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메탁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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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안니스 메탁사스는 군 장교 출신으로,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등에 참전했으며, 1936년 그리스의 임시 총리가 되어 8월 4일 체제를 선포하고 독재 권력을 확립했다. 그는 파시스트 정권을 모방한 정책을 펼쳤으며, 대외적으로는 중립 노선을 유지하려 했으나, 1940년 이탈리아의 침공 위협에 "아니오"라고 답하며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메탁사스는 전쟁 중 사망했으나, 그의 결정은 "오히 데이"로 기념되고 있으며, 사후에는 독재와 관련된 논란 속에 그의 유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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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메탁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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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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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
로마자 표기 | Ioannis Metaxas |
출생일 | 1871년 4월 12일 |
출생지 | 이타키 섬, 그리스 왕국 |
사망일 | 1941년 1월 29일 |
사망지 | 아테네, 그리스 왕국 |
사망 원인 | 패혈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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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직책 | 그리스의 총리 |
재임 기간 시작 | 1936년 4월 13일 |
재임 기간 종료 | 1941년 1월 29일 |
국왕 | 게오르기오스 2세 |
전임 총리 | 콘스탄티노스 데메르치스 |
후임 총리 |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 |
정당 | 자유 사상당 (1922–1936) |
정당 (이후) | 무소속 (1936–1941) |
국방부 장관 | 재임 시작: 1935년 3월 5일 재임 종료: 1935년 3월 13일 총리: 파나기스 차달리스 대통령: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전임: 게오르기오스 콘딜리스 후임: 게오르기오스 콘딜리스 |
국방부 장관 (총리 겸임) | 재임 시작: 1936년 3월 14일 재임 종료: 1941년 1월 29일 총리: 콘스탄티노스 데메르치스, 본인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 전임: 콘스탄티노스 데메르치스 후임: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 |
부총리 | 재임 시작: 1935년 11월 30일 재임 종료: 1936년 4월 12일 총리: 콘스탄티노스 데메르치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 전임: 이오아니스 테오토키스 후임: 콘스탄티노스 자비치아노스 |
내무부 장관 | 재임 시작: 1932년 11월 4일 재임 종료: 1933년 1월 16일 총리: 파나기스 차달리스 대통령: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전임: 이오아니스 치리모코스 후임: 게오르기오스 마리스 |
공공교통부 장관 | 재임 시작: 1926년 12월 4일 재임 종료: 1928년 7월 4일 총리: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대통령: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
군사 경력 | |
소속군 | 그리스 육군 |
복무 기간 | 1890년–1920년 |
최종 계급 | [[File:GR-Army-OF8-1912.svg|15px]] 중장 |
지휘 | 에피스트라토이 |
주요 참전 | 그리스-터키 전쟁 (1897년) 발칸 전쟁 제1차 발칸 전쟁 비자니 전투 제2차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국민 분열 노엠브리아나 |
모교 | 헬레닉 육군 사관학교 프로이센 전쟁 대학 |
소속 부대 | 테살리아 군 |
훈장 | [[File:GRE Order Redeemer 4Class.png|30px]] 구세주 훈장 금십자 |
기타 정보 | |
지지 | 그리스 왕국 |
2. 군 경력
이타키에서 태어난 메탁사스는 원래 군 장교 출신으로 1897년에 일어난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처음으로 종군하였다. 독일 제국에서 유학한 뒤 귀국하여 총참모부에 들어갔으며, 발칸 전쟁(1912년~1913) 전까지 그리스 군대 현대화 사업을 담당하였다. 1913년에 그는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16년에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10년, 메탁사스는 국방부 장관직을 겸임하고 있던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에 의해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12년 발칸 전쟁 직전 베니젤로스는 메탁사스를 소피아로 파견해 그리스와 불가리아 간 군사 조약을 협상하게 했다. 그는 테살리아 군 작전 참모 대위로 제1차 발칸 전쟁에 참전했고, 1912년 12월 1912-13년 런던 회의에서 베니젤로스의 군사 전문가로 활동했다. 1913년 5월에는 군사 전권 대표로 그리스-세르비아 동맹의 군사 조항을 협상했다. 제2차 발칸 전쟁에는 중령으로 참전했다.
발칸 전쟁 이후, 메탁사스는 육군 참모부 제1(작전)국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15년 1월 참모부 부장이 되었다.
1914년 봄과 여름, 그리스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점령했고, 1914년 1월 31일 열강에 의해 그리스에 할양된 에게해 동부 도서의 지위를 놓고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부하여 양국 간의 해군 군비 경쟁과 소아시아 지역 그리스인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다. 5월 29일, 그리스 정부는 포르테(Sublime Porte)에 공식 항의를 제기하며, 박해가 중단되지 않으면 관계 단절과 전쟁까지도 불사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1914년 6월 6일, 사실상 참모본부장이었던 메탁사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군사적 선택 사항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불가리아와의 적대 관계 때문에 그리스군 전체의 소아시아 상륙 작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신 메탁사스는 사전 선전포고 없이 갈리폴리 반도를 갑작스럽게 점령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며, 이스탄불(Constantinople)을 점령하여 오스만 제국과 협상을 강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전날 오스만 정부가 상호 회담을 제안했고, 긴장이 완화되어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와 오스만 그랜드 베지어(Grand Vizier)인 사이드 할림 파샤(Said Halim Pasha)가 7월에 브뤼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그리스의 참전 문제가 대두되었고, 1914년 7월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의 공격에 대비하여 그리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리스는 이를 거절했다. 1914년 7월 14일 독일의 중앙 연합(Central Powers) 참전 요청은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베니젤로스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8월 1일 베니젤로스는 협상국에 참전을 타진했으나, 이는 연합국의 미온적인 반응으로 무산되었다. 완고한 왕당파였던 메탁사스는 콘스탄티노스 1세를 지지하며 그리스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했다.
1915년 1월 11일 영국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 그리스의 참전을 조건으로 소아시아 영토 양보를 제안했고, 베니젤로스는 찬성했지만, 메탁사스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1915년 2월 갈리폴리에 대한 협상국의 공격이 시작되자 베니젤로스는 2월 16일 공식적으로 군단 하나와 그리스 해군 전체를 협상국 지원에 제공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메탁사스는 항의하며 사임했다. 메탁사스의 사임에 베니젤로스는 1915년 2월 21일 사임하였다.
1915년 5월 선거에서 승리한 베니젤로스는 1916년 9월 10일에 그리스의 반격 동원령을 내렸고, 메탁사스는 참모차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국왕은 베니젤로스를 해임하였고, 이는 "국가 분열"을 초래했다.
1916년 5월과 8월에 콘스탄티노스 1세와 참모본부는 중앙 세력(독일과 불가리아)이 루펠 요새와 마케도니아 동부 일부를 점령하도록 허용했고, 이는 특히 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916년 8월,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은 테살로니키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가 방위 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와 메탁사스는 친독일 성향으로 비난받았지만, 연합국과 협상을 계속했다.
메탁사스는 11월 사건 동안 군주제 준군사 조직 예비군(예비역)의 지휘관으로, 아테네에 상륙한 프랑스/영국군에 저항했다. 1917년 6월, 연합국의 압력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는 폐위되었고, 알렉산드로스가 국왕이 되었으며, 베니젤로스가 집권하여 1917년 6월 29일 전국을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메탁사스는 폐위된 국왕을 따라 코르시카로 망명했다.
2. 1. 발칸 전쟁
이타키에서 태어난 메탁사스는 군 장교 출신으로 1897년에 일어난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처음으로 종군하였다. 독일 제국에서 유학한 뒤 귀국하여 총참모부에 들어갔으며, 발칸 전쟁(1912년~1913) 전까지 그리스 군대 현대화 사업을 담당하였다.1910년, 메탁사스는 국방부 장관직을 겸임하고 있던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에 의해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12년 발칸 전쟁 직전 베니젤로스는 메탁사스를 소피아로 파견해 그리스와 불가리아 간 군사 조약을 협상하게 했다. 그는 테살리아 군 작전 참모 대위로 제1차 발칸 전쟁에 참전했고, 1912년 12월 1912-13년 런던 회의에서 베니젤로스의 군사 전문가로 활동했다. 1913년 5월에는 군사 전권 대표로 그리스-세르비아 동맹의 군사 조항을 협상했다. 제2차 발칸 전쟁에는 중령으로 참전했다.
발칸 전쟁 이후, 메탁사스는 육군 참모부 제1(작전)국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15년 1월 참모부 부장이 되었다.
2. 2. 1914년 그리스-튀르크 위기
1914년 봄과 여름, 그리스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점령했고, 1914년 1월 31일 열강에 의해 그리스에 할양된 에게해 동부 도서의 지위를 놓고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부하여 양국 간의 해군 군비 경쟁과 소아시아 지역 그리스인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다. 5월 29일, 그리스 정부는 포르테(Sublime Porte)에 공식 항의를 제기하며, 박해가 중단되지 않으면 관계 단절과 전쟁까지도 불사할 것이라고 위협했다.1914년 6월 6일, 사실상 참모본부장이었던 메탁사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군사적 선택 사항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불가리아와의 적대 관계 때문에 그리스군 전체의 소아시아 상륙 작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신 메탁사스는 사전 선전포고 없이 갈리폴리 반도를 갑작스럽게 점령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며, 이스탄불(Constantinople)을 점령하여 오스만 제국과 협상을 강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전날 오스만 정부가 상호 회담을 제안했고, 긴장이 완화되어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와 오스만 그랜드 베지어(Grand Vizier)인 사이드 할림 파샤(Said Halim Pasha)가 7월에 브뤼셀에서 만날 수 있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국가 분열
요안니스 메탁사스는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에 참전한 군 장교 출신으로, 독일 제국 유학 후 그리스 군대 현대화에 기여했다. 1913년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916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그리스의 참전 문제가 대두되었고, 1914년 7월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의 공격에 대비하여 그리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리스는 이를 거절했다. 1914년 7월 14일 독일의 중앙 연합(Central Powers) 참전 요청은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베니젤로스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8월 1일 베니젤로스는 협상국에 참전을 타진했으나, 이는 연합국의 미온적인 반응으로 무산되었다. 완고한 왕당파였던 메탁사스는 콘스탄티노스 1세를 지지하며 그리스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했다.
1915년 1월 11일 영국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 그리스의 참전을 조건으로 소아시아 영토 양보를 제안했고, 베니젤로스는 찬성했지만, 메탁사스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1915년 2월 갈리폴리에 대한 협상국의 공격이 시작되자 베니젤로스는 2월 16일 공식적으로 군단 하나와 그리스 해군 전체를 협상국 지원에 제공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메탁사스는 항의하며 사임했다. 메탁사스의 사임에 베니젤로스는 1915년 2월 21일 사임하였다.
1915년 5월 선거에서 승리한 베니젤로스는 1916년 9월 10일에 그리스의 반격 동원령을 내렸고, 메탁사스는 참모차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국왕은 베니젤로스를 해임하였고, 이는 "국가 분열"을 초래했다.
1916년 5월과 8월에 콘스탄티노스 1세와 참모본부는 중앙 세력(독일과 불가리아)이 루펠 요새와 마케도니아 동부 일부를 점령하도록 허용했고, 이는 특히 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6] 1916년 8월,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은 테살로니키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가 방위 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와 메탁사스는 친독일 성향으로 비난받았지만, 연합국과 협상을 계속했다.
메탁사스는 11월 사건 동안 군주제 준군사 조직 예비군(예비역)의 지휘관으로, 아테네에 상륙한 프랑스/영국군에 저항했다. 1917년 6월, 연합국의 압력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는 폐위되었고, 알렉산드로스가 국왕이 되었으며, 베니젤로스가 집권하여 1917년 6월 29일 전국을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메탁사스는 폐위된 국왕을 따라 코르시카로 망명했다.
3. 정치 경력
요안니스 메탁사스는 1917년 베니젤로스 집권 후 다른 반(反) 베니젤로스주의자들과 함께 코르시카로 망명했다가, 1920년 베니젤로스의 선거 패배 후 귀국했다.[7][8] 그는 소아시아 원정에 반대하며 1920년 12월 28일 군에서 은퇴했다.[9] 소아시아에서 그리스군이 패배한 후, 1922년 10월 12일 자유사상가당을 창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1923년 왕당파 쿠데타 연루 의혹으로 국외로 도주했고, 요르요스 2세도 망명했다. 1924년 왕정이 폐지되고 제2 헬레닉 공화국이 선포된 후 귀국하여 공화정을 인정했다. 1926년 선거에서 자유사상가당은 원내 52석을 확보하여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의 "거국 정부"에서 통신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당세가 약화되었으나, 1933년 선거에서 3석을 확보하여 파나기스 찰달리스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1933년 베니젤로스 암살 시도가 실패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여 암살 시도에 연관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1935년 3월 1일 테살로니키에서 베니젤리스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 시도가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실패하여, 그리스 엘리트들 사이에서 우익으로의 경향으로 이어졌다. 그는 군주제 복고를 지지하며 군소 왕당파 정당과 연합하여 1935년과 1936년 선거에서 각각 7석을 얻었다.
4. 8월 4일 체제
1935년 요르요스 2세가 복위된 후, 1936년 선거에서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그리스 공산당(KKE)이 득세하자 국왕은 메탁사스를 임시 총리로 임명했다.[29] 1936년 5월, 산업계 불안을 이유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 헌법 조항을 정지시켰다. 1936년 8월 4일, 메탁사스는 8월 4일 체제를 선언하고 독재 권력을 확립했다.
==== 내정 ====
메탁사스 정권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모방하여 정당과 파업을 금지하고, 언론에 광범위한 검열 제도를 도입하였다.[12] 그리스 공산당에 침투하여 사실상 해체시켰으며,[14] 공산주의자였던 어린 소녀에게 고문을 가했다는 기록이 있다.[16] 반공주의와 함께 반의회주의는 8월 4일 정권의 주요 정치 의제였다.[13]
조합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던 메탁사스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여러 제도를 받아들였다. 국민 노역 제도를 만들고, 8시간 근무제를 실시하였으며, 노동자의 노동 여건을 강제적으로 향상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사회 보장 기구(IKA)를 설치하였다. 상징 면에서는 로마식 경례를 도입하고, 미노아식 양날 도끼인 라브뤼스를 파스케스에 대응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무솔리니와 달리 메탁사스는 대중 정당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며, 정권의 유일한 대중 조직은 국가 소년단(EON) 밖에 없었다.
1938년 아테네를 방문한 아서 코이스트러는 플라톤의 "국가"조차 메탁사스의 금서 목록에 있었다고 지적했다.[16]
메탁사스는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여 사회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농촌에서는 농민 부채의 모라토리엄을 실시했지만, 이러한 정책은 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국민들은 점차 좌익으로 기울었지만, 독재 정권에 대한 행동에는 나서지 못했다.
==== 대외 정책과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
대외 정책에서 메탁사스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여 영국과 독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17] 1930년대 말, 다른 발칸 반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이 그리스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메탁사스 정권의 외교 정책은 주로 영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그리스의 조르조스 2세에 의해 결정되었다.[17]
1923년 코르푸 사건 이후로 그리스는 이탈리아를 주요 적국으로 간주했고, 메탁사스는 독일을 이탈리아에 대한 대항마로 보았다.[18] 1930년대 후반, 독일은 그리스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가 되었지만, 메탁사스는 독일이 발칸 지역에서 이탈리아를 억제할 것이라는 희망을 한동안 계속했다.[18]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확장주의 정책을 펴면서 그리스는 프랑스-영국 동맹에 의존하게 되었다.[21] 1939년 4월,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병합 후, 메탁사스는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이 임박했다고 확신했다.[18] 그는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고,[18] 1939년 4월 13일 영국과 프랑스는 루마니아와 그리스에 대한 공동 보장을 발표했다.[22]
메탁사스는 베니젤로스가 시작한 터키와의 우호 관계 정책을 계속했다. 아타튀르크 사망 당일, 메탁사스는 조의를 표하는 편지와 연설을 했다.
1940년 10월 28일, 무솔리니는 그리스의 전략 요충지 점령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메탁사스는 "그럼 전쟁입니다."(''Alors, c'est la guerre.'')라고 답하며 거부했다.[29] 그리스 대중은 그의 답변을 "오히"(Οχι, "아니다"라는 뜻)로 표현했으며, "오히의 날"은 현재까지 그리스에서 기념되고 있다.[24]
몇 시간 뒤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서 그리스를 침공하여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 군은 성공적인 방어와 반격을 통해 이탈리아 군을 격퇴하고 알바니아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 메탁사스는 1941년 1월 29일 아테네에서 인두의 봉와직염이 악화되어 사망했고,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가 총리직을 계승했다. 메탁사스는 그리스 전투 당시 독일의 그리스 침공을 보지 못했다.
4. 1. 내정
메탁사스 정권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모방하여 정당과 파업을 금지하고, 언론에 광범위한 검열 제도를 도입하였다.[12] 그리스 공산당에 침투하여 사실상 해체시켰으며,[14] 공산주의자였던 어린 소녀에게 고문을 가했다는 기록이 있다.[16] 반공주의와 함께 반의회주의는 8월 4일 정권의 주요 정치 의제였다.[13]조합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던 메탁사스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여러 제도를 받아들였다. 국민 노역 제도를 만들고, 8시간 근무제를 실시하였으며, 노동자의 노동 여건을 강제적으로 향상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사회 보장 기구(IKA)를 설치하였다. 상징 면에서는 로마식 경례를 도입하고, 미노아식 양날 도끼인 라브뤼스를 파스케스에 대응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무솔리니와 달리 메탁사스는 대중 정당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며, 정권의 유일한 대중 조직은 국가 소년단(EON) 밖에 없었다. 메탁사스는 1938년 교육부 장관이 되어 모든 교과서를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맞게 다시 썼다.[15] 국가 이익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는 "반그리스적" 문학에 대한 캠페인이 이어졌고,[15] 괴테, 쇼, 프로이트와 같은 작가들과 여러 그리스 작가들을 대상으로 책 사르기가 진행되었다.[15]
1938년 아테네를 방문한 아서 코이스트러는 플라톤의 "국가"조차 메탁사스의 금서 목록에 있었다고 지적했다.[16]
메탁사스는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여 사회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농촌에서는 농민 부채의 모라토리엄을 실시했지만, 이러한 정책은 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국민들은 점차 좌익으로 기울었지만, 독재 정권에 대한 행동에는 나서지 못했다.
4. 2. 대외 정책과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대외 정책에서 메탁사스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여 영국과 독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17] 1930년대 말, 다른 발칸 반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이 그리스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메탁사스 정권의 외교 정책은 주로 영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그리스의 조르조스 2세에 의해 결정되었다.[17]1923년 코르푸 사건 이후로 그리스는 이탈리아를 주요 적국으로 간주했고, 메탁사스는 독일을 이탈리아에 대한 대항마로 보았다.[18] 1930년대 후반, 독일은 그리스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가 되었지만, 메탁사스는 독일이 발칸 지역에서 이탈리아를 억제할 것이라는 희망을 한동안 계속했다.[18]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확장주의 정책을 펴면서 그리스는 프랑스-영국 동맹에 의존하게 되었다.[21] 1939년 4월,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병합 후, 메탁사스는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이 임박했다고 확신했다.[18] 그는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고,[18] 1939년 4월 13일 영국과 프랑스는 루마니아와 그리스에 대한 공동 보장을 발표했다.[22]
메탁사스는 베니젤로스가 시작한 터키와의 우호 관계 정책을 계속했다. 아타튀르크 사망 당일, 메탁사스는 조의를 표하는 편지와 연설을 했다.
1940년 10월 28일, 무솔리니는 그리스의 전략 요충지 점령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메탁사스는 "그럼 전쟁입니다."(''Alors, c'est la guerre.'')라고 답하며 거부했다.[29] 그리스 대중은 그의 답변을 "오히"(Οχι, "아니다"라는 뜻)로 표현했으며, "오히의 날"은 현재까지 그리스에서 기념되고 있다.[24]
몇 시간 뒤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서 그리스를 침공하여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 군은 성공적인 방어와 반격을 통해 이탈리아 군을 격퇴하고 알바니아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 메탁사스는 1941년 1월 29일 아테네에서 인두의 봉와직염이 악화되어 사망했고,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가 총리직을 계승했다. 메탁사스는 그리스 전투 당시 독일의 그리스 침공을 보지 못했다.
5. 유산과 평가
요안니스 메탁사스는 1967년-1974년 그리스 군사 쿠데타 이전까지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애국심과 지도력으로 존경받았다.[27][28] 1940년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한 그의 행동을 기념하여 10월 28일은 오히 데이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다.[26] 그러나 군사 정권 시절, 그의 유산은 억압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 정권은 메탁사스 동상 건립을 거부하고 대신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동상을 제막하는 등 그와 거리를 두려 했다.[27][28]
메탁사스 사후, 침략군은 그리스 북부에 그가 건설한 메탁사스 방어선으로 알려진 요새에 직면해야 했다.[27][28]
군사 정권 말기, 일부 하급 관리들은 파파도풀로스를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 도시에 메탁사스 흉상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스피로스 리나르다토스의 저서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36년의 날들'' 같은 예술 작품은 1967년 쿠데타와 메탁사스 정권, 파시즘 사이의 이념적 연관성을 부각시켰다.[27][28] 1972년에는 저항 단체가 피레우스 교외의 메탁사스 흉상을 폭파하는 사건도 발생했다.[27][28] 이러한 경향은 1974년 이후 주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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