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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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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염파는 중국 전국 시대 조나라의 명장이다. 제나라 공격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위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인상여와의 일화인 '가시 덤불을 지고 죄를 청하다'는 고사성어로 유명하다. 진나라와의 장평대전에서 조괄의 기용으로 인해 파면되었으나, 연나라 침공을 막아 상국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위나라와 초나라에서 활동했으나 조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초나라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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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염파의 초상화
출생기원전 327년경
출생지조나라 고성 (현재의 허베이성)
사망기원전 243년 (84세)
사망지초나라 수춘 (현재의 안후이성)
직업장군
이름
롄 (廉, Lian)
이름포 (頗, Po)
로마자 표기Lian Po

2. 생애

염파는 젊은 시절 제나라와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린샹루는 조나라의 신하였는데, 염파는 그의 급격한 권력 상승과 천재성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린샹루는 여러 일화에서 염파를 피하려 노력했다. 한번은 염파의 수레를 만나자 대장군의 길을 막는 대신 돌아서기도 했다. 결국 이 모든 일은 염파에게 수치심과 당혹감을 안겨주었고, 그는 가시 덤불을 맨 몸으로 지고 린샹루에게 용서를 구했다. 이후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가시 덤불을 지고 죄를 청하다"()라는 성어는 "타인에게 겸손하게 사과하고, 처벌과 용서를 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10]

장평대전에서 염파는 조나라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왕합 장군 휘하의 진나라 군대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대신, 장평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여 진나라의 침략을 저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나 조 효성왕은 진나라 첩자에게 뇌물을 받은 신하들의 설득에 넘어가 염파 대신 조괄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21] 조괄은 경험이 부족하여 백기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에 대패했고, 조나라 군사 40만 명이 처형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장평대전 이후, 염파는 다시 조나라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그는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공을 세웠으나, 만년에 조나라 왕의 불신을 받아 위나라를 거쳐 초나라로 망명했다.[28]

염파는 초나라 수도 수춘에서 생을 마감했다.

2. 1. 초기 활동과 제나라, 위나라와의 전쟁

기원전 283년, 염파는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석양(昔陽) 혹은 양진(陽晋, 지금의 산둥성)을 함락시켰으며 그 공으로 상경(上卿)에 임명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의 용맹함이 제후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4]

기원전 279년, 염파는 제나라를 공격하였다.[5]

기원전 276년, 누창(樓昌)이 장수가 되어 위나라의 기(幾)를 공격하였으나 빼앗지 못하였다. 그러자 염파가 대신 파견되어 이를 빼앗았다.[11]

기원전 275년, 염파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방자(房子)를 공격해 함락시키고는 성을 쌓고 돌아왔으며 다시 안양(安陽)을 공격하여 빼앗았다.[12]

2. 2. 문경지교(刎頸之交)

조 혜문왕진 소양왕과 서하(西河)에서 회담할 때, 인상여는 혜문왕을 따라 민지 회담에 참석하여 큰 공을 세우고 상경에 임명되었는데, 그 지위가 염파보다 높았다. 염파는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자신보다 말만 잘하는 인상여가 더 높은 지위에 있다며 불만을 품고는 "내가 인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욕을 보이리라."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인상여는 언제나 염파를 피해다녔는데, 인상여의 사인들은 염파와 같은 반열에 있는 인상여가 그를 두려워해서 피한다고 생각하고는 크게 실망하여 그를 떠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인상여는 진나라 왕도 겁내지 않은 자신이 염파를 겁내겠느냐고 반문하고는 말하였다.[8]

"내가 생각하기에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에 대해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한데 어울려 싸우면 모두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나라의 급한 일이 먼저이고 사사로운 원한은 나중이기 때문이다."[9]

염파는 이 말을 듣고는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를 등에 진 채 인상여의 집 문에 이르러 사죄하며 "이 비천한 자가 장군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게 되어 목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우정을 나누었다.[10] 여기서 "문경지교(刎頸之交)" 혹은 "문경지우(刎頸之友)"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이 이야기는 "타인에게 겸손하게 사과하고, 처벌과 용서를 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가시 덤불을 지고 죄를 청하다" ()라는 성어의 기원이 되었다.

2. 3. 진나라와의 전쟁 (장평대전)

기원전 262년,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던 한나라의 상당(上黨)이 조나라에 투항 의사를 전달했다. 평양군 조표(趙豹)는 이것이 진나라의 침공을 조나라로 돌리려는 한나라 측의 계책이라고 주장했으나, 조 효성왕은 이를 무시하고 상당을 취했다. 《사기》 연표에 따르면, 이후 기원전 261년부터 염파가 장평(長平)에 파견되어 진나라 군대를 막아냈다.[15] 기원전 260년 4월, 진나라의 왕흘(王齕)이 쳐들어와 상당을 빼앗자 그 인민들이 조나라로 달아났다.[16] 이때 조나라를 뒷받침했던 인상여는 병들어 있었고, 또 다른 명장 조사는 죽은 후였다.[17]

진나라 군대는 공세를 펼쳐 6월에는 조나라 군영을 함락시켜 두 개의 보루를 빼앗고 네 명의 교위를 사로잡았다. 7월에는 진나라가 조나라 보루를 공격하여 교위 둘을 사로잡았다.[19] 그러나 염파는 함부로 나가 싸우지 않고 보루를 쌓고 방어를 강화하는 등 장기전으로 대응하였다.[20]

이에 진나라는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마복군 조사의 아들인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렸다.[21] 이를 믿은 조 효성왕인상여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염파를 파면하고 조사의 아들 조괄을 대신 파견하였다.

그러나 젊고 경험이 부족했던 조괄은 왕흘 대신 상장군이 되어 진나라 군대 지휘를 맡게 된 명장 백기(白起)의 계책에 속아 9월에 이르러 참패하여 전사했고, 백기에게 항복한 조나라 군대 40만 명은 대부분 생매장당했다.[21] 이를 장평대전이라 한다.

2. 4. 연나라와의 전쟁

기원전 251년, 연나라의 연왕 희는 조나라가 장평대전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틈을 타 공격하려 하였다. 연왕 희는 율복(栗腹)과 경진(卿秦) 등을 보내 조나라를 침공했으나, 염파는 호(鄗)에서 연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율복을 죽였다. 악승 또한 대(代)에서 경진을 격파하여 포로로 잡았다.[22]전국책》에서는 율복과 경진이 각기 40만 군사와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침공했으나, 염파와 악승이 각기 8만 군사와 5만 군사를 거느리고 격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3]

기원전 250년, 염파는 반격하여 연나라를 포위하였다. 연왕 희는 성 5개를 떼어주며 화친을 청했고, 조 효성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염파는 이 공로로 위문(尉文)을 봉지로 받고 신평군(信平君)에 봉해졌으며, 평원군을 대신하여 상국 대리가 되었다.[24]

기원전 248년, 상국 신평군 염파는 연릉(延陵)의 균(鈞)과 함께 위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하였다.[26]

2. 5. 망명과 죽음

기원전 245년, 염파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번양(繁陽, 지금의 허베이성 네이황현)을 빼앗았다. 그 직후 조나라에서는 조 효성왕이 죽고 조 도양왕이 즉위하였다. 도양왕은 염파를 장군직에서 파면시키고 그 자리를 악승으로 대신하였다. 분노한 염파는 후임으로 온 악승을 공격하였고, 악승은 달아났다.[27] 이 일로 인하여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하여 그 도읍인 대량(大梁)에 머물렀다. 염파는 오랫동안 위나라에 머물렀으나 위나라 측에서는 그를 믿거나 기용하려 하지 않았다.

한편 조나라는 진나라와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 도양왕은 다시 염파를 불러올 생각을 하였고, 염파 또한 조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때문에 도양왕은 사람을 보내 염파가 아직 쓸모가 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그런데 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곽개(郭開)가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염파를 모함하도록 하였다.

사신을 만난 염파는 그 앞에서 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고는 갑옷을 입고 말에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직 자신이 쓸만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곽개에게 매수된 사신은 조나라로 돌아가서 "염 장군은 비록 늙었지만 밥은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신과 같이 앉아 있는 동안 세 번이나 오줌을 지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도양왕은 염파가 늙었다고 생각하여 그를 부르지 않았다.

이후 초나라에서 몰래 사람을 보내 염파를 맞아들였다. 염파는 초나라의 장수가 되었으나 그곳에서도 공을 세우지 못했다. 이에 염파는 "나는 조나라 군사를 지휘하고 싶다."라고 하였다. 염파는 결국 조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초나라 수춘에서 죽었다.[28] 그가 죽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3. 평가

전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염파를 "양장(良將)", 즉 "뛰어난 장수"라 평가하였다.[1] 남조 시대의 문인 주흥사는 《천자문》에서 "기전파목(起翦頗牧) 용군최정(用軍最精)"이라 하였는데, 이는 곧 전국시대에 백기 · 왕전 · 염파 · 이목 등이 군사를 가장 잘 부렸다는 뜻이다.[2] 북송 시대의 문인 소자유는 《소자고사(蘇子古史)》에서 염파를 높이 평가하여 "국가의 주춧돌"이라 하였다.[3]

염파는 매우 대식가였다고 전해지며, 1(10)의 현미와 10(약 2.2kg)의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한다.[4] 만년의 염파는 망향의 염을 품고 있었으며, "(합전을 한다면) 조나라 사람을 써서 싸우고 싶다"고 말했다.[5]

사마천은 《사기》에서 염파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염파를 인상여와 함께 기울어가는 조나라의 기둥으로 간주했던 듯하며, 인상여·조사·이목과 함께 명장으로 열전을 구성하고 있다.[6] 《소자고사》에서는 염파를 높이 평가하여 "조나라의 지주"라고 평했다.[6]

4. 대중문화 속 염파

만화 및 애니메이션 킹덤에서 염파는 유쾌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중국 전역에서 가장 두려움을 받고 존경받는 장군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그는 전 세대 "조나라 삼대천"의 일원이었다.

염파는 다양한 유형의 전쟁에 능숙한 만능 장군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전투의 '흐름'을 파악하는 본능적인 유형의 장군이자, 전략가 유형의 장군이며, 공격과 방어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삼국지연의에서 그는 조운황충 모두에게 노련한 노장의 전형적인 예시로 언급되었다.

염파는 도상왕의 폭군적인 리더십 방식에 반대하여 조나라를 떠났다. 그 후 위나라로 갔지만, 진나라와의 패배 후 추방당했다. 그 후 초나라의 수춘에 정착하여 여전히 존경받는 "손님"으로 남아있었다.

참조

[1] 인용
[2] 서적 史記
[3] 인용
[4]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5]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6]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7]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8]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9]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0]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1]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12]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13] 서적 사기 권5 진본기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4] 서적 전국책 권20 조책3
[15] 서적 사기 권15 육국연표
[16]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17]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8]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9]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20]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21] 서적 사기 권5 진본기 ; 사기 권43 조세가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22] 서적 사기 권34 연소공세가 ; 사기 권43 조세가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23] 서적 전국책 권31 연책3
[24] 서적 사기 권34 연소공세가 ; 사기 권43 조세가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25]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26]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27]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28]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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