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레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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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레지아 전쟁은 18세기 중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프로이센의 실레지아 점령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 전쟁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며 시작되었으며, 1740년부터 176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전쟁 결과, 프로이센은 실레지아를 확보하고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오스트리아는 개혁을 통해 군주국을 재정비했다. 슐레지엔 전쟁은 유럽 외교 시스템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독일 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경쟁 구도를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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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시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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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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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독일어) | Schlesische Kriege (슐레지셰 크리게) |
명칭 (영어) | Silesian Wars (실레시안 워즈) |
관련 분쟁 |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경쟁 |
전쟁 기간 | |
기간 | 1740년 12월 16일 – 1763년 2월 15일 |
장소 | 중앙유럽 |
결과 | 프로이센의 승리 (3번 모두) |
영토 변경 | 합스부르크 제국, 실레시아 대부분을 프로이센에 할양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로이센 왕국 |
교전국 2 | 합스부르크 제국 작센 선제후국 (제2차, 제3차) 러시아 제국 (제3차) 프랑스 왕국 (제3차) |
지휘관 | |
프로이센 |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1726년) |
합스부르크/동맹국 | 마리아 테레지아 아우구스트 3세 (폴란드 왕)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루이 15세 |
관련 정보 | |
관련 지역 | 실레시아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
2. 배경
18세기 초, 프로이센 왕국을 통치하는 호엔촐레른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였던 실레지아 공작령에 대한 왕위 주장권을 가지고 있었다. 실레지아는 인구가 많고 번영했으며, 프로이센의 핵심 영토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인접해 있었다. 실레지아는 세수입, 산업 생산량, 군사 징집이라는 가치 외에도 여러 세력에게 중요한 지정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상부 오데르 강 계곡은 브란덴부르크,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 사이의 자연적인 군사 통로를 형성했으며, 이 지역을 점유한 세력은 주변국을 위협할 수 있었다. 또한 실레지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북동쪽 경계에 위치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는 세력은 독일 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었다.
===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주장 ===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주장은 16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1] 1537년 실레시아 피아스트 공작 레그니차의 프레데릭 2세와 호엔촐레른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 2세 헥토르 사이에 상속 조약이 체결되었다.[1] 이 조약에 따라 레그니차 공국, 볼라우 공국, 브레크 공국은 실레시아의 피아스트 왕조가 단절될 경우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넘어가도록 규정되었다.[1] 그러나 당시 보헤미아의 합스부르크 왕 페르디난트 1세는 이 협정을 거부하고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이를 파기하도록 압박했다.[1]
1603년, 호엔촐레른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 3세 프리드리히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로부터 예거른도르프 공국을 상속받아 둘째 아들인 요한 게오르크를 공작으로 임명했다.[2] 1618년 보헤미아 반란과 뒤이은 30년 전쟁에서 요한 게오르크는 가톨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맞서 반란에 참여했다.[2] 1621년 백산 전투에서 가톨릭이 승리한 후 황제는 요한 게오르크의 공국을 몰수하고 그의 사후에도 상속자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했지만,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은 예거른도르프의 정당한 통치자임을 계속 주장했다.[2]
1675년 레그니츠의 게오르크 빌헬름 공작의 죽음으로 실레시아 피아스트 가문이 단절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레그니츠, 볼라우, 브레크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합스부르크 황제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주장을 무시하고 해당 영토를 보헤미아 왕실로 몰수했다.[3] 1685년, 오스트리아가 대 터키 전쟁에 참전했을 때 레오폴트 1세 황제는 군사적 지원과 실레시아에 대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미결 주장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실레시아의 월경지인 슈비부스에 대한 즉시 통치권을 부여했다.[4] 그러나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한 후, 황제는 1694년 슈비부스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았다.[4] 황제는 해당 영토가 단지 고인이 된 대 선제후에게 평생 동안만 개인적으로 할당된 것이라고 주장했다.[4] 프리드리히 3세는 이 협정을 파기하고 예거른도르프와 실레시아 피아스트 상속에 대한 옛 호엔촐레른 가문의 주장을 다시 제기했다.[4]
===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문제 ===
18세기 초,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713년 국사조칙을 통해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카를 6세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통치자가 되었고, 합스부르크 군주국 내의 보헤미아 왕관령과 헝가리 영토의 통치자도 되었다. 카를 황제의 생전에는 국사 조칙이 일반적으로 제국 신분들에게 인정되었지만, 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은 즉시 이의를 제기했다.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베르트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는 각각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 사촌과 결혼했고, 그들은 남성 상속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합스부르크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동군 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통치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는 자신의 두 왕국을 하나의 연속적인 영토로 연결하기 위해 슐레지엔을 장악하는 데 특히 관심이 있었다.
한편, 새롭게 즉위한 호엔촐레른 왕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 5월 왕위에 오른 직후 슐레지엔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이 세습 영지가 아니라 제국의 왕관령의 일부로서 합스부르크가가 소유하고 있을 뿐이므로, 국사조칙은 슐레지엔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국사조칙의 승인에 동의했을 때, 그 대가로 라인란트의 율리히 공국과 베르크 공국에 대한 청구 지원을 얻었지만, 오스트리아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는 볼테르에게 보낸 1740년 서한에서 실레시아를 점령할 기회를 "낡은 정치 체제의 완전한 변혁을 위한 신호"라고 칭했다.
2. 1.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주장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주장은 16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1] 1537년 실레시아 피아스트 공작 레그니차의 프레데릭 2세와 호엔촐레른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 2세 헥토르 사이에 상속 조약이 체결되었다.[1] 이 조약에 따라 레그니차 공국, 볼라우 공국, 브레크 공국은 실레시아의 피아스트 왕조가 단절될 경우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넘어가도록 규정되었다.[1] 그러나 당시 보헤미아의 합스부르크 왕 페르디난트 1세는 이 협정을 거부하고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이를 파기하도록 압박했다.[1]1603년, 호엔촐레른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 3세 프리드리히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로부터 예거른도르프 공국을 상속받아 둘째 아들인 요한 게오르크를 공작으로 임명했다.[2] 1618년 보헤미아 반란과 뒤이은 30년 전쟁에서 요한 게오르크는 가톨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맞서 반란에 참여했다.[2] 1621년 백산 전투에서 가톨릭이 승리한 후 황제는 요한 게오르크의 공국을 몰수하고 그의 사후에도 상속자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했지만,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은 예거른도르프의 정당한 통치자임을 계속 주장했다.[2]
1675년 레그니츠의 게오르크 빌헬름 공작의 죽음으로 실레시아 피아스트 가문이 단절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레그니츠, 볼라우, 브레크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합스부르크 황제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주장을 무시하고 해당 영토를 보헤미아 왕실로 몰수했다.[3] 1685년, 오스트리아가 대 터키 전쟁에 참전했을 때 레오폴트 1세 황제는 군사적 지원과 실레시아에 대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미결 주장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실레시아의 월경지인 슈비부스에 대한 즉시 통치권을 부여했다.[4] 그러나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한 후, 황제는 1694년 슈비부스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았다.[4] 황제는 해당 영토가 단지 고인이 된 대 선제후에게 평생 동안만 개인적으로 할당된 것이라고 주장했다.[4] 프리드리히 3세는 이 협정을 파기하고 예거른도르프와 실레시아 피아스트 상속에 대한 옛 호엔촐레른 가문의 주장을 다시 제기했다.[4]
2. 2.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문제
18세기 초,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713년 국사조칙을 통해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카를 6세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통치자가 되었고, 합스부르크 군주국 내의 보헤미아 왕관령과 헝가리 영토의 통치자도 되었다. 카를 황제의 생전에는 국사 조칙이 일반적으로 제국 신분들에게 인정되었지만, 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은 즉시 이의를 제기했다.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베르트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는 각각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 사촌과 결혼했고, 그들은 남성 상속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합스부르크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동군 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통치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는 자신의 두 왕국을 하나의 연속적인 영토로 연결하기 위해 슐레지엔을 장악하는 데 특히 관심이 있었다.
한편, 새롭게 즉위한 호엔촐레른 왕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 5월 왕위에 오른 직후 슐레지엔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이 세습 영지가 아니라 제국의 왕관령의 일부로서 합스부르크가가 소유하고 있을 뿐이므로, 국사조칙은 슐레지엔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국사조칙의 승인에 동의했을 때, 그 대가로 라인란트의 율리히 공국과 베르크 공국에 대한 청구 지원을 얻었지만, 오스트리아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는 볼테르에게 보낸 1740년 서한에서 실레시아를 점령할 기회를 "낡은 정치 체제의 완전한 변혁을 위한 신호"라고 칭했다.
2. 3. 지정학적, 경제적 요인
3. 제1차 슐레지엔 전쟁 (1740년 - 1742년)
1740년 10월 20일 카를 6세가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즉시 선제 공격을 결정하고 11월 8일 프로이센 육군 동원을 명령했으며, 12월 11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최후 통첩을 보내 실레지아 할양을 요구했다. 실레지아 할양의 대가로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외의 합스부르크가 영토에 대한 공격을 막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국사 조서를 승인하는 것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서의 표를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에게 투표할 것을 제안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12월 16일 프로이센군을 이끌고 선전 포고 없이 국경을 넘어 실레지아에 침입했다.[5] 이후 1741년 1월 말까지 실레지아 거의 전역을 점령하고, 남은 그로가우, 브리크, 나이세의 오스트리아 3 거점을 포위했다. 오스트리아군은 3월 말에 나이세 포위를 풀었지만, 4월 10일 몰비츠 전투에서 프로이센 본군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의 실레지아 지배는 확고해졌다.
유럽 각국은 오스트리아가 몰비츠 전투에서 패배하여 프로이센군의 침공을 막지 못한 것에 용기를 얻어 오스트리아 공격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전쟁은 단순한 실레지아를 둘러싼 분쟁에 그치지 않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발전하여 이후 수개월 동안 바이에른, 작센, 프랑스, 나폴리, 스페인이 각지에서 오스트리아 영토를 공격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영국의 촉구와 중재로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비밀 강화 교섭을 시작하여 10월 9일 클라인슈넬렌도르프 밀약이라고 불리는 비밀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밀약에 의해 오스트리아는 강화의 대가로 향후 강화 조약에서 니더 실레지아를 할양하는 것에 동의했다.
오스트리아가 자군을 다른 적군에 대처하게 하고,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가 밀약을 이행하고 실레지아 할양에 응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여 협정 무효를 선언하고 진군을 재개했다.[5] 1741년 12월 프로이센군은 모라비아로 진군하여 수도 올뮤츠를 점령, 보헤미아 변경의 글라츠 요새를 포위했다.[5] 1742년 1월, 174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가 열려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카를 7세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당선되었다. 2월, 프리드리히 2세는 작센군과 프랑스군과 함께 모라비아를 경유하여 빈으로 진군했지만, 프랑스군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빈으로의 진군 계획은 4월에 포기되었고,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와 오버 실레지아로 철수했다.[6][5]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에 대한 반격을 시도, 5월 17일 초투지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교전했으나 패배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을 보헤미아에서 몰아낼 수단이 없는 상황이 되었고, 브레슬라우에서 프로이센과의 강화 교섭을 재개했다.[7] 영국의 압력으로 오스트리아는 실레지아의 대부분과 보헤미아의 글라츠 백작령 할양에 동의하고, 실레지아 남단의 소량의 영토(크르노프, 오파바, 니사 삼공국의 일부, 그리고 체신 공국)만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프로이센은 실레지아 자산을 담보로 한 오스트리아의 부채 일부를 대신 지불하는 것에 동의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중립 유지를 동의했다. 이 합의는 1742년 6월 11일 브레슬라우 조약에서 채택되었고, 7월 28일 베를린 조약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8]
4. 제2차 슐레지엔 전쟁 (1744년 - 1745년)
프로이센과의 평화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와 영국-하노버 동맹국은 1741년 프랑스와 바이에른이 얻은 이득을 되돌릴 수 있었다.[9] 1743년 중반까지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고, 프랑스를 라인강 너머로 몰아내고, 바이에른을 점령했다.[9] 1743년 9월 영국, 오스트리아, 사보이-사르데냐는 웜스 조약에 따라 새로운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프리드리히가 다른 곳에서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슐레지엔을 되찾으려 한다고 의심하게 했다.[9] 그리하여 1744년 8월 7일 프로이센은 황제 카를 알베르트를 위해 진행 중인 분쟁에 개입한다고 선언했고, 프리드리히는 8월 15일 보헤미아로 국경을 넘어 군대를 이끌고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을 시작했다.[10]
프로이센군은 프라하에 집결하여 9월 16일 도시를 점령했고, 이 새로운 위협으로 오스트리아군은 바이에른을 통해 프랑스에서 후퇴했다.[10]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재배치를 괴롭히고 방해하는 데 실패했고,[11] 오스트리아군은 신속하게 완전한 전력으로 보헤미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프라하 주변에 군대를 모아 결정적인 교전을 시도했지만, 오스트리아 사령관 오토 페르디난트 폰 트라운은 침략자들의 보급선을 괴롭히는 데 집중했고, 결국 프로이센군은 11월에 보헤미아를 포기하고 상부 슐레지엔으로 후퇴하게 되었다.[11]
1745년 1월 바르샤바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영국, 작센, 네덜란드 공화국 간의 새로운 "4국 동맹"을 수립했다.[12] 한편, 황제 카를 알베르트는 1월 20일에 사망했고, 프리드리히의 동맹의 근거를 파괴했다.[11] 오스트리아는 1745년 3월 바이에른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여 4월 15일 파펜호펜 전투에서 프랑스-바이에른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4월 22일 퓌센 조약으로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3세 (고 카를 알베르트 황제의 아들)와 평화를 맺었다.[13]
바이에른을 격파한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침공을 시작했다. 5월 말 오스트리아-작센 군은 자이언트 산맥을 넘어 슐레지엔으로 들어왔고, 6월 4일 프리드리히에게 기습을 당해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가 벌어져,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회복할 가능성은 즉시 사라졌다.[14][15] 프로이센군은 퇴각하는 오스트리아-작센군을 따라 보헤미아로 진격하여 엘베강을 따라 주둔했고, 프리드리히는 평화 협정을 추진했다.[16] 그 후 몇 달 동안 마리아 테레지아는 충분한 선제후들의 지지를 얻어 9월 13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남편 프란츠 1세를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하여, 전쟁의 주요 목표 중 하나를 달성했다.[17]
9월 29일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에 있는 프리드리히의 진영을 공격했고, 오스트리아의 기습과 우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소어 전투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했다.[13][15] 곧 낮은 보급으로 인해 프로이센군은 겨울을 위해 상부 슐레지엔으로 철수해야 했다.[18] 11월에 오스트리아와 작센은 베를린을 점령하고 전쟁을 즉시 종식시키기 위해 브란덴부르크에 대한 기습 이중 침공을 준비했다.[15][13] 11월 23일 프리드리히는 헤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침략군을 기습하여 더 큰 오스트리아군을 혼란시키고 흩어지게 했다. 한편, 안할트-데사우 공 레오폴트 1세 휘하의 또 다른 프로이센군은 서부 작센으로 진격하여 12월 15일 케셀스도르프 전투에서 작센군을 공격하여 파괴한 후 프로이센군은 드레스덴을 점령했다.[17]
드레스덴에서 교전국들은 즉시 평화 조약을 협상했고, 그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과 글라츠에 대한 프로이센의 지배를 인정했고, 프리드리히는 프란츠 1세를 신성 로마 황제로 인정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중립을 다시 약속했다.[17] 오스트리아 동맹에 참여한 작센은 프로이센에 100만 릭스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 지역의 국경은 프로이센의 주요 목표였던 ''현상 유지''로 확인되었다.[19] 이 드레스덴 조약은 1745년 12월 25일에 서명되어 오스트리아, 작센, 프로이센 간의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이 종결되었다.
5. 제3차 슐레지엔 전쟁 (1756년 - 1763년)
제3차 슐레지엔 전쟁은 7년 전쟁의 일부로, 오스트리아가 외교 혁명을 통해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21][22]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8월 작센을 침공하여 전쟁을 시작했고, 1757년 프라하 전투, 로스바흐 전투, 로이텐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초반 우세를 점했다. 특히 로스바흐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가 전쟁에 더 이상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759년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대패하면서, 이후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전투 이후 패전을 확신했지만, 연합군의 내분과 소극적인 대응 덕분에 위기를 넘겼고, 이를 브란덴부르크 왕가의 기적이라 불렀다.
1760년 라이그니츠 전투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고, 이후 베를린이 일시 점령되기도 했지만, 1761년까지 결정적인 전황 변화는 없었다. 1762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친프로이센적인 표트르 3세가 즉위하면서 전세는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전환되었다. 표트르 3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비록 표트르 3세는 곧 폐위되었지만, 러시아는 전쟁에 다시 참전하지 않았다. 결국 1763년 2월,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고,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영유를 확정지었다.
6. 영향
슐레지엔 전쟁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끝났다.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였고, 이후 역사학계에서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24] 프로이센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점령하고 방어했으며, 제2차 및 제3차 전쟁에서 '전쟁 전의 상황'(status quo ante)으로 돌아간 결과는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러한 갈등은 당시 유럽 외교 시스템의 광범위한 재편을 촉발하여,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까지 한 세기 동안 독일 정치를 규정할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경쟁을 확립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같은 해, 후에 연방 인쇄소/Bundesdruckerei영어가 되는 국립 인쇄국을 창설했다.
6. 1. 프로이센
프로이센은 합스부르크 군주국과의 전쟁에서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며 바이에른, 작센과 같은 독일 경쟁국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개신교 독일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프로이센은 글라츠와 슐레지엔에서 약 35,000km²의 새로운 영토와 약 100만 명의 새로운 신민을 얻었다. 이 지역은 인구가 많고 산업화가 잘 되어 있어 프로이센에 상당한 인력과 세금을 제공했다. 지정학적으로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에게 작센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위협적인 위치를 제공하고 폴란드에 의한 포위에 대한 강력한 방어를 제공했다.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에서의 성공으로 "대왕"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개인적인 명성을 크게 높였다.[23] 엘리자베타 여왕의 죽음 이후 러시아의 태도 변화와 영국의 재정 지원에 대한 그의 빚은 곧 잊혀졌고, 그의 정력적인 지도력과 전술적 천재성에 대한 기억은 열심히 홍보되었다. 그의 작은 왕국이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물리치고 오스트리아, 영국, 작센, 러시아, 스웨덴, 프랑스에 맞서 승리한 성과를 방어한 것은 당시의 관찰자들에게 기적처럼 보였다.
슐레지엔 전쟁은 프로이센의 위대한 부상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전쟁은 왕국의 경제와 인구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프리드리히 통치의 남은 기간의 대부분은 그 피해를 복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인구 손실을 완화하기 위해 국왕은 가톨릭 왕국에서 온 개신교 난민들에게 프로이센으로 재정착하도록 장려하는 잘츠부르크 개신교도 정책을 계속했다. 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부과된 반복적인 통화 평가 절하는 프로이센(그리고 점령된 작센)에서 빠른 인플레이션과 큰 경제적 혼란을 초래했다. 전쟁 이후 국가는 군사 곡물 창고 네트워크와 곡물에 대한 소비세를 사용하여 식량 가격을 안정시키고 곡물 부족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은 또한 슐레지아 전쟁의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참전 용사를 위한 초보적인 사회 복지 시스템을 구축했다.
프로이센군은 전쟁에서 심각한 사상자를 겪었고, 장교단은 심각하게 고갈되었다. 휴베르투스부르크 평화 조약 이후 국가는 프리드리히가 즉위했을 때와 같은 수준으로 군대를 재건할 돈도 인력도 없었다. 그 후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1778–1779)에서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가 직접 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없이 싸웠고, 프로이센군은 1792–1795년 프랑스 혁명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1806년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에 의해 예나 전투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1806–1807년의 재앙에 의해 촉발된 일련의 개혁 후에야 프로이센 군사력이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6. 2. 오스트리아
슐레지엔 상실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고, 덜 중요한 독일 제후에게 굴복한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프로이센이 일류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국왕과 군대의 위신이 높아진 것은 오스트리아의 독일 내 패권에 대한 장기적인 위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과 아들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 대한 프로이센의 지지를 얻어 가족의 명목상 우위를 보장했지만, 이는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명백히 열세인 적과의 첫 두 차례의 실레지아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합스부르크 군주국 내에서 변화를 강력하게 촉진하여 테레지아 개혁의 첫 번째 물결을 가져왔다. 즉, 합스부르크 행정과 군대의 광범위한 구조 조정과 "외교 혁명"을 통한 합스부르크 외교 정책의 완전한 재편이었다. 세 번째 실레지아 전쟁의 실망이 재차 반복된 후, 테레지아 개혁의 두 번째 물결이 이어졌다. 1761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종종 혼란스러웠던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새롭게 중앙 집권화된 행정 및 정책 결정 기구를 시행했다.
1766년, 국가는 왕국의 법률 시스템을 통일하기 위해 최초의 일반 법전인 ''테레지아 법전''을 공포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농민의 국가 세금 기반 기여 능력을 높이기 위해 1771년부터 1778년 사이에 일련의 노동 특허를 발급하여 독일 및 보헤미아 영토에서 농민의 강제 노동을 제한했으며, 아들은 농노령 특허를 통해 이 과정을 더욱 발전시켰다. 또한 국가는 의무적인 초등 교육을 시행하고 세속적인 공립학교 시스템을 설립했다. 이러한 조치들을 시작으로, 다음 반세기에 걸쳐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현대화하기 위한 광범위한 노력은 오스트리아의 패배에서 비롯되었으며, 1780년대의 요제프주의로 절정에 달했다.
6. 3. 국제 관계
6. 4. 한국에 대한 시사점
참조
[1]
서적
Chapter X – Kurfürst Joachim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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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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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XVII – Duchy of Jägernd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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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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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XVIII – Friedrich Wilhelm, the Great Kurfürst, Eleventh of the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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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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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XIX – King Friedrich I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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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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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VIII – Friedrich Starts for Moravia, on a New Scheme He H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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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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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X – Friedrich Does His Moravian Expedition Which Proves a Mere Moravian Fo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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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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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XIII – Battle of Chotus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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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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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XIV – Peace of Bresl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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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VII – Friedrich Makes Treaty With France; and Silently Gets Re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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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II – Friedrich Marches upon Prag, Captures Pr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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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V – Friedrich, under Difficulties, Prepares for a New Campa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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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VI – Valori Goes on an Electioneering Mission to Dres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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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IX – The Austrian–Saxon Army Invades Silesia, across the Mount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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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XI – Camp of Chlum: Friedrich Cannot Achieve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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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XII – Battle of So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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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XV – Peace of Dresden: Friedrich Does March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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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VIII – Miscellanea in Winter-Quarters, 17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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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III – Battle of Liegn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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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hapter XIII – Peace of Huberts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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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Chapter I – Sans-Souci
https://books.google[...]
[24]
웹사이트
History - Bundesdruckerei
https://www.bundesd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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