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크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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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크부카는 1219년 몽골 카라코룸에서 태어난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로, 몽골 제국의 대칸 선출 과정에서 쿠빌라이 칸과 대립했다. 1259년 몽케 칸 사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이 되었으나, 쿠빌라이 칸과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1264년 항복했다. 이후 감금 생활을 하다 1266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사후 후손들은 일 칸국과 북원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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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크부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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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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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몽골 제국의 카간 |
재위 기간 | 1259년 8월 11일 – 1264년 8월 21일 |
이전 | 몽케 칸 |
이후 | 쿠빌라이 칸 |
전체 이름 | 이름: () |
출생지 | 몽골 제국 |
사망일 | 1266년 |
종교 | 텡그리 신앙 |
가계 | |
왕가 | 보르지긴 가문 |
아버지 | 톨루이 |
어머니 | 소르칵타니 베키 |
배우자 | 엘치크마쉬 카툰 쿠티크타 카툰 쿠틀루 카툰 이라그이 카툰 에시타이 카툰 |
자녀 | 요부쿠르 멜리크 템르 타마치 나이르부카 할루한 아하이 네구데르 아하이 노무한 아하이 |
2. 생애
톨루이와 그의 아내 소르칵타니 베키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막내)이다.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의 동생이며, 막내로서 주로 본거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아 전장 경험은 적었다. 1259년 맏형 몽케가 남송 원정 중 사망하자, 1260년 카라코룸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후계자로 카안에 즉위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또한 카안을 칭하며 몽골 제국은 두 명의 카안이 다투는 상황에 놓였다.
아리크부카는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두, 차가타이 한국의 오르가나를 아군으로 삼아 초반 우세를 점했으나, 화북 농경 지대의 물자를 바탕으로 북진하는 쿠빌라이에게 밀렸다. 기근으로 인한 자군의 괴멸 등 불운이 겹쳐 1264년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동생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살려줬지만, 2년 후 아리크부카는 병사했다.
이후 아리크부카의 자손 예스델이 1388년 쿠빌라이의 자손 토구스 테무르를 살해하고 카안위를 탈취하여 100년 만에 복수했다. 일 칸국에서도 아리크부카의 차남 멜리크 테무르의 증손 알파 케운이 군주위에 오른 적이 있다.
2. 1. 생애 초반
1219년 몽골 카라코룸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일은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와 그의 정실 소르각타니 베키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자, 툴루이의 일곱째 아들이었다. 맏형은 몽케 칸, 둘째 형 홀도도는 요절, 셋째 형은 생모가 불분명, 동복 형제로는 쿠빌라이 칸과 훌라구가 있었다.그의 이름은 '아리크 부카', '아리복스(Aribox)', '아리보거(Arigboge)' 등으로도 불렸다.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 기욤 드 뤼브룩의 동방 제국 여행기에는 '아랄부차(Arabuccha, 키릴 문자:Арабукха)'로, 페르시아어 사료에는 '아리즈 보카(اريغ بوكا)'로 나타난다. '아리크 부카'는 몽골어로 가느다란 황소, 날렵한 황소를 뜻한다.[1]
아리크부카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툴루이는 몽골군과 중국인 부대를 이끌고 칭기즈 칸의 호라즘 원정에 참여했다. 1227년 8월 툴루이는 몽골 제국 감국이 되었으나, 1229년 형 오고타이에게 칸 지위를 양보했다.[1]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다. 아리크부카는 텡그리즘과 샤머니즘을 믿었지만, 기독교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일설에는 기독교식 세례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 1232년 9월 혹은 10월, 아버지 툴루이가 알콜중독 혹은 오고타이 칸 대신 희생 제물로 바쳐져 죽자, 오고타이 칸은 쓰촨 성 주변 영지를 툴루이 가문에 주었다.[1]
1229년 여름 오고타이 선출 쿠릴타이와 1246년 7월 구유크 칸 선출 쿠릴타이에 참여했다. 1251년 툴루이 가문의 몽케 칸이 쿠릴타이를 통해 선출되었다.[1]
1250년 맏형 몽케 칸 즉위 후, 칭기즈 가문에서 툴루이 가문은 더욱 강력해졌다. 아리크부카는 쿠빌라이의 한화 정책에 반대하여 보수적 성향의 몽골 부족장들의 지지를 받았다.[1]
1254년 5월 몽골 제국을 방문한 프랑스 루이 9세의 특사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뤼부룩의 기욤 일행을 접견하고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1258년 2월 몽케 칸은 직접 남송 정벌군을 편성, 쿠빌라이를 대동하고 원정에 나섰다. 몽케 칸은 아리크부카에게 카라코룸과 막북 고원 일대를 지키게 하고, 장군 보로칸, 아란타르 등에게 그를 돕게 했다. 훌라구는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일 한국을 건설한다. 아리크부카는 막내아들이 고향을 지키는 몽골 전통에 따라 고향을 지켰기에 전쟁 경험은 부족했다.[1]
2. 1. 1. 출생과 가계
1219년 몽골 카라코룸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일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아리크부카는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이자, 1227년~1229년 몽골의 임시 대칸을 맡은 툴루이와 그의 정실 소르각타니 베키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다. 툴루이에게는 일곱째 아들이었다.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는 케레이트족 토그릴 옹 칸의 동생 자하감보의 딸이다. 맏형은 몽케 칸이고, 둘째 형 홀도도는 일찍 죽었고, 셋째 형은 생모가 불분명하였으며, 동복 형제로는 쿠빌라이 칸과 훌라구가 있었다.[1]그의 이름은 아리크 부카 또는 아리복스(Aribox), 아리보거(Arigboge) 등으로도 불린다.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 기욤 드 뤼브룩의 동방 제국 여행기에는 그의 이름이 아랄부차(Arabuccha, 키릴 문자:Арабукха)로도 나온다.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아리즈 보카(اريغ بوكا)로 나타난다. 아리크 부카는 몽골어로 가느다란 황소, 날렵한 황소를 뜻한다.[1]
아리크부카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툴루이 칸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국인, 몽골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할아버지 칭기즈 칸을 따라 호라즘 원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1227년 8월 툴루이는 몽골 제국의 감국이 되었으나, 1229년 자신의 형 오고타이에게 칸의 지위를 양보했다.[1]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는 동방에 전래된 기독교의 일파 네스토리우스파 신자였다. 아리크부카는 몽골의 종교 텡그리즘과 샤머니즘을 믿었지만, 후일 기독교에 대해 다소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일설에는 그가 기독교식 세례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 1232년 9월 혹은 10월 아버지 툴루이가 알콜중독 혹은 오고타이 칸 대신 희생제물로 바쳐져 죽자, 오고타이 칸은 쓰촨 성 주변의 영지를 툴루이 가문의 영지로 주었다.[1]
아리크부카의 어린 시절과 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1229년 여름, 오고타이를 선출하는 쿠릴타이와, 오고타이의 사후 1246년 7월 구유크 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에 그도 참여하였다. 오고타이의 아들이자 사촌 구유크 칸이 죽자, 1251년 툴루이 가문의 몽케 칸이 쿠릴타이를 통해 선출되었다.[1]
2. 1. 2. 청년기
형 몽케 칸은 중국화된 동생 쿠빌라이를 내심 불신하였고, 몽골의 보수적 부족장들은 쿠빌라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리크부카는 쿠빌라이의 한화(漢化) 정책에 반대하였다. 쿠빌라이의 중국문화 수용과 친중국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적 성향의 몽골 부족장들이 아리크부카 주위에 모였다. 아리크부카에게는 몽골고원 서부, 간쑤성 서북부, 신장위구르 자치주 동부, 나이만, 스루도스, 대대로 무당을 배출하는 콩고탄부 등이 울루스로 주어졌다.그밖에 아리크부카의 영역은 자브항, 고비 알타이, 호브드와 오브스, 바양 을기, 아르항가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동부 지방, 시베리아의 중부 지방, 알타이산맥 일대, 쿨룬다 일대, 발하슈호, 바이칼호수 주변, 서 시베리아 평원 일대가 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1254년 5월 그는 몽골 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루이 9세의 특사 프란시스코회 소속 수도사 뤼부룩의 기욤 일행을 접견했다. 아리크부카는 기독교에 다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몽케 카안의 재임 중, 프랑스의 루이 9세의 특사인 프란시스코회 소속 수도사 뤼부룩의 기욤의 기록에 나타난다. 뤼부룩의 기욤에 의하면 그는 아리크부카는 십자가 표시를 하고 "우리는 우리의 메시아(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했다.[6]
1258년 2월 몽케 칸은 직접 남송 정벌군을 편성하여, 쿠빌라이를 대동하고 원정길에 올랐다. 몽케 칸은 동생 아리크부카에게 카라코룸과 막북 고원 일대의 지키게 하고, 장군 보로칸(孛魯歡), 아란타르(阿藍答兒) 등에게도 그를 돕게 하였다. 다른 형 훌라구는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여기에 눌러앉아 일 한국을 건설한다. 아리크부카는 막내아들이 고향을 지키는 책임을 맡는 몽골 전통에 따라 고향을 지켰기에 전쟁 경험은 부족했다.
아리크부카는 소르칵타니 베키와 툴루이의 막내 아들이었으며, 툴루이는 칭기즈 칸의 막내 아들이었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했을 때 제국의 지도력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아리크부카의 삼촌)인 오고타이 칸에게 넘어갔다. 그는 삼촌인 대칸 오고타이와 오고타이의 후계자이자 맏아들인 구육 칸의 선거에 평화롭게 참여했다. 맏형 몽케가 1250년에 즉위한 후, 그의 가족은 칭기즈 가문에서 더욱 강력해졌다. 그의 어머니는 기독교인이었고 아리크부카 역시 기독교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프랑스 루이 9세의 사절인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루브룩의 윌리엄의 기록에서 알려졌다. 루브룩의 윌리엄은 아리크부카가 십자가를 긋고 "우리는 메시아[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관찰했다고 기록했다. 유교 교사가 아리크부카를 위해 마련되었는데, 이는 그의 형 쿠빌라이 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지만, 아리크부카는 형처럼 중국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다.[1]
2. 2. 칸위 계승 전쟁
1259년 몽케 칸이 사망하면서, 몽골 제국은 후계자 문제에 직면했다. 몽케 칸의 동생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는 각각 대칸 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이 경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몽골 제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몽케 칸이 남송 원정 중 쓰촨성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몽골고원의 수도 카라코룸을 지키던 막내 동생 아리크부카는 감국(監國) 자격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 지위를 얻었다. 몽케 칸의 아들들과 킵차크 한국의 베르케 칸, 차가타이 한국의 오르가나 카툰, 알루구 등이 그를 지지했다.
한편, 남송 원정에 참여했던 쿠빌라이는 1259년 군대를 돌려 내몽골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 지위에 올랐다. 이로써 몽골 제국에는 두 명의 대칸이 등장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두 형제 사이의 갈등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아리크부카가 우세했지만,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가 점차 유리해졌다. 1261년 말, 카이펑 북쪽 시무토노르 호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쿠빌라이가 승리했지만, 아리크부카는 오이라트 부족의 지원을 받으며 저항했다.
1261년 겨울, 아리크부카는 차가타이 한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알루구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아리크부카 군대는 초원 지대에 고립되어 식량과 무기 부족에 시달렸다. 1262년부터 아리크부카는 알말리크에 주둔하며 알루구와 전쟁을 벌였으나, 1263년 강화 사절로 보낸 마수우드베이가 알루구에게 귀순하는 등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결국 아리크부카는 1264년 8월 21일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동생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주었지만, 아리크부카는 2년 후 사망했다.
2. 2. 1. 쿠릴타이와 즉위
1259년 8월 몽골 제국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 쓰촨성에서 갑자기 병사하였다. 몽케 칸은 생전 후계자를 내정하지 못하고 죽었다. 몽골고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룸을 수비하던 막냇동생 아리크 부케는 감국(監國) 자격으로 몽골 왕족과 부족장을 카라코룸으로 소집, 몽케파 왕족과 차가타이 한국의 일부 귀족들을 모아 카라코룸 서쪽 오르콘강변에서 쿠릴타이를 20일간 열고,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이때 몽케 칸의 아들들, 킵차크 한국의 베르케 칸, 차가타이 한국의 오르가나 카툰, 알루구 등이 참여하였다.[2]원사 권4 세조본기에 의하면 1259년 11월 14일 선황 몽케 칸의 측근인 아란타르(阿藍答兒), 혼도하이(渾都海), 토쿠즈(脫火思), 토리치(脫里赤) 등이 모의하여 아리크부케를 칸으로 추대했다 한다. 바로 아란타르는 고비 사막 이북 막북 고원의 제부족 병력을, 토리치는 막남지역의 몽골 영역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혼도하이는 야율초재의 손자 야율희량(耶律希亮) 등 일부를 포섭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260년 3월 카라코람산맥의 서쪽 아르탄강에서 아리크부카는 스스로를 몽골 제국 대칸으로 정식 선포하였다. 몽케 칸의 아들 아수타이, 시리기, 몽케 칸의 옥새를 소지하고 있던 몽케 칸의 차남 우룩타시(玉龍答失) 역시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다. 주치 가문의 베르케, 차가타이 가문의 알루구 등의 왕족들, 몽케 칸의 아들들이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다. 아란타르는 즉시 섬서, 하남행성을 점령했다.[2]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동생 쿠빌라이는 1259년 음력 윤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 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 24일 혹은 5월 6일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의 개평부(開平府 : 훗날의 상도)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2]
쓰촨 성의 몽케 칸 휘하에 있던 장수들 중 유태평(劉太平), 곽로회(霍魯懷), 미리훠저(密里火者) 등도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1260년 6월 쿠빌라이는 사람을 보내 유태평, 곽로회 등을 사살한다.[2]
1260년 5월 12일부터 6월까지 아리크부카는 다시 오논강 상류에서 쿠릴타이를 소집, 개최하고 다시 대칸임을 선포했다. 몽케 칸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5월 27일 아리크부카는 카라코룸에서 대칸임을 선포하였다. 초기의 아리크부카의 영향력은 아르항가이, 자브항강 주변부터 몽골고원 서부지역, 중국 감숙성, 칭하이 성 일대와 쓰촨 성북서부까지 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동부 카자흐스탄 지역이 영역이었던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 역시 아리크부카 지지를 선언하였다. 한편 프랑스의 루이 9세가 파견한 사절 기욤 드 뤼브룩을 접견하고, 그가 십자가를 제조하는 것을 관찰하기도 했다.[2]
2. 2. 2. 즉위 초반
1260년 5월 12일부터 6월까지 아리크부카는 오논강 상류에서 쿠릴타이를 소집, 개최하고 다시 대칸임을 선포했다. 몽케 칸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2] 5월 27일 아리크부카는 카라코룸에서 대칸임을 선포하였다. 초기의 아리크부카의 영향력은 아르항가이, 자브항강 주변부터 몽골고원 서부지역, 중국 감숙성, 칭하이 성 일대와 쓰촨 성북서부까지 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동부 카자흐스탄 지역이 영역이었던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 역시 아리크부카 지지를 선언하였다. 한편 프랑스의 루이 9세가 파견한 사절 기욤 드 뤼브룩을 접견하고, 그가 십자가를 제조하는 것을 관찰하기도 했다.1260년 차가타이 칸국의 칸위 계승이 혼란해지자, 쿠빌라이 칸은 자신의 측근이며, 차가타이 칸의 아들 모에투칸의 손자이며, 부리의 아들인 아비슈카를 칸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는 군사를 시켜 아비슈카를 체포하여 죽이고, 자신을 지지하던 알루구를 지원, 대신 차가타이 칸국의 칸위에 올렸다.[2] 알루구는 차가타이의 손자로 바이다르의 아들이다. 아릭 부케는 알루구에게 훌라구의 세력과 베르케 칸의 킵차크 칸국 세력과 대적하고, 물자와 군량을 모은 뒤 지역을 방어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알루구는 아리크 부케를 버리고 보물을 지킬 목적으로 사절을 죽였다.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두는 아리크 부케에게 충성을 유지하였다. 아리크 부케는 알루구와 곧 갈등하였고, 아리크 부케는 곧 차가타이 칸국을 공격하였다. 첫 전투에서는 알루구가 승리했으나, 두번째 전투에서는 아리크 부케가 승리하고, 알루구 세력은 차가타이 한국 서부로 도망쳤다. 한편 카이두는 베르케와 교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아리크부카는 티베트로도 사자를 보내 티베트 불교측 인사와도 교섭했다. 티베트의 사서 홍사에 의하면 아리크부카는 티베트 불교 중 카르마파(派)와 관계를 맺었다 한다.
1260년 7월 10일 쿠빌라이가 휘하 장군들에게 아리크부카 토벌을 선언했다. 9월 2일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가 위명(違命)을 날조했다며 중외에 토벌 참여를 선언했다. 1260년 가을, 아리크부카는 군대를 이끌고 카라코룸 인근에 도착, 쿠빌라이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쿠빌라이는 군사를 남쪽으로 후퇴시켰고, 아리크부카는 돌변하여 기습공격을 가했다가 패배,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2. 2. 3. 쿠빌라이와의 전쟁
1260년 9월, 쿠빌라이의 군대가 카라코룸으로 진격하여 아리크부카 군대와 교전하였으나, 쿠빌라이 군이 승리하였다. 아리크부카는 오논강과 툴 분지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했다. 1260년 겨울, 쿠빌라이의 부장 차가(車駕)가 카라코룸을 점령하고 아리크부카를 지지한 아란타르와 혼도하이를 처형하였다. 이때 아리크부카 부대는 겸주(謙州)에 주둔하고 있었다. 1261년 가을, 아리크부카 군대가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항복 의사를 밝혔으나, 곧 뜻을 바꾸어 교전을 개시하였다.[2]1260년 말, 카단 오굴은 위구르인 군사를 이끌고 아리크부카를 공격했다. 카단은 쿠빌라이 군대의 서부 지역을 담당했으며, 감숙성 북서부 고장(姑臧) 근처에서 아릭부케의 장군 아란타르와 쿤두카이의 군사를 격파하고 처형했다.[2]
아리크부카를 지지했던 알루구는 오르가나 카툰의 영역을 침략, 약탈했고 자신의 이익을 중요시했다. 아리크 부카는 차가타이 한국의 알루구와 교전할 수 없어, 알루구와 오르가나 카툰 사이에 중재에 나서 평화협정을 체결시키고 몽골고원으로 되돌아왔다. 후에 알루구는 오르가나의 아들 카라 훌레구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조건하에 알루구와 재혼하였다.[2]
1261년 9월, 아리크부카는 군사를 이끌고 카라코룸 남쪽 사막에 주둔한 예순게(移相哥 또는 亦孫哥)를 습격하여 대패시켰다. 예순게는 주치 카사르의 아들로, 쿠빌라이를 지지하였다. 1261년 10월 1일, 카라코룸 근처에서 쿠빌라이의 부장에게 패하였다. 1261년 11월 3일, 아리크부카는 시무투(몽골어로 모기가 많은 땅이라는 뜻)에서 카단 오굴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3천 병력을 베었다. 아리크부카의 장군 타차르(塔察兒})와 카피치(合必赤)는 시무투 북쪽 50리까지 카단의 잔존 군대를 추격, 대파시켰다. 11월 12일, 아리크부카는 알루쿠(阿兒忒)에서 카단에게 패하고 휘하 장수 아수(阿速)가 카단에게 투항했다. 아리크부카는 카라코룸 서쪽으로 피신했다.[2]
신원사에는 알루쿠가 카단에게 투항했다 하고, 원사 4권에는 쿠빌라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리크부카를 공격했다 한다.[2]
1261년 11월,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261년 말, 카이펑 북쪽 시무토노르 호수에서 벌어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부족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는 차가타이 한국의 알루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아리크 부카는 다시 카라코룸을 출발해 알타이산맥을 넘어 차가타이 한국을 공격했다. 일리강 전투에서 알루구 군대를 물리치고, 알루구는 서쪽으로 도주, 코탄, 카슈가르 서쪽 등지로 도망쳤다.[2]

그러나 아리크 부카 군대가 점령한 곳은 대초원이고, 곡물과 무기 공급원이 없었다. 알루구의 잔류 군대는 아리크부카 군대가 신장의 비옥한 남부 지역으로의 접근을 차단했다. 일리강까지 가는 길에 전쟁과 피로에 지친 아리크 부카의 군대는 도중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역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아리크 부카의 군대는 약탈을 감행하였다. 아리크 부카는 알타이를 건너 알루구와 수차례 싸웠으나 성과가 없었다.[2]
1261년 쿠빌라이를 지지하던 카단은 위구르와 탕구트에서 아리크부카 추종자들을 궤멸시켰다. 아리크부카는 카단 군대의 공격을 두 번 받고, 카라코룸에서 일시 퇴각하기도 했다.[2]
1261년 초겨울, 아리크 부카는 군대를 이끌고 카이핑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의 공격 소식을 듣고 남송과의 교전을 일시 중단하였다. 1261년 겨울, 아리크 부케 측은 몽골 고비 사막의 경계에서 쿠빌라이 칸과 교전하였으나, 기근과 식량 부족으로 패배하고 서쪽으로 퇴각, 알타이산맥 너머로 후퇴하였다. 아리크 부카는 차가타이 한국에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 군수물자를 조달하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분개한 아리크 부카는 알루구의 휘하인 차가타이 한국 변방의 장수와 병사들을 공격, 몰살시켰다.[2]
2. 2. 4. 지지 세력 이탈과 기근
1261년 11월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261년 말 카이펑 북쪽 시무토노르 호수에서 벌어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 부족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는 차가타이 한국의 알루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아리크 부카는 다시 카라코룸을 출발해 알타이산맥을 넘어 차가타이 한국을 공격했다. 일리강 전투에서 알루구 군대를 물리치고, 알루구는 서쪽으로 도주, 코탄, 카슈가르 서쪽 등지로 도망쳤다.[1]그러나 아리크 부카 군대가 점령한 곳은 대초원이고, 곡물과 무기 공급원이 없었다. 알루구의 잔류 군대는 아리크부카 군대가 신장의 비옥한 남부 지역으로의 접근을 차단했다. 일리강까지 가는 길에 전쟁과 피로에 지친 아리크 부카의 군대는 도중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역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아리크부카의 군대는 약탈을 감행하였다. 아리크 부카는 알타이를 건너 알루구와 수차례 싸웠으나 성과가 없었다.[1]
1261년 쿠빌라이를 지지하던 카단은 위구르와 탕구트에서 아리크부카 추종자들을 궤멸시켰다. 아리크부카는 카단 군대의 공격을 두 번 받고, 카라코룸에서 일시 퇴각하기도 했다.[1]
1261년 초겨울, 아리크 부카는 군대를 이끌고 카이핑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의 공격 소식을 듣고 남송과의 교전을 일시 중단하였다. 1261년 겨울, 아리크 부케 측은 몽골 고비 사막의 경계에서 쿠빌라이 칸과 교전하였으나, 기근과 식량 부족으로 패배하고 서쪽으로 퇴각, 알타이산맥 너머로 후퇴하였다. 아리크 부카는 차가타이 한국에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 군수물자를 조달하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분개한 아리크 부카는 알루구의 휘하인 차가타이 한국 변방의 장수와 병사들을 공격, 몰살시켰다.[1]
1262년 아리크부케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훌라구 칸의 아들 줌쿠루는 병 치료를 핑계로 후퇴, 사마르칸트로 퇴각했다가 일 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해 아리크부카의 군대는 화레즘과 아프가니스탄을 공격, 점령했다. 쿠빌라이 카안은 아리크부카 부대의 보급로를 파악, 공격하여 군량 조달을 차단했다.[1]
1262년부터 아리크부케는 알말리크에 주둔하며 다시 차가타이 한국의 알루구 칸과 전쟁하다가, 1263년 이슬람 출신으로 오고타이와 귀유크 칸 당시 투르키스탄 지역 다루가치로 있던 마수우드베이(馬思忽惕別乞占)를 강화사절로 알루구칸에게 파견했다. 마수우드베이는 그길로 차가타이 한국에 귀순하였다. 알루구는 아리크부카가 보낸 다른 사절을 살해하였다. 1263년 겨울 이리 계곡 일대에 주둔중이던 아리크 부카의 군사들은 기근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사상자가 발생했다.[1]
2. 3. 항복과 최후
아리크 부케와 그의 형 쿠빌라이 간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아리크 부케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쿠빌라이는 강력한 몽골 기병대와 몽골, 만주, 한, 킵차크 외 다수의 중국 및 고려 보병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쿠빌라이의 지지자 카단은 알란다르 장군 휘하의 아리크 부케 군대를 격파했고, 아리크 부케는 수도 카라코룸의 지배권을 두 번이나 잃었다. 쿠빌라이는 또한 식량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화북으로부터 몽골로 향하는 모든 무역을 봉쇄했다.결국, 1264년 아리크 부케는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그는 쿠빌라이에 의해 투옥되었고 항복 후 몇 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여, 은밀히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에서 1264년 8월 21일, 쿠빌라이에게 항복하면서 그의 목숨은 보존되었지만, 2년 후 병사했다.
아리크부카의 자손인 예스델이 1388년에 쿠빌라이의 자손 토구스 테무르를 살해하고 카안위를 탈취함으로써 100년 만에 복수를 했다. 또한 훌라구가 세운 일 칸국에서 아리크부카의 차남 멜리크 테무르의 증손인 알파 케운이 군주위에 오른 적이 있다.
2. 3. 1. 최종 패배와 투항
1264년 1월, 쿠빌라이 칸은 사자를 보내 아리크부카에게 항복을 종용했으나 거절했다. 1263년 봄 알루구와의 싸움 도중 병사들의 이탈로, 아리크부카는 알루구와의 교전을 중단하고 되돌아왔다. 1264년 봄, 알말리크에 주둔 중이던 아리크부카의 군대는 엄청난 기근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군대는 동요하였다.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오고타이의 아들 카단은 쿠빌라이의 편에 섰으며,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7월 29일 아리크 부케는 결국 시무투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1264년 7월 29일 시무투(昔木土, 失木鲁, 失木里秃, 失亩里秃, 失木秃, 失门秃 몽골어로 모기가 많은 땅이라는 뜻)에서 쿠빌라이가 보낸 군사와 교전했으나, 시무투 전투에서 아리크부카는 쿠빌라이 군대에 참패하였다.
아리크부카는 투항을 결정하고,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우룽타시, 아수타이, 시리기 등과 함께 상도로 갔다. 원사에 의하면 아리크부카가 상도로 가 스스로 투항했다 한다. 1264년 8월 21일 상도에 도착하여 쿠빌라이를 만났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 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 휘하의 장군 10명을 처형하고, 아리크부카의 지지자들도 처형, 유배보냈다.
송사 기사본말 99권에 의하면 부루카(不魯花) 등 아리크부카의 모신(謀臣, 책사)들도 쿠빌라이에게 복주당했다 한다. 아리크 부케와 그의 형제 쿠빌라이 간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아리크 부케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쿠빌라이는 강력한 몽골 기병대, 몽골, 만주, 한, 킵차크는 물론 다수의 중국 및 고려 보병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쿠빌라이의 지지자 카단은 알란다르 장군 휘하의 아리크 부케 군대를 격파했고, 아리크 부케는 수도 카라코룸의 지배권을 두 번이나 잃었다. 쿠빌라이는 또한 식량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화북으로부터 몽골로 향하는 모든 무역을 봉쇄했다. 아리크 부케는 결국 1264년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그는 쿠빌라이에 의해 투옥되었고 항복 후 몇 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여, 은밀히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259년 몽케가 사망하고, 1260년 4월 카라코룸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아리크 부케가 카안에 즉위했지만, 쿠빌라이 또한 카안을 칭하며, 둘 사이에서 다툼이 시작되었다(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 아리크부카는 카이두와 오르가나를 아군으로 삼아 초반에는 우세했으나, 화북 농경 지대의 풍부한 물자를 배경으로 북진하는 쿠빌라이의 반격과 기근으로 인한 자군의 괴멸 등 불운이 겹쳐, 1264년 8월 21일에 항복했다.
2. 3. 2. 감금과 최후
쿠빌라이 칸은 아리크부카의 처리를 혼자 결정하기 어려워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몽골 대신들은 아리크부카와 아수타이(阿速帶)의 사형을 면해줄 것을 요청했고, 훌라구, 바라크, 알루구 등은 아리크부카의 사형을 주장했다. 베르케는 훌라구와의 전쟁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아리크부카가 항복하자 쿠빌라이 칸은 그의 목숨은 살려주는 대신 금고형에 처했고, 그를 지지하던 왕족과 귀족들은 색출하여 처형했다. 몽케 칸의 아들들을 제외한 몽골 왕공족들도 아리크부카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7]아리크부카가 감금된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설에는 외지로 추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우울증을 앓았으며, 쿠빌라이 칸은 1년간 은밀하게 형벌을 가했다. 1266년 가을, 아리크부카는 대도(大都)에서 갑자기 중병으로 의문스럽게 사망했는데, 쿠빌라이에 의한 독살로 추정된다는 설이 있다. 정확한 사망일자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7]
라시드 웃딘은 아리크부카가 쿠빌라이와 1개월 6일 동안 같이 있다가 사망했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서는 쿠빌라이가 훌라구의 항의를 받은 뒤 1년 동안 아리크부카를 접견하지 않았다는 모순된 기록을 남겼다. 바사프는 쿠빌라이가 아리크부카의 사죄를 받아들여 용서했지만, 부인 한 명과 시종 몇 명과 함께 지방으로 보냈다고 기록하여 이견이 있다. 음식을 먹다가 질식해 죽었다는 설도 있다.[7]
아리크부카와 쿠빌라이 간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아리크부카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쿠빌라이는 강력한 몽골 기병대, 몽골, 만주, 한, 킵차크 외에도 다수의 중국 및 고려 보병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쿠빌라이의 지지자인 카단은 알란다르 장군 휘하의 아리크부카 군대를 격파했고, 아리크부카는 수도 카라코룸의 지배권을 두 번이나 잃었다. 쿠빌라이는 화북에서 몽골로 향하는 모든 무역을 봉쇄하여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결국 아리크부카는 1264년 쿠빌라이에게 항복했고, 투옥된 지 몇 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여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2. 4. 사후
항복한 지 수 개월 뒤에 불가사의하게 사망하여, 이는 그가 비밀리에 독살되었다는 소문으로 이어졌다.[8] 그의 시신은 셀렝가강 근처 부라 운두르(Bura Undur)에 매장되었으나, 정확한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오고타이 칸의 손자이며 오고타이 한국의 군주 카이두는 아리크부카의 계승을 선언, 일부 동몽골의 부족장들과 투르크족 족장들의 지지를 얻어 쿠빌라이 칸과 전쟁을 벌였다. 둘째 아들 메리크 테무르는 카이두의 진영에 섰다가 1306년 원나라에 투항했다. 1307년 원 성종 사후 안서왕 아난다를 추대했다가 카이산에 의해 처형되고, 메리크의 아들 밍간은 손자 아르파 케운을 데리고 일 한국으로 이주했다.
다른 아들 요쿠부르는 시리기의 난을 계기로 카이두의 편에 섰다가, 1296년 원 성종에게 투항했다. 아리크부카를 지지했다가 함께 투항한 몽케 칸의 아들 중 우룽타시는 일찍 죽고, 시리기는 1277년 쿠빌라이 칸의 아들 노무간, 코코추의 카이두 정벌에 출정했다가 노무간, 코코추를 카이두에게 넘기고 카이두의 편에 섰다.

학자 데이비드 모건에 따르면, "아리크 붸케는 1260년 이후 쿠빌라이가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통해 반대했던 몽골 내의 영향력 있는 사상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일부 몽골인들은 쿠빌라이와 같이 정착된 문명과 중국식 삶의 방식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을 전형으로 하여, 위험한 방향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다. 전통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몽골의 중심은 몽골에 남아 있어야 하며, 몽골의 유목 생활은 오염되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야 했다. 중국은 단순히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리크 붸케는 이 파벌의 지도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유산은 카이두에 의해 이어졌다. 아리크 붸케는 권력을 잃었지만, 그의 후손 중 일부는 나중에 일 칸국과 북원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일 칸 아르파 케운과 예쉬데르 모두 아리크 붸케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아리크부카의 자손인 예스델이 지원 10년(1388년)에 쿠빌라이의 자손 토구스 테무르를 살해하고 카안위를 탈취함으로써, 100년 만에 복수를 했다. 또한 훌라구가 세운 일 칸국에서 아리크부카의 차남 멜리크 테무르의 증손인 알파 케운이 군주위에 오른 적이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툴루이 | |
어머니 | 소르칵타니 베키 | 케레이트족 출신, 네스토리우스교 신자 |
형 | 몽케 칸 | |
형 | 쿠빌라이 칸 | |
형 | 훌라구 | |
부인 | 알리카미시(엘치크미시) 카툰 | 오이라트족 토를로시와 칭기즈 칸의 다섯째 딸 체체겐의 딸 |
부인 | 니라우구이 카툰 | 바룰라스 지역 출신 |
부인 | 쿠툴루 카툰 | |
부인 | 쿠투쿠카 카툰 | 나이만족 출신 |
부인 | 에시타이 카툰 | 콩기라트부 타무치의 딸, 아들 요부쿠르가 수계 |
첩 | 이라구 구이 | |
아들 | 요부쿠르(Юбугур) | |
아들 | 멜릭 테무르 | |
며느리 | 에메겐 테무르 | 오이라트족 토를로시와 칭기즈 칸의 다섯째 딸 체체겐의 아들 바르스부카의 딸 |
아들 | 쿠툭투 | |
아들 | 타마치 | |
아들 | 나이라쿠부카 | |
아들 | 라간시간(剌甘失甘) | |
아들 | 카르쿠간 | |
딸 | 네구데르 아히 | |
딸 | 노모간 아히 | |
딸 | 노무곤 | 오이라트부 차파르와 혼인 |
사위 | 츄판 | 오이라트족 토를로시와 칭기즈 칸의 다섯째 딸 체체겐의 손자, 부카 테무르의 아들 |
참조
[1]
백과사전
Ariq-Boke (Ariq-Boga, Arik Buka) (d. 1266)
https://archive.org/[...]
Facts On File
2004
[2]
웹사이트
Arik Buka defeats Alghu
http://warfare.upher[...]
2013-06-26
[3]
서적
Le chapitre CVII du Yuan che: Les généalogies impériales monogoles dans l'histoire chinoise officielle de la dynastie monogole
1945
[4]
서적
Shajrat Ul Atrak: Or, The Genealogical Tree of the Turks and Tatars
"//books.google.com/[...]
[5]
서적
《中國通史·第八卷·中古時代·元時期(下)》
null
[[上海人民出版社]]
null
[6]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n and the Mongol Empire
Facts on File
2004
[7]
서적
몽골 제국 과 고려: 쿠빌라이 정권 의 탄생 과 고려 의 정치적 위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8]
서적
The reign of Khubilai Kh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9]
간행물
Сборник летописей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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