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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디케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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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우리디케 2세는 '아데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필리포스 3세의 아내이자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비였다. 그녀는 어머니 키나네에게 전술을 배우고 용감하게 성장하여 정치에 참여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권력 투쟁에 휘말렸다. 페르디카스 사후 트리파라디소스 군회에서 섭정 임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올림피아스와 대립하다가 체포되어 자결했다. 이후 카산드로스에 의해 장례가 치러지고 베르기나에 안장되었다. 베르기나 왕묘 발굴 과정에서 그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되었으나, 논란이 있다.

2. 생애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가 여러 장군에게 공격받고 살해되자,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새로운 체제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트리파라디소스 회의)가 열렸다. 에우리디케는 페이톤과 아리다이오스의 새로운 섭정 임명에 자신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력이 부족했던 두 섭정은 사임했고, 필리포스 2세 때부터 섬겨온 중신 안티파트로스가 다음 섭정 후보로 추천되었다. 에우리디케는 아스클레피오도로스가 대필한 안티파트로스 탄핵 연설을 군 집회에서 발표하여 군인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안티파트로스는 간신히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러나 장군들과 기병들의 지지를 받은 안티파트로스는 소동을 진압하고 섭정에 취임하여, 에우리디케의 권력 장악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31][32]

그 후, 에우리디케는 남편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돌아왔다.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병사하자 에우리디케는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안티파트로스가 후계자로 지명한 폴리페르콘, 대왕의 모후 올림피아스, 그리고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이라 생각했던 카산드로스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 이때 에우리디케는 카산드로스와 손을 잡았다. 에우리디케는 폴리페르콘에게 군대를 카산드로스에게 넘기라는 편지를 쓰고, 기원전 317년 올림피아스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에피로스에 있던 올림피아스가 알렉산드로스 4세를 옹립하고 귀국하자, 병사들은 에우리디케를 버리고 올림피아스에게 항복했다. 에우리디케는 남편과 함께 암피폴리스로 가던 중 붙잡혔다.[33][34]

에우리디케는 올림피아스에 의해 남편과 함께 좁은 감옥에 감금되었다. 올림피아스는 에우리디케에게 칼, 포승줄, 몇 개의 독이 든 당근을 보내 죽음을 명령했다. 에우리디케는 올림피아스가 자신과 비슷한 운명을 겪지 않기를 기도했다. 이후 살해된 남편의 몸에 난 상처를 닦고 “운명을 한탄할 것도 없고, 불운의 무게에 굴하지도 않겠다”[35]라는 말을 남기고 올가미에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었다.[36][37]

그 후, 카산드로스가 에우리디케와 필리포스 3세, 키나네를 위해 장례식을 치렀고, 그들은 베르기나의 왕묘에 매장되었다.[38]

2. 1. 초기 생애

에우리디케는 원래 '아데아'(Adea)라는 이름이었지만[27],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우리디케로 바뀌었다. 그녀는 군사적 소양을 갖춘 어머니 키나네에게서 자라 전술을 배웠고, 씩씩한 여성으로 성장했다. 이후 올림피아스와 다툴 때는 갑옷을 입고 싸웠다고 한다.[28][29]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에우리디케는 키나네와 함께 아시아로 건너갔다. 그러나 키나네는 바빌론 회의 결과 섭정이 된 페르디카스의 동생 알케타스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군대가 분노하자, 페르디카스는 그 보상으로 에우리디케를 필리포스 3세와 결혼하게 했다.[30] 필리포스 3세는 정신 장애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에우리디케가 정치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2. 2. 필리포스 3세와의 결혼

에우리디케는 원래 '아데아'라는 이름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에우리디케로 바뀌었다.[27] 그녀는 군사적 소양이 있었던 어머니 키나네에게서 전술을 배워 용감한 여성으로 성장하였다.[28][29]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차기 왕을 결정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에우리디케는 키나네와 동행하여 아시아로 건너갔으나, 키나네는 바빌론 회의 결과 섭정이 된 페르디카스의 동생 아르케타스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군대가 분개하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마도 페르디카스의 주선으로) 에우리디케는 왕위에 오른 대왕의 이복형제 필리포스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30] 필리포스 3세는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에우리디케가 정치를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2. 3. 권력 투쟁

에우리디케는 원래 '아데아'(''Adea'')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27] 언제부터인가 에우리디케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녀는 군사적 소양을 갖춘 어머니 키나네에게서 전술을 배우며 씩씩하게 성장했다. 훗날 올림피아스와 대립할 때에는 갑옷을 입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28][29]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차기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졌다. 에우리디케는 어머니 키나네와 함께 아시아로 건너갔으나, 키나네는 바빌론 회의 결과 섭정이 된 페르디카스의 동생 알케타스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군대가 분개하자, 에우리디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형제인 필리포스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30] 필리포스 3세는 정신 장애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에우리디케가 정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가 살해된 후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새로운 체제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트리파라디소스 군회)가 열렸다. 에우리디케는 페이톤과 아리다이오스의 섭정 취임에 대해 자신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력이 부족했던 두 섭정은 사임하고, 필리포스 2세 시절부터 왕을 섬겨온 안티파트로스가 다음 섭정 후보로 거론되었다. 에우리디케는 아스클레피오도로스가 대필한 안티파트로스 탄핵 연설을 군 집회에서 발표하여 병사들을 동요하게 만들었으나, 장군들과 기병들의 지지를 받은 안티파트로스가 섭정에 취임하면서 에우리디케의 권력 장악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31][32]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자 에우리디케는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 폴리페르콘, 올림피아스, 카산드로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자, 에우리디케는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17년, 에우리디케는 폴리페르콘에게 군대를 카산드로스에게 넘기라는 서신을 보내고 올림피아스와의 전투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에피로스에 있던 올림피아스가 알렉산드로스 4세를 옹립하고 귀국하자, 병사들은 에우리디케를 버리고 올림피아스에게 항복했다. 에우리디케는 남편과 함께 암피폴리스로 도주하던 중 붙잡히고 말았다.[33][34]

에우리디케는 올림피아스에 의해 남편과 함께 좁은 감옥에 갇혔다. 올림피아스는 에우리디케에게 칼, 포승줄, 그리고 독이 든 당근을 보내 죽음을 강요했다. 에우리디케는 올림피아스가 자신과 같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지 않기를 기도한 뒤, 이미 살해된 남편의 시신에서 상처를 닦아내고 “운명을 한탄할 것도 없고, 불운의 무게에 굴하지도 않겠다”[35]라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감했다.[36][37]

2. 4. 올림피아스와의 대립과 죽음

에우리디케는 어머니 키나네에게서 군사적 소양과 전술을 배워 용감한 여성으로 성장했으며, 올림피아스와 싸울 때 갑옷을 입고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28][29]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에우리디케는 키나네와 함께 아시아로 건너갔다. 그러나 키나네는 바빌론 회의의 섭정 페르디카스의 동생 아르케타스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군대가 분개하자, 에우리디케는 필리포스 3세와 결혼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30] 필리포스 3세는 정신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에우리디케가 정치 활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회의에서 에우리디케는 새로운 섭정 임명에 자신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섭정 후보였던 안티파트로스를 탄핵하는 연설을 했지만, 안티파트로스는 장군들과 기병들의 지지로 섭정에 취임하여 에우리디케의 권력 탈취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31][32]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자, 에우리디케는 카산드로스와 손을 잡고 폴리페르콘올림피아스에 대항했다. 기원전 317년 올림피아스와 전투를 벌였으나, 알렉산더 4세를 받든 올림피아스에게 병사들이 항복하면서 패배했다. 에우리디케는 남편과 함께 암피폴리스로 가던 중 붙잡혀 좁은 감옥에 감금되었다.[33][34]

올림피아스는 에우리디케에게 칼, 포승줄, 독미나리를 보내 죽음을 명령했다. 에우리디케는 올림피아스가 자신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기를 기도하고,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5][36][37]

이후 카산드로스가 에우리디케와 필리포스 3세, 키나네의 장례를 치르고 베르기나의 왕묘에 매장했다.[38]

2. 5. 사후

에우리디케는 올림피아스에 의해 남편 필리포스 3세와 함께 좁은 감옥에 갇혔다. 올림피아스는 에우리디케에게 칼, 포승줄, 독이 든 당근을 보내 죽음을 명령했다. 에우리디케는 올림피아스가 자신과 비슷한 운명을 겪기를 기도한 후, 이미 살해된 남편의 몸의 상처를 닦고 “운명을 한탄할 것도 없고, 불운의 무게에 굴하지도 않겠다”[35]라는 말을 남기고 올가미에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6][37]

그 후, 카산드로스는 에우리디케와 필리포스 3세, 키나네를 위해 장례식을 치렀고, 그들은 베르기나의 왕묘에 매장되었다.[38] 1977년,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는 대형 고분을 발견하고 그곳에 있는 무덤을 발굴했다. 2번 무덤은 일반적으로 필리포스 2세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의 매장지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에우리디케와 필리포스 3세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17] 이러한 주장은 무덤에서 4세기 도자기 물건이 발견된 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의 시기를 암시하는 2번 무덤의 아시아 건축 및 예술적 특징, 그리고 필리포스 2세,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그들의 딸인 에우로파가 1번 무덤에 묻혔다는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18] 더불어, 여성의 매장지 근처에서 군사 물품과 아마존 이미지가 발견된 것은 그녀가 전사로 매장되었음을 시사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무기가 남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에우리디케가 실제로 전장에서 싸웠다는 증거는 없다고 주장한다.[1]

3. 베르기나 왕묘 발굴

1977년,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는 대형 고분을 발견하고 그곳에 있는 무덤을 발굴했다. 2번 무덤은 일반적으로 필리포스 2세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의 매장지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2번 무덤이 실제로는 에우리디케필리포스 3세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17] 이 주장은 무덤에서 4세기 도자기 물건이 발견된 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시기를 암시하는 2번 무덤의 아시아 건축 및 예술적 특징, 그리고 필리포스 2세,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그들의 딸인 에우로파가 1번 무덤에 묻혔다는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18] 더불어, 여성의 매장지 근처에서 군사 물품과 아마존 이미지가 발견된 것은 에우리디케 2세가 전사로 매장되었음을 시사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무기가 남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에우리디케 2세가 실제로 전장에서 싸웠다는 증거는 없다고 주장한다.[1]

참조

[1] 논문 Commemoration of a Royal Woman as a Warrior: The Burial in the Antechamber of Tomb II at Vergina https://muse.jhu.edu[...] 2017-05-17
[2] 서적 Bibliotheca
[3] 간행물 Mythologization and rationalization of the image of the famous Queen of Macedonia https://en.nbpublish[...] 2022
[4] 논문 The Career of Adea-Eurydike https://www.jstor.or[...] 1987
[5] 서적 An Exceptional Argead Couple: Philip II and Olympias Routledge 2019
[6] 서적 Women in Hellenistic Egypt: from Alexander to Cleopatra https://hdl.handle.n[...] Schocken Books 1984
[7] 문서 The grave relief of Adea, daughter of Cassander and Cynnana 2008
[8] 논문 Transmitters and Representatives of Power: Royal Women in Ancient Macedonia https://www.jstor.or[...] 2000
[9] 서적 The Encyclopedia of Ancient History https://onlinelibrar[...] Wiley 2013-01-21
[10] 서적 Bibliotheca
[11] 문서 Olympias, Adea Eurydice, and the end of the Argead dynasty 1994
[12] 논문 Olympias and the Image of the Virago https://www.jstor.or[...] 1993
[13] 서적
[14] 서적 Epitome of Pompeius Trogus
[15] 서적 Varia Historia
[16] 서적
[17] 웹사이트 Vergina (Tomb of Philip II) https://www.brown.ed[...] 2023-03-21
[18] 문서 “The Lameness of King Philip II and Royal Tomb I at Vergina, Macedonia.”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null
[19] 서적 cod. 92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비블리오테카 http://www.tertullia[...]
[28] 서적
[29] 서적 Stratagemata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유스티누스, XIV 4
[37] 서적 아이리아노스, XIII 36
[38] 서적 디오도로스, XIX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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