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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문민군부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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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 문민군부독재는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우루과이에서 지속된 군부 독재 체제이다. 1960년대 말 심각한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 속에서 군의 정치 개입이 확대되었고, 1971년 총선 이후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가 대통령이 되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1973년 보르다베리는 국회를 해산하고 쿠데타를 통해 군사 독재를 시작했으며, 냉전 논리를 내세워 좌익을 탄압하고 인권 침해, 검열 등을 자행했다. 1984년 민주화 운동과 파업으로 인해 1985년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민주주의로 복귀했지만, 군부의 사면과 독재의 유산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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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문민군부독재
기본 정보
공식 명칭우루과이 동방 공화국
통칭우루과이
시대냉전
시작 사건쿠데타
시작 연도1973년
시작 날짜6월 27일
사건 1선거
사건 1 날짜1984년 11월 25일
종료 사건민주주의로의 전환
종료 연도1985년
종료 날짜3월 1일
이전 국가우루과이
이전 국가 깃발Flag of Uruguay.svg
이후 국가우루과이
이후 국가 깃발Flag of Uruguay.svg
우루과이 깃발
깃발
우루과이 지도
지도
상징 종류국장
우루과이 국장
국장
수도몬테비데오
국가 모토 (번역)자유 또는 죽음
국가 (번역)우루과이 국가
공용어스페인어
정치 체제단일 대통령 공화국 하의 군사 독재
지도자 직책대통령
지도자 1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지도자 1 임기1973년–1976년
지도자 2알베르토 데미첼리
지도자 2 임기1976년
지도자 3아파리시오 멘데스
지도자 3 임기1976년–1981년
지도자 4그레고리오 알바레스
지도자 4 임기1981년–1985년
지도자 5라파엘 아디에고
지도자 5 임기1985년
통화페소 (1973년−1975년)
통화 2누에보 페소 (1975년−1985년)
인간 개발 지수 (HDI)0.658
HDI 참조
HDI 연도1980년

2. 정치적 배경 (1960년대 후반 ~ 1973년)

1960년대 후반, 우루과이는 심각한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독재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2년부터 1967년까지 실험적으로 운영되었던 우루과이 국가 행정 위원회 중심의 집단 대통령제는 악화되는 경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후 대통령제가 복원되었으나, 콜로라도당 소속의 오스카 디에고 게스티도 대통령은 경제 상황 개선에 실패하고 취임 6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호르헤 파체코 아레코 대통령(1967–1972)은 경제 위기와 높은 인플레이션에 직면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선택했다. 그는 좌익 세력과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이는 극좌 도시 게릴라 조직인 투파마로스의 활동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파체코 정부는 여러 차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이에 대응했고, 이 과정에서 군부의 역할과 권한이 크게 증대되었다. 특히 게릴라 소탕 작전을 명분으로 국방부로부터 독립된 군 참모본부(ESMACO)가 창설되면서 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다.[5] 이러한 변화는 국가 예산에도 반영되어, 1968년부터 1971년까지 군사비 지출은 국가 예산의 13.3%에서 26.2%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한 반면, 교육 관련 지출은 24.3%에서 16%로 크게 감소했다.[7]

1971년 총선에서는 12개 이상의 좌파 정당 및 단체가 연합한 광역전선이 리베르 세레니를 후보로 내세우며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당시 시행되던 레마법이라는 독특한 선거 제도로 인해, 개인 득표수에서는 국민당 후보 윌슨 페레이라 알두나테가 가장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당 총득표수에서 근소하게 앞선 콜로라도당의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결과가 나왔다. 파체코의 후계자였던 보르다베리의 이러한 당선 방식은 논란을 낳았으며, 심화된 정치적 불안정과 군부의 영향력 확대는 결국 1973년 군부 쿠데타와 문민군부독재 체제 수립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1. 콜로라도당의 집권과 사회 갈등 심화

1952년부터 1967년까지 우루과이는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우루과이 국가 행정 위원회를 통해 집단 대통령제를 운영했으나, 악화되는 경제 상황 속에서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후 대통령제가 복원되면서 콜로라도당 소속의 오스카 디에고 게스티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경제 상황을 개선하지 못하고 취임 6개월 만인 1967년 12월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호르헤 파체코 아레코(1967–1972)는 경제 위기와 높은 인플레이션 속에서 강압적인 통치를 펼쳤다. 그는 우루과이 사회당을 포함한 여러 좌익 단체와 관련 신문들을 불법화했으며, 대학 내 자유주의 성향의 교수들을 해임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강력히 탄압했다.

파체코 정부의 이러한 억압적인 정책과 계속되는 경제난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극좌 도시 게릴라 조직인 투파마로스의 활동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정부는 이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1968년 6월 13일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같은 해 8월 14일에는 시위 중이던 28세의 대학생 리베르 아르세가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파체코 정권 하에서 희생된 첫 학생이었다.

투파마로스가 미국인 안보 전문가 댄 미트리오네를 살해한 후인 1970년 8월, 정부는 또다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후 영국 대사 제프리 잭슨 납치 사건(1971년 1월)과 100명 이상의 투파마로스 조직원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사건(1971년 9월)이 연이어 발생하자, 파체코 대통령은 군부에 모든 게릴라 활동 진압을 명령했다.[6] 게릴라 소탕 작전을 효율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군은 국방부로부터 독립된 지휘 체계인 참모본부(Junta de Comandantes en Jefe y el Estado Mayor Conjunto, 약칭 ESMACO)를 창설했으며, 이는 군부의 역할 증대와 정치 개입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5]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군부의 역할 증대는 국가 예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8년에서 1971년 사이에 군사비 지출은 국가 예산의 13.3%에서 26.2%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한 반면, 교육 관련 지출은 24.3%에서 16%로 크게 감소했다.[7] 이는 당시 우루과이 사회가 점차 군사화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였다.

2. 2. 투파마로스의 등장과 군의 정치 개입 확대

1960년대 후반 우루과이는 독재로 나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2년부터 1967년까지 운영된 9인 위원회 형태의 우루과이 국가 행정 위원회는 악화되는 경제 상황 속에서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통령제가 복원된 후, 콜로라도당 소속의 오스카 디에고 게스티도 대통령 역시 경제 상황 개선에 실패했고, 취임 6개월 만인 1967년 12월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호르헤 파체코 아레코 대통령(1967–1972)은 우루과이 사회당을 비롯한 좌익 단체와 언론을 금지하고, 대학에서 진보적인 교수들을 축출했으며,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등 강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탄압 정책과 더불어 심각한 경제 위기 및 높은 인플레이션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고, 이는 극좌 도시 게릴라 조직인 투파마로스의 활동을 부추기는 배경이 되었다.

파체코 정부는 사회 불안과 투파마로스의 활동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1968년 6월 13일, 첫 번째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4일에는 시위 중이던 28세 대학생 리베르 아르세가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파체코 정권 하에서 발생한 첫 학생 사망 사건이었다. 이후 투파마로스가 미국의 안보 전문가 댄 미트리오네를 살해하자 1970년 8월에 또다시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게릴라 소탕 작전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군은 참모본부(Junta de Comandantes en Jefe y el Estado Mayor Conjunto, 약칭 ESMACO)를 창설했다. 이 기구는 국방부로부터 완전한 독립성을 부여받아 군의 독자적인 작전 수행 및 권한 확대를 가능하게 했다.[5] 1971년 1월, 투파마로스가 영국 대사 제프리 잭슨을 납치하자 세 번째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같은 해 9월 9일, 100명이 넘는 투파마로스 조직원들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파체코 대통령은 군에 모든 게릴라 활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6]

이 시기 군의 영향력 확대는 예산 배분에서도 드러났다. 1968년부터 1971년 사이, 국가 예산에서 군사비 지출 비중은 13.3%에서 26.2%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한 반면, 교육 예산 비중은 24.3%에서 16%로 크게 감소했다.[7] 이는 당시 우루과이 사회가 군사화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 3. 1971년 총선과 보르다베리의 집권

1971년 우루과이 총선은 우루과이 문민군부독재로 이어지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현직 대통령 호르헤 파체코 아레코는 헌법상 연임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1971년 우루과이 국민투표를 통해 연임 제한 규정을 개정하려 시도했지만 부결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새로운 정치 세력인 광역전선(Frente Amplio)이 등장했다. 광역전선은 12개 이상의 좌익 정당 및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되었으며, 리베르 세레니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18.3%의 의미 있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비록 1973년 군부 쿠데타 이후 불법화되었지만, 광역전선은 훗날 타바레 바스케스호세 무히카와 같은 대통령을 배출하며 우루과이 정치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호세 무히카는 과거 투파마로스 게릴라 활동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거 결과, 국민당의 윌슨 페레이라 알두나테 후보가 개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그러나 당시 우루과이 선거법인 레마법에 따라 정당별 총득표수가 우선시되었다. 콜로라도당은 총 41%의 득표율로 40.2%를 얻은 국민당을 근소한 차이(약 12,000표)로 앞섰다. 이 레마법 규정에 따라, 콜로라도당 내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이자 파체코 대통령이 지명한 후계자인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개인 득표수에서 페레이라 알두나테보다 약 6만 표나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당시 우루과이 사회의 정치적 분열과 불안정성을 반영했으며, 보르다베리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낳았다.

3. 보르다베리 정부와 군사 쿠데타 (1972년 ~ 1973년)

1972년 3월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전임 파체코 정부의 강경 노선을 이어받아 투파마로스 게릴라 소탕에 집중했다. 같은 해 4월 '내부 전쟁' 상태를 선포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군부의 영향력이 점차 커졌으며, 이는 이듬해 군사 쿠데타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3. 1. 군의 권력 장악과 투파마로스 진압

1972년 3월 1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경험이 부족했던 보르다베리투파마로스와의 싸움에 집중하며 전임자 파체코의 탄압 정책을 계승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4월 15일, 그는 "내부 전쟁" 상태를 선포하고 시민의 자유를 정지시켰다. 이 조치는 이후 국회에 의해 1972년 9월, 11월, 그리고 1973년 3월까지 연장되었다.

1972년 7월 10일에는 새로운 국가 안보법이 발효되어 정치범을 군사 법원에서 재판할 수 있게 되었고, 군 장교들은 정부 내에서 더 많은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는 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강경책 속에서 군은 1972년 말까지 사실상 투파마로스를 와해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조직의 지도자였던 라울 센디크를 포함한 주요 인물들을 투옥했다. 투옥된 지도자 대부분은 약 12년간 수감되었으며, 이후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고문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군은 투파마로스 조직원뿐만 아니라 우루과이 공산당 활동가, 노동조합 활동가, 심지어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을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했다.

한편, 1972년 6월 22일 국회는 군에 의한 고문 및 인권 침해 혐의에 대한 조사를 결정했으나, 군은 이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군은 보르다베리 대통령을 설득하여 기존 정치인들의 부패를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합동 군사위원회를 설립하도록 했다. 이는 군부가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직접적인 정치 개입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될 수 있다.

3. 2. 1973년 군사 쿠데타

우루과이 군부는 특별 권한을 부여받은 몇 년 동안 정치 권력에 대한 욕구를 키워나갔고, 점차 민간 정부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1972년 말,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대통령은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1972년 10월 19일, 군 지휘관들은 보르다베리와의 회의에서 군 지휘관직 유지 보장, 국영 기업 운영에 대한 군의 참여, 군 내부 비리 수사의 독립성 보장, 경찰에 대한 군의 통제권 등을 요구하는 8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맞섰다.[5]

1973년 2월 8일, 보르다베리는 군부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퇴역 장군인 안토니오 프란세세를 새로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해군은 이 결정에 초기에 지지를 보냈으나, 육군과 공군 사령관들은 즉각적으로 이를 거부했다. 이들은 2월 9일과 10일에 걸쳐 국가의 정치 및 경제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군부는 실업 문제 해결, 국내 산업 육성, 부패 척결, 토지 개혁 시행, 모든 종류의 테러 종식을 약속했다.

결국 보르다베리는 군부의 압력에 굴복했다. 1973년 2월 12일, 그는 공군 본부에서 군 지휘관들과 만나 협정을 체결하고, 군부가 '자문' 역할을 명목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협정에 따라 육군, 공군, 해군 사령관들과 국방부, 내무부, 경제부, 외무부 장관들로 구성된 새로운 국가안보회의( Consejo de Seguridad Nacional|콘세호 데 세구리다드 나시오날spa, COSENA )가 창설되었다. 이로써 군부는 사실상 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보르다베리는 자신의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셀프 쿠데타에 동참했다.

4. 군사독재 (1973년 ~ 1985년)

1973년 6월 27일, 우루과이 군부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를 해산하고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대통령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며 군사독재 시대를 열었다. 보르다베리 정권은 국무원을 신설하고 군부가 민간 행정까지 통제하도록 했으며, 이웃 브라질 군사 정부의 영향을 받아 냉전 논리로 좌익 탄압을 정당화했다.[8] 군부는 국가안보위원회(COSENA) 등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통치 기반을 강화했다.

정권은 경제 개선을 약속했지만, 1973년 석유 파동 등 국제적인 경제 위기로 인해 실패했다. 외채가 급증하여 1981년에는 국가 부채가 40억달러에 달했고,[7] 경제 정책 실패는 군부 정권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11]

한편, 보르다베리 대통령은 군부보다 더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추구하다 1976년 군부와의 갈등 끝에 실각했다.[9][10] 이후 군부의 영향력 아래 여러 인물이 대통령직을 이었다.

군사 정권은 1980년, 통치를 영구화하려는 헌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국민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 사건은 군부 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국민투표 부결 이후, 1981년 그리고리오 콘라도 알바레스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민간 정치인들과 권력 이양 협상을 시작했다. 1982년에는 일부 전통 정당들의 활동이 재개되었고,[12]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1983년 11월 27일에는 몬테비데오에서 약 50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가 열리는 등[13] 국민적 저항이 확산되면서 군부 독재는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군부는 이러한 시위를 민주주의 파괴를 위한 마르크스주의적 음모라고 비난했지만,[14] 민주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4. 1. 통치 구조

1973년 6월 27일, 군부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를 해산하고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대통령과 함께 통치 체제를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군은 민간 업무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으며, 새로운 독재 정권은 냉전 논리를 내세워 좌익 세력 탄압을 정당화했던 이웃 브라질 군사 정부의 영향을 받았다.[8]

실질적인 통치 기구는 국가안보위원회(Consejo de Seguridad Nacional|콘세호 데 세구리다드 나시오날es, COSENA)였다. COSENA는 매주 회의를 열어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승인했으며, 실제 권력의 원천은 장군단(Junta de Oficiales Generales|훈타 데 오피시알레스 헤네랄레스es, JOG)이었다. 1977년까지 COSENA는 주로 육군 장군, 공군 준장, 해군 제독 등 총 28명의 군 고위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군부는 통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1976년 12월 6일, 기존의 국무원과 JOG를 통합하여 새로운 국가 위원회(Consejo de la Nación|콘세호 데 라 나시온es)를 창설했다.

초대 대통령 보르다베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부 지도부보다 더욱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추구했다. 1976년 6월, 그는 모든 정당 활동을 영구적으로 금지하고 군의 정치적 역할을 헌법에 명시하는 새로운 조합주의적 헌법 개정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는 군부 내에서조차 지나치다는 반발을 샀고, 결국 보르다베리는 사임을 강요당했다.[9][10]

보르다베리의 뒤를 이어 국무원장이었던 알베르토 데미첼리(콜로라도당)가 임시 대통령직을 맡았다. 그는 군부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파로 분류되었으나, 1976년으로 예정되었던 선거를 취소하는 등 군부 통치 연장에 동조했다. 다만 수천 명에 달하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에는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데미첼리는 짧은 기간 재임 후 물러났고, 1976년 9월 1일 국민당 출신의 아파리시오 멘데스가 새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1977년 8월, 군부는 우루과이 민주주의 재편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전통적인 양대 정당인 블랑코스와 콜로라도스의 활동만을 허용하고, 대통령은 군부가 사전에 승인한 단일 후보 중에서 선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군부는 이 계획을 1980년 헌법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예상을 깨고 투표자의 57.2%가 반대하여 부결되었다. 이 국민투표 결과는 군부 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협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군부가 투표 결과를 조작하지 않고 실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제안된 헌법을 합법화하려 했다는 점은, 우루과이에서 민주주의의 기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되기도 했다.

국민투표 부결 이후, 1981년 9월 1일 그리고리오 콘라도 알바레스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1973년부터 국가안보위원회(COSENA) 서기였으며,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우루과이 육군 총사령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알바레스는 민간 정치 지도자들과 권력 이양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82년 6월 7일에는 전통 정당들(블랑코스, 콜로라도스, 그리고 시민 연합당)의 활동을 재개하도록 허용하는 법이 제정되었지만, 좌익 정당은 여전히 금지되었다. 같은 해 11월 28일, 각 정당의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열렸고, 이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여 1984년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12]

4. 2. 경제 정책과 실패

군사 정권은 출범 초기 경제 개선을 약속했지만,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인한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이러한 약속을 무너뜨렸다. 위기 극복을 위해 우루과이는 국제 대출 기관, 특히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빌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은 규모의 우루과이 국내 경제는 외국 자본과 금융 기관에 개방되었고, 이는 경쟁력을 상실한 많은 현지 기업들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재정 압박이 심화되자 정권은 더 많은 외채를 도입하는 동시에 예산 지출을 삭감하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81년까지 인구 300만 명의 우루과이는 40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국가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7]

당시 경제 재무부 장관이었던 알레한드로 베그 빌레가스는 금융 부문을 육성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회생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회 서비스 관련 지출을 축소하고 다수의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기대와 달리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80년에는 GDP가 무려 20%나 감소했으며, 실업률은 17%까지 치솟았다. 결국 정부는 파산 위기에 직면한 수많은 기업과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해야만 했다. 이처럼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권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군사 정권의 통치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다.[11]

4. 3. 인권 탄압과 검열

우루과이의 실종자


군부독재 기간 동안 5,000명 이상이 정치적인 이유로 체포되었고, 우루과이인의 거의 10%가 국외로 이주했다. 고문은 1985년 우루과이 군부독재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우루과이는 세계에서 1인당 정치범 수가 가장 많은 나라였으며, 인구의 거의 20%가 짧거나 긴 기간 동안 체포된 경험이 있었다. 투파마로스(MLN) 지도자들은 감옥에 격리되어 반복적인 고문을 당했다. 정치적 망명을 찾아 해외로 떠나는 우루과이인들이 급증하면서 우루과이에서의 이민이 크게 늘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12년간의 군사 통치 기간 동안 약 180명의 우루과이인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이들 중 대부분은 아르헨티나 등 인접 국가에서 희생되었으며, 우루과이 내에서 사망한 사람은 36명에 불과하다.[16] 희생자 중 다수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으며, 이렇게 실종된 사람들은 "실종자" 또는 스페인어로 desaparecidos|데사파레시도스es라고 불렸다. 몬테비데오에 있는 메모리아 박물관은 군부독재 정권 하에서 살해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을 기리고 있다.

독재 기간 동안 정부의 검열은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언론 및 기타 미디어 매체에 대한 공식적인 정부 검열은 1976년에 시작되었지만,[17] 특정 대상을 겨냥한 검열은 그보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1968년 정부는 경찰의 영장 없는 대학 캠퍼스 급습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한 후, 공화국 대학교가 발행하는 모든 공식 간행물에 대한 검열을 의무화했다.[18]

미디어 매체들은 폐쇄와 심문이라는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렸다. 뉴스 매체는 모든 기자, 편집자, 기타 직원의 이름과 함께 그들의 정치적 견해 및 재정 출처에 대한 명확한 진술서를 교육문화부에 제출해야 했다.[19] 국가의 "위신"을 훼손한다고 판단되는 기사나 간행물은 금지되었으며, 특히 투파마로스 도시 게릴라와 관련된 뉴스 중 정부 발표와 다르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게 하는 내용의 보도는 금지되었다.[20]

검열은 뉴스 매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문학 작품 역시 우루과이 역사상 가장 엄격한 검열 기준을 따라야 했으며, 작가들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구금되었다. 극도로 보수적인 정치 환경 속에서 많은 영향력 있는 자유주의 성향의 작가들은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 이 시기 우루과이의 저명한 작가 마리오 베네데티는 페루, 쿠바,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베네데티는 자신의 소설, 시, 연극을 통해 문민군부독재의 엄격한 검열을 비판하고 정권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을 촉구했다.[21]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출판하기 어려워지자 일부 예술가들은 음악을 통해 저항했다. 이에 정권은 음악과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검열을 시작했다. 정부는 특정 노래나 방송을 금지하는 공식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경찰의 감시가 강화되면서 체포를 피하기 위한 자율 검열이 만연하게 되었다. 저항 가요 작가와 연주가들은 해외로 망명해야 했고, 일부 라디오 방송국은 아예 음악 방송을 중단하기도 했다.

지적 활동에 대한 검열 외에도, 정부는 "도덕 및 시민 교육"을 우선시하며 국가 교육 시스템을 재편하려 했다. 1969년, 아코스타 이 라라(Acosta y Lara) 교수가 중등 교육 위원회를 장악하고 정권과의 유착 하에 학생들의 반대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1972년에는 논란 속에 일반 교육법이 통과되어 지방 교육 위원회의 자율성이 박탈되었다.[23] 특색 있는 완장을 찬 직원들이 학교를 순찰하기 시작했고, 보안 요원들은 학생들의 활동과 수업 중 토론 내용을 엄격하게 감시했다. 국가는 엄격한 교육 과정을 강요하고, 우루과이 역사에서 민간인이 이룬 주요 업적들을 군인의 공으로 돌리는 등 교과서 내용을 검열했으며, 학생들의 정권에 대한 이념적 충성도를 평가했다.[19]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해 학생들에게 충성도 수준에 따라 A, B, C와 같은 단순한 알파벳 등급을 부여하기도 했다.[24]

민주주의 회복 이후, 일부 우루과이인들은 쿠데타가 일어난 6월 27일을 국민들이 진실, 정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날로 기념하는 국가 기념일로 지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25]

5. 민주주의로의 복귀 (1984년 ~ 1985년)

1984년에는 정권에 반대하는 파업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같은 해 1월 13일에는 1973년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24시간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 속에서 군 지도부와 민간 정치인들 간의 대화가 활발해졌다. 비록 윌슨 페레이라 알두나테와 같은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여전히 활동에 제약을 받았지만, 민주화 이행을 위한 논의는 계속되었다.

1984년 8월 3일, 군부와 정당들은 해군 클럽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을 통해 1967년 헌법이 복원되었으나, 군부는 여전히 안보 문제에 대한 조언권과 고위 장교 임명 통제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군부는 과거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해 전면적인 사면을 보장받았다.

같은 해 11월 25일 총선이 치러졌고, 라파엘 아디에고 브루노의 과도 정부를 거쳐 1985년 3월 1일 콜로라도당의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가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민정 이양이 이루어졌다.

상기네티 행정부는 군정 기간 동안 피폐해진 경제를 개혁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다시 공고히 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상기네티 정부는 군사 정권 시절 자행된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투파마로스(MLN) 등 반정부 세력에 대한 탄압과 고문에 책임이 있는 군 관계자들을 기소하는 대신, '사면법'으로 불리는 법률을 통해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6. 군사독재의 유산

독재 정권의 유산은 여전히 논쟁과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해군 클럽 협정으로 이어진 협상에서 군부는 독재 기간 동안의 모든 행위에 대한 완전한 사면 문제에 대해 타협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군부가 그러한 보호 장치 없이는 협상에 응하지 않으려 한 결과, 1986년 논란 속에 국가의 형사 소송 청구 만료에 관한 법률(Ley de Caducidad de la Pretensión Punitiva del Estadospa)이 제정되었으며, 이 법은 여전히 유효하다.[26] 1989년 우루과이 사면 국민투표와 2009년 우루과이 사면 국민투표에서 우루과이 국민들은 이 법을 유지하기 위해 두 차례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며, 비판론자들은 이 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27]

사면에도 불구하고, 사면 대상자들을 기소하라는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2007년 12월, 그레고리오 콘라도 알바레스는 독재 기간 동안 저지른 인권 침해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그는 이 기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다.[28] 2009년 10월 22일, 그는 37건의 살인 및 인권 침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건강 문제로 인해 판결을 듣기 위해 출석하지 못했다.[29] 알바레스는 2016년 12월 28일 91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사망했다.[30][31]

2010년 3월 5일,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는 살인 혐의와 정권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납치하고 실종시킨 배후 혐의로 징역 30년형(우루과이 법에 따라 허용된 최대 형량)을 선고받았다.[32] 건강이 좋지 않았던 보르다베리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지내다 2011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

참조

[1] 웹사이트 Human Development Report 2014 http://hdr.undp.org/[...]
[2] 웹사이트 History of Uruguay http://motherearthtr[...] 2015-10-25
[3] 서적 Life Without Lead: Contamination, Crisis, and Hope in Urugua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0-06-24
[4] 웹사이트 URUGUAY - THE MILITARY GOVERNMENT http://countrystudie[...] 2015-10-25
[5] 서적 Bounded Missions: Military Regimes and Democratization in the Southern Cone and Brazil https://books.google[...] Penn State Press 2001-11-22
[6] 웹사이트 Uruguay - Pachequism, 1967-72 http://countrystudie[...]
[7] 서적 Latin American Dictators of the 20th Century: The Lives and Regimes of 15 Rulers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13-01-01
[8] 뉴스 WAIT GOES ON FOR URUGUAYAN WHO FELL OUT OF STEP https://www.nytimes.[...] 2016-10-25
[9] 뉴스 Juan María Bordaberry obituary https://www.theguard[...] 2011-07-19
[10] 문서
[11] 웹사이트 Uruguay - The Military's Economic Record http://countrystudie[...]
[12] 간행물 Uruguay: voters cast ballots for 'end to military dictatorship' https://www.csmonito[...] 1982-12-03
[13] 웹사이트 A 15 años del Acto del Obelisco. "Por un Uruguay sin exclusiones". https://web.archive.[...]
[14] 웹사이트 A 20 años del comienzo del fin de la dictadura. El espectador https://web.archive.[...]
[15] 뉴스 New find in Uruguay 'missing' dig. http://news.bbc.co.u[...] 2011-02-04
[16] 뉴스 Uruguay dig finds 'disappeared'. http://news.bbc.co.u[...] 2011-02-04
[17] 서적 A History of Organized Labor in Uruguay and Paraguay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5-01-01
[18] 뉴스 La Universidad Amordazada http://bibliotecadig[...] 2022-11-11
[19] 서적 Censorship: A World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1-12-01
[20] 뉴스 Survey Shows That Restrictions on News Media in Major Countries in Latin America Have Increased https://www.nytimes.[...] 2016-10-25
[21] 서적 Censorship & Cultural Regulation in the Modern Age https://books.google[...] Rodopi 2004-01-01
[22] 서적 Repression, Exile, and Democracy: Uruguayan Culture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1993-01-01
[23] 간행물 Uruguay: Against reason 1979-01-01
[24] 서적 Amnesty in the Age of Human Rights Accountability: Comparative and International Perspective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05-28
[25] 웹사이트 A silent anniversary in Uruguay? http://www.aljazeera[...] 2016-10-25
[26] 웹사이트 Uruguay Annual Report 2011 https://www.amnesty.[...] Amnesty International 2013-10-28
[27] 웹사이트 A brief history of Uruguay's Expiry Law http://blogs.lse.ac.[...] London School of Economics 2013-10-28
[28] 뉴스 Uruguayan dictator guilty of murder http://www.aljazeera[...] 2016-12-31
[29] 뉴스 BBC News - Uruguay's ex-ruler Alvarez jailed http://news.bbc.co.u[...] 2016-12-28
[30] 뉴스 Fallece el general Gregorio Álvarez, presidente de Uruguay en la dictadura http://www.teinteres[...] 2016-12-28
[31] 뉴스 Uruguay ex-military ruler Gregorio Alvarez dies aged 91 https://www.bbc.co.u[...] 2016-12-31
[32] 뉴스 Uruguay's ex-ruler Bordaberry jailed for 30 years http://news.bbc.co.u[...] 2010-01-11
[33] 웹사이트 Former Uruguayan dictator Juan Maria Bordaberry dies https://www.washingt[...] 2011-07-18
[34] 웹사이트 Pobre presidente: el documental Jorge Batlle, entre el cielo y el infierno https://ladiaria.com[...] 2024-05-22
[35] 웹인용 History of Uruguay http://motherearthtr[...] 2015-10-25
[36] 서적 Life Without Lead: Contamination, Crisis, and Hope in Uruguay https://www.google.c[...]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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