책 하에서는 아사나 헬루 정벌에 공을 세운 아사나 미사와 아사나 부진 두 사람에 의해 서돌궐 여러 부족이 통괄되었고, 그 두 집안이 대대로 카간 자리를 계승하며 당나라의 반란 진압 등에 참여했다.
장수 연간(692년 - 694년)에 미사(弥射) 집안의 흥석망(興昔亡) 칸이 단절되었고, 741년경에는 보진(歩真) 집안인 십성(十姓) 칸인 아스나 신(阿史那昕)이 돌궐(튀르기슈)의 막하달간(바가·탈르칸)에게 살해되면서 서돌궐의 아스나(阿史那)씨 칸이 멸망하고 서돌궐에서는 돌궐 부족이 대두한다. 이후 돌궐 부족은 '''황성(黄姓)'''과 '''흑성(黒姓)'''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다.
대력 연간(766년 – 779년) 이후로는 갈록(葛邏禄) 부족이 성장하여 황성(黄姓)과 흑성(黒姓)의 돌궐 두 성씨는 갈록에 신종하고, 그 외는 회흘(위구르)에 복속하게 되면서 서돌궐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미사가(弥射家)'''
# 흥석망가한(興昔亡可汗) 아시나 미사(阿史那弥射) (657년 - 662년) … 실점밀가한(室點密可汗)의 5대손, 곤릉도호(崑陵都護) (당나라 관직)
# 흥석망가한(興昔亡可汗) 아시나 원경(阿史那元慶) (685년 - 693년) … 미사(弥射)의 아들, 좌표도위익부중랑장(左豹韜衛翊府中郎将), 곤릉도호(崑陵都護)
# 흥석망가한(興昔亡可汗) 아시나헌(阿史那献) … 원경(元慶)의 아들, 곤릉도호(崑陵都護)
'''보진가(歩真家)'''
# 계왕절가한(繼往絶可汗) 아시나 보진(阿史那歩真) (657년 - 666/667년) … 미사(弥射)의 종형(족형), 몽지도호(濛池都護)
# 갈충사주가한(竭忠事主可汗) 아시나 곡서라(阿史那斛瑟羅) (686년 - 690년) … 보진(歩真)의 아들, 몽지도호(濛池都護)
# 십성가한(十姓可汗) 아시나 회도(阿史那懐道) … 곡서라(斛瑟羅)의 아들, 몽지도호(濛池都護)
# 십성가한(十姓可汗) 아시나 신(阿史那昕) (740년 - 742년) … 회도(懐道)의 아들
2. 4. 서돌궐의 멸망과 그 이후 (742년 ~ )
742년 이리디밀시골돌록비가(이리테미슈·쿠튀르크·빌게, 십성 칸)가 돌궐의 칸을 겸하며 십성(서돌궐)의 칸이 되었다. 그는 흑성 출신으로, 744년까지 칸위를 유지했다. 이후 막하달간(바가·탈르칸)이 740년부터 744년까지 칸위를 이었다.744년 이후 십성(서돌궐)의 칸위는 이리디밀시골돌록비가, 이발(749년 이후), 등리이로밀시(덴그리·일르미슈, 753년 이후), 아다배라(아타·보이라) 등으로 이어졌으나, 이들의 정확한 재위 기간은 불분명하다.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이리디밀시골돌록비가 (이리테미슈·쿠튀르크·빌게) | 742년 - ? | 흑성 출신, 744년까지 돌궐 칸 겸임 |
막하달간 (바가·탈르칸) | 740년 - 744년 | |
이발 | 749년 - ? | |
등리이로밀시 (덴그리·일르미슈) | 753년 - ? | 흑성 출신 |
아다배라 (아타·보이라) | ? - ? | 흑성 출신 |
서돌궐 제국은 10개의 도시로 나뉘어 통치되었으며, 이를 10설(十設) 또는 10성(十姓)이라고 불렀다. 각 도시의 수장은 돌궐 제국 가한으로부터 무기인 화살 하나를 받아 10전(十箭)이라고도 불렸다.[61] 10설(十設) 도시는 쇄엽을 기준으로 동쪽의 다섯 도시인 돌륙(咄陸)과 서쪽의 다섯 도시인 노실필(弩失畢)로 나뉜다. 각 돌륙의 수장은 철(啜), 각 노실필의 수장은 사근(俟斤)이라 불렸다.[61]
돌궐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서돌궐은 실크로드를 통치하며 강력한 세력을 떨쳤다. 서돌궐은 동로마 제국, 페르시아, 당나라 등 주요 문명 국가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3. 정치
『구당서』(열전 제144하 돌궐하)·『신당서』(열전 140하 서돌궐)에 따르면, 군주는 대가한을 정점으로 동서에 두 명의 소가한을 두었다. 동부는 거자(현재 쿠차 시) 북쪽에, 서부는 석국(현재 타슈켄트) 북쪽에 근거지를 두었다. 정치 체제는 돌궐이나 동돌궐과 같아서, 야부그(Yabγu)·특근(Tägin)·사발·을근굴리철·엄홍달·힐리발(Iltäbär)·토둔(Tudun)·사근(Irkin)·달간(Tarqan) 등의 관직이 있었고, 이들이 평의하여 국정을 처리하였다. 수도인 가한정은 북쪽과 남쪽에 각각 북정과 남정을 두었다. 통엽호가한(재위: 619년경 - 628년) 때 가한정을 석국 북쪽 천천(빌키 birkī: 현 잠빌주)로 옮겼다.
사발라질실가한(재위: 634년 - 639년) 무렵 서돌궐은 십부로 나뉘었고, 부마다 셩(šad)이 임명되었으며, 각 셩에게는 화살(箭)이 주어졌는데, 이를 십셩 또는 십전이라고 불렀다. 또한 십셩을 좌우 廂으로 나누어, 수엽수(수이압 강) 동쪽의 오돌륙부를 오대철, 수엽수 서쪽의 오노실필부를 오대사근(Irkin)으로 하였다.
돌륙부의 오대철(좌廂)과 노실필부의 오대사근(우廂)은 다음과 같다.돌륙부의 오대철(좌廂) 노실필부의 오대사근(우廂) |
이후, 일전을 일부라고 칭하거나, 대전두를 대수령이라고 칭하는 등, 이들을 통틀어 '''십성부락'''이라고 불렀다.
4. 외교 관계
서돌궐은 554년부터 서쪽으로 확장하여 555년에는 아랄 해에 도달했다. 이들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에프탈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571년에는 페르시아와 옥수스 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고, 소그드 상인 도시들과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563년 최초의 투르크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동로마 제국과 교류를 시작했다. 568년에는 소그드 상인 마니아크가 이끄는 투르크-소그드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무역과 동맹을 제안했다. 627년에는 통 야브구 카간이 비잔티움 제국과의 동맹을 통해 아르메니아 대부분을 정복하기도 했다.
당나라 건국 이후, 당나라는 동서 돌궐의 대립에 개입하여 양측을 약화시키려 했다. 당 태종 시기에는 서역에 대한 원정이 이루어졌으며,[17][18] 당 고종 시기에는 수정방이 아사나 헬루를 패배시켜 서돌궐 제국을 당나라에 병합했다.[19]
4. 1. 페르시아와의 관계
돌궐은 동로마 제국, 페르시아, 중국 등 세 개의 주요 문명과 접촉한 최초의 스텝 제국이었다. 레프 굴밀료프[10]에 따르면, 부민 카간은 서쪽을 그의 동생 이스타미(553-575)에게 주었다. 554년 봄에 시작된 이 전투는 큰 저항 없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돌궐은 세미레치예를 점령하고 555년에는 아랄 해에 도달했다. 아마도 하류 옥수스에서 자크사르테스를 거쳐 타슈켄트 북쪽 톈산 서쪽 끝까지 이르는 선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흉노족, 우아르, 오굴 등 여러 민족들을 앞세웠는데,[11] 이들은 아바르인과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돌궐은 558년에 볼가 강 너머로 아바르인들을 몰아냈고, 아바르인들은 서쪽 스텝을 가로질러 567년까지 헝가리에 도착했다. 이후 돌궐은 남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당시 에프탈은 타림 분지, 페르가나,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메르브를 장악하고 있었고, 페르시아인들은 현재 국경과 거의 같은 지역에 있었다. 호스로 1세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를 맺고 에프탈을 공격했다. 560년에 전투가 시작되었고,[12] 페르시아는 562년에 승리했으며, 돌궐은 타슈켄트를 점령했다. 565년 에프탈은 카르시에서 패배하여 박트리아로 후퇴했고, 이곳에는 아랍 정복까지 이 민족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돌궐은 에프탈에 예전에 바치던 공물을 요구했고, 이것이 거절되자 옥수스를 건넜지만, 생각을 바꿔 철수했다. 571년에는 옥수스를 따라 국경이 그어졌고,[13] 페르시아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동쪽으로 확장했으며, 돌궐은 소그드 상인 도시들과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되었다.
567년에서 576년 사이에 돌궐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지역을 점령했고, 568년에는 박트리아의 일부를 점령했다. 6세기 후반, 투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지정학적 위치를 확고히 했으며, 동아시아와 서아시아(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이 주도적인 세력이었음) 간 무역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24]
데니스 시너(Denis Sinor)는 비잔티움과의 동맹을 소그드인들이 투르크를 희생시켜 자신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책략으로 보았다. 관련된 사실은 동투르크가 중국으로부터 많은 양의 비단을 전리품으로 빼앗았고, 이를 서쪽으로 판매해야 했다는 것이다. 568년 이전에 주요 상인인 마니아크는 무역을 개방하기 위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 궁정을 방문했지만, 페르시아가 비잔티움과의 무역을 제한하려 했기 때문에 이 제안은 거절되었다. 페르시아에 파견된 두 번째 투르크 사절단의 일부는 독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69년부터 투르크와 페르시아는 메르브(Merv) 근처에서 투르크가 패배할 때까지 전쟁을 벌였고, 571년에 적대 행위가 중단되었다.
576년 발렌티누스(Valentinus)는 카스피해 서쪽에 진영을 친 투르크산토스에게 비잔티움 사절단을 이끌었다. 발렌티누스는 페르시아에 대한 공격을 원했고, 투르크산토스는 비잔티움이 아바르를 숨기고 있다고 불평했다. 발렌티누스는 그 후 동쪽으로 가서 타르두를 만났다. 576~577년 보칸(Bokhan)이라는 투르크 장군과 아나가이(Anagai)라는 우티구르(Utigur)족이 크림 반도의 비잔티움 도시 판티카페이움을 함락시켰지만 케르소네소스 공성전에서는 실패했다.
588~589년 투르크의 박트리아 대규모 침입은 사산 왕조에 의해 패배했다. 602~628년 비잔티움-사산 전쟁 기간 동안 620년대에 투르크-비잔티움 동맹이 부활했다. 627년 통 야브구 카간은 그의 조카 뵈리 샤드를 파견했다. 투르크는 카스피 해안의 대 요새 데르벤트를 급습하여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에 진입하여 많은 약탈을 저질렀고, 티플리스를 포위 공격 중이던 헤라클리우스를 만났다. 포위 공격이 장기화되자 투르크는 철수했고, 헤라클리우스는 남쪽으로 가서 페르시아에 대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투르크는 돌아와 티플리스를 점령하고 수비대를 학살했다. 비잔티움을 대신하여 초르판 타르칸이라는 투르크 장군이 아르메니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4. 2.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6세기 후반, 투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동아시아와 서아시아(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 사이 무역의 중심 역할을 했다.[24] 563년 최초의 투르크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유스티누스 2세를 방문했다. 568년 소그드 상인 마니아크는 아바르와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무역과 동맹을 위해 투르크-소그드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로 이끌었다. 비잔티움 관리 제마르쿠스는 마니아크의 귀환 여정에 동행했고, 투르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마니아크는 페르시아를 우회하여 카스피해 북쪽으로 가는 직접적인 루트를 제안했다. 이 루트를 통한 무역 증가는 코레즘과 흑해 연안 도시에 이익을 주었고, 카자르와 동슬라브족(Rus' people)의 부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6세기 후반부터 옥수스 강을 따라 소그드 상인 도시들을 장악한 투르크는 실크로드 중앙부를 통제하게 되었다. 데니스 시너는 비잔티움과의 동맹을 소그드인들이 투르크를 희생시켜 자신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책략으로 보았다. 동투르크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비단을 전리품으로 얻었고, 이를 서쪽으로 판매해야 했다. 568년 이전, 마니아크는 무역을 개방하기 위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 궁정을 방문했지만 거절당했다. 페르시아에 파견된 두 번째 투르크 사절단의 일부는 독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576년 발렌티누스는 카스피해 서쪽에 진영을 친 투르크산토스에게 비잔티움 사절단을 이끌었다. 발렌티누스는 페르시아 공격을 원했고, 투르크산토스는 비잔티움이 아바르를 숨기고 있다고 불평했다. 576~577년 투르크 장군 보칸과 우티구르족 아나가이는 크림 반도의 비잔티움 도시 판티카페이움을 함락시켰지만 케르소네소스 공성전에서는 실패했다.
602~628년 비잔티움-사산 전쟁 기간 동안 620년대에 투르크-비잔티움 동맹이 부활했다. 627년 통 야브구 카간은 그의 조카 뵈리 샤드를 파견했다. 투르크는 카스피 해안의 요새 데르벤트를 급습하여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에 진입하여 약탈을 저질렀고, 티플리스를 포위 공격 중이던 헤라클리우스를 만났다. 포위 공격이 장기화되자 투르크는 철수했고,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에 대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투르크는 돌아와 티플리스를 점령하고 수비대를 학살했다. 비잔티움을 대신하여 초르판 타르칸이라는 투르크 장군이 아르메니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4. 3. 당나라와의 관계
6세기 후반,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돌궐 제국은 서돌궐과 동돌궐로 분열되었다. 7세기 당나라 건국 이후, 당나라는 동서 돌궐의 대립에 개입하여 양측을 약화시키려 했다. 당 태종 시기에는 고창, 거사, 구자 등 서역에 대한 원정이 이루어졌다.[17][18]
당 고종 시기에는 장군 수정방이 카간 아사나 헬루를 657년에 패배시켜 서돌궐 제국을 당나라에 병합했다.[19] 그러나 서돌궐은 670년과 677년에 타림 분지를 점령하려 했으나 당나라에 의해 격퇴되었다.
679년, 당나라 장군 배행검은 토하리스탄까지 원정을 감행하여 서돌궐의 아시나 두지 칸과 여러 소규모 돌궐 부족장들이 이끄는 안서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았다. 이 지역의 많은 소규모 돌궐 부족장들은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였다.[19]
같은 해, 돌궐 부족장 아시데 원부(Ashide Wenfu)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배행검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아시나 푸녠(Ashina Funian)이 합세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배행검은 두 부족장 사이의 불신을 이용하여 이간질했고, 결국 아시나 푸녠은 당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푸녠은 처형되었고, 이 사건으로 배행검은 은퇴했다.[21]
682년, 배행검은 다시 당나라에 대한 돌궐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출정 전에 사망했다.[21]
716년 빌게 카간은 그의 동생 퀼 테긴에 의해 새 카간으로 옹립되었다. 퀼 테긴은 좌현왕(左賢王)의 위치에서 돌궐 군대의 편성과 정비, 강화라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빌게 카간, 퀼 테긴의 통치 아래에서 돌궐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배가되었다.
장군 톤유쿡의 전략에 의해 돌궐군은 먼저 바스밀을 공격하여 베쉬발리그를 고립시켰다. 그런 다음 720년에 당나라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칸수 전투에서의 승리 후 베쉬발리그를 정복한 돌궐군은 감주(甘州), 원주(原州), 양주(涼州) 지역을 10여 차례 이상 공격하여 이 일대까지 장악했다.
제2돌궐제국은 712년 분열된 서돌궐을 격파하고 그 부족들을 새 제국에 흡수했다.
5. 역대 카간
카간 | 재위 기간 | 아버지, 할아버지 | 칭호 (중국어 음역) | 이름 (중국어 음역) |
---|---|---|---|---|
니리 카간 | – | 양수 특긴, 무칸 카간 | 닐리 꺼한 (Nílì Kèhán) | 샹씨 (向氏, Xiàngshì) |
헤샤나 카간 | 604년–611년 | 니리 카간, 양수 특긴 | 추로 꺼한 (Chùluó Kèhán) | 달만 (達曼, Daman) |
셰구이 | 611년–618년 | 툴루 특긴, 타르두 | 셰구이 꺼한 (Shèguì Kèhán) | 셰구이 (射匮, Shèguì) |
통 야브구 카간 | 618년–628년 | 툴루 특긴, 타르두 | 통 예후 꺼한 (Tǒng yèhù Kèhán) | 통예후 (統葉, Tǒng yèhù) |
퀼뤼그 시비르 | 628년–630년 | 타르두, 이스테미 | 추리치 피 꺼한 (Qūlìqí pí Kèhán) | 모허두오 (莫賀咄, Mòhèduō) |
시 야브구 카간 | 631년–632년 | 통 야브구 카간, 툴루 특긴 | 이피(샤)볼루오 스이예후 꺼한 (Yǐpí (shā)bōluō sìyèhù Kèhán) | 아시나 힐리 (阿史那咥力, Āshǐnà xilì) |
돌루 카간 | 633년–634년 | 바가 샤드, 불명 | 돌루 꺼한 (Duōlù Kèhán) | 아시나 니슈 (阿史那泥孰, Āshǐnà Níshú) |
이슈바라 톨리스 | 634년–639년 | 바가 샤드, 불명 | 샤볼루오 꺼한 (Shābōluō Kèhán) | 아시나 통 (阿史那咥力, Āshǐnà Tóng) |
유쿠크 샤드 | 639년–642년 | 일리그 카간, 야미 카간 | 이피 돌루 꺼한 (Yǐpí duōlù Kèhán) | 아시나 유구 (阿史那欲谷, Āshǐnà Yùgǔ) |
이르비스 세구이 | 642년–650년 | 엘 쿨루그 샤드, 이슈바라 톨리스 | 이피 셰쿠이 꺼한 (Yǐpí shèkuì Kèhán) | 아시나 모허두오 (阿史那莫賀咄, Āshǐnà Mòhèduō) |
아시나 헬루 | 651년–658년 | 뵈리 샤드, 불명 | 샤볼루오 꺼한 (Shābōluō Kèhán) | 아시나 허루 (阿史那賀魯, Āshǐnà Hèlǔ) |
6. 문화
7세기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벽화에는 돌궐 사절들이 중국 사신들과 함께 등장한다. 벽화 왼쪽에 있는 중국 사신들은 사마르칸트 왕에게 보내는 사절단으로, 비단과 누에고치를 들고 있다.[43] 벽화 오른쪽에 있는 돌궐 사절들은 긴 땋은 머리로 알아볼 수 있다.[43] 그들은 단순히 중국 사신들을 호위하는 역할이었기에 선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43]
아프라시아브 벽화에 묘사된 장면들은 서돌궐 카간국이 657년 멸망하기 직전인 648~651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당나라는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44][45]
벽화에서 서돌궐인들은 뚜렷한 동아시아계 특징과 수염이 없는 얼굴을 고려할 때, 투르키스화된 소그드인이 아닌, 누시비(Nushibi)족과 같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묘사되어 있다.[49] 그들은 벽화 속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민족 집단이며, 사신이 아닌 군사 수행원으로 묘사되어 있다.[49] 이들의 묘사는 6~7세기 서돌궐의 의복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49] 그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닥 또는 다섯 가닥의 긴 머리띠를 땋아 종종 하나의 긴 땋은 머리로 묶는다.[49] 그들은 두 개의 깃을 가진 발목까지 내려오는 단색 소매 코트를 입는다.[49] 이러한 옷깃 스타일은 전통적인 투르크 지역인 투루판(Turfan) 근처의 코탄(Khotan)에서 2~4세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49] 그들은 낮고 검은색의 날카로운 코가 특징인 부츠를 신는다.[49] 그들은 청금석이나 진주로 장식된 금 팔찌를 착용한다.[49] 서돌궐 주화에서 "총독과 총독 부인의 얼굴은 분명히 몽골리아계(둥근 얼굴, 좁은 눈)이며, 초상화는 뚜렷한 고대 투르크계 특징(긴 머리카락, 총독의 머리 장식 없음, 총독 부인의 삼각형 모자)을 가지고 있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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