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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발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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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견발해사는 728년부터 811년까지 일본이 발해에 파견한 사절을 지칭한다.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으려 했고, 일본은 고구려 부흥으로 여겨 발해를 우대하여 사절을 파견했다. 초기에는 발해의 문물을 수용하고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했으나, 후에는 발해 사신을 송환하는 역할이 주를 이루었다. 신라 정벌 계획과 관련하여 군사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조공 무역으로 인해 일본의 재정 부담이 커지면서 파견이 제한되기도 했다.

2. 배경

698년 고왕이 발해(당시에는 진국)를 건국한 후, 무왕 시대에 신라와 외교적 대립을 겪었다. 무왕은 이러한 세력을 견제하고자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는데, 이는 군사동맹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일본 역시 발해를 고구려의 부활로 인식하고 사절을 특별히 예우하였다.

720년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続日本紀)에는 와타리시마쓰가루쓰노 쓰카사(渡嶋津軽津司)[7] 모로노키미 구라오(諸君鞍男) 등 6인을 풍속 시찰을 위해 말갈(靺鞨)의 땅에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갈국에 대해서는 홋카이도 북부의 숙신(아시하세)을 가리킨다는 설과 발해를 가리킨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어, 아직까지 정설은 없다.

이후 발해는 조공 무역 형태의 교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나, 일본은 재정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2. 1. 초기 접촉

698년 고왕에 의해 건국된 발해(당시에는 진국)는 무왕 시대에 이나 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을 겪게 되었고, 이들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일본으로의 사절 파견을 계획하였다. 이는 군사동맹으로써의 색채가 강한 사절이었다. 또한 일본측도 발해가 자국 천황의 덕화(徳化)를 사모하여 내조(来朝)하였다는 인식과 더불어, 발해를 그 전신이 된 고구려의 부활이라 인식하고 사절을 특별히 예우하고 이듬해 서둘러 견발해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제1회 견발해사는 이때에 보낸 사신을 가리킨다.[8] 발해 측의 사절단은 현재의 러시아연해주포시에트 만 근처에 있는 크라스키노 토성(염주성)에서 일본으로 향했다고 한다.[4]

720년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続日本紀)에는 와타리시마쓰가루쓰노 쓰카사(渡嶋津軽津司)[7] 모로노키미 구라오(諸君鞍男) 등 6인을 풍속 시찰을 위해 말갈(靺鞨)의 땅에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 2. 발해 건국과 일본과의 관계

698년 고왕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무왕 시대에는 신라와 외교적 대립을 겪었다. 무왕은 이러한 세력을 견제하고자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는데, 이는 군사동맹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발해 측 사절단은 현재의 러시아연해주포시에트 만 근처 크라스키노 토성(염주성)에서 일본으로 향했다고 한다.[4]

일본 사서 《속일본기》에는 720년 (요로 4년) 와타리시마쓰가루쓰노 쓰카사(渡嶋津軽津司)[1] 모로노 기미 구라오 등 6명을 풍속 시찰을 위해 말갈국에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말갈국에 대해 쓰다 소우키치, 미즈모토 히로노리, 구마타 료스케, 이시이 마사토시 등은 홋카이도 북부 숙신(아시하세)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으나, 도리야마 기이치, 사카요리 마사시, 모리타 데이, 세키구치 아키라 등은 발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등 정설은 없다. 후자에 따르면, 720년 일본이 모로노키미 구라오를 사신으로 보낸 것을 계기로 발해가 고제덕을 대사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다고 하나, 반론[3]도 있다.

발해 사절 일행은 727년 (진귀 4년) 가을 데와에 도착, 이듬해(728년) 정월 입공하여 국서를 헌납했다. 일본 측은 발해가 천황의 덕화(徳化)를 사모하여 내조(来朝)했다고 인식하고, 발해를 그 전신인 고구려의 부활로 여겨 사절을 특별히 예우하고 이듬해 서둘러 견발해사를 파견했다. 보통 제1회 견발해사는 이때 보낸 사신을 가리킨다.

758년-763년 사이, 신라와의 관계가 긴장 상태에 있을 때 거의 매년 사신이 왕래했다. 759년 (덴표호지 3년), 일본 에미노 오시카쓰는 발해의 요청에 따라 군선 394척, 병사 4만 700명을 동원하는 본격적인 신라정토계획(新羅遠征計画)을 세웠다. 이 원정은 고켄 상황과 오시카쓰 사이 불화, 발해 측 사정 변화 등으로 중지되었으나, 문왕이 당과 융화를 도모하면서 군사적 의미는 약해지고 문화 교류나 경제활동 중심의 사절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 교류는 조공 무역 형태였기에, 발해 물품에 대해 일본 조정은 몇 배의 회사(回賜)로 보답해야 했고, 발해는 막대한 이익을 얻은 반면 일본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8] 사절 접대와 회사 경비가 크게 늘자 일본 조정은 견발해사를 중단했고, 발해 사신도 12년에 한 번씩, 오는 장소도 다자이후로 제한했다. 그러나 발해 측 사절은 발해 멸망까지 계속되었다.

일본 헤이안 시대 문헌 《엔기시키》 대장성식에 따르면, 견발해사 일행은 대사, 판관, 녹사, 역어, 주신, 의사, 음양사, 사생, 선사, 사수, 복부, 잡사, 선공, 지사, 겸인, 협묘, 수수 등으로 구성되었다.

3. 견발해사

720년 일본 겐쇼 천황은 와타리시마쓰가루쓰노 쓰카사[7] 모로노키미 구라오 등 6인을 말갈의 땅에 파견하여 풍속을 시찰하게 하였다.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파견은 무왕 인안 2년에 해당한다. 이 말갈국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도리야마 기이치 등은 발해를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일본의 사신 파견을 계기로 발해에서 고제덕을 대사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낸 것이라고 한다.

698년 고왕에 의해 건국된 발해(당시 국호는 진)는 무왕 시대에 , 신라와 외교적 대립을 겪었다.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사절 파견을 계획했는데, 이는 군사 동맹의 성격이 강했다.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 부흥으로 인식하고 사절을 특별히 예우했으며, 이듬해 견발해사를 파견했다.

758년-763년 신라와 긴장 관계에 있던 시기에는 거의 매년 사신이 왕래했고, 759년 일본의 에미노 오시카쓰신라정토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문왕 시대에 당과의 융화를 추구하면서 군사적 의미는 옅어지고, 문화 교류 및 경제 활동 중심으로 사절의 성격이 변화했다.

발해와의 교류는 조공 무역 형태였으므로, 발해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일본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8] 일본 조정은 견발해사를 중단하고 발해 사신 방문을 12년에 한 번, 다자이후로 제한했다. 그러나 발해는 멸망 때까지 사절을 계속 보냈다.

일본 헤이안 시대 문헌 《엔기시키》에 따르면, 견발해사 일행은 대사(大使), 판관(判官), 녹사(録事), 역어(訳語), 주신(主神), 의사(医師), 음양사(陰陽師), 사생(史生), 선사(船師), 사수(射手), 복부(卜部), 잡사(雑使), 선공(船工), 이사(柂師), 겸인(傔人), 협초(挟杪), 수수(水手)로 구성되었다.

견발해사 파견 일람은 다음과 같다.

횟수파견 연도일본 연호발해 연호정사명일본 천황발해 국왕비고출전
720년요로 4년인안 원년제안남겐쇼 천황무왕와타리시마쓰가루쓰노 쓰카사인 제군안남 등 6명을 말갈국에 파견하여 풍속 시찰속일본기
1728년진키 5년인안 9년인전충마로쇼무 천황무왕발해 객사(客使)를 보냄. 고제덕 등 8명(대사 고인의 등은 왕복 중 사망)의 귀로에 동행.속일본기
2740년덴표 12년대흥 3년오토모 이누카이쇼무 천황문왕견발해대사. 전년 발해 부사·기진몽(대사 서요덕은 왕복 중 조난사) 등의 견사에 응함.속일본기
3758년덴표호지 2년대흥 21년고노다 모리고켄 천황문왕견발해대사. 발해 사신 양승경을 동반하여 귀국. 안사의 난 보고.속일본기
4759년덴표호지 3년대흥 22년고원도준닌 천황문왕영입당대사사. 후지와라 기요카와를 맞이하러 가는 특사. 발해 경유하여 입당. 신라 정벌 계획 연계 목적.속일본기
5760년덴표호지 4년대흥 23년양후령규준닌 천황문왕송고남신사. 발해 사신 고남신 등을 돌려보냄.속일본기
6761년덴표호지 5년대흥 24년고려대산준닌 천황문왕견고려대사. 신라 정벌 계획에 따른 군사 동맹 체결 목적. 발해 사신 왕신복 동반 귀국.속일본기
7763년덴표호지 7년대흥 26년다지히 고미미준닌 천황문왕송고려인사(도항하지 않음). 왕신복 등 동반 출항. 고내궁 가족 등 해중에 투척.속일본기
8772년보귀 3년대흥 35년무생조수고닌 천황문왕송발해객사. 발해 사신 일만복을 보냄. 발해 부사 모창록 사망.속일본기
9777년보귀 8년대흥 40년고려전계(고창전계)[5]고닌 천황문왕송사. 발해 사신 사도몽 동반 출항, 발해 변방 표착.속일본기
10779년보귀 10년대흥 42년대망광도고닌 천황문왕송고려객사. 자세한 것은 불명.속일본기
787년엔랴쿠 6년대흥 50년간무 천황문왕발해 사신 이원태에게 배 등 지급.속일본기
11796년엔랴쿠 15년정력 2년어장광악・상원추성간무 천황강왕송발해객사. 발해 사신 여정림 송환.일본후기
12798년엔랴쿠 17년정력 4년내장가모마로간무 천황강왕견발해사. 도항 간격 6년 옥서 전달, 발해 측 거부.일본후기
13799년엔랴쿠 18년정력 5년자야선대(자야선백)간무 천황강왕압송. 발해 사신 대창태 송환.일본후기
14811년고닌 2년영덕 2년임동인사가 천황정왕송발해객사. 발해 사신 고남용 송환.일본후기



13회 설에서는 제4회를 제외하고, 15회 설에서는 787년(또는 720년)을 포함한다.

3. 1. 견발해사의 목적과 성격 변화

무왕 인안(仁安) 2년(720년)에 해당되는 일본 요로(養老) 4년에 일본에서 모로노키미 구라오를 사신으로 보낸 것을 계기로, 발해는 신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다. 이는 군사 동맹의 성격이 강했다.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의 부활로 인식하고 사절을 특별히 예우했으며, 이듬해 서둘러 견발해사를 파견했다.

신라와의 관계가 긴장 상태였던 758년~763년에는 거의 매년 사신이 오갔다. 759년에는 일본의 에미노 오시카쓰신라정토계획(新羅遠征計画)을 세웠으나, 고켄 상황과의 불화 및 발해 측의 사정 변화로 중지되었다. 이후 문왕이 당과의 융화를 도모하면서 군사적 의미는 약해지고, 문화 교류나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성격이 변화했다.

발해와의 교류는 조공 무역 형태였기 때문에, 발해는 막대한 이익을 챙긴 반면 일본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8] 일본 조정은 견발해사를 중단하고 발해 사신의 방문을 12년에 한 번, 다자이후로 제한했다. 그러나 발해는 멸망할 때까지 사절을 계속 보냈다.

3. 2. 견발해사의 구성

속일본기(続日本紀)에 따르면, 720년 일본 요로(養老) 4년에 와타리시마쓰가루쓰노 쓰카사(渡嶋津軽津司) 모로노키미 구라오(諸君鞍男) 등 6인을 풍속 시찰을 위해 말갈(靺鞨)의 땅에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7] 이 말갈국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발해를 가리킨 것이라는 주장에 의하면, 이 파견을 계기로 발해에서 고제덕을 대사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낸 것이라고 한다.

698년 고왕(高王)에 의해 세워진 발해는 무왕 시대에 이나 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을 겪게 되었고, 이들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일본으로의 사절 파견을 계획하였다. 이는 군사동맹으로써의 색채가 강한 사절이었다. 또한 일본측도 발해가 자국 천황의 덕화를 사모하여 내조하였다는 인식과 더불어, 발해를 그 전신이 된 고구려의 부활이라 인식하고 사절을 특별히 예우하고 이듬해 서둘러 견발해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신라와의 관계가 긴장 상태였던 758년-763년에는 거의 매년 사신이 오고 갔는데, 759년에는 일본의 에미노 오시카쓰신라정토계획(新羅遠征計画)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문왕이 당과의 융화를 도모하는 시대가 되면서 군사적 의미는 약해지고 문화 교류나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그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이 교류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발해로부터 오는 물품들에 대해 일본 조정측에서 몇 배의 회사(回賜)로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발해측이 막대한 이익을 챙긴 반면 일본측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8] 때문에 일본 조정에서 발해로 보내는 견발해사는 중단되었고 발해에서 오는 사신도 12년에 한 번씩만 올 것과 오는 장소도 다자이후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발해측에서의 사절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헌인 《엔기시키》(延喜式)의 대장성식(大蔵省式)에 따르면, 일본에서 보내는 견발해사 일행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직책
대사(大使)
판관(判官)
녹사(録事)
역어(訳語)
주신(主神)
의사(医師)
음양사(陰陽師)
사생(史生)
선사(船師)
사수(射手)
복부(卜部)
잡사(雑使)
선공(船工)
이사(柂師)
겸인(傔人)
협초(挟杪)
수수(水手)


3. 3. 견발해사 일람

회차파견된 해일본 연호발해 연호대사(大使)일본 천황발해 국왕비고출전
720년요로 4년인안 원년모로노키미 쿠라오겐쇼 천황무왕말갈국 풍속을 관찰속일본기
1728년진키 5년인안 9년히키타노아손 무시마로(引田朝臣虫麻呂)쇼무 천황무왕고제덕 등 발해객(渤海客)을 발해까지 전송《속일본기》
2740년덴표 12년대흥 3년오토모노스쿠네 이누카이(大伴宿禰犬養)쇼무 천황문왕견발해대사(遣渤海大使)《속일본기》
3758년덴표호지 2년대흥 21년오노노아손 다모리(小野朝臣田守)고켄 천황문왕견발해대사로 발해의 사신 양승경을 데리고 왔으며 당에서 일어난 안사의 난을 일본 조정에 알림《속일본기》
4759년덴표호지 3년대흥 22년고원도[9]준닌 천황문왕일본 견당사들을 당으로부터 맞아 데려옴《속일본기》
5760년덴표호지 4년대흥 23년야코노후비토 레이큐(陽侯史玲璆)준닌 천황문왕발해의 사신 고남신 등을 발해로 송환《속일본기》
6762년덴표호지 6년대흥 25년고마노아손 오야마(高麗朝臣大山)준닌 천황문왕견고려사(遣高麗使)로써 발해의 사신 왕신복 등을 데려옴《속일본기》
7763년덴표호지 7년대흥 26년다지히노마히토 고미미(多治比真人小耳)준닌 천황문왕견고려인사(遣高麗人使)로써 대사는 도항하지 않았고 이타후리노 카마쓰카(板振鎌束)는 표류해서 귀국《속일본기》
8772년호키 3년대흥 35년다케후노무라치 토리모리(武生連鳥守)고닌 천황문왕발해 사신들을 발해까지 송환시킴《속일본기》
9777년호키 8년대흥 40년고마노아손 도노쓰구(高麗朝臣殿嗣)고닌 천황문왕사도몽 등 발해 사신을 본국으로 송환시키고 발해에서 사신 장선수를 데려옴《속일본기》
10779년호키 10년대흥 42년오쓰나노기미 히로미치(大網公広道)고닌 천황문왕장선수 등 고려(발해)의 사신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킴《속일본기》
787년엔랴쿠 6년대흥 50년간무 천황문왕발해의 사신 이원태에게 배 한 척과 조타수, 선두, 수수 등을 지급《속일본기》
11796년엔랴쿠 15년정력 2년미나가노마히토 히로오카(御長真人広岳)간무 천황강왕여정림 등의 발해객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킴일본후기
12798년엔랴쿠 17년정력 4년쿠라노스쿠네 카모마로(内蔵宿禰賀茂麻呂)간무 천황강왕발해에 파견《일본후기》
13799년엔랴쿠 18년정력 5년시게노스쿠네 후네시로(滋野宿禰船白)간무 천황강왕압송《일본후기》
14811년고닌 2년영덕 2년하야시노스쿠네 아즈마히토(林宿禰東人)사가 천황정왕발해객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킴《일본후기》



14회가 아닌 13회로 보는 설의 경우 제4회 견발해사를 제외하였고, 15회로 보는 경우에는 786년(또는 720년)을 포함시켰다.

4. 견일본사 (발해 측 사신)

720년 일본에서 모로노키미 구라오를 사신으로 보낸 것을 계기로, 발해에서 고제덕을 대사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7]

698년 고왕(高王)에 의해 세워진 발해(당시에는 진국)는 무왕 시대에 이나 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을 겪게 되었고, 이들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일본으로의 사절 파견을 계획하였다. 이는 군사동맹으로써의 색채가 강한 사절이었다. 일본측도 발해가 자국 천황의 덕화(徳化)를 사모하여 내조(来朝)하였다는 인식과 더불어, 발해를 그 전신이 된 고구려의 부활이라 인식하고 사절을 특별히 예우하고 이듬해 서둘러 견발해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제1회 견발해사는 이때 보낸 사신을 가리킨다.

신라와의 관계가 긴장 상태에 있었던 기간(758년-763년)에는 거의 매년 사신이 오고 갔는데, 문왕 대흥 23년/덴표호지(天平宝字) 3년(759년)에는 일본의 에미노 오시카쓰가 (발해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군선(軍船) 394척, 병사 4만 700인을 동원하는 본격적인 신라정토계획(新羅遠征計画)을 세웠다. 이 원정은 훗날 고켄 상황(孝謙上皇)과 오시카쓰 사이의 불화나 발해측의 사정 변화 등으로 인해 중지되었으나, 문왕이 당과의 융화를 도모하는 시대가 되면서 군사적 의미도 더불어 약해지고 전적으로 문화 교류나 경제활동만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그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이 교류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발해로부터 오는 물품들에 대해 일본 조정측에서 몇 배의 회사(回賜)로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발해측이 막대한 이익을 챙긴 반면 일본측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8] 때문에 사절에게 제공하는 접대나 회사에 들어가는 경비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불어나자 일본 조정에서 발해로 보내는 견발해사는 중단되었고, 발해에서 오는 사신도 12년에 한 번씩만 올 것과 오는 장소도 다자이후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발해측에서의 사절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5. 교류의 영향

720년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에는 무왕 인안 2년에 해당하는 일본 요로 4년에 와타리시마쓰가루쓰노 쓰카사[7] 모로노키미 구라오 등 6인을 풍속 시찰을 위해 말갈의 땅에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갈국에 대해 홋카이도 북부의 아시와세를 가리킨다는 주장과 발해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후자에 따르면, 일본에서 모로노키미 구라오를 사신으로 보낸 것을 계기로 발해에서 고제덕을 대사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698년 고왕(高王)에 의해 건국된 발해(당시에는 진국)는 무왕 시대에 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을 겪었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사절 파견을 계획했다. 이는 군사동맹의 성격이 강했으며,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의 부활로 인식하고 사절을 특별히 예우하고 이듬해 견발해사를 파견했다.

758년-763년 신라와의 관계가 긴장 상태였던 기간에는 거의 매년 사신이 왕래했다. 759년 일본의 에미노 오시카쓰신라정토계획을 세웠으나, 고켄 상황과의 불화 및 발해 측의 사정 변화로 중지되었다. 이후 문왕이 당과의 융화를 도모하면서 군사적 의미는 약해지고 문화 교류와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성격이 변화했다.

5. 1. 경제적 영향

일본과 발해의 교류는 조공 무역 형태였기 때문에, 발해는 일본에 물품을 보내고 일본은 그 대가로 몇 배의 답례품을 보내야 했다. 이로 인해 발해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일본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8] 사절 접대와 답례에 드는 비용이 증가하면서 일본 조정은 견발해사를 중단하고, 발해 사신의 방문도 12년에 한 번, 다자이후로 제한했다. 그러나 발해는 멸망할 때까지 사절을 계속 보냈다.

5. 2. 문화적 영향

720년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에는 일본 요로 4년에 와타리시마쓰가루쓰노 쓰카사[7] 모로노키미 구라오 등 6인을 풍속 시찰을 위해 말갈의 땅에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갈국에 대해 홋카이도 북부의 아시와세를 가리킨다는 주장과 발해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후자에 따르면, 일본에서 모로노키미 구라오를 사신으로 보낸 것을 계기로 발해에서 고제덕을 대사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698년 고왕(高王)에 의해 건국된 발해(당시에는 진국)는 무왕 시대에 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을 겪었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사절 파견을 계획했다. 이는 군사동맹의 성격이 강했으며,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의 부활로 인식하고 사절을 특별히 예우하고 이듬해 견발해사를 파견했다.

신라와의 관계가 긴장 상태였던 758년-763년에는 거의 매년 사신이 왕래했다. 759년에는 일본의 에미노 오시카쓰신라정토계획을 세웠으나, 고켄 상황과의 불화 및 발해 측의 사정 변화로 중지되었다. 이후 문왕이 당과의 융화를 도모하면서 군사적 의미는 약해지고 문화 교류와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성격이 변화했다.

발해와의 교류는 조공무역 형태였기 때문에 발해는 막대한 이익을 챙겼지만, 일본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8] 일본 조정은 견발해사를 중단하고 발해 사신의 방문을 12년에 한 번, 다자이후로 제한했으나, 발해는 멸망할 때까지 사절을 계속 보냈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헌인 《엔기시키》(延喜式)에 따르면, 일본에서 보내는 견발해사 일행은 대사(大使), 판관(判官), 녹사(録事), 역어(訳語), 주신(主神), 의사(医師), 음양사(陰陽師), 사생(史生), 선사(船師), 사수(射手), 복부(卜部), 잡사(雑使), 선공(船工), 이사(柂師), 겸인(傔人), 협초(挟杪), 수수(水手)로 구성되어 있었다.

5. 3. 일본의 제한 조치

일본 조정은 발해에서 오는 사신을 12년에 한 번씩만 오도록 하고, 오는 장소도 다자이후로 제한하였다. 이는 사절 접대와 회사(回賜)에 들어가는 경비가 일본 조정에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발해는 조공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반면, 일본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8]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멸망할 때까지 일본에 사절을 계속 보냈다.

참조

[1] 서적 "古代蝦夷の時代" 石川県金沢市 2002-03
[2] 문서 1995
[3] 문서 1999
[4] 문서 2013
[5] 문서 高麗大山の子
[6] 문서
[7] 서적 "고대 에미시의 시대"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2002-03
[8] 서적 한국해양사 학연문화사 2008
[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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