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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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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계분은 청나라 말기의 관료로, 자는 경생(經笙), 호는 소산(小山)이며, 강소 오강 출신이다. 1847년 진사로 등과하여 이홍장, 심보정 등과 함께 서길사에 임명되었고, 내각학사, 예부시랑, 산서순무, 군기대신, 총리각국사무아문대신 등을 역임하며 양무운동을 지지했다. 병부상서, 태자소보를 거쳐 '나귀차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880년 사망 후 태자태부로 추증되고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류큐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의 류큐 2분안에 서명했으나, 이홍장의 비준 거부로 인해 청나라 조정의 묵시적 승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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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나라의 내각학사 - 이홍장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기여하고 직례총독으로서 외교를 주도하며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나, 청일 전쟁 패배와 부패 논란 등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의 삶은 청나라 격변기와 근대화 노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심계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심계분
원어명沈桂芬
심계분
경생(經笙)
소산(小山)
시호문정(文定)
출생일1818년
출생지청나라 장쑤성 오강
사망일1880년
사망지청나라 장쑤성 오강
국적청나라
소속 정당양무운동파
관직 정보
추증 관직태자태부
추증 임기1880년
군주광서제
태자소보태자소보
태자소보 임기1872년 ~ 1880년
태자소보 군주동치제 · 광서제
병부상서병부상서
병부상서 임기1870년 5월 8일 ~ 1881년 2월 1일
병부상서 군주동치제 · 광서제
전임 병부상서정돈근
후임 병부상서이홍조
겸임군기대신 겸 총리각국사무아문대신
겸임 임기1867년 ~ 1881년 2월 1일
호부시랑 겸 산서순무호부시랑 겸 산서순무
호부시랑 겸 산서순무 임기1863년 ~ 1865년
군주 (호부시랑 겸 산서순무)동치제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내각학사 겸 예부시랑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 임기1857년 ~ 1863년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 군주함풍제 · 동치제

2. 생애

강소성 오강현 동리진(同裏鎮) 출신으로, 자는 經笙|경생중국어, 호는 小山|소산중국어이다.[1][2] 도광 27년(1847년)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양무운동을 지지하는 등 청나라 말기의 주요 관료로 활동했다.

2. 1. 초기 생애

강소성 오강현 동리진(同裏鎮) 출신으로, 자는 經笙|경생중국어, 호는 小山|소산중국어이다.[1][2] 도광 27년(1847년)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한림원 서길사(庶吉士)로 임명되었다. 이때 이홍장(李鴻章), 심보정(沈葆楨), 곽숭도(郭嵩燾) 등과 같은 해에 동관(同館)하였다.[1][2]

2. 2. 관료 생활

도광 27년(1847년) 진사에 급제하여 서길사(庶吉士)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홍장, 심보정, 곽숭도 등과 동기였다. 함풍 7년(1857년)에는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을 지냈다. 동치 2년(1863년) 호부좌시랑 겸 산서순무(山西巡撫)로 부임하여 아편 재배를 엄격히 금지시켰다. 동치 6년(1867년)에는 군기대신 겸 총리각국사무아문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홍장, 마신이(馬新貽), 하경(何璟), 심보정 등과 협력하여 각 성에서 진행되던 양무운동을 지원했으며, 양무운동 중앙 지도부 내에서 한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했다. 동치 9년(1870년) 병부상서가 되었고, 동치 11년(1872년)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를 겸임하였다. 같은 군기대신이자 총리각국사무아문대신이었던 이홍조(李鴻藻)와 결탁하여 청나라 말기 조정 내 파벌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광서 원년(1875년)에 잠시 파면되었으나 곧 복직하였다. 복직 후에는 검소하게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조정에 출근하여 '나귀차 재상(驢車宰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광서 6년(1880년) 별세 후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되었고, 문정(文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1][2]

2. 3. 사망

광서 6년(1880년)에 별세하였다.[1][2] 사후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되었고, 문정(文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1][2]

3. 류큐 문제와 심계분

1879년 3월 27일, 일본 정부는 500명의 병력을 류큐 왕국으로 보내 슈리성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4월 4일에는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류큐의 마지막 왕 쇼타이는 폐위되어 도쿄로 압송 후 유폐되었고, 이로써 450년 역사의 류큐 왕국은 소멸하였다.

류큐가 일본에 병합되자, 청나라 조정은 이 문제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당시 미국 제18대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이홍장을 만났다. 그랜트는 류큐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청나라가 류큐를 포기할 경우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이홍장에게 '류큐 3분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류큐 북부는 일본이, 중부는 청과 일본이 공동 관리하며, 남부는 청나라가 관할하는 방안이었다.

이홍장은 그랜트에게 중재를 요청했으나, 일본 측은 그랜트의 3분안을 수정하여 중부와 북부를 일본이, 남부만을 청나라가 관할하는 '류큐 2분안'을 역으로 제시했다. 이는 사실상 류큐 영토의 3분의 2를 일본이 차지하겠다는 의도였다. 1880년 10월, 당시 총리각국사무아문 대신이었던 심계분은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만나 이 '류큐 2분안' 초안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이 초안의 비준을 거부하고 결정을 미뤘다. 비준하자니 류큐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는 명분을 잃고, 거부하자니 일본의 군사적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청나라 조정의 이러한 비준 지연은 결국 일본의 류큐 병합을 막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류큐 병합에 대한 묵시적 승인으로 간주되는 결과를 낳았다.[3]

4. 평가

(작성할 내용 없음)

참조

[1] 위키백과 중국위키백과
[2] 서적 청사고
[3] 뉴스 비운의 오키나와 역사㊤…日, 조선에 앞서 류큐를 집어삼켰다 http://www.gokorea.k[...] 공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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