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Gnaeus Pompeius Magnus)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기원전 106년 9월 29일에 태어나 기원전 48년 9월 29일에 사망했다. 그는 지방 귀족 출신으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동맹시 전쟁, 술라의 내전, 해적 소탕, 미트라다테스 전쟁, 세르토리우스 전쟁 등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얻었다. 폼페이우스는 세 차례의 개선식을 거행했고, 마그누스(Magnus, 위대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로마 정치를 좌우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와의 권력 다툼 끝에 내전이 발발했고,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집트로 도망쳤으나 살해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106년 출생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에 태어난 로마의 정치가이자 웅변가, 문인으로, 로마 공화정 시대에 활동하며 뛰어난 웅변술과 저술 활동으로 라틴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폼페이우스 씨족 - 폼페이아 플로티나
    폼페이아 플로티나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아내이자 하드리아누스 즉위에 영향을 미쳤으며, 에피쿠로스 학파를 후원하고 황제 숭배 대상이 된 로마 황후이다.
  • 폼페이우스 씨족 -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폼페이우스 대왕의 아들로, 로마 공화정 말기에 활동하며 카이사르 암살 이후 시칠리아에서 세력을 키웠으나 옥타비아누스와의 갈등 끝에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 기원전 48년 사망 -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적이었으며, 집정관 시절 카이사르와 갈등을 겪고 시리아 총독을 지낸 후 카이사르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함대를 지휘하다 병사했다.
  • 기원전 48년 사망 - 정길
    정길은 전한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서역 경영에 공헌하여 초대 서역도호를 지냈으며, 차사국 복속과 흉노 일축왕 귀순에 기여하여 안원후에 봉해졌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기본 정보
흰색 흉상
기원전 70-60년 원본의 복제품인 폼페이우스 흉상, 베네치아 국립 고고학 박물관
로마자 표기Gnaeus Pompeius Magnus
출생일기원전 106년 9월 29일
출생지피케눔, 이탈리아
사망일기원전 48년 9월 28일 (57세)
사망지펠루시움, 이집트
사망 원인암살
안장된 곳알바노 라치알레, 이탈리아
아버지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배우자안티스티아 (기원전 86–82년, 이혼)
아이밀리아 (기원전 82년, 사망)
무키아 테르티아 (기원전 79–61년, 이혼)
율리아 (기원전 59–54년, 사망)
코르넬리아 메텔라 (기원전 52–48년, 사망)
자녀그나이우스
폼페이아
섹스투스
가문폼페이우스 씨족
직업군사령관 및 정치가
정치 경력
관직집정관 (기원전 70, 55, 52년)
아우구르기원전 61년 ~ 48년
토지 분배 20인 위원기원전 59년
곡물 조달 콘술 임페리움기원전 57년 - 52년
프로콘술 (히스파니아)기원전 54년 - 49년
프로콘술 (대 카이사르)기원전 49년
군사 경력
주요 전투사회 전쟁
술라의 내전
세르토리우스 전쟁
제3차 노예 전쟁
킬리키아 해적 소탕 작전
하스모니아 내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수상 경력3회 개선식
기타 정보
별칭마그누스
관련 인물
주요 인물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브루투스
카이사르
카시우스
카토
키케로
클레오파트라
클로디우스 풀케르
크라수스
레피두스
섹스투스
마르쿠스 아그리파
주요 사건
주요 사건제1차 삼두 정치
카이사르의 내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제2차 삼두 정치
필리피 전투
시칠리아 전쟁
악티움 해전
주요 장소
주요 장소카이사레움
코미티움
쿠리아 율리아
쿠리아 호스틸리아
로스트라
폼페이우스 극장

2. 생애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106년 9월 29일 피케눔에서 태어나, 아버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휘하에서 동맹 전쟁 (기원전 91-87년)을 통해 군 경력을 시작했다.[50] 스트라보가 횡령 혐의로 기소되자, 폼페이우스는 판사의 딸과 결혼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다.[51]

기원전 83년 술라가 이탈리아로 귀환하자, 폼페이우스는 3개 군단을 이끌고 합류하여 내전에 참전했다.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신임을 얻어 그의 계딸과 결혼했다. 이후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에서 마리우스파 잔당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젊은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지만,[52]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마그누스''(대왕)라는 칭호를 얻었다.[53]

기원전 78년 술라 사후, 폼페이우스는 레피두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기원전 77년에는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발렌시아 외곽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부하들을 패퇴시켰고,[3] 수크로 전투에서 세르토리우스와 싸웠다.[3] 세르토리우스는 사군툼에서 폼페이우스에게 타격을 입혔지만,[3] 결국 내분으로 인해 암살당했다.

기원전 71년, 폼페이우스는 제3차 노예 전쟁을 진압하고 있던 크라수스와 공동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67년, 가비니우스 법에 따라 해적 소탕 임무를 맡아 3개월 만에 지중해 해적을 소탕했다. 기원전 66년부터는 미트라다테스 6세를 상대로 동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기원전 61년 로마로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기원전 54년 율리아 사망, 기원전 53년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삼두정치가 붕괴되자,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결탁하여 카이사르와 대립했다.

기원전 49년 내전 발발 후, 폼페이우스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집트로 도피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65]

2. 1. 어린 시절과 가문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106년 9월 29일 피케눔에서 지방 귀족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50] 폼페이우스 가문은 피케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지만, 스트라보는 그의 가계에서 처음으로 로마에서 상원의원 지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쿠르수스 호노룸''을 완료하여 기원전 89년 집정관이 되었고, 탐욕, 정치적 기만, 그리고 군사적 무자비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폼페이우스는 아버지 휘하에서 동맹 전쟁 (기원전 91-87년)에 참전하며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50]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군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아버지를 배신할 것이라면 차라리 나를 밟고 가라"고 호소하여 반란을 막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폼페이우스는 뛰어난 지도력을 보였다.

스트라보는 벨룸 옥타비아눔la으로 알려진 짧은 기간의 내전 중 기원전 87년에 사망했다. 그가 병으로 사망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들이 다르다. 사망하기 전에 스트라보는 횡령 혐의를 받았고, 그의 법적 상속인인 폼페이우스는 이 혐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판사의 딸인 안티스티아와 결혼하기로 합의한 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51]

기원전 86년, 아버지가 아스클룸 전투의 전리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했지만,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기원전 91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파필리우스 카르보 (기원전 85년 집정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가 변호하여 무죄가 되었고, 재판을 주재한 안티스티우스의 딸과 결혼했다.[51] 킨나는 술라에 대항하기 위해 동지를 필요로 했고, 폼페이우스가 가지고 있던 피케눔 인맥을 얻기 위해 변호를 시켰다는 설도 있다.

2. 2. 군사적 성공

기원전 83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이탈리아로 귀환하자 폼페이우스는 3개 군단을 이끌고 술라에게 합류하여 마리우스파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술라는 폼페이우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51] 폼페이우스는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에서 마리우스파 잔당을 소탕하며 "십대 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잔혹함을 보였으나,[52] 뛰어난 군사 작전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술라는 그의 공적을 기려 "마그누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53]

기원전 77년, 폼페이우스는 전직 집정관 레피두스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서 히스파니아로 도망친 마리우스파의 잔당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진압을 자청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을 해체하지 않겠다고 원로원을 압박하여 '집정관 대리'라는 임시 직함과 군사 지휘권을 부여받아 히스파니아로 파견되었다.

당시 히스파니아에는 이미 메텔루스 피우스가 파견되어 세르토리우스와 싸우고 있었으나 별다른 전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가세하여 로마 정규군은 공세를 더욱 강화했으나 세르토리우스 전쟁은 기원전 72년 세르토리우스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살해당함으로써 끝났다.

기원전 71년, 이탈리아로 귀환한 폼페이우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며 크라수스와 함께 공동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2. 3. 동방 원정과 삼두정치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는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주도로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막대한 권한을 가진 해적 토벌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폼페이우스는 3년 동안 전권을 가지고 해적 소탕에 나서, 뛰어난 전술과 군사 운용으로 불과 3개월여 만에 지중해의 거의 모든 해적을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66년부터 동방의 지휘권을 행사한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 6세를 상대로 두 번 승리하고 파르티아와 협정을 맺은 뒤,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를 압박하여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미트라다테스 6세는 결국 자결했고, 폼페이우스는 소아시아에서 팔레스타인, 이집트에 이르는 동방을 완전히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는 남하하여 시리아로 진군,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13세를 퇴위시키고 시리아를 로마 속주(시리아 속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년에는 페니키아와 시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고 유대로 진군했다. 하스몬 왕조의 내분을 틈타 예루살렘을 포위, 점령하고 (예루살렘 포위전)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같은 해, 예리코에 주둔하던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 6세의 자살 소식을 듣고, 그의 아들 파르나케스 2세를 폰투스 왕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61년 로마로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9월 29일 그의 생일에 동방에서의 빛나는 승리를 기념하여 세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동방 정책을 인준하지 않고 퇴역병을 위한 토지 분배를 거부하며 폼페이우스를 견제했다.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비공식적으로 협력하기로 결정하고,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를 집정관으로 선출되도록 돕고, 자신의 병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이를 제1차 삼두정치라고 한다.)

기원전 59년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여 동맹을 강화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어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시리아와 유대 등 동방 속주 재편 계획을 승인했다.

기원전 56년 카이사르는 루카에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차례로 불러 회담을 가졌고( 룩카 회담), 삼두정치 전략을 재수정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의 집정관직 선출을 약속받고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 속주의 속주 지휘권을 갖기로 하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지휘권을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다음은 폼페이우스의 주요 연혁을 정리한 표이다.

연도사건
기원전 67년해적 토벌전 (3개월 만에 완료)
기원전 66년소아시아·흑해 원정. 미트라다테스 6세 격파(~기원전 63년)
기원전 64년시리아, 유대, 페니키아 등을 로마의 세력권에 편입
기원전 61년세 번째 개선식
기원전 59년제1차 삼두정치 (크라수스 및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
기원전 58년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취임(~기원전 55년), 이 기간 동안 폼페이우스 극장 완공
기원전 56년룩카 회담
기원전 55년집정관 취임 (동료는 크라수스)


2. 4. 내전과 죽음

기원전 54년, 율리아가 사망하고 기원전 53년 카르라에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붕괴되었다.[65]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와 결탁하여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대조카였던 오크타비아(후에 카이사르의 계승자가 되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와의 혼담 제안을 거절하고, 기원전 52년 원로원파 거물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의 딸이자 카르라에 전투에서 전사한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코르넬리아와 결혼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격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65]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포기하고 브룬디시를 거쳐 그리스로 후퇴하여 군대를 재조직하려 했다. 듀라키움 전투에서 카이사르 군에 승리했지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파르살루스 이후 폼페이우스의 도주'', 장 푸케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대패하고 이집트로 도피했다.[65] 미틸레네 섬을 거쳐 키프로스로 간 후, 시리아에서 재기를 꾀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집트로 향했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죽음; 18세기 판화


이집트 펠루시움 항구에 도착한 폼페이우스는 오랜 벗이었던 아킬라스와 루키우스 세프티미우스에게 영접받았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와 함께 작은 배에 올랐지만, 그 직전에 아내와 자녀들에게 소포클레스의 다음 시를 읊었다고 한다.

"폭군의 문을 한 번이라도 열었다면, 한때 자유로웠다 하더라도,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살해했다.[65] 폼페이우스는 58세 생일에 자신의 오랜 벗이었던 자에게 배신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65][66] 갤리선에 타고 있던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코르넬리아는 이집트를 떠났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에 격노하며 그의 목을 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코르넬리아는 카이사르로부터 폼페이우스의 유골과 반지를 받아 이탈리아에 매장하고 여생을 보냈다.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미노르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티투스 라비에누스와 메텔루스 스키피오 등 살아남은 원로원파와 합류하여 카이사르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게 된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폼페이우스 극장"에 설치된 폼페이우스 동상 아래에서 카이사르는 공화파에게 암살당했다.[67]

3. 폼페이우스의 유산과 영향

폼페이우스는 뛰어난 군사적 업적과 정치적 영향력으로 로마 공화정 말기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해적 소탕과 동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고 속주를 재편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로마 정계를 주도하기도 했다.

기원전 67년 가비니우스의 주도로 해적 토벌대 사령관에 임명된 폼페이우스는 3년 만에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했다. 기원전 66년부터 동방 지휘권을 행사하며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를 격파하고, 아르메니아 왕국을 로마 속국으로 만들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을 멸망시키고 시리아를 병합했으며, 유대를 정복하여 로마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23] 이러한 군사적 업적은 폼페이우스에게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전통적이고 혁신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다.[31]

정치적으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귀환 후 원로원과 협력하여 퇴역병에게 토지를 분할하고 동방 정책 인준을 받으려 했으나, 보수파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기원전 60년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제1차 삼두정치 협약을 맺고 협력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했고,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갈리아에서 5년 임기의 지휘권을 확보했다.[9] 기원전 56년 루카 회담을 통해 삼두정치는 재정비되었고,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55년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율리아의 죽음과 크라수스의 전사로 삼두정치가 붕괴되면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대립하게 되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자,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포기하고 동방에서 군대를 재조직하려 했으나,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대패하고 이집트로 도망쳤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배신당해 기원전 48년 9월 29일 58세 생일에 살해당했다.[65][66]

폼페이우스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 몰락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로마는 카이사르의 독재와 암살, 뒤이은 내전을 거쳐 옥타비아누스의 제정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3. 1. 군사적 업적과 평가

폼페이우스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로마의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해적 소탕과 동방 원정에서의 성공은 그의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32]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는 가비니우스의 주도로 해적 토벌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지중해의 해적을 거의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맡아 그의 절대 사령관직을 연장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14]

기원전 66년부터 동방의 지휘권을 행사한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 6세를 상대로 두 차례 승리했다.[16][17] 파르티아와 협정을 맺은 후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를 압박하여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미트라다테스 6세는 결국 자결했고, 폼페이우스는 소아시아에서 팔레스타인, 이집트에 이르는 동방을 완전히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23]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전술은 때때로 전통적이고 혁신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1] 파르살루스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조직가로서, 대규모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장기적인 전략을 구상하는 능력이 뛰어났다.[32] 그는 적의 상황에 맞게 전략을 수정하고 결단력 있게 행동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폼페이우스는 초반에 여러 차례 패배했지만, 소모전 전략을 통해 점차 우위를 확보하고 결국 승리했다.[6]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다른 장군들의 승리를 가로채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15]

3. 2. 정치적 유산과 삼두정치

5년간 로마를 떠나 귀환한 폼페이우스로마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보수파 귀족들은 그를 의심했고, 원로원 귀족파와의 혼인 동맹 시도도 거부당했다. 원로원과 협력하여 퇴역병에게 토지를 분할하고 동방 정책 인준을 받으려던 폼페이우스는 난관에 부딪혔다.

이때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와 기원전 59년의 집정관직을 노리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비밀리에 제1차 삼두정치 협약을 맺고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했고,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즉각 토지법안을 관철시켜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갈리아에서 5년 임기의 지휘권을 확보했다.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자리를 받았지만, 로마의 곡물 문제 해결을 위해 로마에 머물렀다.

귀족파들은 키케로 추방에 대한 앙심으로 여전히 카이사르와 결탁한 폼페이우스를 반대했다. 키케로가 망명에서 돌아와 폼페이우스를 옹호했으나, 원로원의 의심은 여전했다. 기원전 56년 카이사르는 루카에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불러 회담을 가졌고, 삼두정치 전략을 재수정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의 집정관직을 약속받고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 속주 지휘권을 갖기로 했으며,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휘권을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입후보로 선거는 뇌물과 부패로 얼룩졌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직을 얻었으나 폭력과 혼란이 로마 사회를 어지럽혔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상설 대극장을 지어 기증했다.

폼페이우스의 부재 중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제3차 노예 전쟁을 진압했다. 기원전 71년 크라수스가 주요 반군을 패퇴시키기 직전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도망친 6,000명의 탈주자들을 학살했다. 전쟁을 종식시켰다는 그의 주장은 오랫동안 크라수스의 분노의 원천이 되었다.[7][8]

기원전 71년 폼페이우스가 두 번째 승전을 기념하여 주조한 오우레우스. 앞면에는 아프리카 여신, 뒷면에는 폼페이우스가 승리 전차에 앉아 있고, 아들 그나이우스가 앞에, 비크토리아가 위에서 날고 있다.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의 승리로 두 번째 승전을 거두고 집정관직에 임명되었다. 너무 어리고 자격이 없었기에 상원의 특별 결의가 필요했다.[9] 플루타르코스는 폼페이우스가 크라수스를 공동 집정관으로 지지하여 그에게 의무를 지게 만들었다고 제안한다.[10] 두 사람은 기원전 70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지만,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으며, 그들의 임기는 "정치적으로 불모지였고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11]

그러나 그들의 집정관 시대에는 호민관이 술라에 의해 박탈당했던 권한을 회복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상원 의안에 대한 거부권으로, 후기 공화정 정치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인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옵티마테스에 의해 반대되었을 것이며, 통과하려면 두 집정관의 지지가 필요했지만, 대부분의 기존 자료는 크라수스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9]

셀레우코스 제국의 최종 붕괴로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4년 시리아를 병합할 수 있었지만, 제국의 해체는 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많은 도시들이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기원전 63년 초, 폼페이우스는 안티오크를 떠나 남쪽으로 진군하여 아파메아와 같은 해안 도시들을 점령한 후 안티 레바논 산맥을 넘어 펠라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기원전 63년, 북쪽의 데카폴리스(빨강)를 잃은 후의 유대(파랑)


폼페이우스의 남쪽, 유대로의 침입은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지휘 아래 유대 주민들이 페니키아를 황폐화시켰고, 폼페이우스가 이를 막고자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24] 초기 공격은 하스몬 왕조 내전으로 인해 중단되었는데, 이 전쟁에서 폼페이우스는 그의 형제 아리스토불루스 2세보다 히르카누스 2세를 지지했다. 그가 후자에게 예루살렘 항복을 강요했을 때, 수비병들은 성전으로 피신했고, 로마군은 먼저 성전을 공격한 후 약탈했다. 유대는 히르카누스가 다스리는 속국이 되었고, 북쪽 지역은 반자치 도시들의 연맹인 데카폴리스에 편입되었다(지도 참조). 유대와 연맹 모두 새로운 시리아 속주에 종속되었다.[25]

다른 조직 개편에는 비티니아와 폰투스 속주 창설이 포함되었는데, 미트리다테스의 영토의 나머지는 로마의 동맹국들에 분배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카파도키아의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왕위에 복위되었고, 소아르메니아는 티그라네스로부터 빼앗겨 갈라티아에 편입되었으며, 폼페이우스가 옹립한 데이오타루스가 새로운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길리키아는 이전에 해적의 중심지였던 해안 지역인 팜필리아와 다른 내륙 지역을 받아들여 여섯 부분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로마 국가의 수입을 크게 증가시켰고, 폼페이우스에게 그의 개인적인 부와 후원 기반을 확대할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제공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는 남하하여 시리아로 진군하여, 영토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13세를 퇴위시키고, 시리아를 로마 속주(시리아 속주)로 만들었다 (안티오쿠스 13세의 후계자로 필리포스 2세가 등장했지만, 기원전 63년에 패망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더 남하하여 페니키아 및 시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한 후, 유대로 진군했다. 당시 유대는 하스몬 왕조의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형제가 왕위와 대제사장직을 놓고 다투고 있었고, 양측은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이려고 경쟁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폼페이우스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폼페이우스와 히르카누스 2세의 연합군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지키는 예루살렘을 포위했다(예루살렘 포위전). 아리스토불루스 2세 측의 강력한 저항과 예루살렘의 견고한 방어 앞에 로마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3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함락시키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포로로 잡았다.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로마로 압송했지만,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나중에 탈출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을 여러 차례 주도하게 된다.

예루살렘 함락 당시 폼페이우스는 로마인과 달리 물리적인 형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유대교 성전 내부의 지성소에 들어갔지만, 순금으로 된 촛대와 램프 등 성전 내부의 보물에는 손대지 않았고, 점령 다음 날부터 유대교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고, 인근의 사마리아가자 등을 점령했다.

기원전 63년, 예리코에 주둔하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아들 파르나케스 2세를 폰투스 왕으로 임명하고, 오랫동안 로마의 적인 미트리다테스 6세의 시신을 고국인 폰투스 왕국의 수도 시노페(현: 시노프)에 매장하게 했다. 이러한 조치를 마친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부하 장군인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 통치를 맡기고 로마로 귀환했다.[60]

폼페이우스는 아시아 전역에서 복무한 병사들에게 토지(경작지)를 제공하는 등을 약속하고 이를 위해 노력했지만,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소 카토)와 루쿨루스 등 원로원파(옵티마테스)는 폼페이우스의 인기에 여전히 경계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토의 여동생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했지만 거절당했다[62]는 점도 있어 로마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도 하락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는 오랜 숙적 크라수스와 프로프라에토르(전 법무관)로서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와 비공식적으로 손을 잡기로 결정하고, 기원전 59년에 카이사르를 집정관으로 만들고 폼페이우스가 이끌던 병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등을 내약했다(일반적으로 「삼두정치」라고 불린다).

기원전 59년,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를 새로운 아내로 맞이했다(전처 무키아는 카이사르와의 불륜 관계가 드러났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이혼했다). 20세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폼페이우스와 율리아의 부부 관계는 매우 좋았다. 이 해에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취임하고, 폼페이우스가 요구했던 폼페이우스의 전 병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것과 자신이 정복한 시리아와 유대 등 동방 속주에 대한 재편 계획 등이 가결되었고, 토지법 개정에서도 폼페이우스는 중요한 자리를 얻어 크게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58년부터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 총독에 취임하기로 결정했지만,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로마에 체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부터 갈리아 키살피나일리리쿰 등의 속주 총독이 되는 것도 결정되었다.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 로마를 떠난 후, 로마 정계는 삼두정치 측의 호민관이었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클로디우스는 키케로에게 격렬한 적의를 품고 있었고, 클로디우스가 키케로를 로마에서 추방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을 때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무시했기 때문에 키케로는 로마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57년, 클로디우스에 대한 지지가 급락하고 전년까지 소아시아에 부임했던 카토가 귀환했으며, 키케로의 추방이 해제된 것(폼페이우스 자신도 키케로의 로마 귀환에 협력했지만) 때문에 삼두정치 측은 원로원파로부터 반격을 받았다. 폼페이우스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고, 자신이 참여했던 로마 최초의 상설 극장인 「폼페이우스 극장」의 공사 진척 등 문화 활동에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율리아와의 신혼 생활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63]

아래는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활동과 관련된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표이다.

연도사건
기원전 71년두 번째 개선식, 크라수스와 공동 집정관
기원전 70년호민관 권한 회복
기원전 64년시리아 병합
기원전 63년예루살렘 점령, 유대 속국화, 데카폴리스 형성
기원전 60년카이사르, 크라수스와 제1차 삼두정치 결성
기원전 59년카이사르 집정관 선출 지원, 율리아와 결혼
기원전 58년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 총독 취임(로마 체류)
기원전 56년루카 회담, 삼두정치 재정비
기원전 55년크라수스와 공동 집정관


3. 3.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로마 공화정의 몰락

기원전 54년, 폼페이우스의 아내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면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이어주던 연결고리가 사라졌고, 크라수스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로마 민중들 사이에서는 카이사르가 더 유능한 장군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혼인 동맹 제안을 거절하고, 기원전 52년 카이사르의 정적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과 결합하여 원로원파로 전향했다.

같은 해 클로디우스의 암살과 원로원 건물 파괴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질서 회복을 요청받았다. 폼페이우스는 군사 행동으로 질서를 회복했지만, 원로원은 그를 의심하여 독재관 대신 단독 집정관직을 부여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와 싸우는 동안, 카이사르를 기소하기 위한 법률을 만드는 등 그를 압박했다. 기원전 51년에는 카이사르가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집정관직을 수행할 수 없도록 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두려워하며 원로원파의 정쟁 도구로 파국을 향해 달려갔고, 내전은 불가피해 보였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자,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 동방에서 군대를 재조직하려 했다. 내전은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그리스에서 벌어졌다. 폼페이우스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대패하여 이집트로 도망쳤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배신당해 기원전 48년 9월 29일 58세 생일에 살해당했다.[65][66]

폼페이우스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였다. 그의 죽음 이후, 로마는 카이사르의 독재와 암살, 그리고 뒤이은 내전을 거쳐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제정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4. 연표

기원전사건
106년 9월 29일피케눔(Picenum)에서 출생
89년동맹 전쟁 기간, 아스쿨룸(Asculum)에서 아버지 휘하에서 복무
86년안티스티아(Antistia)와 결혼
83년폰투스(Pontus)의 미트라다테스 6세 왕에 대항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귀환한 뒤 술라와 연합, 군단과 기병을 모아 합류[27]
83년 ~ 82년이탈리아 전쟁에서 술라를 위해 싸움. 처음에는 기병대 지휘관, 그 후 공동 지휘관, 마지막에는 독립군 지휘
82년안티스티아와 이혼하고 술라의 명으로 아에밀리아(Aemilia)와 결혼. 아에밀리아는 임신 중이었고 출산 중 사망[28]
82년 ~ 81년시칠리아아프리카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동맹군을 패배시킴
81년로마로 귀환하여 첫 번째 개선식을 거행
79년무키아 테르티아(Mucia Tertia)와 결혼[29]
79년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선거를 지지. 폼페이우스는 피케눔에서 모은 군대로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군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처형. 그는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하게 될 브루투스의 아버지임[30]
76년 ~ 71년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에 대항하는 원정
71년이탈리아로 귀환하여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 반란 진압에 참여하고 두 번째 개선식을 거행
70년첫 번째 집정관직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67년해적을 패배시키고 아시아 속주로 진출
66년 ~ 61년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 왕을 패배시켜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종식
64년 ~ 63년시리아, 레반트유대를 통과하여 행군
61년무키아 테르티아(Mucia Tertia)와 이혼
61년 9월 29일세 번째 개선식
59년 4월제1차 삼두정치 성립. 폼페이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크라수스와 동맹을 맺고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
58년 ~ 55년폼페이우스 극장이 건설되는 동안 대리로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Hispania Ulterior)를 통치
55년두 번째 집정관직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폼페이우스 극장 개관
54년율리아가 출산 중 사망, 제1차 삼두정치 종식
52년윤달 동안 단독 집정관으로 재임[31], 나머지 기간 동안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세 번째 정식 집정관직을 수행하고 그의 딸 코르넬리아 메텔라와 결혼
51년갈리아에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결석 상태에서 집정관에 입후보하는 것을 금지
50년캄파니아에서 고열로 위독하게 아팠지만 "대중의 기도"로 회복[48]
49년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를 침략, 폼페이우스는 보수파와 함께 그리스로 후퇴
48년율리우스 카이사르그리스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패배시킴.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후퇴하여 펠루시움(Pelusium)에서 살해됨


참조

[1] 서적 Bellum Civile
[2] 서적 Life of Sertorius
[3] 서적 Bellum Civile
[4]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Pompey
[5] 서적 Life of Sertorius
[6] 서적 Histories
[7] 서적 Life of Crassus
[8]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Pompey
[9] 서적 Periochae
[10] 서적 Life of Crassus
[11] 서적 Life of Crassus
[12]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Lucullus
[13] 서적 Roman History
[14]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Pompey
[15] 서적 Roman History
[16] 서적 Roman History
[17]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Pompey
[18] 서적 Roman History
[19]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Pompey
[20] 서적 The Mithridatic Wars
[21] 서적 Roman History
[22] 서적 Roman History
[23] 서적 Roman History
[24] 서적 Dio's Roman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1969-01-01
[25] 서적 Jewish Antiquities
[26] 서적 1974-01-01
[27]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aesar
[28]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Pompey
[29] 서적 Epitome of Roman History
[30]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Pompey
[31] 서적 Life of Sertorius and Life of Lucullus
[32] 서적 Pharsalus
[33] 서적 History of the Ancient & Medieval World Vol. 6 Marshall Cavendish Corporation 1996-01-01
[34] 서적 Who's Who in the Roman World Routledge Taylor & Francis Group 2001-01-01
[35] 논문 Why Pompey Is better off dead https://www.academia[...] 2011-01-01
[36] 서적 A Manual of Old English Plays https://books.google[...] 1892
[37] 서적 Stoicism, Politics and Literature in the Age of Milt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1998
[38] 서적 An Essay on the Genius and Writings of Pope https://books.google[...] 1756
[39] 서적 A Collection of Poems by Several Hands https://books.google[...] 1755
[40] 서적 The Broken Heart, with other poems https://books.google[...] 1825
[41] 서적 Lyrics of the Heart https://books.google[...] 1851
[42] 서적 Pompey’s Pillar https://books.google[...] 1849
[43] 서적 The Tragedy of Pompey the Great https://ia800208.us.[...] 1910
[44] 웹사이트 The Tragedy of Pompey the Great http://explore.bfi.o[...] British Film Institute 2012-07-20
[45] 논문 Historical Fiction and Ancient Rome: Colleen McCullough's ''Masters Of Rome'' Series https://www.persee.f[...] 2024-02-09
[46] 웹사이트 Interview: Steven Saylor https://crimefiction[...] 2014-10-19
[47] 웹사이트 Robert Harris {{!}} 'Cicero had very good relations with Caesar but he was absolutely delighted to see him murdered before his own eyes' https://www.thebooks[...] 2015-09-11
[48] 서적 Satire X
[49] 웹사이트 Pompey the Great Roman statesman https://www.britanni[...]
[50] 문서 年代記 13.6
[51]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9
[52]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12
[53]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14
[54] 문서 対比列伝 ポンペイウス.20.1
[55] 문서 対比列伝 ルクッルス.5.2
[56]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21
[57]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28、ほか
[58] 문서 pro Lege Manilia, 12 or De Imperio Cn. Pompei -0066
[59]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33
[60] 문서 ユダヤ戦記 第1巻 6,7
[61]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45
[62]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44
[63]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48
[64] 문서 皇帝伝 カエサル 24 wikisource:The Lives[...]
[65] 문서 内乱記 3.104
[66]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殺害後、レントゥルスは別の舟でエジプトへ上陸し殺害された
[67] 문서 英雄伝 カエサル66
[68]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36
[69]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4
[70] 문서 英雄伝 ポンペイウス9、英雄伝 スッラ33
[71] 서적 皇帝伝 wikisource:The Lives[...] wikisource
[72] 서적 英雄伝
[73] 서적 英雄伝
[74] 서적 アッティクス宛書簡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