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키 유키오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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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자키 유키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였다. 나미쇼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1961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이끌며 '괴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하여 신인왕을 수상했고, 1964년부터 1966년까지 3년 연속 20승을 기록했으며, 1965년에는 27승을 거두며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어깨 부상으로 인해 1973년 29세의 나이로 은퇴했으며, 통산 107승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음식점을 운영하고 스포츠 관련 회사에서 근무하며 소년 야구 지도를 하다가 2013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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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키 유키오 (야구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선수명 | 오자키 유키오 |
로마자 표기 | Yukio Ozaki |
출생지 | 오사카부 이즈미오쓰시 |
신장 | 176 |
체중 | 83 |
수비 위치 | 투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62년 |
첫 출장 | 1962년 4월 8일 |
마지막 경기 | 1973년 6월 5일 |
선수 경력 | |
경력 | 도에이 플라이어스 (1962 - 1973) 닛타쿠홈 플라이어스 (1962 - 1973) |
2. 선수 시절
오자키 유키오는 나미쇼 고등학교(현재의 오사카 체육대학 나미쇼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1년 제43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 투수가 되어 ‘괴동’이라고 불렸다.[27] 같은 이름을 가진 오자키 유키오와 닮았다고 하여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고등학교 1년 선배로 스미토모 다이라가 있고, 1년 후배로 다카다 시게루가 있다.
1961년 11월 6일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29] 11월 14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했다.[30] 프로 첫 해인 1962년, 첫 등판에서 승리 투수가 되는 등 20승 9패, 평균 자책점 2.42의 성적으로 신인왕에 선정되었다.[31] 18세의 신인왕 수상은 현재까지 역대 최연소 기록이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3년 연속 20승을 기록했고, 1965년에는 27승(23선발승)으로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32]
그러나 손가락 물집과 혹사의 영향으로 어깨 부상이 생겨 1968년 이후로는 승수가 줄었고,[28] 결국 1973년 29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프로 통산 107승을 기록하여 여름 고시엔 우승 투수로는 전후 최초로 프로 통산 100승 투수가 되었다.
오른쪽 어깨 통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구종을 직구로 던질 정도로 빠른 공을 던졌다고 평가받는다. 주쿄 대학 체육학부 유아사 가게모토 교수의 계산에 따르면, 전성기 시절 오자키의 직구는 159km/h에 육박했다.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4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62년 | 도에이 닛타쿠홈 | 49 | 19 | 9 | 4 | 1 | 20 | 9 | -- | -- | .690 | 851 | 207.2 | 170 | 10 | 63 | 4 | 9 | 196 | 5 | 0 | 72 | 56 | 2.42 | 1.12 |
1963년 | 17 | 13 | 4 | 3 | 0 | 7 | 5 | -- | -- | .583 | 380 | 93.0 | 83 | 13 | 29 | 0 | 1 | 60 | 0 | 1 | 34 | 30 | 2.90 | 1.20 | |
1964년 | 55 | 33 | 11 | 4 | 1 | 20 | 18 | -- | -- | .526 | 1167 | 286.0 | 233 | 23 | 90 | 2 | 9 | 197 | 1 | 0 | 93 | 81 | 2.55 | 1.13 | |
1965년 | 61 | 37 | 26 | 6 | 5 | 27 | 12 | -- | -- | .692 | 1444 | 378.0 | 261 | 23 | 63 | 4 | 11 | 259 | 1 | 0 | 91 | 79 | 1.88 | 0.86 | |
1966년 | 65 | 29 | 15 | 2 | 6 | 24 | 17 | -- | -- | .585 | 1162 | 292.0 | 268 | 23 | 40 | 4 | 2 | 122 | 4 | 1 | 100 | 85 | 2.62 | 1.05 | |
1967년 | 28 | 21 | 7 | 2 | 1 | 6 | 14 | -- | -- | .300 | 531 | 126.2 | 132 | 16 | 25 | 3 | 3 | 67 | 0 | 0 | 58 | 43 | 3.05 | 1.24 | |
1968년 | 14 | 4 | 0 | 0 | 0 | 0 | 0 | -- | -- | ---- | 88 | 19.0 | 27 | 5 | 5 | 0 | 2 | 4 | 0 | 0 | 15 | 13 | 6.16 | 1.68 | |
1969년 | 7 | 1 | 1 | 0 | 1 | 0 | 2 | -- | -- | .000 | 75 | 17.1 | 22 | 5 | 2 | 0 | 0 | 6 | 0 | 0 | 14 | 11 | 5.82 | 1.38 | |
1970년 | 24 | 2 | 0 | 0 | 0 | 0 | 2 | -- | -- | .000 | 193 | 43.0 | 56 | 11 | 11 | 0 | 0 | 41 | 0 | 0 | 30 | 28 | 5.86 | 1.56 | |
1971년 | 24 | 2 | 0 | 0 | 0 | 0 | 3 | -- | -- | .000 | 170 | 40.1 | 46 | 6 | 12 | 0 | 1 | 26 | 1 | 1 | 22 | 20 | 4.50 | 1.44 | |
1972년 | 17 | 2 | 0 | 0 | 0 | 3 | 1 | -- | -- | .750 | 151 | 39.2 | 27 | 4 | 7 | 1 | 2 | 29 | 0 | 0 | 12 | 10 | 2.25 | 0.86 | |
1973년 | 3 | 0 | 0 | 0 | 0 | 0 | 0 | -- | -- | ---- | 32 | 6.0 | 12 | 4 | 2 | 0 | 0 | 3 | 0 | 1 | 9 | 9 | 13.50 | 2.33 | |
통산 : 12년 | 364 | 163 | 73 | 21 | 15 | 107 | 83 | -- | -- | .563 | 3244 | 1548.2 | 1337 | 143 | 349 | 18 | 40 | 1010 | 12 | 4 | 550 | 465 | 2.70 | 1.09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 도에이(도에이 플라이어스)는 1973년에 닛타쿠홈(닛타쿠홈 플라이어스)으로 구단명을 변경.
2. 1. 고등학교 시절
나미쇼 고등학교(현재의 오사카 체육대학 나미쇼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1년 제43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 투수가 되어 ‘괴동’이라고 불리었다.[27] 전년도 여름 고시엔에서 호세이 대학 제2 고등학교의 시바타 이사오와의 세 번에 걸친 대결은 명승부로 알려져 있다.[28] 고등학교 1년 선배로 스미토모 다이라가 있고, 1년 후배로 다카다 시게루가 있다.1960년에 1학년임에도 1학년 위의 오츠카 야스오와 배터리를 이루어 여름 고시엔에 출전했다. 2회전에서 호세이 제2고등학교와 맞붙었지만, 시바타 이사오와의 첫 대결은 0-4로 완봉패했다. 호세이 제2고등학교는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듬해 1961년에는 봄, 여름 고시엔에 연속 출전했다. 봄 선발에서는 준준결승에서 또다시 호세이 제2고등학교와 대결, 3회에 선취점을 얻었지만 1-3으로 역전패했다. 호세이 제2고등학교는 여름과 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여름 고시엔 준결승에서 호세이 제2고등학교와 세 번째 대결을 펼쳐, 9회에 2점 차를 따라잡아 연장 11회 접전 끝에 4-2로 첫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는 좌완 에이스 모리카와 가츠토시(게이오 - 마쓰시타 전기)를 보유한 기토인고등학교에 고전했지만, 1-0으로 꺾고 우승했다. 1년 위 팀 동료로는 오츠카 외에 3루수 오쿠마 타다요시, 2루수 스미토모 타이라가 있었고, 1년 아래로는 외야수 타카다 시게루가 있었다.
2. 2. 프로 선수 시절
오자키 유키오는 나미쇼 고등학교(현재의 오사카 체육대학 나미쇼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1년 제43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 투수가 되어 ‘괴동’이라고 불리었다.[27] 고등학교 1년 선배로 스미토모 다이라와 1년 후배로 다카다 시게루가 있다. 같은 해 11월 6일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29] 11월 14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했다.[30]1962년, 프로 첫 등판에서 승리 투수가 되는 등 20승(10선발승) 9패, 평균 자책점 2.42의 성적으로 신인왕에 선정되었다.[31] 18세에 수상한 신인왕은 현재까지 역대 최연소 기록이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3년 연속 20승을 기록했고 1965년에는 27승(23선발승)(유일한 선발 20승)을 올려 다승왕 타이틀을 석권했다.[32] 그러나 손가락 물집과 혹사의 영향으로 어깨 부상이 나타나 1968년 이후로는 승리에서 멀어졌고[28] 결국 1973년 29세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프로 통산 107승을 올려 여름의 고시엔 우승 투수로는 전후 최초의 프로 통산 100승 투수가 되었다.
구속이 매우 빨랐다고 평가받는 투수로 오른쪽 어깨의 통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구종을 직구로 던졌다. 주쿄 대학 체육학부의 유아사 가게모토 교수의 계산에 따르면 전성기 시절 오자키의 직구는 159km/h에 육박했다.
1962년 4월 8일 개막 2차전 다이마이 오리온즈 전에서 10회 초부터 릴리프로 첫 등판, 모두 직구로 2번 가츠라기 다카오를 투수 땅볼, 3번 에노모토 키하치와 4번 야마우치 카즈히로를 연속 삼진으로 처리한 후, 그 뒤 이닝에서 끝내기 승리를 거두면서 오자키는 단 15개의 공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14] . 4월 22일에는 첫 선발로 긴테츠의 쿠보 마사히로와 맞붙어 12탈삼진을 잡고 완봉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순조롭게 승수를 쌓아 올스타전 전까지 18승을 거두었다[15] . 올스타전에도 출전하여 2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 후 더운 8월에 피로가 최고조에 달하여 약 2개월 동안 승리에서 멀어졌지만[15], 최종적으로 20승 9패, 평균 자책점 2.42(리그 5위)의 성적으로 도에이의 리그 첫 우승에 기여, 신인왕으로 선정되었다[16] . 18세의 신인왕은 현재까지 역대 최연소이다. 그러나 같은 해 한신 타이거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서 릴리프로 등판했지만, 연장 10회에 요시다 요시오에게 끝내기 2루타를 맞아 패전 투수가 되었고, 그 후 등판 기회는 없었다.
1963년에는 4월에 2완봉승을 거둔 후, 부상으로 부진이 이어져 7승에 그쳤다. 그러나 1964년에는 20승 18패, 평균 자책점 2.55(리그 6위)로 부활, 또한 리그 최다인 197탈삼진을 기록했다. 1965년에는 너클볼을 익히고, 지금까지 항상 빠른 공으로 삼진을 잡던 곳에서 너클볼로 장난치면서 삼진을 잡아볼까 하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17] . 이 해에는 리그 최다인 61경기에 등판, 27승(12패)으로 최다승을 획득, 게다가 평균 자책점은 1.88로 리그 2위, 탈삼진은 리그 최다인 259개로 좋은 성적을 거두어 베스트 나인도 획득했다. 1966년에도 24승, 평균 자책점 2.62(리그 8위)로 3년 연속 20승을 기록했다.
1967년은 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올스타전 전까지 불과 4승(10패) 평균 자책점 3.58이었다. 게다가 여름 무렵부터 어깨에 걸리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들여 워밍업을 함으로써 어떻게든 경기에서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고, 8월 25일 니시테츠 라이온즈 전에서 6승을 완봉으로 장식했다[18] . 그러나 무리는 계속되었고, 9월 중순 야마가타 원정 무렵에는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1m도 던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후 침·뜸·사우나·마사지 등, 좋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치료를 시도했지만, 어깨 상태는 돌아오지 않았다[17] .
1968년에 복귀했지만 부상 이후 구속이 올라가지 않아 변화구 위주로 스타일을 바꾸었지만, 승리에서 멀어졌다[5] . 1971년 오프 연봉 협상에서는 구단으로부터 어깨가 나을 때까지 타격 투수를 하라는 통보를 받고, 일단 은퇴를 결심했다. 그러나 은퇴계를 지참하여 구단 사무실에 갔을 때, 감독 타미야 켄지로에게 "여기서 던져 버리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된다. 남자라면, 다시 한번 해 봐"라는 설득을 받고 은퇴를 철회한다.
1972년에는 5월 이후 릴리프 등판한 6경기 모두 무실점으로 막았고, 6월 25일 긴테츠를 상대로 시즌 첫 선발, 7회를 던져 3안타 2실점으로 호투, 5년 만에 승리 투수가 되었다[18] . 같은 해 3승을 기록하며 약간의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다음 해 1973년 6월 연습을 하던 중 어지럼증이나 식은땀과 같은 증상이 발생.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간이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고 1개월간 누워 있게 되었고, 같은 해 오프에 29세로 현역에서 은퇴했다[19] .
3. 은퇴 이후
은퇴 후 레스토랑을 경영했고, 이후 스포츠 관련 회사에서 근무하며[28] 소년 야구 지도를 했다.[28] 2013년 6월 13일에 폐암으로 사망했다(향년 68세).[33]
4. 투구 스타일
스리쿼터보다 약간 아래에서 던지는 빠른 공을 무기로 삼았으며, 그 외에 커브, 슈트, 너클 등을 던졌다.[17] 오른쪽 어깨 통증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대부분 스트레이트를 던졌다. 프로 야구 역사상 속구 투수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선수 중 한 명이다.[24] 유아사 카게모토의 계산에 따르면, 오자키가 전력으로 투구했을 때 구속은 156.7km였다.[25] 고등학교 1년 후배였던 다카다 시게루는 "커브는 중학생 수준이었지만 직구는 속구왕이었다"고 평가했다.[26]
제구력은 좋지 않아, 목표한 코스로 들어가는 공은 10구 중 3구 정도였다. 데이터를 모으거나 메모를 하지 않았고, 타자의 단점을 대략적으로 파악하여 마운드에 올랐을 때의 감각을 중요하게 여겼다. 투구가 어디로 갈지 몰랐기 때문에 타자도 노릴 공을 좁히기 어려웠다고 한다.[17] 반면 통산 볼넷 허용률은 2.02로, 볼넷은 적었다.
5. 상세 정보
도
속
판
발
투
봉
4
구
리
전
이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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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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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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