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네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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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네팔 전쟁은 1814년부터 1816년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팔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은 네팔을 통해 티베트와 중국으로의 무역로를 확보하려 했고, 네팔은 영토를 확장하면서 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수가울리 조약을 통해 네팔은 시킴, 쿠마온, 가르왈 영토와 서부 테라이 지역을 잃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구르카 용병이 영국군에 편입되었고, 네팔의 정치적 지형이 변화했으며, 영국은 히말라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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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네팔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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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요 | |
분쟁 이름 | 앵글로-네팔 전쟁 |
다른 이름 | 구르카 전쟁 (Gurkha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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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814년 11월 1일 – 1816년 3월 4일 |
장소 | 네팔 왕국 |
결과 | 영국의 승리 |
결과 상세 | 스가울리 조약 체결 |
영토 변경 | 네팔은 분쟁 중인 타라이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칼리 강 서쪽에서 수틀레지 강까지 정복한 영토를 양도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영국 동인도 회사 |
교전국 2 | 네팔 왕국 |
영국 동인도 회사 연합군 | 갈왈 왕국 파티알라 번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영국 동인도 회사 | 프랜시스 로던-헤이스팅스 (제1대 헤이스팅스 후작) 데이비드 옥터로니 로버트 롤로 길레스피(전사) 베넷 말리 존 설리번 우드 가브리엘 마틴델 |
네팔 왕국 | 기르반 유다 비크람 샤 빔센 타파 아마르 싱 타파(바다) 우지르 싱 타파 라나비르 싱 타파 바크타와르 싱 타파 라나조르 싱 타파 달반잔 판데 바크티 타파(전사) 발바드라 싱 쿠ನ್와르 |
병력 규모 | |
영국 동인도 회사 | 1차 전역: 22,000명, 대포 60문 2차 전역: 17,000명 양쪽 전역에 걸쳐 100,000명의 인도군 동원 |
네팔 왕국 | 11,000명 이상 |
사상자 및 피해 | |
영국 동인도 회사 | 알 수 없음 |
네팔 왕국 | 알 수 없으나 매우 큼 |
2. 역사적 배경
18세기 중반,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팔과 활발하게 무역을 했다.[7] 네팔은 쌀, 버터, 종자유, 목재, 염료, 금과 같은 상품을 동인도 회사에 공급하며 풍요의 중심지로 여겨졌다.[7] 1767년, 네팔에서 고르카족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영국은 이러한 관계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7]
1768년, 고르카족은 카트만두 계곡을 정복하고 네팔의 지배 세력이 되었으며, 이는 영국령 인도와 네팔 간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7] 1801년, 동인도 회사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카트만두에 영국 레지던시를 설치했다.[7] 1814년 무렵, 영국은 네팔과 북인도의 시크교도 간의 동맹 가능성을 우려했다.[7] 동인도 회사는 네팔이 서부 "테라이" 지역에서 축출되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7] 1814년, 영국은 이를 실행에 옮겨 카트만두에 두 번째 레지던시를 설치하여 네팔을 감시하려 했다.[7]
1792년, 중국 건륭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네팔군을 티베트에서 카트만두 인근 5km 지점까지 몰아냈다. 섭정 바하두르 샤(프리트비 나라얀의 아들)는 인도의 영국 총독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총독은 중국과의 대립을 피하고자 군대 파견 대신 커크패트릭 대위를 중재자로 보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중국과의 전쟁은 끝났다.
티베트 사건으로 가르왈 왕국 공격 계획은 연기되었지만, 1803년 가르왈의 라자 프라두만 샤는 패배했다. 1804년 1월 전투에서 그는 사망했고, 그의 영토는 모두 합병되었다. 서쪽으로 아마르 싱 타파 장군은 히마찰프라데시 강가까지 영토를 점령하고 강가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펀자브의 시크 통치자 란지트 싱은 개입하여 1809년까지 네팔군을 수틀레지강 동쪽으로 몰아냈다.
2. 1. 고르카 왕국의 부상과 네팔 통일

수 세기 동안 카트만두 계곡은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 세 왕국으로 나뉘어 서로 끊임없이 다투었고, 외부 침략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1769년, 고르카 왕 프리트비 나라얀 샤가 카트만두 계곡을 정복하면서 통일 네팔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에 앞서 1767년, 카트만두 계곡의 소국들은 고르카의 확장에 위협을 느껴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은 킨록 대위가 이끄는 2,500명의 병력을 파견했지만, 이들은 제대로 된 장비나 준비를 갖추지 못해 원정에 실패했다. 오히려 이 원정은 고르카군에게 화기를 제공하고, 영국군을 얕잡아보는 인식을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카트만두 계곡 정복은 고르카 확장의 시작에 불과했다. 1773년까지 고르카군은 동부 네팔 전역을 장악했고, 1788년에는 시킴 서부 지역을 병합했다.
1790년에는 서쪽의 칼리 강까지 모든 통치자들이 고르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더 서쪽의 쿠마온 지방과 그 수도 알모라 역시 고르카에 항복했다.
2. 2. 청나라와의 충돌
1789년과 1791년, 네팔은 티베트를 침공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철수해야 했다.[56] 1792년, 청나라 황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티베트에서 네팔군을 몰아냈다.[57] 네팔은 청나라와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5년마다 베이징에 조공해야 했다.[57]3. 영국과의 긴장, 충돌
18세기 후반,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팔을 통해 티베트와 중국으로의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당시 영국은 네팔과 활발하게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7] 1767년 고르카족이 네팔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영국은 이러한 관계에 우려를 갖게 되었다.[7]
1801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카트만두에 영국 레지던시(residency)를 설치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7] 1814년이 되면서 영국은 네팔과 북인도의 시크교도 간의 동맹 가능성을 우려하게 되었고, 네팔을 서부 지역인 "테라이" 지역에서 축출하면 더 이상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7]
1814년 5월, 네팔의 영국군은 말라리아 시즌을 피해 일시적으로 철수했다.[8] 네팔군이 권력을 재확립하려 하자 그 과정에서 회사 관리들이 살해되었고,[8] 같은 해 벵골 총독 워렌 헤이스팅스는 네팔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7] 9월에는 16,000명의 병력이 네팔 침공을 위해 파견되었다.[8]
무역이 회사의 주요 목표였지만, "정치적 안전"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으며, 이는 억제 전략과 더 넓은 점령 지역을 의미했다. 헤이스팅스는 상업적 이유만으로 네팔을 침공한 것이 아니라, 쇠퇴하는 무굴 제국 속에서 마라타족, 시크교도, 구르카족 사이의 힌두교 부흥과 연대에 대한 전략적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는 중앙 인도에서 마라타족에 대한 선제적 정복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 먼저 네팔을 무력화해야 했다.
P.J. 마셜은 "정치적 안전은 군사적 대비를 의미했다. 1761-62년부터 1770-71년까지의 군사 지출은 총 2,200만 파운드의 지출 중 44%를 차지했다. 무역과 개선보다는 전쟁과 외교가 중요했다."라고 설명한다.
3. 1. 네팔의 영토 확장과 영국의 우려
18세기 중반, 고르카족이 네팔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팔과의 관계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7] 1768년, 고르카족은 카트만두 계곡을 정복하고 네팔의 지배 세력이 되었으며, 이는 영국령 인도와 네팔 간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7]샤 왕조 시대 고르카 왕 프리트비 나라얀 샤는 카트만두 계곡을 침략하여 네팔을 통일했다. 키르티푸르 전투를 시작으로 카트만두 계곡을 점령한 프리트비 나라얀 샤는 수도를 고르카에서 카트만두로 옮겼고, 이후 그의 후손들이 건설한 제국은 네팔로 알려지게 되었다.
북쪽으로는 티베트와의 분쟁으로 인해 1792년 중국이 개입하여 네팔군을 카트만두 인근까지 몰아냈다. 섭정 바하두르 샤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중국과의 대립을 피하려던 영국은 군대 대신 중재자를 보냈다. 그러나 중재자가 도착하기 전에 중국과의 전쟁은 끝났다.
티베트 사건으로 인해 가르왈 왕국 공격 계획은 연기되었지만, 1803년까지 가르왈은 네팔에 합병되었다. 더 서쪽으로, 아마르 싱 타파 장군은 히마찰프라데시 강가까지 영토를 점령했다.[7] 그러나 1809년 펀자브의 란지트 싱이 개입하여 네팔군을 수틀레지강 동쪽으로 몰아냈다.

네팔이 동쪽으로 시킴, 서쪽으로 쿠마온과 가르왈, 남쪽으로 아와드까지 제국을 확장하는 동안, 영국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 마드라스, 봄베이를 중심으로 인도에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영국-네팔 전쟁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영토 분쟁이었다. 네팔과 영국령 인도의 국경 지역은 "차이를 관리, 분리 및 협상하기 위한 접촉 구역"을 나타내며, 1814년까지 이 지역에 대한 분쟁은 갈등을 촉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네팔의 국경은 환경, 공물, 과세 청구, 토지 소유 패턴에 따라 자주 변동했다.[10] 영국은 국경을 고정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네팔의 유동적인 경계를 침범으로 해석했다.[7]
영국은 측량 및 지도 제작 프로젝트를 통해 네팔에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려 했다.[10] 이러한 지도는 회사가 토지를 고정된 공간으로 나누는 전략의 일환이었다.[10]
아와드 나바브의 토지를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수하면서 고라크푸르 지역은 네팔의 팔파와 가까워졌다. 18세기 말, 팔파는 네팔에 합병되었고, 1804년부터 1812년까지 네팔이 영국 보호령 하에 있던 부트왈의 테라이를 점령한 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이유였다.[11][12][13]
1813년 모이라 백작이 총독이 되면서 네팔과의 국경 분쟁을 재검토했다. 고정된 경계가 없었기 때문에 분쟁은 해결되지 못했다. 네팔 역사가 바부람 아차르야는 영국이 네팔의 언덕 지역을 합병하려고 국경 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영국 대표는 네팔 대표를 무시하여 전쟁을 촉발하려 했다.
네팔의 타라이 평야에 대한 습격, 즉 네팔의 언덕 지역과 인도를 분리하는 비옥한 땅은 긴장을 고조시켰다.[14] 영국은 이 지역의 힘과 캘커타와 북서부 간의 취약한 통신선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 명확한 국경이 없어 양국 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영토 문제 외에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북인도에서 영국의 지배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려는 욕구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8] 회사는 네팔의 반(反)영국적 편견이 벵골 공격으로 이어지거나, 인도 국가들이 연합하여 반(反)영국 동맹을 맺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8] 구르카족의 카트만두 계곡 정복은 영국에게 네팔의 힘에 대한 과장된 시각을 제공했고, 이는 영국이 네팔을 안보 위협으로 여기는 데 기여했다.[8]
사가울리 조약은 영국의 안보 우려를 보여준다.[9] 조약 제6조는 네팔이 칼리강 서쪽에 위치한 국가에 대한 모든 관계를 포기하도록 규정하여, 영국이 영토 제한을 통해 안보 우려를 억제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3. 2. 양국의 대립
18세기 중반,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팔과 활발한 무역을 했다.[7] 1767년, 고르카족이 네팔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영국은 이러한 관계에 우려를 갖게 되었다.[7] 1768년, 고르카족은 카트만두 계곡을 정복하고 네팔의 지배 세력이 되었으며, 이는 영국령 인도와 네팔 간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7]키르티푸르 전투를 시작으로 프리트비 나라얀 샤의 승리와 카트만두 계곡 점령은 그의 왕국의 수도를 고르카에서 카트만두로 옮기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와 그의 후손들이 건설한 제국은 이후 네팔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무역과 산길 지배를 둘러싼 오랜 분쟁으로 인해 티베트에 대한 공격적인 습격이 중국의 개입을 촉발했다. 1792년, 중국 건륭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네팔군을 티베트에서 수도 카트만두에서 5km 떨어진 곳까지 몰아냈다. 섭정 바하두르 샤(프리트비 나라얀의 아들)는 인도의 영국 총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중국과의 대립을 피하려는 총독은 군대를 보내는 대신 커크패트릭 대위를 중재자로 보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중국과의 전쟁은 끝났다.
가르왈 왕국에 대한 공격 계획은 연기되었지만, 1803년까지 가르왈의 라자 프라두만 샤는 패배했다. 그는 1804년 1월 전투에서 사망했고, 그의 모든 영토는 합병되었다. 더 서쪽으로, 아마르 싱 타파 장군은 히마찰프라데시 강가까지 영토를 점령했으며, 언덕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인 강가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펀자브의 시크 국가 통치자인 란지트 싱 마하라자는 개입하여 1809년까지 네팔군을 수틀레지강 동쪽으로 몰아냈다.
전쟁 발발 전 몇 년 동안, 영국은 세력 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네팔이 동쪽으로 시킴, 서쪽으로 쿠마온과 가르왈, 남쪽으로 아와드까지 제국을 확장하는 동안, 영국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 마드라스, 봄베이를 거점으로 인도의 입지를 강화했다.
영국-네팔 전쟁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영토 분쟁이었다. 국경과 국경 지역에 대한 네팔의 견해는 회사의 공간과 영토성에 대한 비전과 충돌했다. 국경 지역은 "차이를 관리, 분리 및 협상하기 위한 접촉 구역"을 나타내며, 1814년까지 국경 지역에 대한 분쟁은 네팔과 영국령 인도의 갈등을 촉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역사적으로 히말라야는 정치적 유연성과 얽혀있는 농업적 권리의 장소 역할을 했다.[10] 이로 인해 네팔의 경계는 느슨하게 유지되었다. 고정된 영토선과 달리 네팔은 무역과 인구의 다양한 이동을 용이하게 하는 "무한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10]
영토적 우려에 의해 회사는 측량 및 지도 제작 프로젝트를 시작했다.[10] 이러한 지도는 19세기에 수입 측량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회사가 토지를 중첩되지 않는 고정된 공간으로 나누는 전략 역할을 했다.[10] 따라서 국경 지역과 공간성에 대한 상반된 생각은 1814년 영토 분쟁이 절정에 달하기까지, 즉 영국-네팔 전쟁의 시작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수가울리 조약의 내용은 영토에 대한 견해의 충돌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었음을 보여준다.[9]
아와드 나바브의 토지를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수하면서 고라크푸르 지역은 네팔 중심부에 있는 마지막 남은 독립 도시인 팔파의 라자(왕)와 가까워졌다. 팔파와 부트왈은 원래 별개의 공국이었지만, 나중에 한 명의 독립적인 라지푸트 왕자에 의해 통일되었으며, 그는 부트왈을 정복한 후 팔파의 세습 재산에 추가했다. 1806년부터 1837년까지 네팔의 총리였던 빔센 타파는 자신의 아버지를 팔파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로 인해 두 강대국 간에 심각한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1804년부터 1812년까지 네팔이 영국 보호령 하에 있던 부트왈의 테라이를 점령한 것이 1814년 영국-네팔 전쟁의 직접적인 이유였다.[11][12][13]
1813년 10월, 모이라 백작이 총독 자리에 올랐고, 그의 첫 번째 행위는 네팔과 영국 동인도 회사 간의 국경 분쟁을 재검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쟁은 네팔과 영국을 분리하는 고정된 경계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골카가 확장한 판도는 동쪽으로는 시킴, 서쪽으로는 쿠마온과 가르왈, 그리고 남쪽으로는 영국 세력권 내의 아와드까지 뻗어 있었다. 한편, 영국 동인도 회사도 캘커타, 마드라스, 봄베이를 거점으로 세력권을 확대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충돌의 계기는 타라이 지방의 영유를 둘러싼 분쟁이었다.[58] 골카는 팔파와 부트왈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라이 지방에 접근하여 동 지방의 영유를 주장하는 영국과 충돌하여 분쟁이 발생했다.[58] 프란시스 해스팅스는 25일 이내에 부트왈과 시우라지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했지만, 이로 인해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1814년 11월 벵골 총독은 선전 포고를 했다.[58]
카트만두 두르바르가 영국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네팔 추장들의 의견을 구했을 때, 아마르 싱 타파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를 확립하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몰아낸 언덕 라자들과 연합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슴을 사냥해 왔을 뿐이지만, 만약 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호랑이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19]라고 말했다.
이는 네팔의 총리 빔센 타파의 입장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는 "...우리의 언덕과 요새는 신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난공불락이다."[21][22]라고 말했다.
4. 전쟁
총독은 네팔과의 전쟁을 앞두고 아와드 나바브에게 자금을 요청했다. 2000만인도 루피가 요청되었으나, 사두트 알리의 사망으로 그의 후임자가 1000만인도 루피를 제공했다. 총독은 이를 동인도 회사에 대한 대여금으로 받고, 이후 80만인도 루피를 추가하여 이자를 확보했다. 이 자금은 전쟁 준비에 사용될 예정이었다.[23]
캘커타에서는 이 중 540만인도 루피를 대출 상환에, 나머지를 전쟁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총독은 나바브 비지르에게 추가 지원을 요청하여 1000만인도 루피를 더 받았고, 동인도 회사는 총 250만파운드 이상의 자금을 확보했다.[23]
전쟁 후, 영국은 정복한 영토 일부를 나바브 비지르에게 이전하여 두 번째 크로르를 상환받았다. 이 중 520만인도 루피가 전쟁 비용으로 사용되었고, 48만인도 루피(60만파운드)가 남아 동인도 회사에 이익을 안겨주었다.[23] 이는 티베트와의 전쟁으로 재정이 고갈된 네팔과 대조적이었다.
4. 1. 제1차 영국-네팔 전쟁 (1814-1815)
영국군은 네팔과의 전쟁을 위해 4개 사단으로 나뉘어 공격을 시작했으나,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베넷 말리 소장과 존 설리번 우드 소장이 카트만두 계곡을 목표로 진격했으나, 네팔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마크완푸르와 하리하르푸르 요새 공격에 실패했다.[39] 조지 우드 소장은 네팔군의 공격에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베티야로 후퇴했다.[39]우드 소장은 팔파 왕의 도움을 받아 부트왈 방어를 우회하여 팔파를 공격하려 했으나, 지트 가디 전투에서 우지르 싱 타파 대령이 이끄는 네팔군에게 패배했다.[40]
날라파니 전투는 영국-네팔 전쟁의 첫 번째 전투였다. 영국군은 데라둔 인근 날라파니 요새를 포위했지만, 발바드라 쿤와르 대위가 이끄는 네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여성들은 총알과 포탄을 몸으로 막았다고 전해진다.[40] 영국군은 두 번의 공격 실패 후 물 공급을 차단하여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결국 70명의 생존자가 요새를 탈출했다.[40]
반면, 서부 전선에서는 데이비드 오크털로니 대령이 이끄는 영국군이 네팔군을 몰아내며 승기를 잡았다. 아마르 싱 타파가 지휘하는 네팔군은 넓은 전선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오크털로니는 데우탈 전투에서 승리하고,[60] 아마르 싱 타파는 알모라 함락 소식을 듣고 항복했다.[60]
4. 2. 제2차 영국-네팔 전쟁 (1816)
모이라 경은 1815년 11월 28일에 조인된 강화 조약을 네팔 왕궁(다르바르)이 비준하지 않자, 데이비드 오크터로니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2만 명의 정예 병력을 투입하여 제2차 전역을 시작했다.[61] 오크터로니 장군이 마크완푸르로 진군하는 동안, 시킴의 왕은 동쪽에서 네팔군을 추격했다.1816년 2월 28일, 마크완푸르에서의 결정적인 전투와 인접한 하리하르푸르 요새의 함락으로 네팔의 상황은 매우 위태로워졌다.[61] 영국군은 수도 카트만두를 위협했고, 네팔은 조약 비준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61]
5. 수가울리 조약
1815년 11월 28일, 영국은 네팔에 조약 비준을 요구하는 15일 기한의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조약 내용은 네팔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이 네팔을 상대로 2차 군사 작전을 개시하는 명분이 되었다.
1816년 2월, 데이비드 옥털로니(David Ochterlony) 소장은 17,000명의 대규모 영국군을 이끌고 네팔을 공격했다. 켈리 대령과 오하라 대령은 하리하르푸르 가디를 공격했고, 네팔군은 격전 끝에 후퇴했다. 이후 영국군은 마카완푸르로 물러났다.
정세가 위급해지자, 데이비드 옥털로니 소장은 찬드라 세카르 우파디아야와 판디트 가자라지 미슈라를 통해 카트만두 다르바르가 서명한 조약을 접수했다. 이틀 뒤, 마카완푸르에서 비준된 조약이 영국군에 전달되면서 수가울리 조약이 체결되었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 조약으로 메치 강은 네팔의 새로운 동쪽 국경이 되었고, 마하칼리 강은 서쪽 경계가 되었다.[45]
영국은 카트만두에 영국 레지던트를 주둔시켰으나, 네팔 통치자들은 레지던트를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로 고립시켰다.[45]
5. 1. 조약의 문제점과 후속 조치
수가울리 조약은 1816년 3월 4일에 비준되었다.[45] 이 조약에 따라 네팔은 시킴(다르질링 포함), 쿠마온, 가르왈 영토와 서부 테라이를 상실했다. 메치 강은 새로운 동쪽 국경이 되었고, 마하칼리 강은 왕국의 서쪽 경계가 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테라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수입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연간 200000INR를 지불할 예정이었다.[61] 영국은 레지던트를 설치했다.[45]그러나 테라이 지역은 영국이 통치하기 어렵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1816년 후반에 그 중 일부가 네팔에 반환되었으며, 이에 따라 연간 지불금도 폐지되었다.[46][61] 영국-네팔 전쟁이 종결된 후에도 두 국가 간의 국경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네팔과 아우드의 경계는 1830년까지 최종 조정되지 않았고, 네팔과 영국 영토 간의 경계는 그 이후 몇 년 동안 두 정부 간의 논의 사항으로 남아 있었다.[47]
6. 전쟁의 영향
수가울리 조약은 1816년 3월 4일에 비준되었다. 이 조약으로 네팔은 시킴(다르질링 포함), 쿠마온, 가르왈 영토, 서부 테라이를 잃었다. 메치 강은 새로운 동쪽 국경이 되었고, 마하칼리 강은 왕국의 서쪽 경계가 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테라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수입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연간 20만 루피를 지불할 예정이었다.[45] 영국은 레지던트를 설치했다.[45]
그러나 테라이 지역은 영국이 통치하기 어렵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1816년 후반에 그 중 일부가 왕국으로 반환되었으며, 이에 따라 연례 지불금도 폐지되었다.[46] 영국-네팔 전쟁이 종결된 후에도 두 국가 간의 국경 문제는 1830년까지 최종 조정되지 않았고, 네팔과 영국 영토 간의 경계는 그 이후 몇 년 동안 두 정부 간의 논의 사항으로 남아 있었다.[47]
영국은 중국과 네팔 사이에 완충 국가를 두는 것을 선호하여 네팔을 분할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1815년 영국군이 네팔 서부에서 작전할 때 중국군이 라사에서 진격했고, 이듬해 영국-네팔 조약 체결 후 다시 네팔 국경까지 이동했다. 네팔은 1792년 중국 침공을 기억하며 긴장했지만, 외교적 노력을 통해 위기를 넘겼다.[48]
구르카 전쟁은 마라타와 핀다리스에 대한 캠페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비용(5156961sicca rupee)을 지출했다.[49] 이 때문에 동인도 회사는 티베트와의 숄 양모 무역 발전에 소극적이었고, 또 다른 산악 전쟁의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49]
영국 상인들은 숄 양모 시장의 독점권을 가진 카슈미르와 라다크 상인들, 그리고 라호르의 시크교 통치자 란지트 싱 때문에 숄 양모 무역에서 이익을 얻지 못했다. 결국 동인도 회사는 숄 양모를 얻지 못했고, 1840년대 시크 전쟁 이후 펀자브와 카슈미르를 획득했을 때는 이미 무역을 포기한 상태였다.[50]
6. 1. 구르카 용병의 등장


데이비드 옥털로니 경과 정치 에이전트 윌리엄 프레이저는 영국-네팔 전쟁 중에 네팔 병사(구르카족)의 용맹함과 군사적 잠재력을 빠르게 간파했다. 영국은 전쟁 중 네팔군에서 탈영한 병사들을 비정규 부대로 활용하고자 했다. 1815년 4월, 옥털로니 경은 이들의 충성심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로스 중위 휘하에 '나시리 연대'라는 대대를 편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 연대는 이후 제1 킹 조지 경 구르카 소총 연대가 되었고, 말라운 요새 전투에서 활약하며 로티 중위로부터 "그들의 노력에 매우 만족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옥털로니 경의 구르칼리 대대 외에도, 윌리엄 프레이저와 프레데릭 영 중위는 시르무르 대대를 창설했으며, 이는 후에 제2 킹 에드워드 7세 구르카 소총 연대가 되었다. 쿠마온 대대 또한 창설되어 제3 퀸 알렉산드라 구르카 소총 연대가 되었다.
수가울리 조약 체결 이후, 약 5,000명의 네팔군 병사들이 영국군에 입대했다. 이들은 주로 쿠마온, 가르왈 등 히말라야 고지 출신이었다.[62] 이들은 4개 연대로 편성되어 영국군과 인도군의 핵심 전력인 '팀 구르카'로 활약하게 되었다.[62]
6. 2. 빔센 타파의 몰락

트리푸라순다리 섭정 여왕의 지원을 받은 빔센 타파는 네팔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유지했다.[1] 다른 지배 가문, 특히 판데 가문은 빔센 타파가 영국에 대해 보이는 복종적인 태도를 비난했다.[1] 그러나 빔센 타파는 대규모의 근대화된 군대를 유지하고 라젠드라 비크람 샤 국왕(재위 1816-1847)의 미성년 기간 동안 궁정을 정치적으로 지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1] 또한, 그는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권력의 자리에 임명하여 판데 가문을 권력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1]
1832년 트리푸라순다리 여왕이 사망하자 빔센 타파는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1] 1833년, 브라이언 호턴 호지슨이 영국 거주자가 되어 빔센 타파의 반대자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1837년 국왕은 독립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하여 총리와 그의 조카의 군사적 권한을 박탈했다.[1] 여왕의 장남이 사망한 후, 빔센 타파는 왕자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1]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타파 가문은 혼란에 빠졌다.[1] 판데 가문의 수장인 라나 장 판데가 총리가 되자 그는 빔센 타파를 다시 투옥했고, 빔센 타파는 1839년 8월 자살했다.[1]
6. 3. 데이비드 옥터로니의 말년
데이비드 옥터로니는 영국-네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양원으로부터 감사를 받았으며,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GCB를 수여받은 최초의 장교가 되었다. 모이라 경은 그를 델리의 레지던트로 복귀시켰다.[44]그러나 모이라 경이 인도를 떠난 후, 1823년 앰허스트 경이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옥터로니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1825년 바라트푸르의 라자가 사망하자, 옥터로니가 지지했던 6세의 왕위 계승자는 사촌인 두르잔 살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두르잔 살이 왕좌를 비우라는 옥터로니의 요구에 따르지 않자, 옥터로니는 바라트푸르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새로운 총독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앰허스트가 그의 명령을 철회하자 옥터로니는 사임했다. 이 사건은 건강이 악화된 옥터로니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1825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44]
캘커타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165피트 높이의 기념비가 세워졌지만, 데이비드 옥터로니 경의 가장 큰 유산은 고르카족을 영국 및 인도 군대에 지속적으로 징집한 것이다.[44]
7. 평가 및 역사적 의의
영국-네팔 전쟁은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으며, 그 역사적 의의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서부 전선에서 네팔군은 병력 분산과 통신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쿠마운 지역은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해야 했고, 영국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네팔군을 압도했다. 하스티 달 샤와 같은 유능한 지휘관이 전사하고, 밤 샤는 결국 알모라를 항복했다.
말라온과 자이탁에서의 전투는 네팔군의 패배를 더욱 확실하게 했다. 박티 타파의 용맹함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전략에 네팔군은 무너졌다. 결국 아마르 싱 타파는 항복을 선택했고, 네팔은 서부 지역 통제권을 상실했다.
7. 1. 더불어민주당 관점
영국-네팔 전쟁은 19세기 초, 제국주의 영국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북인도에서의 지배력 강화를 위해 네팔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일으켰다.[8] 이는 네팔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하는 행위였다.전쟁 결과 체결된 수가울리 조약은 불평등 조약으로, 네팔은 이 조약으로 인해 시킴(다르질링 포함), 쿠마온과 가르왈 영토, 서부 테라이 등 상당한 영토를 상실했다.[45][46] 메치 강은 새로운 동쪽 국경이 되었고, 마하칼리 강은 네팔의 서쪽 경계가 되었다.[45] 또한 영국은 네팔의 정치에 간섭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구르카족의 용맹함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마르 싱 타파는 "우리는 지금까지 사슴을 사냥해 왔을 뿐이지만, 만약 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호랑이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19]라며 영국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비록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구르카족은 이후 영국군에 고용되어 세계 각지에서 활약했다.

대한민국은 과거 제국주의 침략의 피해를 경험했기에, 네팔의 역사에 깊이 공감한다. 대한민국은 주권 존중과 평화적 관계를 지지하며, 네팔과의 협력을 통해 상호 발전과 번영을 추구할 것이다.
7. 2. 비판적 시각
영국-네팔 전쟁은 단순히 영국의 일방적인 침략 전쟁으로만 볼 수 없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이러한 시각은 전쟁의 복합적인 원인과 결과, 그리고 관련된 여러 주체들의 행위를 균형 있게 조명한다.전쟁의 복합적 원인:
- 영국의 안보 우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팔을 북인도 지배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네팔이 벵골을 공격하거나, 다른 인도 국가들과 연합하여 반(反)영국 동맹을 맺을 가능성을 우려했다.[8] 1760년대부터 구르카족이 보여준 강력한 저항은 이러한 우려를 더욱 심화시켰다.[8]
- 네팔의 제국주의적 팽창: 네팔은 고르카 왕국 시절 주변국을 침략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였다. 이는 영국과의 충돌을 야기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 전략적 요충지: 네팔의 영토는 영국 행정의 중심지인 벵골 바로 북쪽에 위치하여 영국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8]
- 경제적 요인: 무역을 중시했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팔과의 전쟁을 통해 이권을 확보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네팔 내부의 갈등:
- 전쟁 찬반 논쟁: 네팔의 총리였던 빔센 타파는 전쟁을 주장했지만, 군 사령관 아마르 싱 타파는 전쟁에 반대했다.[19] 아마르 싱 타파는 영국의 힘을 경계하며, 전쟁이 네팔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9]
- 개인의 탐욕: 아마르 싱 타파는 부트왈과 시오라에서 채택된 조치가 개인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9][20]
수가울리 조약에 대한 상반된 평가:
- 불평등 조약: 수가울리 조약으로 네팔은 영토의 3분의 1을 잃는 등[44] 불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 독립 유지: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해 네팔은 영국의 완전한 식민 지배를 피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구르카 용병 문제:
- 제국주의 협력: 구르카족이 영국군에 복무한 것은 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로 비판받을 수 있다.
- 생존을 위한 선택: 하지만, 당시 구르카족에게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결론:영국-네팔 전쟁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했으며, 단순히 영국의 침략으로만 규정하기는 어렵다. 네팔 역시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구했고,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수가울리 조약은 네팔에 불리했지만, 동시에 독립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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