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여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여칭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활동한 문신으로, 고려 시대에는 사헌 규정, 전라도 안렴사 등을 역임했고, 조선 개국 후에는 조전부사, 형조 판서, 지의정부사 등을 지냈다. 특히 태종 때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로 활동하며 위태로운 시기에 정도를 지켜 태종으로부터 전지와 노비를 하사받았으며, 세종은 그가 죽자 조회를 중단하고 정평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여칭은 청렴하고 강직하며, 학문에도 능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려의 전라도안찰사 - 유정현 (조선)
    유정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조선 개국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태종과 세종 초기에 걸쳐 재임하며 세종 시대 문화 융성에 기여했고, 대마도 정벌을 총괄했으나 탐욕스럽다는 평가도 있다.
여칭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여칭
원어 이름呂稱
출생일1351년
사망일1423년 3월 28일
본관함양(咸陽)
별명자 중부(仲父)
호 저곡(樗谷)
시호 정평(靖平)
국적고려조선
경력
주요 직위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형조 판서
의정부사(知議政府事)
직업문관
가족
배우자언양 김씨(彦陽金氏) 김수익(金受益)의 딸
자녀여계(呂稽), 여재(呂賫)
부모여언손(呂言孫)
경주 설씨(慶州薛氏) 설돈(薛惇)의 딸

2. 고려 시대

여칭은 고려 왕조에 벼슬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고, 전라도 안렴사(按廉使)·전법 전리 총랑(典法典理摠郞)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서 공주와 나주의 목사(牧使)가 되었다.[1]

1392년 조선이 개국된 뒤 양광도(楊廣道)·경상도·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고,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판각문사(判閣門事)와 여러 조(曹)의 전서(典書)가 되고, 승추부 우군 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와 강원도 도관찰사로 승진되어,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1]

1402년 (태종 2)에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 때에 여칭은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가 되었는데, 태종은 그가 위태한 시기에 임하여 정도(正道)를 지켰다 하여,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주었다.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옮겨져서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1407년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지내고, 1413년 형조 판서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겸하였다. 1413년에 사신이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황제의 안부를 묻고 돌아왔다.[1]

여칭은 네 고을의 수령으로 백성들이 사모하고, 다섯 도(道)의 감사가 되어 간사한 무리가 없어졌으며 임오년에 북방을 순문(巡問)하였을 때 마침 어렵고 위태로운 일이 있었는데, 경이 마음껏 의(義)에 따라 미리 방비하여 안녕(安寧)을 도모하였다.[2]

한가로이 있은 지 10년 만에 1423년 (세종 5년) 3월 28일 돌아가니, 연세가 73세였다. 부고(訃告)가 위에 들리니 세종은 조회를 3일 동안 폐하였고, 정평(靖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너그럽고 즐거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 다스림에 과오(過誤)가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여칭은 나라를 위함에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세미(細微)한 일까지도 정세(精細) 치밀(緻密)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1] 1423년 4월 24일 작고한 도총제(都摠制) 여칭(呂稱)에게 사제(賜祭)하였다.[2]

2. 1. 관직 생활

여칭은 고려 왕조에 벼슬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고, 전라도 안렴사(按廉使)·전법 전리 총랑(典法典理摠郞)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서 공주와 나주의 목사(牧使)가 되었다.[1]

1392년 조선이 개국된 뒤 양광도(楊廣道)·경상도·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고,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판각문사(判閣門事)와 여러 조(曹)의 전서(典書)가 되고, 승추부 우군 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와 강원도 도관찰사로 승진되어,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1]

1402년 (태종 2)에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 때에 여칭은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가 되었는데, 태종은 그가 위태한 시기에 임하여 정도(正道)를 지켰다 하여,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주었다.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옮겨져서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1407년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지내고, 1413년 형조 판서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겸하였다. 1413년에 사신이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황제의 안부를 묻고 돌아왔다.[1]

여칭은 네 고을의 수령으로 백성들이 사모하고, 다섯 도(道)의 감사가 되어 간사한 무리가 없어졌으며 임오년에 북방을 순문(巡問)하였을 때 마침 어렵고 위태로운 일이 있었는데, 경이 마음껏 의(義)에 따라 미리 방비하여 안녕(安寧)을 도모하였다.[2]

한가로이 있은 지 10년 만에 1423년 (세종 5년) 3월 28일 돌아가니, 연세가 73세였다. 부고(訃告)가 위에 들리니 세종은 조회를 3일 동안 폐하였고, 정평(靖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너그럽고 즐거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 다스림에 과오(過誤)가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여칭은 나라를 위함에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세미(細微)한 일까지도 정세(精細) 치밀(緻密)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1] 1423년 4월 24일 작고한 도총제(都摠制) 여칭(呂稱)에게 사제(賜祭)하였다.[2]

3. 조선 시대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조선 개국 이후에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1] 1402년(태종 2)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 때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를 맡아 정도(正道)를 지켰다는 이유로 태종에게서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받았다.[1]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옮겨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지냈고, 1407년에는 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역임했다.[1] 1413년 형조 판서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겸하고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1]

10년 동안 한가롭게 지내다 1423년(세종 5) 3월 28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하고 정평(靖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 세종은 여칭을 단정하고 강직하며 이치(吏治)에 장점이 있고 학문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을 내렸다.[2] 여칭은 나라를 위해 근면하고 신중하게 일했으며, 세밀한 일까지도 정밀하고 치밀하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3. 1. 조선 개국 초기의 활동

고려 왕조에 벼슬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고, 전라도 안렴사(按廉使)·전법 전리 총랑(典法典理摠郞)을 역임(歷任)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서 공주(公州)와 나주(羅州)의 목사(牧使)가 되었다.[1]

1392년 조선이 개국된 뒤 양광도(楊廣道)·경상도·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고,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판각문사(判閣門事)와 여러 조(曹)의 전서(典書)가 되고, 승추부 우군 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와 강원도 도관찰사로 승진되어,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1]

1402년 (태종 2)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 때에 여칭은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가 되었는데, 태종은 그가 위태한 시기에 임하여 정도(正道)를 지켰다 하여,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주었다.[1]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옮겨져서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1] 1407년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지내고,[1] 1413년 형조 판서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겸하였다.[1] 1413년에 사신이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황제의 안부를 묻고 돌아왔다.[1]

한가로이 있은 지 10년 만에 1423년(세종 5년) 3월 28일 돌아가니, 연세가 73세였다. 부고(訃告)가 위에 들리니 세종은 조회를 3일 동안 폐하였고, 정평(靖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너그럽고 즐거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 다스림에 과오(過誤)가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1] 여칭은 나라를 위함에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세미(細微)한 일까지도 정세(精細) 치밀(緻密)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1]

1423년 4월 24일 작고한 도총제(都摠制) 여칭(呂稱)에게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하였다.[2]

3. 2. 태종과의 관계

고려 왕조에서 벼슬하여 사헌 규정, 전라도 안렴사, 전법 전리 총랑 등을 역임했고, 외직으로 공주와 나주의 목사를 지냈다.[1] 1392년 조선 개국 후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의 조전부사가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판각문사, 여러 조의 전서, 승추부 우군 동지총제, 강원도 도관찰사로 승진하여 참지의정부사가 되었다.[1]

1402년(태종 2)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 때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가 되었는데, 태종은 그가 위태로운 시기에 정도를 지켰다 하여 전지와 노비를 주었다.[1]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 병마 도절제사를 거쳐 1407년 개성 유후를 지내고, 1413년 형조 판서와 지의정부사를 겸하였다.[1] 같은 해 사신으로 연경에 가서 황제의 안부를 묻고 돌아왔다.[1]

1423년(세종 5년) 3월 28일 73세로 사망하자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하고 정평(靖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 세종은 여칭을 단정하고 강직하며 이치에 밝고 학문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을 내렸다.[2] 특히 태종 대에 어려운 시기에 의를 따라 안녕을 도모한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2]

3. 3. 형조 판서와 지의정부사

여칭은 고려 왕조에 벼슬하여 사헌 규정, 전라도 안렴사, 전법 전리 총랑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공주와 나주의 목사가 되었다.[1] 1392년 조선 개국 후 양광도·경상도·전라도의 조전부사가 되고, 여러 번 천직되어 판각문사와 여러 조의 전서를 거쳐 승추부 우군 동지총제와 강원도 도관찰사로 승진하여 참지의정부사가 되었다.[1]

1402년(태종 2)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 때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가 되었는데, 태종은 그가 위태로운 시기에 정도를 지켰다 하여 전지와 노비를 주었다.[1]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로 옮겨져 병마 도절제사, 1407년 개성 유후를 지내고, 1413년 형조 판서와 지의정부사를 겸하였다.[1] 같은 해 사신이 되어 연경에 가서 황제의 안부를 묻고 돌아왔다.[1]

한가로이 있은 지 10년 만인 1423년(세종 5) 3월 28일 73세로 돌아가니, 세종은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정평(靖平)이란 시호를 내렸다.[1] 세종은 여칭을 단정하고 강직하며 이치에 장점이 있고 학문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했다. 또한 네 고을의 수령으로 백성들이 사모하고, 다섯 도의 감사가 되어 간사한 무리가 없어졌으며, 임오년에 북방을 순문했을 때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의에 따라 미리 방비하여 안녕을 도모하였다고 평가했다.[2]

3. 4. 세종 시대와 죽음

여칭은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조선 개국 이후에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1] 1402년(태종 2)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 때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를 맡아 정도(正道)를 지켰다는 이유로 태종에게서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받았다.[1]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옮겨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지냈고, 1407년에는 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역임했다.[1] 1413년 형조 판서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겸하고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1]

10년 동안 한가롭게 지내다 1423년(세종 5) 3월 28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하고 정평(靖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 세종은 여칭을 단정하고 강직하며 이치(吏治)에 장점이 있고 학문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을 내렸다.[2] 여칭은 나라를 위해 근면하고 신중하게 일했으며, 세밀한 일까지도 정밀하고 치밀하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4. 가족 관계

wikitext


  • 조부 : 밀직 부사(密直副使) 여공계(呂公係)
  • * 아버지 : 증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여언손(呂言孫)
  • 외조부 : 중대광(重大匡) 양원군(楊原君) 설돈(薛惇)
  • * 어머니 : 경주 설씨
  • ** 전 부인(前夫人) : 남양 홍씨
  • * 처부 : 도관찰사(都觀察使) 김수익(金受益)
  • ** 후 부인(後夫人) : 언양 김씨

장자 : 좌랑(佐郞) 여계
며느리 : 청송 심씨 - 심의귀(沈義龜)의 딸, 문하시중 영삼사사 문하부좌정승 청성백 심덕부의 손녀
* 손자 : 현감 여종숙(呂宗肅)
차자 : 현감(縣監) 여재(呂賫)
장녀 : 부사(府使) 신계삼(辛季參)에게 출가
차녀 : 박경무(朴景武)에게 출가

4. 1. 가계도


  • 조부 : 밀직 부사(密直副使) 여공계(呂公係)
  • * 아버지 : 증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여언손(呂言孫)
  • 외조부 : 중대광(重大匡) 양원군(楊原君) 설돈(薛惇)
  • * 어머니 : 경주 설씨
  • ** 전 부인(前夫人) : 남양 홍씨
  • * 처부 : 도관찰사(都觀察使) 김수익(金受益)
  • ** 후 부인(後夫人) : 언양 김씨

장자 : 좌랑(佐郞) 여계
며느리 : 청송 심씨 - 심의귀(沈義龜)의 딸, 문하시중 영삼사사 문하부좌정승 청성백 심덕부의 손녀
* 손자 : 현감 여종숙(呂宗肅)
차자 : 현감(縣監) 여재(呂賫)
장녀 : 부사(府使) 신계삼(辛季參)에게 출가
차녀 : 박경무(朴景武)에게 출가

4. 1. 1. 조부와 부모

wikitext

  • 조부 : 밀직 부사(密直副使) 여공계(呂公係)
  • * 아버지 : 증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여언손(呂言孫)
  • 외조부 : 중대광(重大匡) 양원군(楊原君) 설돈(薛惇)
  • * 어머니 : 경주 설씨(慶州薛氏)
  • ** 전 부인(前夫人) : 남양 홍씨(南陽洪氏)
  • * 처부 : 도관찰사(都觀察使) 김수익(金受益)
  • ** 후 부인(後夫人) : 언양 김씨(彦陽金氏)

4. 1. 2. 배우자와 자녀


  • 조부 : 밀직 부사(密直副使) 여공계(呂公係)
  • * 아버지 : 증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여언손(呂言孫)
  • 외조부 : 중대광(重大匡) 양원군(楊原君) 설돈(薛惇)
  • * 어머니 : 경주 설씨(慶州薛氏)
  • ** 전 부인(前夫人) : 남양 홍씨(南陽洪氏)
  • * 처부 : 도관찰사(都觀察使) 김수익(金受益)
  • ** 후 부인(後夫人) : 언양 김씨(彦陽金氏)

장자 : 좌랑(佐郞) 여계(呂稽)
며느리 : 청송 심씨 - 심의귀(沈義龜)의 딸, 문하시중 영삼사사 문하부좌정승 청성백 심덕부(靑城伯 沈德符)의 손녀
* 손자 : 현감 여종숙(呂宗肅)
차자 : 현감(縣監) 여재(呂賫)
장녀 : 부사(府使) 신계삼(辛季參)에게 출가
차녀 : 박경무(朴景武)에게 출가

5. 평가

참조

[1] 역사기록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 3월 28일 기유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2] 역사기록 세종실록 20권, 세종 5년 4월 24일 갑술 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