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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방위군 (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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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토방위군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1969년 창설한 군사 조직으로, 정규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보조하여 영토 방위 임무를 수행했다. 냉전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잠재적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전인민 방위전' 교리를 채택했고, 영토방위군은 이 교리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각 공화국별로 조직된 영토방위군은 평시에는 예비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쟁 발발 시 유고슬라비아의 독립과 비동맹 노선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이후, 영토방위군은 각 공화국의 분리주의 세력에 의해 사용되어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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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방위군 (유고슬라비아)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영토방위군 휘장
원어 명칭Територијална Oдбрана
로마자 표기Teritorijalna odbrana
약칭OHO
슬로베니아어Splošna ljudska obramba
군사 정보
창설일1969년
해체일1992년
국가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군종민병대
헌병대
국민위병
예비군
역할예비군
경보병
향토방위군
규모86만 명
예비군약 300만 명
지휘 구조유고슬라비아 인민군
깃발
전투 및 활동
기타

2.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추축국에 대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성공적인 저항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948년 티토-스탈린 분열을 겪으며 소련 및 그 동맹국들과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고, 이전부터 스탈린의 압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독자적인 국가 방위 시스템 구축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냉전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 운동의 주요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독자 노선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유고슬라비아 지도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소련의 잠재적 침공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를 불러일으켰다.[1] 이 사건은 소규모 국가의 정규군만으로는 강대국의 기습적인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2] NATO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라는 양대 군사 블록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상, 유고슬라비아는 대규모 침공 가능성에 대비한 독자적인 군사 교리 개발과 방위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성공적인 저항 경험과 맞물려, 정규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보완하고 전 국민적 저항을 가능하게 할 새로운 군사 조직, 즉 영토방위군의 창설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1. 제2차 세계 대전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 점령에 맞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성공적인 저항은 전후 사회주의 국가 유고슬라비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당시 파르티잔을 이끌었던 티토는 추축국 점령 하의 국토를 파르티잔 활동으로 해방시킨 경험을 통해 풀뿌리 저항 전략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티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대독(對獨) 전쟁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산악 지형을 활용한 경험을 통해, 이러한 지형이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파르티잔 부대는 전쟁 기간 동안 산악 지형의 이점을 적극 활용하여 효과적인 무장 저항을 펼쳤다. 이러한 성공적인 파르티잔 경험은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국방 사상과 전략 수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2. 냉전과 비동맹 운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추축국에 성공적으로 저항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948년 티토-스탈린 분열로 소련 및 그 동맹국들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이전부터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으로부터 여러 차례 압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독자적인 국가 방위 시스템 구축이 시급했다. 냉전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 운동의 주요 회원국으로 활동했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유고슬라비아 지도부에게 소련의 잠재적 침공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 이 사건은 소규모 국가의 정규군만으로는 강대국의 기습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2] NATO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라는 양대 군사 블록 사이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는 제3차 세계 대전과 같은 대규모 침공 시나리오에 대비하기 위한 독자적인 군사 교리를 개발해야 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십 브로즈 티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인민 해방 전쟁에서 파르티잔을 이끌며 국토를 해방시킨 경험을 통해, 산악 지형이 많은 유고슬라비아가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과 풀뿌리 저항 전략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파르티잔 부대는 지형을 활용하여 효과적인 무장 저항을 펼쳤다. 이러한 경험과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전민중 방위'(Total National Defense)라는 독특한 방위 시스템이 고안되어 채택되었다.

이 시스템은 말 그대로 모든 국민이 국가 방위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스위스민병 제도와 유사하게, 고등학생 이상의 모든 국민은 침략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할 권리이자 의무를 가졌다. 이 시스템 하에서 훈련받은 국민의 약 60%가 즉시 무장 저항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었으며, 고등학생들은 실탄 사격 훈련을 받고 적의 무기를 빼앗아 싸우는 방법까지 교육받았다.

유고슬라비아의 군사 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군사 조직
조직설명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JNA)정규군
영토방위군 (TO)각 공화국이 독자적으로 보유하는 방위군
치안 경찰군 (밀리샤)치안 담당 경찰군
민병 조직지역 기반의 방위 조직



이 모든 조직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헌법에 따라 정규 군대로 인정받아, 유사시 거대한 통합 방위 체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각 기업과 지역의 자주 관리 조직은 자체 방위 위원회를 두어 비상시 즉각적으로 파르티잔 부대, 사보타주 부대, 통신 연락 부대, 병참 보급 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적이 침략했을 경우, 중앙 지휘부의 명령 없이도 각 지역 저항 조직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소화기, 탄약, 폭약 등 기본적인 무기는 평시에도 자주 관리 조직이 관리하여 즉시 사용할 수 있었고, 사보타주 부대는 주요 교량, 도로, 시설 등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계획되었다.

무기, 탄약, 식량, 연료 등 군수 물자는 게릴라전에 적합하도록 평시부터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엄중하게 보관되었으며, 특히 산악 지역에 집중되었다. 때로는 전투기와 같은 중화기도 산속에 숨겨두거나 산악 도로를 임시 활주로로 사용하여 운용할 계획까지 세워져 있었다.[7]

이러한 전민중 방위 사상과 전략은 티토 집권기인 1974년에 개정된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명확히 규정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전민중 레지스탕스'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총력적인 무장 저항을 국가 방위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으며, 모든 국민은 저항할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 국가 원수조차 국민의 이 저항권을 침해할 수 없었으며, 군사적 점령이나 항복을 수용하는 행위는 반역죄로 간주되었다.

방위권은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으로 보장되었으며, 국가나 사회 그 누구도 이를 빼앗을 수 없다고 명시되었다. 이는 모든 국민이 무기를 들고 싸울 권리가 있음을 의미하며, 실제 전투에서도 개별적인 저항 활동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전민중 방위 시스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장 저항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 즉 직업 군인뿐만 아니라 무기를 든 시민군, 심지어 무기를 들지 않은 저항자까지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군의 일원으로 인정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저항군 병사가 포로가 되었을 경우 제네바 협약에 따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여 사기를 높이고, 정보 수집 및 병참 확보를 용이하게 하는 이점이 있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해 포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학살당했던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사례와 비교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2. 3.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성공적인 저항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948년 티토-스탈린 분열 이후 소련 및 그 동맹국들과 관계를 단절하고, 냉전 기간 동안 비동맹 운동의 주요 회원국으로 활동했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사건은 유고슬라비아 지도부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소련의 잠재적 공격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1] 이 침공은 소규모 국가의 정규군만으로는 질적, 양적으로 우세한 침략자의 기습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었다.[2] NATO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라는 양대 군사 블록 사이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유고슬라비아는,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발생 가능한 대규모 침공 시나리오에 대비하기 위해 독자적인 군사 교리를 수립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3. 군사 교리: 전인민 방위전 (Total National Defense)

1969년 국방법 통과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는 '전국토 방위전' 또는 '전인민 방위전'(ONO, Opštenarodna odbrana|옵슈테나로드나 오브라나sh)이라는 독특한 총력전 군사 교리를 채택했다. 이 교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에 맞서 싸운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성공적인 저항 운동 경험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3], 외부 침략이 발생하더라도 유고슬라비아가 독립과 비동맹 지위를 지키거나 최종적으로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되었다.[2]

전인민 방위전의 핵심 사상은 "침략자에 저항하는 모든 시민은 무장세력의 구성원"이라는 개념에 기반하며[2], 이를 통해 유사시 전체 인구를 하나의 거대한 저항군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1] 이러한 교리의 채택 배경에는 1948년 소련과의 관계 단절 이후 고조된 안보 위협과, 티토 자신의 파르티잔 활동 경험 및 유고슬라비아의 산악 지형에 대한 이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교리를 실현하기 위해 정규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을 보완하는 영토방위군(TO)이 창설되었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교육 과정과 사회 조직, 기업 활동을 통해 전국민적인 방위 태세를 구축하고자 했다.[3][2] 전인민 방위전의 구체적인 개념, 교육 및 훈련 방식, 무장 및 보급 체계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3. 1. 총력전 개념

1969년 국방법 통과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는 '전국토 방위전' 또는 '전인민 방위전'(ONO, Opštenarodna odbrana|옵슈테나로드나 오브라나sh)이라는 총력전 군사 교리를 채택했다. 이 교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에 맞서 싸운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저항 운동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으며[3], 외부 침략이 발생했을 때 유고슬라비아가 독립과 비동맹 지위를 지키거나 최종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2] 이 교리에 따르면, "침략자에 저항하는 모든 시민은 무장세력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었고,[2] 이를 통해 전체 인구를 하나의 거대한 저항군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1]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육 과정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과 기업 활동을 통해 잠재적인 국가 점령 상황에 대비하고 궁극적으로 국토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체 인구를 준비시켰다.[3][2] 이러한 목적을 위해 영토방위군(TO, Teritorijalna odbrana|테리토리얄나 오브라나sh)이 창설되어 침략 시 인구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2] 영토방위군은 평시에 이미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실제 전쟁 발발 시 별도의 조직 및 훈련 단계를 거치지 않고 즉시 투입될 수 있었다.[2] 영토방위군은 정규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을 보완하며, 무장한 지역 주민을 통해 방어의 깊이를 더하고 전투 작전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많은 수의 무장 시민이 저항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잠재적 침략자가 치러야 할 전쟁 비용을 크게 높이고자 했다.[2]

ONO 교리가 상정한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는 나토(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간의 전면전이었다.[2] 이러한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철저히 비동맹 노선을 유지하며, 양 진영 어느 쪽의 군대도 자국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방침이었다.[2] 이 교리는 어느 한쪽 진영이 통신망 확보나 단순히 적군에게 영토를 빼앗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전진 기지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침략으로 간주되어 즉각적인 저항에 부딪힐 것이었다.[2] 침략자의 이념과 관계없이,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점령하려는 모든 세력은 적으로 간주되었다.[2]

이러한 총력전 개념의 배경에는 1948년 소련과의 관계 단절(정확히는 소련 주도의 코민포름에서의 제명) 이후 고조된 안보 위협이 있었다. 관계 단절 이전부터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으로부터 여러 차례 압력을 받아왔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는 독자적인 방위 시스템 구축이 시급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티토는 제2차 세계 대전추축국 점령 하의 국토를 파르티잔 활동으로 해방시킨 경험을 가진 인물로, 풀뿌리 저항 전략의 전문가였다. 그는 대독 전쟁 당시 국내를 이동하며 유고슬라비아가 산악 지형으로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파르티잔 부대는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여 효과적인 무장 저항을 펼쳤다. 1948년 코민포름 제명 이후, 소련군바르샤바 조약 기구 군의 침공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티토는 '토탈 내셔널 디펜스'(전민중 방위) 개념을 고안하고 채택하게 되었다.

이 시스템은 말 그대로 국민 전체가 하나 되어 국가를 방위하는 체제였다. 스위스와 유사한 민병 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고등학생 이상의 모든 국민은 침략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여겨졌다. 이 시스템 덕분에 훈련받은 국민의 약 60%가 유사시 즉시 무장하고 저항에 나설 수 있었다. 실제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고등학생이 되면 실탄 사격 훈련을 받았고, 적의 무기를 빼앗아 싸우는 방법까지 교육받았다.

유고슬라비아의 군사 조직은 정규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외에 각 공화국이 독자적으로 보유하는 영토 방위군, Militia (Yugoslavia)|밀리샤영어라고 불리는 치안 경찰군, 그리고 민병 조직이 있었으며, 모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헌법에서 정규 군대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거대한 조직이 될 수 있었다. 각 기업, 각 지역의 자주 관리 조직은 각각 자체적인 방위 위원회를 조직하고 있었으며, 비상시에는 즉시 파르티잔 부대, 사보타주 부대, 통신 연락 부대, 병참 보급 부대를 조직하여 실전 행동에 돌입하게 되어 있었다.

조직명설명비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정규군국가 중앙 군사력
영토방위군(TO)각 공화국이 독자적으로 보유한 군사 조직지역 방위 및 JNA 지원
Militia (Yugoslavia)|밀리샤영어치안 담당 경찰군내부 치안 유지 및 전시 지원
민병 조직각 지역 및 기업 단위의 자주 관리 조직 기반풀뿌리 저항의 핵심



실제로 적이 침략해 왔을 경우, 가령 상층부로부터의 지령이 없더라도 각 저항 조직은 자율적으로 방침을 결정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었다. 소화기 정도의 무기, 탄약이라면 자주 관리 조직이 평시에도 관리하고 있으므로 즉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폭약도 자주 관리 조직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으므로, 사보타주 부대가 출동하여 주요 교량, 도로, 시설 등을 폭파하게 되어 있었다.

무기, 탄약, 식량, 연료 등의 군수 물자는 이러한 게릴라전 형 전쟁에 적응할 수 있도록 평시부터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또한 유고의 군사 전략은 산악 게릴라전이 기본이므로 산중에 이러한 군수 물자가 보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군수 물자뿐만 아니라 요격용 전투기 등이 산중에 숨겨져 있거나, 산악 도로를 활주로로 삼아 요격을 하게 되어 있었다[7]

유고슬라비아의 방위에 관한 기본 이념 및 전략은 티토가 생존해 있던 시절의 1974년에 개정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헌법(통칭 "1974년 헌법")에 명확하게 담겨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고슬라비아는 "토탈 내셔널 레지스탕스(전민중 군사 저항)"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고, "토탈 내셔널 디펜스"의 형태를 취하며, 총력전으로 무장 저항하기로 했으며, 국민은 모두 그 권리 및 의무를 보유한다. 이를 위해, 설령 국가 원수인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었으며, 군사 점령이나 항복을 받아들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자는 반역죄로 묻게 되어 있었다.

유고에서 방위는 국민 각자의 기본적 인권으로 보장되었다. 이 기본적 인권인 방위권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지며, 국가에 의해서도 사회에 의해서도 결코 빼앗길 수 없다고 규정되었다. 그것과 동시에 한 사람이라도 무기를 들고 싸울 권리가 있으며, 실제로 싸울 때에도 그것이 기본이 되었다.

또한 토탈 내셔널 디펜스의 특징으로는, 무장 저항을 하는 자는 직업 군인은 물론 시민군도 무기를 갖지 않은 자도 모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군 병사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약 레지스탕스 병사가 포로가 되었을 때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며, 사기를 높이거나 정보 수집의 효율화, 병참 확보 등의 목적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Italian resistance movement|이탈리아 파르티잔영어은 정규군 병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포로로 취급받지 못한 채 학살된 경위를 생각하면, 정규군 병사로 인정하는 것은 매우 많은 이점을 가져온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유고슬라비아 내부에서의 민족 대립이 격화되어,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시작되자, 평시부터 소화기류가 자주 관리 조직에 의해 관리되었고, 또한 시민 각자가 무기의 취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 간의 대립에 이러한 화기류가 이용되어, 시민끼리 서로 살육하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3. 2. 교육 및 훈련

유고슬라비아는 1969년 국방법 통과와 함께 '전국토 방위전' 또는 '전인민 방위전'(ONO)이라는 총력전 군사 교리를 채택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에 맞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저항 운동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3], 외부 침략 시 유고슬라비아의 독립과 비동맹 지위를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고안되었다.[2] 이 교리에 따라 "침략자에 저항하는 모든 시민은 무장세력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었으며[2], 전 국민이 유사시 단일화된 저항군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1]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당국은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육 과정뿐만 아니라 각종 조직과 기업을 통해 전 인구를 잠재적 점령에 대비시키고 궁극적으로 국토를 해방시킬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3][2] 특히 고등학교 이상의 국민은 모두 침략하는 적에게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여겨졌다. 고등학생들은 실탄 사격 훈련을 받고, 적의 무기를 빼앗아 사용하는 방법까지 배우는 등 실질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 시스템 덕분에 국민의 약 60%가 즉시 무기를 들고 저항에 나설 수 있는 상태였다.

영토방위군(TO)은 이러한 전국민적 저항 체제의 핵심으로 창설되었으며, 침략 발생 시 즉각적으로 인구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2] TO의 존재는 전쟁 발발 후 별도의 조직 및 훈련 단계를 생략하고 즉각적인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2] TO는 정규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을 보완하여 방어의 깊이를 더하고, 전투 작전을 지원할 무장된 지역 주민을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2]

각 기업과 지역의 자주 관리 조직은 자체 방위 위원회를 운영하며 평시에도 소화기, 탄약, 폭약 등 기본적인 무기를 관리했다. 비상시에는 이 조직들이 즉시 파르티잔 부대, 사보타주 부대, 통신 연락 부대, 병참 보급 부대 등으로 전환되어 자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상부의 지령 없이도 각 저항 조직이 독자적으로 방침을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무기, 탄약, 식량, 연료 등 군수 물자는 게릴라전에 대비하여 평시부터 전국 각지, 특히 산악 지대에 분산되어 엄중하게 보관되었다.[7]

1974년 개정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헌법은 이러한 방위 개념을 명확히 규정했다. 유고슬라비아는 "토탈 내셔널 레지스탕스"(전민중 군사 저항)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토탈 내셔널 디펜스"를 실행하며, 모든 국민은 국가 방위에 참여할 권리이자 의무를 가졌다. 이 권리는 기본적 인권으로 간주되어 국가나 사회에 의해 침해될 수 없으며, 국가 원수조차 국민의 저항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명시되었다. 또한, 군사 점령이나 항복을 수용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이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반역죄로 처벌받도록 규정되었다.

토탈 내셔널 디펜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장 저항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 즉 직업 군인뿐만 아니라 무기를 든 시민과 심지어 무기를 들지 않은 지원 인력까지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군의 일원으로 인정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저항군 병사가 포로가 될 경우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하여 사기를 높이고, 정보 수집 및 병참 확보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해 포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학살당했던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사례를 고려한 조치였다.

3. 3. 무장 및 보급

유고슬라비아의 '전국토 방위전' 교리에 따라, 침략 시 전체 인구가 무장 저항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1][2] 이를 위해 영토방위군(TO)이 창설되어 정규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을 보완하고, 무장한 지역 주민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2]

스위스와 유사한 민병 제도를 기반으로, 고등학생 이상의 모든 국민은 침략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로 여겨졌다. 이 시스템에 따라 훈련받은 국민의 약 60%는 즉시 무장 저항에 참여할 능력을 갖추었다. 실제로 고등학생들은 학교에서 실탄 사격 훈련을 받았으며, 적의 무기를 노획하여 사용하는 방법도 교육받았다.

각 기업과 지역의 자주 관리 조직은 자체 방위 위원회를 운영하며, 비상시에는 즉각적으로 파르티잔 부대, 사보타주 부대, 통신 연락 부대, 병참 보급 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도록 준비되었다. 소화기 수준의 무기와 탄약은 평시에도 이러한 자주 관리 조직이 관리하여 즉시 사용할 수 있었고, 폭약 역시 관리 하에 있어 유사시 사보타주 부대가 주요 교량, 도로, 시설 등을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무기, 탄약, 식량, 연료 등 군수 물자는 게릴라전 수행에 적합하도록 평시부터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엄중하게 보관되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의 군사 전략이 산악 게릴라전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많은 군수 물자가 산악 지역에 은닉되었다. 때로는 군수 물자 외에 요격용 전투기까지 산중에 숨겨두거나, 산악 도로를 임시 활주로로 사용하여 작전을 수행할 계획도 있었다.[7]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무기 분산 및 관리 시스템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시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평소 자주 관리 조직이 관리하던 소화기와 시민들의 무기 사용 능력이 민족 간 분쟁에 악용되어 내전의 참상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4. 영토방위군 (Territorial Defense Forces)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방위군(Teritorijalna odbrana|테리토리얄나 오브라나sh, TO)은 1969년 국가의 '총국방'(Opštenarodna odbrana|옵슈테나로드나 오브라나sh) 개념에 따라 창설된 준군사 조직이다.[8] 정규군인 유고 인민군(JNA)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군사력의 양대 축을 이루었으며, 외부 침략 시 전면전을 통해 영토를 방어하고 JNA를 지원하는 임무를 가졌다. 각 공화국별로 조직되어 주로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 예비군 성격이었으며, 전쟁 시 동원될 유격대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4. 1. 창설

유고슬라비아 영토방위군은 1969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총국방' 교리의 핵심 부분으로 창설되었다.[8] 이는 공화국 헌법과 법률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의 양대 군사 조직 중 하나이자, JNA의 두 번째 구성 요소로 설립된 것이다. 영토방위군의 주된 임무는 침략자에 대한 전면전 교리를 통해 조직적인 무장 저항을 수행하며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방어하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을 지원하고 협력하는 것이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독립, 주권, 영토 보전 및 사회 조직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유고슬라비아 내 각 공화국별로 배치되었다.[8]

4. 2. 역할 및 임무

유고슬라비아는 1969년, 효율적인 영토 방어와 정규군인 유고 인민군(JNA)과의 지원 및 협력을 위한 제2군으로서 영토방위군(Teritorijalna odbrana|테리토리얄나 오브라나sh, TO)을 창설했다. 영토방위군은 유고 인민군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양대 축을 이루었으며,[8] 유고슬라비아 내 각 공화국별로 배치되었다. 이는 침략자에 대한 전면전 교리를 바탕으로 한 유고슬라비아의 '총국방'(Opštenarodna odbrana|옵슈테나로드나 오브라나sh) 개념의 핵심 요소로, 조직적인 무장 저항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방어하고 유고 인민군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영토방위군의 주요 임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독립, 주권, 영토 보전 및 사회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병력은 주로 각 공화국과 지방 자치 단체에 거주하는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예비군이었으며, 전쟁 발발 시 동원될 예정이었다. 각 공화국에는 영토방위군 사령부가 설치되었고, 사령부에는 현역 군인이 근무했지만 대부분의 부대는 예비군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전쟁 기간에만 활동하는 일종의 유격대 성격을 띠었으며, 유고 인민군(JNA)의 현역 부대에 비해 무장은 제한적이었다. 영토방위군은 전쟁 중 산업 시설 가동 유지, 지역 안보 확보, 특히 도시와 중요 군사 시설에 대한 점 방어 임무를 수행했으며, JNA는 적 주력 부대와의 교전을 위한 전략 및 작전 부대 역할을 맡았다.

영토방위군의 전술 개념은 익숙한 지역 지형에서 방어전을 수행하는 소규모 경무장 보병 부대에 초점을 맞추었다.[2] 기본적인 부대 단위는 중대 규모의 분견대였다.[2] 2,000개 이상의 코뮌, 공장, 기타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이러한 부대를 조직하여 지역 방어와 전시 생산 유지에 기여했다.[2] 더불어, 영토방위군은 더 넓은 작전 책임을 지는 일부 대규모 중무장 부대도 운용했다.[2] 대대연대 규모의 부대는 포병, 대공포, 일부 구형 장갑 전투 차량을 갖추고 지역 내에서 작전을 수행했다.[2] 이들은 기동성과 전술적 주도권을 발휘하여 적 기갑 부대나 공습으로부터 소규모 영토방위군 부대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고자 했다.[2] 해안 지역의 영토방위군 부대는 해군 임무도 수행했는데,[2] 일부 군함을 운용하여 해군 작전을 지원하고,[2] 적의 상륙 작전이나 기습으로부터 전략적 해안 지역과 해군 시설을 방어했다.[2] 또한, 일부 잠수부를 훈련시켜 사보타주 및 기타 특수 작전에 투입하기도 했다.[2]

영토방위군은 평시에 대규모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 이는 막대한 비용과 더불어 대부분의 인력이 평시 민간인 신분이라 훈련 참여 시 생업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었다. 구성원의 대다수는 징집병으로 유고 인민군 복무를 마친 예비군이었으며, 예비 장교 양성을 위한 별도의 학교도 운영되었다. 무장은 주로 자스타바 M48과 같은 소총이었고, 1980년대에는 일부 부대에 자스타바 M70이 보급되었다. 일부 부대는 기관총, 경대전차 무기(9M14 말류트카, M80 졸자, M60 무반동포), 대공 무기(스트렐라 2MJ, 20mm 자동포 자스타바 M55), 76mm 산포 M48과 같은 포병 자산, 그리고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구형 트럭 및 장갑차를 보유했다. 우트바 66, An-2와 같은 경비행기가 일부 영토 사령부에 배치되었으며, 가장 강력한 항공 자산은 슬로베니아와 몬테네그로 영토방위군 사령부 소속의 소코 J-20 크라구이 공격기였으나 1989년에 퇴역했다. 모든 영토방위군 부대가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인해 무장 수준은 부대별로 차이가 있었으며, 대부분의 무기는 현대화 과정에서 JNA로부터 넘겨받은 것이었다.

영토방위군 부대는 신체 건강한 민간인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존속 기간 동안, 전시에는 15세에서 65세 사이의 100만에서 30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정규군 또는 게릴라 부대로서 영토방위군 지휘 하에 동원될 수 있었다.

CIA 보고서에 따른 각 공화국별 영토방위군의 추정 전시 전력은 다음과 같다.[5]

공화국추정 전력
세르비아300,000명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200,000명
크로아티아200,000명
마케도니아100,000명
슬로베니아60,000명
몬테네그로30,000명


4. 3. 구성 및 편성

유고슬라비아는 1969년 효과적인 영토 방어와 정규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의 지원 및 협력을 위한 제2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영토방위군(Teritorijalna odbrana|테리토리얄나 오브라나sh, TO)을 창설했다. 영토방위군은 JNA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의 양대 군사 조직을 이루었다.[8] 영토방위군은 유고슬라비아 내 각 공화국별로 배치되었으며, 주로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기반으로 한 예비군 성격을 띠었다. 전쟁 발생 시 동원될 이들 부대는 각 공화국에 설치된 영토방위군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사령부에는 현역 군인이 배치되었으나, 대부분의 부대원은 예비군으로 구성되었다.

영토방위군은 전쟁 기간에만 활동하도록 조직된 일종의 유격대였으며, JNA에 비해 제한된 무장을 갖추었다. 주요 임무는 전쟁 중 산업 시설 보호와 지역 안보 유지, 특히 도시와 중요 군사 시설에 대한 점 방어 제공이었다. 반면, JNA는 적과의 교전을 위한 전략 및 작전 부대를 담당했다.

영토방위군의 기본 개념은 익숙한 지역 지형에서 방어전을 수행하는 소규모 경무장 보병 부대에 초점을 맞추었다.[2] 가장 일반적인 부대 형태는 중대 규모의 분견대였다.[2]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2,000개 이상의 코뮌(지방 자치체), 공장, 기업 등이 이러한 부대를 자체적으로 조직했으며, 이들은 지역 방어와 함께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지역 생산 활동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2] 영토방위군에는 더 넓은 작전 책임을 지는 규모가 크고 중무장한 부대도 일부 포함되었다.[2] 대대연대급 부대는 포병, 대공포, 일부 장갑 전투 차량을 운용하며 지역 작전을 수행했다.[2] 이들은 기동성과 전술적 주도성을 발휘하여 적의 기갑 부대나 공습으로부터 소규모 영토방위군 부대가 받는 압박을 완화하고자 했다.[2]

해안 지역의 영토방위군 부대는 해군 관련 임무도 수행했다.[2] 일부 군함을 운용하여 해군 작전을 지원했으며, 전략적 해안 지역과 해군 시설을 적의 상륙 작전이나 기습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2] 또한, 일부 부대원은 잠수부 훈련을 받아 사보타주나 기타 특수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2]

영토방위군은 평시에 대규모 훈련이나 전력 점검을 거의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인력이 평시에는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훈련에 동원하는 것은 비용 문제뿐만 아니라 생업 활동에도 지장을 주었기 때문이다. 영토방위군을 구성하는 예비군 대부분은 징병 기간 동안 JNA에서 복무했던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으며, 예비 장교 양성을 위한 별도의 학교도 운영되었다.

무장은 주로 자스타바 M48과 같은 소총이었으나, 1980년대에는 일부 부대에 자스타바 M70 돌격소총이 보급되었다. 일부 기관총과 함께, 여단급 부대는 9M14 말류트카 대전차 미사일, M80 졸자 휴대용 대전차 로켓, M60 무반동포, 스트렐라 2MJ 휴대용 대공 미사일, 20mm 자스타바 M55 대공포, 76mm 산포 M48과 같은 포병 자산을 보유했다. 또한 구형 트럭과 일부 장갑차(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노후 장비)도 운용했다. 우트바 66, An-2와 같은 경비행기가 일부 영토 사령부에 배치되었으며, 가장 강력한 항공기로는 소코 J-20 크라구이 공격기가 있었으나 1989년에 퇴역했다. 모든 영토방위군 부대가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 부족으로 인해 무장 수준은 부대별로 차이가 컸다. 대부분의 무기는 현대화 과정에서 JNA가 퇴역시키는 장비를 넘겨받아 확보했다.

영토방위군 부대는 신체 건강한 민간인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존속 기간 동안, 전쟁 시 약 100만 명에서 300만 명의 시민이 정규군 또는 게릴라 부대로서 영토방위군 지휘 하에 동원될 수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에 따른 각 공화국별 영토방위군의 추정 전시 전력은 다음과 같다.[5]

CIA 추정 공화국별 영토방위군 전시 전력[5]
공화국추정 전력
세르비아300,000명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200,000명
크로아티아200,000명
마케도니아100,000명
슬로베니아60,000명
몬테네그로30,000명


4. 4. 해체와 유고슬라비아 전쟁

각 유고슬라비아 연방 구성 단위가 자체적인 무장 부대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언젠가 이들이 분리주의 활동 과정에서 연방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에 대항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러한 우려는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유고슬라비아 전쟁 동안 현실이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구성 공화국의 영토방위군(TO) 부대는 기존의 충성을 버리고 분리주의 성향의 준군사 조직으로 변모했다. 이들 이전 TO 부대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탈영병 및 군사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등장한 독립 국가 및 기타 정치 단체의 군대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의 군대가 포함된다.

한편, 유고슬라비아의 독특한 '전민중 방위' 시스템은 평시에도 각 지역의 자주 관리 조직이 소화기 등 무기와 탄약을 관리하고, 시민들이 무기 사용 훈련을 받도록 했다. 이는 외부 침략에 대한 강력한 저항 능력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으나, 1990년대 들어 내부의 민족 대립이 격화되고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시작되자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평소 무기 접근성이 높고 사용법을 숙지하고 있던 시민들이 민족 갈등 속에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면서 내전의 참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참조

[1] 논문 Civil-Military Relations in Yugoslavia, 1971-1975 https://journals.sag[...] 1976
[2] 간행물 Yugoslavia: a country study https://www.loc.gov/[...] "[[Federal Research Division]], [[Library of Congress]]" 1992
[3] 논문 The Yugoslav Concept of "All National Defense": A Deterrence to Great Powers http://www.icwa.org/[...] American Universities Field Staff, Inc. 1971-11
[4] 웹사이트 Ustav Socijalističke Federativne Republike Jugoslavije IZ 1974 http://mojustav.rs/w[...] 1974
[5] 웹사이트 Yugoslavia: Military Dynamics of a Potential Civil War https://www.cia.gov/[...] 1991-03-13
[6] 문서 「総合人民防衛」との訳もある。また、過去スイスにおいて採用されていた同名の防衛構想は「総合国家防衛」と訳される
[7] 문서 当時のユーゴスラビア国内ではこうした軍需物資を隠匿する必要上、山中の道路に一時停止禁止を示す標識なども存在した
[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mojustav.rs/w[...] 20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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