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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냐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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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마냐크파는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암살 이후 부르고뉴 공작에 대항하여 결성된 정치적 동맹이다. 지앵 동맹을 결성하여 부르고뉴파와 대립했으며,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 왕국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아르마냐크파는 파리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가혹한 통치로 반발을 사기도 했다. 1419년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 이후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부르고뉴파에 밀려 쇠퇴했으며, 아라스 조약(1435년)을 통해 부르고뉴파와의 갈등을 종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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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냐크파
개요
아르마냐크파 문양
아르마냐크파의 상징
주요 인물베르나르 7세
샤를 1세 드 알브레
루이 1세 도를레앙
샤를 5세
샤를 6세
장 다르크
상세 정보
유형정치 파벌
국가프랑스 왕국
존속 기간1410년 - 1460년대
이념왕권 강화
반 부르고뉴파
적대 세력부르고뉴파
관련 사건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
백년 전쟁
역사적 배경
기원루이 1세 도를레앙의 지지자들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의 지지
주요 사건1410년: 파벌 형성
1418년: 파리 점령
1429년: 장 다르크의 등장과 왕세자 지지
해체1460년대 이후 세력 약화 및 소멸

2. 기원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용담공 장의 명령으로 암살당하면서, 부르고뉴 공작에 대항하는 동맹이 1410년 결성되었다.[1] 이 동맹에는 베리 공작, 브르타뉴 공작, 오를레앙 공작, 알랑송 백작, 클레르몽 백작, 아르마냐크 백작 등이 참여했다. 암살된 루이의 아들 샤를 드 오를레앙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 보느 다르마냐크와 결혼했고, 베르나르 7세가 이 가문의 명목상 수장이 되면서 오를레앙파는 '아르마냐크파'로 불리게 되었다.[1]

아르마냐크파는 발루아 궁정에서 오를레앙파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파리 시의 질서 유지를 위해 고용된 가스코뉴 출신 병사들은 흰색 어깨띠를 착용했다. 그러나 아르마냐크파의 잔혹한 전술은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평판을 떨어뜨렸다.

2. 1.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암살 (1407년)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용담공 장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1] 이 사건은 부르고뉴의 야망을 우려한 베리 공작, 브르타뉴 공작, 오를레앙 공작, 알랑송 백작, 클레르몽 백작, 아르마냐크 백작1410년 부르고뉴 공작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하게 만들었다.[1] 암살당한 루이의 아들 샤를 드 오를레앙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 보느 다르마냐크와 결혼하여, 장인이 명목상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1]

2. 2. 지앵 동맹 결성 (1410년)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용담공 장의 명령으로 암살되었다.[1] 부르고뉴의 야망을 우려한 베리 공작, 브르타뉴 공작, 오를레앙 공작, 알랑송 백작, 클레르몽 백작, 아르마냐크 백작1410년 부르고뉴 공작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1] 암살당한 루이의 아들 샤를 드 오를레앙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 보느 다르마냐크와 결혼하여, 장인이 명목상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를레앙파는 아르마냐크파로 불렸다.[1]

아르마냐크파는 도시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나 지앵 동맹을 결성하고, 불만을 가진 왕족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샤를 5세의 막내 동생인 베리 공작 장, 앙주 공 루이 2세, 부르봉 공작 장 1세, 알랑송 공작 장 1세,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프랑스의 컨스터블 샤를 달브레, 클레르몽 백작 장이었다. 이들은 아르마냐크파의 정치적, 군사적 엘리트를 구성했다.

3. 프랑스 왕국의 주도권 다툼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용담공 장의 명령으로 암살당하면서 프랑스 왕국 내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1410년 베리 공작, 브르타뉴 공작, 오를레앙 공작, 알랑송 백작, 클레르몽 백작, 아르마냐크 백작 등은 부르고뉴의 야망을 우려하여 동맹을 결성했다.[1] 이 동맹은 암살된 루이의 아들 샤를 도를레앙이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과 결혼하면서 아르마냐크 백작이 명목상 수장이 되었고, 이로 인해 오를레앙파는 '아르마냐크파'로 불리게 되었다.[1]

파리 시민들은 도시 지배권을 놓고 부르고뉴파와 투쟁하면서 "아르마냐크"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아르마냐크파는 발루아 궁정에서 오를레앙파를 열렬히 지지했지만, 가스코뉴 출신 약탈자들의 잔혹한 전술로 인해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1409년 12월 말, 부르고뉴파는 시 정부의 모든 직책을 장악했다.

이에 아르마냐크파는 도시 정치에서 물러나 지앵 동맹을 결성하고, 불만을 가진 왕족들과 합류했다. 베리 공작 장, 앙주 공 루이 2세, 부르봉 공작 장 1세, 알랑송 공작 장 1세,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샤를 달브레, 클레르몽 백작 장 등이 참여하여 아르마냐크파의 정치적, 군사적 엘리트를 구성했다.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는 비세트르 조약을 통해 휴전을 시도했으나, 아르마냐크파가 파리를 포위 공격하면서 실패했다. 1411년 10월, 소규모 영국군이 칼레에 상륙하여 파리로 진군하며 부르고뉴 정부를 지원했다.

3. 1. 내전의 격화와 잉글랜드의 개입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용담공 장의 명령으로 암살당한 후, 1410년 베리 공작, 브르타뉴 공작, 오를레앙 공작, 알랑송 백작, 클레르몽 백작, 아르마냐크 백작 등이 부르고뉴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1] 암살된 루이의 아들 샤를 도를레앙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이 가문의 명목상 수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오를레앙파는 아르마냐크파로 불리게 되었다.[1]

파리 시민들은 부르고뉴파에 대항하여 도시 지배권을 놓고 투쟁하면서 "아르마냐크"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아르마냐크파는 발루아 궁정에서 오를레앙파를 열렬히 지지했지만, 가스코뉴 출신 약탈자들의 잔혹한 전술로 인해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1409년 12월 말까지 부르고뉴파는 시 정부의 모든 직책을 장악했다.

아르마냐크파는 도시 정치에서 물러나 지앵 동맹을 결성하고, 불만을 가진 왕족들과 합류했다. 베리 공작 장, 앙주 공 루이 2세, 부르봉 공작 장 1세, 알랑송 공작 장 1세,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샤를 달브레, 클레르몽 백작 장 등이 이에 참여하여 아르마냐크파의 정치적, 군사적 엘리트를 구성했다.

비세트르 조약은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간의 휴전을 시도했으나, 아르마냐크파가 파리를 포위 공격하면서 실패했다. 1411년 10월, 영국군이 파리로 진군하여 부르고뉴 정부를 지원했다.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 양측은 잉글랜드의 헨리 4세의 지원을 구했다.[1] 1412년 5월, 아르마냐크파는 부르주 조약에서 4,000명의 군대와 맞바꾸어 가스코뉴에서 헨리 4세에게 완전한 주권을 제공했다.[1] 클라렌스 공 토마스는 노르망디를 포함한 상당한 영토 할양을 요구했다. 아르마냐크파는 내부 분쟁에 대한 영국의 중재를 구하며 뷔잔세 조약에서 엄청난 몸값을 요구받았다. 기옌 공 루이는 계략에 넘어가 패배하고 오세르 조약에 강제로 서명했다.

1419년, 부르고뉴는 파리를 장악했고, 아르마냐크 백작은 암살당했다. 같은 해 헨리 5세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양측은 영국이 주요 위협임을 인지하고 화해를 시도했으나, 1419년 9월 몽테로 다리 회의에서 도팽 샤를의 추종자들이 용담공 장을 암살했다. 그 결과, 장의 아들 좋은 필립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1]

아르마냐크파는 도팽 샤를과 함께 프랑스 중부와 남부에 별도의 관할권을 설립했고, 영국-부르고뉴 동맹은 파리를 포함한 북부를 장악했다.[1] 양측 간의 산발적인 전쟁은 계속되었고, 백년 전쟁이 끝날 무렵 샤를 7세에 의해 이 용어는 금지될 때까지 파벌 간의 불화는 지속되었다.

1411년 7월부터 시작된 내전에서 양측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다. 부르고뉴파는 10월에 잉글랜드 지원군 2000명을 얻어 파리를 점령했으나, 1412년 1월 잉글랜드의 정책 변화로 5월에 아르마냐크파와 잉글랜드의 동맹이 체결되면서 부르고뉴파는 배제되었다.

1413년 파리에서 친부르고뉴파인 시몽 까보슈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아르마냐크파 관료들을 학살하는 사건(까보슈의 난)이 발생했다. 샤를 6세와 왕태자는 아르마냐크파에 도움을 요청했고, 8월에 폭도들을 진압한 아르마냐크파는 궁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하며 큰 타격을 입었다.

1417년부터 시작된 헨리 5세의 프랑스 정복에 아르마냐크파는 속수무책이었다. 1418년 부르고뉴파가 선동한 파리 시민들의 폭동으로 아르마냐크 백작이 살해되었고, 파리는 다시 부르고뉴파가 장악했다.[8]

1419년 샤를 왕태자 등 아르마냐크파는 무공(無怖公)을 암살했다. 이에 그의 아들 필리프 3세와 잉글랜드가 동맹을 맺었고,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왕태자는 계승권을 부정당했다.

아르마냐크파는 부르주를 중심으로 잉글랜드에 저항했지만, 1422년 이후 잉글랜드군에 밀렸다. 욜랑드 다라고니는 1424년 브르타뉴 공작과 함께 선량공과 왕태자 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1425년 리슈몽을 프랑스 원수에 임명하고, 아르마냐크파 강경파를 배제하여 궁정을 선량공과의 화해에 가깝게 만들었다.[9]

3. 2. 카보슈의 난 (1413년)

1413년, 파리에서 친부르고뉴파인 도축업자 시몽 카보슈(Simon Caboche, 시몽 르 쿠트리에)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아르마냐크파로 여겨지는 관료들을 학살하는 사건(카보슈의 난(Révolte des Cabochiens))이 발생했다. 격분한 샤를 6세와 루이 왕태자 등 궁정파는 아르마냐크파에 도움을 요청했다.[8]

이에 호응한 아르마냐크파는 8월에 폭도들을 진압했고, 무공(無怖公) 등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탈출했다.

3. 3. 아쟁쿠르 전투의 패배 (1415년)

1413년, 파리에서 친부르고뉴파인 도축업자 시몽 카보슈(Simon Caboche, 시몽 르 쿠트리에)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아르마냐크파로 여겨지는 관료들을 학살하는 사건(카보슈의 난(Révolte des Cabochiens))이 발생했다. 격분한 샤를 6세와 루이(루이 드 기옌)(Louis de Guyenne)왕태자 등 궁정파는 아르마냐크파에 도움을 요청했다.[8]

이에 호응한 아르마냐크파는 8월에 폭도들을 진압했고, 무공(無怖公) 등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탈출했다. 이렇게 궁정을 장악한 아르마냐크파였지만, 1415년 프랑스 원정을 시작한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격파하려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했다. 알랑송 공작은 전사했고, 오를레앙 공작과 부르봉 공작은 포로가 되었으며, 브르타뉴 공작의 동생 아르튀르 드 리슈몽도 붙잡히면서 잉글랜드에 저항할 수 없게 되었고, 아르마냐크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8]

3. 4. 부르고뉴파의 파리 장악과 아르마냐크 백작의 죽음 (1418년)

1413년, 파리에서 친부르고뉴파인 도축업자 시몽 카보슈(Simon Caboche, 시몽 르 쿠트리에)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아르마냐크파로 여겨지는 관료들을 학살하는 사건(카보슈의 난)이 발생했다. 격분한 샤를 6세와 왕태자(도팽) 루이 등 궁정파는 아르마냐크파에 도움을 요청했다.[8]

이에 호응한 아르마냐크파는 1413년 8월에 폭도들을 진압했고, 무공(無怖公) 장 1세 등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탈출했다. 이렇게 궁정을 장악한 아르마냐크파였지만, 1415년 프랑스 원정을 시작한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격파하려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했다. 알랑송 공작 장 1세는 전사했고, 샤를 도를레앙과 장 1세 드 부르봉은 포로가 되었으며,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의 동생 아르튀르 드 리슈몽도 붙잡히면서 잉글랜드에 저항할 수 없게 되었고, 아르마냐크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8]

1415년과 이듬해인 1416년에 왕태자와 베리 공작 장도 사망했고, 1417년부터 시작된 헨리 5세의 프랑스 정복에 아르마냐크파는 속수무책이었다. 1418년 부르고뉴파가 선동한 파리 시민들의 다시 한번의 폭동으로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가 살해되었고, 파리는 다시 부르고뉴파가 장악했다.[8]

3. 5. 용담공 장의 암살과 부르고뉴-잉글랜드 동맹 (1419년)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용담공 장의 명령으로 암살되었다.[1] 1419년 9월, 몽테로 다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도팽 샤를(1417년에 왕위 계승)의 추종자들이 용담공 장을 암살했다.[1] 이 사건으로 장의 아들인 좋은 필립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고, 헨리 5세가 파리로 진군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1]

아르마냐크파는 도팽 샤를과 함께 프랑스 중부와 남부에 별도의 관할권을 설립했고, 부르고뉴-잉글랜드 동맹은 파리를 포함한 북부를 장악했다.[1]

3. 6. 아르마냐크파의 저항과 잔 다르크의 등장

1411년 7월부터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간의 내전이 팽팽하게 이어졌지만, 양측 모두 잉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다. 부르고뉴파는 잉글랜드의 지원군 2000명을 얻어 파리를 점령했으나, 1412년 잉글랜드의 정책 변화로 아르마냐크파와 잉글랜드가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양측은 내전에 지쳐 화의를 맺었고, 잉글랜드는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당했다.[7]

1413년 파리에서 친부르고뉴파인 시몽 까보슈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아르마냐크파 관료들을 학살하는 사건(까보슈의 난)이 발생했다. 샤를 6세와 루이 왕태자는 아르마냐크파에 도움을 요청했고, 아르마냐크파는 폭도들을 진압했다. 그러나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에게 대패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1416년에 왕태자와 베리 공작이 사망하고, 1417년부터 헨리 5세의 프랑스 정복이 시작되면서 아르마냐크파는 속수무책이었다. 1418년 파리 시민들의 폭동으로 아르마냐크 백작이 살해되고, 파리는 다시 부르고뉴파가 장악했다.[8]

1419년, 잉글랜드의 세력 확장에 불안감을 느낀 부르고뉴 공작 장(무공)이 아르마냐크파와의 화의에 나섰지만, 샤를 왕태자(훗날 샤를 7세) 등 아르마냐크파는 장을 암살했다. 이에 장의 아들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고,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잉글랜드-프랑스 이중 왕국 수립이 약속되면서 왕태자는 계승권을 부정당했다.

아르마냐크파는 부르주를 중심으로 프랑스 남부에서 잉글랜드에 저항했지만,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죽은 후 잉글랜드군에 밀렸다. 욜랑드 다라고니가 부르고뉴파와의 화의에 착수하여 1424년 브르타뉴 공작도 함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1425년, 욜랑드는 잉글랜드로부터 해방된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프랑스 원수에 임명하고, 장(무공) 암살자 등 아르마냐크파 강경파를 배제하여 궁정을 부르고뉴파와의 화해에 가깝게 만들었다.[9]

4. 부르고뉴파와의 화해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대립은 해소되었다. 이 조약으로 선량공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고 프랑스와 협력하게 되었다. 조약 내용에는 샤를 7세가 선량공에게 무공후 암살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선량공의 프랑스에 대한 신하로서의 종속 의무를 면제하며, 프랑스 영토를 선량공에게 분할하는 등 샤를 7세에게 불리한 조항이 많았다. 그러나 이 조약을 통해 파벌 간의 갈등이 사라지고, 궁정은 리슈몽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리슈몽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1436년 파리를 되찾는 등 잉글랜드에 대한 반격을 이끌었다.[11]

4. 1. 리슈몽의 역할과 아라스 조약 (1435년)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리슈몽이 너무 직설적이었기에 왕세자에게서 멀어지고, 대신 조르주 드 라 트레무이유가 중용됨에 따라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에서 멀어지고, 부르고뉴파와의 협상도 중단되었으며, 리슈몽과 라 트레무이유 간의 사전(私戦)이 발생하여 아르마냐크파는 내란으로 분열되었다.[10]

1429년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승리하자, 리슈몽은 궁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잔 다르크를 지원하여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승리하였으나, 궁정의 반감이 강하여 다시 멀어졌고, 샤를 7세의 대관식에서 그의 정통성이 인정되었음에도 전선은 교착되었다.

그러나 1431년에 브르타뉴 공작이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측으로 돌아오고, 1432년에 리슈몽이 요랑드의 요청으로 궁정에 복귀하였으며, 이듬해 1433년에 라 트레무이유가 리슈몽 등의 쿠데타로 궁정에서 추방되자, 리슈몽을 중심으로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협상이 재개되어 진전되었다.[10]

1434년 12월부터 이듬해 1435년 2월까지 느베르에서 리슈몽은 선량공과의 협상을 조율하였고, 7월에는 잉글랜드도 포함된 화의 협상에 참가했다. 도중에 잉글랜드가 탈퇴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네베르 협정을 기반으로 화의 조건을 정하고, 9월 21일에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어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대립은 해소되었고, 선량공은 잉글랜드와 손을 끊고 프랑스와 손을 잡게 되었다.

조약은 샤를 7세가 선량공에게 무공후 암살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선량공의 프랑스에 대한 신종(臣従) 면제, 프랑스의 토지를 선량공에게 분할하는 등 샤를 7세가 대가를 치르는 조항이 많았지만, 이로써 파벌 항쟁은 없어지고, 궁정은 리슈몽 아래에서 통합되었다. 이후, 리슈몽은 프랑스군을 동원하여 1436년 파리 탈환을 시작으로 잉글랜드의 반격을 진행해 나갔다.[11]

참조

[1] 서적 The Hundred Years War : a people's history https://www.worldcat[...] 2014
[2] 서적 佐藤 2003
[3] 서적 佐藤 2003
[4] 서적 佐藤 2003
[5] 서적 佐藤 2003
[6] 서적 堀越、エチュヴェリー、清水、城戸
[7] 서적 堀越、エチュヴェリー、清水、城戸
[8] 서적 堀越、エチュヴェリー、清水、城戸
[9] 서적 堀越、エチュヴェリー、清水、城戸
[10] 서적 堀越、エチュヴェリー、清水、城戸
[11] 서적 エチュヴェリー、清水、城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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