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부 (중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순천부는 명나라 시대에 북경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행정 구역으로, 원나라 시대의 대도(大都路)를 계승하여 1403년(영락 원년) 순천부로 개칭되었다. 청나라 시대에는 직례성에 속했으며, 1743년에는 4개의 로청과 24개의 주·현으로 행정 구역이 개편되었다. 중화민국 시기인 1914년 폐지되었으며, 이후 수도 지역을 거쳐 1928년 북평 특별시로 변경되었다. 순천부 지부는 높은 위상을 가졌으며, 베이징 성벽 밖의 지역은 직예총독과 이중 행정 관할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베이징시의 역사 - 북양정부
북양정부는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의 초기 정부로,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 간 권력 다툼으로 혼란해졌으나 장제스의 북벌과 장쉐량의 투항으로 소멸되었다. - 베이징시의 역사 - 대도
대도는 1267년 쿠빌라이 칸이 건설하여 원나라의 수도로 삼은 도시이며, 몽골어로는 칸발릭,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는 캄발룩으로 기록되었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베이징으로 개칭되었다. - 명나라 - 홍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은 14세기 중반 원나라 말기에 백련교도 한산동과 유복통 등이 주도하여 부패한 정치와 자연재해로 피폐해진 민심을 기반으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고려 침입과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에 영향을 주었다. - 명나라 - 자금성
자금성은 명, 청나라 황제들이 거주했던 베이징의 거대한 궁궐로, 황실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며 현재 고궁박물원으로 개장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청나라 - 만주
만주는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을 포함한 중국 동북 지역을 가리키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왕조가 지배했으며, 지리적으로는 광활한 평야와 산맥을 특징으로 하며, 현재는 중국 정부가 "동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 청나라 - 제1차 아편 전쟁
제1차 아편 전쟁은 1839년부터 1842년까지 청나라와 영국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광저우 무역 체제와 아편 밀매가 원인이 되어 영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난징 조약 체결로 청나라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 연혁
원나라 시대에 황실 수도는 대도(大都路, ''Dadulu'')로 알려졌으며 중서성(Zhongshu Sheng)의 통제를 받았다. 명나라 홍무제 원년(1368년) 8월, 대도는 북평부로 개명되었고, 같은 해 10월 산동성에 귀속되었다. 영락제 원년(1403년) 음력 1월, 수도는 북경으로 개명되었고, 북평부는 순천부로 개칭되었다.[3]
청나라 시대 순천부는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건륭제 시기인 1743년에 경계와 행정 구획이 확립되었다. 당시 순천부는 4개의 루팅(路廳, ''luting'')과 24개의 주(州, ''zhou'') 현(縣, ''xian'')으로 구성되었으며, 황실 지사(府尹, ''fuyin'')의 관할을 받았다.[1]
1914년 (민국 3년), 중화민국에 의해 순천부는 폐지되었다.[1]
2. 1. 명나라 시기
명나라 초기에는 '''연왕부'''(燕王府)라고 불렸으나, 정난의 변으로 권력을 잡은 영락제가 1403년(영락 원년)에 순천부로 이름을 바꾸고 명나라의 수도로 삼았다.1491년(홍치 4년)에는 100,518호 669,033명, 1578년(만력 6년)에는 101,134호 706,861명의 인구를 기록했다.[5] 순천부는 5개의 주(州)와 22개의 현(縣)을 관할했다.
2. 2. 청나라 시기
청나라 시대에 순천부는 직례성에 속했으며, 그 경계와 행정 구획은 건륭제 시기인 1743년에 확립되었다. 당시 순천부는 4개의 로청(路廳, luting)과 24개의 주(州, zhou) 현(縣, xian)으로 구성되었다.[1] 순천부 지부(府尹, fuyin)는 청나라 3품(正三品, zhengsanpin) 관료로, 다른 부의 지부보다 2~3계급 높은 품계였다. 일부 순천부 지부는 시랑(侍郎) 품계의 제국 대신일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3품 청나라 관료의 야문은 구리 도장을 사용했지만, 순천부 야문은 은 도장을 사용했다는 점이 특이하다.순천부 지부는 직예총독과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베이징 성벽 밖의 순천부 지역은 직예총독과 순천부 지부 야문의 이중 행정 관할을 받았지만, 직예총독은 베이징 성벽 내에서는 권한이 없었다.
초기 청나라 시대 베이징 시 행정의 특징은 한족과 만주족의 거주지와 행정이 분리되었다는 점이다. 만주 팔기군은 모두 서교(西郊)에 위치한 삼대영(三大營, sandaying) 또는 소위 내성에 거주했고, 한족과 기타 민족은 외성에 거주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내 팔기 외 오성"(內八旗外五城, neibaqiwaiwucheng)이라는 옛 중국 속담이 생겨났다. 순천부(順天府) 지사는 외성에 거주하는 한족 및 기타 민족을 관할했으며, 팔기군의 관할은 구문 제독(九門提督, jiumen tidu)의 군사 사무소에 속했다.
청나라 때 순천부의 관할 구역은 다음과 같았다.
2. 3. 중화민국 시기
1910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순천부는 점차 폐지되었다.[1] 1914년 민국 3년, 중화민국에 의해 순천부는 폐지되고 수도 지역(京兆地方)이 되었다.[1] 1928년 6월 20일에는 북평 특별시가 되었다.[1] 순천부 야문의 잔재는 오늘날 북경시 동성구 동공가(東公街)에서 찾아볼 수 있다.[1]3. 행정 구역
명나라 시대 순천부는 5개 주(州)와 22개 현(縣)을 관할했으며, 1490년에 100,518가구, 669,033명, 1578년에 101,134가구, 706,861명이 거주했다.[2]
청나라는 순천부를 직례성에 소속시키고 5주 19현으로 개편했다.[4] 1743년부터는 4개의 로청(路廳)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3. 1. 명나라 시대 행정 구역
명나라 초기에는 '''연왕부'''(燕王府)라고 불렸으나, 정난의 변으로 권력을 잡은 영락제가 1403년(영락 원년)에 순천부로 이름을 바꾸고 명나라의 수도로 삼았다.[5]1491년(홍치 4년)에 100,518호 669,033명을 거느렸고, 1578년(만력 6년)에는 101,134호 706,861명을 거느렸다.[5]
3. 2. 청나라 시대 행정 구역
1743년 이후, 순천부는 4개의 로청(路廳)으로 나뉘었다. 각 로청과 관할 주현(州縣)은 다음과 같다.4. 순천부 지부 (府尹)
순천부 지부(府尹, fuyin)는 수도 베이징을 포함하는 행정 구역의 특성상 명성이 높았다. 청나라 3품(正三品, zhengsanpin) 관료로서 다른 부의 지부보다 2~3계급 높았으며, 일부 순천부 지부는 시랑(侍郎) 품계의 제국 대신이었다. 3품 관료는 구리 도장을 사용했지만, 순천부 야문은 은 도장을 사용했다. 순천부의 하위 부와 현이 형식적으로 직예총독 관할이었으나, 순천부 지부는 직예총독과 종속 관계가 아니었다. 베이징 성벽 밖 순천부 지역은 직예총독과 순천부 지부 야문의 이중 행정 관할이었고, 직예총독은 베이징 성벽 내에서는 권한이 없었다.[1]
참조
[1]
서적
中國官制史
文津出版社
1993
[2]
서적
History of Ming (明史)
[3]
서적
明史
[4]
서적
清史稿
[5]
서적
명사-권40
https://zh.wikisour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