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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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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티븐은 프랑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삼촌인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영향 아래 성장했으며,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주장하며 잉글랜드로 건너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스티븐은 마틸다 황후의 반란으로 인해 잉글랜드 내전(무정부 시대)을 겪었으며, 1153년 윌링포드 조약을 통해 헨리 2세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1154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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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잉글랜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매튜 파리스의 'Historia Anglorum'에 있는 미니어처
매튜 파리스의 'Historia Anglorum'에 있는 미니어처
칭호잉글랜드 국왕
통치 기간1135년 12월 22일 – 1154년 10월 25일
대관식1135년 12월 22일, 1141년 12월 25일
이전 군주헨리 1세
다음 군주헨리 2세
섭정마틸다 (1141–1148)
섭정 유형경쟁자
배우자마틸다 1세, 불로뉴 여백작 (1125년 결혼, 1152년 사망)
자녀외스타슈 4세, 불로뉴 백작
마리 1세, 불로뉴 여백작
기욤 1세, 불로뉴 백작
제르바시스 (사생아)
가문블루아 가
아버지에티엔 2세, 블루아 백작
어머니아델라 드 노르망디
출생일1092년 또는 1096년
출생 장소블루아, 프랑스 왕국
사망일1154년 10월 25일 (57–58세 또는 61–62세)
사망 장소도버, 잉글랜드 왕국, 켄트 주
매장 장소페버샴 수도원, 켄트, 잉글랜드
작위
노르망디 공작 재위 기간1135년–1144년
이전 공작헨리 1세
다음 공작조프루아 5세

2. 어린 시절

스티븐은 프랑스의 귀족인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와 노르망디의 아델라(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의 딸)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으며 부친의 이름을 딴 에티엔(Étienne)으로 불렸다. 형제들로는 쉴리 백작 기욤,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샹파뉴 백작으로는 티보 2세), 윈체스터 주교 블루아의 헨리 등이 있다.

스티븐이 태어날 무렵의 북부 프랑스


스티븐은 1092년 또는 1096년에 프랑스의 블루아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스티븐-헨리였는데, 스티븐이 열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2] 스티븐-헨리는 제1차 십자군 전쟁 중 비겁함으로 악명이 높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1101년에 다시 레반트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람라 전투에서 전사했다.[3] 스티븐의 어머니인 노르망디의 아델은 정복자 윌리엄과 플랑드르의 마틸다의 딸이었다. 그녀는 경건함과 강한 성격으로 당대에 유명했다.[1] 아델은 스티븐이 성장하는 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4]

12세기 프랑스는 프랑스 왕의 최소한의 통제하에 있는 여러 백작령과 작은 정치 단위들의 느슨한 집합체였다. 왕의 권력은 스티븐의 고향인 블루아 백작령의 동쪽에 있는 부유한 일드프랑스 지방에 대한 그의 통제력과 관련이 있었다.[6] 서쪽에는 망주, 앙주, 투렌의 세 개의 백작령이 있었고, 블루아 북쪽에는 1066년에 정복자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했던 노르망디 공국이 있었다. 윌리엄의 자녀들은 여전히 합동적인 앵글로-노르만 상속권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7] 이 지역의 지배자들은 지역 방언이 있었지만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고, 같은 종교를 따랐으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8]

스티븐은 적어도 네 명의 형제와 한 명의 여동생, 그리고 두 명의 가능성 있는 이복 여동생이 있었다.[4] 그의 형인 윌리엄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블루아와 샤르트르를 통치했을 것이다. 윌리엄은 아마도 지능 장애가 있었고, 아델은 대신 두 번째 아들인 테오발드에게 백작령을 물려주었다.[3] 스티븐의 다른 형인 오도는 어린 나이에, 아마도 십대 초반에 사망했다.[4]

스티븐의 남동생인 헨리는 아마도 그보다 4년 후에 태어났을 것이다.[4] 형제들은 끈끈한 가족 관계를 형성했고, 아델은 스티븐이 봉건 기사 또는 남작의 역할을 맡도록 격려하면서 헨리가 교회에서 경력을 쌓도록 이끌었다.[10] 스티븐은 가까운 친척에게 보내지는 대신 어머니의 집에서 자랐고, 라틴어와 승마를 배우고, 노르망디의 윌리엄이라는 가정교사에게 최근 역사와 성경 이야기를 배웠다.[11]

부친이 제1차 십자군 전쟁 중 세상을 떠나자 외숙부 헨리 1세에 의해 양육되었다. 1106년에 잉글랜드로 건너간 에티엔은 1115년에 모르탱 백작으로 봉해졌고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의 딸 마틸드와 결혼하였다.

3. 즉위 전

헨리 1세는 생전에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마틸다를 주요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밝히고 그들에게 지지할 것을 서약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틸다의 왕위 계승은 불투명했는데,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당시 잉글랜드 귀족층이었던 노르만인들이 마틸다의 남편 앙주 백작 제프리를 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븐과 그의 형인 티보 4세 드 블루아 백작, 헨리 1세의 사생아이자 마틸다의 이복남매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 등이 왕위를 탐내고 있었던 것 또한 왕위 계승을 불투명하게 만들었다.[266]

헨리 1세는 마틸다에 대한 지지를 강제하며 스티븐에게 그러한 맹세를 앞장서서 이행할 책임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135년 헨리 1세가 죽자, 스티븐은 윈체스터 주교였던 그의 형 헨리의 도움을 받아 왕이 죽기 직전에 침상에서 후계자를 자신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하며 왕위를 찬탈하였다.[266] 당시 대다수의 귀족들은 서약은 하였지만 마틸다를 싫어하였으므로 그는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즉위하였다.

14세기 스티븐 가계도 묘사. 맨 위에 어머니인 아델라가 있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윌리엄, 테오발드, 스티븐이 있다.


스티븐의 초기 삶은 그의 삼촌인 헨리 1세와의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헨리 1세는 그의 형인 윌리엄 루퍼스 사후 잉글랜드의 권력을 장악했다. 1106년 그는 그의 형인 로베르 쿠르토즈가 통치하던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하여 점령하고,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의 군대를 패배시켰다.[12] 그 후 헨리는 프랑스의 루이 6세와 갈등을 겪게 되었는데, 루이는 로베르의 아들인 윌리엄 클리토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선포할 기회를 잡았다.[13]

헨리는 루이에 대항하여 프랑스 서부 백작령들과 동맹을 맺었고, 이로 인해 스티븐의 초기 삶 내내 지속되는 지역 분쟁이 발생했다.[13] 아델라와 테오발드는 헨리와 동맹을 맺었고, 스티븐의 어머니는 그를 헨리의 궁정에 두기로 결정했다. 헨리는 1111년부터 노르망디에서 다음 군사 원정을 수행했는데, 벨렘의 로베르가 이끄는 반군이 그의 통치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1112년 헨리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 아마도 헨리와 함께 군사 원정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는 1113년 왕이 생에브루 압바이를 방문했을 때 궁정에 있었다.[15] 스티븐은 거의 확실히 헨리의 궁정의 일원으로서 1113년 또는 1115년에 처음으로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것이다.[14]

헨리는 스티븐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는데, 아마도 스티븐이 그의 먼 친척이자 지역 동맹이었지만, 스스로 충분히 부유하거나 강력하지 않아 왕이나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윌리엄 아델린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기로 선택했을 것이다.[16] 영향력 있는 지역 가문의 셋째 아들인 스티븐조차도 삶에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후원자의 지원이 필요했다.[16]

헨리의 지원으로 스티븐은 빠르게 토지와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1106년 탱슈브레 전투 이후, 헨리는 그의 사촌인 윌리엄으로부터 모르탱 백작령을, 로베르 말레로부터 아이 영지를 몰수했다.[17] 1113년 스티븐은 윌리엄이 이전에 잉글랜드에서 소유했던 토지 없이 작위와 영지를 모두 받았다.[17] 랭커스터 영지 또한 헨리가 푸아티에의 로제로부터 몰수한 후 그에게 주어졌다.[18] 스티븐은 또한 헨리로부터 노르망디 남부 알랑송의 토지를 받았지만, 현지 노르망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앙주 백작 풀크 4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19] 스티븐과 그의 형 테오발드는 그 후의 전투에서 완패했고, 알랑송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영토는 회복되지 않았다.[20]

1120년 백선(White Ship) 침몰을 묘사한 14세기 초 그림


1120년, 잉글랜드의 정치 지형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300명의 승객이 노르망디의 바르플뢰르에서 잉글랜드로 향하는 백선에 탑승했는데, 여기에는 왕위 계승자였던 윌리엄 아델린과 많은 고위 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1] 스티븐 역시 같은 배를 타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다른 배를 기다렸다. 배가 너무 붐빌까 봐 걱정했거나, 설사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22] 항해 도중 배가 침몰하여 윌리엄 아델린을 포함한 승객 대부분이 사망했다. 단 한 명만 살아남았다.[23]

윌리엄 아델린이 사망하면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은 불확실해졌다. 당시 서유럽의 계승 규칙은 불확실했다.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장자 상속, 즉 장남이 작위를 상속받는 것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었다.[24] 프랑스 국왕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후계자를 직접 즉위시키는 전통이 있어 계승 순서가 비교적 명확했지만, 잉글랜드는 그렇지 않았다.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장남이 부계 재산(일반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됨)을 상속받고, 차남은 더 작거나 최근에 취득한 토지나 영지를 받는 전통이 있었다.[24] 여성 통치자의 전례는 없었다.

헨리에게는 합법적인 자녀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마틸다 황후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당한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23] 아들의 죽음 직후, 국왕은 두 번째 부인인 루방의 아델라이즈와 결혼했지만, 더 이상 합법적인 아들을 낳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점점 명확해졌고, 그는 마틸다를 후계자로 삼았다.[26] 마틸다는 헨리 5세와의 결혼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 황후의 칭호를 주장했지만, 남편이 1125년 사망하자 1128년 노르망디 공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앙주 백작 제프리 플랜태지넷과 재혼했다.[27] 제프리는 앵글로-노르만 엘리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앙주 통치자로서 그는 전통적으로 노르망인들의 적이었다.[28]

한편 국왕은 1125년 스티븐이 중요한 대륙 항구인 불로뉴와 잉글랜드 북서부와 남동부의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불로뉴 백작 유스타스 3세의 딸이자 유일한 상속녀인 불로뉴 백작 부인 마틸다와 결혼하도록 주선했다.[18] 1127년, 잉글랜드 왕위의 잠재적인 계승자였던 윌리엄 클리토가 플랑드르 백작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국왕은 이를 막기 위해 스티븐을 파견했고, 스티븐이 성공적으로 선출된 후 윌리엄은 보복으로 이웃 불로뉴의 스티븐의 영토를 공격했다. 결국 휴전이 선포되었고, 윌리엄은 다음 해에 사망했다.[31]

헨리는 1127년, 그리고 다시 1128년과 1131년에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모두에서 마틸다에 대한 정치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려고 시도했으며, 그의 궁정이 마틸다를 그의 직계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녀의 자손을 그녀 이후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하는 선서를 하도록 요구했다.[32] 스티븐도 1127년 이 선서에 참여했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마틸다, 제프리 사이의 관계는 국왕의 생애 말기에 점점 악화되었다. 마틸다와 제프리는 잉글랜드에서 진정한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의심하여 1135년 헨리에게 노르망디의 왕궁을 살아있는 동안 마틸다에게 넘겨주고 노르망디 귀족들이 마틸다에게 즉각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구하여 헨리의 죽음 후 훨씬 더 강력한 위치를 확보할 것을 제안했다.[34] 헨리는 아마도 제프리가 의도보다 훨씬 일찍 노르망디에서 권력을 장악하려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이를 분노하며 거절했다.[35] 노르망디 남부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고, 제프리와 마틸다는 반군을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했다.[24] 이러한 대립 중에 헨리는 예상치 못하게 병들어 리옹라포레 근처에서 사망했다.[28]

프랑스 귀족인 블루아 백작 에티엔느 2세와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망디 공국 공 윌리엄 1세(정복왕)의 딸 아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중 한 명이다. 프랑스식 이름은 '''에티엔느 드 블루아'''(Étienne de Blois)이다.

유년기에는 외숙부인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1120년 화이트십이 난파될 때 사촌인 윌리엄 아델린과 함께 배에 승선할 예정이었으나, 직전에 병에 걸려 동행하지 못하고 화를 면했다. 이후에도 외숙부에게 귀여움을 받았으며, 1125년에는 외숙부의 주선으로 부룬 백작 우스타슈 3세의 딸 마틸드(영국식 이름은 마틸다)와 결혼하여 부룬 백작위를 계승했다.[253][254] 블루아 백작위는 형 티보 4세(샹파뉴 백작으로서는 티보 2세)가 계승했다.

외아들 윌리엄 아델린을 잃은 헨리 1세에게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결혼했던 딸이자 윌리엄의 누이인 마틸다(모드는 애칭)가 유일한 적출자가 되었다. 그 때문에, 남편과 사별한 마틸다를 1125년에 불러들여 왕위 계승자로 삼고, 1128년에는 노르망디에 인접한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아들 제프루아 4세와 결혼시켰다. 이 기간 동안 헨리 1세는 왕족·귀족들과 마틸다에 대한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서약을 맺었지만, 스티븐도 서약한 왕족 중 한 명으로 1126년·1127년에 서약했다(그 외에 헨리 1세의 서자이자 마틸다의 이복형제인 로버트, 마틸다의 외숙부에 해당하는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1세도 있었다).[255]

그런데 헨리 1세가 1135년에 죽자, 스티븐은 헨리 1세의 생전 약속이나 선왕의 신하들의 의향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가신들을 이끌고 소유지인 프랑스 부룬에서 잉글랜드로 상륙하여 런던에 입성한 뒤, 런던 시민과 자신의 동생인 윈체스터 주교 헨리를 통해 캔터베리 대주교를 설득하여 교회 주요 인물들로부터 왕위 계승을 승인받고, 그들의 추대를 받아 잉글랜드 왕에 즉위했다.[256]

4. 내전 (무정부 시대)

1138년 마틸다 황후의 이복동생이자 유력 귀족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헨리 1세의 정통 계승자는 마틸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헨리 1세의 계승자를 둘러싼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19년간의 겨울'' 혹은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잠드셨던 기간''으로 기록되어 있다.[267]

내전 초기, 스티븐은 잇단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1139년 솔즈베리 주교 로저와 그의 사촌 동생들인 링컨 주교 알렉산더, 일리 주교 나이젤을 마틸다 지지 혐의로 체포하고 교황의 서신에도 불구하고 석방하지 않아 성직 제후들의 지지를 잃었다. 1141년 2월 링컨 전투에서 윌리엄 카헤이즈라는 기사에게 생포되어 브리스톨에 유폐되었다.[267]

1141년 4월, 마틸다는 윈체스터에서 열린 성직자 회의에서 '잉글랜드의 레이디'로 선출되었으나, 6월 대관식을 위해 런던에 온 그녀는 거만한 행동과 과도한 금전 요구로 시민과 귀족들의 분노를 사, 신변의 위협을 느껴 옥스퍼드로 도망쳤다. 이때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가 추격대를 조직해 마틸다의 핵심 가신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를 생포했다.

로버트와 스티븐의 교환 협정으로 유폐에서 풀려난 스티븐은 다시 세력을 모아 1141년 9월 윈체스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142년, 마틸다는 본거지인 옥스퍼드에서 포위되었다가 그해 12월 몇몇 가신들만 데리고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1147년, 마틸다의 아들 헨리(훗날 헨리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1차 침공은 실패했지만, 1153년 1월에 다시 침공하여 스티븐과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 헨리가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153년, 앙주 백작 앙리(훗날 헨리 2세)가 잉글랜드에 상륙하면서 전환점이 찾아왔다. 스티븐은 1152년 왕비를, 1153년 8월에는 장남 우스타슈 4세를 잃고 마틸다파와의 협상에 응했다. 11월 6일, 앙리와 평화 협정(워링포드 조약 또는 윈체스터 조약)을 맺고, 앙리를 후계자로 삼아 화해했다. 스티븐의 차남 기욤 1세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영지를 보전받았다.[260]

화해 후, 불법 성채 파괴와 반란 진압에 힘썼지만, 1154년 10월 25일 스티븐은 도버에서 사망했다. 협정에 따라 앙리가 헨리 2세로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립되었다. 스티븐의 유해는 페버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261]

스티븐의 대인장

4. 1. 내전 발발

1138년 마틸다의 이복동생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헨리 1세의 정통 계승자는 마틸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헨리 1세의 계승자를 둘러싼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티븐은 왕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하지 못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스티븐의 통치 기간을 '19년간의 겨울' 또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잠드셨던 기간'으로 기록하고 있다.[267]

내전 초기 스티븐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1139년 솔즈베리 주교 로저와 그의 사촌동생들인 링컨 주교 알렉산더, 일리 주교 나이젤을 마틸다 지지 혐의로 체포하고 풀어주지 않아 성직 제후들의 지지를 잃었다. 1141년 2월 링컨 전투에서 패배하고 브리스톨에 유폐되었다.[267]

1141년 4월, 마틸다는 윈체스터 성직자 회의에서 '잉글랜드의 레이디(Lady of England)'로 선출되었지만, 거만한 행동과 과도한 금전 요구로 런던 시민과 귀족들의 분노를 사 옥스퍼드로 도망쳤다.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가 추격대를 보내 마틸다의 주요 가신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를 생포했다.

로버트와 스티븐의 교환 협정으로 스티븐은 풀려났고, 1141년 9월 윈체스터 전투에서 승리했다. 1142년 옥스퍼드에서 포위된 마틸다는 그해 12월 몇 명의 가신들만을 거느린 채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1147년 마틸다의 아들 헨리(훗날 헨리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1차 침공은 실패했다. 1153년 1월 헨리가 다시 잉글랜드를 침략했고, 스티븐은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하여 헨리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다.

4. 2. 스티븐의 위기

1138년 마틸다의 이복동생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헨리 1세의 계승자를 둘러싼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티븐은 왕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하지 못했으며,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시기를 '19년간의 겨울'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267]

내전 초기 스티븐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1139년 솔즈베리 주교 로저와 그의 친척들을 체포하면서 성직 제후들의 지지를 잃었다. 1141년 2월 링컨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 브리스톨에 유폐되었다.[267]

1141년 4월, 마틸다는 윈체스터에서 열린 성직자 회의에서 '잉글랜드의 레이디(Lady of England)'로 선출되었으나, 런던에서 거만한 행동과 과도한 금전 요구로 민심을 잃고 옥스퍼드로 도망쳤다.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는 추격대를 조직해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를 생포했다.

포로 교환 협정으로 풀려난 스티븐은 1141년 9월 윈체스터 전투에서 승리했고, 1142년 옥스퍼드에서 마틸다를 포위하여 노르망디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1147년 마틸다의 아들 헨리(훗날 헨리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처음에는 실패했다. 1153년 1월, 헨리는 다시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스티븐과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 헨리가 차기 왕위 계승권을 얻게 되었다.

13세기 매슈 패리스(Matthew Paris)가 그린 스티븐의 대관식 묘사


1135년 스티븐은 앵글로-노르망디 사회에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유하고 예의 바르며 동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36] 그는 겸손하고 사교적인 지도자였으며, 부하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겼다.[36] 또한 매우 경건했으며, 시토회 수도원 설립을 장려하여 교회 내 동맹을 얻었다.[38]

그러나 아버지의 비겁함에 대한 소문이 계속되었고, 이를 피하려는 욕망이 스티븐의 성급한 군사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39] 그의 아내 마틸다는 영지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부부는 왕과 왕비 다음으로 부유한 평민 가정이 되었다.[40]

스티븐의 동생 블루아의 헨리는 클뤼니 수도원 수도사였으며,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장과 윈체스터 주교를 겸임하여 왕 다음으로 부유한 인물이 되었다.[42] 윈체스터의 헨리는 노르만 왕들이 교회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여겨 이를 되돌리고자 했다.[43]

스티븐의 동생 블루아의 헨리의 당대 묘사. 주교 지팡이와 반지를 들고 있다.


헨리 1세의 사망 소식이 퍼졌을 때, 왕위 계승 후보자들은 적절히 대응하기 어려웠다. 제프리와 마틸다는 앙주에 있었고, 글로스터의 로베르트는 노르망디에 있었다.[24] 스티븐은 불로뉴에 있다가 영국으로 향했고, 런던 군중들은 그를 왕으로 선포했다.[49]

스티븐은 윈체스터에서 왕실 금고를 넘겨받았고,[50] 12월 15일 헨리는 스티븐이 교회에 광범위한 자유를 부여하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51] 스티븐은 마틸다에게 충성 맹세를 했었지만, 헨리는 왕국의 안정을 위한 맹세였으므로 무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2] 휴 빅고드는 헨리 1세가 죽기 직전 스티븐을 지명했다고 증언했다.[52] 스티븐의 대관식은 1135년 12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54]

한편, 노르망디 귀족들은 테오발드를 왕으로 선포하려 했으나,[56] 스티븐의 대관식 소식을 듣고 포기했다. 테오발드는 스티븐에게 재정적 보상을 받고 블루아에 남았다.[58]

1153년, 앙주 백작 앙리(훗날 헨리 2세)가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서부를 평정하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스티븐은 1152년 왕비를, 1153년 장남 우스타슈 4세를 잃고 11월 6일 앙리와 평화 협정(워링포드 협정 또는 윈체스터 협정)을 맺었다. 스티븐은 자신의 왕위를 인정받는 대신 앙리를 후계자로 삼았다. 스티븐의 아들 기욤 1세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영지를 보전받았다.[260]

화해 후 양측 용병 해산, 불법 성채 파괴 등이 이루어졌으나, 스티븐은 1154년 10월 25일 사망했다. 앙리는 헨리 2세로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었다. 스티븐의 유해는 페버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261]

4. 3. 마틸다의 득세와 좌절

1138년 마틸다의 이복동생이자 유력 귀족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헨리 1세의 정통 계승자는 마틸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헨리 1세의 계승자를 둘러싼 내전이 시작되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스티븐의 통치 기간을 '19년간의 겨울' 혹은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잠드셨던 기간'으로 기록하고 있다.[267]

내전 초기 스티븐은 연이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1139년 솔즈베리 주교 로저와 그의 사촌 동생들인 링컨 주교 알렉산더, 일리 주교 나이젤을 마틸다 지지 혐의로 체포하고 교황의 서신에도 불구하고 석방하지 않아 성직 제후들의 지지를 잃었다. 1141년 2월 링컨 전투에서 윌리엄 카헤이즈라는 기사에게 생포되어 브리스톨에 유폐되었다.[267]

1141년 4월, 마틸다는 윈체스터에서 열린 성직자 회의에서 '잉글랜드의 레이디'로 선출되어 왕위 회복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6월 대관식을 위해 런던에 온 그녀는 거만한 행동과 과도한 금전 요구로 시민과 귀족들의 분노를 사, 신변의 위협을 느껴 옥스퍼드로 도망쳤다. 이때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가 추격대를 조직해 마틸다의 핵심 가신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를 생포했다.

로버트와 스티븐의 교환 협정으로 유폐에서 풀려난 스티븐은 다시 세력을 모아 1141년 9월 윈체스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142년, 마틸다는 본거지인 옥스퍼드에서 포위되었다가 그해 12월 몇몇 가신들만 데리고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14세기 스티븐과 사냥용 새를 묘사한 그림

4. 4. 스티븐의 귀환과 반격

1138년,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잉글랜드는 내전에 돌입했다.[90] 로버트는 헨리 1세의 사생아이자 마틸다 황후의 이복형제로, 노르망디에 영지를 가진 강력한 귀족이었다.[91] 그는 1135년 테오발드가 왕위에 오르도록 설득하려 했고, 1136년 스티븐의 첫 궁정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1138년에는 스티븐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마틸다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92][93] 프랑스에서는 앙주의 제프리가 노르망디를 재침공했고,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도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여 마틸다 황후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며 요크셔까지 진격했다.[98]

스티븐은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통해 반란과 침략에 대응했다. 그의 아내 마틸다는 도버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았고,[91] 소수의 가신 기사들이 북쪽으로 파견되어 스코틀랜드군과 싸웠으며, 데이비드의 군대는 스탠더드 전투에서 패배했다.[98] 스티븐 자신은 글로스터셔를 장악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헤리퍼드슈루즈베리를 점령하고 배스로 향했다.[91] 그는 군사적 우위를 이용하여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정을 맺었고, 더럼 조약을 통해 노섬벌랜드와 컴브리아를 데이비드와 그의 아들 헨리에게 할양했다.[98]

그러나 1139년, 스티븐은 솔즈베리의 로저 주교와 그의 조카들인 링컨의 알렉산더 주교와 엘리의 나이절 주교를 체포하고 그들의 성을 몰수했다.[109] 이 사건은 고위 성직자들과의 관계를 손상시켰을 수 있다.[113]

1141년 2월, 링컨 전투에서 스티븐은 생포되어 브리스톨에 유폐되었다.[267] 이후 마틸다는 '잉글랜드의 레이디(Lady of England)'로 선출되었으나, 거만한 행동과 과도한 금전 요구로 인해 런던 시민과 귀족들의 분노를 사 옥스퍼드로 도망쳤다. 이때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가 추격대를 구성하여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를 생포했다.

로버트와 스티븐을 교환하는 협정으로 풀려난 스티븐은 1141년 9월 윈체스터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1142년 옥스퍼드에서 포위된 마틸다는 노르망디로 도주하였다.

4. 5. 교착 상태와 종전

1138년, 마틸다의 이복동생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헨리 1세의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티븐은 왕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거의 하지 못했으며,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시기를 "19년간의 겨울"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267]

내전 초기, 스티븐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1139년 솔즈베리 주교 로저와 그의 친척들을 체포하고 풀어주지 않아 성직자들의 지지를 잃었다. 1141년 2월, 링컨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 브리스톨에 유폐되었다.[267]

1141년 4월, 마틸다는 윈체스터에서 열린 성직자 회의에서 "잉글랜드의 레이디(Lady of England)"로 선출되었지만, 거만한 행동과 과도한 금전 요구로 민심을 잃고 런던에서 옥스퍼드로 도망쳤다. 이때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가 추격대를 보내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를 생포했다.

로버트와 스티븐의 교환 협정으로 풀려난 스티븐은 1141년 9월 윈체스터에서 승리하고, 1142년에는 옥스퍼드에서 마틸다를 포위했지만, 마틸다는 12월에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1147년, 마틸다의 아들 헨리(훗날 헨리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1차 침공은 실패했지만, 1153년 1월에 다시 침공하여 스티븐과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 헨리가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153년 초, 헨리 피츠엠프레스는 영국으로 돌아와 말메스버리 성을 공격했다. 스티븐은 이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일시적인 휴전에 동의했다. 이후 헨리는 미들랜즈를 거쳐 북쪽으로 이동했고,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몽이 앙주 편에 가담했다.

여름 동안 스티븐은 월링포드 성(Wallingford Castle)을 포위했지만, 헨리가 이를 해제하려 하자 양측은 대치했다. 양측 귀족들은 전투를 피하려 했고, 교회 관계자들이 휴전을 중재했다.

월링포드 사건 이후 스티븐과 헨리는 비밀리에 논의했고, 스티븐의 아들 유스테이스가 평화에 반발했지만 얼마 후 사망했다. 이후 전투는 소극적으로 진행되었고, 스티븐의 형제 블루아의 헨리와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가 평화를 중재했다.

결국 11월, 스티븐과 헨리는 윈체스터에서 윈체스터 조약(Treaty of Winchester)을 체결했다. 스티븐은 헨리를 양자이자 계승자로 인정하고, 헨리는 스티븐에게 봉신을 맹세했다. 스티븐의 남은 아들 윌리엄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땅을 보장받았다. 외국 용병들은 해산되었다.[219]

1153년, 앙주 백작 앙리(훗날 헨리 2세)가 잉글랜드에 상륙하면서 전환점이 찾아왔다. 스티븐은 1152년 왕비를, 1153년 8월에는 장남 우스타슈 4세를 잃고 마틸다파와의 협상에 응했다. 11월 6일, 앙리와 평화 협정(워링포드 협정 또는 윈체스터 협정)을 맺고, 앙리를 후계자로 삼아 화해했다. 스티븐의 차남 기욤 1세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영지를 보전받았다.[260]

화해 후, 불법 성채 파괴와 반란 진압에 힘썼지만, 1154년 10월 25일 스티븐은 도버에서 사망했다. 협정에 따라 앙리가 헨리 2세로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립되었다. 스티븐의 유해는 페버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261]

5. 내전 이후

1140년대 중반, 잉글랜드 내전은 교착 상태에 빠졌지만, 앙주 백작 제프리는 노르망디에서 세력을 강화했다.[163] 1143년, 스티븐은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에게 포위당하는 등 위기에 처했으나, 윌턴 전투에서 집사 윌리엄 마르텔의 활약으로 탈출했다.[164] 스티븐은 윌리엄의 충성심에 대한 보답으로 셔번 성을 내주기도 했다.[166]

1143년 말, 스티븐은 에식스 백작 제프리 드 맨드빌의 반란에 직면했다.[167] 스티븐은 맨드빌을 체포하고 여러 성을 넘겨받았지만, 풀려난 맨드빌은 펜스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69] 스티븐은 다른 반란 진압에 자원을 투입해야 했기에 맨드빌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170]

1144년, 체스터 백작 랜울프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랭커스터 영지를 헨리 왕자와 나누었다.[171] 서부에서는 글로스터 백작과 그 추종자들이 왕당파 영토를 약탈했고, 앙주 백작 제프리는 노르망디를 장악했다.[171],[159]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제프리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했다.[172] 이 시기 스티븐은 이프르의 윌리엄 등에게 의존했고, 백작 네트워크를 거의 활용하지 못했다.[173]

1143년 이후 전쟁은 스티븐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174] 글로스터 백작 마일즈가 사망하고,[175] 제프리 드 맨드빌도 사망하면서[176] 스티븐은 페어링던 성을 탈환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176] 스티븐은 체스터 백작 랜울프와 합의했지만, 다시 그를 체포하고 석방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171] 이러한 스티븐의 행동은 불명예와 불신을 초래했다.[177]

브로뉴 백작령은 스티븐의 아들 윌리엄이 계승했지만, 1159년 윌리엄이 사망하면서 딸 마리에게 상속되었다. 마리는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 달자스의 아들 마티외와 결혼했으나, 1170년 이혼하면서 브로뉴는 마티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마리의 손녀 마틸드가 브라반트 공작 앙리 1세와 결혼하여 그 자손들이 홀란트 백작과 에노 백작이 되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왕비 필리파는 에노 백작가 출신이다.

스티븐은 헨리 2세를 후계자로 인정했지만, 이는 내전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지 않았다.[221] 1154년에는 윌리엄이 헨리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222] 역사가들은 윈체스터 조약을 "불안정한 평화"라고 평가한다.[223]

스티븐은 왕권 재확립을 위해 노력했지만,[224] 1154년 여름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를 만나러 도버로 간 후 병에 걸려 10월 25일 도버 수도원에서 사망했다.[226] 스티븐은 파버샴 수도원에 묻혔다.[226]

5. 1. 윌링포드 조약

마틸다를 몰아낸 뒤 스티븐은 왕위를 지켰다. 그는 장남 외스타슈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1153년 8월 외스타슈가 세인트 에드먼드 수도원에서 사고로 사망하자 실의에 빠졌다. 그는 잉글랜드를 침공해온 헨리와 월링퍼드 조약을 맺었다.[268] 헨리를 차기 왕위계승자로 정하는 대신, 헨리 즉위 후 스티븐의 둘째 아들 윌리엄에게 불로뉴 백작 직위를 주기로 합의했다.

스티븐에게는 정실 소생 자녀가 없었으므로 헨리의 조건을 수용하였다. 이후, 스티븐은 켄트주의 도버에서 사망하였다.

1153년 여름, 스티븐은 주요 앙주 거점인 월링포드 성(Wallingford Castle)을 장기간 포위 공격했다.[211] 월링포드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헨리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포위 공격을 해제하려 했고, 스티븐의 포위군을 역으로 포위했다.[212] 이 소식을 들은 스티븐은 대규모 군대를 모아 옥스퍼드에서 출발했고, 7월 월링포드에서 템즈 강(River Thames)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대치했다.[212]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양측의 귀족들은 공개 전투를 피하려는 듯했다.[213] 그 결과 전투 대신 교회 관계자들이 휴전을 중재했고, 스티븐과 헨리 모두 불만을 표했다.[213]

월링포드 사건 이후 스티븐과 헨리는 전쟁 종식 가능성에 대해 비밀리에 논의했다. 그러나 스티븐의 아들 유스테이스(Eustace)는 월링포드에서의 평화적인 결과에 격분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캠브리지로 돌아가 새로운 전투를 위한 자금을 모았지만, 그곳에서 병들어 다음 달에 사망했다.[214]

월링포드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다소 소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스티븐은 동쪽 영국에서 휴 비고드와 싸우는 동안 헨리에게 옥스퍼드(Oxford)와 스탬퍼드를 빼앗겼지만, 노팅엄 성(Nottingham Castle)은 앙주 측의 함락 시도를 막아냈다.[216] 한편 스티븐의 형제인 블루아의 헨리(Henry of Blois)와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Theobald of Canterbury)는 양측 간의 영구적인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며, 스티븐에게 합의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217] 스티븐과 헨리 피츠엠프레스의 군대는 다시 윈체스터에서 만났고, 두 지도자는 11월에 영구적인 평화 조약을 비준했다.[218] 스티븐은 윈체스터 조약(Treaty of Winchester)을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선포했다. 그는 헨리 피츠엠프레스(Henry FitzEmpress)를 양자이자 계승자로 인정하고, 대신 헨리가 그에게 봉신을 하기로 했다. 스티븐은 헨리의 조언을 경청하기로 약속했지만, 모든 왕권을 유지했다. 스티븐의 남은 아들인 윌리엄은 헨리에게 봉신하고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그의 땅의 안전을 보장받기로 했다. 주요 왕실 성은 헨리를 대신하여 보증인이 소유하고, 스티븐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었다. 수많은 외국 용병들은 해산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다.[219] 스티븐과 헨리는 대성당에서 평화의 입맞춤(kiss of peace)으로 조약을 맺었다.[220]

5. 2. 죽음

마틸다를 몰아낸 뒤 스티븐은 죽을 때까지 왕위를 지켰다. 그는 장남 외스타슈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1153년 8월 외스타슈가 세인트 에드먼드 수도원에서 사고로 죽자 실의에 빠졌다. 이후 잉글랜드를 침공해온 헨리와 월링퍼드 조약을 맺었다.[268] 헨리를 차기 왕위계승자로 정하는 대신, 헨리가 즉위하면 스티븐의 둘째 아들 윌리엄에게 불로뉴 백작 직위를 주기로 합의했다.

스티븐에게는 정실 소생 자녀가 없었기에 결국 헨리의 조건을 수용하였다. 이후, 스티븐은 켄트주의 도버에서 사망하였다.

스티븐이 헨리 2세를 상속자로 인정한 것은 내전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221] 새로운 화폐 발행과 행정 개혁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은 더 오래 살 수도 있었고, 헨리의 대륙에서의 지위는 불안정했다.[221] 스티븐의 아들 윌리엄이 1153년에 왕위를 놓고 헨리에게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1154년에는 윌리엄이 헨리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문이 퍼지는 등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222] 역사가 그레이엄 화이트는 윈체스터 조약을 "불안정한 평화"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1153년 말의 상황이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었다는 현대 역사가들의 판단과 일치한다.[223]

지방에 대한 왕권 재확립, 장기간의 내전 후 분쟁 지역과 영지를 어떤 귀족들이 통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복잡한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224] 스티븐은 1154년 초부터 왕국 전역을 여행하며 활동을 시작했다.[225] 그는 영국 남서부에 대한 왕실 영장을 다시 발부하고, 요크에서 주요 법정을 열어 북부 귀족들에게 왕권이 재확립되고 있음을 알리려 했다.[222] 그러나 1154년 여름, 스티븐은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를 만나기 위해 도버로 갔고, 일부 역사가들은 이때 이미 스티븐이 병들어 가족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본다.[226] 스티븐은 위장병으로 현지 수도원에서 10월 25일 사망했고, 파버샴 수도원에 아내 마틸다, 아들 유스타스와 함께 묻혔다.[226]

6. 유산

스티븐 사후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다. 헨리 2세는 내전 이후 왕권을 강력하게 재확립하기 위해 성들을 해체하고 수입을 늘렸지만, 이러한 경향의 일부는 이미 스티븐 치세 때부터 시작되었다.[227] 헨리 2세 치세의 성 파괴는 과거 생각했던 것만큼 극적이지는 않았고, 그는 왕실 수입을 회복했지만 잉글랜드의 경제는 두 통치자 시대 모두 크게 변하지 않았다.[227]

스티븐의 아들 윌리엄은 헨리 2세에 의해 서리 백작으로 인정받았고, 새로운 정권하에서 번영했지만 헨리 2세와 가끔 마찰을 빚기도 했다.[228] 스티븐의 딸 마틸다(마리 1세, 불로뉴 백작부인) 또한 아버지보다 오래 살았다. 그녀는 스티븐에 의해 수녀원에 들어가 있었지만, 그의 사후 수녀원을 떠나 결혼했다.[222] 스티븐의 둘째 아들 볼드윈과 둘째 딸 마틸다는 1147년 이전에 사망하여 올드게이트의 성 삼위일체 수도원에 묻혔다.[229]

스티븐은 그의 정부인 다메트(Damette) 사이에서 게르바시우스(웨스트민스터 수도원장), 랄프, 아메릭 등 세 명의 사생아를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르바시우스는 1138년 수도원장이 되었지만, 아버지가 죽은 후 1157년 헨리 2세에 의해 축출되었고 얼마 후 사망했다.[230]

7. 자녀

스티븐은 1125년에 마틸다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251] 또한, 정부인 다멧(Damette)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251]

스티븐 왕의 자녀
이름출생년도사망년도비고
볼드윈(Baldwin)1135년 이전런던탑에서 사망, 알드게이트(런던) 성 삼위일체 수도원 매장
우스타슈(Eustace)1127/31년1153년부로뉴 백작
마오(Matilda)1133/34년1137/41년몰랑 백작 발레랑 드 보몽과 결혼
마리(Mary)1136년경1182년부로뉴 백작 부인,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 달자스의 장남 마튀와 결혼. 필리파 드 에노(플랜태저넷 왕조 제7대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의 혈통을 이음.[263]
기욤(William)1137년경1159년부로뉴 백작, 서리 백작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장 저베이스사생아
랄프사생아
아말릭사생아


8. 가계도

잉글랜드 국왕
Reign|재위영어 1066-1087로베르윌리엄 2세
잉글랜드 국왕
Reign|재위영어 1087-1100헨리 1세
잉글랜드 국왕
Reign|재위영어 1100-1135아델라윌리엄마틸다스티븐
잉글랜드 국왕
Reign|재위영어 1135-1154헨리 2세
잉글랜드 국왕
Reign|재위영어 1154-11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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