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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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블로스는 콘스탄티노스 1세의 아들이자 그리스의 국왕으로, 해군 장교로 교육받았다. 1917년부터 1935년까지 망명 생활을 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망명 정부를 통해 국민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1947년 형 요르요스 2세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그리스 내전을 수습하고 경제 회복을 이끌었으며, 터키를 방문한 최초의 그리스 국가 원수가 되었다. 키프로스 문제에 관여하고 총리를 해임하는 등 정치적 개입으로 논란이 있었으며, 1964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슬하에 소피아, 콘스탄티노스 2세, 이레네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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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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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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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 | Παύλος (Pav́los) |
한국어 이름 | 파울로스 |
칭호 | 그리스인의 왕 |
통치 기간 | 1947년 4월 1일 – 1964년 3월 6일 |
즉위일 | 1947년 4월 2일 |
대리 통치 | 디미트리오스 막시모스 콘스탄티노스 차다리스 테미스토클리스 소풀리스 알렉산드로스 디오미디스 요안니스 테오토키스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디미트리오스 키우소풀로스 알렉산더 파파고스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콘스탄티노스 게오르가코풀로스 콘스탄티노스 도바스 파나기오티스 피피넬리스 스틸리아노스 마브로미할리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요안니스 파라스케보풀로스 |
배우자 | 프리데리키 폰 하노버 (1938년 1월 9일 결혼) |
자녀 | 소피아, 스페인 왕비 콘스탄티노스 2세 이리니 공주 |
왕가 | 글뤽스부르크가 |
아버지 | 콘스탄티노스 1세 |
어머니 | 소피아 티스 프로시아스 |
출생일 | 1901년 12월 14일 |
출생지 | 타토이 궁전, 아테네, 그리스 왕국 |
사망일 | 1964년 3월 6일 |
사망지 | 아테네, 그리스 |
매장일 | 1964년 3월 12일 |
매장지 | 왕실 묘지, 타토이 궁전, 그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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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 그리스 왕국 |
군 종류 | 그리스 해군 그리스 육군 그리스 공군 |
복무 기간 | 1912년–1941년 |
계급 | 중위 |
정치 | |
후임 | 콘스탄티노스 2세 |
종교 | |
종교 | 그리스 정교회 |
2. 생애
콘스탄티노스 1세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딸 소피아의 셋째 아들로 아테네에서 태어나 해군 장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생애 동안 여러 차례 망명 생활을 경험했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는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과 함께, 1923년부터 1935년까지는 형 요르요스 2세와 함께 망명 생활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1년 4월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공하자[33], 형 요르요스 2세와 함께 크레타섬을 거쳐 이집트와 영국으로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파블로스를 '황저'(皇儲, 왕위 계승자)[34]로 칭하기도 했다. 망명 기간 동안 그는 런던과 카이로의 망명 정부에 합류하여 활동했으며, 카이로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리스 국민들에게 저항의 메시지를 보냈다.
1946년 그리스로 귀국했으며, 그리스 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4월 1일, 자녀가 없던 형 요르요스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왕당파뿐만 아니라 공화주의자의 지지까지 얻으며 내전 종식에 힘썼고, 1949년까지 공산주의 반군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북부 지역 재건을 시작했다.
1950년대 들어 그리스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자, 파블로스는 해외 순방 등을 통해 외교 및 무역 관계 증진을 지원했다. 특히 그리스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오랜 적대국이었던 터키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정에서는 어려움이 따랐다. 1955년 자신이 직접 임명했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총리를 1963년 왕비와의 갈등 등을 이유로 갑자기 해임하면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고, 이는 그리스 정국의 혼란과 사회 불안을 증대시켜 훗날 왕정 폐지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4년 3월 6일 위암으로 62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2. 1. 젊은 시절



파블로스는 1901년 12월 14일(구력 12월 1일) 아테네 북쪽 아티카의 타토이 궁전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콘스탄티노스와 그의 아내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족들은 그를 '팔로'(Palo)라고 불렀다.[1] 그는 부모가 거주하던 아테네 대통령궁과 그리스 군주의 공식 거처인 타토이 궁전에서 다섯 명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랐다. 세 살 때, 형인 알렉산드로스가 빠른 속도로 왕실 정원으로 들어가는 마차에서 그를 실수로 떨어뜨려 거의 죽을 뻔했다. 그는 부모님과 주로 영어로 대화하며 자랐고, 그리스어는 두 번째 언어로 배웠다.
아버지와 두 형에 이어 그리스 왕위 계승 서열 4위였기 때문에, 파블로스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가 선택한 외국인 교사, 그리스 대학교수, 그리고 어머니의 포메라니안 채플린인 호니그 박사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았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는 영국 이스트본의 세인트 피터스 예비 학교에서 여름 과정을 수강했으며, 목공과 같은 신체 활동 과목과 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전해진다.
1909년, 파블로스가 일곱 살 때 그리스 장교들이 그의 할아버지인 게오르기오스 1세를 상대로 구디 쿠데타를 일으켰다. 니콜라오스 조르바스가 이끄는 장교들은 군주제를 지지했지만, 게오르기오스 1세에게 아들들을 군대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했고, 왕자들은 결국 군대에서 사임했다. 비판을 받은 콘스탄티노스는 아내와 파블로스를 포함한 아들들과 함께 몇 달 동안 독일로 이주하여 파블로스의 이모인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와 함께 크론베르크에 머물렀다. 가족은 1911년 초 그리스로 돌아왔고, 새로운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왕자들의 군 복귀를 허용했다. 이듬해인 1912년부터 1913년까지 그리스는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파블로스는 11세의 나이로 그리스 해군의 최연소 생도로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연합국의 압력으로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가 1917년 퇴위하자, 파블로스도 아버지를 따라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스위스에서 첫 망명 생활을 했다. 망명 중 가족은 장크트모리츠와 취리히 등지에 머물렀으며, 1918년에는 아버지 콘스탄티노스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심하게 앓기도 했다. 콘스탄티노스는 파블로스의 교육 부족을 계속 걱정했고, 영국 해군 입대가 거부되자 빌헬름 2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파블로스를 독일 제국 해군 사관학교에 보냈다. 파블로스는 외삼촌인 하인리히 공자의 감독 아래 훈련을 받았으나, 독일 11월 혁명과 킬 군항의 반란 등으로 독일 제정이 붕괴되자 훈련을 중단하고 스위스로 돌아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파블로스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려 가족과의 재회가 늦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그리스는 세브르 조약에 따라 영토를 확장했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의 반발을 사 그리스-터키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 중이던 1920년, 파블로스의 형이자 당시 국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가 원숭이에게 물린 상처가 패혈증으로 악화되어 사망하면서 그리스는 군주 공백 상태에 빠졌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콘스탄티노스 1세의 복위를 반대하며 파블로스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그러나 파블로스는 아버지 콘스탄티노스와 형 요르요스 2세가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법을 무시할 수 없다며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1920년 그리스 총선에서 왕정복고파가 승리하여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가 다시 왕위에 올랐으나, 그리스-터키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1922년 다시 퇴위했다.
파블로스는 형 요르요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한 후에도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1923년부터 1935년까지,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41년부터 1946년까지 형과 함께 다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리스가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있을 때는 주로 런던과 카이로의 그리스 망명 정부에 머물며 카이로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리스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938년 1월 9일, 파블로스는 아테네에서 하노버의 프레데리키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소피아, 콘스탄티노스 2세, 이리니)를 두었다. 결혼 전 한때 동성애 문학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2. 2. 청년기
콘스탄티노스 1세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딸 소피아의 셋째 아들로 아테네에서 태어나 해군 장교 교육을 받았다.1917년 부왕 콘스탄티노스 1세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문제와 국가 분열로 인해 폐위되자[33], 파블로스는 왕위 계승 후보였음에도 부왕과 함께 그리스를 떠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은 잠시 오로포스를 거쳐 이탈리아를 통해 스위스로 망명하여 장크트모리츠와 취리히 등지에 머물렀다. 망명 중 부왕 콘스탄티노스는 파블로스의 교육을 걱정하여, 영국 해군 입대가 거부되자 빌헬름 2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파블로스를 독일 제국 해군 사관학교에 보냈다. 파블로스는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자의 감독 아래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1918년 독일 혁명과 킬 해군 반란 등으로 독일 군주제가 무너지면서 파블로스는 다시 스위스로 피신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독감에 걸려 가족과의 재회가 늦어지기도 했다.
1920년 10월, 형 알렉산드로스 왕이 원숭이에게 물린 상처가 패혈증으로 악화되어 사망하자, 베니젤로스 총리는 파블로스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그러나 파블로스는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나 형 요르요스 2세가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1920년 그리스 총선에서 왕당파가 승리하면서 1920년 12월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위되었고, 파블로스도 그리스로 귀국했다.
그리스-터키 전쟁 패배 이후 1923년 12월, 공화정 수립 여론이 높아지자 파블로스는 다시 그리스를 떠나 형 요르요스 2세와 함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이 망명은 1935년까지 이어졌다. 1935년 그리스에서 왕정 복고가 선언되고 형 요르요스 2세가 국왕으로 추대되면서 파블로스도 귀국했다.
1938년 친척인 브라운슈바이크의 프레데리카 공주와 결혼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이탈리아와의 전쟁 시기에는 그리스 국군 참모부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그리스 해군, 육군, 공군 장교로 복무하며 참전했다. 1941년 4월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공하여 아테네가 점령당하자[33], 정부와 왕가는 크레타섬으로 이전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파블로스를 "황저(皇儲)"[34], 즉 추정 상속인에 해당하는 의미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5월 크레타섬마저 독일군에게 점령되자, 파블로스는 형 요르요스 2세와 함께 이집트로 탈출하여 카이로와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독일 점령 기간 동안 파블로스는 런던과 카이로에 기반을 둔 그리스 망명 정부에 합류하여 활동하며, 카이로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리스 국민들에게 저항 메시지를 보냈다. 1946년 종전 후 그리스로 귀국했다.
2. 3. 귀국과 통치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점령 하의 그리스를 떠나 런던과 카이로의 망명 정부에 의지했던 파블로스는 1946년 그리스로 귀국했다. 이듬해인 1947년 4월 1일, 자녀가 없던 형 요르요스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 그리스는 그리스 공산당과 비공산당 정부군 간의 그리스 내전이 한창이었다. 파블로스는 왕당파뿐만 아니라 공화주의자의 지지까지 얻어 혼란을 수습하는 데 힘썼고, 1949년에는 공산주의 반군을 진압하며 내전을 사실상 종결시켰다. 이후 내전으로 피해가 컸던 그리스 북부 지역의 재건을 시작했다.
왕위 계승 후 파블로스와 가족들은 프시히코의 별장을 떠나 복원 작업이 완료된 타토이 궁으로 이주했다. 파블로스와 프레데리카 왕비는 자녀들과 주로 영어로 대화했으며, 딸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등 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왕세자 콘스탄티노스는 마루시의 아나브리타 실험 리세움에서 교육받았다. 가족들은 매년 겨울 오스트리아에서 스키를 즐기고 여름에는 요트를 타는 등 휴가를 보냈으며, 이 자리에는 독일 친척들이 자주 초대되었다. 그러나 왕족 내부적으로는 사촌 페테르와의 관계나, 고모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와 프레데리카 왕비 사이의 갈등 등 긴장 관계도 존재했다. 1947년에는 장티푸스를 앓아 사촌 필립 마운트배튼과 엘리자베스 2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1950년대에 들어 그리스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자, 파블로스는 해외 순방 등을 통해 외교 관계 증진과 무역 확대에 힘썼다. 특히 오랜 적대 관계였던 터키를 그리스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방문하여 이스탄불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에는 어려움도 따랐다. 키프로스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정치적, 외교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내정에서는 1955년에 자신이 직접 임명했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총리를 1963년 왕비와의 갈등 등을 이유로 갑자기 해임하면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 이러한 결정은 그리스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사회 불안을 증대시켜, 훗날 왕정 폐지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블로스는 1964년 3월 6일 위암으로 62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2. 4. 생애 후반
키프로스의 독립 문제로 영국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파블로스와 그리스 정부는 키프로스의 독립을 반대했으나, 영국은 독립을 지지했다. 결국 키프로스는 영국의 입장을 따라 1960년에 독립하였다.1958년 6월 2일,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18세가 되면서 왕실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파블로스는 왕세자에게 군주로서의 역할을 가르치며, 자신과 형제들이 겪었던 정치적 어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파블로스의 지원 아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는 오디세우스 에스키초글루, 게오르기오스 자이미스와 함께 요트 팀을 이루어 1960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고, 1960년 9월 7일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1896년 하계 올림픽에서 스피리돈 루이스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이후 그리스가 근대 올림픽에서 획득한 두 번째 금메달이었다. 또한 파블로스는 장녀 소피아 공주가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와 결혼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두 사람은 왕족들의 크루즈 여행에서 처음 만나 로마 올림픽에서 재회하며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파블로스 통치 후반기에는 여러 정치적 논란이 발생했다. 1963년 초, 프레데리카 왕비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총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켄트 공주 알렉산드라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런던을 방문했다. 당시 키프로스 문제로 그리스와 영국 간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고, 카라만리스는 왕비의 방문이 반발을 살 것을 우려했다. 예상대로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프레데리카가 젊은 시절 히틀러 유겐트 제복을 입은 사진을 공개하며 그녀를 비판했고, 런던에서는 시위가 벌어졌다. 프레데리카는 시위대를 피해 도망쳐야 했으며, 이 사건은 그리스-영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를 비롯한 야당 세력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군주제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63년 5월 22일, 좌익 성향의 국회의원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가 테살로니키에서 교통사고로 위장된 정치적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왕실과 가까운 고위 정부 관리들이 사건 배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왕실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카라만리스 총리의 국민 급진 연합은 큰 타격을 입었다. 같은 해, 파블로스는 프레데리카 왕비와의 갈등 등을 이유로 카라만리스 총리를 갑자기 해임했다. 이 결정은 그리스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사회 불안을 증대시켜, 훗날 왕정 폐지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라만리스의 사임 이후 치러진 1964년 그리스 총선에서는 파블로스의 주요 비판자였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정당이 승리하여 정부를 구성했다.
파블로스는 만년에 건강 문제로 고생했다. 1959년에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고, 1963년에는 맹장염으로 응급 수술을 받았다. 1964년 초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수술 몇 주 후인 1964년 3월 6일 62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3. 통치 기간의 주요 사건
파블로스의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처남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의 관계로 인해 중앙 열강 지지자로 여겨졌다. 반면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연합국 참전을 주장하며 국왕과 대립했고, 이는 국가 분열이라는 내전 양상으로 번졌다. 결국 연합국의 압력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는 1917년 퇴위했고, 연합국은 그의 장남 게오르기오스 2세 대신 차남 알렉산드로스를 왕위에 앉혔다. 파블로스를 포함한 왕실 가족 대부분은 알렉산드로스 국왕을 제외하고 그리스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알렉산드로스 국왕이 1920년 사망하고,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위했으나, 그리스-터키 전쟁 패배 이후 1922년 군사 쿠데타(1922년 9월 11일 혁명)로 다시 퇴위해야 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의 장남 게오르기오스가 게오르기오스 2세로 즉위했지만, 정치적 불안은 계속되었다.
게오르기오스 2세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파블로스가 공식적인 왕세자가 되었다. 그러나 1923년 그리스 총선에서 베니젤로스가 이끄는 자유당이 승리하면서 왕가는 다시 정치적 압박에 직면했다. 결국 게오르기오스 2세와 파블로스를 포함한 왕족들은 1923년 12월 다시 망명길에 올라 루마니아 등으로 떠났다. 1924년 3월 25일, 그리스는 제2차 헬레니즘 공화국을 선포했고, 국민투표를 통해 군주제 폐지가 확정되었다. 이로써 파블로스는 왕세자 지위를 잃고 무국적 상태가 되었으나, 사촌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로부터 덴마크 여권을 받아 생활했다.
망명 기간 동안 파블로스는 어머니, 여동생들과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에서 지내기도 했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파울 벡'이라는 가명으로 암스트롱 시들리 항공기 공장에서 견습 기계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그리스-이탈리아 전쟁)했으나 그리스군은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1941년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공(독일의 그리스 침공)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독일군은 빠르게 그리스를 점령했고,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와 파블로스를 포함한 왕족, 정부 인사들은 크레타로 피신했다. 독일군의 크레타 침공(크레타 전투) 이후 왕족들은 다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탈출했다. 이후 게오르기오스 2세와 파블로스는 런던에서 망명 정부 활동을 이어갔고, 파블로스의 아내 프레데리카와 자녀들은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피신했다. 파블로스는 카이로에서 자유 그리스군에 합류하려 했으나, 군 내부의 공화주의 움직임과 형 게오르기오스 2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44년 그리스가 해방되기 시작했지만, 국내의 강한 공화주의 여론 때문에 왕가는 즉시 귀국하지 못했다. 윈스턴 처칠 등의 중재로 아테네의 다마스키노스 대주교가 국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국민투표에서 왕정 복고가 결정되면서 게오르기오스 2세와 파블로스를 포함한 왕족들은 그리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당시 그리스는 파괴되었고, 왕궁 역시 약탈당한 상태였으며, 그리스 내전이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1947년 4월 1일, 형 게오르기오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파블로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그리스는 공산주의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치열한 그리스 내전 (1946-1949)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3. 1. 그리스 내전 (1946-1949)
파블로스는 1946년 그리스로 돌아왔다. 1947년 형 요르요스 2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그리스는 그리스 공산당과 비공산주의 정부군 사이의 그리스 내전 (1946-1949)이 한창이었다. 파블로스는 즉위 후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949년 정부군이 공산주의 반군을 최종적으로 진압하면서 내전은 끝났고, 파블로스는 내전으로 폐허가 된 북부 지역 재건에 노력을 기울였다.3. 2. 경제 회복과 발전
그리스 내전이 끝난 후 파괴된 북부 지역 재건에 힘썼다.[1] 1950년대에는 수출과 무역을 장려하는 정책을 통해 그리스 경제 회복을 이끌었으며, 파블로스 국왕의 적극적인 해외 순방과 경제 수교 노력을 통해 외교 및 무역 관계가 강화되었다.[1]그리스는 마셜 플랜의 초기 수혜국 중 하나로 미국의 경제 원조를 적극 활용했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 그리스는 미국으로부터 3.76억달러 이상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외부 지원과 더불어, 파블로스 국왕 치하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안정 역시 경제 성장에 기여한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이전 수십 년간 불안정했던 그리스 정치 상황과 달리, 이 시기에는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와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단 두 명의 총리가 비교적 장기간(총 11년) 집권하며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는 농업, 산업, 광업, 관광업 등 여러 분야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루며 '경제 기적'이라 불릴 만한 발전을 경험했다. 현대 드라크마화의 가치가 안정되었고, 많은 그리스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하여 노동 후 본국으로 상당한 금액을 송금하면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 이면에는 문제점도 존재했다. 경제학자들은 그리스 경제가 외국 차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소비되는 식량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적 취약점을 지적했다. 또한, 국가 예산의 3분의 1이라는 막대한 비중이 군사 및 국방비에 지출되는 점도 경제 발전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형식적으로는 입헌 군주제를 표방했지만, 당시 그리스 정치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사실상 절대 군주제와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1952년 헌법은 다른 유럽 국가의 군주들보다 국왕에게 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파블로스 국왕은 유럽 언론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특히 키프로스 분쟁에 대한 독단적인 정치적 입장 표명, 총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1963년 영국 방문, 그리스 육군 고위 장교들과의 긴밀한 관계 등이 주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군주제 유지 비용 또한 논란거리였다. 파블로스 국왕과 프레데리카 왕비가 국민들의 어려운 경제 사정은 외면한 채 개인적인 휴가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공금을 유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왕비가 관리하는 기금(여왕 폐하 기금)의 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는 이러한 군주제의 문제점을 강하게 비판하며 "국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정치적 구호로 내세웠고, 여러 왕실 행사에 불참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3. 3. 키프로스 문제
파블로스 국왕은 1952년 터키의 이스탄불을 방문하여 터키를 방문한 최초의 그리스 군주이자 국가원수가 되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의 통치 기간 중 키프로스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외교적 난제로 떠올랐다. 이 문제로 인해 파블로스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는 국내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파블로스는 자신이 임명했던 총리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를 해임하는 등 정치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3. 4. 정치적 개입 논란
파블로스 치세의 그리스는 표면적으로 입헌 군주제였지만, 비판가들은 절대 군주제의 특징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리스 1952년 헌법은 다른 유럽 군주국의 군주들보다 국왕에게 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유럽 언론들은 파블로스가 민주주의를 제한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으나, 일부 기록은 이러한 보도가 과장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파블로스의 정치 개입 논란은 여러 사례에서 나타났다. 그는 키프로스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으며, 자신이 임명했던 총리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를 해임하여 정치적 반발을 사기도 했다. 또한 1963년에는 총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영국 방문을 강행했으며, 그리스 육군 고위 간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군주제 유지 비용 역시 논란거리였다. 파블로스와 프레데리카 왕비는 공금을 개인적인 휴가나 사치스러운 생활에 사용하고, 심지어 여왕 폐하 기금에서 돈을 가져다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당 지도자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는 군주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국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여러 왕실 행사를 보이콧하며 파블로스 국왕과 대립각을 세웠다.
4. 가족
1938년 1월 9일, 파울은 하노버의 프레데리카 공주와 결혼했다. 프레데리카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딸이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손녀였다. 파울과 프레데리카는 프리드리히 3세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을 통해 5촌 당질 관계였고,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를 통해 6촌 당질 관계였다. 두 사람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결혼 | 자녀 | |
---|---|---|---|---|---|
날짜 | 배우자 | ||||
소피아 | 1938년 11월 2일 | 1962년 5월 14일 | 후안 카를로스 1세 | * 엘레나 공주 | |
콘스탄티노스 2세 | 1940년 6월 2일 | 2023년 1월 10일 (82세) | 1964년 9월 18일 | 덴마크의 앤마리 | * 알렉시아 공주 |
이레네 | 1942년 5월 11일 |
1947년 4월 1일, 형 게오르기오스 2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파울은 왕위를 계승했다. 파울과 그의 가족은 프시히코에 있는 별장을 떠나 대규모 복원 작업이 완료된 타토이 궁전으로 이사했다. 공사 지연으로 인해 1949년 영구적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타토이와 프시히코를 오가며 생활했다. 파울과 프레데리카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서로 대화하거나 자녀들과 이야기할 때는 주로 영어를 사용했다. 파울은 종종 딸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클래식 음악을 함께 듣곤 했다. 딸들은 이후 교육을 위해 잘렘에 있는 기숙 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는 독일 출신 왕가에서 교육 원칙으로 삼았던 쿠르트 한의 교육 철학에 영향을 받은 곳이었다. 아들이자 새로운 왕세자인 콘스탄티노스는 마루시의 아나브리타 실험 리세움으로 보내졌다.
파울 가족은 매년 겨울 오스트리아 팔켄에서 스키 휴가를 즐겼고, 여름에는 페탈리스에서 요트를 빌려 시간을 보냈다. 이 휴가에는 바덴 가문, 헤세 가문, 하노버 가문, 호엔로에 가문 등 프레데리카의 독일 친척들이 자주 초대되었다. 1947년 파울은 장티푸스를 앓아 사촌 필립 공(훗날의 필립 공)과 미래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독일 친척 외에도 러시아 혁명 이후 생존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가의 일원들이 종종 타토이 궁전에 초대받았다. 1948년 6월에는 루마니아의 미하이 1세와 안 드 부르봉파르마의 결혼식이 아테네에서 열리기도 했다.
파울의 통치 초기에는 왕족 내부에 긴장 관계도 존재했다. 파울은 사촌 페테르 왕자가 러시아 평민 이리나 오프친니코바와 결혼한 것을 왕가의 격에 맞지 않는 귀천상혼으로 여겨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고모이자 필립 공의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는 프레데리카를 둔하고 그녀의 시누이인 러시아의 엘레나 블라디미로브나 대공녀를 두려워한다고 여겨, 프레데리카와 자주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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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974년에 군사 정권이 선포한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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