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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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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산은 쿠빌라이 칸의 손자이자 진왕 카말라의 아들로, 1292년 혹은 1293년 황증손 자격으로 운남성에 출진했다. 그는 운남왕과 양왕에 봉해졌으며, 1296년에는 운남성 원강 변의 도적을 토벌했다. 1301년에는 운남성의 반란을 진압하고 1305년 운남행성사에 임명되었으나, 1309년 운남왕직에서 해임된 후 사망했다. 송산은 예순테무르 칸의 동생 혹은 이복 형이라는 설이 있으며, 그의 아들 왕선이 1320년에 운남왕 직위를 다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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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 (몽골)

2. 생애

송산은 쿠빌라이 칸의 손자인 진왕 카말라의 아들로, 정확한 출생년도와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카말라의 첩(이름 미상) 또는 정실 부인 부얀케르미시로 추정된다. 송산이 태어날 당시 증조부 대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생존해 있었다. 카말라의 아들로서 적차남, 혹은 서장자라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예순테무르 칸의 동생 또는 이복 형으로, 원사신원사의 기록에 따라 형제 관계에 차이가 있다. 델리겔부카는 송산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1]

송산은 1293년 운남왕에 봉해진 뒤 반란 진압과 통치 임무를 수행했다.[2][3] 1309년 건강 문제로 운남왕 직위에서 물러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권신 태평왕 옌테무르와의 싸움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제기된다.[10]

2. 1. 운남왕 봉작

1292년 혹은 1293년 황증손 자격으로 운남성에 출진하였으며, 증조부 쿠빌라이 칸이 자녀가 없는 종조부 노무간 대신 아버지 카말라를 진왕으로 교체 임명하고, 송산을 대신 운남왕과 양왕에 봉하고 왕인을 내려주었다.[2] 원래 쿠빌라이 칸의 여섯 번째 아들 후게치의 가족은 윈난 지역에 있었지만, 1293년에 쿠빌라이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후게치의 형 친킴의 아들인 다른 손자 카말라를 양왕으로 파견하였다.[3] 그런데 북방 몽골리아를 통할하던 북안왕 노무간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에, 카말라가 노무간의 후계자로서 몽골리아로 보내지게 되었고, 원래 카말라가 맡을 예정이었던 "양왕"의 지위는 아들 송산에게 넘겨지게 되었다.[4]

1296년(원정 2년) 겁설석(怯薛歹)에 임명되어 운남성 원강(元江)변의 도적을 토벌하였다.[6] 1301년(대덕 5년) 5월 운남성의 토관 송융제(宋隆濟)가 반란을 일으켰다. 파견된 행성평장정사 테우르(幢兀兒), 행성참지정사 부란카이(不蘭奚)와 함께 송융제를 토벌, 해산시켰다. 이때 500인의 수급을 베었다.[7]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인들이 비어를 만들어, 송산이 부참지설을 믿고 진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정에서는 유포자들을 색출해 복주하였다.

1305년 9월 원 성종 테무르는 조령을 내려 송산을 동시에 운남행성사(雲南行省事)에 임명하고, 동시에 초(鈔) 천정을 내려주어 위문하였다.[8][9] 그러나 송산은 억울해하고 즐기지 않았으며, 점차 풍질(風疾)이 심해졌다.

1309년(지대 2년) 운남왕직에서 해임되고, 원 무종 카이산은 오그룩치의 손자인 제왕 노딕칸(老的罕)을 대신 운남왕에 봉하고, 송산 대신 운남성을 진수하게 했다.[10] 송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일설에는 권신인 태평왕 옌테무르와 싸우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운남왕 직위는 1320년에 가서 그의 아들 왕선이 다시 임명되었다.

2. 2. 운남 통치와 반란 진압

1292년 혹은 1293년 황증손 자격으로 운남성에 출진하였으며, 증조부 쿠빌라이가 자녀가 없는 종조부 노무간 대신 아버지 카말라를 진왕으로 교체 임명하고, 송산을 대신 운남왕과 양왕에 봉하고 왕인을 내려주었다.[2] 원래 쿠빌라이의 여섯 번째 아들 후게치의 가족은 윈난 지역에 있었지만, 1293년에 쿠빌라이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후게치의 형 친킴의 아들인 다른 손자 카마라를 양왕으로 파견하였다.[3] 1296년(원정 2년) 겁설석(怯薛歹)에 임명되어 운남성 원강(元江)변의 도적을 토벌하였다.[6]

1301년(대덕 5년) 5월 운남성의 토관 송융제(宋隆濟)가 반란을 일으켰다. 파견된 행성평장정사 테우르(幢兀兒), 행성참지정사 부란카이(不蘭奚)와 함께 송융제를 토벌, 해산시켰다. 이때 500인의 수급을 베었다.[7]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인들이 비어를 만들어, 송산이 부참지설을 믿고 진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정에서는 유포자들을 색출해 복주하였다.

1305년 9월 원 성종 테무르는 조령을 내려 송산을 동시에 운남행성사(雲南行省事)에 임명하고, 동시에 초(鈔) 천정을 내려주어 위문하였다.[8][9] 그러나 송산은 억울해하고 즐기지 않았으며, 점차 풍질(風疾)이 심해졌다.

1309년(지대 2년) 운남왕직에서 해임되고, 원 무종 카이산은 오그룩치의 손자인 제왕 노딕칸(老的罕)을 대신 운남왕에 봉하고, 송산 대신 운남성을 진수하게 했다.[10] 송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일설에는 권신인 태평왕 옌테무르와 싸우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운남왕 직위는 1320년에 가서 그의 아들 왕선이 다시 임명되었다.

2. 3. 운남왕 지위 반납과 죽음

1293년 황증손 자격으로 운남성에 출진하였으며, 증조부 쿠빌라이는 자녀가 없는 종조부 노무간 대신 아버지 카말라를 진왕으로 교체 임명하고, 송산을 대신 운남왕과 양왕에 봉하고 왕인을 내려주었다.[2] 원래 쿠빌라이의 여섯 번째 아들 후게치의 가족은 윈난 지역에 있었지만, 1293년에 쿠빌라이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후게치의 형 친킴의 아들인 다른 손자 카마라를 양왕으로 파견하였다.[3] 1296년(원정 2년) 겁설석(怯薛歹)에 임명되어 운남성 원강(元江)변의 도적을 토벌하였다.[6]

1301년(대덕 5년) 5월 운남성의 토관 송융제(宋隆濟)가 반란을 일으켰다. 파견된 행성평장정사 테우르(幢兀兒), 행성참지정사 부란카이(不蘭奚)와 함께 송융제를 토벌, 해산시켰다.[7] 이때 500인의 수급을 베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인들이 비어를 만들어, 송산이 부참지설을 믿고 진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정에서는 유포자들을 색출해 복주하였다.

1305년 9월 원 성종 테무르는 조령을 내려 송산을 동시에 운남행성사(雲南行省事)에 임명하고, 동시에 초(鈔) 천정을 내려주어 위문하였다.[8][9] 그러나 송산은 억울해하고 즐기지 않았으며, 점차 풍질(風疾)이 심해졌다.

1309년(지대 2년) 운남왕직에서 해임되고, 원 무종 카이산은 오그룩치의 손자인 제왕 노딕칸(老的罕)을 대신 운남왕에 봉하고, 송산 대신 운남성을 진수하게 했다.[10] 송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일설에는 권신인 태평왕 옌테무르와 싸우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운남왕 직위는 1320년에 가서 그의 아들 왕선이 다시 임명되었다.

3. 가계

송산쿠빌라이 칸의 손자인 진왕 카말라의 아들로, 생년월일과 출생지는 전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카말라의 정실 부인 부얀케르미시이거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첩이다. 송산은 카말라의 아들 중 한 명으로, 예순테무르 칸의 동생이라는 설과 카말라의 서장자로 예순테무르 칸의 이복 형이라는 설이 있다. 송산이 태어날 무렵에는 증조부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이 생존해 있었다.

1292년 혹은 1293년 황증손 자격으로 운남성에 출진하였으며, 증조부 쿠빌라이가 자녀가 없는 종조부 노무간 대신 아버지 카말라를 진왕으로 임명하고, 송산을 운남왕과 양왕에 봉하고 왕인을 내려주었다.

가계는 다음과 같다.

윗대아랫대
예순 테무르 카안(태정제)라키파크 카안(천순제)
예순 테무르 카안(태정제)진왕 파드마갸르포
예순 테무르 카안(태정제)소세 태자
예순 테무르 카안(태정제)욘단 장보 태자
송산양왕 온샨
양왕 온샨운남왕 테무르 부카
상녕왕 델게르 부카상녕왕 바라시리


3. 1. 진왕 카말라 가문

송산쿠빌라이 칸의 손자이자 진왕 카말라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카말라의 정실 부인 부얀케르미시이거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첩이다. 송산은 카말라의 아들 중 한 명으로, 예순테무르 칸의 동생이라는 설과, 카말라의 서장자로 예순테무르 칸의 이복 형이라는 설이 있다. 《원사》 107권에는 송산이 원 현종 카말라의 장남이지만 서장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원사》 115권에서는 카말라의 아들 예순테무르가 장남이고, 송산은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신원사》에는 진종 예순테무르 칸이 카말라의 장남이고, 송산은 차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사》와 《신원사》 모두 델게르 부카를 송산의 동생으로 지목한다.[1]

1293년, 아버지 카말라가 "량왕"의 지위를 받아 윈난으로 파견되었으나, 북방 몽골리아를 통치하던 북안왕 노무간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카말라가 몽골리아로 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원래 카말라가 맡을 예정이었던 "량왕"의 지위는 아들 송산에게 넘겨졌다.[2][3]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량왕이 된 송산을 위해 조정에서는 과거 후게치를 섬기며 윈난 행정에 관여했던 장립도를 송산의 보좌로 파견했다.[4]

가계는 다음과 같다.

윗대아랫대
세첸 카안(세조 쿠빌라이)황태자 진김
황태자 진김진왕 카말라
진왕 카말라예순 테무르 카안(태정제)
진왕 카말라송산
진왕 카말라상녕왕 델게르 부카


참조

[1] 서적 元史
[2] 서적 元史
[3] 서적 元史
[4] 서적 元史
[5] 서적 元史
[6] 서적 元史
[7] 서적 元史
[8] 서적 元史
[9] 서적 元史
[10] 서적 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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