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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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런던탑은 1078년 윌리엄 1세에 의해 건설된 잉글랜드 런던의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왕궁, 감옥, 조폐국, 동물원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정치범 수감과 처형 장소로도 유명하다. 화이트 타워를 중심으로 이너 워드, 아우터 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는 관광 명소로, 왕실 보물 전시와 까마귀 사육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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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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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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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 히즈 마제스티스 로열 팰리스 앤드 포트리스 오브 더 타워 오브 런던 |
위치 | 타워 햄리츠 |
면적 | 성: 12 에이커 (4.9 헥타르) 타워 자유 구역: 6 에이커 (2.4 헥타르) |
건축 시기 | 화이트 타워: 1078년 내부 구역: 1190년대 재건축: 1285년 부두 확장: 1377–1399년 |
높이 | 27 미터 (89 피트) |
소유주 | 국왕 찰스 3세 (국왕의 권리) |
방문객 수 | 2,790,280 (2023년) |
세계 유산 등재 연도 | 1988년 |
세계 유산 등재 기준 | ii, iv |
세계 유산 지정 번호 | 488 |
세계 유산 국가 | 잉글랜드 |
세계 유산 지역 | 유럽 및 북미 |
국가 지정 문화재 등급 | 영국 1급 영국 2급 |
역사 | |
건축 시작 | 1078년 |
관리 | |
관리 주체 | Historic Royal Palaces |
2. 역사
노르망디 공작인 정복자 윌리엄은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 런던으로 향하면서 요새를 건설하였다.[258][259] 그해 12월, 런던 지도자들은 윌리엄 1세에게 도시를 넘겼다.[260][261][262] 윌리엄 1세는 런던에 임시 요새를 지었는데, 이것이 런던탑의 시초이다.[258]
초기 런던탑은 목재로 지어졌지만, 11세기 말엽 석재로 대체되었다.[266] 1078년 건축을 시작한 화이트 타워는 잉글랜드 최초의 석조 아성으로, 군주의 숙소도 이곳에 있었다.[268][269] 1100년 래널프 플램바드 주교가 런던탑에 수감되면서, 런던탑은 감옥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270]
리처드 1세 시기, 대법관 윌리엄 롱챔프가 런던탑을 증축하였다.[278] 1189년부터 1190년까지 2881GBP 1실링 10펜스가 소요되었으며, 이는 당시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에 건설한 성들의 총비용 7000GBP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279][280] 1199년 리처드 1세가 사망하고 존이 왕위에 올랐으나, 봉건 영주들의 반발로 1214년 런던탑이 포위되기도 했다.[282]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통치 시기인 13세기 동안 런던탑은 크게 확장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283] 헨리 3세는 1216년부터 1227년까지 10000GBP에 가까운 비용을 들여 런던탑을 증축하고, 1240년 아성의 외장을 하얗게 꾸며 '화이트 타워'라는 이름을 붙였다.[226][285] 에드워드 1세는 1275년부터 1285년까지 21000GBP를 들여 런던탑을 개축하고, 옹성을 갖춘 문루와 두 개의 물레방아를 설치했다.[291][293][294]
14세기 초 에드워드 2세 치세에는 왕실 의상서가 런던탑에 설치되어 왕실의 무장과 보물도 관리하게 되었다.[298] 1321년에는 마거릿 드 클레어가 런던탑에 수감된 첫 번째 여성이 되었다.[300] 에드워드 3세는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군주들을 런던탑에 수감하였다.[306] 리처드 2세는 1377년 즉위하면서 런던탑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행진하는 관례를 따랐다.[306] 와트 타일러의 난 당시 런던탑이 반군에 포위되기도 했다.[308]
15세기에는 장미 전쟁으로 런던탑이 포위되고 피해를 입었으나, 총안이 설치되는 등 요새화되었다.[311] 1483년 런던탑의 두 왕자 살해 사건은 런던탑의 가장 악명 높은 사건 중 하나이다.[312]
튜더 왕조 시대부터 런던탑은 왕궁보다는 무기고, 군수 창고, 죄수의 구금처로 주로 사용되었다.[315] 16세기에는 수장령에 반대한 사람들이 런던탑에 구금되었고, 앤 불린도 런던탑에 수감되었다.[322]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종교적·정치적 이유로 런던탑에 갇힌 수인의 수는 절정에 달했다.[322]
15세기부터 군수품 사무소와 무기 관리 사무소가 설치되어 왕실 보물을 경비했고, 17세기에는 왕립 무기고와 군수품 위원회가 설립되어 상비군을 위한 보급을 담당했다.[330][332] 잉글랜드 내전 기간 동안 런던탑은 의회파의 통제하에 있었다.[333] 하노버 왕조 시기에는 런던탑이 보수되었고, 1845년에는 워털루 배럭이 건립되었다.[337]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간첩 혐의로 11명이 런던탑에서 처형되었고,[339]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루돌프 헤스가 런던탑에 구금되었다.[340] 2차 대전 이후 런던탑은 주로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1988년 런던 타워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목록에 추가되었다.[151][152]
2. 1. 건립 초기 (11세기 - 12세기)
노르망디 공작 정복왕 윌리엄은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 런던으로 향하면서 요새를 건설하였다.[258][259] 윌리엄 1세는 캔터베리를 거쳐 런던으로 가는 다리 대신 서더크를 공략하고, 1066년 12월 런던 지도자들에게 도시를 넘겨받았다.[260][261][262] 1066년에서 1087년 사이 윌리엄 1세는 36개의 성을 축조하였고, 둠스데이 북에는 그의 부하들이 더 많은 성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59][263]윌리엄 1세는 자신의 담당사제이자 연대기 기록자인 푸아티에의 윌리엄에게 런던 요새화를 맡겼다. 당시 런던은 에드워드 참회왕이 건설한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옛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있는 행정 중심지였으며, 번영하던 런던 항구는 노르만군에게 꼭 필요했다.[262] 윌리엄 1세는 시티오브런던 외곽에 베이너즈성과 몬트피셰츠성을 건립하고,[266] 템스강변 옛 로마 시대 성벽 남동쪽 구석에 임시 요새를 지었는데, 이것이 런던탑의 시초이다.[258] 최초의 요새는 목책과 해자, 윌리엄 1세를 위한 거처로 구성되었다.[267]

초기 노르만 성들은 대부분 목재였지만, 11세기 말엽 런던탑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성이 석재로 대체되었다.[266] 런던탑의 화이트 타워는 1078년 건축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268] 윌리엄 1세는 로체스터 주교 건둘프에게 축조를 맡겼으나, 1087년 윌리엄 1세 사망 시까지 공사가 완료되지 못했다.[268] 화이트 타워는 잉글랜드 최초의 석조 아성으로, 군주의 숙소도 이곳에 있었다.[269] 1100년 래널프 플램바드 주교가 수감되었으므로, 최소한 그 무렵에는 완공되었을 것이다.[270] 플램바드는 가혹한 세금 수취로 악명이 높았으며, 런던탑의 첫 수감자이자 처음으로 탈출한 사람이다. 1101년 2월 2일, 플램바드는 포도주통에 숨겨온 밧줄을 이용하여 탈출하였다.[272]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1097년 윌리엄 2세가 런던탑 주위에 성벽을 쌓도록 지시하였다고 기록한다. 이는 목책을 석벽으로 교체한 것으로 추정된다.[273] 노르만인의 런던 정복은 도시 구조의 변화도 불러왔다. 토지는 몰수되어 노르만 영주들에게 재분배되었고, 노르만인들은 수백 명의 유대인을 데려왔다.[274] 유대인들은 런던탑 근처에 거주하며 반유대주의 폭력 발생 시 런던탑을 피난처로 삼았다.[274]
1135년 헨리 1세 사망 후, 블루아의 스티븐이 왕위를 찬탈하며 잉글랜드는 무정부시대를 맞았다. 스티븐은 런던과 런던탑을 손에 넣었다. 당시 런던탑 무장관은 조프리 드맨더빌이었는데, 그는 스티븐과 마틸다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다.[276] 조프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276] 조프리가 마틸다와 비밀 회담을 갖자, 스티븐은 조프리를 체포하고 성의 통제권을 포기하게 했다. 이후 런던탑 무장관 직책은 군주가 임명하는 자리가 되었다. 무장관은 성과 수비대를 유지하고, 런던 시정에 관련된 의무도 있었다. 1191년 런던 시장경 신설로 런던탑 무장관의 권한은 줄어들었고, 때로는 둘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277]
2. 2. 증축 및 확장 (13세기)
리처드 1세 시기까지 런던탑은 건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고,[278]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잉글랜드의 내정을 담당하였던 대법관 윌리엄 롱챔프가 런던탑을 증축하였다. 파이프 롤의 기록에 따르면 1189년 12월 3일에서 1190년 11월 11일까지 이어진 런던탑 증축에는 모두 2881GBP 1실링 10펜스의 비용이 들었다.[279] 당시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에 건설한 성들의 총비용은 7000GBP였다.[280] 12세기 연대기 작가인 하우든의 로저는 롱챔프가 성 주위에 해자를 파고 템스강 물을 끌어들여 채우려 하였으나 실패했다고 기록하였다.[232] 롱챔프는 런던탑 무장관도 겸직하였는데, 리처드 1세의 동생이자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에 잉글랜드의 섭정이었던 존과 갈등을 빚었고, 롱챔프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한 런던탑을 견고하게 구축하였다.1199년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 존이 왕좌를 계승하였다. 존은 휘하의 봉신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1214년 존이 윈저성에 있는 동안 봉건 영주들의 군대는 로버트 피츠월터의 지휘 아래 진군하여 런던탑을 포위하였다. 런던탑은 존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할 때까지 포위되었다.[282] 마그나 카르타의 이행과 존의 왕위를 둘러싸고 잉글랜드는 제1차 남작 전쟁이 일어나 내전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존은 1216년 사망하고 만다. 내전은 존의 아들 헨리와 프랑스 왕가의 루이 사이의 왕위 계승전으로 전환되었다. 피츠월터는 루이의 편에 섰으며 런던탑은 여전히 피츠월터의 관할 아래 있었다.[282] 1217년 육상과 해상에서 헨리 3세를 받드는 귀족들이 승리하자 루이는 프랑스로 철수하였다. 당시 헨리 3세의 나이는 9살이었다.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가 통치하던 13세기 동안 런던탑은 더욱 확장되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283] 헨리는 런던탑을 더욱 견고한 요새이자 살기 편한 궁전으로 만들어 그곳에 거주하였다.[284] 1216년에서 1227년까지 지속된 런던탑 증축 공사에는 거의 10000GBP가 들었다. 비용의 대부분은 이너모스트 워드에 신축된 궁전 공사에 쓰였다.[226] 1240년 아성의 외장을 하얗게 꾸몄고 이때부터 런던탑의 아성은 화이트 타워로 불리게 되었다.[285]
1238년 무렵부터 런던탑은 동쪽, 북쪽, 동북쪽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확장은 때때로 소요 때문에 중단되면서 헨리 3세 시기를 거쳐 에드워드 1세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새롭게 확장된 구역들은 템스강에 의한 방어의 이점을 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해자를 파 성벽을 격리시켰다. 동쪽 구역이 확장되면서 런던시 방벽의 일부였던 로마 시기에 세워진 옛 성벽은 런던탑의 방어 시설로 편입되었다.[285] 런던 주민들은 오랫동안 런던탑을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헨리 3세의 성벽 증축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런 이유로 런던인들은 1240년 있었던 문루 붕괴를 축하하였다.[286] 확장 과정에서 주변의 건물들 역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왕실은 런던탑 세인트캐서린 병원과 올드게이트 세인트트리니티 수도원에 그 보상으로 166GBP를 지급하였다.[287]
헨리 3세는 종종 런던탑에서 궁정을 주재하였고 봉신들의 충성이 의심되자 최소 두 번(1236년과 1261년) 이상 런던탑에서 의회를 개회하도록 하였다. 헨리 3세가 마그나 카르타를 따르지 않자 불만에 찬 귀족들은 1258년 시몽 드 몽포르를 앞세우고 헨리 3세를 압박하여 정기 의회 개최 등을 포함한 개혁안에 동의하게 했다. 런던탑을 포기하는 것도 조건 중 하나였다. 당시 헨리 3세는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는 둘째 아들 에드워드를 위해 시칠리아를 정복하고자 하였고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협약하였다. 교황의 용병들이 시칠리아를 침공하면 그에 대한 비용뿐만 아니라 교황이 지고 있던 빚도 갚아주기로 한 것이다. 교황은 이 약속을 믿고 전쟁 비용으로 135000XCM를 사용했지만 헨리는 밀약을 맺은 지 4년이 지나도록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인노첸시오 4세는 약속 이행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헨리 3세의 전쟁 비용을 감당할 마음이 없었다. 결국 1259년 헨리는 귀족들과 옥스퍼드 조항을 맺어 행정권을 의회로 이양하였다.[288] 1261년 용병들의 도움으로 헨리 3세는 런던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귀족들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왕은 어떤 군대의 공격도 받지 않았지만 런던탑에 틀어박혔다. 이로서 런던탑은 다시 한 번 국왕의 아성이 되었다. 1264년 국왕과 귀족들 사이에 다시 한 번 내전이 발생하였고 헨리 3세는 런던탑을 발판삼아 1265년 이브셤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자들을 파문하기 위해 오토부오노 추기경(훗날 교황 하드리아노 5세)이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는데, 이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추기경에게 런던탑을 통제할 권한이 주어지자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1267년 4월 하트퍼드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는 런던시에 입성한 다음 런던탑을 포위했고, “런던탑의 통제권을 외국인에게 맡길 수는 없으며, 성직자에게는 더더욱 맡길 수 없다”고 선언했다.[289] 드 클레어 백작은 많은 군사와 공성 병기를 동원하였으나 런던탑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군대를 물렸고 헨리 3세는 런던을 되찾았다. 이후 그의 치세 동안 런던탑은 평화로웠다.[290]
에드워드 1세는 십자군 원정을 비롯한 많은 원정을 다녔기 때문에 런던에 있던 적은 많지 않지만 1275년에서 1285년까지 21000GBP를 들여 런던탑을 개축하였다. 이는 헨리 3세 통치 기간 전체 동안 런던탑에 들인 돈의 두 배가 넘었다.[291] 에드워드 1세는 런던탑을 개축하면서 자신이 십자군 원정에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공성전에 대비할 방어 시설을 지었다.[291] 그는 웨일스의 귀네드 지역에도 많은 성들을 지었는데 궁수가 성벽 안에서 안전하게 활을 쏠 수 있도록 만든 애로 슬릿을 도입하였다. 동방의 영향을 받은 양식인 애로 슬릿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여러 성들에 도입되었다.[292] 성을 확장하면서 에드워드 1세는 헨리 3세 시기의 해자를 메우고 그 자리에 막벽을 세웠으며 막벽 밖에 새로운 해자를 팠다. 새 성벽엔 옹성을 갖춘 문루가 세워졌고,[293] 성의 자급력을 높이기 위해 두 개의 물레방아를 놓았다.[294]
2. 3. 중세 후기 (14세기 - 15세기)
에드워드 2세의 치세 동안 런던탑과 관련한 소소한 사건들이 있었다.[297] 이 시기 잉글랜드 왕실에는 왕가의 의상을 담당하는 의상서가 설치되었고, 점차 역할이 확대되어 왕실의 무장과 보물도 관리하게 되었으며 런던탑에 사무실을 두고 상비군을 조직하였다.[298]1321년 마거릿 드 클레어Margaret de Clare, Baroness Badlesmere영어가 런던탑에 수감되어 런던탑의 첫 번째 여성 수인이 되었다.[300] 마거릿은 에드워드 2세의 아내인 이사벨 드 프랑스의 리즈 성 입성을 거부하고 왕실 근위대를 상대로 활을 쏘게 하여 여섯 명을 죽였다.[301][302][303] 대체로 신분이 높은 죄수들만 갇혔던 런던탑은[304] 국왕 소유의 감옥 중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간수에게 뇌물을 주고 탈출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1323년 제1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는 런던탑 내부자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였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잉글랜드의 왕비 이사벨과 접선했고, 두 사람은 불륜 관계가 되어 왕을 몰아낼 계획을 꾸몄다. 1326년, 에드워드 2세에 반대하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온 모티머는 런던탑을 점령하고 수감자들을 풀어주었다. 모티머는 이사벨의 조력과 에드워드 2세의 아들 에드워드 3세의 묵인 아래 에드워드 2세의 폐위를 압박했다. 1327년 모티머는 양위를 통해 즉위한 에드워드 3세가 열다섯 살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의 섭정이 되었지만, 1330년 에드워드 3세는 모티머를 다시 런던탑에 가두고 친정을 시작하였다.[305]
에드워드 3세는 주변국과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 프랑스의 장 2세와 같은 군주들을 포로로 잡아 런던탑에 수감하였다. 이 시기에 런던탑에는 많은 귀족들이 포로로 갇혔다.[306] 에드워드 2세가 런던탑을 황폐해지도록 내버려 둔 탓에, 에드워드 3세 때에 이르러 런던탑은 지내기 불편한 장소가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런던탑을 보수하도록 명령했다.[307]
리처드 2세는 1377년 즉위하면서 관례에 따라 런던탑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행진하였다. 이 관례는 적어도 14세기 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1660년까지 계속되었다.[306] 와트 타일러의 난 때, 군주의 거처였던 런던탑은 반군에 포위되었다. 리처드 2세가 와트 타일러와 협상을 위해 런던탑을 비우고 마일엔드로 간 사이에 반군은 런던탑을 점령하고 수장고를 약탈하였다. 군중들은 런던탑에 있던 귀족과 시종들을 붙잡아 타워힐에서 참수하였다.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먼 서드버리는 성 요한 예배실로 들어가 교회의 신성함에 의지하여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군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끌어내었다.[308] 6년 후 런던탑은 다시 시민들에게 포위되었다.[309] 의회를 탄압하던 리처드 2세는 자신의 사촌이던 의회파 랭커스터 백작 헨리를 추방하고 그의 영지를 몰수하고자 하였으나, 1399년 오히려 의회파에 붙잡혀 화이트 타워에 연금되었다. 리처드 2세는 헨리 4세에게 왕위를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308]
15세기 동안 런던탑은 건축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피난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죽은 리처드 2세의 추종자들이 주현절 반란을 일으키자 헨리 4세는 런던탑으로 피신하였다. 이 시기에 런던탑에는 많은 귀족들이 수감되었는데, 나중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는 제임스 1세는 1406년 프랑스를 여행하다 납치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헨리 5세가 백년 전쟁을 일으킨 뒤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하자 런던탑은 많은 프랑스 귀족 포로들을 수감하게 되었다.[310]
15세기 중후반에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랭커스터가와 요크가 사이에 장미 전쟁이 일어났다.[311] 1460년 런던탑은 장미 전쟁의 여파로 다시 한 번 포위되었다. 이번에 탑을 포위한 것은 요크가의 군사들이었다. 런던탑은 포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으나 함락되지 않다가 노샘프턴 전투에서 헨리 6세가 사로잡힌 뒤에야 항복하였다. 1470년 “킹메이커”로 불리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도움으로 헨리 6세는 잠시나마 다시 왕좌를 차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워드 4세가 통치권을 되찾았고 헨리 6세는 런던탑에 구금되었다. 확실치는 않으나 헨리 6세는 아마도 런던탑에서 살해된 것으로 여겨진다.[308] 장미 전쟁 기간 동안 런던탑은 포격을 버틸 수 있도록 요새화되었고 대포와 총을 쏠 수 있도록 총안이 설치되었다.[311]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탑의 두 왕자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번졌다. 이는 런던탑에 얽힌 가장 악명높은 사건 중 하나다.[312] 에드워드 4세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 5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삼촌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왕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스스로 호국경에 올라 섭정이 되었다.[313] 당시 12세의 에드워드 5세는 동생 리처드와 함께 런던탑에 연금되었으며, 1483년 6월 행방이 묘연해졌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새로 왕위에 올라 리처드 3세가 되었다.[312] 그 해 여름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이 리처드 3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번져나갔다.[313] 1674년 화이트 타워 출입문 인근의 12세기에 지어진 건물 근처 3m 깊이의 땅 속에서 인골이 발견되자 이러한 소문은 더욱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대의 고고학 발굴 결과 인골이 발견된 층은 로마 시대의 무덤 자리로 밝혀졌다.[314] 1485년 헨리 튜더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죽이고 헨리 7세로서 왕위에 올라 튜더 왕조를 열었다.[312]
2. 4. 근세 이후 (16세기 - 현재)
튜더 왕조 시대가 시작되면서 런던탑은 점차 왕궁으로 쓰이지 않기 시작했다. 16세기 연대기 작가 래피얼 홀린제드는 “런던탑은 왕이나 여왕이 머무르는 궁전보다는 무기고이자 군수 창고, 죄수의 구금처”로 사용되었다고 기록하였다.[315] 헨리 8세는 1485년에서 1500년까지 런던탑을 열네 번 방문했는데 대체로 한번에 일주일 넘게 머무르지 않았다.[316] 왕실 경비대인 요맨 워더스(Yeoman Warders)는 늦어도 1509년 무렵 창립되었다.[317] 헨리 8세 치세 동안 런던탑은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보수되었다. 1532년 토머스 크롬웰은 3593GBP을 들여 탑을 보수하였고 이를 위해 캉에서 들여온 3천 톤의 석재가 사용되었다.[241] 그렇게 하였어도 런던탑은 새롭게 대두한 공성 무기인 대포의 화력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견고함을 갖추지는 못하였다.[318] 탑의 방어 시설은 보수되었지만 궁전 건물들은 헨리 8세의 죽음 이후 방치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궁전은 더 이상 거처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하였다.[315] 1547년 이후 런던탑은 그 정치적·역사적 상징성이 중요하게 여겨질 때를 제외하면 국왕의 처소로 쓰이지 않았다. 예컨대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는 모두 대관식 직전에만 잠깐 런던탑에 머물렀다.[319]16세기에 런던탑은 음산하고 불길한 감옥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다양한 인물들이 런던탑에 갇혔지만 대개는 고위층 죄수였고 구금 기간도 길지 않았다. 평민을 위한 감옥은 다른 곳에도 이미 많았기에 평민이 런던탑에 갇히는 일은 잘 없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고위층 죄수들은 런던탑 무장 부관을 통해 질 좋은 음식이나 태피스트리 등을 구입할 수 있었고 비교적 편안한 대우를 받았다.[320] 요맨 워더스는 왕실 경호대로 시작되었으나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그들의 주요 임무는 런던탑의 수인을 감시하는 것이었다.[321] 평민들이 주로 수감되던 런던 시내의 플릿 교도소에서 빈번히 발생한 전염병에 수인들이 죽어 나간 것에 비하면 런던탑은 비교적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월터 롤리는 심지어 수감 기간 동안 가족을 런던탑에 불러들였고 거기서 아들도 태어났다.[323] 모든 성이 그렇듯이 원래 런던탑에 죄수를 가두는 일은 어쩌다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1687년 화이트 타워 북서쪽에 “병사 감옥”이 세워지기 전까지 런던탑에는 별도의 감옥이 없었다. 16세기에는 수장령에 반대한 사람들이 대거 런던탑에 구금되었고, 19세기에는 여러 명의 낭만주의자들이 런던탑에 수감되었다.[322] 앤 불린 역시 런던탑의 수인이었다.[322]
런던탑의 감옥 이미지는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종교적·정치적 이유로 런던탑에 갇힌 수인의 수는 절정에 달했다.[322] 고문 시행에는 추밀원의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주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1540년에서 1640년까지 런던탑 수인에 대한 고문은 48건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고문 도구는 랙, 스캐빈저의 딸, 수갑과 족쇄 같은 것이었다.[323] 사지를 잡아 늘리는 고문 도구인 랙은 1447년 당시 런던탑 무장관이었던 엑서터 공작이 잉글랜드에 들여왔기 때문에 엑서터 공작의 딸이란 별칭이 붙었다.[324] 윌리엄 스캐핑턴(William Skeffington)이 런던탑에 들여왔다고 하는[325] 스캐빈저의 딸은 수인의 목과 손목 발목을 연결하는 A자 모양의 구속 도구로 이를 착용하면 몸을 제대로 펼 수 없어 구부린 자세가 되었고 오래 방치되면 코와 귀로 피를 흘렸다.[326] 1605년 화약 음모 사건의 주동자 가이 포크스 역시 런던탑에서 고문을 받았다.[322] 런던탑의 수인에 대한 사형 집행은 주로 런던탑이 아니라 그 북쪽의 타워힐에서 이루어졌는데 400년 동안 112명의 사형이 여기서 집행되었다.[327] 드물긴 하지만 런던탑 내부의 타워 그린 역시 처형 장소로 쓰였는데 20세기가 되기 전에 이곳에서 처형된 수인은 서퍽 공녀 제인 그레이를 포함하여 7명이었다. 타워 그린은 공개 처형이 위험하다고 여겨진 수인들을 처형할 때만 쓰였다.[327] 1554년 2월 12일 제인 그레이의 사형 집행 이후[328] 메리 1세는 자신의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토머스 와이어트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런던탑에 가두었다. 엘리자베스는 훗날 엘리자베스 1세가 되었다.[329]
15세기에 들어 군수품 사무소와 무기 관리 사무소가 설치되어 이전까지 경비대가 담당하던 왕실 보물에 대한 경비 업무를 인수하였다.[330] 1661년 이전까지 잉글랜드에는 상비군이 없었고 전시에만 직업 군인들을 고용하였다.[331] 17세기에 들어 왕립 무기고와 군수품 위원회가 설립되어 상비군을 위한 보급을 확보하였다. 군수품 위원회는 화이트 타워에 사무실을 두고 주변 건물을 비축 창고로 사용하였다. 1885년 위원회가 해산되고 그 업무는 1869년 위원회가 쓰던 자리에 설립된 전쟁성 산하의 왕립 육군 보급대가 이어받았다.[332]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자 1640년 런던의 민병대는 런던탑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런던탑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포대를 구축하였으나 잉글랜드 내전 기간 동안 런던탑에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1642년 찰스 1세는 다섯 명의 의원을 체포하려다가 실패하자 런던을 탈출했다. 한편 런던탑의 민병대는 의회파로 돌아섰고 무장 부관 존 바이런은 왕의 허락을 얻어 런던탑을 포기하였다. 이로서 의회파는 내전 기간 동안 런던탑의 통제권을 쥐게 되었다.[333]
1661년 찰스 2세의 대관식에서도 관례에 따라 런던탑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의 행진이 있었지만 당시 런던탑은 이미 쇠락하여 더 이상 밤을 지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334] 스튜어트 왕가의 군주들은 주로 군수품 사무소의 지원 하에 런던탑의 건물들을 개축하였다. 1663년 4000GBP을 약간 상회하는 비용을 들여 새로운 창고를 지었고 이너 워드에 세워진 이 건물은 오늘날 새 무기고로 불린다.[246] 17세기에 들어 런던탑을 당시 군사 요새의 전형적 양식이었던 성형요새로 개조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1670년 군사들을 위한 병영인 아이리시 배럭이 추가되었다.[335]

하노버 왕조는 왕위에 오른 뒤 불확실한 정세와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런던탑을 보수했다. 스튜어트 시대에 만들어진 포대는 퇴락해 있었다. 대포의 수는 118문에서 45문으로 줄어 있었고, 당대의 어느 논평가는 런던탑이 “공성전을 준비한 군대를 상대로 스물네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평했다.[336] 1774년 옹성을 갖춘 문루가 남쪽 아우터 워드의 해자 건너편에 추가되었다. 1830년 런던탑 무장관이었던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해자에 쌓인 흙을 퍼냈지만 경비 부대에 대한 물 공급을 고려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1841년에는 물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부대 안에 전염병이 돌아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자 해자의 썩은 물을 비우고 다시 흙으로 채워 넣게 되었다. 이 작업은 1843년에 시작되어 2년 후에 끝났다. 1845년에는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영인 워털루 배럭이 화이트 타워 북동쪽에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오늘날 왕립 수발총대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337] 1828년에서 1858년까지 차티즘의 열기가 달아오르자 소요를 우려하여 런던탑을 다시 요새화하자는 요구가 있었다. 이것은 군사적 용도로 런던탑을 대규모로 보수한 마지막 사례였다. 현재까지 보존된 포대와 총기 사용을 위한 시설은 대부분 이 시기의 것이다.[338]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간첩 혐의로 11명이 런던탑에서 처형되었다.[339]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런던탑은 다시 한 번 전쟁 포로를 수용하게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자대리였던 루돌프 헤스는 1941년 5월 10일에 화평안을 제안한다는 이유로 직접 비행기를 몰고 영국으로 건너왔으나 체포되었다. 그는 4일 동안 런던탑에 구금되었다. 헤스는 런던탑에 구금된 마지막 국사범이었다.[340] 런던탑에서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독일의 간첩인 요제프 야콥스로 1941년 8월 15일에 총살되었다.[341] 2차 대전은 런던탑이 요새로 사용된 마지막 시기이다. 바다사자 작전으로 독일군의 영국 침공이 예상되자 런던탑은 인근의 창고, 왕립 조폐국과 함께 런던의 최후 방어 기지로 선정되었다.[342]
제1차 세계 대전 중 런던 타워에 떨어진 폭탄은 하나뿐이었고(해자에 무사히 떨어짐) 제2차 세계 대전은 더 큰 흔적을 남겼다. 1940년 9월 23일, 블리츠 동안 고성능 폭탄이 성에 피해를 입혀 여러 건물이 파괴되었고, 화이트 타워는 간신히 피해를 면했다. 전쟁 후 피해가 복구되었고 런던 타워는 일반에게 다시 공개되었다.[142]
화이트 타워의 박격포실에서 발생한 1974년 폭탄 테러로 1명이 사망하고 41명이 부상했다. 폭발에 대한 책임을 주장한 사람은 없었지만, 경찰은 IRA가 배후에 있다는 의혹을 조사했다.[143]
21세기에 들어서 런던 타워의 주요 역할은 관광이다. 20세기 후반에 왕립 병참단의 나머지 일상적인 군사 활동이 축소되고 성에서 이전되었다.[142] 그러나 런던 타워에는 여전히 왕립 퓨실리어 연대의 연대 본부와 그 전신인 왕립 퓨실리어를 위한 박물관이 있다.[144][145] 또한 버킹엄 궁전에서 국왕 근위병을 제공하는 부대의 분견대가 런던 타워에서 경비를 서고, 여왕 근위병과 함께 매일 열쇠 인수식에 참여한다.[146][147][148] 일년에 여러 차례 예포가 명예 포병대에 의해 런던 타워에서 발사되는데, 왕실 행사에는 62발, 다른 행사에는 41발이다.[149]

1990년부터 런던 타워는 정부나 왕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지 않는 독립 자선 단체인 역사적인 왕실 궁전이 관리하고 있다.[150] 1988년 런던 타워는 세계적인 중요성을 인정받고 유적지를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목록에 추가되었다.[151][152] 그러나 인근에 고층 빌딩이 건설되는 등 최근의 개발로 런던 타워는 유엔의 세계유산 위기에 처한 목록에 추가될 위기에 처했다.[153] 중세 궁전의 유적은 2006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어 방문객들은 복원된 방들을 둘러볼 수 있다.[154] 런던 타워 관리관의 직책은 런던 타워에서 가장 높은 직책이지만,[155] 일상적인 행정 업무는 거주 총독에게 위임된다.[156] 관리관은 5년 임기로 임명된다. 오늘날 이는 주로 의례적인 직책이지만, 관리관은 또한 역사적인 왕실 궁전과 왕립 무기고의 이사이기도 하다. 고든 메신저 장군이 2022년 관리관으로 임명되었다.[157]
까마귀가 없으면 왕국이 멸망한다는 믿음에 따라 적어도 6마리의 까마귀가 항상 런던 타워에 있다.[158] 그들은 까마귀 관리인(여왕 근위병 중 한 명)의 관리를 받고 있다.[159] 여왕 근위병들은 의례적인 임무 외에도 런던 타워를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110][118]
3. 건축
런던탑은 크게 세 곳의 안뜰, 즉 "워드"로 나뉜다. 가장 안쪽의 이너모스트 워드에는 화이트 타워가 있고, 이를 북쪽, 동쪽, 서쪽으로 둘러싼 이너 워드는 리처드 1세 시기에 지어졌다. 에드워드 1세는 바깥쪽 안뜰인 아우터 워드와 외곽 성벽을 건축하여 1285년 완공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이 있었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에드워드 1세 시기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213] 성의 면적은 12acre이고, 추가로 성 주변에 6acre의 리버티(보안상의 이유로 주변을 정리한 구역)가 있다.[213]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런던탑에는 항시적인 고문실은 없었지만, 화이트 타워에 종종 고문대인 랙이 설치되기도 했다.[215] 에드워드 1세는 물품 하역을 위해 런던탑 남측에 부두를 설치했고, 리처드 2세가 이를 오늘날의 크기로 확장했다.[216]
런던탑 건축에는 여러 가지 건축 자재와 양식이 사용되었다.
구분 | 내용 |
---|---|
건축 자재 | 주로 켄트 지방의 석회암과 런던 주위의 이암이 사용되었다. 외장재로는 석회암이 쓰였는데, 원래는 노르망디의 캉에서 가져온 캉 스톤이 쓰였지만, 17세기와 18세기에 포틀랜드 스톤으로 대체되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221] |
건축 양식 | 화이트 타워는 노르만 양식의 아성으로, 11세기 유럽의 궁전들 가운데 가장 완전한 궁전으로 평가받는다.[219] 13세기에 세워진 뷰챔프 타워는 로마인들이 영국을 떠난 이후 영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대규모 벽돌 건축물이다.[238] 워털루 블록은 튜더 양식으로 세부 장식을 한 고딕 복고양식 건물이다.[248] |
3. 1. 배치
런던탑의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방어 시설은 앵글로색슨족의 도시였던 런던을 내려다보는 방향에 있다. 영국의 고고학자 앨런 빈스는 이것이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피지배민이 된 앵글로색슨족의 반란을 우려한 의도적인 설계라고 본다.[211] 런던탑은 주변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축물로서 템스강을 지나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212]성은 크게 세 곳의 “워드”(ward), 즉 안뜰로 나뉜다.
- 가장 안쪽 안뜰인 이너모스트 워드는 가장 먼저 지어진 부분으로서 화이트 타워가 자리잡고 있다.
- 이너모스트 워드를 북쪽, 동쪽, 서쪽으로 둘러싼 안뜰인 이너 워드는 리처드 1세(1189년–1199년)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 에드워드 1세가 바깥쪽 안뜰인 아우터 워드와 외곽 성벽을 건축하여 1285년 완공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증축이 있었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에드워드 1세 시기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 성의 면적은 12acre이고 추가로 성 주변에 6acre의 리버티가 있다. 리버티는 보안상의 이유로 주변을 정리한 구역이다.[213] 헨리 3세는 성 주위 구역에 방해물을 제거하라고 명령했고 그것이 리버티의 기원이 되었다.[214]
널리 퍼진 이야기와는 달리 런던탑엔 항시적인 고문실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고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화이트 타워에는 종종 고문대인 랙이 설치되었다.[215] 에드워드 1세가 물품의 하역을 위해 런던탑 남측에 부두를 설치했고 리처드 2세가 이를 오늘날의 크기로 확장했다.[216]

3. 2. 화이트 타워
화이트 타워는 런던탑의 아성으로, 중세 성에서 가장 견고한 구조물이자 군주의 거처였다.[217] 군사 역사학자 앨런 브라운은 "그 거대한 탑(화이트 타워)은 견고함과 장엄함, 귀족적인 처소를 갖춘 탁월한 아성이었다"라고 평가했다.[218] 화이트 타워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아성 가운데 하나였으며,[268] "11세기 유럽의 궁전들 가운데 가장 완전한 궁전"으로 묘사되었다.[219]
화이트 타워는 연결된 부속 탑들을 제외하고 가로 36m, 세로 32m이며, 남쪽 흉벽의 높이는 27m이다. 원래는 기반층, 출입층, 위층의 3층 구조였다. 남쪽에 낸 출입구는 노르만 양식 아성의 특징대로 지면에서 높이 떨어져 있었고, 방어 시 제거할 수 있는 나무 계단을 통해 드나들었다. 헨리 2세(1154년 - 1189년) 때 출입구 외곽에 방어용 성문을 추가했지만,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각 층은 세 개의 방으로 나뉘었는데, 서쪽이 가장 크고 북동쪽 방이 작았다. 출입층과 위층의 남동쪽에는 예배실이 있었다.[220] 서쪽 모서리에는 정방형 탑, 북동쪽에는 나선 계단이 있는 원형 탑, 남동쪽 모서리에는 예배실의 후진이 원호를 그리며 튀어나와 있다. 방어뿐 아니라 편안한 생활도 고려하여 벽 안에 화장실을 마련하고, 난방용 벽난로도 네 곳에 설치했다.[219]
주로 켄트 지방의 석회암을 사용했고, 런던 주위의 이암도 함께 사용했다. 외장재로는 석회암을 썼는데, 원래는 노르망디의 캉에서 가져온 캉 스톤을 사용했지만, 17세기와 18세기에 포틀랜드 스톤으로 대체되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8세기에 창문 크기를 키우면서 남쪽 벽의 창문 두 개만 (복원되어) 예전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221]
화이트 타워는 언덕 옆면을 깎아 지었기 때문에 북면 기반층 일부는 지하이다.[222] 대부분의 아성처럼[223] 바닥층은 창고로 사용했고, 지하층 방 중 하나에는 우물이 있었다. 최초 건축 당시와 평면 배치는 큰 차이가 없지만, 내부 장식은 대부분 18세기에 개조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바닥을 낮추고 나무 궁륭을 벽돌로 바꾼 것이다.[222] 기반층에는 채광을 위한 좁은 홈들이 있다.[219]

출입층은 런던탑 무장관과 부관 등 고위 관리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에 폐쇄되었다가 1973년에 다시 열린 남측 출입문으로 들어가 동쪽의 작은 방을 지나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남동쪽 구석에는 성 요한 예배실의 크립트가 있으며, 동쪽 방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다. 크립트 북쪽 벽에는 벽감이 있다. 조프리 파넬은 "창문이 없는 형태와 하나뿐인 출입문을 고려할 때 이곳은 왕실의 보물과 중요 문건을 보관하기 위한 수장고로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222]
위층 서쪽에는 그레이트 홀이, 동쪽에는 거실 두 개가 딸려 있다. 거실은 둘 다 지붕으로 덮여 있고 벽 속 회랑에 둘러싸여 있다. 남동쪽에는 성 요한 예배실이 있다. 최상층은 15세기 무렵 현재의 지붕과 함께 지어졌다.[220][224] 처음에는 예배실이 없었지만, 흉벽을 추가하면서 건물에서 튀어나온 형태로 덧붙여 건축하였다.[222] 탑의 기능과 설계가 계속 변화하면서, 현재는 예배실을 제외하고는 만들어졌을 당시의 인테리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270] 현재의 예배실은 노르만 왕조 시기의 건축물이 연상되도록 단순하고 꾸밈없는 모습이지만, 헨리 3세 재위 기간(13세기)에는 금장 십자가, 성모 마리아와 성 삼위를 나타낸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었다.[225]
3. 3. 이너모스트 워드
런던탑의 가장 안쪽에 있는 안뜰인 이너모스트 워드는 화이트 타워 바로 남쪽에 있으며 템스강변과 맞닿아 있다. 11세기에 지어진 헨 도멘 등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런던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 이너모스트 워드는 목조 건물들로 채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늦어도 1170년대 이전부터 왕의 처소가 화이트 타워에서 이너모스트 워드로 점차 확장되기 시작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221] 1220년대와 1230년대에는 왕의 처소가 개조되고 확장되어 윈저성과 같은 다른 궁전들과 견줄 만하게 되었다.[226] 1220년대에 이너모스트 워드와 템스강 사이를 성벽으로 막고 경계를 위한 망루인 웨이크필드 타워와 랜턴 타워를 조성하였다.[283] 두 망루는 각각 왕비와 왕을 위한 처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헨리 3세 시기에 왕비의 처소는 백색으로 칠하고 꽃을 그려 넣었으며 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 이너모스트 워드 남쪽, 두 망루 사이에는 그레이트 홀이 있었다.[227] 그 구조는 헨리 3세 시기에 지어진 윈체스터 성의 것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조금 작았다.[228] 웨이크필드 타워 옆에는 군주의 거처와 통하는 은밀한 샛문이 있었다. 이너모스트 워드는 원래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1220년대에 메워졌다. 비슷한 시기에 이너모스트 워드에 부엌이 들어섰다.[229] 1666년에서 1676년 사이에 이너모스트 워드에 있던 궁전 건물들은 해체되었다.[230] 화이트 타워 주변에는 시야를 가릴 만한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되었고, 아성에 들어서려는 사람은 누구든 개활지를 통과해야만 했다. 화이트 타워의 수장고가 철거되자 영국의 대관보기는 마틴 타워로 옮겨졌다.[231]
3. 4. 이너 워드
사자심왕 리처드 시기에 최내측 워드 서쪽에 해자를 파서 런던탑의 크기를 두 배로 확장하면서 만들어졌다.[232][233] 헨리 3세가 이너 워드의 동쪽과 북쪽에 성벽을 쌓았고, 이너 워드의 크기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234] 성벽의 아홉 망루 중 완전히 새로 지어진 두 개를 제외하면 헨리 3세 시대의 건축물은 대부분 현재까지 남아 있다.[235] 웨이크필드 타워와 랜턴 타워 사이에 있는 최내측 워드의 성벽은 이너 워드의 막벽 역할도 겸한다.[236]이너 워드의 주출입문은 아마도 오늘날 뷰챔프 타워 자리에 있었던 서쪽 막벽의 문루였을 것이다. 이너 워드의 서쪽 막벽은 에드워드 1세 시기에 개축되었다.[237] 13세기에 세워진 뷰챔프 타워는 로마인들이 영국을 떠난 5세기 이후 영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대규모 벽돌 건축물이었다.[238]
현재 이너 워드의 막벽에는 13개의 망루가 세워져 있는데, 남서쪽 구석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벨 타워, 뷰챔프, 데버루, 플린트, 보이어, 브릭, 마틴, 콘스터블, 브로드 애로, 솔트, 랜턴, 웨이크필드, 블러디 타워로 불린다.[236] 이들 망루는 적군에 측면 사격을 할 수 있는 위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안에 숙소도 있었다. 벨 타워에는 적군의 공격을 알리는 종이 달려 있었다. 보이어 타워에는 장궁, 쇠뇌, 투석기 따위를 제작하던 왕실 궁장인의 작업실이 있었기에 “보이어”(Bowyer, 궁장인)라는 이름이 붙었다. 랜턴 타워 꼭대기에 있는 포탑은 밤이 되면 탑에 접근하는 교통을 위한 등대로 사용되었다.[239]

헨리 3세가 이너 워드의 막벽을 건축하면서 원래 런던탑 밖에 있던 노르만 양식의 속박된 성 베드로 교회가 성 안으로 편입되었다. 헨리 3세는 교회에 유리창을 내었고 자신과 왕비를 위한 좌석을 설치했다.[235] 에드워드 1세는 300GBP의 비용을 들여 교회를 개축하였고[240] 1519년 헨리 8세가 다시 개축하였다. 교회 내부가 19세기에 새로 꾸며지긴 했지만 교회 건물의 구조는 헨리 8세 때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241]
이너 워드를 만들면서 웨이크필드 타워 바로 옆에 세운 블러디 타워에는 템스강에서 런던탑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문이 달려 있었다. 수문에는 방어를 위해 내려닫이 창살문인 포트컬리스를 달았다.[242] 블러디 타워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런던탑의 두 왕자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16세기에 붙은 것이다.[243] 1339년에서 1341년 사이에 막벽의 벨 타워와 솔트 타워에 문루가 세워졌다.[244]
튜더 왕조 시기에 이너 워드 북쪽 안뜰에 군수품 창고가 세워졌다.[245] 스튜어트 왕조 시기에는 군수품 사무소의 지원 하에 이너 워드 건물들을 개축하였다. 1663년 4000GBP을 조금 넘기는 비용을 들여 이너 워드에 새 창고가 건설되었다. 이 건물은 현재 뉴 아머리즈(New Armouries, 새 무기고)라고 불린다.[246] 1688년에는 튜더 시기 화이트 타워 북쪽에 세워졌던 창고들을 허물고 같은 자리에 새로 커다란 창고를 지었으나[247] 184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자리에 세워진 워털루 블록은 튜더 양식으로 세부 장식을 한 고딕 복고양식 건물로서[248] 원래는 병영으로 쓰이다가 오늘날에는 지하실을 왕가 수장고로 사용하고 있다.[249]
3. 5. 아우터 워드
에드워드 1세가 런던탑을 증축하면서 세 번째 안뜰인 아우터 워드가 만들어졌다. 같은 시기에 성의 북서쪽에 레그스 마운트(Legge's Mount)로 불리는 보루가 건축되었다. 북동쪽의 보루인 브래스 마운트(Brass Mount)는 그보다 나중에 지어졌다. 동쪽 성벽을 따라 세 개의 사각형 탑이 지어졌지만 1843년 해체되었다. 흔히 레그의 보루가 튜더 왕조 시기에 지어졌다고 하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는 이 보루가 에드워드 1세 시기에 건축되었음을 시사한다.[250] 레그의 보루 남쪽에 남아 있는 흉벽은 런던탑의 흉벽 가운데 유일하게 중세 시기의 것이 남은 것이다. 흉벽의 나머지 부분은 빅토리아 시대에 다시 세워졌다.[251]아우터 워드가 만들어지면서 그 주위로 폭 50m의 새로운 해자가 놓였다.[252] 해자 중앙의 깊이는 지금보다 4.5m 더 깊었다.[250] 아우터 워드에 새 막벽을 건축함으로써 옛 출입문은 시야에서 가려지고 역할이 애매하게 되었다. 새 성벽의 출입구는 성벽의 남서쪽에 세워졌다. 출입구 건물은 안쪽 문루와 바깥쪽 문루, 감시 망루로 이루어져 있었다. 늦어도 1330년대부터 런던탑이 왕실 동물원으로 사용되면서 새 출입구 건물은 라이언 타워로 불리게 되었다.[253] 라이언 타워는 훗날 해체되었다.[254]
에드워드 1세는 과거 템스강에 잠겨 있던 땅을 따라 런던탑 남쪽에 새로 성벽을 지었고, 1275년에서 1279년 사이 이 성벽에 문루인 토머스 타워를 세웠다. 이 문루는 훗날 트레이터스 게이트(배신자의 문)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는 튜더 시기에 이 문을 통해 죄수들을 런던탑에 보냈기 때문이다. 트레이터스 게이트는 블러디 타워를 대신하여 수문으로 쓰였다. 그 부두에는 강변에서 공격해 올 경우를 대비하여 궁수가 틈새로 활을 쏠 수 있는 애로슬릿을 설치하였고 1층에는 화려하게 꾸민 숙소가 있었다.[255] 에드워드 1세는 또한 왕립 조폐국을 런던탑으로 옮겼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아우터 워드나 라이언 타워로 추정된다.[256] 이후 1560년에 이르면 조폐국은 솔트 타워 부근으로 이전해 있었다.[257] 1348년에서 1355년까지 국왕 전용의 두번째 수문인 크레이들 타워가 토머스 타워 동쪽에 증축되었다.[244]
4. 기타 시설
13세기부터 1834년까지 런던탑은 왕립동물원이었다. 존 왕 시절인 1210년에서 1212년 사이의 기록에는 사자 관리인에게 급여를 지급했다는 내용이 있어, 이미 런던탑에서 야생 동물을 길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375][376][377] 헨리 3세 시기에는 왕립 머내저리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1235년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헨리 3세에게 표범 세 마리를 선물했고, 1252년에는 노르웨이의 호콘 4세가 북극곰 한 마리를 선물했으며, 1254년 혹은 1255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아프리카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오는 등 다양한 동물들이 런던탑에서 길러졌다.[378][274][379][380][377][381]
18세기에 머내저리는 대중에게 유료로 공개되었으며, 1828년 당시 60종 280마리의 동물을 사육했다.[377][385][389] 1830년 조지 4세 사망 이후, 웰링턴 공작의 명에 따라 머내저리는 폐쇄되었고, 동물들은 대부분 런던 동물원으로 이관되었다.[390]
런던탑은 헨리 3세 시대부터 왕관과 보주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왕관, 보주, 보석, 왕홀, 검 등 왕실의 상징물은 특별히 마련된 수장고에 보관되었다.[366] 잉글랜드 내전 중인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은 수장고의 귀금속을 조폐국으로 가져가 녹여 동전으로 만들게 했고, 이 과정에서 왕관도 통째로 녹여졌다.[367] 1660년 왕정 복고 당시에는 12세기에 제작된 은수저 하나와 의례용 검 세 자루만 남아있었다.[368] 1994년부터 워털루 블록의 수장고에서 왕관과 보주를 대중에게 전시하고 있다.[372]
4. 1. 왕립 조폐국
에드워드 1세는 왕립 조폐국을 런던탑으로 옮겼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아우터 워드나 라이언 타워로 추정된다.[256] 이후 1560년에 이르면 조폐국은 솔트 타워 부근으로 이전해 있었다.[257]4. 2. 왕립 머내저리 (동물원)
존 왕 시절인 1210년에서 1212년 사이의 기록에는 사자 관리인에게 급여를 지급했다는 내용이 있어, 이미 런던탑에서 야생 동물을 길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375][376][377]
헨리 3세 시기에는 왕립 머내저리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1235년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헨리 3세에게 표범 세 마리를 선물했고, 이 표범들은 런던탑에서 길러졌다.[378] 1252년에는 노르웨이의 호콘 4세가 북극곰 한 마리를 선물했는데, 이 북극곰은 사슬에 묶인 채로 템스강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아 런던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274][379][380] 1254년 혹은 1255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아프리카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와, 이를 위해 길이 12.2m, 너비 6.1m의 목제 건물이 지어졌다.[377][381] 이 코끼리는 1258년에 죽었는데, 적포도주를 먹였기 때문이라는 설과 잉글랜드의 추운 날씨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382]
1288년 에드워드 1세는 사자와 스라소니를 보살피기 위해 처음으로 동물 사육관을 공식 임명하였다.[383] 에드워드 3세는 사자 두 마리와 표범 한 마리, 삵 두 마리를 추가했고, 막시밀리안 1세 황제는 헨리 8세에게 표범, 삵, 자칼, 갈색곰, 하이에나와 같은 야생 동물을 선물했다.[384] 1436년 헨리 6세 시기에 모든 사자들이 죽자 사육관 윌리엄 커비는 실직하게 되었다.[383]
역사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1세가 1277년 반원형 구조물을 만들고 사자를 길렀기 때문에 이곳의 보루에 라이언 타워라는 이름이 붙었다. 1335년 기록에는 사자와 표범 우리를 잠그는 열쇠와 자물쇠를 이 보루의 서쪽 출입문에 두었다고 적혀있다. 1500년대에 이 구역은 머내저리라고 불렸다.[377] 1604년에서 1606년 사이에 머내저리는 해자와 라이언 타워를 마주하는 훈련장에 있었다. 왕실이 사자를 둘러볼 수 있도록 전망대가 세워졌다. 제임스 1세 시기인 1657년에는 6마리의 사자가 있었고, 1708년에는 11마리로 늘었다. 이 외에도 다른 고양이과 동물들과 독수리, 올빼미, 자칼 등을 길렀다고 한다.[377]
18세기에 머내저리는 대중에게 유료로 공개되었다. 입장료는 1.5펜스였고, 사자에게 먹이로 줄 개나 고양이를 돈 대신 받기도 하였다. 18세기 말 입장료는 9펜스로 올랐다.[377][385] 특히 인기를 끌었던 동물은 올드 마틴으로 불린 회색곰으로, 1811년 허드슨 베이 회사가 조지 3세에게 헌사한 것이었다.[386][387] 1800년 기록에는 “호랑이, 표범, 하이에나, 비비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원숭이, 늑대, 그 밖의 동물들”을 사육하였다고 한다.[388] 1828년 당시의 사육 목록은 60종의 동물 280마리로 늘어나 있었으며, 당시 사육관은 알프레드 콥스였다.[389]
1830년에 조지 4세가 사망한 이후, 웰링턴 공작의 명에 따라 머내저리는 폐쇄되었다. 기르던 동물의 대부분은 1831년에 런던 동물원으로 이관되었다. 런던 동물원은 1828년에 개장하였다.[390] 런던탑의 야생 동물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은 것들은 1835년에 리젠츠 파크로 옮겨졌다. 그렇게 된 계기는 확실하지 않은데, 사자 한 마리가 병사를 물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391][392] 원숭이 한 마리가 선원을 물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377][393] 1852년에 머내저리는 완전히 철거되었으나, 사육관은 평생 동안 라이언 타워에 거주할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동물들이 모두 건물을 떠난 지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언 타워는 1853년에 마지막 사육관인 콥스가 사망한 뒤에야 철거되었다.[391]
1999년에는 사자 우리가 발굴되었다. 가로 2m, 세로 3m의 크기로 다 큰 사자가 지내기엔 매우 비좁은 공간이었다.[394] 2008년 런던탑 해자에서 바버리사자 수컷 두 마리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바버리사자는 오늘날 야생에서는 이미 멸종하였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한 마리는 1280년에서 1385년 사이에, 다른 한 마리는 1420년에서 1480년 사이에 런던탑에서 기른 것으로 보인다.[376] 2011년 영국의 철사 공예 예술가 켄드라 헤이스트는 두 사자를 기념하는 조형물을 런던탑에 세웠다.[395]
4. 3. 왕관과 보주 (Crown Jewels)
런던탑이 왕관과 보주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된 것은 헨리 3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왕실의 상징물인 왕관, 보주, 보석, 왕홀, 검 등은 특별히 마련된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헨리 3세는 정부와 독립적으로 왕실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수장고를 만들고 관리관을 임명했다.[366] 관리관의 보수는 높았는데, 에드워드 3세 시기에는 매일 12펜스를 받았다. 관리관의 업무는 점차 확대되어 왕실 소유의 금은보석을 구입하고 왕실 금세공인과 보석세공인을 고용하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366]잉글랜드 내전이 한창이던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은 수장고의 귀금속을 조폐국으로 가져가 녹여 동전으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왕관 역시 통째로 녹여졌다.[367] 1660년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 수장고에 남은 것은 12세기에 제작된 은수저 하나와 의례용 검 세 자루뿐이었다(팔려나간 물건 중 일부는 이후 왕실에 반환되었다).[368] 옛 보물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었고, 찰스 1세 시기의 그림을 참고하여 1661년 찰스 2세의 대관식을 위해 새로운 보물들을 만들 수 있었다. 다만, 보주는 왕실의 재산이 부족하여 구입할 수 없어 대여해야 했다.[369]
1669년에는 기존의 수장고가 철거되었고,[231] 마틴 타워가 새로운 수장고가 되어 1841년까지 사용되었다.[370] 이곳에서 대중은 돈을 내고 왕관과 보주를 관람할 수 있었다. 1671년, 스스로를 “대령”이라 칭하던 토머스 블러드는 이를 이용하여 수장고에서 왕관과 보주를 훔치려 했다.[344] 블러드와 공모자들은 목사로 위장하여 여러 차례 런던탑에 들어가 수장고 관리인의 환심을 샀다. 기회를 틈타 관리관을 결박하고 재갈을 물린 뒤 제국관과 보주, 홀을 훔쳐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 관리관의 아들이 나타나 경종을 울리면서 실패했다.[367][371] 블러드는 말을 타고 런던탑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왕관과 대부분의 보물은 회수되었지만, 일부 보석은 끝내 찾지 못했다.
1994년부터 워털루 블록의 수장고에서 왕관과 보주를 대중에게 전시하고 있다. 23,578점의 보석, 영국의 제국관, 8백 년 된 대관식 의례용 숟가락,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대관식에서 사용되는 성 에드워드 왕관과 같은 보물을 관람할 수 있다.[372][373][374]
5. 런던탑의 까마귀
런던탑에는 세계 최대급 크기의 까마귀가 일정 수 사육되고 있다. 까마귀는 대형 잡식성 조류로, 1666년에 발생한 런던 대화재로 인한 다량의 사망자 시체를 먹이로 크게 번성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기록된 사망자는 겨우 5명이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시민의 사망은 기록되지 않았고, 불의 열이 많은 희생자들을 화장하여 인식 가능한 시체를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런던탑에도 다수의 까마귀가 서식했지만, 찰스 2세가 구제를 생각했을 때, 점쟁이에게 “까마귀가 없어지면 런던탑이 무너지고, 런던탑을 잃은 영국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 이후로 런던탑에서는 일정 수의 까마귀를 사육하는 풍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영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아서왕 전설에서 아서왕이 마법으로 까마귀로 변해 버렸다는 전설도 있으며, 까마귀를 죽이는 것은 아서왕에 대한 반역 행위라고도 하여, 옛날부터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여겨져 왔다.
현재도 런던탑의 까마귀는 “레이븐 마스터(Raven Master)”라고 불리는 직책의 왕국 근위병에 의해 길러지고 있다. 날갯짓을 하지 못하도록 날개깃을 잘라 도망치지 못하게 한 까마귀들이 돼지 뼈를 먹이로 반쯤 방사 사육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조류 인플루엔자 감염을 우려하여 사육장을 설치하여 사육으로 전환되고 있다. 약 25년의 수명을 가진 까마귀이지만, 사육 수가 일정 수를 밑돌면 야생 까마귀를 포획하여 보충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인공 번식에도 성공한 모양이다. 참고로 까마귀는 성질이 사나워서 함부로 관광객이 괴롭히면 공격받는 경우도 있다는 경고가 나와 있다.
6. 유령
헨리 8세에 의해 1536년 참수당한 앤 불린은 런던탑에 출몰하는 유령으로도 유명하다. 속설에는 앤 불린의 유령이 자신의 잘린 머리를 팔로 감싸고 속박된 성 베드로 아드 빈쿨라 교회에서 화이트 타워 사이를 거닌다고 한다.[199] 이 괴담은 1934년 코미디 가요 "With Her Head Tucked Underneath Her Arm"의 소재가 되었다.[200] 이 외에도 헨리 6세, 제인 그레이, 마가렛 폴, 그리고 런던탑의 왕자들 등이 유령 이야기의 단골 소재이다.[200] 1816년 1월에는 수장고 경비병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곰의 유령을 보고는 두려움에 휩싸여 며칠 후 죽었다는 괴담이 있었고,[200] 1817년 10월에는 왕관 보석 보관소의 에드먼드 렌설 스위프트가 보석관에서 빛나는 대롱 모양의 유령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유령이 아내의 어깨 위에 떠 있었고, 아내는 "오, 그리스도! 내게 달려들었어!"라고 외쳤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런던탑의 야간 근무 직원들이 다른 이름 없는 형태 없는 공포를 보고했다고 한다.[201]
7. 처형된 사람들
런던탑은 감옥이기도 했기에, 이곳에서 처형이 자주 이루어졌다. 아래는 그중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저명한 사람들의 목록이다.
- 1471년 헨리 6세: 랭커스터 왕조의 마지막 왕. 장미 전쟁에서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에게 잡혀 암살되었다.
- 1483년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 모두 에드워드 4세의 왕자. 아버지의 죽음 후 런던탑에 끌려간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 왕위를 찬탈한 리처드 3세가 살해했다고 여겨진다. 1674년 두 아이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2020년 필리파 랭글리에 의해 1487년 시점에서 생존했음을 보여주는 당시 문서가 발견되어 기존의 설이 뒤집혔다고 발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203] 이 연구의 자세한 내용은 2023년에 발행된 『The Princes in the Tower : Solving History's Greatest Cold Case』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1535년 존 피셔와 토마스 모어: 첫 번째 왕비와 이혼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인연을 끊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했던 헨리 8세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반역죄로 기소되어 타워 힐에서 처형되었다.
- 1536년 앤 불린: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간통죄 등으로 성내 타워 그린에서 처형되었다. 앤에게 씌워진 간통 등의 죄는 누명이었다고 여겨지며, 런던탑에는 지금도 앤 불린의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
- 1540년 토마스 크롬웰: 헨리 8세를 지지한 재상. 크롬웰의 추천으로 네 번째 왕비로서 잉글랜드에 시집온 앤 오브 클리브를 헨리 8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불과 반년 만에 이혼했다. 크롬웰도 이 책임을 지고 타워 힐에서 처형되었다.
- 1542년 캐서린 하워드: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 앤 불린과 마찬가지로 간통죄로 기소되어, 간통을 도왔다고 여겨지는 여관 로치포드 남작 미망인 제인 불린과 함께 타워 그린에서 처형되었다.
- 1554년 제인 그레이: 헨리 7세의 증손녀. 에드워드 6세의 죽음 후, 유력 귀족의 의도로 잉글랜드 여왕으로 추대되었지만, 메리 1세에게 패하여 9일 만에 폐위되었다. 타워 그린에서 처형되었다. 남편 길포드 더들리도 같은 날 타워 힐에서 처형되었다.
- 1601년 에섹스 백작 로버트 드벌루: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던 신하. 반란을 기도했기 때문에 타워 그린에서 처형되었다.
8. 세계유산
1988년에 유네스코(UNESCO)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202] 바로 옆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개교인 타워 브리지가 있으며, 맞은편에는 영국 해군 경순양함 벨파스트가 기념함으로서 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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