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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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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움베르토 보시는 1941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비아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학위를 받지 못했고, 한때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후 지역주의로 전향하여 북부 연맹을 창당했으며, 2012년까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92년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되었고, 폭력 선동, 불법 이민자 관련 논란 등 여러 비판을 받았다. 2012년 당 자금 유용 혐의로 사무총장직에서 사퇴했으며, 2019년 대법원에서 자금 몰수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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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보시
기본 정보
2022년 보시
이름움베르토 보시
출생일1941년 9월 19일
출생지이탈리아 카사노마냐고
국적이탈리아
1.76m
배우자마누엘라 마로네
자녀4명, 렌초 보시 포함
정당롬바르다 동맹 (1982년–현재)
북부동맹 (1989년–현재)
기타 정당이탈리아 공산당 (1975–1976)
정치 경력
북부동맹 연방 서기재임 시작: 1989년 12월 4일
재임 종료: 2012년 4월 5일
전임: 직책 신설
후임: 로베르토 마로니
북부동맹 총재재임 시작: 2012년 4월 5일
연방 개혁 장관재임 시작: 2008년 5월 8일
재임 종료: 2011년 11월 16일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임: 바니노 키티
기관 개혁 및 권한 이양 장관재임 시작: 2001년 6월 11일
재임 종료: 2004년 7월 19일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임: 안토니오 마카니코
후임: 로베르토 칼데롤리
의회 경력
하원 의원재임 시작: 2022년 10월 13일
선거구: 롬바르디아
재임 시작: 2008년 4월 29일
재임 종료: 2018년 3월 22일
선거구: 롬바르디아
재임 시작: 1992년 4월 23일
재임 종료: 2004년 7월 19일
선거구: 밀라노
상원 의원재임 시작: 2018년 3월 23일
재임 종료: 2022년 10월 13일
선거구: 바레세
재임 시작: 1987년 7월 2일
재임 종료: 1992년 4월 22일
선거구: 롬바르디아
유럽 의회 의원재임 시작: 2004년 7월 20일
재임 종료: 2008년 4월 28일
선거구: 북서부 이탈리아
재임 시작: 1994년 7월 19일
재임 종료: 2001년 6월 10일
선거구: 북서부 이탈리아

2. 초기 생애 및 정치 입문

움베르토 보시는 1941년 바레세주 롬바르디아주 카사노 마냐고에서 태어나 파비아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1975년 잠시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했고,[4] 1979년 발도스타 연합의 지도자 브루노 살바도리를 만나면서 지역주의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80년 살바도리가 사망한 후, 보시는 롬바르디아에 집중하여 2년 뒤 자치주의 정당인 롬바르디아 연합을 창설했다. 이 시기에 그는 두 번째 부인인 마누엘라 마로네를 만났다. 롬바르디아 연맹은 베네토, 피에몬테의 유사한 운동들과 연합하여 북부연맹으로 발전했고, 보시는 2012년까지 연맹 사무총장과 당 지도자를 역임했다.

2. 1. 출생과 성장

움베르토 보시는 1941년 바레세주 롬바르디아주 카사노 마냐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근 갈라라테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였고, 어머니도 함께 일하며 건물 관리인을 맡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4] 그는 과학계열 고등학교(liceo scientifico)를 졸업하고 나중에 파비아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학위는 받지 못했다.[4]

청년 시절부터 사라가트이탈리아 민주사회당이나 이탈리아 공산당과 같은 신좌파 정당 활동가로 활동했다. 1975년 이탈리아 공산당에 잠시 가입하기도 했다.[4] 고향인 바레세현 사마라테 공산당 지부에 배치되었는데, 이때 실제로는 의사 면허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로 당원증을 발급받았다. 사마라테 공산당 지부에서는 칠레 피노체트 정권 반대 운동 등에 참여했고, 아마추어 기타 가수로도 활동했다.

1970년대까지 보시는 무명의 정치인이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반정부 조직을 원형으로 하는 아오스타의 지역 정당인 발도스타 연합과의 관계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9년 2월에는 발도스타 연합의 지도자 브루노 살바도리를 만났다. 브루노 살바도리가 주장하는 향토주의와 반국가주의·반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에서 향토주의로 전향했다. 1980년 브루노가 사망하자 아오스타를 떠나 고향에서 조직 구성을 시작했다.[4]

2. 2. 공산주의 활동

움베르토 보시는 젊은 시절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이탈리아 프로레타리아 공산주의 연합에서 활동했다.[12] 1975년 이탈리아 공산당(Partito Comunista Italiano)에 입당하여 바레세현 사마라테(Samarate) 지부에서 활동하면서, 칠레 피노체트 정권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고 아마추어 기타 가수로도 활동했다. 이때 실제로는 의사 면허가 없었음에도 "의사"로 당원증을 발급받았다.[13]

1970년대까지 무명의 정치인이었던 보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반정부 조직을 원형으로 하는 아오스타의 지역 정당 발도스탄 연합과의 관계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12] 브루노 살바도리가 주장하는 향토주의와 반국가주의·반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에서 향토주의로 전향했으며, 1980년 브루노가 사망하자 아오스타를 떠나 고향에서 조직 구성을 시작했다.[12]

2. 3. 지역주의로 전향

1970년대까지 움베르토 보시는 무명의 정치인이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반정부 조직을 원형으로 하는 아오스타(Aosta)의 지역 정당인 발도스탄 연합과의 관계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운동 지도자인 브루노 살바도리(Bruno Salvadori)의 향토주의와 반국가주의·반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에서 향토주의로 전향했다.

1980년 살바도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보시는 롬바르디아 지역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2년 뒤, 자치주의 정당인 롬바르디아 연합이 탄생했다. 이 무렵 보시는 두 번째 부인인 마누엘라 마로네를 만났다.

롬바르디아 연맹은 이후 베네토와 피에몬테의 유사한 운동들과 동맹을 맺어 북부연맹을 결성했으며, 보시는 2012년 4월 5일까지 연맹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당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었고, 심각한 뇌졸중 이후에도 2012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현재는 연맹의 연방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이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며, 자신이 창립한 운동의 지도력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1992년부터 탕겐토폴리 스캔들이 밝혀지자, 보시는 자신을 정치계의 새로운 인물로 내세우며 부패와 무능을 일소하려 했다. 보시는 당시 사건 당시 북부연맹의 회계 담당이었던 알레산드로 파텔리와 함께 2억 리라뇌물을 받은 혐의로 8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는데, 이 재판에서는 그가 꾸준히 비난했던 베티노 크락시, 아르날도 포르라니 등 많은 정치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5] 보시의 형은 항소심에서도 유지되었다.[6]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보시 (1997년)


1998년, 보시는 북부연맹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후 폭력 선동 혐의로 1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우리는 이 악당들[신파시스트]을 사냥해야 하며, 그들이 우리로부터 표를 빼앗아 간다면, 우리는 전쟁 후 파시스트들을 몰아냈던 것처럼 집집마다 수색해야 한다."[7]

2003년 개혁 장관 재직 시절, 보시는 해군에 불법 이민자를 태운 배에 실탄을 발사하라고 명령하며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경고 후, 쾅… 대포를 쏜다"고 말했다.[8][9][10]

보시는 유럽 연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한때 유럽 연합을 "공산주의 은행가들의 소굴"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6]

3. 북부동맹 창당과 정치 활동

1980년 여름 교통사고로 살바도리가 사망한 후, 보시는 롬바르디아 지역 정치에 더욱 집중했다. 2년 후, 자치주의 정당인 롬바르디아 연합이 탄생했고, 보시는 이 시기에 두 번째 부인인 마누엘라 마로네를 만났다.

롬바르디아 연맹은 이후 베네토와 피에몬테의 유사한 지역주의 운동들과 동맹을 맺어 북부연맹을 결성했으며, 보시는 2012년 4월 5일까지 연맹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으며, 2004년 뇌졸중 이후에도 2012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현재는 연맹의 연방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이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며, 보시는 자신이 창립한 운동의 지도력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1989년, 롬바르디아 연맹·북부 연합은 8.1%의 득표율로 2명의 유럽 의회 의원을 당선시켰다. 보시는 선거 연합을 정당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주장했고, 같은 해 12월 4일 '''북부 연맹'''(Lega Nord)을 결성하여 초대 서기장이 되었다. 북부 각 주를 통합한 후에는 "북부와 남부"라는 구도로 지역주의를 선동하는 방침을 세우고, 남부가 북부 경제의 불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남부의 테로네"(토인)이라는 차별적인 발언을 반복하며 좌파로부터 비판을 받는 한편, 반국가주의자로서 우파의 민족주의도 공격하는 등, 필요에 따라 입장과 행동을 바꾸었다. 대기업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격을 하는 등, 자신의 주장보다 대중의 동향을 우선시하는 포퓰리스트적인 면모도 보였다.

1992년, "탕겐토폴리"로 불리는 대규모 부정부패 척결로 이탈리아의 기존 정당들이 타격을 입고 정계 개편의 흐름이 생겼다. 부정부패의 배경에 남부 마피아가 존재했던 것도 있어, 보시와 북부 연맹의 과격한 주장이 크게 부각되었다. 같은 해 총선거에서 북부 연맹은 하원 55석, 상원 25석을 획득하며 당세를 확장했다.

3. 1. 롬바르디아 연맹 창당

1984년 4월 12일, 롬바르디아 주의 지역 정당인 롬바르디아 연맹(Lega Lombarda)(당시는 롬바르디아 자치 연맹)이 폰티다에서 설립되었고, 2년 후 '''롬바르디아 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1] 밀라노를 중심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롬바르디아 주가 다른 주에 세수를 빼앗기고 있다는 주장은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1] 1987년 총선거(1987년 이탈리아 총선거)에 출마하여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하원에서도 다른 후보가 당선되어 총 2석을 획득했다.[1] 국정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북이탈리아 각 지역 정당과 연합을 주도하여, 베네치아 연맹(Liga Veneta), 피에몬테 자치 운동(Lega Nord Piemont), 리구리아 연맹(Uniun Ligure), 에밀리아-로마냐 연맹(Lega Nord Emilia), 토스카나 연합(Alleanza Toscana)과 함께 선거 연합인 '''롬바르디아 연맹·북부 연합'''(Lega Lombarda – Alleanza Nord)을 결성했다.[1]

3. 2. 북부동맹 결성

움베르토 보시는 1987년 자신이 이끌던 북부연맹의 유일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세나투르'(Senatur, 롬바르드어로 상원의원을 의미)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후에도 이 별명으로 불렸다.[11]

1994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연합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몇 달 만에 동맹을 파기하여 첫 번째 베를루스코니 내각은 199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붕괴되었다.[11]

이후 보시는 베를루스코니와 다시 동맹을 맺어 2001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2차 내각에서 개혁 장관으로 재직했으나, 2004년 3월 11일 뇌졸중으로 2004년 7월 19일 사임하고 유럽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11]

1996년 야당이 된 후, 보시는 지방 분권 문제에 대해 "연방제로의 이행" 또는 "북부 주들의 독립"을 주장하며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 같은 해 9월 15일, 베네치아에서 포 강 유역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가 파다냐(Padania)의 독립을 선언하고, 당명을 "파다냐 독립을 위한 북부 동맹"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 선언은 자국 정부와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11]

1998년 보시는 연설에서 "우리는 신파시스트 악당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로부터 표를 빼앗는다면, 우리는 전쟁 후처럼 그들을 폭력으로 제거합시다"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 발언은 이탈리아 사회 운동을 전신으로 하는 국민 동맹의 반발을 샀고, 보시는 "폭력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았다.[21] 또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마피아"라고 비난하며 포르차 이탈리아와도 관계가 악화되었다.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고립된 북부 동맹과 보시는 정치적 위기를 겪었고, 당내에서도 독립에 회의적인 당원들이 탈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3. 3. 정치적 입장 변화

1990년대 탕겐토폴리 스캔들이 터지자, 보시는 부패와 무능을 청산하려는 새로운 정치인으로 자신을 내세웠다. 그러나 보시 자신도 2억 리라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8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5] 보시의 형은 항소심에서도 유지되었다.[6]

1998년에는 폭력 선동 혐의로 1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는 북부연맹 회의에서 "우리는 이 악당들[신파시스트]을 사냥해야 하며, 그들이 우리로부터 표를 빼앗아 간다면, 우리는 전쟁 후 파시스트들을 몰아냈던 것처럼 집집마다 수색해야 한다"고 발언했다.[7]

2003년 개혁 장관 재직 시절에는 해군에 불법 이민자를 태운 배에 실탄을 발사하라고 명령하며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경고 후, 쾅… 대포를 쏜다"고 말했다.[8][9][10]

보시는 유럽 연합에 대해 비판적이며, "공산주의 은행가들의 소굴"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6]

1996년 야당이 된 후, 보시는 지방 분권 문제에 대해 "연방제로의 이행" 또는 "북부 주들의 독립"을 요구하며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 같은 해 9월 15일, 베네치아에서 포 강 유역에 기원을 둔 새로운 국가 파다니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당명을 "파다냐 독립을 위한 북부 동맹"으로 변경했지만, 좌파 정당 중심의 여당과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1998년, 보시는 연설에서 "우리는 신파시스트 악당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로부터 표를 빼앗는다면, 우리는 전쟁 후처럼 그들을 폭력으로 제거합시다"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는 전후 공산 파르티잔이 무솔리니 계열의 반정부 세력 병사들을 학살한 것을 칭찬하는 듯한 발언으로, 이탈리아 사회 운동을 전신으로 하는 국민 동맹으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21]

이후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적대시된 북부 동맹과 보시는 정계에서 고립되었고, 당내에서도 독립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당원들이 탈당하는 움직임이 발생했다.

4. 베를루스코니 내각 참여와 갈등

움베르토 보시는 1987년 북부연맹의 유일한 상원의원으로 제도권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세나투르"(Senatur, 롬바르드어로 상원의원을 의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2년 탕겐토폴리 스캔들이 터지자 보시는 부패 청산을 외치며 정치계의 새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보시 자신도 2억 리라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이 재판에서 베티노 크락시, 아르날도 포르라니 등 많은 정치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5] 보시의 형은 항소심에서도 유지되었다.[6]

1994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연합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몇 달 만에 동맹을 깨뜨려 첫 번째 베를루스코니 내각은 199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무너졌다.

이후, 보시는 베를루스코니와의 동맹을 재개하여 2001년 선거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두 번째 내각에서 개혁 장관으로 활동했다. 2004년 3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2004년 7월 19일 사임하고 유럽 의회 의원직을 맡았으나, 출석률은 9%에 그쳤다.[11]

2003년 개혁 장관 재직 시절, 보시는 해군에 불법 이민자를 태운 배에 실탄을 발사하라고 명령하며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경고 후, 쾅… 대포를 쏜다"고 말했다.[8][9][10]

보시는 유럽 연합을 비판하며 "공산주의 은행가들의 소굴"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6]

2008년 5월 8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네 번째 내각에서 다시 제도 개혁 장관이 되었으며, 2011년 11월 16일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보시(왼쪽)와 로베르토 칼데롤리, 로지 마우로, 로베르토 코타, 페데리코 브리콜로

4. 1. 제1차 베를루스코니 내각 참여와 연정 탈퇴

1994년, 보시는 총선거에서 약진한 중도우파 포르차 이탈리아, 극우 이탈리아 국민동맹과 함께 제1차 베를루스코니 내각을 수립했다. 보시는 지역 분권 정책의 재검토를 연립 정권에 요구했지만, 극우인 국민동맹과의 대립으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

1995년, 북부 연맹의 연립 탈퇴로 제1차 베를루스코니 내각은 조기에 퇴진했다.[3]

4. 2. 파다니아 독립 선언과 좌절

1996년, 야당으로 전향한 후에도 움베르토 보시는 과격한 주장으로 지지를 얻었고, 지방 분권 문제에 대해서는 "연방제로의 이행" 또는 "북부 주들의 독립"을 요구하는 수준까지 과격해졌다. 같은 해 9월 15일, 베네치아에서 포 강 유역에 기원을 둔 새로운 국가 파다냐(Padania)의 독립을 선언하고, 당명도 "파다냐 독립을 위한 북부 동맹"(Lega Nord per l'Indipendenza della Padania)으로 공식 변경했지만, 좌파 정당을 중심으로 한 여당으로부터 무시당했다. 독립 의회 선거라는 퍼포먼스도 벌였지만, 독립 선언은 이탈리아 정부는 물론 국제 사회로부터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21]

1998년, 보시는 연설에서 "우리는 신파시스트 악당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로부터 표를 빼앗는다면, 우리는 전쟁 후처럼 그들을 폭력으로 제거합시다"라고 발언했다. 이는 전후 공산 파르티잔이 RSI군(추축국에 남아 싸운 무솔리니 계열의 반정부 세력) 병사들을 학살한 것을 칭찬하는 듯한 발언으로, 이탈리아 사회 운동을 전신으로 하는 국민 동맹으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보시는 "폭력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포르차 이탈리아와도 당수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마피아"라고 욕하며 사이가 악화되었다.[21]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적대시된 북부 동맹과 보시는 정계에서 고립되었고, 당내에서도 독립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당원들이 탈당하여 다른 당으로 이적하는 움직임이 발생했다.

4. 3. 제2차, 제3차 베를루스코니 내각 참여

2001년, 북부 연맹은 독립 주장을 철회하고 이민자 공격을 통해 우파 정당들과의 협력 기반을 마련했다. 그 결과, 포르차 이탈리아, 국민동맹과 연립하여 제2차 베를루스코니 내각이 구성되었다. 보시는 이 내각에서 지방자치를 관할하는 행정개혁 담당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주로 외국인 공격 정책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이민자에게 지문 날인을 요구하는 "이민 대책법"을 통과시켰고, 불법 이민자에 대해 강경 대응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23]

2004년, 보시는 연설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원 및 장관직을 사퇴하고 요양에 들어갔다. 2005년 1월 11일, 복귀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2008년 총선에서 북부 연맹은 하원 60석, 상원 26석을 획득하며 최대 승리를 거두었다. 포르차 이탈리아와 국민동맹이 합당한 자유의 인민과 연립하여 제3차 베를루스코니 내각이 구성되었고, 보시는 연방 정책 담당 장관(행정개혁 담당 장관에서 개칭)에 취임했다.

2008년 5월 8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네 번째 내각에서 다시 제도 개혁 장관이 되었으며, 2011년 11월 16일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5. 몰락과 정치적 고립

1992년 탕겐토폴리 스캔들이 밝혀지자 보시는 정치계의 새로운 인물로 자신을 내세우며 부패와 무능을 일소하려 했다. 그러나 보시 자신도 북부연맹 회계 담당이었던 알레산드로 파텔리와 함께 2억 리라 뇌물 수수 혐의로 8개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5] 이 재판에서는 그가 비난했던 베티노 크락시, 아르날도 포르라니 등 많은 정치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보시의 형은 항소심에서도 유지되었다.[6]

1998년 보시는 북부연맹 회의에서 "우리는 이 악당들(신파시스트)을 사냥해야 하며, 그들이 우리로부터 표를 빼앗아 간다면, 우리는 전쟁 후 파시스트들을 몰아냈던 것처럼 집집마다 수색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폭력 선동 혐의로 1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7]

2003년 개혁 장관 재직 시절 보시는 해군에 불법 이민자를 태운 배에 실탄을 발사하라고 명령하며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경고 후, 쾅… 대포를 쏜다"고 말했다.[8][9][10]

보시는 유럽 연합을 비판했으며, 한때 "공산주의 은행가들의 소굴"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6]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장기 집권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자유의 인민 해산으로 우파 정당이 분열되면서 국민들의 지지율이 하락했다. 오성운동 부상으로 좌파 정당도 쇠퇴하는 등 탕겐토폴리 이후 정치적 혼란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부동맹 내에서도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젊은 당원들이 보시의 사퇴를 요구했다.

2013년 총선에서 북부동맹이 참패하자, 로베르토 마로니가 롬바르디아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 보시는 사무총장 복귀를 선언했지만, 당내 반발로 마테오 살비니가 대항마로 나서면서 최초의 사무총장 선거가 치러졌다.[25] 보시는 이 선거에서 살비니에게 크게 패배했다.

2017년 사무총장 선거에서 보시는 살비니 반대파인 Gianni Fava|잔니 파바영어를 지지했지만, 살비니가 재선되었다.

2018년 총선에서 살비니 체제의 동맹은 압승을 거두어 오성운동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보시는 상원의원에 재선되었지만, 선거 후 폰티다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연단에 서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아 창당자로서의 권위를 상실했음을 보여주었다.

5. 1. 당 자금 유용 스캔들과 사퇴

2012년 4월 5일, 움베르토 보시는 가족의 사적인 일에 당 자금이 부적절하게 사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부동맹 연방 서기장직에서 사퇴했다.[14] 이탈리아 검찰은 보시가 당 자금을 자신의 집 수리와 가족을 위한 특혜에 사용했다고 주장했다.[15] 사퇴 후, 북부동맹은 즉시 그에게 명예 당수직을 부여했다.[16]

베를루스코니의 장기 집권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면서 국민들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자유의 인민이 해산하면서 우파 정당은 분열 상태에 빠졌다. 또한 오성운동의 부상으로 좌파 정당도 쇠퇴하는 등 탕겐토폴리 이후로 정치적 혼란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북부동맹에서도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젊은 당원들이 보시의 사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원래 보시는 당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었고, 빽을 이용해 롬바르디아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아들 렌초 보시의 잇따른 스캔들이 비판받았던 것도 배경이었다.

2012년, 북부동맹 내에서 당비 유용 의혹이 제기되어 조사가 진행된 결과 횡령을 실행한 회계 담당자가 보시 가족의 개인 계좌로 송금한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자택 개조 및 가족 생활비 등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4] 그동안 창립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위기를 넘겼지만 이번에는 책임 추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치지 않아 4월 5일 20년간 유지해 온 서기장직에서 사퇴했다. 이사회의 집단 지도 체제를 거쳐 Roberto Maroni|로베르토 마로니영어가 제2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사퇴 후 보시는 "명예 대표" 칭호를 받았지만 명목상의 직책이며, 모든 당내 권한을 박탈당했다.

북부동맹의 지도권은 처음에 로베르토 마로니, 로베르토 칼데롤리, 마누엘라 달 라고로 구성된 소위 "삼두정치"에 맡겨졌다. 2013년 12월 7일 마테오 살비니가 당의 공식 대표를 맡았다.[17]

2019년 8월 결정으로, 로이터가 보도한 바와 같이, 이탈리아 대법원은 "전 북부동맹 대표 움베르토 보시와 전 당 재무 담당자에 대한 사건은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지만, 자금 몰수는 그대로 유지된다"고 판결했다.[18] 이 판결은 2018년 11월 26일 항소법원 판결과 2017년 7월 24일 당의 2009년과 2010년 재정 보고서와 관련된 초기 판결 이후 2019년 11월 5일에 발표되었다.[19]

5. 2. 마테오 살비니와의 갈등

마테오 살비니는 2013년 12월 7일 북부동맹의 공식 대표가 되었다.[17] 로베르토 마로니가 롬바르디아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나자, 움베르토 보시는 사무총장 복귀를 선언했다. 그러나 당내 반발로 마테오 살비니가 대항마로 나서면서 최초의 사무총장 선거가 치러졌고,[25] 보시는 이 선거에서 살비니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살비니는 우익 포퓰리즘으로 전환하여 북부동맹을 "동맹"(Lega)으로 재편했지만, 보시는 살비니가 국가주의와 파시즘에 동조한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보시는 공산주의에서 전향하여 지역주의, 외국인 이민 반대, 반EU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반국가주의와 반파시즘은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17년 사무총장 선거에서 보시는 살비니 반대파인 Gianni Fava|잔니 파바영어를 지지했지만, 살비니가 재선되었다.

2018년 총선에서 살비니 체제의 동맹은 압승을 거두었고 오성운동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보시는 상원의원에 재선되었지만, 선거 후 폰티다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연단에 서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아 창당자로서의 권위를 상실했음을 보여주었다.

5. 3. 정치적 고립

2012년 4월 5일, 움베르토 보시는 가족의 사적인 일에 당 자금이 부적절하게 사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부동맹 연방 서기장직에서 사퇴했다.[14] 이탈리아 검찰은 보시가 당 자금을 자신의 집 수리와 가족을 위한 특혜에 사용했다고 주장했다.[15] 사퇴 후, 북부동맹은 즉시 그에게 명예 당수직을 부여했다.[16] 북부동맹의 지도권은 처음에 로베르토 마로니, 로베르토 칼데롤리, 마누엘라 달 라고로 구성된 소위 "삼두정치"에 맡겨졌으며, 2013년 12월 7일 마테오 살비니가 당의 공식 대표를 맡았다.[17]

이탈리아 대법원은 2019년 8월 결정에서 "전 북부동맹 대표 움베르토 보시와 전 당 재무 담당자에 대한 사건은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지만, 자금 몰수는 그대로 유지된다"고 판결했다.[18] 이 판결은 2018년 11월 26일 항소법원 판결과 2017년 7월 24일 당의 2009년과 2010년 재정 보고서와 관련된 초기 판결 이후 2019년 11월 5일에 발표되었다.[19]

2013년 총선에서 북부동맹이 참패한 후, 로베르토 마로니가 롬바르디아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움베르토 보시는 사무총장 복귀를 선언했지만, 당내 반발로 마테오 살비니가 대항마로 나서면서 최초의 사무총장 선거가 치러졌다.[25] 보시는 선거에서 살비니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살비니는 우익 포퓰리즘으로 전환하여 북부동맹을 "동맹"으로 재편했지만, 보시는 살비니가 국가주의와 파시즘에 동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보시는 반국가주의와 반파시즘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2017년 사무총장 선거에서 보시는 살비니 반대파인 잔니 파바|Gianni Fava영어를 지지했지만, 살비니가 재선되었다.

2018년 총선에서 살비니 체제의 동맹은 압승을 거두어 오성운동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보시도 상원의원에 재선되었지만, 선거 후 폰티다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연단에 서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아 창당자의 권위를 상실했음을 보여주었다.

6. 사생활

움베르토 보시는 두 번 결혼했다. 그는 정치적 주장을 위해 아이들에게 특이한 이름을 지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장남의 이름은 리베레(이탈리아어로 '자유'를 의미하는 여성 명사)이며, 차남의 이름은 엘리다노(포 강에 산다고 여겨지는 신)이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렌초 보시는 롬바르디아 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고등학교를 여러 번 유급했다는 사실과 디플로마 밀(성적표 위조)을 통한 대학 졸업 의혹, 연예인과의 열애 스캔들 등이 보도되었다.

7. 비판 및 논란

움베르토 보시는 1992년 탕겐토폴리 스캔들이 터졌을 때 자신을 정치계의 새 인물로 내세우며 부패 청산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시 자신도 뇌물을 받은 혐의로 8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5] 이 형은 항소심에서도 유지되었다.[6]

1998년에는 "우리는 이 악당들(신파시스트)을 사냥해야 하며, 그들이 우리로부터 표를 빼앗아 간다면, 우리는 전쟁 후 파시스트들을 몰아냈던 것처럼 집집마다 수색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폭력 선동 혐의로 1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7]

2003년 개혁 장관 재직 시절에는 해군에 불법 이민자를 태운 배에 실탄을 발사하라고 명령하며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경고 후, 쾅… 대포를 쏜다"고 말해 논란이 되었다.[8][9][10]

보시는 유럽 연합에 대해 비판적이며, "공산주의 은행가들의 소굴"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6]

1998년, 보시는 연설에서 “우리는 신파시스트 악당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로부터 표를 빼앗는다면, 우리는 전쟁 후처럼 그들을 폭력으로 제거합시다”라고 발언하여 이탈리아 사회 운동을 전신으로 하는 국민 동맹으로부터 큰 반발을 샀고, “폭력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았다.[21]

보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마피아”라고 욕하며 사이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격한 언행으로 보시와 북부 동맹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당내에서도 독립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당원들이 탈당하기도 했다.

사생활에서는 두 번 결혼했으며, 자녀들에게 특이한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남은 '자유'를 뜻하는 리베레, 차남은 포 강에 산다고 여겨지는 신의 이름인 엘리다노이다. 아들 렌초 보시는 롬바르디아 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고등학교 유급, 성적표 위조, 연예인과의 스캔들 등으로 논란이 되었다.

8. 역대 선거 결과

움베르토 보시 역대 선거 결과
선거의회선거구정당득표수결과
1983년하원코모-손드리오-바레세LpT157낙선
1985년롬바르디아 주의회바레세LL943낙선
1987년상원롬바르디아LL15,802당선
1989년유럽 의회북서 이탈리아LL68,519당선
1992년하원밀라노LL239,798당선
1994년하원밀라노LN46,570당선
1994년유럽 의회북서 이탈리아LN387,546당선
1996년하원밀라노LN10,179낙선
폐쇄명부식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당선
1999년유럽 의회북서 이탈리아LN134,318당선
2001년하원밀라노LN40,372당선
2004년유럽 의회북서 이탈리아LN182,823당선
2008년하원롬바르디아LN폐쇄명부식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당선
2009년유럽 의회북서 이탈리아LN171,052당선
2013년하원롬바르디아LN폐쇄명부식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당선
2018년상원바레세LN폐쇄명부식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당선
2022년하원바레세LN폐쇄명부식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당선



1994년 총선거 (하원): 롬바르디아 — 밀라노 1
후보연합득표수%
움베르토 보시자유의 극46,57048.7
프랑코 바사니니진보 연합24,30525.4
지아니 리베라이탈리아를 위한 협약11,32111.8
이냐치오 라 루사국가연합8,5619.0
기타4,8295.0
합계95,586100.0



1996년 총선거 (하원): 롬바르디아 — 밀라노 1
후보연합득표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자유를 위한 극46,09851.5
미켈레 살바티올리브 나무32,46436.3
움베르토 보시북부연맹10,17911.4
기타7660.9
합계89,507100.0



2001년 총선거 (하원): 롬바르디아 — 밀라노 3
후보연합득표수%
움베르토 보시자유의 집40,37253.1
알베르토 마르티넬리올리브 나무31,45441.3
기타4,2665.6
합계76,092100.0


참조

[1] 웹사이트 Membri del Consiglio Federale - Lega Nord https://www.leganord[...]
[2] 웹사이트 Umberto Bossi iscritto al Pci https://espresso.rep[...] 2010-12-02
[3] 웹사이트 MotherJones.com https://www.motherjo[...]
[4] 잡지 Umberto Bossi iscritto al Pci http://espresso.repu[...] 2010-12-02
[5] 뉴스 Bossi Joins Craxi in Corruption Conviction 1995-10-28
[6] 뉴스 Italian Court Upholds Corruption Convictions Agence France-Presse 1997-06-07
[7] 뉴스 Italian Separatist Leader Convicted of Inciting Violence Deutsche Presse-Agentur 1998-02-22
[8] 웹사이트 The Latest News from the UK and Around the World http://news.sky.com/[...]
[9] 웹사이트 https://www.aljazeer[...]
[10] 웹사이트 https://www.smh.com.[...]
[11] 웹사이트 http://www.europarl.[...]
[12] 웹사이트 Bossi a messa dai lefebvriani «Mi liberano con i loro canti» http://archiviostori[...]
[13] 웹사이트 Angela Merkel Attacks Pope Over Holocaust Bishop http://www.huffingto[...]
[14] 뉴스 How Matteo Salvini pulled Italy to the far right https://www.theguard[...] 2018-08-09
[15] 뉴스 Umberto Bossi resigns as leader of Northern League amid funding scandal https://www.theguard[...] 2012-04-05
[16] 뉴스 Italian Northern League leader Umberto Bossi resigns https://www.bbc.co.u[...] BBC News 2012-04-05
[17] 뉴스 Lega: primarie, a Salvini l'81,66% dei voti a Bossi il 18,34% http://www.adnkronos[...] Adnkronos 2013-12-08
[18] 뉴스 Italy's top court upholds seizure of League funds over corruption https://www.reuters.[...] 2019-08-07
[19] 웹사이트 Sez. FERIALE PENALE, Sentenza n. 44878 del 05/11/2019 (ECLI:IT:CASS:2019:44878PEN), udienza del 06/08/2019, Presidente IZZO FAUSTO Relatore MESSINI D'AGOSTINI PIERO http://www.italgiure[...] 2019-11-05
[20] 웹사이트 Lega, il salto di Salvini. Dai Comunisti padani all’amicizia con l’estrema destra http://www.ilfattoqu[...] 2013-12-15
[21] 뉴스 Italian Separatist Leader Convicted of Inciting Violence Deutsche Presse-Agentur 1998-02-22
[22] 뉴스 Italian Northern League leader Umberto Bossi resigns https://www.bbc.co.u[...] BBC News 2012-04-05
[23] 웹사이트 http://news.sky.com/[...]
[24] 뉴스 Umberto Bossi resigns as leader of Northern League amid funding scandal https://www.theguard[...] 2012-04-05
[25] 뉴스 Lega: primarie, a Salvini l'81,66% dei voti a Bossi il 18,34% http://www.adnkronos[...] Adnkronos 201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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