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세노네스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세노네스족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이탈리아 북부에 정착한 갈리아족의 일파이다. 로마 작가들은 이들을 '세노네스'라는 이름으로 언급했으며, 이는 '고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들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를 약탈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283년 로마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갈리아 트란살피나 지역에서도 활동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세노네스족은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고고학적으로 라텐 문화 유물이 발견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갈리아의 부족 - 네르비족
    네르비족은 고대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에 거주하며 용맹한 벨가이족으로 알려졌으나, 로마에 저항하다 프랑크족에 동화되었다.
  • 갈리아의 부족 - 트레베리족
    트레베리족은 켈트-게르만 문화의 혼합 양상을 보이며 로마와 협력하여 자치 도시 지위를 얻고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나, 3세기 위기 이후 쇠퇴한 고대 민족이다.
  • 마르케주의 역사 - 우르비노 공국
    1443년 교황에 의해 시작된 우르비노 공국은 몬테펠트로 가문과 델라 로베레 가문의 통치 하에 르네상스 시기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으나, 1625년 교황청에 귀속되어 1631년 교황령에 합병되었다.
  • 마르케주의 역사 - 교황령
    교황령은 교황이 세속 권력을 행사하며 통치했던 국가로,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증으로 시작되어 군주제 국가가 되었으나 1870년 멸망 후 바티칸 시국으로 축소, 1929년 라테라노 조약으로 범위가 확정되었다.
  • 고대 로마 -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부터 로마에 의한 합병까지의 시기로, 그리스인들의 시야 확장과 새로운 헬레니즘 도시로의 이주, 도시 국가들의 연합 노력, 마케도니아와 후계 왕국들의 패권 다툼, 그리고 로마의 개입과 지배로 특징지어진다.
  • 고대 로마 - 누마 폼필리우스
    누마 폼필리우스는 로마의 두 번째 왕으로, 종교 개혁과 사회 정책을 통해 로마의 종교 제도와 역법을 개혁하고 야누스 신전을 건립했으며, 로마력 개혁을 이끌었다.
세노네스족
지도 정보
민족 정보
민족명세노네스족
로마자 표기Senones
언어골어
역사적 배경
거주 지역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벨기카
피케눔
주요 활동 시기기원전 4세기 ~ 기원후 1세기
기원켈트족
문화적 특징라텐 문화
갈리아의 세노네스족
주요 활동 지역센 강 유역
주요 도시아게딘쿰 (현재의 Sens, Yonne)
역사적 사건브렌누스의 로마 약탈 (기원전 390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참여 (기원전 50년대)
이탈리아의 세노네스족
주요 활동 지역피케눔
주요 도시세나 갈리카
역사적 사건로마 공화정과의 전쟁
기원전 283년, 로마에 의해 축출
문화 및 사회
사회 구조부족 사회
종교켈트족 다신교
경제 활동농업
수공업
약탈 (특히 초기)
관련 인물
주요 인물브렌누스
기타 관련 인물불명

2. 명칭

폴리비오스(기원전 2세기)는 ''Sḗnōnes''(Σήνωνες)와 ''Sḗnōnas''(Σήνωνας)로,[1] 카이사르(기원전 1세기 중반)는 ''Senonii''로,[2] 디오도로스 시쿨루스(기원전 1세기)는 ''Sénnōnes''(Σέννωνες)로,[3] 스트라보(서기 1세기 초)는 ''Sénōnes''(Σένωνες)로,[4] 플리니우스(서기 1세기)는 ''Senones''로,[5] 프톨레마이오스(서기 2세기)는 ''Sénones''(Σένονες)로, 아미아누스(서기 4세기)는 ''Senones''로 언급했다.[7][8]

골족의 민족명칭 ''Senones''는 일반적으로 '고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 이름은 원시 켈트어 어근 ''*sen-'' ('오래된'; cf. 고대 아일랜드어 ''sen''; 중세 웨일스어 ''hen'' '오래된')에 접미사 -''on-es''가 붙은 형태이다. 피에르-이브 랑베르는 어근 *''sen(H)''-에서 유래하여 '얻다, 정복하다'를 의미한다는 어원을 제시하기도 했다. 고대에 마우루스 세르비우스 호노라투스는 이 이름을 그리스어 ξενός ('손님, 주최자, 이방인')과 비교했다.[9]

서기 4세기에 ''Senonas oppidum'' ('세노네스 족의 오피둠')으로 기록된 상스 시는 갈리아 부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3. 지리

갈리아의 세노네스족은 그들의 수도인 ''아게디쿰''(오늘날의 상스) 주변에 거주했다.

4. 역사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의 북부 이탈리아 민족


기원전 269-267년 피케네 전쟁 당시의 민족

4. 1. 이탈리아 반도로의 이주와 로마와의 갈등

로마-갈리아 전쟁도 참조

기원전 600년경, 세노네스족은 아에두이족, 앙바리족, 아르베르니족, 아울레르키족, 카르누테스족과 함께 벨로베수스의 이탈리아 이주에 합류했다.[10]

기원전 400년에 그들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까지 진출하여 약탈했다. 그들은 퇴각하여 움브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이탈리아 동해안에 정착했다. 그들의 영토는 포를리에서 안코나, 그리고 테르니에 이르렀으며, 피체눔 또는 나중에는 "아게르 갈리쿠스"였다. 그들은 세니갈리아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곳이 그들의 수도가 되었고 북부 피체눔을 점령했다. 기원전 391년, 족장 브렌누스의 지휘하에 그들은 에트루리아를 침공하여 클루시움을 포위했다. 클루시움인들은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다. 로마는 지원을 제공했는데, 이는 만국 공법 위반이었다. 이어진 전쟁의 결과는 알리아 전투 (기원전 390년)에서 로마의 패배와 로마 약탈로 이어졌다.[11]

세노네스족은 100년 이상 로마-갈리아 전쟁에 참여했는데, 기원전 284년에 갈리아인들이 기원전 294년에 로마와 40년 휴전 협정을 맺은 에트루리아 도시 아레티움을 포위할 때까지였다. 로마인들은 도시를 지원하러 갔지만 성벽 아래 전투에서 패배했다. 로마는 갈리아인들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사절들을 죽였다. 프라에토르인 카에킬리우스는 그들의 살인을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그는 에트루리아인들과 갈리아인들에게 7명의 군인 및 많은 귀족들과 함께 살해당했다.[12][13] 마침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기원전 283년에 그들을 영토에서 몰아냈다.[14] 이탈리아에서는 그들에 대한 소식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뉴브, 마케도니아, 소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갈리아 부족들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나 갈리카 (현재 세니갈리아)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으며, 에트루리아의 세나 율리아 (시에나)와 구별하기 위해 명명되었다.[11]

4. 2. 갈리아 트란살피나에서의 활동

기원전 53~51년 현재의 센에마른주, 루아레주 및 욘주를 포함하는 지역에 정착한 세노네스족 분파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들의 왕으로 임명한 카바리누스를 추방하여 카이사르와 적대 관계를 맺었다.[1] 기원전 51년, 드라페스라는 세노네스족이 로마 속주를 위협했지만 체포되어 굶어 죽었다.[1] 이 시점부터 갈리아의 세노네스족은 역사에서 사라진다.[1] 이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에 포함되었다.[1] 그들의 주요 도시들은 아제딩쿰(나중에는 세노네스, 여기서 상스가 유래), Metiosedum|메티오세둠프랑스어 (멜룅; A. 홀더에 따르면 뫼동), 벨라우노두눔 (위치 불확실)이었다.[1]

5. 문화

에트루리아의 영향으로 이탈리아인들과 접촉하면서 양방향 문화 교류가 일어났고, 이는 혼인을 통한 토착 민족과의 통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세노네스족은 포도주 소비와 심포지엄 같은 이탈리아 풍습을 받아들이며 점차 헬레니즘화되었다. 누마나, 아르체비아, 카메라노, 산 필리포 디 오시모의 피케네 묘지에서는 라텐 문화 양식의 칼, 칼집 등 전형적인 켈트족 유물이 발견되었다.[1]

5. 1. 고고학적 증거

이탈리아인들과의 접촉과 강한 에트루리아의 영향으로 양방향 문화적 삼투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는 때때로 혼인을 통한 토착 민족과의 통합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세노네스족은 포도주 소비 및 심포지엄과 같은 이탈리아인들의 전형적인 관습을 받아들이면서 점진적인 헬레니즘화를 겪었다. 또한, 누마나, 아르체비아, 카메라노, 산 필리포 디 오시모의 피케네 묘지에서 라텐 문화 유형의 칼과 칼집과 같은 전형적인 켈트족 유물이 나타났다.[1] 피체노 지역에서 세노네스족과 그 동맹국의 패배 직후 초기 시기를 포함하여 그들의 존재는 특히 장례 풍습과 같은 무덤 내용물을 통해 나타나지만, 정착지는 발굴되지 않았다.[1]

참조

[1] 서적 Historíai
[2] 서적 Commentarii de Bello Gallico
[3]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4] 서적 Geōgraphiká
[5] 서적 Naturalis Historia
[6] 서적 Geōgraphikḕ Hyphḗgēsis
[7] 서적 Res Gestae
[8] 서적 Senones
[9] 서적 Σένονες
[10] 서적 Ab Urbe condita
[11] 간행물 Senones EB1911
[12] 서적 Histories
[13] 서적 History against the Pagans
[14] 서적 Gallic War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