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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정토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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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정토계획은 755년 당나라의 안사의 난을 틈타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려던 계획이다. 7세기 삼국 통일 이후 일본은 신라를 번국으로 간주하며 외교적 마찰을 겪었고, 8세기 중엽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집권기에 신라 정벌 계획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다자이후를 통해 태제부조행군식이라는 세부 계획을 수립하고, 이토성 축조, 전함 건조, 신라어 교육 등 대규모 준비를 진행했다. 그러나 발해의 소극적인 태도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몰락으로 인해 계획은 중단되었으며, 한국 학계에서는 일본 측 사료에만 의존한 계획의 실행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신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수세적 차원의 군사 활동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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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정토계획
신라 정토 계획
목표신라 정복
주체당나라
시기660년대 후반 ~ 676년
원인나당 전쟁 발발
결과계획 실패,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 실패
배경
직접적 배경백제 멸망 이후 신라의 급부상 및 당나라에 대한 반발
간접적 배경고구려 멸망 및 당나라의 한반도 전체 지배 야욕
주요 내용
군사적 계획신라 공격을 위한 군대 파견
고구려 유민을 이용한 신라 견제
백제 부흥군 지원을 통한 신라 압박
정치적 계획신라 내부 분열 유도
친당 세력 규합
백제, 고구려 유민 포섭
경제적 계획신라의 경제력 약화 시도
진행 과정
초기 단계백제 부흥 운동 지원 (660년대)
고구려 유민을 이용한 신라 공격 (660년대 후반)
중반 단계대규모 군사 파견 및 신라 공격 (670년대 초)
매소성 전투, 기벌포 전투 등 주요 전투 발생
후반 단계신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힘
당나라 내부 혼란으로 인한 지원 감소
실패 요인
신라의 강력한 저항김유신 등 명장의 활약
신라 군사의 뛰어난 전투력
신라 백성들의 애국심
당나라의 내부 문제정치적 불안정
재정 부족
군사력 분산
지리적 요인한반도의 험준한 지형 및 보급의 어려움
결과 및 영향
군사적 결과당나라 군대의 한반도에서 철수 및 신라의 삼국 통일 완수
정치적 결과신라의 한반도 지배 확립 및 당나라의 영향력 감소
역사적 영향신라 중심의 민족 문화 형성 및 한민족의 정체성 확립

2. 삼국통일 이후 신라와 일본의 관계

663년 일본은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42,000명의 군대와 800척 이상의 함대를 파견했으나 백강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5]

이후 한동안 일본은 오노성(665년)[5]과 카네다 성(667년)[6]을 축조하고 방어 전쟁 준비를 하는 등 당나라의 침략 위협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나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 위험이 존재하는 동안 후방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720년까지 교류를 증진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동안 일본은 당나라의 율령 체제를 모방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701년, 다이호 율령) 천황 중심의 일본식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외 이념을 표방하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藩國)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서기》 등이 편찬(720년)되면서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설이 조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당시 신라는 국력이 상승하고 있었기에 일본의 이러한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고, 720년 경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례한 태도는 도를 넘어서서,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강요하다가 추방당하고 신라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다가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결국 731년 (성덕왕 30년) 일본은 병선 300척을 동원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패배하였다.[7] 그 후 일본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한 대안으로 발해와 적극적으로 통교하기 시작했다. 발해는 일본 견당사의 호송을 목적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험악하게만 돌아갔고, 양국 간의 극한 대립은 경덕왕 재위 기간(742년 ~ 765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집권기에 절정에 달했다.

3. 신라 정토 계획의 배경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했다. 당나라가 내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일본은 이 틈을 타 신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정치적 야심과 맞물려 더욱 구체화되었다.[8]

당시 일본은 다자이후를 통해 신라 정벌 계획인 '''태제부조행군식'''(太宰府造行軍式)을 수립하고, 756년 호쿠부큐슈에 이토성(怡土城)을 축조하는 등 군사적 준비를 시작했다. 759년에는 762년을 목표로 대규모 전함 건조를 지시하고, 761년에는 신라어 교육을 실시하는 등 전례 없는 규모로 전쟁 준비를 진행했다.[9]

한편, 신라 역시 중대 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치·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일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모벌성(毛伐城)에 노당(弩幢)을 증원하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3. 1. 안사의 난과 동아시아 정세 변화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란이 발발하였다. 이로 인해 당나라가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지자, 일본은 당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정치적 야심과 맞물려 진행되었다.[8]

당시 신라 등 외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던 관청인 다자이후에서는 신라 정벌을 위한 세부 계획안인 '''태제부조행군식'''(太宰府造行軍式)을 마련하여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756년 일본 조정은 호쿠부큐슈에 이토성(怡土城)을 축조하였다. 여러 기술을 동원해 견고하게 건설된 이 성은 근처에 주선사(主船司)라는 관청, 용광로, 무기 제조 공장을 설치하는 등 대규모 병참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759년에는 3년 후인 762년을 목표로 호쿠리쿠도·산인도·산요도·난카이도 4도에 할당량을 정해 500척의 전함을 건조하도록 지시했다. 761년에는 미노국·무사시국에서 20명씩 소년을 징발하여 신라어 교육을 시작하는 등, 유례없이 대규모로 준비가 진행되었다.[9]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쇠퇴하던 당나라처럼, 신라도 중대 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모벌성(毛伐城)에 노당(弩幢)을 증원하는 등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경덕왕 대에는 군을 중앙의 6기정(六畿停)과 지방의 9주정(九州停)으로 재편하는 등 신속한 군대 동원을 위한 군제 개혁도 실시하였다.

3. 2.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집권과 정치적 야망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란이 발생하여, 당나라가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게 되었다. 이 틈을 타 일본은 당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신라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정치적 야망과 맞물려 진행되었다.[8]

당시 외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던 관청인 다자이후에서는 신라 정벌을 위한 세부 계획안인 '''태제부조행군식'''(太宰府造行軍式)을 마련하여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756년 일본 조정은 호쿠부큐슈에 이토성(怡土城)을 축조했다. 이 성은 여러 기술을 동원하여 견고하게 건설되었으며, 근처에 주선사(主船司)라는 관청, 용광로, 무기 제조 공장을 설치하여 대규모 병참 기지로 기능했다.

759년에는 3년 후인 762년을 기한으로 호쿠리쿠도 '''·''' 산인도 '''·''' 산요도 '''·''' 난카이도 4도에 500척의 전함을 건조하도록 지시했다. 761년에는 미노국 '''·''' 무사시국에서 20명의 소년을 징발해 신라어 교육을 시작하는 등, 유례없이 대규모로 준비가 진행되었다.[9]

4. 신라 정토 계획의 내용 및 준비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일본은 이 틈을 타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정치적 야심과 맞물려 추진되었다.[8]

당시 외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던 관청인 다자이후는 신라 정벌을 위한 세부 계획안인 '''태제부조행군식'''(太宰府造行軍式)을 마련하여 실행에 옮겼다.

756년 일본 조정은 호쿠부큐슈에 이토성(怡土城)을 쌓았다. 이 성은 견고하게 건설되었으며, 주변에 주선사(主船司)라는 관청, 용광로, 무기 제조 공장을 설치하여 대규모 병참 기지로 기능했다.

759년에는 762년을 목표로 호쿠리쿠도 '''·''' 산인도 '''·''' 산요도 '''·''' 난카이도 4도에 500척의 전함을 건조하도록 지시했다. 761년에는 미노국 '''·''' 무사시국에서 소년 20명씩을 징발하여 신라어 교육을 시작하는 등, 유례없이 대규모로 준비가 진행되었다.[9]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신라도 중대 후기에 혼란스러운 정치 '''·''' 경제적 상황을 맞고 있었지만,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모벌성(毛伐城)에 노당(弩幢)을 증원하는 등 방어 준비를 갖추었다. 경덕왕 대에는 군대를 중앙의 6기정(六畿停)과 지방의 9주정(九州停)으로 재편하여 신속한 군대 동원을 위한 군제 개혁도 실시했다.

5. 일본의 외교적 노력과 발해의 입장

757년 일본은 신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쫓겨난 오노 다모리를 단장으로 하여금 견발해사를 발해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후 759년760년에 연이어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 일본이 이처럼 발해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자 했던 까닭은, 신라가 일본과 발해 양국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과 더불어 전쟁 시 발해의 협공과 지원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1]

오노 다모리는 귀국하는 길에 발해 장군 양승경이 이끄는 발해 사절단을 동행했으며, 일본은 양승경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며 발해의 참전을 요청했다. 762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후손인 고마노 오야마를 단장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했으나, 발해는 답례 사신으로 의례적인 무관 대신 문관인 왕신복을 파견하여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을 사실상 거절했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교류를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1]

결국 일본은 나카마로의 몰락 등으로 신라 침략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신라정토계획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 1. 견발해사 파견과 발해와의 협력 모색

757년 일본은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쫓겨난 경험이 있던 오노 다모리를 단장으로 처음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하기 시작해 759년760년에 연이어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일본이 발해와 적극적으로 교류한 원인은 신라가 일본과 발해 양국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며, 전쟁 시엔 발해의 협공과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1]

오노 다모리는 귀국길에 발해장군 양승경이 인솔하는 발해사절단을 같이 데려왔고, 일본 측은 양승경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면서 발해의 참전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신라 침공 일정이 짜여져 있던 762년, 고구려 왕실의 후손인 고마노 오야마를 단장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했지만, 발해는 견발해사에 대한 답례 사신에 의례적으로 파견되던 무관을 대신해 문관인 왕신복을 파견하는 것으로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에 사실상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교류를 시작하고 있었기에 굳이 일본과 손잡고 신라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1]

5. 2. 발해의 소극적 태도와 신라와의 관계

757년 일본은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쫓겨난 경험이 있던 오노 다모리를 단장으로 처음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하기 시작해 759년과 760년에 연이어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일본이 발해와 적극적으로 교류한 원인은 신라가 일본과 발해 양국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며, 전쟁 시엔 발해의 협공과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오노 다모리는 귀국길에 발해장군 양승경이 인솔하는 발해 사절단을 같이 데려왔고, 일본 측은 양승경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면서 발해의 참전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신라 침공 일정이 짜여져 있던 762년, 고구려 왕실의 후손인 고마노 오야마를 단장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했지만, 발해는 견발해사에 대한 답례 사신에 의례적으로 파견되던 무관을 대신해 문관인 왕신복을 파견하는 것으로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에 사실상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교류를 시작하고 있었기에 굳이 일본과 손잡고 신라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1]

6. 신라 정토 계획의 좌절과 역사적 의미

신라 정토 계획은 안사의 난이라는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일본이 신라를 군사적으로 침공하고자 했던 계획이었으나, 여러 이유로 좌절되었다. 이 계획은 1930년대부터 일본 학계가 대륙 침략을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연구되었다.

그러나 한국 학계에서는 일본 측 사료에만 전해지는 신라정토계획의 실행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신라 경덕왕대의 정세를 통해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을 재해석한 결과, 등원중마려가 입안한 신라정토계획은 공격적인 전쟁이라기보다는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 동원이었다고 해석된다.

또한, 일본이 신라정토계획을 추진하던 기간 동안 발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에 대해, 신라와 발해의 교섭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발해와의 외교를 활발히 추진했다는 시각도 있다.

6. 1. 한국 학계의 비판적 시각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은 안사의 난이라는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일본이 신라를 군사적으로 침공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이에 대한 연구는 1930년대부터 일본 학계가 대륙 침략을 위한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 학계는 일본 학계의 연구 성과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1]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일본 측 사료에만 전해지는 신라정토계획의 실행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신라 경덕왕대의 정세를 통해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을 재해석한 결과, 안사의 난을 전후하여 신라가 체제 정비에 주력하는 동시에 발해와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등원중마려가 입안한 신라정토계획은 공격적인 전쟁이라기보다는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 동원이었다고 해석된다. 8세기 중엽 이래 일본은 신라와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축성 등의 군사적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당시 일본의 군사력으로는 단독으로 신라를 공격할 상황도 아니었다.[1]

일본이 신라정토계획을 추진하던 기간 동안 발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에 대해, 기존 연구자들은 일본이 발해와의 협력을 통해 신라정토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신라와 발해의 교섭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발해와의 외교를 활발히 추진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은 천황중심사관이라는 관념의 산물에 불과하며, 현실적으로는 신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수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군사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1][2]

6. 2. 역사 왜곡 문제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은 안사의 난이라는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일본이 신라를 군사적으로 침공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이에 대한 연구는 1930년대부터 일본 학계가 대륙 침략을 위한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국 학계는 일본 학계의 연구 성과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1]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일본 측 사료에만 전하는 신라정토계획의 실행 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신라 경덕왕대의 정세를 통해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을 재해석한 결과, 안사의 난을 전후하여 신라가 체제 정비에 주력하는 동시에 발해와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등원중마려가 입안한 신라정토계획은 사실상 공격적 전쟁이라기보다는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 동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8세기 중엽 이래 일본은 신라와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축성 등의 군사적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당시 일본의 군사력으로는 단독으로 신라를 공격할 상황도 아니었다.[1]

일본이 신라정토계획을 추진하던 기간 동안 발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기존 연구에서는 일본이 발해와의 협력을 통해 신라정토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신라와 발해의 교섭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발해와의 외교를 활발히 추진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은 천황 중심 사관의 관념적 산물에 불과하며, 현실적으로는 신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수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군사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1][2]

참조

[1] 해설
[2] 웹인용 신라 경덕왕대 국내외정세에서 본 일본의 '신라정토계획' - 'The attack plan against silla' confimed from foreign relaion of king Gyeongdeok period https://www.krm.or.k[...] 2013-09-01
[3] 해설
[4] 웹인용 신라 경덕왕대 국내외정세에서 본 일본의 ‘신라정토계획’ https://www.krm.or.k[...] 2015-09-01
[5] 서적 일본서기
[6] 서적 일본서기
[7] 서적 삼국사기
[8] 서적 역사스페셜6 효형출판
[9] 서적 신라인 이야기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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