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쇼케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라이 쇼케이는 1948년 오사카에서 재일 한국인 3세로 태어나, 1966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도쿄 대학 경제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장성 관료를 거쳐 자민당 소속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개혁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했으나, 1997년 닛코 증권으로부터 부당 이익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으로 조사를 받았다. 1998년, 체포 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자살한 정치인 -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전국 시대의 무장으로, 오와리 출신에서 시작하여 일본 통일을 목표로 센고쿠 시대를 지배하며 막강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 일본의 자살한 정치인 - 나카가와 쇼이치
나카가와 쇼이치는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으로, 농림수산대신과 경제산업대신 등 여러 장관직을 역임하고 아소 다로 내각에서 재무대신을 지냈으나 2009년 총선에서 낙선 후 사망했으며, 정치적 견해와 여성관 및 역사 인식, 음주 의혹 등으로 논란이 있었다. - 일본의 재무관료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일본의 재무관료 - 하타 이쿠히코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의 역사학자로, 일본 근현대사와 군사 및 전쟁사를 연구하며 난징 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다수의 저서를 저술하여 일본 내외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여러 상을 수상했다. - 조선적자 - 아라이 히로후미
아라이 히로후미는 한국명 박경배로, 2001년 데뷔하여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동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나, 2019년 성폭행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재일 한국인 3세 일본 배우이다. - 조선적자 - 가네시로 가즈키
가네시로 가즈키는 조선학교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일본의 소설가이자 각본가이며, 자전적 소설 《GO》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영화화된 작품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아라이 쇼케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신아라이 쇼케이 |
원어명 | 新井将敬 |
로마자 표기 | Arai Shōkei |
![]() | |
국적 | 조선적→일본 |
출생일 | 1948년 1월 12일 |
출생지 |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
사망일 | 1998년 2월 19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
학력 | 도쿄 대학 |
정치 | |
정당 | 자유민주당 (미쓰카파) |
이전 정당 | 자유민주당 (와타나베파) 자유당 신진당 무소속 |
선거구 | (구 도쿄 2구→)도쿄 4구 |
당선 횟수 | 4회 |
취임일 | 1986년 7월 7일 |
퇴임일 | 1998년 2월 19일 |
퇴임 사유 | 재직 중 자살 |
이전 직업 | 국가공무원 (대장성) |
학위 | 경제학사 (도쿄 대학) |
2. 생애
1948년 일본 오사카의 작은 마을에서 재일 한국인 3세로 태어났다. 본명은 박경재였으나, 계속되는 일본 사회의 차별을 견디지 못해 가족 모두가 1966년 일본에 귀화한 뒤 아라이 쇼케이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듬해인 1967년 도쿄 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20]
졸업 후 곧바로 일본의 유명 대기업 제철회사 신일본제철에 입사하였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주경야독으로 국가고시를 치러 일본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이 몰린다는 대장성의 관료가 된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고 정확한 업무처리로 실력을 발휘하며 자민당 부총재이자 실력자였던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당시 대장성 대신의 눈에 띄어 그의 발탁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20]
와타나베 미치오의 도움으로 1982년 도쿄 2구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한 그의 상대 후보는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였다. 그는 ‘조선인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며 연일 맹공을 퍼부었다. 그때 이시하라의 비서가 그의 선거 포스터에 ‘1966년 북조선에서 귀화’라고 적힌 검은 딱지 3000장을 붙인 ‘검은 실(seal) 사건’이 일어났다. '승공연합의 첩자'라는 협박장이 사무실로 날아오고 가족들은 ‘조센진 스파이’라는 유언비어들이 나돌았다. 원 국적(조선)이 기록된 호적 원본 복사본이 유권자들에게 우송됐다. 결국 아라이는 첫 출마에서 참패했다.[21]
이후 1986년 치러진 두 번째 선거에서 재기해 재일교포 출신으로 사상 처음 일본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며 개혁의 선봉에 섰다. 그는 정치구조 개혁 등을 외쳐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이로 인해 보수적인 원로 의원들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20]
재기한 아라이가 오히려 자신의 ‘이질적인’ 출생 조건을 살려 일본의 국제화 기수로 자신을 내세우자 극우파의 대표 정치인으로 성장한 이시하라 신타로는 또 다시 그의 출신성분을 들먹이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일관계에선 심한 마찰이 생겼을 때 과연 어느 쪽 국익을 우선할 것인가하는 게 중요합니다. 아라이씨의 원 국적이 북쪽인지 남쪽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교과서문제나 독도 영유권 문제가 있고 어업권도 언제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북쪽은 일본을 적대시하는 나라지요. …귀화했다고는 하지만 원 조국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두 개의 조국 사이에 끼여 본인도 괴로울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1]
1997년 12월 22일 일본 신문들은 ‘닛코증권, 아라이에게 부당 이익 제공’이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증권사가 아라이의 차명계좌를 개설해 정치자금을 수억 원이나 부풀려 줬다는 의혹이었지만, 이는 당시 일본 정치인들에게 오래된 관행이었다. 그 무렵 일본 4대 증권사 중 하나였던 야마이치 증권 파산충격이 열도를 흔들었다. 야당은 아라이 의원의 검찰 증인 출두를 요구했고, 자민당 내에서도 자발적 탈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16살 때까지 나는 재일조선인이었다,” “몇 백명의 국회의원들이 나와 똑같은 투자를 하고 있는데 내 주식거래만 문제가 되는 것은 민족차별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의 항변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중의원에선 그의 체포동의안을 의결하기로 했다.[21]
결국 1998년 2월 19일 오전 3시 자신의 아내가 외출한 사이 호텔방 욕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50세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그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다. 부활을 위한 정치적 터전도, 신념을 같이하는 동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첫 ‘자이니치’(재일동포) 중의원의 꿈은 그렇게 외롭게 끝이 났다.[20]
2. 1. 출생과 성장
아라이 쇼케이는 1948년 오사카부오사카시에서 재일 한국인 3세로 태어났다.[2] 본명은 박경재였으나, 16세 때 조선적에서 일본으로 귀화하여 아라이 쇼케이로 이름을 바꾸었다.[2] 오사카시립 스가나미 중학교와 오사카부립 키타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2] 고등학교 시절 담임교사는 그를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강하고, 상향심이 남들보다 월등히 강했다"고 평가했다.[2]도쿄대학교 이과 1류에 진학하여, 미시마 유키오와 칼 마르크스에 심취하기도 하였다.[2] 도쿄대학교 경제학부 경제학과 졸업 후,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 효고현의 히로하타 제철소에 잠시 근무하다가, 1973년 대장성에 입성하여 주계국총무과에 배속되었다.[3]
관료 경력으로는 오사카 국세청 조사부(1975년)등에서 근무하였으며, 1976년 7월 후생성 아동가정국 기획과에 파견된후, 같은 해 10월, 후생성 의무국 총무과로 이동하였다.[18]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후생대신에 취임한 와타나베 미치오에게 의사 세제에 대해 강의한 것을 계기로 와타나베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18] 1978년 7월 29세의 나이로 센다이 국세청 사카타 세무서장이 되었다.[18] 1979년 7월, 은행국 총무과장 보좌(기획)에 취임한다.[4] 일본 수출입은행 총무부 조사역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대장대신이 된 와타나베 미치오의 정무 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18][5] 비서관 시절 중기 국채 펀드 도입을 성사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니쿄 증권(현: SMBC닛코 증권)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6]
2. 2. 엘리트 관료 시절
1967년 도쿄 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는 미시마 유키오와 칼 마르크스에 심취했다. 졸업 후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에 입사했으나, 1973년 대장성 관료가 되었다. 대장성에서 와타나베 미치오 당시 대장성 대신의 눈에 띄어 그의 정치 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와타나베의 비서관 시절, 증권계가 갈망하던 소액 예금 상품인 '중기 국채 펀드' 도입을 성사시켰다.2. 3. 정치 입문과 시련
아라이 쇼케이는 1983년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구 도쿄 2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7] 당시 상대 후보였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조선인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발언을 하고, 아라이의 선거 포스터에 '검은 실(seal)'을 붙이는 등 인종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7] 이시하라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비서가 함부로 한 것"이라고 발뺌했지만, 민족적 출신을 비방한 것에 대해서는 "선거민은 입후보한 사람의 개인적인 과거를 알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7] 아라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극우 활동가 노무라 슈우스케와 평생 교류하게 된다.[8]2. 4. 중의원 의원 당선과 개혁 활동
1983년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신인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당시 대립 후보였던 이시하라 신타로 진영에서 아라이 쇼케이의 출신을 "구 북한 사람"이라고 비방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아라이는 이시하라를 고소했다.[7]1986년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재일교포 출신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7] 이후 연속 4회 당선되었다. 아라이는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며 정치구조 개혁 등을 주장하여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보수적인 원로 의원들의 미움을 샀다.
1992년 도쿄 사가와 급편 사건이 발각되자,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를 강하게 비판하고 의원 사퇴를 요구했다. 정치 개혁과 중선거구제 도입 논쟁에서 개혁파 젊은 논객으로 TV에 출연하며 주목받았다. 아카기 노리히코 등도 당시 아라이와 행동을 함께했다. 아라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나 이시하라 신타로까지도 "수구파"라고 비판했다.
1993년 자민당 분열 시 자민당에 잔류했으나,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후계를 둘러싼 와타나베 미치오 추대 과정에서 탈당하여 자유당을 결성했다.
1994년 신진당 결성에 참여했으나, 오자와 이치로의 당 운영에 반발하여 1996년 탈당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한 후, 자민당에 복당하여 세이와 정책 연구회(미츠카파)에 소속되었다.[9]
2. 5. 닛코 증권 스캔들과 죽음
1997년 12월, 아라이 쇼케이는 닛코 증권으로부터 부당 이익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다.[10] 이는 당시 일본 정치인들에게 만연했던 관행이었으나, 야당과 자민당 내에서 아라이에 대한 압박이 거세졌다. 그는 "재일조선인이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민족 차별이라고 항변했으나,[10] 1998년 2월 19일, 중의원 의원 운영 위원회에서 체포 동의 요구가 가결되어 본회의에서 체포 동의 결의가 표결될 예정이었다. 표결 직전, 아라이는 "마지막 말만 들어주십시오. 저는 결백합니다"라고 말했다.[10]다음날인 1998년 2월 20일, 도쿄도 미나토구의 호텔 파시픽 도쿄 23128호실에서 아라이 쇼케이는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11][12][13][14][15][16] 방에는 위스키 빈 병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17] 신문 보도와 경찰은 자살로 판단했지만, 자살 동기를 의심하는 설이나 타살을 의심하는 설 등 여러 설이 있으며,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내와 가메이 시즈카에게 보내는 유서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18] 아라이의 사망으로 인해 체포 허가 청구는 철회되었다.
같은 해 3월 10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요시노 케이에 의해 추도 연설이 행해졌다.[19] 그의 아내는 "남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출마를 결심했다"며 도쿄도 제4구의 보궐선거에 출마 의욕을 보였으나,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
3. 사후
1998년 2월 20일, 도쿄도 미나토구의 호텔 파시픽 도쿄 23128호실에서 아라이 쇼케이는 목 매달아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11][12][13][14][15][16] 방에는 위스키 빈병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17] 신문 보도와 경찰은 자살로 판단했지만, 자살 동기를 의심하는 설이나 타살을 의심하는 설 등 여러 설이 있으며,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라이의 사망으로 인해 체포 허가 청구는 철회되었다.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과 재일동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 정치의 부패와 개혁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같은 해 3월 10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요시노 케이에 의해 추도 연설이 행해졌다.[19]
아라이의 아내는 남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도쿄도 제4구의 보궐선거 출마를 고려했으나,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
4. 저서 및 관련 문헌
4. 1. 저서
- 정보센터출판국 (情報センター出版局)에서 1983년 11월 18일에 출판한 《신화에의 도전 : 단괴의 세대는 묵묵히 죽지 않는다》 (神話への挑戦 : 団塊の世代は黙って死なない)
- 쇼덴샤 (祥伝社)에서 1993년 4월 15일에 출판한 《「헤이세이의 난」을 일으켜라 : 신뢰회복의 원점은 바로 이것이다》 (「平成の乱」を起こせ : 信頼回復の原点はこれだ)
- 매거진하우스 (マガジンハウス)에서 1994년 6월 23일에 출판한 《에로틱한 정치 : 살아남기 위해 죽기 위한 말》 (エロチックな政治 : 生きるため死ぬための言葉)
4. 2. 관련 문헌
- 안베 죠지/安部譲二일본어 『일본괴사인열전(日本怪死人列伝)』 산케이신문뉴스서비스(産経新聞ニュースサービス), 2002년 4월 1일, ISBN 978-459403487-0
- * 후소샤문고(扶桑社文庫), 2004년
- 아라이 마리코/新井真理子일본어 『마지막 연서 천국의 당신에게—"아라이 마사타카의 아내"는 나의 천직이었다(最後の恋文 天国のあなたへ—「新井将敬の妻」は私の天職だった)』 정보센터출판국(情報センター出版局), 2005년 10월, ISBN 978-479584432-2
- 아라이 마리코/新井真理子일본어 "아라이 마사타카(新井将敬) 미망인이 본 "자결의 순간" 미해결사건 30(私は真犯人を知っている 未解決事件30)" 『문예춘추/文藝春秋일본어』 편집부 편(編集部), 문예춘추/文藝春秋일본어, 2011년 3월, ISBN 978-416780127-4
- 이가리 토시오/猪狩俊郎일본어 "아라이 마사타카(新井将敬) 의원을 자살로 몰아넣은 검찰의 수사방법은.." 『격돌! 검찰, 폭력단, 변호사회 - 타부의 권력과 대치한 변호사의 사건부(激突! 検察、暴力団、弁護士会 - タブーの権力と対峙した弁護士の事件簿)』 코분샤(光文社), 2010년 9월 17일, ISBN 978-433497626-2
- 오카와 유타카/大川豊일본어 『누가 아라이 마사타카(新井将敬)를 죽였는가(誰が新井将敬を殺したか)』 오타슈판(太田出版), 1998년 7월, ISBN 978-487233410-4
- 오지마 마사히로/尾島正洋일본어 "제7장 산이치증권의 붕괴와 아라이 마사타카(新井将敬)의 자살" 『총회야와 버블(総会屋とバブル)』 문예춘추/文藝春秋일본어 〈분슌신쇼(文春新書)〉, 2019년 11월 20일, ISBN 978-416661241-3
- 도쿄대학 법학부 부속 근대일본법정사료센터 원자료부(東京大学法学部附属近代日本法政史料センター原資料部) 편(編) 『아라이 마사타카(新井将敬) 관계문서 목록(関係文書目録)』 2003년 2월
- 세이부 스스무/西部邁일본어 "아라이 마사타카(新井将敬)를 검찰에 팔아넘긴 니코증권과 자민당" 『세이부 스스무/西部邁일본어의 논쟁 또다시 - 대미속국에서 벗어나는 방법(西部邁の論争ふたたび - 対米属国からぬけでる方法)』 니칸코교신문사(日刊工業新聞社) 〈B&T북스(B&Tブックス)〉, 1999년 11월, 215-217쪽, ISBN 978-452604470-0
- 가와 신키/河信基일본어 『의원의 자결 - 아라이 마사타카(新井将敬)의 진실(代議士の自決 - 新井将敬の真実)』 산이치쇼보(三一書房), 1999년 12월, ISBN 978-438099233-9
- 가와 신키/河信基일본어 『일본개혁의 옛날과 지금 - 수상을 목표한 재일 아라이 마사타카(日本改革の今昔 - 首相を目指した在日 新井将敬)』 사이류샤(彩流社), 2017년 6월 20일, ISBN 978-477912339-9
5. 아라이 쇼케이의 비서
- 소곰 신지(小熊慎司)는 입헌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이다.
- 오츠카 토오루(大塚徹)는 오비히로 시의회 의원이다.
- 야스다 곤네이(安田権寧)는 빅카메라 이사이다.
- 이토 마사히로(伊藤昌宏)는 시나가와 구의회 의원이다.
- 아라키 히데키(荒木秀樹)는 전 오타 구의회 의원이다.
- 우에하라 카츠히토(上原克仁)는 시즈오카 현립대학 경영정보학부 준교수이다.
참조
[1]
웹사이트
出自めぐる光と影…新井将敬元衆院議員の実像に迫る「土曜セミナー」
https://www.mindan.o[...]
2011-11-16
[2]
서적
虚ろな革命家たち―連合赤軍 森恒夫の足跡をたどって
集英社
2022
[3]
잡지
文藝春秋
(정보 부족)
2024-02
[4]
서적
職員録 第1部
大蔵省印刷局
1980
[5]
문서
要出典範囲
2024-10
[6]
웹사이트
亀井内閣府特命担当大臣閣議後記者会見の概要(雑誌・フリー等の記者):金融庁
https://www.fsa.go.j[...]
2024-11-20
[7]
웹사이트
第47回:石原慎太郎の偉業、黒シール事件! 「北朝鮮より帰化」勢の立候補を阻むべき理由|悪いキツネをおさえつけることはできない|丸屋 九兵衛|webちくま
https://www.webchiku[...]
2017-03-22
[8]
웹사이트
第47回:石原慎太郎の偉業、黒シール事件! 「北朝鮮より帰化」勢の立候補を阻むべき理由|悪いキツネをおさえつけることはできない|丸屋 九兵衛|webちくま
https://www.webchiku[...]
2017-03-22
[9]
웹사이트
かつての政界キングメーカー、亀井静香氏がぶっちゃけた小泉、石破、新井、俺 「政策なんて権力を握ってから考えればいい」とあの総理は言った {{!}} JBpress (ジェイビープレス)
https://jbpress.isme[...]
2024-11-20
[10]
웹사이트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が書く「検察情報とメディアの追随」
https://blog.goo.ne.[...]
gooブログ
2009-05-31
[11]
뉴스
(제목 없음)
産経新聞
2008-02-20
[12]
서적
日本怪死人列伝
産経新聞ニュースサービス
2004
[13]
뉴스
한국계의원 자살
KBSニュース9, 한국방송공사
1998-02-19
[14]
뉴스
일본, 한국계 아라이 쇼케이 의원 자살
https://imnews.imbc.[...]
MBCニュースデスク, 문화방송 (한국)
1998-02-19
[15]
뉴스
일본 정계파문
KBSニュース9, 한국방송공사
1998-02-20
[16]
뉴스
한국계 아라이 쇼케이 의원 자살,일본정치의 벽 좌절
https://imnews.imbc.[...]
MBCニュースデスク, 문화방송 (한국)
1998-02-20
[17]
웹사이트
新井将敬さんの自殺について 1998/02/23
https://www.eda-jp.c[...]
2024-11-20
[18]
잡지
新井将敬氏における「死ぬべき理由」
産業経済新聞社
1998-05
[19]
웹사이트
第142回 衆議院 本会議 第15号 平成10年3月10日
https://kokkai.ndl.g[...]
1998-03-10
[20]
뉴스
책갈피 속의 오늘] 1998년 日중의원 아라이 자살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8-02-19
[21]
뉴스
한국계 일본인 아라이 중의원…주식 불법거래 혐의 받다 자살
https://news.naver.c[...]
한겨레신문
2006-02-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