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키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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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자키 유키오는 1858년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나, 1890년 미에현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62년 이상 의원직을 역임하며 '헌법주의의 신'으로 불렸다. 게이오기주쿠에서 수학하고 니가타 신문 주필을 거쳐, 도쿄부회 의원, 도쿄 시장 등을 역임하며 헌정옹호운동과 다이쇼 정변에 참여했다. 문부대신을 지냈으며,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보통선거 운동과 여성 참정권을 지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반전, 세계 연방주의 활동을 펼쳤으며, 195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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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키 유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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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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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자키 유키오 |
일본어 이름 | 尾崎 行雄 |
로마자 표기 | Ozaki Yukio |
출생일 | 1858년 12월 24일 |
출생지 | 일본 가나가와마타노 |
사망일 | 1954년 10월 6일 |
사망지 | 도쿄 |
배우자 | 오자키 데오도라 (1904년 결혼) |
자녀 | 4남: 오자키 고키 3녀: 소마 유키카 |
학력 | |
최종 학력 | 도쿄 대학 중퇴 게이오기주쿠 대학 중퇴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과거: 입헌개진당, 진보당, 헌정당, 헌정본당, 정우회, 유흥회, 중정회, 헌정회, 혁신구락부) |
중의원 의원 | 미에 25선 (최다 당선 기록) |
중의원 의원 임기 시작 | 1890년 7월 2일 |
중의원 의원 임기 종료 | 1953년 3월 14일 |
법무대신 | 내각: 제2차 오쿠마 내각 임기 시작: 1914년 4월 16일 임기 종료: 1916년 10월 9일 |
문부대신 | 내각: 제1차 오쿠마 내각 임기 시작: 1898년 6월 30일 임기 종료: 1898년 10월 27일 |
도쿄 시장 | 임기 시작: 1903년 6월 29일 임기 종료: 1912년 6월 26일 |
기타 정보 | |
칭호 및 훈장 | 중의원 명예 의원 도쿄도 명예 도민 |
2. 생애
오자키 유키오는 1858년 12월 24일(안정 5년 11월 20일) 가나가와현 쓰쿠이군 마타노무라(현 사가미하라시 미도리구 마타노)에서 오자키 유키마사와 그의 아내 사다코 사이에서 태어났다.[2] 에도(현재의 도쿄)에서 서쪽으로 약 56km 떨어진 사가미 산지에 위치한 곳이었다.[2] 오자키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신이었으나, 다케다 신겐에게 공격받아 몰락했다. 이후 1590년 후호조씨가 멸망한 후 마타노로 이주하여 대대로 촌장을 지냈다.[32] 아버지 유키마사는 보신 전쟁 당시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부대에 참가하여 아이즈 전투를 치렀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단정대의 관리가 되었다.
오자키는 11살까지 마타노무라에서 지낸 후, 아버지를 따라 도쿄와 다카사키, 야마다(현 미에현 이세시 우지야마다) 등지로 이사하며 공부했다.[32] 1874년 동생과 함께 상경하여 게이오기주쿠 동자국에 입학, 주임인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인정받아 뛰어난 학생이 되었다.[33] 1875년 크리스마스에는 성공회 선교사 A.C. 쇼에게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29][34] 이후 공학료(후의 공부대학교, 현 도쿄대학 공학부)로 전학하려 할 때 쇼에게서 영어와 고등 수학을 배웠다.[35]
1876년 공학료에 재입학했으나, 학풍 차이와 이화학에 대한 싫증으로 1년도 채 되지 않아 퇴학했다.[36] 그 후 게이오기주쿠로 돌아와 아사부키 에이지가 경영한 『민간 잡지』 편집에 참여하고, 1879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으로 니가타 신문의 주필이 되었다.[36]
오자키는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하여 주임인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인정받았고, 1875년에는 성공회 선교사 A.C. 쇼에게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29][33][34] 이후 공학료(후의 공부대학교, 현 도쿄대학 공학부)에 진학했으나, 학풍 차이 등으로 1년도 채 되지 않아 퇴학했다.[35]
게이오기주쿠로 돌아온 오자키는 1879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으로 니가타 신문의 주필이 되었다.[36] 20세에 니가타 신문(니가타 신문)의 편집장이 된 것이다.[3] 22세에 도쿄로 돌아와 통계국에 임명되었고, 1885년 도쿄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3]
오자키는 1885년 도쿄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887년 치안유지법에 따라 3년간 도쿄에서 추방당했다.[3] 보안조례에 의해 도쿄에서 추방당할 당시, 오자키는 “도리가 물러서는 시대를 개탄한다”라고 말하며, 호를 학당에서 억당(愕堂)으로 바꾸었다(후에 심신의 쇠약을 느껴 ‘愕’의 획을 고쳐 아당(咢堂)으로 했다).[38]
1882년, 『호치 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어 입헌개진당 창당에 참여했지만, 오쿠마 시게노부의 기이한 탈당에 불신감을 느꼈다. 이듬해, 도쿄부회 개선에서 니혼바시구에서 추천되어 최연소로 부의원이 되고, 상치위원에 선출된다.[37] 정부의 조약 개정안에 대한 강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자, 오자키는 반서구화주의의 급선봉이 되어 고토 쇼지로를 내세워 대동단결운동을 추진했다.
1887년, 새로 제정된 치안유지법에 따라 3년간 도쿄에서 추방당했다.[3] 오자키는 “도리가 물러서는 시대를 개탄한다”라고 말하며, 호를 학당에서 억당(愕堂)으로 바꾸었다(후에 심신의 쇠약을 느껴 ‘愕’의 획을 고쳐 아당(咢堂)으로 했다).[38] 호시 토오루와 하야시 유조 등의 도사파와 친분을 맺고, 지인들 사이를 돌아다녔다.[37]
1888년 미국을 거쳐 영국을 경유, 일본으로 돌아왔다.[4] 1890년 미에현에서 출마하여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후,[3] 25번이나 재선되며 62년 이상 의원직을 역임했다.[4][5]
제1차 마쓰가타 내각 제3회 의회에서 군함 제조비 삭제 문제 등에서 활약했으며, 제2차 이토 내각 제6회 의회에서는 내각 탄핵 상소문을 제출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청일전쟁 발발 후에는 동아시아 대계를 세워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하며 여론을 선도했다. 삼국 간섭에 이토 히로부미가 굴복하자, 오자키는 대외 강경파의 선두에 서서 정유유지회를 조직하여 연설했다.
제2차 마쓰가타 내각이 성립되자 오쿠마 시게노부의 추천으로 외무 참사관에 취임했지만, "26세기 사건"과 카바야마 스키나리의 말 바꾸기 등으로 인해 퇴각했다. 이후 칙임관 신분으로 진보당 회의에 참석하여 내각을 공격하다 징계 면직 처분을 받았다.
1898년 6월 21일, 진보당과 자유당이 합동하여 헌정당이 결성되었다. 제1차 오쿠마 내각이 성립되었고, 오자키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문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제6회 총선거에서 헌정당은 압도적으로 승리했지만, 내부 항쟁과 엽관운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내각은 크게 흔들렸다. 8월 22일, 오자키는 제국교육회의 요청으로 연설했지만, 이토 미요지가 경영하는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말꼬리를 잡혀 공격을 받았다(공화연설 사건).[39] 10월 24일, 오자키는 병을 이유로 문상을 사임했고, 후임을 둘러싸고 헌정당은 분열되었고, 오쿠마-이타가키 내각도 총사퇴했다.
제2차 야마가타 내각이 발족하자 헌정본당의 최고 간부에 속해 있었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하여 의화단의 난 이후의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의기투합했다. 입헌정우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헌정본당을 탈당하고, 정우회의 총무 위원 중 한 명이 되어 오자키는 호시 토오루와 함께 원내 총무를 맡았다. 제1차 가쓰라 내각이 발족하자 당무 집행의 상무 위원 5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곧 호시 토오루가 암살당하고, 당무의 중심은 오자키와 마쓰다 마사히사 두 사람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그 후 이토와도 대립하여 탈당했다.
1903년부터 1912년까지 도쿄 시장을 역임했다. 오자키의 도쿄 시장 재임 중에 도쿄시가 도쿄 철도를 매수하고 도쿄시 전기국을 설치했다.
1903년부터 1912년까지 도쿄 시장을 역임했다.[5] 도쿄 시장 재임 중, 오자키는 도시 기반 시설 개선에 힘썼다. 상하수도 개선, 도로 포장, 노면 전차 서비스 확장, 가스 회사 합병 등을 감독했다.[13]
도쿄 시장으로서 오자키는 외국 고위 인사를 접대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미국 국무장관과 영국의 필드 마셜 로드 키치너와 같은 인물들이 도쿄를 방문했을 때, 오자키가 이들을 맞이했다.[14]
1910년, 오자키는 도쿠가와 이에사토 왕족이 이끄는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워싱턴 D.C.를 방문했다.[15]
1910년 도쿄시는 워싱턴 D.C.에 2,000그루의 벚꽃나무를 기증했으나, 이 나무들은 병들어 파괴되었다.[16] 1912년, 도쿄시는 이를 대체하기 위해 3,020그루의 벚꽃 묘목을 다시 기증했다.[17] 이후 워싱턴 D.C.의 포토맥 강 서쪽 공원에 있는 타이달 베이슨 주변에서 매년 벚꽃이 피게 되었으며, 이는 오자키가 도쿄 시장 시절 추진한 사업의 결과였다.[18] 이 벚꽃들은 전국 벚꽃 축제의 시초가 되었다.[19]
오자키는 시장 재임 중 도쿄 철도를 매수하고 도쿄시 전기국을 설치하여 도시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8년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문부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6] 공화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은 연설(공화연설 사건) 때문에 사임해야 했다.[39] 이후 입헌정우회 창립에 참가했다. 제1차 카쓰라 내각에서는 당무 집행 상무 위원 5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호시 토오루가 암살당하고 당무의 중심은 오자키와 마쓰다 마사히사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이토와도 대립하여 탈당했다.[20]
1903년부터 1912년까지 도쿄 시장을 역임하면서, 오자키는 도쿄시의 도쿄 철도 매수 및 도쿄시 전기국 설치를 추진했다.[40] 1910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사토와 함께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벚꽃나무를 기증하는 외교 활동을 펼쳤다.[15]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이개사단증설 문제로 사퇴하고, 군벌의 지지를 받은 카쓰라 다로가 내무대신이 되자, 오자키는 헌정옹호운동에 참여하여 카쓰라를 "옥좌를 성벽으로 하고 조칙을 탄환으로 하는 자"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20] 이는 다이쇼 정변의 계기가 되었다.
오자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축과 국제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2] 유럽 여러 국가를 시찰하며 전쟁의 비참함을 목격한 후,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군축론자로 전향했다.[42]
제1차 야마모토 내각이 지멘스 사건으로 사퇴하고, 제2차 오쿠마 내각이 성립되었다.[42] 오자키는 사법대신으로 입각했다. 이후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당수로 추대하여 헌정회를 결성하고 최고 간부가 되었다.
오자키는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시찰을 떠났다.[42] 이때의 경험은 그를 군축론자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42]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는 보통선거 운동에 참여하고,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지원하는 등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42] 신부인 협회의 치안경찰법 개정 운동을 지원했고, 군축 추진 운동과 치안유지법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42]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와 반군 연설을 한 사이토 타카오(斎藤隆夫)의 제명에 반대하는등, 의회주의 민주주의를 옹호했다.[42]
정계에서는 점차 고립되어 헌정회를 탈당하고 무소속 의원이 되었지만, 이후 30년 이상 무소속으로 활동하며 군축과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42]
오자키는 군국주의에 반대했으며,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하여 당국에 의해 구금되기도 했다.[12] 1921년에는 암살자가 그의 집으로 뛰어들었지만, 그는 딸 유키카와 함께 정원에 숨었다.
{{poemquote|
젊은이를 몰아붙인 것이 애국심이었다면,
나의 암살자는 그에 대한 영광을 받을 만하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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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보통선거 운동에 특히 적극적이었고, 1925년 보통남자선거권이 제정되었다. 1930년대 독립 정치인으로서 그는 일본 군부의 증가하는 영향력을 비판하고 여성의 투표권을 옹호했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중에 투옥되었다.[12]
쇼와 6년(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 군부의 정치 개입이 잇따라 정당 정치는 위기에 처했다. 쇼와 7년(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가 암살되자 정당 내각은 막을 내렸다.
2·26 사건 이후의 히로타 내각이 1년도 채 못 되어 무너지고, 하야시 센주로가 조각하면서 쇼와 12년(1937년) 2월 17일, 오자키는 의회에서 연단에 섰다. 제1차 고노에 내각이 탄생하고 중일전쟁이 깊어지자, 니시오 스에히로의 연설에 연좌된 사건으로 의회 구내에 오자키의 동상을 건립하려던 계획도 중단되었다. 대정익찬회 결성,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과의 일독이 삼국 동맹을 거쳐 도조 히데키가 내각을 조각하자, 오자키는 의회 정치에 회의를 느껴 산장에 은거하며 더 이상 상경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인 쇼와 17년(1942년)에 실시된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익찬선거)에는 비추천 출마로 당선되었다. 쇼와 18년(1943년), 전년도 총선거 당시 다가와 다이키치로의 응원 연설에서 익찬 선거 비판을 한 가운데 인용한 川柳의 “팔고 집과 당나라 글씨로 쓰는 3대째”가 쇼와 천황의 치세를 풍자하는 것이라고 여겨 불경죄로 기소되었다(오자키 불경 사건). 1944년(쇼와 19년)에 대심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오자키는 보통선거 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1925년 보통남자선거권이 제정되는데 기여했다. 1930년대에는 일본 군부의 영향력을 비판하고 여성의 투표권을 옹호했으며,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중에 투옥되기도 했다.[12] 그는 "헌법주의의 신"(''kensei no kami'')과 "의회 정치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8]
그는 "헌법주의의 신"(''kensei no kami'')과 "의회 정치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8]
1898년 문부大臣이 되었으나,[6] 의회의 보수파가 공화주의를 조장한다고 여긴 연설 때문에 사임해야 했다.[6] 이후 1914년에는 법무大臣을 역임했다.[7]
패전 후, 오자키 유키오는 반전, 세계 연방주의 및 친민주주의 활동에 참여하며 정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1946년 정삼위(正三位)훈일등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을 반납하고 정계 은퇴를 결심했지만, 같은 해 총선거에서 미에현 전 지역구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 1947년 총선거에서도 미에 2구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43] 전후 국회에서도 민주주의 부활과 세계 평화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1953년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여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중의원으로부터 명예의원 칭호를 받았다.
1954년 10월 6일, 직장암으로 인한 영양장애와 노쇠로 게이오 병원에서 사망했다().[44] 묘소는 가마쿠라의 엔가쿠지에 있다.
2. 1. 초기 생애 (출생 및 유년 시절)
오자키 유키오는 1858년 12월 24일(안정 5년 11월 20일) 가나가와현 쓰쿠이군 마타노무라(현 사가미하라시 미도리구 마타노)에서 오자키 유키마사와 그의 아내 사다코 사이에서 태어났다.[2] 에도(현재의 도쿄)에서 서쪽으로 약 56km 떨어진 사가미 산지에 위치한 곳이었다.[2] 오자키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신이었으나, 다케다 신겐에게 공격받아 몰락했다. 이후 1590년 후호조씨가 멸망한 후 마타노로 이주하여 대대로 촌장을 지냈다.[32] 아버지 유키마사는 보신 전쟁 당시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부대에 참가하여 아이즈 전투를 치렀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단정대의 관리가 되었다.오자키는 11살까지 마타노무라에서 지낸 후, 아버지를 따라 도쿄와 다카사키, 야마다(현 미에현 이세시 우지야마다) 등지로 이사하며 공부했다.[32] 1874년 동생과 함께 상경하여 게이오기주쿠 동자국에 입학, 주임인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인정받아 뛰어난 학생이 되었다.[33] 1875년 크리스마스에는 성공회 선교사 A.C. 쇼에게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29][34] 이후 공학료(후의 공부대학교, 현 도쿄대학 공학부)로 전학하려 할 때 쇼에게서 영어와 고등 수학을 배웠다.[35]
1876년 공학료에 재입학했으나, 학풍 차이와 이화학에 대한 싫증으로 1년도 채 되지 않아 퇴학했다.[36] 그 후 게이오기주쿠로 돌아와 아사부키 에이지가 경영한 『민간 잡지』 편집에 참여하고, 1879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으로 니가타 신문의 주필이 되었다.[36]
2. 2. 게이오기주쿠 수학과 언론 활동
오자키 유키오는 1858년 12월 24일, 사가미국 쓰쿠이군 마타노무라(현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 미도리구 마타노)에서 오자키 유키마사와 사다코 부부의 세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한방의를 가업으로 삼았고, 오자키 가문은 대대로 촌장을 지냈다.[32]오자키는 11세까지 마타노무라에서 지낸 후, 아버지를 따라 도쿄, 다카사키, 와카이 등을 거치며 공부했다. 그는 1874년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하여 주임인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인정받았고, 1875년에는 성공회 선교사 A.C. 쇼에게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29][33][34] 이후 공학료(후의 공부대학교, 현 도쿄대학 공학부)에 진학했으나, 학풍 차이 등으로 1년도 채 되지 않아 퇴학했다.[35]
게이오기주쿠로 돌아온 오자키는 1879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으로 니가타 신문의 주필이 되었다.[36] 20세에 니가타 신문(니가타 신문)의 편집장이 된 것이다.[3] 22세에 도쿄로 돌아와 통계국에 임명되었고, 1885년 도쿄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3]
2. 3. 관료, 언론인, 정치 입문
오자키 유키오는 1858년 가나가와현 쓰쿠이군 마타노 마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여 20세에 니가타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고, 22세에 도쿄로 돌아와 통계국에 임명되었다.[2][3] 1881년에는 야노 후미오의 권유로 통계원 권소서기관에 취임했지만,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두 달 만에 사임했다. 1882년에는 『호치 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어 입헌개진당 창당에 참여했다.[37]1885년 도쿄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887년 치안유지법에 따라 3년간 도쿄에서 추방당했다.[3] 보안조례에 의해 도쿄에서 추방당할 당시, 오자키는 “도리가 물러서는 시대를 개탄한다”라고 말하며, 호를 학당에서 억당(愕堂)으로 바꾸었다(후에 심신의 쇠약을 느껴 ‘愕’의 획을 고쳐 아당(咢堂)으로 했다).[38] 추방 기간 동안, 호시 토오루와 하야시 유조 등과 교류하였다.
1888년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온 후, 1890년 미에현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어 25번이나 재선되었다.[3][4][5]
2. 4. 대동단결운동과 보안조례 추방
오자키 유키오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여 20세에 니가타 신문(니가타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다.[3] 22세에 도쿄로 돌아와 통계국에 임명되었고, 1885년 도쿄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3]1882년, 『호치 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어 입헌개진당 창당에 참여했지만, 오쿠마 시게노부의 기이한 탈당에 불신감을 느꼈다. 이듬해, 도쿄부회 개선에서 니혼바시구에서 추천되어 최연소로 부의원이 되고, 상치위원에 선출된다.[37] 정부의 조약 개정안에 대한 강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자, 오자키는 반서구화주의의 급선봉이 되어 고토 쇼지로를 내세워 대동단결운동을 추진했다. 상의한 결과, 고토를 정장을 차려 입히고 궁내성으로 보냈지만 메이지 천황을 만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37]
1887년, 새로 제정된 치안유지법에 따라 3년간 도쿄에서 추방당했다.[3] 오자키는 “도리가 물러서는 시대를 개탄한다”라고 말하며, 호를 학당에서 억당(愕堂)으로 바꾸었다(후에 심신의 쇠약을 느껴 ‘愕’의 획을 고쳐 아당(咢堂)으로 했다).[38] 호시 토오루와 하야시 유조 등의 도사파와 친분을 맺고, 지인들 사이를 돌아다녔다.[37]
2. 5. 중의원 의원 당선과 초기 의정 활동
오자키 유키오는 1858년 가나가와현 쓰쿠이군 마타노 마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수학한 후 니가타 신문 편집장, 도쿄부회 의원 등을 역임했다.[3] 1887년에는 치안유지법에 따라 도쿄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3] 1888년 미국을 거쳐 영국을 경유, 일본으로 돌아왔다.[4]1890년 미에현에서 출마하여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후,[3] 25번이나 재선되며 62년 이상 의원직을 역임했다.[4][5] 이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긴 기록이다. 오자키는 갑신정변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아버지의 인연으로 이세에서 출마했으며, 현지 유권자들은 2대, 3대에 걸쳐 "오자키 유키오"라고만 적어 투표했다고 한다. 당시 선거는 전쟁과 다름없었으며, 오자키는 여러 번 암살 위협을 받았으나 멧돼지 사냥 총격대를 조직하여 물리치기도 했다.
제1차 마쓰가타 내각 제3회 의회에서 군함 제조비 삭제 문제 등에서 활약했으며, 제2차 이토 내각 제6회 의회에서는 내각 탄핵 상소문을 제출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청일전쟁 발발 후에는 동아시아 대계를 세워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하며 여론을 선도했다. 삼국 간섭에 이토 히로부미가 굴복하자, 오자키는 대외 강경파의 선두에 서서 정유유지회를 조직하여 연설했다.
제2차 마쓰가타 내각이 성립되자 오쿠마 시게노부의 추천으로 외무 참사관에 취임했지만, "26세기 사건"과 카바야마 스키나리의 말 바꾸기 등으로 인해 퇴각했다. 이후 칙임관 신분으로 진보당 회의에 참석하여 내각을 공격하다 징계 면직 처분을 받았다.
2. 6. 진보당, 헌정당 활동과 문부대신 취임
오자키 유키오는 1858년 가나가와현 쓰쿠이군 마타노 마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여 20세에 니가타 신문(니가타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다. 22세에 도쿄로 돌아와 통계국에 임명되었고, 1885년 도쿄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887년 새로 제정된 치안유지법에 따라 3년간 도쿄에서 추방당했다.[3] 1890년 미에현 출신으로 중의원 의원으로 제1회 의회에 당선되었고,[3] 25번이나 재선되었다.[5]1898년 6월 21일, 진보당과 자유당이 합동하여 헌정당이 결성되었다.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조서가 내려와 제1차 오쿠마 내각이 성립되었고, 오자키 유키오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문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이때 오쿠마의 보증으로 메이지 천황이 징계를 면제하는 재가를 내렸다. 같은 해 8월 14일에 치러진 제6회 총선거에서 헌정당은 압도적으로 승리했지만, 내부 항쟁과 엽관운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호시 도루가 오쿠마를 공격하는 등 내각은 크게 흔들렸다. 8월 22일, 오자키는 제국교육회의 요청으로 칸다 히토쓰바시의 동회에서 연설했지만, 이토 미요지가 경영하는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말꼬리를 잡혀 공격을 받았다(공화연설 사건).[39] 10월경부터 퇴각을 노리던 호시 토오루 등 자유당 파벌의 오자키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10월 21일, 이타가키가 오자키의 파면을 상소했다. 이를 받은 천황은 오쿠마와 오자키에게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수상인 오쿠마에게 시비를 묻지도 않고 사직을 요구했다. 10월 24일, 오자키는 병을 이유로 문상을 사임했고, 후임으로 호시 토오루와 에바라 소로쿠를 거론했지만, 후임을 둘러싸고 헌정당은 분열되었고, 오쿠마-이타가키 내각도 총사퇴했다.
제2차 야마가타 내각이 발족하자 헌정본당의 최고 간부에 속해 있었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하여 의화단의 난 이후의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의기투합했다. 입헌정우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헌정본당을 탈당하고, 정우회의 총무 위원 중 한 명이 되어 오자키는 호시 토오루와 함께 원내 총무를 맡았다. 제1차 가쓰라 내각이 발족하자 당무 집행의 상무 위원 5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곧 호시가 암살당하고, 당무의 중심은 오자키와 마쓰다 마사히사 두 사람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그 후 이토와도 대립하여 탈당했다. 가토 다카아키도 이에 따르며 동지연구회를 조직하고, 그 후 유흥회 등을 거쳐 정우회에 복당하는 등 급격하게 소속 정당을 바꾸었다.
1903년부터 1912년까지 도쿄 시장에 취임했다. 오자키의 도쿄 시장 재임 중에 도쿄시가 도쿄 철도를 매수하고 도쿄시 전기국을 설치했다.
2. 7. 도쿄 시장 시절
오자키 유키오는 1903년부터 1912년까지 도쿄 시장을 역임했다.[5] 도쿄 시장 재임 중, 오자키는 도시 기반 시설 개선에 힘썼다. 상하수도 개선, 도로 포장, 노면 전차 서비스 확장, 가스 회사 합병 등을 감독했다.[13] 이러한 노력들은 도시 환경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도쿄 시장으로서 오자키는 외국 고위 인사를 접대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미국 국무장관과 영국의 필드 마셜 로드 키치너와 같은 인물들이 도쿄를 방문했을 때, 오자키가 이들을 맞이했다.[14]
1910년, 오자키는 도쿠가와 이에사토 왕족이 이끄는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이 방문은 일본이 미국에 벚꽃나무를 기증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15] 오자키는 이 자리에서 일본계 미국인 사회의 주요 인사들과 미국의 주요 정부 관계자들을 만났다.
1910년 도쿄시는 워싱턴 D.C.에 2,000그루의 벚꽃나무를 기증했으나, 이 나무들은 병들어 파괴되었다.[16] 1912년, 도쿄시는 이를 대체하기 위해 3,020그루의 벚꽃 묘목을 다시 기증했다.[17] 이후 워싱턴 D.C.의 포토맥 강 서쪽 공원에 있는 타이달 베이슨 주변에서 매년 벚꽃이 피게 되었으며, 이는 오자키가 도쿄 시장 시절 추진한 사업의 결과였다.[18] 이 벚꽃들은 전국 벚꽃 축제의 시초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워싱턴 D.C.와 다른 주에서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19]
오자키는 시장 재임 중 도쿄 철도를 매수하고 도쿄시 전기국을 설치하여 도시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8. 헌정옹호운동과 다이쇼 정변
오자키 유키오는 1890년 미에현에서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된 후, 25번이나 재선되었다.[3][5] 1898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문부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6] 공화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은 연설(공화연설 사건) 때문에 사임해야 했다.[39] 이 사건으로 헌정당은 분열되었고, 오쿠마 내각도 총사퇴했다.[39] 이후 제2차 야마가타 내각이 발족하자 헌정본당의 최고 간부였지만, 이토 히로부미와 의기투합하여 입헌정우회 창립에 참가했다. 제1차 카쓰라 내각에서는 당무 집행 상무 위원 5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호시 토오루가 암살당하고 당무의 중심은 오자키와 마쓰다 마사히사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이토와도 대립하여 탈당했다.[20]1903년부터 1912년까지 도쿄 시장을 역임하면서, 오자키는 도쿄시의 도쿄 철도 매수 및 도쿄시 전기국 설치를 추진했다.[40] 1910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사토와 함께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벚꽃나무를 기증하는 외교 활동을 펼쳤다.[15] 이 벚꽃나무들은 포토맥 강 서쪽 공원의 타이달 베이슨 주변에 심어졌고,[18] 전국 벚꽃 축제의 시초가 되었다.[19]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이개사단증설 문제로 사퇴하고, 군벌의 지지를 받은 카쓰라 다로가 내무대신이 되자, 오자키는 헌정옹호운동에 참여하여 카쓰라를 "옥좌를 성벽으로 하고 조칙을 탄환으로 하는 자"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20] 이는 다이쇼 정변의 계기가 되었으며, 전국적인 국민 운동으로 이어졌다. 제3차 카쓰라 내각 퇴진 후, 오자키는 정우구락부, 역락회, 중정회, 헌정회, 혁신구락부 등 여러 정당을 거쳤다.
2. 9.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축과 국제 평화 운동
오자키 유키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축과 국제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2] 유럽 여러 국가를 시찰하며 전쟁의 비참함을 목격한 후,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군축론자로 전향했다.[42]제1차 야마모토 내각이 지멘스 사건으로 사퇴하고, 키우라 게이고(清浦奎吾)의 수상이 불발되자, 제2차 오쿠마 내각이 성립되었다.[42] 오자키는 중정회를 통해 사법대신으로 입각했다.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와 스즈키 기사부로(鈴木喜三郎)등의 부하직원들과 함께, 와카츠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郎), 외무대신·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야시로 로쿠로(八代六郎)등이 사임하자, 내각 개조를 단행했다. 이후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당수로 추대하여 헌정회를 결성하고 최고 간부가 되었다.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은퇴와 테라이 내각의 조기 종식 이후 하라 내각이 탄생하자, 오자키는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시찰을 떠났다.[42] 이때의 경험은 그를 군축론자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42]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는 보통선거 운동에 참여하고,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지원하는 등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42] 신부인 협회의 치안경찰법 개정 운동을 지원했고, 군축 추진 운동과 치안유지법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42]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와 반군 연설을 한 사이토 타카오(斎藤隆夫)의 제명에 반대하는등, 의회주의 민주주의를 옹호했다.[42]
정계에서는 점차 고립되어 헌정회를 탈당하고 무소속 의원이 되었지만, 이후 30년 이상 무소속으로 활동하며 군축과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42]
2. 10. 무소속 의원과 군국주의 반대
오자키 유키오는 군국주의에 반대했으며,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하여 당국에 의해 구금되기도 했다.[12] 그는 자신의 신념과 다른 사람들의 신념을 칭찬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암살자가 그의 집으로 뛰어들었지만, 그는 딸 유키카와 함께 정원에 숨었다. 이러한 위험한 젊은이들 중 한 명의 아버지는 나중에 오자키에게 찾아가 아들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오자키는 즉시 32음절의 단가 시 한 수를 건네주었다.[12]{{poemquote|
젊은이를 몰아붙인 것이 애국심이었다면,
나의 암살자는 그에 대한 영광을 받을 만하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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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보통선거 운동에 특히 적극적이었고, 1925년 보통남자선거권이 제정되었다. 1930년대 독립 정치인으로서 그는 일본 군부의 증가하는 영향력을 비판하고 여성의 투표권을 옹호했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중에 투옥되었다.[12] 제2차 세계 대전 후 정치 영웅으로 칭송받은 그는 사망할 때까지 반전, 세계 연방주의 및 친민주주의 활동에 참여했다.
쇼와 6년(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 군부의 정치 개입이 잇따라 정당 정치는 위기에 처했다. 쇼와 7년(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가 암살되자 정당 내각은 막을 내렸다. 오자키는 이러한 현실을 우려하여 ‘묘비 대신’이라는 제목으로 유언을 작성하여 잡지 『개조』에 게재했다.
2·26 사건 이후의 히로타 내각이 1년도 채 못 되어 무너지고, 하야시 센주로가 조각하면서 쇼와 12년(1937년) 2월 17일, 오자키는 의회에서 연단에 서서 ‘정성(正成)이 적을 마주할 수 있는 마음으로 나는 연단에 선다’라는 2시간에 걸친 사세(辞世)를 읊었고, 신문은 전면을 할애하여 오자키의 연설을 게재했다. 제1차 고노에 내각이 탄생하고 중일전쟁이 깊어지자, 니시오 스에히로의 연설에 연좌된 사건으로 의회 구내에 오자키의 동상을 건립하려던 계획도 중단되었다. 대정익찬회 결성,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과의 일독이 삼국 동맹을 거쳐 도조 히데키가 내각을 조각하자, 오자키는 의회 정치에 회의를 느껴 산장에 은거하며 더 이상 상경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인 쇼와 17년(1942년)에 실시된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익찬선거)에는 비추천 출마로 당선되었다. 쇼와 18년(1943년), 전년도 총선거 당시 다가와 다이키치로의 응원 연설에서 익찬 선거 비판을 한 가운데 인용한 川柳의 “팔고 집과 당나라 글씨로 쓰는 3대째”가 쇼와 천황의 치세를 풍자하는 것이라고 여겨 불경죄로 기소되었다(오자키 불경 사건). 1심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고, 1944년(쇼와 19년)에 대심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2. 11. 익찬선거 비판과 불경죄 사건
오자키 유키오는 1890년 미에현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제1회 의회에 당선된 이후 25번이나 재선되었으며,[3][5] 62년 이상 의원직을 역임하며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직한 의원 중 한 명이 되었다.[4] 1898년에는 문부대신이 되었으나,[6] 의회의 보수파가 공화주의를 조장한다고 여긴 연설 때문에 사임해야 했다.[6] 그의 사임은 위기를 종식시키지 못했고, 결국 오쿠마 시게노부 수상의 퇴진과 여당인 겐세이토의 분열로 이어졌다.[6]오자키는 보통선거 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1925년 보통남자선거권이 제정되는데 기여했다. 1930년대에는 일본 군부의 영향력을 비판하고 여성의 투표권을 옹호했으며,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중에 투옥되기도 했다.[12] 그는 "헌법주의의 신"(''kensei no kami'')과 "의회 정치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8]
2. 12. 전후 활동과 사망
오자키 유키오는 1890년 미에현 출신으로 제1회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이후 25번이나 재선되었으며,[3][5] 62년 이상 의원직을 역임하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직한 의원 중 한 명이 되었다.[4] 그는 "헌법주의의 신"(''kensei no kami'')과 "의회 정치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8]1898년 문부大臣이 되었으나,[6] 의회의 보수파가 공화주의를 조장한다고 여긴 연설 때문에 사임해야 했다.[6] 이후 1914년에는 법무大臣을 역임했다.[7] 보통선거 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1925년 보통남자선거권 제정에 기여했다. 1930년대에는 일본 군부의 영향력을 비판하고 여성의 투표권을 옹호했으며,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중에 투옥되기도 했다.[12]
패전 후, 오자키 유키오는 반전, 세계 연방주의 및 친민주주의 활동에 참여하며 정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1946년 정삼위(正三位)훈일등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을 반납하고 정계 은퇴를 결심했지만, 미에현을 중심으로 한 지지자들의 추천으로 같은 해 총선거에서 미에현 전 지역구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 1947년 총선거에서도 미에 2구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43] 전후 국회에서도 민주주의 부활과 세계 평화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1953년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여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중의원으로부터 명예의원 칭호를 받았다. 94세까지 중의원 의원을 지낸 것은 일본 역사상 최고령 기록이며, 당선 25회, 의원 재직 63년도 역시 일본 기록이다.
1954년 10월 6일, 직장암으로 인한 영양장애와 노쇠로 게이오 병원에서 사망했다().[44] 묘소는 가마쿠라의 엔가쿠지에 있다.
3. 사상과 평가
오자키 유키오는 장기 재직 의원 표창 제1호, 중의원 명예의원(50년 이상 의원 재직자. 중의원 정면 현관에 흉상을 건립) 제1호, 도쿄도 명예도민 제1호였다. 출생지인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미도리구 마타노에 있는 오자키가 저택 터와, 세 번째 이사 온 곳이자 후에 아버지 행정이 은거했던 미에현 이세시 가와바타의 구 저택을 개축하여 각각 오자키 곽당 기념관이 있다. 이세신궁에 인접한 합격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 또한, 국회 전정 부지 내에 있는 헌정기념관은 오자키의 공적을 기념하여 건설된 곳이며, 동상도 건립되어 있다.
가루이자와는 즐겨 찾던 곳으로, 메이지 39년(1906년)부터 전세 별장에 머무르기 시작하여 다이쇼 3년(1914년)에는 별장을 지었다.[27] 머무는 동안 승마 등을 즐겼고, 그 당당한 승마 모습은 그 지역의 명물이었다고 한다.[45] 쇼와 11년(1936년)에 열린 가루이자와 피서지 50주년 기념식에서는 명예 총재를 역임하여 열변을 토했다.[46] 별장인 「막아이산장」에는 이시카와 타쿠보쿠와 요사노 테츠칸·아키코 부부가 머물렀거나,[47] 구죠 타케코와 야나기하라 하쿠렌이 방문하여 다회를 열었거나,[27] 또 주일 미국 대사인 조셉 그루에게 별장을 빌려주기도 했다.[48] 가루이자와의 개척자인 쇼 가문과도 자주 시간을 보냈다.[27] 가루이자와를 방문한 찰스 린드버그도 이 별장을 방문했다.[4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이 별장에 주일 이탈리아 대사관이 피난했다.[50] 딸인 소마 세츠카는 말년, 유년 시절부터 정들었던 가루이자와를 생애 마지막 거처로 삼아 그곳에서 사망했다.
도쿄 시장 재임 중 엘리자 시드모어의 제안으로 고가마사키치 등과 협력하여 미국에 소메이요시노 2,000그루를 보내 포토맥 강에 심었다.[51] 그러나 이 소메이요시노들은 해충 피해로 소각되었고, 나중에 3,100그루의 벚나무가 새로 심어졌다. 그에 대한 답례로 미국으로부터 꽃개나리가 보내졌고,[52] 일본에 처음으로 꽃개나리를 가져온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 기증을 기념하여 전미 벚꽃 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오쿠마 시게노부에 따르면 "순진하고 재미있는" 남자였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에도 상대가 후쿠자와 유키치이더라도 맞서 싸웠다. 개진당 결성 당시의 주요 간부였던 가와노 토시카마와 마에지마 히토시 등이 정부에 복귀했을 때는 격분하여 오쿠마에게도 "학교(도쿄 전문학교)를 박살내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9년에 걸친 도쿄 시장 재임은 정쟁이 심하고 단기 재임으로 교체가 잦았던 도쿄 시장 중에서 가장 긴 것이다. 금전적으로도 청렴결백으로 유명했다. 다만 토가와 이사부에 따르면, 이누카이 츠요시에게 "그래 당신은 청렴결백해서 헌금을 받지 않을지 몰라도, 그 대신 우리에게 빚을 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돈을 갚지 않는 것이 아닌가. 빌린 돈을 갚지 않는 것도 청렴결백의 범주에 드는가."라고 몰아세워, 결국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토가와에 따르면 오자키는 "하라 다카시는 돈이 필요한 의원에게는 돈을 주고, 지위가 필요한 의원에게는 지위를 주어, 그렇게 해서 추종자를 늘렸다."고 말했다고 하며, 다나카 가쿠에이 신파로 유명했던 토가와는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오자키는 정계에서 고립되었다."고 쓰고 있다.
후에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미키 다케오는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 오자키를 정치적 은사로 여겼다. 30세에 초선된 미키는 의사당에서 오자키와 같은 대기실을 사용했다. 최고령 의원과 최연소 의원의 조합은 신문에서도 자주 다루어졌고, 나란히 앉아 있으면 자주 사진을 찍었다고 미키는 말년에 회고하고 있다.
쇼와 25년(1950년)에는 영어국어화론을 제창하기도 했다. 1950년 5월부터 6월까지 미국을 방문했다. 100세가 되면 워싱턴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53]
3. 1. 민주주의와 의회주의 옹호
3. 2. 국제 평화주의
3. 3. 한국에 대한 인식
3. 4. 평가
오자키 유키오는 장기 재직 의원 표창 제1호, 중의원 명예의원(50년 이상 의원 재직자) 제1호, 도쿄도 명예도민 제1호를 받았다. 출생지인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미도리구 마타노에 있는 오자키가 저택 터와, 미에현 이세시 가와바타의 구 저택을 개축하여 각각 오자키 곽당 기념관이 있다. 이세신궁에 인접한 합격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으며, 국회 전정 부지 내에 있는 헌정기념관은 오자키의 공적을 기념하여 건설된 곳이며, 동상도 건립되어 있다.가루이자와를 즐겨 찾았으며, 메이지 39년(1906년)부터 전세 별장에 머무르기 시작하여 다이쇼 3년(1914년)에는 별장을 지었다.[27] 머무는 동안 승마 등을 즐겼고, 그 당당한 승마 모습은 그 지역의 명물이었다고 한다.[45] 쇼와 11년(1936년)에 열린 가루이자와 피서지 50주년 기념식에서는 명예 총재를 역임하여 열변을 토했다.[46] 별장인 「막아이산장」에는 이시카와 타쿠보쿠와 요사노 테츠칸·아키코 부부가 머물렀거나,[47] 구죠 타케코와 야나기하라 하쿠렌이 방문하여 다회를 열었거나,[27] 주일 미국 대사에게 별장을 빌려주기도 했다.[48] 쇼 가문과도 자주 시간을 보냈으며,[27] 찰스 린드버그도 이 별장을 방문했다.[4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이 별장에 주일 이탈리아 대사관이 피난했다.[50]
도쿄 시장 재임 중 엘리자 시드모어의 제안으로 고가마사키치 등과 협력하여 미국에 소메이요시노 2,000그루를 보내 포토맥 강에 심었다.[51] 그러나 이 소메이요시노들은 해충 피해로 소각되었고, 나중에 3,100그루의 벚나무가 새로 심어졌다. 그에 대한 답례로 미국으로부터 꽃개나리가 보내졌고,[52] 일본에 처음으로 꽃개나리를 가져온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 기증을 기념하여 전미 벚꽃 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오쿠마 시게노부에 따르면 "순진하고 재미있는" 남자였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상대가 후쿠자와 유키치이더라도 맞서 싸웠다. 9년에 걸친 도쿄 시장 재임은 정쟁이 심하고 단기 재임으로 교체가 잦았던 도쿄 시장 중에서 가장 긴 것이다. 금전적으로도 청렴결백으로 유명했다.
미키 다케오는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 오자키를 정치적 은사로 여겼다. 최고령 의원과 최연소 의원의 조합은 신문에서도 자주 다루어졌고, 나란히 앉아 있으면 자주 사진을 찍었다고 미키는 회고하고 있다. 쇼와 25년(1950년)에는 영어국어화론을 제창하기도 했다. 1950년 5월부터 6월까지 미국을 방문했을때, 100세가 되면 워싱턴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53]
4. 가족 관계
아버지 오자키 유키마사(尾崎行正)는 미에현(三重県) 사족(士族) 출신이다.[60] 본래 성은 미네오(峯尾)이며, 무사시국(武蔵国) 하치오우지(八王寺) 산타무라(散田村) 출신으로, 사가미국(相模国) 츠쿠이군 마타노무라(又野村)의 명주(名主) 오자키 히코시로 유키나오(彦四郎行直)의 사위로서 가독을 이어받았다.[61]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에는 탄정대(弾正台)의 관리가 되어, 다카사키현(高崎県), 와타라이현(渡会県), 쿠마모토현(熊本県)으로 옮겨 다녔다.[63]
동생 오자키 유키타카(尾崎行隆)는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배우고 미국으로 건너가 배우 윌리엄 길렛(William Gillette)의 집사(執事)로 40년간 일했다.[65]
전처 시게코(繁子)는 나가사키시(長崎市) 출신으로, 유키오를 뒷받침하며 빈곤 속에서 폐병을 앓다가 병사했다.[66]
후처는 에이코 테오도라 오자키(英子セオドラ尾崎)로, 전처가 죽은 다음 해인 1905년에 결혼했다.
사남 오자키 유키테루(尾崎行輝)는 참의원(参議院議員)을 1기 역임하고 일본항공(日本航空) 임원을 역임했다.[67]
장녀 사사키 세이카(佐々木清香)는 실업가이자 중의원 의원인 사사키 큐지(佐々木久二)와 결혼했다.[68]
삼녀 소마 세츠카(相馬雪香)는 난민을 돕는 모임(難民を助ける会) 창립자이며, 소마시(相馬氏) 제32대 당주 소마 케이인(相馬恵胤)의 아내이다.[69]
손자(차남) 오자키 유키노부(尾崎行信)는 변호사(弁護士)에서 최고재판소 재판관(最高裁判所裁判官)을 역임했다.
5. 기타
6. 수상
오자키 유키오는 욱일장(Order of the Rising Sun),[23] 국회의원 50년,[24] 명예 국회의원, 도쿄 명예시민[25] 등의 상을 받았다. 미국 상원 특별 결의안이 통과되기도 했다.[26]
1898년 7월 5일 정삼위[54], 1914년 6월 18일 훈삼등 녹조훈장[55], 1915년 11월 10일 대례기념장[56], 1916년 7월 14일 훈일등 욱일대수장[57]을 수여받았다. 1938년 2월 11일에는 금배 하나를 받았다.[58]
1906년 3월 23일에는 영국으로부터 로열 빅토리아 훈장 멤버 수여 허가를 받았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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