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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히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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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가 히토미는 1959년 니가타현 사도군에서 태어나 간호사로 일하던 중 1978년 어머니와 함께 북한에 납치되었다. 북한에서 일본어 교육 요원으로 활동하며 찰스 젠킨스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고, 2002년 일시 귀국 후 일본에 정착했다. 현재는 납북 피해자 가족회와 함께 어머니 소가 미요시의 구출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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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히토미
기본 정보
이름소가 히토미
출생일1959년 5월 17일
출생지니가타현사도시
실종일1978년 8월 12일 (19세)
실종 장소사도
실종 상태귀환
국적일본
다른 이름민혜경
알려진 이유납치 피해자
배우자찰스 로버트 젠킨스(1980년–2017년, 사망)
자녀미카 소가-젠킨스 (딸)
브린다 소가-젠킨스 (딸)
가족
아버지시게루
어머니미요시
자매후미코
기타
북한 이름민혜경

2. 납치 이전의 삶

소가 히토미는 학교 수업과 농구부 활동을 병행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 병원에서 약 10km 떨어진 학교까지 버스로 통학했고,[19] 수업 후 농구부 연습을 마치고 병원 기숙사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다.[19] 평소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는 마노정의 친가에 돌아갔다가 일요일에 돌아왔다.[12] 이러한 생활 속에서 히토미는 니가타현립 사도고등학교 정시제 과정 졸업증서를 받기 직전 납치되었다.[19]

2. 1. 어린 시절과 가족

소가 히토미는 1959년 5월 17일, 소가 시게루와 미요시 사이의 장녀로 니가타현 사도군 마노정에서 태어났다.[11][12] 마노 중학교에서 배드민턴부에 소속되어 있었다.[12]

2. 2. 간호사의 길

1975년(쇼와 50년) 3월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사도종합병원 부속 준간호학원(구 가나이정)과 니가타현립 사도고등학교정시제 과정 사와네 분교(구 사와다정)에 입학했다.[13][17] 준간호학원 교사는 히토미가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했다.[13][17] 1977년 4월부터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준간호사로 일했다.[13][17] 아이를 돌보는 일을 특히 좋아해서, 잘 달래면서 치료를 했다고 한다.[13] 1978년 4월부터 외과 외래에 배속되었으며, 친한 친구에게만 외과는 싫다고 말했지만 지각이나 무단결근은 한 번도 없었다.[13]

3. 북한에 의한 납치

간호사였던 소가 히토미는 1978년 8월 12일, 어머니 소가 미요시와 함께 고향인 니가타현 사도시 마노정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던 중 북한에 납치되었다.[9] [1] [2] [3] 북한은 소가에게 '민혜경'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들은 북한에서 일본의 관습과 언어를 가르치는 요원 양성에 동원되었다.[9] [1] [2] [3] 소가 미요시는 딸과 헤어진 후 소식이 끊겼다.[9] [1] [2] [3]

소가 히토미와 어머니 소가 미요시, 1960년대 초


1980년 7월, 소가는 찰스 젠킨스를 만나 영어를 배웠고, 같은 해 8월 8일에 결혼하여 두 딸 미카와 브린다가 태어났다.[9] [1] [2] [3]

3. 1. 납치 사건 발생

1978년 8월 12일, 소가 히토미는 어머니 소가 미요시와 함께 장을 보고 귀가하던 중 납치되었다.[9] [1] [2] [3] 당시 소가 히토미는 19세였다.[12] 두 사람은 니가타현 사도시 마노정에서 잡화점에 들러 백중에 불단에 바칠 물건과 아이스크림 등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12][13][17][21]

갑자기 뒤에서 남자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나무 아래로 끌고 갔다.[12][13][22] 소가 히토미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이 막히고 자루에 담겨 한 남자에게 들쳐 메어졌다.[12][13][22] 그 후, 소가 히토미는 어머니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15][22]

소가 히토미는 작은 배에 실려 강에서 바다로 나갔고, 더 큰 배로 갈아탔다.[12][21][22] 그녀는 배 안에서 더듬거리는 일본어를 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21] 이튿날 13일 오후 5시경, 배에서 내려 북한 청진에 도착했다.[12]

납치범은 4명으로, 그중 1명은 더듬거리는 일본어를 하는 여간부 '김명숙'이었다.[22][27] 그녀는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으로, 키는 약 150cm였다.[22] 나머지 3명은 전투원이었다.[22]

3. 2. 납치 직후의 생활

소가 히토미는 1978년 8월 12일, 어머니와 함께 니가타현 사도시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던 중 북한에 납치되었다.[9] 납치 당시 19세였던 소가는 자루에 담겨 배에 실려 청진으로 이동했다.[12][21][22] 8월 13일 오후 5시경 북한 청진에 도착했고, 8월 15일 평양에 도착했다.[12][15]

납치범은 4명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은 '김명숙'이라는 더듬거리는 일본어를 하는 여간부였다.[22][27] 김명숙은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으로, 소가 히토미의 감시 및 몸 관리를 담당했다.[22][27][38]

평양의 초대소에서 소가 히토미는 요코타 메구미와 1년 반 정도 함께 생활하며 서로에게 의지했다.[12][29] 두 사람은 함께 조선어를 공부하고, 배드민턴이나 탁구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12][29] 소가 히토미의 조선 이름은 민혜경, 요코타 메구미의 조선 이름은 류명숙이었다.[29] 신광수가 소가 히토미와 요코타 메구미의 북한 교육을 담당했다.[29]

4. 북한에서의 생활

간호사였던 소가 히토미는 1978년 8월 12일, 어머니 소가 미요시와 함께 고향 사도시에서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북한에 납치되어, 일본의 관습과 언어를 가르치는 요원 양성에 동원되었다.[9] [1] [2] [3] 이후 소가 미요시는 히토미와 헤어져 현재까지 소식이 끊겼다. 북한 당국은 소가 히토미에게 민혜경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1980년 7월 초, 소가 히토미는 찰스 젠킨스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를 만났으며, 1980년 8월 8일에 결혼했다.

4. 1. 찰스 젠킨스와의 만남과 결혼

1980년 6월, 소가 히토미는 주한미군에서 탈영한 미국 군인 찰스 젠킨스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31] 당시 40세였던 젠킨스는 평양 승호구역(勝湖區域) 립석리(立石里)에 살고 있었는데, 소가 히토미에게 영어를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았다.[31] 젠킨스는 히토미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히토미는 처음에는 경계하며 일주일 동안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31]

젠킨스는 히토미에게 진심으로 다가갔고, 그녀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31] 그는 여러 차례 청혼했지만, 히토미는 계속 거절했다.[29] 젠킨스는 히토미에게 "저와 결혼하면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에게는 일반적인 남녀처럼 천천히 결혼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라며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29]

그의 열정과 성실함에 감동한 소가 히토미는 결국 결혼을 결심했고, 두 사람은 만난 지 40일 만인 1980년 8월 8일에 결혼식을 올렸다.[32] 지도원, 전직 요리사, 정치위원, 보좌관, 운전사 등이 참석하여 축하연을 베풀었다.[32]

4. 2. 가족 생활과 고난

1981년 5월 10일, 소가 히토미와 찰스 젠킨스 부부의 첫 아들 '정비'가 태어났으나, 조산으로 인해 당일 사망했다.[32][33] 히토미는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며 슬퍼했고, 죽은 아이를 만나고 싶어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34] 1983년 6월 1일에는 장녀 로버타 미카 젠킨스가, 1985년 7월 23일에는 차녀 브린다 캐롤 젠킨스가 태어났다.[16]

1990년대 후반,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다.[36][37] 젠킨스는 "우리는 늘 추위와 배고픔, 빈곤과 비위생과 싸웠다. 날마다, 해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36] 히토미는 잦은 정전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38] 전기가 끊기면 수도 사용이 불가능해 빗물을 모아 사용해야 했고, 물은 반드시 끓여야만 했다.[38][36] 겨울에는 난방용 석탄이 자주 도난당했고,[36] 온수 파이프 문제로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36] 젠킨스는 딸들을 위해 직접 온돌을 만들었지만, 1997년 이후로는 정전이 더욱 심해졌다.[36]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 가족들은 여러 겹의 옷과 양말을 신고, 하나의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야 했다.[38] 수세식 변소의 물이 얼어 변기가 깨지기도 했다.[38]

식량 배급은 있었지만, 생활비는 최소한의 수준이었다.[38] 4인 가족에게는 부족한 금액이었고, 일본산 식품은 너무 비싸 중국산으로 대체해야 했다.[38]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금지된 암시장(장마단)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불량품이나 가짜 상품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38] 배급되는 쌀에는 조약돌이나 벌레가 섞여 있었고, 계란은 썩은 것이 섞여 있기도 했다.[38] 훗날 딸들은 일본 쌀을 처음 보고 "쌀이 하얀색이네"라며 놀랐다고 한다.[38]

4. 3. 간첩 양성 시도

1995년, 북한 간부들은 젠킨스와 소가 히토미 부부에게 "김정일 동지의 위대한 배려"라며, 그들의 자녀들을 포함한 미국 탈영병 자녀들이 평양외국어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렸다.[39] 그러나 이는 간첩 양성을 위한 준비 단계로 여겨졌다. 서양인의 외모를 가진 아이들은 북한 간첩으로 의심받지 않을 것이기에 간첩으로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39] 김현희도 외국어대학 학생이었다가 소환되어 간첩이 되었다.[39] 젠킨스는 매우 걱정했지만, 학교 기숙사에 자리가 없어 아파트에서 통학해야 했고, 겨울철 배편 통학의 위험성 때문에 곧 퇴학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39]

5. 일본으로의 귀환

2002년, 북한이 일시 귀국을 허용한 일본인 납북 피해자 5명 중 한 명이었던 소가 히토미는 다른 4명과 함께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4] 그녀는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의 석방을 촉구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와 협상하여 군사 재판에서 찰스 젠킨스에게 온건한 판결을 약속받았다.[49] 2004년 7월 9일, 소가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남편 젠킨스와 두 딸과 재회했다.[4] 젠킨스는 미군 시설에서 "탈영" 혐의로 26일간 수감되었지만 석방되었다.[6] 2004년 7월 18일, 가족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5]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가족은 소가의 고향인 니가타현 사도마노에 정착했다.[6]

2012년 10월, 소가는 북한 정부에 어머니와 다른 납치 피해자들의 석방을 호소했다.[7][8] 2017년, 찰스 로버트 젠킨스는 사망했다.[10]

2017년 일본에서 아베 신조도널드 트럼프와 함께한 소가 히토미(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2023년 7월, 사도시 시장인 와타나베 류고(왼쪽 끝)와 함께 총리대신기시다 후미오(오른쪽에서 두 번째)를 만났다. (직책은 촬영 당시)


현재 소가 히토미는 "가족회"와 함께 어머니이자 납치 피해자인 소가 미요시의 구출 활동에 힘쓰고 있다.

5. 1. 2002년 일시 귀국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북한을 방문하여 일북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북한 정부는 그동안 부인해왔던 일본인 납치 피해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40] 소가 히토미의 생존도 확인되었고, 여동생은 그때 처음으로 언니와 어머니가 북한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6]

10월 15일, 소가 히토미는 24년 만에 일본으로 일시 귀국했다.[41] 평양국제공항에서 젠킨스와 두 딸, 요코타 메구미의 딸 김혜경이 배웅했다.[41] 소가 히토미는 김혜경을 껴안고 울었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30]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소가 히토미는 24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여동생과 재회하여 서로 껴안고 울었다.[26] 10월 17일, 고향 사도에 돌아왔고, 마노정에서는 "어서 오세요. 소가 히토미 씨"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환영했다.[42] 기자회견에서 "지금 저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산, 강, 골짜기, 모두 따뜻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라고 말했다.[42]

당시 젠킨스와 소가 히토미는 곧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41] 그러나 가족과의 재회를 위해 일본에 남기로 결심했다. 11월 6일, 아베 신조 내각관방 부장관과 나카야마 쿄코 내각관방 참여가 방문하여 납치 피해자 5명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고 가족을 일본으로 귀국시키겠다는 정부 방침을 전달했다.[43] 소가 히토미는 "일본에서 열심히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복잡한 심경이었다.[43] 결국 소가 히토미는 혼자서 가족을 기다리기로 결정하고,[30][44] 11월 23일, 일본에 머물겠다는 의사를 정부에 전달했다.[43]

5. 2. 일본 정부의 노력과 가족 재회

2002년 9월, 북한이 고국 방문을 허용한 일본인 납북자 5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소가 히토미는, 짧은 방문 후 다른 4명과 함께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4] 그녀와 많은 일본인들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의 석방을 촉구했다. 2004년 7월 9일, 소가는 남편 찰스 젠킨스가 체포될 것을 우려하여 중립 지역으로 선정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남편과 두 딸과 재회했다.[4]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와 협상하여 군사 재판에서 젠킨스에게 온건한 판결을 약속받았다.[49] 그 결과, 젠킨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탈영 혐의로 일본 주둔 미군 시설에 26일 동안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6] 2004년 7월 18일, 젠킨스와 두 딸은 일본에 입국하여 소가 히토미와 함께 살게 되었다.[5]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가족은 소가의 고향인 사도에 정착했다.[6]

6. 귀국 후의 생활

2002년 9월, 북한이 본국 방문을 허용했던 5명의 일본인 납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던 소가 히토미는 짧은 방문 예정이었지만, 다른 네 명의 동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4] 그녀와 많은 일본인들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의 석방을 촉구했다. 2004년 7월 9일, 소가는 젠킨스가 체포될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중립적인 장소로 선택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남편과 두 딸과 재회했으며[4], 2004년 7월 18일 가족은 일본으로 돌아왔다.[5]

젠킨스는 일본의 미군 시설에서 "탈영" 혐의로 26일간 군사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지만 석방되었다.[6] 2012년 10월, 소가는 북한 정부에 어머니와 다른 납치 피해자들의 석방을 호소했다.[7][8] 찰스 로버트 젠킨스는 2017년 사망했다.[10]

6. 1. 사도가섬에서의 정착

언론 보도에 따르면 소가 히토미와 가족은 소가의 고향인 마노에 정착했다.[6]

2003년, 마노정(2004년 3월 1일 사도시에 통합 합병됨)에서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되었다. 2007년, 준간호사 자격을 살려 사도시의 정규직 공무원이 되었다. 시의 노인 복지 시설에서 요양 업무에 종사했다.[52] 2020년 3월 31일 정년퇴직[53]하였으나, 이후 재임용되어 같은 복지시설에서 근무했다.

2024년 4월, 사도시청 총무부 총무과 납치피해자대책계로 이동하여 납치 문제 전담이 되었다.[54]

6. 2. 납북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



소가 히토미는 납북 피해자 가족회와 함께 어머니 소가 미요시의 구출 활동에 힘쓰고 있다. 소가 미요시는 1978년 소가 히토미와 함께 납북되었으나, 북한은 소가 히토미만 납치되었다고 주장한다.[21]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방북하여 북일 정상회담을 열었을 때, 북한은 일본인 납치 피해자 존재를 공식 인정했지만, 소가 미요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발표했다.[21]

2002년 10월 8일, 경찰청은 소가 미요시와 소가 히토미 모녀를 공식 납치 피해자로 인정했다.[12] 소가 히토미는 2002년 10월 15일 일본으로 귀국했지만,[41] 어머니 소식은 알 수 없었고, 북한에 있는 남편과 자녀들을 만날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되었다.[12]

2012년 10월, 소가는 북한 정부에 어머니와 다른 납치 피해자들의 석방을 호소했다.[7][8] 납치 문제의 진실 규명과 해결을 위해 일본 정부와 국제사회에 지속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렌케 카오루는 소가 미요시에 대해 "딸은 알고 있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북한이 납치 피해자들의 소재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51]

소가는 사도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며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2003년 사도시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되었고, 2007년 정규직 공무원이 되어 노인 복지 시설에서 근무했다.[52] 2020년 정년퇴직 후 재임용되어 근무하다가,[53] 2024년 4월부터 사도시청 총무부 총무과 납치피해자대책계에서 납치 문제 전담으로 활동하고 있다.[54]

7. 소가 히토미 사건의 의의와 영향

소가 히토미 사건은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북한을 방문하여 일북정상회담을 개최했을 때, 북한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공식 인정하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진 사건이다.[40] 이 사건은 북한의 반인륜적 행위를 폭로하고, 한일 관계의 쟁점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은 소가 히토미의 생존은 인정했지만,[26] 어머니 소가 미요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발표했다.[21] 히토미는 일본으로 귀국했지만,[41] 어머니와 북한에 남은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12] 이후 히토미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남편 찰스 젠킨스와 두 딸을 만나 재회했고,[48][49][50] 가족 모두 일본으로 함께 입국했다.

현재 소가 히토미는 '가족회'와 함께 납북 피해자인 어머니 소가 미요시의 구출 활동에 힘쓰고 있다.

7. 1. 북한의 반인륜적 행위 폭로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북한을 방문하여 일북정상회담을 열었고, 이 자리에서 북한은 그동안 부인해왔던 일본인 납치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40] 이로써 소가 히토미의 생존이 확인되었고,[26] 이는 북한의 반인륜적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히토미의 어머니 소가 미요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발표했다.[21]

2002년 10월 15일, 소가 히토미는 일본으로 귀국했지만,[41] 어머니의 생사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북한에 남은 남편과 자녀들을 만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계속되었다.[12] 그녀는 일본에 머물며 가족을 기다리기로 결심했고,[30][44] 2003년 4월 14일, 다른 납치 피해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귀환을 촉구했다.[45]

2004년 7월, 소가 히토미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남편 찰스 젠킨스와 두 딸을 만나 재회했고,[48][49][50] 가족 모두 일본으로 함께 입국했다.

현재 소가 히토미는 '가족회'와 함께 납북 피해자인 어머니 소가 미요시의 구출 활동에 힘쓰고 있다. 이 사건은 북한의 인권 유린 실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7. 2. 한일 관계의 쟁점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북한을 방문하여 일·북 정상회담을 열었을 때, 북한은 일본인 납치 피해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40] 소가 히토미의 생존도 확인되었으나,[26] 어머니 소가 미요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발표했다.[21]

2002년 10월 15일, 소가 히토미는 일본으로 귀국했지만,[41] 어머니와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없어 고통받았다.[12] 2003년 4월 14일, 납치 피해자 5명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며, 일본 정부에 가족 인도 협상 마무리를 요청했다.[45]

2004년 7월 9일, 소가 히토미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남편 찰스 로버트 젠킨스와 두 딸과 재회했고,[49] 7월 18일 일본에 입국했다.

현재 그녀는 "가족회"와 함께 납치 피해자인 어머니 소가 미요시 구출 활동을 하고 있다.

8. 관련 인물

9. 미디어에서의 묘사

소가는 2006년 일본 텔레비전 영화 사이카이: 요코타 메구미상노 네가이에서 호리코시 노리 역을 맡았다.[1]


  • 호리코시 노리: "재회 ~요코타 메구미 씨의 소원~" (일본TV(日本テレビ), 2006년)

참조

[1] 뉴스 From Hell With Love http://content.time.[...] TIME 2005-10-24
[2] 뉴스 US defector's extraordinary N Korea love story https://www.bbc.com/[...] 2017-12-14
[3] 뉴스 American who defected to North Korea dies https://www.bbc.com/[...] 2017-12-12
[4] 뉴스 Japan abductee meets family again http://news.bbc.co.u[...] BBC News Online 2004-07-09
[5] 뉴스 Alleged deserter arrives in Japan http://edition.cnn.c[...] CNN.com 200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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