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하타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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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하타 제철소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부국강병 정책에 따라 설립된 제철소로, 일본 근대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7년 후쿠오카현 야하타촌에 관영 제철소로 개청되었으며, 초기에는 독일 기술을 도입했으나 기술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일본 기술자들의 노력으로 기술 자립을 이루었고, 1912년까지 일본 선철 생산량의 80%를 담당하며 수직적 통합 제철소로서 일본 강철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1934년 일본 제철에 합병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폭격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야하타 제철소는 2014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 '일본 메이지 유신 산업 혁명 유산'의 일부로 등재되었으며, 현재는 일본 제철의 소유 하에 큐슈 지역의 자동차 제조업체에 강철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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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타 제철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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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야하타 제철소 |
원어 명칭 | 八幡製鐵所 (일본어) |
로마자 표기 | Yahata Seitetsu-sho (야하타 세이테츠쇼) |
옛 표기 | 官營八幡製鐵所 (かんえいやはたせいてつしょ, 간에이야하타세이테츠쇼) |
영어 명칭 | Imperial Steel Works, Yawata, Japan |
위치 | |
국가 | 일본 |
현 | 후쿠오카현 |
시 | 기타큐슈시 |
역사 | |
설립 | 1901년 |
특징 | |
중요 시설 | 히가시다 제1고로 (東田第一高炉跡) |
세계유산 등재 | 명칭: 일본의 메이지 산업 혁명 유산 제철·제강, 조선, 석탄 산업 |
참고 | 일본제철 규슈제철소 야하타 지구의 일부 |
2. 연혁
- 1896년 (메이지 29년) 3월 28일 - 제국 의회 제9의회가 제철소 창립을 결정.
- 1897년 (메이지 30년) 2월 6일 - 제철소를 야하타촌에 설치하기로 결정.
- 1897년 (메이지 30년) 6월 1일 - 야하타촌에 관영 제철소를 개청.
- 1901년 (메이지 34년) 2월 5일 - 히가시다 제1고로에 불을 지핌. 5월에 제강 공장, 6월에 중형 공장·소형 공장(모두 형강용 압연 공장)·강판 공장, 11월에 궤조 공장이 조업을 시작.
- 1901년 (메이지 34년) 11월 18일 - 작업 개시식을 거행. 후시미노미야 사다아키 친왕, 히라타 토스케 농상무 대신이 참석[28]。
- 1902년 (메이지 35년) 7월 - 히가시다 제1고로·전로 휴지.
- 1904년 (메이지 37년) 4월 - 대형 공장(대형 형강 압연)이 조업 시작.
- 1904년 (메이지 37년) 4월 6일 - 히가시다 제1고로 두 번째 점화. 17일 만에 휴지.
- 1904년 (메이지 37년) 7월 23일 - 히가시다 제1고로 세 번째 점화.
- 1905년 (메이지 38년) 2월 25일 - 히가시다 제2고로 점화.
- 1905년 (메이지 38년) 12월 - 후판 공장이 조업을 시작.
- 1906년 (메이지 39년) - 제1기 확장 공사 시작.
- 1907년 (메이지 40년) 1월 - 선재 공장이 조업을 시작.
- 1909년 (메이지 42년) 10월 - 히가시다 제3고로 점화.
- 1912년 (다이쇼 원년) - 중공 롤 기계 도입(이리스 상회에 의한).
- 1913년 (다이쇼 2년) - 시멘트 제조 시작(닛테츠 스미토모 고로 시멘트의 기원).
- 1914년 (다이쇼 3년) 4월 - 히가시다 제4고로 점화.
- 1916년 5월 1일 - 댐 붕괴로 마을과 공장 대부분이 침수되어 수백 명 사망.
- 1917년 (다이쇼 6년) - 전기로를 신설.
- 1917년 (다이쇼 6년) 9월 30일 - 큐슈 제강 주식회사 설립.
- 1917년 (다이쇼 6년) 11월 1일 - 도요 제철 주식회사 설립.
- 1918년 (다이쇼 7년) 12월 - 히가시다 제5고로 점화.
- 1918년 - 야하타 제철소의 기술자 구로다 타이조(黒田泰造)가 재생 연소 장치를 통해 부산물을 회수하는 구로다 코크스 오븐(黒田式コークス炉)을 발명. 이는 에너지 재활용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혁신적인 에너지 절약형 오븐이었음.
- 1919년 (다이쇼 8년) 5월 12일 - 도요 제철에서 고로 점화 (후의 토바타 제2고로).
- 1921년 (다이쇼 10년) 4월 - 히가시다 제6고로 점화.
- 1921년 (다이쇼 10년) 4월 16일 - 관영 제철소가 도요 제철의 공장을 차용.
- 1922년 (다이쇼 11년) 10월 - 주석 도금 강판 (당시는 열처리 주석 도금) 제조 시작.
- 1924년 (다이쇼 13년) 11월 - 토바타 작업소에서 2번째 고로에 점화 (후의 토바타 제1고로)
- 1928년 (쇼와 3년) 11월 7일 - 큐슈 제강의 제강 공장 (통칭 서야하타 공장)이 조업을 시작, 동시에 관영 제철소가 차용. 당월 내에 후판 공장이 조업 시작.
- 1929년 (쇼와 4년) 1월 - 큐슈 제강의 대형 공장이 조업 시작.
- 1930년 (쇼와 5년) 2월 - 전용 철도 (탄재선, 현 쿠로가네선) 운전 개시.
- 1930년 (쇼와 5년) 6월 17일 - 호라오카 제1고로 점화.
- 1933년 (쇼와 8년) 10월 11일 - 호라오카 제2고로 점화.
- 1934년 (쇼와 9년) 1월 29일 - 관영 제철소와 큐슈 제강 등이 합병하여 일본 제철 (닛테츠) 발족. 닛테츠 야하타 제철소가 됨. 2월 1일부터 정식으로 영업 개시.
분류:후쿠오카현의 역사
분류:기타큐슈시의 역사
분류:야하타히가시구
분류:일본의 제철소
분류:일본제철
분류:1897년 설립
분류:1970년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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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본의 세계유산
분류:메이지 시대의 산업 유산
2. 1. 설립 배경
메이지 정부의 부국강병 정책으로 청일 전쟁 이전부터 제철소 건설이 요구되었으나, 1891년 제2회 제국 의회에 제출된 예산안은 막대한 비용 문제로 부결되었다.[21][22]1895년 제철 사업 조사회를 설치하여 "제철소는 관영으로 하고, 원료가 풍부하며, 제철·철강 시험 결과도 양호하다"는 보고를 받았고, 조사 중 청일 전쟁 발발로 군수 산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896년 일본 국내 철 수요는 선철 6만 5천 톤, 강재 22만 톤이었으나, 국내 공급량은 선철 2만 6천 톤, 강재 1천 2백 톤으로 해외 수입에 의존했다.
1896년 3월 30일 제철소 관제가 발포되어 야마우치 테이운이 장관, 오시마 미치타로가 기술관으로 임명되었다. 후쿠오카현 오가군 야하타 마을(현 기타큐슈시 야하타히가시구), 기쿠마키군 야나기가우라, 히로시마현 아키군 사카 마을이 후보지로 거론되었고, 유치 운동과 진정 합전이 벌어졌다. 지쿠호 탄전에서 철도와 수운을 통한 석탄 조달, 항만을 통한 군사 방위 및 원자재 확보의 유리함으로 야하타가 선정되었다. 후쿠오카현 출신 농상무 차관 가네코 겐타로의 지원과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후루카와 등 중앙 자본, 가이시마, 아소, 야스카와 등 지역 재벌이 지쿠호 탄전에 진출한 것도 영향을 주었다.[23]
2. 2. 초기 운영 (1901년 ~ 1904년)
1897년 (메이지 30년) 2월 6일, "제철소는 후쿠오카현 지쿠젠국 야하타 마을에 둔다"는 공표와 함께 야하타 제철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1901년 (메이지 34년) 2월 5일, 히가시다 제1고로에 불을 지피며 본격적인 조업이 시작되었다. 조업에는 독일 오버하우젠시의 구테호프눙스휘테 (GHH)의 최신 기술이 도입되었고, 다수의 독일인 기술자들이 참여했다.그러나 초기에는 코크스 로가 없어 코크스를 자체 생산할 수 없었고, 사용된 철광석의 성질도 유럽과 달라 선철 생산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제철소는 심각한 적자를 겪었고, 결국 1902년 (메이지 35년) 7월, 조업이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이후 코크스 로를 건설하고 원료를 정선하는 등 대대적인 개선 작업을 거쳐 조업 재개를 시도했으나, 1904년 (메이지 37년) 4월 6일에 재가동된 고로는 불과 17일 만에 다시 멈춰 섰다. 이에 도쿄 제국대학 공학부 전 교수이자 가마이시 광산 다나카 제철소의 고문이었던 노로 가게요시가 문제 해결을 위해 투입되었다.
노로 가게요시는 고로의 형태를 변경하고 조업 방식을 개선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그의 제안에 따라 개조된 고로는 7월 23일 세 번째 가동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야하타 제철소는 안정적인 조업을 통해 선철 생산량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24][25]
2. 3. 노로 가게요시의 공헌과 기술 자립 (1904년 ~ 1934년)
1904년(메이지 37년) 2월 러일 전쟁 발발로 철강 수요가 급증했다. 정부는 코크스 로 완성을 계기로 제철소 조업 재개를 결정했고, 4월 6일 두 번째 불을 지폈으나 17일 만에 조업이 중단되었다.[24] 이에 가마이시 광산 다나카 제철소 고문이자 도쿄 제국대학 공학부 전 교수였던 노로 가게요시에게 원인 조사가 의뢰되었다.[24]노로 가게요시는 고로 내부를 고온으로 유지하기 위해 고로 형태를 개조하고 조업 방식을 개선할 것을 제안했다.[24] 그의 제안에 따라 고로를 개조하고 1904년 7월 23일 세 번째 불을 지폈다.[24] 이 개량은 성공적이었고, 이후 순조롭게 조업이 진행되어 많은 선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 1905년(메이지 38년) 2월 25일에는 기존에 건설 중이던 히가시다 제2고로에도 불을 지펴 선철 생산량이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24]
전쟁 이후 민간에서 철강 수요가 증가하고, 기술 혁신과 중공업 발전에 따른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제1기 확장 공사(1906년~1910년), 제2기 확장 공사(1911년~1915년)가 진행되었다.[24]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철강 수요가 대폭 증가함에 따라 제3기 확장 공사(1917년)가 진행되었고, 1927년(쇼와 2년)에는 연간 선철 생산량 100만 톤 계획이 수립되었다.[24] 이 계획에 따라 바다 위에 건설하는 제철소의 선구자인 도노오카 고로군 건설이 결정되어 1938년(쇼와 18년)에 완공되었다.[24] 이러한 확장을 통해 야하타 제철소는 국내 철강 수요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1934년(쇼와 9년) 1월 29일 일본제철 주식회사법에 의해 관영 제철소, 규슈 제강, 무로란 제철, 가마이시 광산, 아사노 제강, 미쓰비시 제철(현 황해 제철 연합 기업소), 도요 제철이 관민 합작으로 일본제철(닛테츠)로 통합되었다. 이때 관영 제철소의 명칭이 '''야하타 제철소'''로 변경되었다.
2. 4. 일본제철 합병과 전시 체제 (1934년 ~ 1945년)
1934년 1월 29일, 제1차 세계 대전 후 불황으로 제철 기업 합리화가 추진되면서 일본제철 주식회사법에 의해 관영 제철소, 규슈 제강, 무로란 제철, 가마이시 광산, 아사노 제강, 미쓰비시 제철(현 황해 제철 연합 기업소), 도요 제철이 합병되어 관민 합작 일본제철(닛테츠)이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영 제철소는 '''야하타 제철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사건은 제철 대합동이라고 불리며, 닛테츠는 국내 철강 생산 점유율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태평양 전쟁 중 야하타 제철소는 일본 압연 강철 생산의 24%를 담당할 정도로 중공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0][11]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전략 폭격 목표가 되었고, 1944년 6월 야하타 폭격이 시작되었다.[10][11] 1945년 8월 9일에는 두 번째 원자 폭탄 투하 목표 지점으로 지정되었으나, 짙은 구름으로 인해 투하 목표가 나가사키로 변경되었다.[12][13][14]
2. 5. 전후 복구와 발전 (1945년 이후)
여러 차례의 확장과 기업 개편을 거쳐 현재 이 제철소는 일본제철(이전에는 세계 최대의 철강 생산 업체[15])이 소유하고 있으며, 큐슈의 자동차 제조업체에 대한 공급 기지로서 수출 시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16][17]3. 기술 발전
1912년까지 야하타 제철소는 일본 선철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다.[7] 코크스, 철, 강철 설비를 갖춘 수직적 통합 제철소였던 야하타는 이 시기에 일본 강철 생산량의 80~90%를 담당했다.[4][9] 에너지 효율은 동력원을 증기에서 전기로 전환하면서 크게 향상되었는데, 강철 1톤 생산당 석탄 소비량은 1920년 4톤에서 1933년 1.58ton으로 감소했다.[4] 철광석은 주로 중국과 한국에서 수입했다.[9]
3. 1. 초기 기술 도입
일본은 개항과 함께 서양식 반사로를 도입하여 재래식 타타라 시스템을 대체하기 시작했다.[3]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철광이 있는 이와테현 가마이시 등지에 고로가 건설되었다.[2][3]1901년 2월 5일, 독일 엔지니어링 회사 구테 호프눙스휘테가 설계하고 제작한 히가시다 제1고로가 야하타에서 가동을 시작했다.[2] 그러나 생산량의 저품질, 코크스 소비량 대비 제강 생산량이 높은 비율, 잦은 고장 등 여러 문제로 인해 다음 해에 가동이 중단되었다.[4][5] 이로 인해 독일 자문관 전원이 해고되었고, "일본 야금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로 가게요시를 포함한 일본인 기술자들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2][6][7] 초기 국영 제철소는 수익성이 좋지 않아 정부 보조금에 의존해야 했다.[8]
3. 2. 일본 기술자들의 노력과 기술 자립
"일본 야금의 아버지" 노로 가게요시는 고로를 개량하고 조업 방식을 개선하여 제철소의 효율을 높였다.[2][6][7] 1918년에는 야하타 제철소의 기술자인 구로다 다이조(黒田泰造)가 구로다 코크스 오븐(黒田式コークス炉)을 발명했는데, 이는 부산물을 회수하고 에너지 재활용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혁신적인 에너지 절약형 오븐이었다.[4] 이 오븐은 코크스 처리 수율도 높였다. 1933년 야하타 제철소의 8번째 코크스 오븐은 독일의 최신 코크스 오븐과 거의 동등한 에너지 효율을 보였다.코크스 오븐과 고로에서 발생한 가스를 재사용하는 등 에너지 재활용 기술이 활용되어 공장의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강철 1톤 생산당 석탄 소비량은 1924년 3.7kg에서 1933년 1.58kg으로 크게 감소했다. 이러한 에너지 절약 및 재활용 기술은 일본 강철 기술자들에게 기본이 되었고, 1962년 전로 폐가스 냉각 및 청정 시스템 발명으로 이어졌다.
3. 3. 기술 혁신과 현대화
1913년에는 시멘트 제조를 시작했고, 1917년에는 전기로 제강법을 도입했다.[4] 1922년에는 주석 도금 강판 제조를 시작했다.[4]1916년 5월 1일, 댐이 붕괴되어 마을과 공장 대부분이 침수되고 수백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1918년 야하타 제철소의 기술자인 구로다 타이조(黒田泰造, 1883-1961)가 발명한 재생 연소 장치를 통해 부산물을 회수하는 구로다 코크스 오븐(黒田式コークス炉)은 에너지 재활용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혁신적인 에너지 절약형 오븐이었다. 이 오븐은 부산물 처리를 개선하고 코크스 처리 수율을 높였다. 1933년까지 야하타 제철소의 8번째 코크스 오븐의 에너지 효율은 독일의 가장 진보된 코크스 오븐과 거의 동등했다. 코크스 품질 개선은 제철 에너지 효율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고, 코크스 오븐과 고로에서 발생한 가스를 재사용하는 등 에너지 재활용 기술이 활용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공장의 에너지 소비가 감소했다. 강철 1톤 생산당 석탄 소비량은 1924년 3.7kg에서 1933년 1.58kg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에너지 절약 및 재활용에 대한 구로다의 아이디어는 일본 강철 기술자들에게 기본이 되었다. 1962년, 이러한 기술 유산은 야하타 제철소(야하타 제철소의 후신)에서 발명된 가장 중요한 혁신 중 하나인 전로 폐가스 냉각 및 청정 시스템을 만들어냈다.[4]
4. 사회적 영향
야하타 제철소는 산업 발전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도 여러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1917년 3월에는 장기간에 걸친 뇌물 수수 사실이 드러난 관영 야하타 제철소 사건이 발생하여 오시카와 노리요시 장관이 자살하고 관계자 110명이 체포되었다.[29] 당시 검사총장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이 조사 및 기소에 참여했다.
1966년에는 야하타 제철 사건의 최고재판소 판결을 통해 기업의 정치 헌금이 영리 법인의 정치 활동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4. 1. 산업 발전 기여
야하타 제철소는 일본 메이지 시대 이후 중공업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01년 독일 기술로 건설된 히가시다 제1고로는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본 야금의 아버지" 노로 가게요시를 비롯한 일본 기술자들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생산성을 향상시켰다.[2][4][5][6][7]1912년까지 일본 선철 생산량의 80%를 담당했으며,[7] 코크스, 철, 강철 설비를 갖춘 수직적 통합 제철소로서 일본 강철 생산량의 80~90%를 차지했다.[4][9] 특히, 증기에서 전기로 동력원을 전환하면서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여, 1920년 강철 1톤 생산에 4톤의 석탄을 소비하던 것을 1933년에는 1.58톤으로 줄였다.[4]
1918년에는 야하타 제철소의 기술자인 구로다 타이조가 개발한 구로다 코크스 오븐을 통해 에너지 재활용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부산물 회수, 코크스 처리 수율 향상, 코크스 오븐 및 고로 발생 가스 재사용 등을 통해 에너지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33년에는 독일의 최첨단 코크스 오븐과 거의 동등한 수준의 에너지 효율을 달성했다.[4]
야하타 제철소는 쇼와 시대에도 중공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지속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략 폭격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10][11]
현재 일본제철의 소유인 야하타 제철소는 큐슈 지역 자동차 제조업체에 철강을 공급하며 수출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16][17]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메이지 시대 일본 산업화에 기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18][19]
또한, 야하타 제철소와 관련된 시설들은 다음과 같이 역사적, 기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온가강 수원지 펌프실: 세계 유산 구성 자산
- 가와치 저수지: 토목학회 선정 토목 유산으로 인정받은 "가와치 저수지 제방"과 "미나미카와치 다리"를 포함
- 구로가네 선: 근대화 산업 유산 구성 자산
4. 2. 정치/사회적 사건
- 1917년 3월, 장기간에 걸친 증뢰(贈賂)・수뢰(受賂) 사실이 드러난 관영 야하타 제철소 사건이 발생하여, 장관 오시카와 노리요시는 자살하고, 관계자 110명이 체포되었다. 당시에는 기소 편의주의가 아직 채택되지 않았으며, 검사총장 히라누마 기이치로, 검찰관 오바라 나오, 고바야시 요시로 등이 조사 및 기소에 참여했다.[29]
- 1966년, 야하타 제철 사건의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해, 기업에 의한 정치 헌금이 영리 법인의 정치 활동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4. 3. 한국과의 관계
일제 강점기, 야하타 제철소는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 징용되어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곳이다. 철광석 등 상당 부분의 자원이 한국에서 수입되었다.[9]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경제 발전을 위해 제철 산업 육성이 필요했고, 1960년대 후반 포스코(POSCO) 설립 과정에서 야하타 제철소의 경험과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야하타 제철소는 포스코에 기술 제휴를 제공하고 기술자 연수를 지원하는 등 포스코의 초기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야하타 제철소는 한국 철강 산업 발전에 있어 중요한 참고 사례이자, 동시에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의 아픈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로 남아있다.
5. 근대화 산업 유산
메이지 시대 20년대에 급증한 철강 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1897년, 지쿠호 탄전에 인접한 야하타에 제철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구테호프눙스휘테(GHH)사에 설계를 의뢰하고 기술 지도를 받았다. 4년의 건설 기간을 거쳐 1901년 2월 동전 제1 고로가 가동을 시작했다.[2] 그러나, 여러 문제와 자금난으로 인해 다음 해인 1902년 7월에는 가동이 중단되었고, 가마이시 광산 다나카 제철소에서 일본 최초로 코크스를 이용한 선철 생산에 성공한 노로 가게요시에게 재건을 맡겼다.[6][7] 노로는 고로를 개량하고 새로운 코크스 로를 건설하여 1904년 7월부터 본격적인 가동을 재개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고로 조업 기술이 확립되어, 일본의 산업 근대화(중공업화)가 달성되었다. 제철소는 1930년대에 걸쳐 확장되었고, 주변에도 많은 산업이 집적되어 기타큐슈 공업 지대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야하타 제철소는 일본 산업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일본 메이지 유신 산업 혁명 유산 중 하나로 등재되었다.[18][19]
5. 1. 세계 유산 등재
2014년, 야하타 제철소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일본 메이지 유신 산업 혁명 유산 중 하나로 등재되었다.[18] 이는 바쿠마츠 및 메이지 시대의 일본 산업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유적지들의 연쇄 등재였다.[19] 등재된 주요 시설은 다음과 같다.- '''구 본부 사무소'''
1899년에 건설된 붉은 벽돌 조적조 건물이다. 제철소 기술자(야마구치 한로쿠로 추정)가 설계했으며, 퀸 포스트 트러스 구조의 골조, 영국식 벽돌 쌓기, 일본식 기와 지붕, 흰 회반죽 마감 내벽, 리놀륨 바닥재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1922년까지 본사무소로 사용된 후 철강 연구소로 사용되었다. 2015년 4월에는 전망 공간이 마련되어 원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18]
- '''수선 공장'''
1900년에 건설된 철골 구조 건물로, 설계 및 사용 강재는 독일 구테호프눙스휘테(GHH)사에서 제공했다. 현존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골 건축물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50×30미터 크기였으나, 1905년, 1908년, 1917년 세 차례에 걸쳐 동쪽으로 증축되었다. 사용된 강재가 독일제에서 점차 일본제로 바뀌면서 일본 제철 기술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현재는 신일본제철의 협력 회사인 산큐에서 제철소 기계 수선 및 부재 제작을 담당하고 있으며, 가동 유산으로 세계 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 '''구 단야 공장'''
1900년에 건설된 철골 구조 건물이다. 설계 및 사용 강재는 GHH사에서 제공했다. 처음에는 단조품을 제조했으며, 다이쇼 시대에 현재 위치로 이전한 후에는 제품 시험소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창업 당시 자료를 보관하는 사료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 외에도, 야하타 제철소 관련 시설로 '''온가강 수원지 펌프실''' 등이 세계 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5. 2. 보존 및 활용
'''근대 산업 유산'''(The Imperial Steel Works, Japan (ID1484-022))으로 인정받고 있다.1899년에 건설된 붉은 벽돌 조적조 건물이다. 제철소 기술자(야마구치 한로쿠라는 설이 유력)에 의한 설계로, 골조는 퀸 포스트 트러스 구조, 벽돌 쌓기는 영국식인 반면, 지붕은 일본식 기와, 내벽은 복도와 실내 모두 흰 회반죽 마감, 복도는 처음부터 리놀륨 바닥재였다. 1922년까지 본사무소로 사용된 후, 철강 연구소로 사용되었다. '''세계 유산'''이다. 견학은 불가능하지만, 2015년 4월에 전망 공간이 마련되어 원경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등록 후 개인 이용에 한해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세계 유산 등록 후에 내진 보강 공사와 내벽의 회반죽 재시공, 옛 사진 분석에 의한 나무 문과 창틀의 도장을 갈색에서 흰색으로 변경했다.[18][19]
1900년에 건설된 철골 구조 건물이다. 설계 및 사용 강재는 GHH사에 의한 것이다. 현존하는 일본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철골 건축물이다. 전체 길이 140미터, 최대 폭 41미터이다. 당초에는 50×30미터에 불과했지만, 1905년, 1908년, 1917년과 3번에 걸쳐 동쪽으로 연장하는 방식으로 증축되었다. 사용된 강재가 독일제에서 점차 일본제로 바뀌면서, 일본의 제철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외벽재도 처음에는 붉은 벽돌이었지만, 마지막 증축 시에는 광재 벽돌이 사용되었다(전후에 일부 함석 처리가 되었다). 단면은 볼록형, 내부는 트인 공간이며, 개설 당시부터 설치되어 있는 천장 크레인이 있다. 채광을 위해 창문이 크게 만들어졌으며, 높은 창문도 있다. 지붕은 둥근 어묵형이다. 현재는 신일본제철의 주요 협력 회사 중 하나인 산큐에 의해 제철소에서 사용하는 기계의 수선 및 부재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현재도 가동 중이다. '''세계 유산'''(가동 유산)이다. 세계 유산의 대상은 메이지 시대까지이며, 마지막 증축은 다이쇼 시대이지만,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견학은 불가능하다.
1900년에 건설된 또 다른 철골 구조 건물은 GHH사가 설계 및 강재를 제공했다. 제철소에서 사용할 단조품을 제조했으며, 다이쇼 시대에 현재 위치로 이전한 후에는 제품 시험소로 사용되었다. 전체 길이 55미터, 최대 폭 21.7미터. 처음에는 25×15미터에 불과했지만, 1909년과 1928년에 걸쳐 두 차례 서쪽과 남쪽에 증축되었다. 바닥은 처음부터 타일로 덮여 있다. 채광을 위해 창문이 크게 만들어져 있다. 지붕은 둥근 반원형으로, 엄폐호와 같은 형태이다. 현재는 창업 당시부터의 자료를 보관하는 사료실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 유산'''이다. 세계 유산 대상은 메이지 시대까지이며, 마지막 증축은 쇼와 시대에 이루어졌지만,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견학은 불가능하다.
2014년, 야하타 제철소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일본 메이지 유신 산업 혁명 유산 중 하나로 등재되었으며, 이는 바쿠마츠 및 메이지 시대의 일본 산업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유적지들의 연쇄 등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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