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그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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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그룩치는 쿠빌라이 카안의 서자로, 1269년 서평왕에 봉해져 티베트 동부에 자신의 울루스를 형성했다. 그는 티베트, 윈난, 쓰촨 지역의 정복 임무를 수행했으며, 군가 삼포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에도 원나라 왕족으로서 하사를 받았으나, 1306년 이후 기록에서 사라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들들은 서평왕가와 진서무정왕가문을 형성했다.

오그룩치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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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출생1243년
사망1304년
봉호서평왕
존호현명보국민안정원공정덕치공신(顯明輔國安民靖遠功定德致功臣)
가계
아버지쿠빌라이 칸
어머니쿠이 린지(奎林吉)
배우자불합한씨(不合罕氏), 노신공주(魯辛公主)
자녀테무르 부카
생애
즉위1292년 (음력 12월)
주요 경력위왕(魏王)
태위(太尉)
중서령(中書令)
서평왕
시호무정(武定)
기타
종교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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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초기

오그룩치는 쿠빌라이의 측실인 도르벤 부족 출신의 도르베진 하툰에게서 태어났으며, 동모형제로는 운남왕 후게치가 있었다. 지원 6년(1269년), 형들인 친킴, 만갈라, 노무간, 후게치 등이 각각 연왕, 안서왕, 북평왕, 운남왕에 봉해져 자신의 울루스를 형성한 데 이어, 오그룩치도 서평왕에 임명되었다. 『집사』 "쿠빌라이 칸 기"에는 "쿠빌라이 칸은 티베트 지방을 그에게 위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오그룩치는 티베트 동부에 자신의 울루스(서평왕국)를 형성하였다. 서출이었던 후게치, 오그룩치 등의 소유지는 친킴 등 적출자의 왕국보다 비교적 소규모였으며, 안서왕 만갈라의 통령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원 9년(1272년), 쿠빌라이는 오그룩치에게 티베트, 운남, 사천의 충돌 지대에 해당하는 가인두/건도(현재의 시창시)를 정복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오그룩치는 사천행성의 예스델을 시작으로, 망구다이, 스게, 유은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출발했다. 같은 해 쿠빌라이로부터 쌀을 지급받았다.

지원 10년(1273년), 오그룩치는 예스델 등과 함께 가인두를 공략하여 추장 하제 등 4명을 포획하고, 그 백성 600명을 지배하에 두었다.

2.1. 출생과 가계

오그룩치는 쿠빌라이 카안의 서자였다. 《원사》, 《원사연의》에는 7번째 아들,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는 8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5남으로 지목된 서자 코코다이가 친킴, 도르지보다도 연상일 가능성이 있어 형제간 연령 추정은 다소 어렵다. 오그룩치의 출생 연도와 생일, 출생지는 미상이다.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 따르면 오그룩치는 쿠빌라이 칸의 측실인 도르벤 부족 출신 도르벤 카툰에게서 태어났으며, 친형제로는 운남왕 후게치가 있었다고 한다.

오그룩치의 어린 시절과 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의 성격, 외모에 대한 기록도 없다.

2.2. 유년 시절

오그룩치는 쿠빌라이 카안의 서자였다. 《원사》, 《원사연의》에 의하면 7번째 아들,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 의하면 8번째 아들이라 한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5남으로 지목된 서자 코코다이가 친킴, 도르지보다도 연상일 가능성이 있어 형제간 연령 추정은 다소 어렵다. 오그룩치의 출생년도와 생일, 출생지는 미상이다.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 따르면 오그룩치는 쿠빌라이 칸의 측실인 도르벤 부족 출신 도르벤 카툰 소생으로, 친형제로는 운남왕(雲南王) 후게치(忽哥赤 Хөхэчи)가 있었다고 한다.

오그룩치의 어린 시절과 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성격, 외모에 대한 기록도 없다. 《원사》 137권 열전 제24 차간(察罕) 편에 의하면, 오그룩치는 어느 시점에 호광(湖廣)지역에 출진하여 진수를 맡아보기도 했다. 오그룩치는 차간을 몽골인 만호부 지사와 평장으로 중용했다 한다. 그런데 오그룩치가 언제 호광지역에 출진했는지는 불분명하다.

3. 서평왕 책봉과 통치

쿠빌라이 칸의 측실 돌벤부 출신 돌베진 하툰에게서 태어났으며, 동모형제로는 후게치가 있었다. 친킴, 만갈라, 노무간, 후게치 등은 각각 연왕, 안서왕, 북평왕, 운남왕에 봉해져 자신의 울루스를 형성했고, 아울루크치는 1269년 서평왕에 임명되었다.

1272년, 쿠빌라이의 명으로 티베트, 운남, 사천의 충돌 지대에 있는 가인두/건도(현재의 시창시)를 정복하기 위해 사천행성의 예스델, 망구다이, 스게, 유은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출발했다. 1273년 예스델 등과 함께 가인두를 공략, 추장 하제 등 4명을 포획하고 백성 600명을 지배하에 두었다.

1275년, 제사 파크파가 티베트 본국으로 돌아갈 때 몽골 지배에 불만을 품은 군가 삼포가 반란을 일으키자(군가 삼포의 난), 쿠빌라이는 안서왕 만갈라, 지비크 테무르, 부마 장기에게 명하여 몽골 군사를 아울루크치에게 파견하게 했다. 아울루크치는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군가 삼포의 난을 평정했다.

이후 아울루크치의 군사 활동 기록은 줄어들고, 1279년, 1280년, 1282년, 1286년에 쿠빌라이에게 하사를 받았다는 기록만 있다. 1293년 장방서가 서쪽으로 원정할 때 군세를 제공했다.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하자, 차기 칸을 결정하는 상도 쿠릴타이에 아들 테무르 부카, 이제르 부카와 함께 참석했다. 1295년 추베이가 이끌던 탐마치를 통솔하라는 명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상도 개평부에서 신제 테무르와 함께 행동했다.

아울루크치는 왕족으로서 정기적으로 하사를 받았으나, 1306년 이후 사료에 나타나지 않아 이때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1. 서평왕 책봉

1269년 10월 29일, 오그룩치는 서평왕(西平王)에 봉해지고, 부황(父皇)에게서 타류옥금은인(驼纽鋈金银印, 낙타, 사슴 또는 영양을 새기고 금으로 도금한 은 도장)을 하사받았다. 일설에는 1269년 6월에 서평왕에 봉해졌다고도 한다.

오그룩치는 군단급 부대인 케식(怯薛)을 받았으며, 그의 부하이자 대리인이자 또 다른 케식 지휘관으로 나카이(那懷)가 임명되었다.

3.2. 티베트 원정과 통치

1269년 10월 29일, 오그룩치는 서평왕(西平王)에 봉해지고 부황으로부터 타류옥금은인(驼纽鋈金银印, 낙타와, 사슴 또는 영양을 새기고 으로 도금한 도장)을 받았다.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는 쿠빌라이 칸이 티베트 지방을 그에게 위임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이후 오그룩치는 티베트 동부에 자신의 울루스(서평왕국)를 형성하게 된다. 서출이었던 후게치와 오그룩치 등의 소유 영지는 친킴 등 쿠빌라이 카안의 적자들의 왕국보다는 비교적 소규모였고, 안서왕 망갈라의 통령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그룩치에게는 군단급 부대인 케식(怯薛)이 주어졌고, 그의 부하이자 대리인이며 또다른 케식의 지휘관으로 나카이(那懷)가 딸려보내졌다.

1272년 1월 17일, 오그룩치는 부황의 명을 받들어 현대의 티베트 ・ 윈난(雲南) ・ 쓰촨(四川)의 절충지대에 해당하는 가인두(建都) 공격에 나섰다. 이때 제왕 아로 테무르(阿鲁帖木儿)、툴게(秃哥),남평왕(南平王) 툴룩(秃鲁) 등이 각기 부속을 거느리고, 사천행성의 아수타르(也速帶兒) 부족 등도 오그룩치를 따랐다. 쿠빌라이 카안은 그에게 마가궁시(馬價弓矢)를 하사했다. 곧 도원수(都元帥) 사천행성(四川行省)의 예수데르(也速答儿)와 망구다이(忙古带), 수게, 유은(劉恩) 등 여러 장군들과 그들이 거느린 욕속공배(欲速公弄) 등 토번(吐蕃) 18개 부족(部族)의 병사들이 모두 오그룩치의 절도를 받게 되었다. 같은 해에 쿠빌라이로부터 쌀을 지급받기도 하였다.

1273년 오그룩치는 예수데르 등과 함께 가인두를 공략해, 10월 추장 하제(下济) 등 네 명을 생포하였고 그 백성 6백 명을 복속, 원나라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가인두가 항복하자 망구다이를 그곳에 머물러두게 해서 신구(新舊)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지키도록 하였다. 이후 그는 가인두를 근거지로 하여 티베트 동부 지방을 다스렸다.

1275년 3월 1일 부황의 명으로 토번(吐蕃) 원정에 출정했다. 쿠빌라이 카안은 만집중(萬執中), 당영견(唐永堅), 아시간(阿失罕) 등과 장군, 청병 천여 명을 같이 파견했다. 1275년 3월 4일 안서왕(安西王) 망갈라(忙哥剌)、제왕 지빅테무르(只必帖木儿)、부마(驸马) 찬기르(昌吉) 등이 오그룩치를 지원하기 위해 추가 파견되었다.

이후 오그룩치의 군사 행동에 관한 기록은 줄어들게 되며, 1279년, 1280년, 1282년, 1286년에 오그룩치에게 쿠빌라이로부터 물품이 하사되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3.3. 두아와의 교전

1285년 제왕 아지키(阿只吉)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와 맞서 싸웠으나 소득이 없었다. 두아는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 편에 서서 쿠빌라이 카안을 공격하였다. 1293년 오그룩치는 자신의 부하 9천 명을 만호 장방서(张邦瑞)에게 주어 서쪽으로 두아를 치게 하였다.

1293년 10월 2일 저녁 륙판산에 있던 원나라 군사 1천 명과 오그룩치의 군사 1만 명이 다시 서부를 원정, 카이두를 상대로 교전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4. 생애 후반

오그룩치는 쿠빌라이의 측실 돌벤부 출신 돌베진 하툰에게서 태어났으며, 동모형제로는 운남왕 후게치가 있었다. 1269년 서평왕에 임명되었고, 티베트 동부에 자신의 울루스(서평왕국)를 형성했다. 서출이었던 오그룩치의 소유지는 친킴 등 적출자의 왕국보다 비교적 소규모였으며, 안서왕 만갈라의 통령 하에 있었다.

1272년, 쿠빌라이의 명으로 티베트, 운남, 사천의 충돌 지대에 해당하는 가인두/건도(현재의 시창시) 정복에 나섰다. 사천행성의 예스델, 망구다이, 스게, 유은 등 여러 장수를 이끌었으며, 같은 해 쿠빌라이로부터 쌀을 지급받았다.

1273년, 예스델 등과 함께 가인두를 공략하여 추장 하제 등 4명을 포획하고 백성 600명을 지배하에 두었다. 1275년, 군가 삼포가 몽골 지배 체제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군가 삼포의 난), 쿠빌라이는 안서왕 만갈라, 지비크 테무르, 부마 장기에게 명하여 몽골 군사를 원군으로 보내게 했다. 오그룩치는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이 난을 평정했다.

이후 오그룩치의 군사 행동에 관한 기록은 줄어들고, 1279년, 1280년, 1282년, 1286년에 쿠빌라이로부터 하사를 받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1293년, 장방서가 서방 원정에 나설 때 군세를 제공했다.

4.1. 쿠릴타이 참석과 테무르 즉위 지원

1294년 1월,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자, 다음 대칸을 결정하기 위한 상도(上都)에서의 쿠릴타이에 오그룩치는 그의 아들 테무르부카, 이지르부카와 함께 참석하였다. 이듬해인 1295년에는 제왕(诸王) 추바이(出伯)가 거느리고 있던 탄마치(探马赤), 적예군(红祆军) 각 5천 명을 그의 휘하에 예속시켰다. 같은 해, 용북도염방사(龍北道廉访司)가 장방서(張邦瑞)를 체포하려 하자, 오그룩치는 장방서를 비호하고 피신시켰으며, 원 성종은 명을 내려 장방서를 체포하게 했다. 1296년에는 황명으로 상도개평부(上都開平府)에 소환되어, 새로운 대칸(황제) 테무르와 행동을 함께 하였다.

4.2. 사망

1306년(대덕 10년) 11월 이후 사료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이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망 원인과 사망 장소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5. 사후

그의 사망 기록과 사망 원인, 장례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때 그가 1303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원사에는 1304년 4월원 성종에게 초 1만 정을 하사받은 기록이 등장한다. 아들 파디마지카 혹은 이질부카가 서평왕위를 계승했고 쿵부판(巩卜班)으로 이어진다. 오그룩치의 시호 여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들 테무르부카는 티베트 개주(阶州, 지금의 감숙성 룽난시 우두구)의 영지를 하사받고 1297년 진서무정왕에 봉해졌다. 그의 자손들은 서평왕가와 진서무정왕가문을 형성하였다. 손자 중 1명인 아나트라시리는 섬서성 일대의 영지를 받고 서안왕(西安王)에 봉해졌다.

6. 자손

원사》와 《집사》에는 오그룩치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남은 테무르 부카로, 그의 가계가 오그룩치 울루스 당주 자리를 계승했다. 차남의 이름은 사료에 따라 다른데, 《집사》에는 '이지르부카', 《원사》에는 '바데마데자'로 기록되어 있다. '바데마데자'는 티베트어에서 유래한 별명일 가능성이 있다.

6.1. 테무르부카

오그룩치의 장남의 이름은 《원사》에서는 톄무얼 부화(鐵木児不花, tiĕmùérbùhuā), 《집사》에서는 팀ურ 부카(tīmūr būqā)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어느 쪽이나 테무르 부카(Temür Buqa)라는 이름을 표기한 것이다. 오그룩치 울루스의 군주 자리는 기본적으로 테무르 부카의 가계로 이어지게 된다. 테무르 부카 본인은 원 왕조에서 진서무정왕(镇西武靖王)에 봉해졌다.

6.2. 이지르부카(바데마데자)

오그룩치의 차남 이름에 대해 《원사》는 '바데마데자', 《집사》는 '이지르부카'로 기록하여 일치하지 않는다. 《집사》에 기록된 「이지르부카」가 본명이고, 《원사》에 기록된 「바데마데자」는 티베트어에서 유래한 별명일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