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페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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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리페르콘은 고대 마케도니아의 군인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 치하에서 복무했으며, 이수스 전투 이후 팔랑크스 대대 지휘관을 역임했다. 안티파트로스의 후계자로 섭정 지위에 올랐으나, 카산드로스와의 대립으로 인해 몰락했다. 폴리페르콘은 그리스 도시들의 자유를 선언했지만, 결국 카산드로스에게 패배하여 펠로폰네소스로 도망쳤다. 그는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고 펠로폰네소스를 지배했으나, 헤라클레스를 살해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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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페르콘 | |
---|---|
기본 정보 | |
이름 | 폴리페르콘 |
로마자 표기 | Polyperchon |
다른 이름 | 폴리스페르콘 |
생애 | |
출생 | 기원전 390년경 |
사망 | 기원전 303년 이후 |
활동 시기 | 기원전 4세기 |
군사 경력 | |
복무 | 마케도니아 |
계급 | 장군 |
참여 전쟁 | 카이로네이아 전투 페르시아 원정 람미아 전쟁 |
2. 초기 생애와 군 경력
폴리페르콘은 에피루스의 팀파이아 출신 시미아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 아래에서 복무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오랜 원정에 동행했다. 333년 이수스 전투 이후, 폴리페르콘은 팔랑크스의 팀파이아 대대 지휘권을 받았고 324년까지 유지했다.
바빌론으로 돌아온 후, 폴리페르콘은 (다른 참전 용사들과 함께) 크라테로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로 보내졌지만, 323년 알렉산드로스 사망 당시에는 킬리키아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크라테로스는 마케도니아 섭정인 안티파트로스를 대체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폴리페르콘은 크라테로스가 통치할 수 없을 경우 그를 계승할 예정이었다. 폴리페르콘과 크라테로스는 그리스로 이동했다.
크라테로스의 부관으로서, 폴리페르콘은 마케도니아의 총독 역할을 했고, 라미아 전쟁에서 안티파트로스가 그리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 폴리페르콘은 이전까지 거의 무적이라고 여겨졌던 테살리아 기병대 메논을 격파했다.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폴리페르콘은 안티파트로스가 전 제국에 대한 자신의 섭정을 주장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이동하는 동안 마케도니아에 남았다.
2. 1.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폴리페르콘은 에피로스의 티파이아 출신의 심미아스의 아들로,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더 3세를 보좌하였다.[11]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전 여정을 같이 하였으며, 기원전 333년 이소스 전투 이후에는 티파니아 팔랑크스 부대의 사령관직을 맡았다.[11]기원전 323년, 폴리페르콘은 크라테로스의 부관으로서 제대 군인을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귀환시키는 임무를 맡았다.[7] 바빌론으로 돌아온 후, 폴리페르콘은 크라테로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로 보내졌지만, 알렉산드로스 사망 당시에는 킬리키아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크라테로스는 마케도니아 섭정인 안티파트로스를 대체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폴리페르콘이 그를 계승할 예정이었다.
크라테로스의 부관으로서, 폴리페르콘은 마케도니아의 총독 역할을 했고, 라미아 전쟁에서 안티파트로스가 그리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테살리아의 기병대메논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폴리페르콘은 안티파트로스가 전 제국에 대한 자신의 섭정을 주장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이동하는 동안 마케도니아에 남았다.
2. 2. 마케도니아 귀환과 라미아 전쟁
폴리페르콘은 에피루스의 팀파이아 출신 시미아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 아래에서 복무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오랜 원정에 동행했다. 333년 이수스 전투 이후, 폴리페르콘은 팔랑크스의 팀파이아 대대 지휘권을 받았고 324년까지 유지했다.바빌론으로 돌아온 후, 폴리페르콘은 크라테로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로 보내졌지만, 323년 알렉산드로스 사망 당시에는 킬리키아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크라테로스는 마케도니아 섭정인 안티파트로스를 대체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폴리페르콘은 크라테로스가 통치할 수 없을 경우 그를 계승할 예정이었다. 폴리페르콘과 크라테로스는 그리스로 이동했다.
크라테로스의 부관으로서, 폴리페르콘은 마케도니아의 총독 역할을 했고, 라미아 전쟁에서 안티파트로스가 그리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 폴리페르콘은 이전까지 거의 무적이라고 여겨졌던 테살리아 기병대 메논을 격파했다.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폴리페르콘은 안티파트로스가 전 제국에 대한 자신의 섭정을 주장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이동하는 동안 마케도니아에 남았다.
3. 디아도코이 전쟁과 섭정 지위
기원전 323년, 폴리페르콘 일행들이 킬리키아에 이르렀을 때 알렉산더 3세가 갑작스럽게 병사했다.[8] 크라테로스와 폴리페르콘은 라미아 전쟁에서 고전 중인 안티파트로스의 원군으로 그리스를 향해 계속 진군했다. 크라테로스 휘하의 2인자로서, 그는 마케도니아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안티파트로스가 라미아 전투에서 그리스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폴리페르콘은 멤논이 이끄는 테살리아의 기병대를 물리쳤는데, 당시까지는 실질적으로 불패의 기병으로 알려져 있었다.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폴리페르콘은 마케도니아에 남았지만, 안티파트로스는 전 제국에 걸쳐 섭정이 되기 위해 소아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등이 페르디카스와 대립했을 때, 폴리페르콘은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 의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후방의 수비를 맡았다.[8]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병사하면서, 폴리페르콘은 제국의 섭정과 전군 최고사령관에 지명받았다.[9] 그러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그것을 반대하며 양측은 전쟁 상태에 빠졌다. 그런 분쟁은 다른 디아도코이에게로 번져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은 카산드로스를 대적하기 위해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고 그들과 대항했다.
한편 폴리페르콘은 그리스 도시들을 확실하게 지배하는데 성공했고, 그리스 도시들의 자유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는 기원전 318년에 안티고노스에 의해 격파당했고, 그 해에 카산드로스가 아테네를 손에 넣었다. 곧이어 폴리페르콘은 카산드로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나 에페이로스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대왕의 왕비 록사네가 어린 아들 알렉산더 4세와 합류했다. 그는 올림피아스와 에피로스의 왕 아이아키데스와의 동맹을 체결했다. 이렇게 힘을 얻게 된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였고, 카산드로스로 적대적 관계였던 필리포스 3세와 왕비 에우리디케 2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아 처형했다. 그러나 직후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돌아온 카산드로스에게 패배를 당하며, 기원전 316년에 잡혀 처형당했다. 동시에 카산드로스는 록사네와 알렉산더 4세를 연금했다.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로 도망을 가서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파기한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고, 코린토스와 시키온을 제외한 모든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지배 하에 두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자,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서자 헤라클레스를 카산드로스와 협상 수단으로 폴리페르콘에게 보냈다. 그러나 카산드로스에 매수된 폴리페르콘은 그 소년을 기원전 309년에 살해했다.[10] 그 후, 죽을 때까지 몇 년 동안 펠로폰네소스를 지배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부가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3. 1. 안티파트로스의 후계자
기원전 323년 폴리페르콘 일행이 킬리키아에 도착했을 때 알렉산더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8] 크라테로스와 폴리페르콘은 라미아 전쟁에서 고전 중인 안티파트로스의 원군으로 그리스를 향해 계속 진군했다. 크라테로스 휘하의 2인자로서 마케도니아 책임자 역할을 했으며, 안티파트로스가 라미아 전투에서 그리스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폴리페르콘은 멤논이 이끄는 테살리아의 기병대를 물리쳤는데, 당시까지는 실질적으로 불패의 기병으로 알려져 있었다.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폴리페르콘은 마케도니아에 남았지만, 안티파트로스는 전 제국에 걸쳐 섭정이 되기 위해 소아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등이 페르디카스와 대립했을 때, 폴리페르콘은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 의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후방의 수비를 맡았다.[8]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폴리페르콘은 제국의 섭정과 전군 최고사령관에 지명받았다.[9] 그러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그것을 반대하며 양측은 전쟁 상태에 빠졌다. 두 사람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고,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모든 후계자들 사이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다른 디아도코이에게로 번져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은 카산드로스를 대적하기 위해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고 그들과 대항했다.
폴리페르콘은 처음에는 그리스 도시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여 그들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는 기원전 318년에 안티고노스에 의해 격파당했고, 그 해에 카산드로스가 아테네를 손에 넣었다. 곧이어 폴리페르콘은 카산드로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나 에페이로스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대왕의 왕비 록사네, 어린 아들 알렉산더 4세와 합류했다. 그는 올림피아스와 에피로스의 왕 아이아키데스와의 동맹을 체결했다. 이렇게 힘을 얻게 된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였고, 카산드로스로 적대적 관계였던 필리포스 3세와 왕비 에우리디케 2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아 처형했다. 그러나 직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돌아온 카산드로스에게 패배를 당하며, 기원전 316년에 잡혀 처형당했다. 동시에 카산드로스는 록사네와 알렉산더 4세를 연금했다.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로 도망을 가서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파기한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고, 코린토스와 시키온을 제외한 모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배 하에 두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자,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서자 헤라클레스를 카산드로스와 협상 수단으로 폴리페르콘에게 보냈다. 그러나 카산드로스에 매수된 폴리페르콘은 그 소년을 기원전 309년에 살해했다.[10] 그 후, 죽을 때까지 몇 년 동안 펠로폰네소스를 지배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부가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3. 2. 카산드로스와의 대립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폴리페르콘은 크라테로스와 함께 라미아 전쟁에서 고전 중인 안티파트로스의 원군으로 그리스를 향해 진군했다.[8] 그는 크라테로스 휘하의 2인자로서 마케도니아 책임자 역할을 했으며, 안티파트로스가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폴리페르콘은 멤논이 이끄는 테살리아 기병대를 물리치기도 했다.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폴리페르콘은 마케도니아에 남았고, 안티파트로스는 전 제국의 섭정이 되기 위해 소아시아로 떠났다.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등이 페르디카스와 대립했을 때, 폴리페르콘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후방 수비를 맡았다.[8]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병사하면서 폴리페르콘은 제국의 섭정과 전군 최고사령관에 지명받았다.[9] 그러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그것을 반대하며 양측은 전쟁 상태에 빠졌다. 이 분쟁은 다른 디아도코이에게로 번져,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은 카산드로스를 대적하기 위해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었다.[9]
폴리페르콘은 그리스 도시들의 자유를 선언하며 지배력을 확보하려 했으나, 기원전 318년 그의 함대는 안티고노스에게 격파당했고, 같은 해 카산드로스가 아테네를 손에 넣었다. 곧이어 폴리페르콘은 카산드로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나 에페이로스로 달아났다.[9] 그곳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왕비 록사네, 어린 아들 알렉산더 4세와 합류했다. 그는 올림피아스 및 에페이로스의 왕 아이아키데스와 동맹을 체결했다.
힘을 얻은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여 필리포스 3세와 왕비 에우리디케 2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처형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돌아온 카산드로스에게 패배하여 기원전 316년에 처형당했고, 카산드로스는 록사네와 알렉산더 4세를 연금했다.[9]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로 도망쳐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파기한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고, 코린토스와 시키온을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대부분을 지배했다.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서자 헤라클레스를 카산드로스와의 협상 카드로 폴리페르콘에게 보냈으나, 폴리페르콘은 카산드로스에 매수되어 기원전 309년 헤라클레스를 살해했다.[10] 이후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를 지배했지만, 정치적인 역할은 미미했다.
3. 3. 그리스 도시 정책과 몰락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폴리페르콘은 크라테로스와 함께 라미아 전쟁에서 고전 중인 안티파트로스를 지원하기 위해 그리스로 향했다.[8] 그는 멤논이 이끄는 테살리아 기병대를 물리치는 등 마케도니아군의 지휘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안티파트로스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폴리페르콘은 마케도니아에 남았고, 안티파트로스는 전 제국의 섭정이 되기 위해 소아시아로 이동했다.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가 페르디카스와 대립했을 때, 폴리페르콘은 그들에 의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후방 수비를 맡았다.[8]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폴리페르콘은 제국의 섭정이자 최고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9] 그러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는 이에 반대했고, 두 사람은 전쟁에 돌입했다. 이 분쟁은 다른 디아도코이에게도 번져,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고 카산드로스,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 동맹에 맞섰다.
폴리페르콘은 그리스 도시들의 자유를 선언하며 지배력을 확보하려 했으나,[9] 기원전 318년 그의 함대는 안티고노스에게 격파당했고, 카산드로스는 아테네를 장악했다. 폴리페르콘은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나 에페이로스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왕비 록사네, 아들 알렉산더 4세와 합류했다. 그는 올림피아스 및 에페이로스의 아이아키데스와 동맹을 맺었다.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여 필리포스 3세와 왕비 에우리디케 2세를 처형했지만, 기원전 316년 카산드로스에게 패배하여 처형당했다. 카산드로스는 록사네와 알렉산더 4세를 연금했다.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로 도망쳐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고 코린트와 시키온을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대부분을 지배했다.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서자 헤라클레스를 카산드로스와의 협상 카드로 폴리페르콘에게 보냈으나, 폴리페르콘은 기원전 309년 카산드로스에게 매수되어 헤라클레스를 살해했다.[10] 이후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를 지배했지만, 더 이상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3. 4. 올림피아스와의 동맹
기원전 323년 폴리페르콘 일행이 킬리키아에 도착했을 때 알렉산드로스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8] 크라테로스와 폴리페르콘은 라미아 전쟁에서 고전 중이던 안티파트로스의 원군으로 그리스를 향해 계속 진군했다.[8] 그는 마케도니아 책임자로서 안티파트로스가 라미아 전투에서 그리스 반란군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고, 멤논이 이끄는 테살리아 기병대를 물리쳤다.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폴리페르콘은 마케도니아에 남았고, 안티파트로스는 소아시아로 떠났다.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등이 페르디카스와 대립했을 때, 폴리페르콘은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 의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후방 수비를 맡았다.[8]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폴리페르콘은 제국의 섭정과 전군 최고사령관에 지명받았다.[9] 그러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그것에 반대하며 양측은 전쟁 상태에 빠졌고, 이 분쟁은 다른 디아도코이에게로 번져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은 카산드로스를 대적하기 위해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었다.[9]
폴리페르콘은 그리스 도시들을 확실하게 지배하는데 성공했고, 그리스 도시들의 자유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는 기원전 318년에 안티고노스에게 격파당했고, 그 해에 카산드로스가 아테네를 손에 넣었다. 곧이어 폴리페르콘은 카산드로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나 에페이로스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대왕의 왕비 록사네가 어린 아들 알렉산더 4세와 합류했다. 그는 올림피아스와 에피로스의 왕 아이아키데스와의 동맹을 체결했다.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였고, 카산드로스와 적대적 관계였던 필리포스 3세와 왕비 에우리디케 2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아 처형했다. 그러나 직후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돌아온 카산드로스에게 패배를 당하며, 기원전 316년에 잡혀 처형당했다. 동시에 카산드로스는 록사네와 알렉산더 4세를 연금했다.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로 도망을 가서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파기한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고, 코린토스와 시키온을 제외한 모든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지배 하에 두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자,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서자 헤라클레스를 카산드로스와 협상 수단으로 폴리페르콘에게 보냈다. 그러나 카산드로스에 매수된 폴리페르콘은 그 소년을 기원전 309년에 살해했다.[10] 그 후, 죽을 때까지 몇 년 동안 펠로폰네소스를 지배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부가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4. 펠로폰네소스 통치와 말년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로 도망쳐 그곳의 몇몇 요새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이전 동맹과 결별한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었다. 폴리페르콘은 섭정직을 안티고노스에게 넘겼다.[3] 폴리페르콘은 곧 코린토스와 시키온을 포함한 펠로폰네소스의 많은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다.[3] 311년 안티고노스와 그의 적들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고 소년 왕 알렉산드로스 4세와 그의 어머니가 살해된 이후, 폴리페르콘은 이 지역들을 유지했다.[3] 안티고노스와 다른 세력들 사이에 다시 전쟁이 발발하자,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에 대항하기 위한 협상 카드로 알렉산드로스 4세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헤라클레스를 폴리페르콘에게 보냈다.[3] 그러나 폴리페르콘은 안티고노스와 결별하기로 결심하고 309년에 그 소년을 살해했다.[3]
폴리페르콘의 사망 날짜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기원전 304년에 살아있었던 것으로 마지막 언급이 되었지만,[3] 그 이후의 언급이 없는 것은 디오도로스의 후속 서술이 유실되었고 다른 기록이 이 시기를 충분히 상세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의 『피로스』 8.3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생존했을 가능성이 있다.[4]
폴리페르콘은 알렉산드로스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는 디아도코이 전쟁에 참여하여 처음에는 아버지 밑에서, 그 다음에는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맺었다.
4. 1. 안티고노스와의 동맹과 배신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로 도망쳐 그곳의 몇몇 요새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이전 동맹과 결별한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었다. 폴리페르콘은 섭정직을 안티고노스에게 넘겼다. 폴리페르콘은 곧 코린토스와 시키온을 포함한 펠로폰네소스의 많은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311년 안티고노스와 그의 적들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고 소년 왕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가 살해된 이후, 폴리페르콘은 이 지역들을 유지했다. 안티고노스와 다른 세력들 사이에 다시 전쟁이 발발하자,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에 대항하기 위한 협상 카드로 알렉산드로스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헤라클레스를 폴리페르콘에게 보냈다. 그러나 폴리페르콘은 안티고노스와 결별하기로 결심하고 309년에 그 소년을 살해했다.4. 2. 말년과 사망
폴리페르콘의 사망 날짜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기원전 304년에 살아있었던 것으로 마지막 언급이 되었지만,[3] 그 이후의 언급이 없는 것은 디오도로스의 후속 서술이 유실되었고 다른 기록이 이 시기를 충분히 상세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의 『피로스』 8.3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생존했을 가능성이 있다.[4]폴리페르콘은 알렉산드로스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는 디아도코이 전쟁에 참여하여 처음에는 아버지 밑에서, 그 다음에는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맺었다.
5. 평가 및 영향
5.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폴리페르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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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Marshals of Alexander''s Empire'
[2]
서적
'Antigonos the One-Eyed and the Creation of the Hellenistic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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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 Who in the Classic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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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ostile inaction? Antipater, Craterus, and the Macedonian regency
https://www.cambridg[...]
20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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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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ちくま学芸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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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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