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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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미관은 1912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개관한 극장으로, 일제강점기부터 1982년 폐업까지 운영되었다. 개관 당시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영화 등을 상영했으며, 1928년에는 한국 최초로 유성 영화를 상영했다. 1959년 화재 이후 인사동으로 이전했으나, 재개봉관으로 운영되다가 1982년 11월 30일 폐업했다. 현재는 상가 건물이 들어섰으며, 우미관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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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서울 최대 규모의 최고급 극장으로 개관하여 블록버스터 영화 상영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대한극장은 경영난으로 폐관 후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했으나 2024년 최종 폐관하며 한국 영화 산업의 상징적 공간이자 변화하는 영화 관람 문화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남았다.
| 우미관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우미관 | |
| 종류 | 사업장 |
| 국적 | 대한민국 |
| 본사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89번지 |
| 설립 | 1912년 12월 |
| 업종 | 서비스업 |
| 사업 내용 | 영화 흥행 |
| 관련 인물 | 시바타 산다이지 하야시다 킨지로 |
| 역사 | |
| 개관 | 1912년 12월 |
| 이전 | 1959년 화재로 이전 |
| 폐관 | 1982년 11월 30일 |
2. 연혁
1910년 극장은 2층 벽돌 건물에 1,000명 가량이 관람할 수 있는 긴 나무의자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항상 2,000명이 넘는 관람객으로 들어차 "우미관 구경 안 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유명했다.[20] 개관 당시 이탈리아 영화 <천마>, 미국 영화 <로빈 훗>, 프랑스 영화 <프로티아>, <환토마> 등을 상영하였으며, 찰리 채플린 감독의 <황금광 시대>도 상영하였다. 1928년에는 한국 최초로 유성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20]
1912년 12월 종로구 관철동 89번지에 개관하였으며[4], 1959년 화재로 소실되어 인사동 262번지로 이전했다.[5] 1982년 11월 30일 경영난으로 폐관하였다.[5]
1912년 12월, 일제강점기 경성부 관철동 89번지(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89번지)에 개관했다.[4] 우미관은 경성부 내 북촌에 위치했으며, 같은 구역에는 1907년 단성사가 먼저 개관했지만, 모두 조선인 대상의 양화 전문관이었다.[3] 특히 우미관은 할리우드 영화의 봉절관이었으며, 경성부 내 인기 명소의 위치를 확립해 갔다.[3] 1921년 발행된 《조선공론》 9월호에는 단성사와 함께 "고급 양극"을 상영하는 영화관으로서, 조선 전역에서도 뛰어난 점이 일본인 관객들에게도 높이 평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1937년 4월 24일, 이규환과 스즈키 쥬키치가 공동 감독하고 성봉영화각과 신흥키네마가 합작한 조선어 최초의 토키 영화 《나그네》가 우미관에서 공개되었다. 같은 날 명치좌에서는 일본어판이 공개되었다. 무성영화 시대 단성사 등의 인기 활동사진 변사였던 서상호가 아편 중독으로 1937년 8월 12일 우미관 화장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4]
1940년 전후 경영자가 하야시다 킨지로로 바뀌고, 관객 정원수는 789명으로 증가했다.[11][12]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시 통제로 1942년 모든 영화가 영화배급사의 배급을 받게 되었다.[11]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김두한이 고려공산청년회 결성 집회를 우미관에서 열었다.[14] 1950년대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상영했다.
원래 우미관이 있던 자리에는 벽돌 구조 건물이 남아 우미관 타운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미관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석비가 세워져 있다. 2002년 드라마 《야인시대》 촬영을 위해 우미관을 재현한 세트가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에 지어졌으나 2011년 폐관했다.
2. 1. 설립과 초기 (1910년대-1920년대)
1910년대 초, 우미관은 종로구 관철동에서 문을 열었다. 개관 당시 극장은 2층 벽돌 건물이었고, 1,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긴 나무 의자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항상 2,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려들어 "우미관 구경 안 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20]초기에는 이탈리아 영화 <천마>, 미국 영화 <로빈 훗>, 프랑스 영화 <프로티아>, <환토마> 등을 상영했다.[20] 또한 찰리 채플린 감독의 <황금광 시대>도 상영되었다.[20] 1928년에는 한국 최초로 유성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20]
1912년 12월 종로구 관철동 89번지에 개관하였으며[4], 당시 경영자는 시바타 미요지였다.[7][8][9] 1927년 당시 관객 정원은 520명이었다.[8]
2. 2. 전성기와 변화 (1930년대-1940년대)

1937년 4월 24일, 우미관에서는 이규환과 스즈키 쥬키치가 공동 감독하고 성봉영화각과 신흥키네마가 합작한 조선어 최초의 토키 영화 《나그네》가 개봉되었다.[4] 같은 날 명치좌에서는 일본어판이 상영되었다. 이규환 감독은 한국 영화사의 선구자로, 그의 작품은 시대를 앞서간 영상미와 깊이 있는 주제 의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같은 해 8월 12일, 무성영화 시대에 단성사와 함께 인기 활동사진 변사로 이름을 날렸던 서상호(1889년 - 1937년)가 우미관 화장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4] 그는 아편 중독으로 인해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0년을 전후하여 우미관 경영자는 하야시다 킨지로로 바뀌었고, 관객 정원수는 789명으로 증가했다.[11][12] 하야시다 킨지로는 경성에서 잡화 환전상을 하던 인물이었다.[1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전시 통제가 실시되어, 1942년에는 모든 영화가 사단법인 영화배급사의 배급을 받게 되었다.[11] 이로 인해 영화관들은 홍계와 백계, 두 계통으로 편성되었으나, 우미관의 흥행 계통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2. 3. 광복 이후 (1945년-1982년)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도 우미관은 단성사, 조선극장과 함께 일류 개봉극장으로 명맥을 이어갔다.[20] 1959년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고, 종로구 인사동 262번지로 이전하였다.[5] 1960년부터는 소규모 이류 재개봉극장으로 운영되다가, 여러 차례 영업 정지와 적자 운영으로 인해 1982년 11월 30일 폐업하였다. 폐업 직후 건물은 철거되고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21]3. 건물 및 시설
1910년 우미관은 2층 벽돌 건물로 개관했으며, 1,000명 가량 수용할 수 있는 긴 나무 의자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2,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려 "우미관 구경 안 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20] 건물 구조는 목조 연와(벽돌)였다.
관객 정원은 1927년~1930년에는 520명,[8][9] 1942년~1943년에는 789명이었다.[11][12]
1959년 화재로 소실된 후 인사동 262번지로 이전하여 영업을 재개했다.[5] 이전 후에는 주로 재개봉 영화를 상영했다.[4] 1982년 11월 30일,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건물은 철거되어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21]
원래 우미관이 있던 자리( 종로구 관철동 89번지)에는 현재 우미관 터를 알리는 석비가 있다.[5]
4. 사회문화적 영향
우미관은 한국 영화사와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들에게 문화 향유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우미관은 "고급 양극"을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조선 전역에서 일본인 관객들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3] 특히 할리우드 영화의 봉절관이었으며, 경성부 내 인기 명소였다.[3]
1937년에는 이규환과 스즈키 쥬키치가 공동 감독한 조선어 최초의 토키 영화 《나그네》가 우미관에서 공개되었다.[4]
개관 당시 상영작으로는 이탈리아 영화 <천마>, 미국 영화 <로빈 훗>, 프랑스 영화 <프로티아>, <환토마> 등이 있었으며, 찰리 채플린 감독의 <황금광 시대>도 상영되었다. 1928년에는 한국 최초로 유성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20] 1950년대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상영했다.[15][16]
우미관은 단순한 영화관을 넘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게 문화적 오아시스 역할을 했다. "우미관 구경 안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20]
5. 현재
1982년 11월 30일, 우미관은 경영난으로 폐업했고 건물은 철거되었다. 이후 그 자리에 '우미관 타운'이라는 벽돌 구조의 상가 건물이 들어서 음식점 등이 입점했다. 현재 우미관 터에는 우미관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21]
2002년에는 김두한을 주인공으로 한 SBS 드라마 야인시대 촬영을 위해 우미관을 포함한 옛 경성 거리를 재현한 세트장이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에 지어졌으나, 2011년에 폐쇄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우미관 (優美館)
https://encykorea.ak[...]
2023-10-01
[2]
논문
The Power of Representation: Korean Movie Narrators and Authority
https://www.jstor.or[...]
2011-00-00
[3]
논문
京城における帝国キネマ演芸の興亡 : 朝鮮映画産業と帝国日本の映画興行
https://hdl.handle.n[...]
関西大学大阪都市遺産研究センター
[4]
서적
(서적 제목 미상)
2010-00-00
[5]
뉴스
우리나라 최초의 映畵館(영화관) 優美館(우미관) 없어진다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2-11-18
[6]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25-00-00
[7]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27-00-00
[8]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29-00-0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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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제목 미상)
1930-00-00
[10]
웹사이트
昭和7年の映画館 朝鮮 41館
http://homepage1.nif[...]
2013-11-11
[11]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42-00-00
[12]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43-00-00
[13]
서적
(서적 제목 미상)
2005-00-00
[14]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70-00-00
[15]
영화
Gone with the Wind
2013-11-11
[16]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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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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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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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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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1
[2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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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뉴스
우리나라 최초의 映畵館(영화관) 優美館(우미관) 없어진다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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