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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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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성사는 1907년 서울 종로3가에 설립된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극장으로, 1919년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고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개봉하는 등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문화를 지키는 역할을 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악극 공연을 통해 명성을 되찾으려 했다. 1990년대 멀티플렉스 영화관 등장으로 쇠퇴하여, 2001년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했으나 경영난을 겪다 2008년 부도 처리되었다. 이후 건물은 여러 차례 소유주가 변경되었으며, 현재는 단성골드빌딩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보석 판매 및 영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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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 [회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7년경의 단성사 건물
개관일1907년
폐관일2010년
위치서울특별시 종로구 돈화문로26 (묘동)
한국어 명칭단성사
한자 명칭團成社
로마자 표기Danseongsa
매큔-라이샤워 표기Tansŏngsa
회사 정보
회사명㈜자일개발 단성골드 주얼리센터
영문 회사명Dansungsa
2008년 11월 30일 촬영된 단성사 극장
회사 형태주식회사
산업문화
창립일2008년 11월 19일 (㈜아산엠 단성사), 2008년 4월 (씨너스 단성사), 2005년 2월 (멀티플렉스 단성사), 1953년 5월 12일 (㈜단성사), 1907년 6월 4일 (극장 단성사 설립), 2016년 9월 1일 단성골드빌딩
창립자지명근, 주수영, 박태일
이전 회사씨너스 단성사, 아산엠 단성사
대표이사이호상
서비스영화관 운영업, 귀금속 유통업
모기업㈜아산엠그룹, 영안모자
운영 정보
사업 내용영화 흥행
주요 주주Young An Hat Company
주요 자회사대우버스
관련 인물김연영, 다무라 요시지로, 다무라 미네, 박승필
외부 링크dansunggold
역사
연혁1907년 6월 4일 단성사 개관, 1917년 일본인 사업가 다무라 요시지로에게 소유권 이전, 1939년 3월 27일 대륙극장으로 개칭, 1946년 1월 31일 단성사로 관명 환원, 2005년 1월 시네콘으로 재개관

2. 연혁


  • 1907년 서울 종로3가에 단성사가 설립되었다.
  • 1915년 2월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5월에 다시 개장하였다.
  • 1917년 다무라 요시지로(田村義次郞)에게 매각되었다.
  • 1918년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개봉되었고, 이날은 영화의 날로 제정되었다.
  • 1924년 단성사 촬영부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이 상영되어 한국 최초로 극영화 촬영, 현상, 편집에 성공하였다.
  •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되었다.
  • 1926년 이후 단성사는 《조선극장》, 《우미관》과 함께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하였다.
  • 일제 강점기 말 《대륙극장》으로 개칭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하여 악극을 공연하였다.
  • 2001년 9월 구 건물이 철거되었다.
  • 2005년 2월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하였고, 2006년 9월에는 10개 관으로 확장되었다.
  • 2008년 4월 씨너스 단성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 9월 23일 부도 처리되었다. 이후 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출범하였다.
  • 2010년 7월 14일 리모델링 공사로 임시 휴관하였으나, 2011년 리모델링이 중지되었다.
  • 2012년 8월 법원에서 경매 개시 결정을 내렸다.
  • 2015년 3월 12일 영안모자 계열사인 자일개발(주)에 낙찰되었다.
  • 2016년 9월 1일 단성골드빌딩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단성골드주얼리센터가 개장하였다.


2001년 멀티플렉스로 재탄생했으나 경영난과 채권자들의 문제로 리모델링이 중단되어 영화 상영이 중단되었고, 건물주가 바뀐 현재도 영화는 상영되지 않고 있다.

2. 1. 설립 초기 (1907년 ~ 1918년)

1918년 12월 21일 준공된 4층 건물인 '''단성사'''


1907년(메이지 40년) 6월 4일, 당시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 묘동(이후 조선 경성부 수은정 56번지, 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 56번지[8])에 '''단성사'''(團成社)로 개관했다.[8][9]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었으며, 1910년(메이지 43년) 8월 29일에는 대한제국 병합으로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개관 당시 소유주는 김연영(金然永)이었으며, 초기부터 이미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조선인을 위한 영화관이었다.[8][9] 관객 정원은 350명으로 소규모 목조 영화관이었으나, 1914년(다이쇼 3년) 1월 28일 개축을 통해 1,000명으로 확장되었다.[8]

1917년(다이쇼 6년)에는 일본인 사업가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郎)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9] 다무라는 경성부에 황금유원(黃金遊園)을 소유하고 그곳에 황금관(黃金館, 이후 국도극장)과 고등연기관(高等演技館, 이후 세계관)을 경영하던 인물이었다.[9] 다무라는 소유권을 취득한 이듬해인 1918년(다이쇼 7년) 12월 21일, 약 60000JPY(당시 환율)을 투자하여 4층 건물로 개축·재개관하고, 박승필을 관장으로 임명하여 경영을 맡겼다.[8][9][10] 1920년 전후 다무라는 사망하였고, 사후에는 그의 아내 다무라 미네(田村みね)가 소유권을 상속받았다.[9][10] 박승필은 영화관을 서양 영화 전문관으로 전환하고, 황금관에 있던 천활선만일괄대리점(天活鮮滿一括代理店)이 배급하는 천연색 활동사진(天活)이 수입한 유럽과 미국 영화를 상영했다.[9] 이후 박승필은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게 되어, 천활의 촬영기사 미야가와 사에노스케(宮川早之助)를 기용하여 '의리적 구투'(義理的仇討, 감독 김도산|金陶山일본어)를 제작하여 1919년(다이쇼 8년) 10월 27일에 공개했다.[8][9] 이 작품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영화와 실연으로 구성된 연쇄극이었지만, 이후 "조선 영화 제1호" 또는 "한국 영화 제1호"로 여겨지는 작품이 되었다.[8][9] 이 작품은 천활이 제작·배급한 연쇄극 '선장의 아내'(船長の妻, 1918년)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이 있다.[9] 박승필은 단성사 박승필연예부(團成社朴承弼演芸部)라는 제작 부서를 설립하여 영화관 경영과 병행하여 영화 제작을 수행했다.[9] 단성사는 우미관과 함께 "고급 서양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조선 전역에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9]

2. 2. 한국 영화의 탄생과 발전 (1919년 ~ 1945년)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8][9] 이 영화는 영화와 실연(實演)이 결합된 연쇄극이었지만, 이후 "한국 영화 제1호"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같은 날은 영화의 날로도 제정되었다.[8][9]

1924년 단성사 촬영부는 7권 분량의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하여 한국인에 의한 극영화 촬영, 현상, 편집에 처음으로 성공했다.[10]

1926년나운규》의 민족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8] 이후 단성사는 《조선극장》, 《우미관》과 함께 북촌의 한국인들을 위한 공연장으로, 《황금좌》, 《희락관》, 《대정관》 등 일본인 영화관에 맞서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음악, 무용 발표회 등에도 무대를 제공하며 새로운 문화 매체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2]

1935년 10월 4일에는 토키(トーキー)판 《춘향전》이 단성사에서 공개되었다.[8]

일제 강점기 말인 1939년 3월 27일 《대륙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8][15][16] 1945년 광복 이후 다시 단성사로 돌아와 악극(樂劇)을 공연했다.

2. 3. 광복 이후 (1946년 ~ 현재)

1945년 광복 이후 단성사는 악극(樂劇)을 주로 공연하였다.[2] 1946년 1월 31일, 극장 이름을 단성사로 다시 바꾸고 1,117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영업을 재개했다.[8]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의리적 구투》가 처음 상영된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제정했다. 이는 한국 영화 산업과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영화를 상영했던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4][5]

1993년에는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최초의 한국 영화 《서편제》가 단성사에서 시사회를 가졌다.[2]

1990년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등장으로 단성사의 수익은 급감했다.[2][3][5] 2001년부터 2005년까지 10개 상영관, 1,802석 규모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했지만,[5] 경영난은 계속되었다. 2005년 씨너스와 협력하여 씨너스 단성사로 다시 문을 열었지만, 2007년 110억 원의 손실을 기록했다.[5]

2008년 우리은행 대출금 15억을 갚지 못해 파산했다.[5] 같은 해 4월에는 멀티플렉스 체인인 씨너스 단성사가 되었으나, 9월 23일 경영 악화로 부도 처리되었다.[8] 2008년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새롭게 출범했다.[8]

2010년 7월 14일 리모델링 공사로 임시 휴관에 들어갔으나, 2011년 극장 리모델링은 중단되었다.[8] 2012년 8월 법원에서 경매 개시 결정을 내렸다.[8]

2015년 3월 12일, 영안모자 계열사인 자일개발(주)가 법원 경매에서 575억에 단성사를 인수했다.[8] 2016년 9월 1일 단성골드빌딩으로 이름을 바꾸고, 단성골드주얼리센터를 열었다.[8]

2019년, 영안모자는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하여 단성사 박물관을 개관할 것이라고 발표했고,[3] 같은 해 10월 23일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7]

2001년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탄생했으나 경영난과 채권자들의 이해관계로 리모델링이 중단되면서 영화가 상영되지 못했고, 건물주가 바뀐 현재도 영화는 상영되지 않고 있다.

1953년경 단성사. '까다로운 캐롤린'을 상영 중이며, '데카메론' 상영을 앞두고 있었다. 이 건물은 2001년에 철거되었다.



3. 한국 영화사에서의 의미

단성사는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이정표를 장식한 극장이다. 1919년 최초의 한국 영화 ''정의의 한 수''가 상영되었고, 나운규의 ''아리랑'' (1926년), ''춘향전'' (1935년) 등 역사적인 작품들이 이곳에서 관객과 만났다.

1907년 건립 이후, 단성사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소규모 목조 건물이었으나, 1914년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되었다. 1918년에는 4층 건물로 재개관하며 박승필이 경영을 맡아 서양 영화 전문관으로 운영되었다. 박승필은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여 ''의리적 구토''(1919년)를 제작, 공개하였는데, 이는 한국 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39년 대륙극장으로 개칭되기도 했으나, 광복 이후 단성사로 환원되었다. 1990년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00년대 초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하며 변화를 모색했다. 2019년에는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하여 박물관이 개관되기도 했다.

3. 1. 선구적인 역할

1907년 대한제국 시대에 처음 지어진 단성사는 한국 영화계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 종로3가 지역에 위치했던 단성사는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한국 영화로 여겨지는 키노 드라마인 ''정의의 한 수''의 첫 시사회를 개최했다.[3] 이 날은 1963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한국 영화의 날로 선포되었으며, 이는 한국 영화 산업과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 영화를 상영한 유일한 극장이었던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을 기념하는 것이었다.[4][5]

1926년에는 나운규의 한국 민속 영화인 ''아리랑''이 상영되었고,[8] 1935년에는 ''춘향전''이 세 번째로 시사회를 가졌다.[4][2] 1993년에는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최초의 대한민국 영화인 ''서편제''가 이 극장에서 시사회를 가졌다.[2]

단성사는 수십 년 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영화의 첫 상영을 위한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2]

3. 2. 민족문화의 중심지

1907년 대한제국 시대에 처음 지어진 단성사는 한국 영화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왔다. 종로3가에 있었던 단성사는[2][3]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한국 영화로 여겨지는 키노 드라마 ''정의의 한 수''가 처음 상영된 곳이다.[3]

1926년에는 나운규의 한국 민속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었고, 1935년에는 ''춘향전''이 세 번째로 시사회를 가졌다.[4][2] 이처럼 단성사는 수십 년 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영화 첫 상영 장소로 명성을 얻었다.[2]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의의 한 수''가 처음 상영된 10월 27일을 한국영화의 날로 선포했다. 이는 한국 영화 산업과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 영화를 상영한 유일한 극장이었던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4][5]

1993년에는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최초의 대한민국 영화 ''서편제''가 이곳에서 시사회를 가졌다.[2]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1946년 1월 31일 단성사로 극장 이름을 환원하고 영업을 재개했다. 1953년 경에는 '까다로운 캐롤린'과 '데카메론'을 상영했고, '모감보'도 상영하며 "개축 신장 개관 기념 특별 상영"이라는 광고를 냈다.

3. 3. 역사적 유산

1907년 대한제국 시대에 단층, 2층 목조 건물로 처음 지어졌으며 현재 서울 종로 3가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2][3]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한국 영화로 여겨지는 키노 드라마인 ''정의의 한 수''의 첫 시사회가 이곳에서 열렸다.[3] 나운규의 한국 민속 영화인 ''아리랑''1926년에 상영되었고, ''춘향전''은 1935년 단성사에서 시사회를 가졌다.[4][2]

단성사는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영화의 첫 상영을 위한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 극장에는 오랫동안 줄이 늘어서 있었고, 표를 되파는 사람들도 흔했다.[2]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의의 한 수''가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된 날인 10월 27일을 한국영화의 날로 선포했다. 이는 한국 영화 산업과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 영화를 상영한 유일한 극장이었던 단성사를 기념하는 것이었다.[4][5]

1993년,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최초의 대한민국 영화인 ''서편제''가 이 극장에서 시사회를 가졌다.[2]

1990년대에는[3]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등장으로 수익이 급감했다.[2][5] 2001년부터 2005년까지 10개 스크린에 1,802석 규모의 멀티플렉스로 리모델링되었지만,[5] 이는 쇠퇴를 막지 못했다. 2005년 시너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시너스 단성사로 재개장했지만, 리모델링 투자비를 회수하지 못했고, 2007년에는 110억 원의 사상 최대 손실을 기록했다. 2008년 우리은행에 대한 15억(130만 달러)의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고 파산했다. 2008년2010년까지는 영화 상영을 계속하고 그 이후에는 일반 사무실 건물로 전환될 것이라고 발표되었으며,[5] 건물은 결국 2010년에 전환되었다.[2] 현재는 보석을 판매하고 있다.[6]

2019년에는 건물 소유주인 영안모자(Young An Hat Co.)가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물에 단성사를 기리는 박물관을 개관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박물관은 같은 해 10월 23일에 개관했다.[7]

1907년(메이지 40년) 6월 4일, 당시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 묘동(이후 조선 경성부 수은정 56번지, 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 56번지[8])에 '''단성사'''(團成社)로 개관했다.[8][9]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었으며, 1910년(메이지 43년) 8월 29일에는 대한제국 병합으로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개관 당시 소유주는 김연영(金然永)이었으며, 초기부터 이미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조선인을 위한 영화관이었다.[8][9] 관객 정원은 350명으로 소규모 목조 영화관이었으나, 1914년(다이쇼 3년) 1월 28일 개축을 통해 1,000명으로 확장되었다.[8]

1917년(다이쇼 6년)에는 일본인 사업가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郎)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9] 다무라는 경성부에 황금유원(黃金遊園)을 소유하고 그곳에 황금관(黃金館, 이후 국도극장)과 고등연기관(高等演技館, 이후 세계관)을 경영하던 인물이었다.[9] 다무라는 소유권을 취득한 이듬해인 1918년(다이쇼 7년) 12월 21일, 약 60000JPY(당시 환율)을 투자하여 4층 건물로 개축·재개관하고, 박승필(朴承弼)을 관장으로 임명하여 경영을 맡겼다.[8][9][10] 1920년 전후 다무라는 사망하였고, 사후에는 그의 아내 다무라 미네(田村みね)가 소유권을 상속받았다.[9][10] 박승필은 영화관을 서양 영화 전문관으로 전환하고, 황금관에 있던 천활선만일괄대리점(天活鮮滿一括代理店)이 배급하는 천연색 활동사진(天活)이 수입한 유럽과 미국 영화를 상영했다.[9] 이후 박승필은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게 되어, 천활의 촬영기사 미야가와 사에노스케(宮川早之助)를 기용하여 '의리적 척토'(義理的仇討, 감독 김도산|한국어)를 제작하여 1919년(다이쇼 8년) 10월 27일에 공개했다.[8][9] 이 작품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영화와 실연으로 구성된 연쇄극이었지만, 이후 "조선 영화 제1호" 또는 "한국 영화 제1호"로 여겨지는 작품이 되었다.[8][9] 이 작품은 천활이 제작·배급한 연쇄극 '선장의 아내'(船長の妻, 1918년)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이 있다.[9] 박승필은 단성사 박승필연예부(團成社朴承弼演芸部)라는 제작 부서를 설립하여 영화관 경영과 병행하여 영화 제작을 수행했다.[9] 단성사는 우미관과 함께 "고급 서양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조선 전역에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9]

1925년(다이쇼 14년)에 발행된 『일본영화연감 다이쇼 13·14년』에 따르면, 단성사 부지는 146평(약 482.6m2), 관객 정원은 960명, 소유주는 "다무라 노부코"(田村ノブコ)로 기록되어 있으며, 관장은 박승필, 흥행 계통은 쇼치쿠 영화 및 유니버설 영화, 직원 수는 40명(영화 설명자(활동사진변사) 6명 포함), 악사 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있었다.[10] 당시 단성사는 외국 영화(수입 영화, 서양 영화)를 중심으로 흥행하였으나, 단성사 박승필연예부가 제작한 장편 영화 장화홍련전|한국어(감독 박정현)을 상영하여 호평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0] 1927년(쇼와 2년)에 발행된 『일본영화사업총람 쇼와 2년판』에 따르면, 당시 소유주·경영자는 "다무라 노부"(田村ノブ)로 기록되어 있으며, 관장은 박승필, 관객 정원은 변함없었고, 흥행 계통은 마키노 프로덕션 및 동아키네마였다.[11] 당시 단성사에서는 『파리의 여인』(감독 주연 찰리 채플린, 미국 공개 1923년 9월 26일[17], 일본 공개 1924년 10월)이나 부산부(현재 부산광역시)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제작한 『새장 속의 새』(감독 이규설, 각본 츠무라 슈이치, 1926년 6월 19일)를 상영하여 호평을 얻었다.[11] 1926년(다이쇼 15년) 10월 1일에는 역시 조선키네마가 제작하고, 『새장 속의 새』의 각본을 쓴 츠무라 슈이치 즉 나운규가 감독·주연한 『아리랑』(일본 배급 야마니 양행, 일본 공개를 위한 검열일 같은 해 12월 22일[18])을 단성사에서 공개했다.[8] 1935년(쇼와 10년) 10월 4일에는 토키(トーキー)판 『춘향전』(감독 이명우, 주연 문예봉)을 단성사에서 공개했다.[8]

1939년(쇼와 14년) 3월 27일에는 '''대륙극장'''(大陸劇場)으로 개칭했다.[8][15][16] 같은 시기에 경영자가 바뀌었고, 1942년(쇼와 17년)에 발행된 『영화연감 쇼와 17년판』에 따르면, 경영자는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 관장은 스다 코이치(須田光一), 관객 정원은 650명으로 크게 감소했다.[15][16] 이시바시 료스케는 경성부 메이지정 1정목 54번지(현재 명동)에 메이지좌(明治座)를 경영하던 인물이다.[15][16]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전시 통제가 시행되어 일본의 모든 영화가 1942년 2월 1일에 설립된 사단법인 영화배급사의 배급이 되고, 영화관의 경영 주체에 관계없이 모든 영화관이 홍계·백계의 2계통으로 편입되었지만, 해당 자료에는 단성사의 흥행 계통에 대한 기록은 없다.[15]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었고, 같은 해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까지는 주한미군사령부 군정청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1946년 1월 31일, 극장 이름을 단성사로 환원하고 관객 수용 인원을 1,117명으로 늘려 영업을 재개하였다.[8] 1953년경에는, '까다로운 캐롤린'(Un caprice de Caroline chérie, 감독 장 드베브르(Jean Devaivre), 프랑스 개봉 1953년 3월 6일, 일본 개봉 동년 12월 2일[19])과 '데카메론'(Decameron Nights, 감독 휴고 프레고네세(Hugo Fregonese), 영국 개봉 1953년 1월 13일, 일본 개봉 1954년 2월 15일[20][21])을 상영한 것을 보여주는 사진이 남아 있다. 같은 시기에, '모감보'(감독 존 포드, 미국 개봉 1954년 4월 5일, 일본 개봉 동년 4월 9일[22])도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 단성사 광고에 "개축 신장 개관 기념 특별 상영"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1974년 8월 15일에는 인근에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이 개업하였고, 1996년 12월 30일에는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되었다.

2001년 8월 31일, 오랜 세월 동안 친숙했던 기존 건물에서의 상영이 종료되고 휴관에 들어갔으며, 다음 날인 9월 1일 건물 철거에 착수하였다.[8] 2005년 1월, 현재의 지하 4층, 지상 9층 건물이 신축되었고, 이 건물 내부에 7개 스크린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재개관하였다.[8] 2006년 9월에는 스크린 3개를 추가하여 총 10개 스크린으로 운영되었다.[8] 2008년 4월에는 시노스 단성사를 설립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3일에는 도산하였고, 같은 해 11월 19일에는 "주식회사 ASAAN M 단성사"가 설립되어 이후 동사가 단성사를 경영하고 있다.[8]

4. 현재의 모습

종로3가역 3호선 출구와 가깝고 CGV 피카디리 1958점과 마주보고 있다. 2001년 멀티플렉스로 재탄생했으나 경영난과 채권자들의 이해관계로 리모델링이 중단되면서 영화가 상영되지 못했고, 건물주가 바뀐 현재도 영화는 상영되지 않고 있다.

2015년 세계 1위 모자판매회사이자 클라크지게차, 자일대우버스, OBS경인TV 등을 인수한 영안모자 계열회사인 자일개발(주)가 4차례 경매 끝에 단성사를 인수하여 일대 변화를 맞게 됐다. 단성사는 2016년 9월 1일 단성골드빌딩으로 이름을 바꾸고, 1층에 백화점형 주얼리도소매센터를 열었다. 2017년까지 보석 역사관, 단성사 영화관, 한국영화 100년 역사관 개관 등이 차례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2019년에는 건물 소유주인 영안모자가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물에 단성사를 기리는 박물관을 개관할 것이라고 발표했고,[3] 같은 해 10월 23일에 박물관이 개관했다.[7]

현재 건물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입점해 있다.

층수시설
9F종합보석갤러리 (예정)
8F그린램프스퀘어독서실
7F브라운편입학원
6FKG인테리어뱅크
4F, 5FKGIT BANK
3F바른생각 스터디랩 챌린저 독서실
1F, 2F단성골드
B1F푸드코트 (예정)
B2F단성사
B3F단성영화역사관



5. 교통

지하철 1·3·5호선 종로3가역 9, 10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화문로 26(묘동 56) 단성골드빌딩이다.

참조

[1] 웹사이트 "한국 최초의 영화관 '애관극장' 사라지면 안되잖아요" https://www.hani.co.[...] 2023-09-10
[2] 웹사이트 Curtain falls on nation's first movie theater https://www.koreatim[...] 2023-09-05
[3] 웹사이트 Theater Dansungsa reborn as film museum https://en.yna.co.kr[...] 2023-09-05
[4] 웹사이트 The premiere cinematic experience - DANSUNGSA http://www.dansungsa[...] 2006-10-07
[5] 웹사이트 Theater pioneer folds under amassed debt https://koreajoongan[...] 2023-09-05
[6] 웹사이트 Old Hollywood soldiers on in central Seoul https://koreajoongan[...] 2023-09-05
[7] 웹사이트 [기사] 단성사,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영화역사관'으로 재탄생 (연합뉴스, 20191014) :새공공영상문화유산정책포럼 정보공유센터 https://archivecente[...] 2023-09-05
[8] 웹사이트 연혁 http://www.dansungsa[...] 2013-11-07
[9] 논문 京城における帝国キネマ演芸の興亡 : 朝鮮映画産業と帝国日本の映画興行 https://hdl.handle.n[...] 関西大学大阪都市遺産研究センター
[10] 서적 年鑑
[11] 서적 総覧
[12] 서적 総覧
[13] 서적 総覧
[14] 웹사이트 昭和7年の映画館 朝鮮 41館 http://homepage1.nif[...] 2013-11-07
[15] 서적 年鑑
[16] 서적 年鑑
[17] 영화 A Woman of Paris: A Drama of Fate 2013-11-07
[18] 영화 アリラン http://www.jmdb.ne.j[...] 2013-11-07
[19] 영화 浮気なカロリーヌ 2013-11-07
[20] 영화 デカメロン夜話 2013-11-07
[21] 영화 Decameron Nights 2013-11-07
[22] 영화 Mogambo 201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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