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우문사급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우문사급은 수나라 말기부터 당나라 초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수나라 우위대장군 우문술의 아들이다. 그는 수 문제의 총애를 받아 양제의 딸 남양공주와 결혼했으나, 이복형 우문화급이 양제를 살해한 후 당나라에 귀순했다. 당나라에서 이세민을 도와 송금강 토벌에 기여하고 영국공에 봉해졌으며, 중서령, 양주도독 등을 역임했다. 현무문의 변 이후 중서령에 임명되었으며, 말년에는 좌위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국의 부마 - 포훈
    포훈은 한나라 장군 포현의 9대손이자, 조조를 섬기며 승상연을 지냈고, 조비의 즉위 후 직언을 하다 미움을 사 치서진법으로 좌천되어 226년에 처형되었다.
  • 중국의 부마 - 복완
    복완은 후한 말 헌제의 장인이자 복황후의 아버지로, 조조 암살 시도 이후 복황후가 조조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으나 209년 사망했고, 이후 복황후의 조조 제거 시도가 발각되며 복씨 일족은 숙청당했다.
  • 당 고조 때의 재상 - 당 태종
    당 태종은 당나라의 제2대 황제로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관의 치로 불리는 치세를 통해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균전제 등 제도를 정비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는 인물이다.
  • 당 고조 때의 재상 - 이원길 (603년)
    당 고조 이연의 아들이자 당 태종 이세민의 동생인 이원길은 당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나, 이세민을 견제하려다 현무문의 변에서 살해되었고, 사후 추증되었지만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성품으로 평가받는다.
우문사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우문사급 (宇文士及)
인인 (仁人)
작위영종공 (郢縱公)
출생지시안, 산시 성
사망일642년 11월 11일
가계
아버지우문술
형제자매우문화급 (형)
우문지급 (형)
우문혜급 (형)
우문씨 (누이)
배우자양나라의 남양공주
수광현주
자녀우문찬사
우문숭사
우문수타라
다른 두 아들
경력
직업군주, 정치인

2. 생애

우문술의 아들로 태어난 우문사급은 600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성현공(新城縣公)에 봉해졌고, 양견의 눈에 들어 양광의 장녀 남양공주와 혼인하여 상련봉어(尙輦奉御)가 되었다.[1] 616년 우문술이 사망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이 끝나자 홍려소경(鴻臚少卿)에 임명되었고, 618년 이복형 우문화급이 양광을 살해하자 촉왕(蜀王)에 봉해졌다.[1]

평소 이연과 친분이 있었던 우문사급은 우문화급을 따라 여양(黎陽)으로 이동했을 때 이연으로부터 합류 요청을 받았다.[2] 우문사급은 우문화급에게 당나라에 귀순할 것을 권했으나 거절당하고 두건덕과 싸우다 패했다.[2] 이후 제북(濟北) 세력을 모아 두건덕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봉륜 등과 함께 당나라에 귀의했다.[2] 여동생이 이연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았기에 상의동(上儀同)에 임명되었다.[2]

이후 이세민을 따라 송금강 토벌에 공을 세워 수나라 시절 봉토를 회복하고 종실의 딸과 혼인했으며, 진왕부(秦王府) 소속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었다.[2] 왕세충 정벌에도 공헌하여 영국공(郢國公)에 봉해졌고, 625년 검교시중(檢校侍中) 및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승진했다.[2]

626년 이세민이 황제가 되자 중서령에 임명되고 익주에 700호의 봉읍(封邑)을 받았으며, 양주도독(凉州都督)을 추가로 역임했다. 이후 전중감(殿中監), 포주자사(蒲州刺史),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역임했다.[1]

우문사급은 군사적으로는 엄격했지만, 정치에서는 관용을 베풀었다. 어린 동생들과 형의 고아들을 보살폈고, 친구들과의 우의를 소중히 여겼다. 또한 태종과의 대화 내용을 비밀로 하여 깊은 신임을 받았다.[3]

642년 사망 후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및 양주도독(凉州都督)으로 추증되었고, 소릉 주변에 배장(陪葬)되었다.[1] 시호는 처음에는 공(恭)이었으나, 유기의 의견으로 종(縱)으로 바뀌었다.[3]

2. 1. 수나라 시기

600년 아버지 우문술의 영향으로 신성현공(新城縣公)에 봉해졌으며, 양견의 마음에 들어 양광의 장녀인 남양공주와 혼인한 뒤 상련봉어(尙輦奉御)가 되었다.[1] 616년 우문술이 사망하자 관직에서 물러난 뒤 상이 끝나자 홍려소경(鴻臚少卿)을 제수받았으며, 618년 이복형인 우문화급우문지급 등이 병변을 일으켜 양광을 교살하자 촉왕(蜀王)에 봉해졌다.[1]

우문사급은 수나라 장군이자 관료였던 우문술의 아들이었으며, 문제 재위 기간 동안, 아버지의 공헌으로 인해 신성현공(新城縣公)에 봉해졌다. 한번은 문제가 우문사지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었고, 우문사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자신의 손녀인 남양공주(아들 양광, 태자)를 우문사지에게 시집보냈다. 그들은 아들 우문선사(宇文禪師)를 두었다.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는 동생 우문지급을 업신여겼지만, 우문화급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604년, 문제가 사망하고 양광이 뒤를 이어 양제가 되었다. 우문사급의 양제 통치 초기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그는 이원 장군과 친했고, 이원과 군사 문제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양제 통치 중반에 우문사급은 황실 수송 담당관이었다. 양제가 616년 동쪽 수도 뤄양에서 강도(江都, 현재 장쑤성 양저우)로 갔을 때, 우문사급도 그를 따라갔다. 역시 양제를 따라 강도로 갔던 우문술이 그해 말 병들어 사망하자, 우문사급은 잠시 사임하여 아버지의 상을 치렀지만, 곧 황실 보급 부장관으로 복귀했다.

618년 봄, 우문화급과 우문지급은 양제의 정예 군대인 효과군(驍果)의 고위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양제의 사위인 우문사급이 이 음모를 폭로할까 두려워 그의 계획을 우문사급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곧 쿠데타를 일으켜 양제를 살해하고, 양제의 조카 양호를 진왕(秦王)으로 옹립했다.

2. 2. 우문화급의 몰락과 당나라 귀순

618년, 이복형 우문화급양광을 살해하자, 우문사급은 촉왕(蜀王)에 봉해졌다.[1]

이후 우문화급을 따라 여양(黎陽)으로 이동했을 때,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이연으로부터 합류 요청을 받았다.[2] 우문사급은 우문화급에게 당나라에 귀의할 것을 권유했으나, 우문화급은 이를 거부하고 두건덕과 싸우다 패배하였다.[2]

그 뒤 제북(濟北)의 세력을 규합해 두건덕에게 대항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봉륜 등과 함께 당나라에 귀의했다.[2] 여동생이 이연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았던 관계로 상의동(上儀同)에 임명되었다.[2]

2. 3. 당나라 시기

626년, 이세민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이건성, 이원길을 죽이고 황제에 오르자, 우문사급은 중서령에 임명되었으며, 익주에 700호의 봉읍을 받았다. 또한 양주도독(凉州都督)에 추가로 임명되었다. 이후 전중감(殿中監), 포주자사(蒲州刺史),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1]

627년, 우문사급은 ''중서령'' 직함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재상이 아니었다. 그는 양주(涼州, 대략 현대의 무위)의 태수가 되었다. 그는 양주의 백성들에게 위엄과 품격을 보여주었고, 동돌궐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2]

우문사급은 군사적으로는 엄격하게 부하 장병을 채찍질했지만, 정치에서는 관용과 간략함을 숭상했다. 어린 동생들과 형의 고아들을 아끼고 보살폈으며, 친구들과의 교분도 돈독했다. 또한 태종과 나눈 이야기는 굳게 비밀로 하고, 그의 아내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아 태종에게 깊은 신임을 받았다.[3]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우문술(宇文述)북주 장군, 이후 수나라
배우자남양공주(南陽公主)수나라 양제의 딸, 616년 형제들의 쿠데타 이후 별거
수광현주(寿光县主)당나라 고조의 사촌
형제우문화급(宇文化及)이복 형
우문지급(宇文智及)이복 형
우문소의(宇문소의)당 고조소의[2]
자녀우문선사(宇文禅师)두건덕에 의해 619년에 처형, 남양공주의 아들
우문숭사(宇文崇嗣)중어대부(中御大夫), 영국공(郢国公)
우문묘(宇文邈)
봉성현공(封城县公)이름 미상 아들
신성현공(新城县公)이름 미상 아들
우문수다라(宇文修多羅)당나라 태종의 13번째 아들 조왕 이부(李福)의 후궁
손자이윤(李胤)건평왕(建平王), 요절
이목(李穆)조왕(赵王), 양자 이사순(李思順)[3]을 후계자로 삼음
이택(李泽)신두군공(信都郡公)
이공(李恭)한단공(邯郸公)
증손우문정(宇文鼎)
현손우문양(宇文杨)
우문종(宇文综)


4. 평가

우문사급은 동생, 형제, 조카들에게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었으며, 가난한 친척들에게도 관대했던 것으로 칭찬받았다. 그러나 사치스럽고 낭비적인 생활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한번은 당 태종이 특정 나무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 나무를 বারবার 칭찬하여 당 태종에게 꾸지람을 들은 적도 있었다.[1]

:"위징은 종종 나에게 아첨꾼을 멀리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몰랐고, 당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문사급은 사과했지만, 황제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황제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고 변명했다. 당 태종은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1]

초기에 시호를 담당하는 관료들은 우문사급에게 공(恭, "경계")이라는 시호를 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관료 유기는 우문사급의 낭비벽을 지적하며 "공" 대신 "종"(縱, "방종")을 제안했고, 결국 "종"이 그의 시호가 되었다.[1]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문서 Zhaoyi
[3] 문서 Li Sishu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