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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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기남은 1539년 경상북도 의흥현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 시기에 유교의 성현 위패와 경서를 8년간 보존한 인물이다. 그는 54세의 나이로 의흥향교 대성전의 오성위판을 선암산 암굴로 옮겨 보존했으며, 전란 후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손기남은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며 절개와 의리를 실천했고, 사후에는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에 증직되었다. 현재 의흥향교 대성전과 모성효의비, 화계서원, 모성당, 숭덕사, 성재암 등이 유적으로 남아 있으며, '돈암손선생실기 책판'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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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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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손기남 |
현지 이름 | 돈암 (遯巖) |
본관 | 밀양 손씨 |
출생일 | 1539년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의흥현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의흥면 금양리) |
사망일 | 1606년음력 6월 16일 (향년 68세) |
별명 | 손장군, 손선생 |
경력 | 유림(儒林)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파평 윤씨 부인 |
자녀 | 아들 昉, 晛, 昭, 嘷, 暉, 時 |
부모 | 아버지 풍정(豐貞), 어머니 밀양 박씨 |
거주지 | 조선 경상도 의흥현 금양리 |
군사 경력 | |
참전 | 임진왜란, 義士 |
시호 |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 사재감첨정 |
2. 생애 및 행적
손기남은 1539년 경상북도 의흥현 금양(현 군위군 의흥면 금양리)에서 출생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국토를 유린하자, 당시 54세였던 손기남은 유교의 성전이자 요람이었던 향교가 불타는 것에 개탄하였다. 그는 친히 의흥향교 대성전에 들어가 성현의 오성위판(五聖位版)과 경서를 지게에 지고 30리 떨어진 의흥현 선암산 암굴(성재암)로 옮겨 8년간 보존하였다.[2] 매월 보름과 그믐에는 분향하며 위판을 관리하였고, 전란이 끝난 후에는 의흥현 파전리 용연정(龍淵亭)에 위판을 임시 보관하였다가 의흥향교 중건 후 제자리에 복원시켰다.[3]
임진왜란이 모두 끝난 1599년, 수사(繡使, 암행어사) 민후홍(閔候弘)이 그의 행적을 조정에 보고하니, 선조가 친히 불러 복호 4결을 내렸다. 손기남이 2결은 받지 않겠다고 사양하자, 임금이 “공은 나라에 충신이요, 부모에게는 효자이며 성문(聖門)에서는 어진 제자다”[4]라고 칭찬하며 어사주(御賜酒)를 내렸다고 한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오성위판은 왜란이 끝난 후 인근 향교 재건 시 표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건립 당시의 원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의흥향교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난리가 끝나자 산 아래 용연 언덕에 초막을 짓고 위판을 안치한 후 춘추향사를 2년 반 동안 지내는 예의를 다했다.[2][3][4]
1606년 향년 6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607년(선조 40년)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 사재감첨정(通政大夫 成均館大司成 司宰監僉正)에 증직되었다.
2. 1. 출생 및 성장
손기남은 1539년 경상북도 의흥현 금양(현 군위군 의흥면 금양리)에서 출생하였다.2. 2. 임진왜란과 오성위판 보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국토를 유린하자, 당시 54세였던 손기남은 유교의 성전이자 요람이었던 향교가 불타는 것에 개탄하였다. 그는 친히 의흥향교 대성전에 들어가 성현의 오성위판(五聖位版)과 경서를 지게에 지고 30리 떨어진 의흥현 선암산 암굴(성재암)로 옮겨 8년간 보존하였다.[2] 매월 보름과 그믐에는 분향하며 위판을 관리하였고, 전란이 끝난 후에는 의흥현 파전리 용연정(龍淵亭)에 위판을 임시 보관하였다가 의흥향교 중건 후 제자리에 복원시켰다.[3]임진왜란이 모두 끝난 1599년, 수사(繡使, 암행어사) 민후홍(閔候弘)이 그의 행적을 조정에 보고하니, 선조가 친히 불러 복호 4결을 내렸다. 손기남이 2결은 받지 않겠다고 사양하자, 임금이 “공은 나라에 충신이요, 부모에게는 효자이며 성문(聖門)에서는 어진 제자다”[4]라고 칭찬하며 어사주(御賜酒)를 내렸다고 한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오성위판은 왜란이 끝난 후 인근 향교 재건 시 표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건립 당시의 원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의흥향교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난리가 끝나자 산 아래 용연 언덕에 초막을 짓고 위판을 안치한 후 춘추향사를 2년 반 동안 지내는 예의를 다했다.[2][3][4]
2. 3. 조정의 포상
1599년 암행어사 민후홍(閔候弘)의 장계로 선조에게 복호 4결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복호 4결이 과하다며 2결을 반환하려 하자, 선조가 "충신, 효자, 어진 제자"라 칭송하며 어사주를 내렸다.2. 4. 사망 및 추증
1606년 향년 6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607년(선조 40년)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 사재감첨정(通政大夫 成均館大司成 司宰監僉正)에 증직되었다.3. 사상과 신념
손기남은 평생 유림으로서 절개와 의리를 중시하고 충(忠)·효(孝)·예(禮)를 인간의 도리이자 최고 덕목으로 여겼다. 일반 백성은 물론, 관리나 임금까지도 자기 한 몸과 식솔을 챙겨 피난하기 급급한 위기 상황에서, 벼슬이나 향교를 지켜야 할 직분도 아니었던 그가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교 성현의 위판을 8년이나 지켜낸 행적은 그의 굳은 신념을 대변해준다.
유교와 성리학이 지금의 헌법보다도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던 당시 관점으로 보면, 유교 성전의 정수를 목숨 걸고 8년간 버텨낸 힘은 오직 절의(節義, 절개와 의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손기남의 행적을 재조명하고 확산시키는 일은 충효의 고장인 군위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예와 의리를 중시하는 전통의 맥을 잇는 차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3. 1. 유교적 가치관과 절의 정신
손기남은 평생 유림으로서 절개와 의리를 중시하고 충(忠)·효(孝)·예(禮)를 인간의 도리이자 최고 덕목으로 여겼다. 일반 백성은 물론, 관리나 임금까지도 자기 한 몸과 식솔을 챙겨 피난하기 급급한 위기 상황에서, 벼슬이나 향교를 지켜야 할 직분도 아니었던 그가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교 성현의 위판을 8년이나 지켜낸 행적은 그의 굳은 신념을 대변해준다.유교와 성리학이 지금의 헌법보다도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던 당시 관점으로 보면, 유교 성전의 정수를 목숨 걸고 8년간 버텨낸 힘은 오직 절의(節義, 절개와 의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손기남의 행적을 재조명하고 확산시키는 일은 충효의 고장인 군위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예와 의리를 중시하는 전통의 맥을 잇는 차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3. 2. 민본주의적 가치 수호
현대적 관점에서 손기남의 행적과 신념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조선을 합병한 일제가 한민족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조선을 상징하는 유교와 향교 폄하 작업을 전개했고, 해방 후 현대화 과정에서 유교 정신은 점차 그 의미가 퇴색되면서 전통 가치는 고루한 것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5]손기남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오성위판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 건국의 정신과 문묘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절대 왕권 체제인 고려와는 달리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유교(성리학)의 인본주의를 통치 원리로 삼아 왕권의 자의적 행사와 폭주를 견제하는 신권 강화를 내세운 국가였다. 이들은 삼강오륜 등 윤리 강령을 마련하고 공자 등 오성 신위를 봉안한 문묘를 건립함으로서 권력 속성상 예견되는 왕의 전횡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사상적, 도덕적 안전장치이자 신권 수호의 보루를 마련했다. 조선 각 고을 향교 대성전에도 문묘처럼 오성 위패를 봉안함으로서 유교적 이념을 모든 백성에게 체화시키려 했다.[5]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림인 손기남이 8년간 온몸으로 지켜낸 오성위판은 이러한 민본주의적 공유 가치의 상징이 왜구에게 짓밟히는 것을 막아내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지, 한양 도성을 버리고 평양과 의주로 피난한 선조에 대한 맹목적 충성의 발로로 해석될 수 없다. 그의 행적이 조선 330여 고을 중에서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가 활짝 핀 이 시대에 돌아보아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기에 후세 유림들이 앞다투어 절개와 의리의 표상이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4. 평가
4. 1. 당대의 평가
4. 2. 후대 유림들의 평가
참판 이의익은 병자호란 때 나생과 정복이 성현의 오성위판을 남한산성으로 피난시킨 공로로 포상을 받은 것과 비교하며, 임진왜란은 8년간 지속되었고 손기남은 스스로 의거를 행했다는 점에서 돈암의 공이 더 크다고 평가했다. 전적 박광보는 임금이 피난 갔던 평양과 조선 삼백여 고을 중에서 손기남과 같이 아름다운 행적을 남긴 이가 없으며, 세상이 변해도 그의 자취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찬양했다.4. 3. 현대적 재평가
5. 유적 및 유물
5. 1. 유적
의흥향교 대성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에 다시 지어졌으며, 1641년 현재 위치로 옮겨지면서 새로 건립되었다.[6] 의흥향교 대성전에는 유교 성현 2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경상북도 향교 중 유일하게 건립 당시 위패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손기남이 오성위판을 선암산 바위굴에 피난시켜 8년간 모셨다가 1601년에 다시 봉안했기 때문이다.[6]
모성효의비는 1718년(숙종 44년) 의흥현감 조하성이 의흥향교 입구에 건립한 공적비로, 성인을 숭모하고 의리를 본받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6] 비문에는 "몸소 신위를 받들어 두 번이나 병화를 피하여 깊은 산골에 모셨다가 마침내 옛 향교로 돌렸네. 십실에 충성하니 유궁에 의리가 현저하도다. 천추에 깎여지지 않는 흰 돌이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6]

화계서원(화계사)은 손기남을 모시기 위해 1699년(숙종 25년) 조정의 명에 따라 의흥면 금양리에 건립된 사당이다.[6] 1726년(영조 2년) 박현보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6]
모성당은 1897년 의흥현감 신태철이 화계서원이 훼철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건립한 사당이다. 화계서원 복원 당시 밀양 손씨 후손들이 감춰두었던 목재를 사용하여 숭덕사(崇德祠)와 함께 건립하였다.[6] 현재는 밀양 손씨 돈암공파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며 매년 음력 3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를 지낸다.[6]
숭덕사는 손기남의 불천지위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모성당 바로 옆에 위치한다.[6]

성재암은 손기남이 1592년 4월 21일부터 8년간 오성위판과 경서를 안치하고 춘추향사를 지냈던 암굴이다. 경북 군위군 의흥면 선암산 해발 700미터 지점에 있다.
손정(우물)은 경북 군위군 의흥면 지호동에 있으며, 선암산에 안치한 오성위판 향사에 사용하던 우물이다.
용연정은 전란 후 오성위패를 임시 보관했던 초막으로, 손씨향교라고도 불린다.
유허비각은 1915년 손기남의 9대손 손치붕 등 후손들이 그의 효의정신을 기리기 위해 금양마을에 세운 비각이다.
5. 2. 유물
돈암손선생실기 책판은 손기남의 일대기를 기록한 목판으로, 후손 손만진 등이 기존의 것을 보완하고 박재운의 편집을 거쳐 19세기 후반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총 23장이 남아있으며, 이 중 21장은 2015년 10월 한국에서 12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고, 나머지 2장은 경북 군위군 숭유관에 보관되어 있다.돈암집은 1859년 박문현이 저술한 사료 모음집이다. 예조, 관찰사, 의흥현감의 공문에서부터 지역 향교 간 통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서와 사료를 바탕으로 손기남의 공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객관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주요 자료로는 예조 등급관문, 영문관문, 관문후록, 태학통문, 사림정장, 관제, 정영장, 영제, 본관보장, 향장, 본손정장, 통문 등이 있다.
6. 일화
그는 오성위판을 돌보기위해 본가에서 30리 떨어진 선암산(船巖山) 암굴로 수시로 밤을 도와 다녔는데 그때마다 호랑이가 동행 호위하였다고 한다. 또 전란을 피하기 위해 어버이를 업고 금양리 뒷산인 조림산에 움막을 짓고 무려 8년간을 피신하였는데 그의 효성에 호랑이도 감복하여 노루와 토끼를 잡아다 주어 어버이 봉양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의흥군의흥군/義興郡중국어수 신태철(申泰哲)이 찬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선조 39년(1606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지관을 보내서 명당자리를 살펴주었다고 한다. 지역 형세를 살펴본 지관은 3곳의 명당을 꼽았는데 의흥 화북동 도리터(물이 돌아 흐르는 곳)이고 다른 곳은 안동권씨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고 마지막 남은 명당자리는 매성동 용남등(일명 까시산 옥녀봉)이다.
이곳에 묘를 쓰게 되면 백자천손하는데, 다만 여기에 묘를 쓸 경우 상여가 도착할 때까지 상주는 굿 안에서 뒤를 돌아보지 말고 허리를 굽혀 곡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산세가 워낙 험한 터라 기다리다 못해 뒤를 돌아보고 용이 하늘로 날아감에 따라 결국 묘를 쓰지 못하고 현재의 자리인 조림산 오좌원에 영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금양에서 보면 용남등에 묘터 흔적이 보인다.
6. 1. 호랑이의 호위
그는 오성위판을 돌보기 위해 본가에서 30리 떨어진 선암산(船巖山) 암굴로 수시로 밤을 도와 다녔는데 그때마다 호랑이가 동행 호위하였다고 한다. 또 전란을 피하기 위해 어버이를 업고 금양리 뒷산인 조림산에 움막을 짓고 무려 8년간을 피신하였는데 그의 효성에 호랑이도 감복하여 노루와 토끼를 잡아다 주어 어버이 봉양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의흥군의흥군/義興郡중국어수 신태철(申泰哲)이 찬하였다.6. 2. 호랑이의 효도
그는 오성위판을 돌보기 위해 본가에서 30리 떨어진 선암산(船巖山) 암굴로 수시로 밤을 도와 다녔는데 그때마다 호랑이가 동행 호위하였다고 한다. 또 전란을 피하기 위해 어버이를 업고 금양리 뒷산인 조림산에 움막을 짓고 무려 8년간을 피신하였는데 그의 효성에 호랑이도 감복하여 노루와 토끼를 잡아다 주어 어버이 봉양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의흥군수 신태철(申泰哲)이 찬하였다.6. 3. 용남등 묘터
손기남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지관을 보내 명당자리를 살펴주었다. 지관은 세 곳의 명당을 꼽았는데, 의흥 화북동 도리터(물이 돌아 흐르는 곳), 안동권씨가 이미 자리하고 있던 곳, 그리고 매성동 용남등(일명 까시산 옥녀봉)이었다.용남등에 묘를 쓰면 백자천손할 수 있지만, 상여가 도착할 때까지 상주는 굿 안에서 뒤를 돌아보지 말고 허리를 굽혀 곡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산세가 험해 기다리다 못한 상주가 뒤를 돌아보았고, 용이 하늘로 날아가 결국 묘를 쓰지 못하고 현재의 자리인 조림산 오좌원에 영장을 하게 되었다. 현재 금양에서 용남등의 묘터 흔적을 볼 수 있다.
7. 연보
참조
[1]
문서
문묘에 모신 다섯 성인
[2]
문서
충신, 효자, 열녀가 난 집에 주는 상
[3]
문서
1결의 크기
[4]
문서
유교 성현들을 일컫는 말
[5]
문서
廟와 墓의 차이
[6]
문서
충신, 효자, 열녀의 공적 기리고 알리기 위한 조정의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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