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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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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무간은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의 아들로, 막내 상속 제도에 따라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다. 1266년 북평왕에 봉해져 몽골 고원에서 군사를 통괄했으며, 차가타이 칸국 원정에 나섰으나 반란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귀국 후 북안왕에 봉해졌지만, 카이두와의 전투에서 활약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군대는 조카 카마라에게 계승되었고, 사후에는 귀정왕, 소정왕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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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간

2. 생애

몽골의 막내 상속 제도에 따라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가능성이 높은 적자 중 막내였기 때문에, 쿠빌라이의 유력한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지원 3년(1266년)에는 북평왕(北平王) 칭호를 받고 쿠빌라이의 북방 대리인으로서 몽골 고원에 주둔하며, 고원의 모든 유목민 군단을 통솔하고 칭기스 칸의 제사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노무간의 주요 군사적 임무는 알타이 산맥 서쪽의 오고데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울루스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카안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원 12년(1275년), 쿠빌라이의 중앙 정부 고관인 중서우승상 안톤과 함께 중앙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노무간은 고원의 여러 왕족을 이끌고 차가타이 칸국의 본거지인 일리 강 계곡으로 침입하여 중심 도시 알마리크에 주둔했다.

그러나 지원 13년(1276년) 여름, 원정에 동행했던 사촌 시리기 등이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과 안톤을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알마리크의 북평왕 군대는 와해되었고, 노무간은 시리기에 의해 조치 울루스로 넘겨져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시리기의 반란은 쿠빌라이에 의해 진압되었고, 노무간은 지원 19년(1282년) 석방되어 아버지 쿠빌라이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 노무간은 북안왕(北安王) 칭호를 받고 다시 몽골 고원 주둔 명령을 받았지만, 몽골 고원 방면의 군사적 주도권은 중앙에서 파견된 바얀에게 넘어갔다. 이후 노무간은 카이두와의 전투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몇 년 안에 사망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북안왕가는 1대에서 단절되었고, 그의 군대는 지원 28년(1291년) 진왕(지논)에 봉해진 조카 카마라에게 계승되었다.

2. 1. 생애 초반

노무간의 정확한 출생년월일과 출생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카안과 소예순성황후 차브이 카툰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툴루이 칸이고, 증조부는 칭기즈 칸이다. 그는 쿠빌라이 카안의 정실 황후 소생으로는 넷째 아들이며, 일찍 세상을 떠난 도르지(朵儿只), 태자 친킴(眞金), 안서왕 망갈라(忙哥剌)의 동복 동생이었다.

그의 이름은 한자로 나목한(那木罕), 나목간(那木干), 낙목간(諾木干), 남목합(南木合)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으며, 당대에는 주로 낙목간(諾木干)으로 불렸다. 『원사』(元史)에서도 그의 이름을 나목한, 나목간, 남목합 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일부 판본에는 오기로 남술합(南朮合), 나몰간(那沒罕)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노무간의 성격이나 어린 시절, 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노무간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책' 또는 '경전'을 의미하는 Ном|노무mn와 '강함' 또는 '가뭄'을 뜻하는 ган|간mn이 합쳐진 것이다. 페르시아계 역사서인 『집사』(集史)에는 그의 이름이 نوموغانfa로 기록되어 있다.

1248년, 노무간은 아버지 쿠빌라이 카안의 명으로 형제들과 함께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 칭기즈 칸의 친위대원 아들이자 보르테 카툰의 시종이었던 집안의 자제 볼라드 등 다른 귀족 자제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그의 결혼 여부에 대해서는 『원사』, 『원사연의』(元史類編), 『신원사』(新元史) 등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몽골 제국의 전통적인 막내 상속 제도에 따라, 노무간은 부모의 재산을 가장 많이 상속받을 수 있는 적자 중 막내였기에 한때 아버지 쿠빌라이 칸의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여겨졌다. 지원 3년(1266년), 그는 북평왕(北平王)에 봉해져 쿠빌라이 칸을 대신하여 북방 지역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몽골 민족의 본거지인 몽골 고원에 주둔하며 고원에 있는 모든 유목민 군단을 통솔했다. 노무간의 왕부(王府)는 옛 수도인 카라코룸 근교의 목지를 따라 유목 생활을 했으며, 칭기스 칸의 4대 오르도에서 거행되는 제사를 관리하는 책임도 맡았다.

북평왕으로서 노무간의 주요 군사적 임무는 알타이 산맥 서쪽에 위치한 오고데이 울루스(오고데이 가문)와 차가타이 칸국(차가타이 가문)의 울루스(국가)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카안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지원 12년(1275년), 쿠빌라이 칸은 중앙 정부의 고위 관료인 중서우승상 안톤을 노무간에게 파견하여 중앙아시아 원정을 지원하게 했다. 노무간은 몽골 고원의 여러 왕족들을 이끌고, 당시 칸의 자리를 둘러싼 내부 혼란을 겪고 있던 차가타이 가문의 본거지인 일리 강 유역으로 진격하여 중심 도시인 알마리크에 주둔했다.

그러나 지원 13년(1276년) 여름, 원정군에 참여했던 노무간의 사촌 시리기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으로 노무간과 안톤은 포로로 잡혔고, 알마리크에 주둔하던 북평왕의 군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2. 2. 정치, 군사 활동

1264년 8월 15일 설서관(說書官)이 되었다. 같은 해 쿠빌라이 칸은 고도취(高道就)를 보내 노무간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했다. 1265년 6월 6일 혹은 1266년 6월, 아버지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북평왕(北平王)에 봉해지고 낙뉴금인(螭紐金印)을 하사받았다. 영지로는 과거 북평왕의 영지였던 허베이성(河北省) 일부가 주어졌다. 이 영지는 본래 칭기즈 칸의 공신 아라쿠사 디기투클의 동생 비누이의 아들 셍군(鎮国), 셍군의 아들이자 툴루이의 딸 투무겐 공주의 남편 네구데이(聂古角+得), 그리고 칭기즈 칸과 보르테의 딸 알라야 베키의 남편 파르카에게 수여되었으나 이후 상속인이 없던 곳이었다.

1266년 노무간은 쿠빌라이 영토의 북방 대리인이 되어 막북(漠北)의 카라코룸 근처로 파견되었다. 그는 몽골 민족의 본거지인 몽골고원고비 사막 이북 고원에 흩어져 있던 전통적인 천호군(千戶軍)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고원 전체 유목민 군단의 병마를 관리하고 총괄했다. 또한 카라코룸 근처의 영지를 다스리며 칭기즈 칸과 그의 4대 조상의 제사를 관리했다. 그는 옛 수도 카라코룸과 그 주변 지역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아, 이전의 오고타이처럼 고비 이북과 몽골고원을 오가며 계절 이동을 했다.

같은 해 1266년, 쿠빌라이 칸은 노무간을 아리크 부케 토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군사 3천 명을 주었다. 노무간은 여러 왕족, 부족장, 몽골 본토의 천호 집단으로 구성된 몽골 기마군을 이끌고 카이두와 쿠빌라이 칸 사이의 전쟁에 참여했다. 아리크부카1266년 7월 또는 8월에 항복했지만,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는 자신을 아리크부카의 계승자로 선언하며 쿠빌라이 칸에게 계속 저항했다. 1267년, 노무간은 아리크부카의 지지자였던 카이두 군대가 카라코룸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북방으로 파견되어 교전했다. 그의 주요 군사 임무는 알타이산맥 서쪽에 위치한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울루스(국가)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카안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1267년 3월, 세조 쿠빌라이 칸은 연왕 친킴, 망갈라(忙阿剌), 노무간(那沒罕), 후게치(忽哥赤) 등에게 은(銀) 3만 냥을 하사했다. 같은 해, 쿠빌라이 칸은 노무간에게 6만 명의 군사를 주어 서북쪽의 알말리크를 공략하게 했다. 그해 여름, 노무간은 알말리크 일대를 점령하고 그곳을 주둔지로 삼았다. 1268년,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가 군대를 이끌고 카라코룸을 공격했다. 노무간의 군대는 카이두 군대의 주둔지에서 15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여 3일 후 교전을 벌였다.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쿠빌라이 카안은 추가 병력을 파견했다. 쿠빌라이의 증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카이두는 도주했다. 같은 해, 쿠빌라이 카안은 노무간에게 갑옷 1천 벌을 보내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도록 했다.

1271년, 쿠빌라이의 명령으로 차가타이 칸국의 칸 네구베이를 공격했다. 그러나 네구베이는 곧 카이두와 서로 공격하며 교전하다가 전사했다. 노무간의 병력은 수적으로 카이두보다 우세했지만 패배했다. 1272년 12월 혹은 1273년 1월, 쿠빌라이 카안은 그에게 양과 갑옷 1천 벌을 하사했다.

1273년 2월, 쿠빌라이 카안이 친킴을 황태자로 정했으나, 노무간은 칸의 자리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1273년 12월 1일, 쿠빌라이 카안의 명으로 보오르추(孛兀兒出)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같은 달 차가타이 한국의 네구베이와 교전하고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금(金), 은(銀), 폐(幣), 백(帛) 등을 상으로 받았다.

몽골의 막내 상속 제도에 따라 적자 중 막내였던 노무간은 쿠빌라이의 유력한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지원 3년(1266년) 북평왕 칭호를 받고 쿠빌라이의 북방 대리인이 되어 몽골 고원에 주둔하며 고원의 모든 유목민 군단을 통솔했다. 그의 왕부는 옛 수도 카라코룸 근교의 목지를 따라 유목하며 이동했고, 칭기스 칸의 4대 오르도에서 거행되는 칭기스 칸 제사를 관리했다.

노무간의 주요 군사 임무는 알타이 산맥 서쪽의 오고데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울루스에 군사적 압력을 가해 카안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지원 12년(1275년), 쿠빌라이의 중앙 정부 고관인 중서우승상 안톤을 대동하고 중앙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노무간은 고원의 여러 왕족들을 이끌고, 당주 자리를 놓고 혼란이 계속되던 차가타이 가문의 본거지인 일리 강 계곡에 침입하여 중심 도시인 알마리크에 주둔했다.

그러나 지원 13년(1276년) 여름, 원정에 동행했던 노무간의 사촌 시리기 등이 군대 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노무간과 안톤은 체포되었고, 알마리크에 주둔하던 북평왕 군대는 와해되었다. 노무간은 시리기에 의해 조치 울루스로 넘겨져 중앙아시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리기의 기대와 달리 조치 울루스는 노무간의 신병을 확보했음에도 시리기를 지원하지 않았고, 쿠빌라이에게 공개적으로 반항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리기의 반란은 쿠빌라이에 의해 진압되었다. 지원 19년(1282년), 노무간은 석방되어 아버지 쿠빌라이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귀국 후 노무간은 북안왕(北安王) 칭호를 받고 다시 몽골 고원에 주둔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몽골 고원 방면의 군사적 주도권은 중앙에서 파견된 바얀이 이끄는 군대에게 넘어갔다. 노무간은 이후 카이두와의 전투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몇 년 안에 사망했다. 노무간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북안왕가는 1대에서 단절되었고, 그의 군대는 지원 28년(1291년) 진왕(지논)에 봉해진 조카 카마라에게 계승되었다.

2. 3. 체포와 킵차크 감금, 탈출

1275년 7월 쿠빌라이 카안의 명으로 승상 안통, 이복동생 코코추, 아리크 부케의 아들 요부쿠르(藥木忽兒), 몽케 칸의 손자 사르반(撒里蛮) 등과 함께 카이두 정벌에 출정했다. 당시 차가타이 한국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을 이용하여 차가타이 한국 원정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리강(현, 신장위구르자치구) 유역 말리크에 주둔하던 중, 1277년 7월 몽케 칸 계열 왕족인 시리기 등이 일으킨 진중 반란으로 요부쿠르, 살리만 등에게 코코추와 함께 야간에 피랍되었다.

노무간과 안톤 등은 반란군에 의해 킵차크 칸국으로 끌려가 감금되었다. 이 사건으로 알말리크에 있던 북평왕부의 군대는 사망하거나 도주하는 등 사실상 와해되었다. 반란 중 탈출에 성공한 장군 쿠루타이(忽魯帶)는 카라코룸으로 이동하여 중서우승상 바얀의 군대에 합류했고, 진중 반란 사실을 보고했다.

노무간은 조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시리기의 기대와는 달리 조치 울루스는 노무간의 신병을 확보했음에도 시리기에 대한 원조를 하지 않았고, 쿠빌라이에게 공개적으로 반항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시리기의 반란은 결국 쿠빌라이에 의해 진압되었다. 노무간은 억류되어 있다가 1278년 킵차크 한국을 탈출하였다.

1282년 1월 1일, 노무간은 마침내 석방되어 귀국길에 올랐다. 대도에 도착하기 전, 쿠빌라이 카안이 보낸 사자의 명을 받고 차라쿠(札剌忽)에게 가 카이두에게 협력한 이유를 추궁하기도 했다. 1282년 1월 대도로 돌아와 아버지 쿠빌라이 칸을 만났으나, 쿠빌라이 칸은 노무간에게 크게 진노하였다. 반란을 주도했던 시리기는 체포된 후 후회하였으나, 결국 고려대청도로 유배되었다.

2. 4. 탈출 및 귀환 이후

1282년 시리기의 반란이 진압된 후, 조치 울루스에 억류되어 있던 노무간은 석방되어 아버지 쿠빌라이 칸에게 돌아왔다. 귀국 후 노무간은 북안왕(北安王)의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1284년 음력 윤 5월 16일 또는 1282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다시 몽골 고원에 주둔하라는 명을 받았다.

1284년 3월, 노무간과 함께 억류되었던 부하 장수들이 석방되어 귀환했다. 같은 해 3월 8일, 노무간과 승상 안통(安童)은 자청하여 북쪽 국경 지대로 나아갔다. 6월 19일에는 노무간의 휘하 케식에 겁련구(怯憐口) 10,246명, 말 10,195마리, 양 10,060마리가 하사되었다. 12월 12일, 노무간은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로 가서 북안왕의 지위와 함께 낙타 손잡이 모양의 금 도장인 낙뉴금인(駱紐金印)을 받고 북쪽 국경으로 출정하였다. 이때 추가로 허난 성과 산시성 장안(현 시안) 일대를 영지로 받았다.

1286년 1월, 노무간은 하남행성의 제원(济源)으로 파견되어, 쿠빌라이 칸을 대신하여 오악의 산신과 황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악독(岳渎) 제사에 참석했다. 그해 노무간은 자신이 태자로 책봉되기를 원하며 승상 안통을 공격했지만, 쿠빌라이 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미 사망한 형 친킴의 아들 다르마발라를 후계자로 내정했다. 같은 해 임강로(臨江路)의 일부인 6만 5천 호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1287년 2월, 노무간은 다시 제원으로 파견되어 악독 제사를 주관했다. 그해 4월, 칭기즈 칸의 동생 벨구테이의 4대손이자 몽골 동부 지역의 영주였던 나얀이 계속된 일본 원정 실패 등에 불만을 품고 동방의 여러 왕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노무간은 나얀의 반란 진압에 출정했으나, 반란군의 서쪽 방면을 공격하다가 패배하였다. 10월에는 북안도총관부(北安都總管府)를 설치하고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은 노무간의 군권 상당 부분을 바얀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노무간은 생애 후반 몇 년간 카이두와의 전투 등 주요 정벌이나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몇 년 안에 사망했으며,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북안왕가는 1대로 단절되었다. 그의 군대는 1291년 진왕(지논)에 봉해진 조카 카마라에게 계승되었다.

2. 5. 대권 계승 실패와 최후

노무간은 형 친킴1286년 1월 5일 알콜중독으로 사망하자 대권을 기대했으나, 형수 코코진 카툰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다. 코코진 카툰은 쿠빌라이 카안과 원나라 대신, 몽골 부족장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아들 다르마발라가 황태자 지위와 계승권을 받도록 했다. 1290년에는 요부쿠르가 막북 고원에 있던 노무간을 기습 공격하기도 했다.

1291년 또는 1292년 12월, 아들이 없었던 노무간의 지위와 군대는 조카이자 친킴의 아들인 카마라에게 넘어갔다. 칭기즈 칸의 4대 오르도 역시 카마라에게 인계되었다. 과거 시리기의 반란 때 다른 왕족에게 포로로 잡혔던 사건은 그의 칸위 계승 경쟁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아들이 없다는 점 역시 약점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카이두와의 전쟁에서 점차 배제되었고, 중앙아시아 방면은 장군 바얀이 주도하게 되었다. 다르마발라가 병으로 사망하자, 코코진 카툰은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여 1293년 테무르가 황태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노무간의 정확한 사망 시기와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원사신원사 등 역사서에도 명확한 기록은 없다. 1292년 또는 1294년 음력 7월 4일에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설, 1298년 음력 7월 4일 사망설, 쿠빌라이 칸이 사망한 이후인 1301년에 사망했다는 설 등이 존재한다. 노무간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받은 북안왕 작위와 가문은 그의 대에서 단절되었고, 그의 군대는 1291년 진왕(지논)에 봉해진 조카 카마라에게 계승되었다.

3. 사후

원사(元史), 원사연의(元史演義), 신원사(新元史)에는 노무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그의 사람됨이나 인물평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노무간은 체포되었다가 돌아온 것을 이유로 1313년에 귀정왕(歸定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이후 1320년에 소정왕(昭定王)으로 시호가 개정되었다. 그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영지였던 카라코룸 일대는 카말라가 계승했고, 북평왕 작위는 부투쿠이(傅禿歸)에게 넘어갔다.

원 태정제 예순테무르가 즉위한 후, 1323년 11월 25일 태정제의 명으로 회복원(会福院) 내의 고량하사(高良河寺)에 그의 초상화가 봉안되었다. 이 초상화에는 '평왕 약목한(平王 諾木干)'이라고 쓰여 있다. 원사에는 그가 북평왕과 북안왕에 임명된 기록만 있을 뿐, 언제 한 글자 왕 작위인 '평왕'으로 승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노무간의 초상화는 현재 중국 베이징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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