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항 봉쇄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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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산항 봉쇄 작전은 1951년 2월부터 1953년 7월까지 861일간 유엔군이 원산항을 봉쇄한 작전이다. 유엔군은 1.4 후퇴 이후 해군의 해상 우위를 바탕으로 원산만 일대의 섬들을 점령하여 원산항을 봉쇄하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이 작전으로 인해 원산항은 봉쇄되었고, 북한군은 전력을 분산해야 했으며, 유엔군은 지상군 작전을 지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선이 고착되면서 작전 목표는 후방 교란, 항만 봉쇄 등으로 변경되었고, 해병대의 장기 주둔으로 이어졌다. 작전 기간 동안 미 해군은 북한군의 해안 포격에 대응하며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으며, 1953년 휴전 협정으로 작전이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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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산항 봉쇄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분쟁 | 한국 전쟁 |
| 기간 | 1951년 2월 16일 – 1953년 7월 27일 |
| 위치 | 북한 원산 및 동해 |
| 결과 | 유엔군의 승리; 원산 봉쇄 성공 |
| 교전 세력 | |
| 유엔군 | |
| 북한 및 중국 | |
| 지휘관 | |
| 유엔군 | 불명 |
| 북한 및 중국 | 불명 |
| 전력 | |
| 유엔군 | 불명 |
| 북한 및 중국 | 불명 |
| 피해 규모 | |
| 유엔군 | 41명 사망 158명 부상 경비정 1척 침몰 소해정 2척 침몰 전함 1척 손상 순양함 2척 손상 구축함 16척 손상 호위함 3척 손상 소해정 5척 손상 LSD 1척 손상 LSMR 3척 손상 |
| 북한 및 중국 | 불명 |
| 참고 사항 | |
2. 배경
1950년, 중국군의 인해전술로 UN군은 1951년 1.4 후퇴를 한다. 하지만 UN군은 후퇴를 하면서도 다시 북한 지역으로 진격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특히 해군은 지상군의 후퇴와 상관없이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군의 재반격과 북진을 대비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전략적 요충지는 진남포 입구의 초도, 장산곶을 감시할 수 있는 백령도 등 원산만 일대의 여러 섬들이 지정되었다. 따라서 각 도서에 한국 해병을 1~2개 중대씩 투입하여 점령하고 UN군이 재반격할 때까지 기다리며 지상군 작전을 지원했다.
특히 원산항은 동부전선에서 UN군이 다시 북진할 때 필수적인 보급항구였기 때문에 점령하여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2. 1. 전략적 중요성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UN군은 1951년 1.4 후퇴를 단행했다. 그러나 해군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상 병력의 재반격 및 북진을 지원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 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로는 진남포 입구의 초도, 장산곶을 감시할 수 있는 백령도를 비롯한 원산만 일대의 여러 섬들이 선정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해병대는 각 도서에 1~2개 중대씩 투입되어 섬들을 점령하고, UN군의 재반격 시까지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특히 원산항은 동부전선에서 UN군이 북진할 때 필수적인 보급항이었기 때문에, 북한군을 저지하고 항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원산은 북한 동남부 해안의 전략적 요충지로, 대규모 항구, 비행장, 석유 정유 공장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75,000명의 인구와 다수의 포병 부대를 포함하여 최대 80,0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1][2]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X 군단에게 원산에 상륙하여 서쪽으로 진격, 제8군과 연결한 후 북한의 수도인 평양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2]
북한 해군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각종 기뢰를 활용하여 원산 방어에 나섰다. 소련 군사 고문들은 효과적인 기뢰밭 구축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작전의 초기 목표 중 하나는 기뢰의 위치를 파악하고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를 위해 수십 척의 기뢰 제거함이 봉쇄 작전에 투입되었다. 원산 해역 제거 작전은 상륙 예정일 10일 전인 1950년 10월 10일에 개시되었다. 리처드 제독 제임스 H. 도일은 제거 작전에 투입된 수십 척의 미국 군함으로 구성된 제90 기동전단을 지휘했다.[1][2]
이틀 뒤인 10월 12일, 기뢰로 인해 기뢰 제거함 와 가 침몰하여[4] 12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으며, 북한 해안 포대의 정확한 사격을 받았다.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조선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기뢰 제거함 생산을 시작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다른 선박들도 기뢰와 포격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Pirate''와 ''Pledge''의 손실은 작전 중 주요 교전으로 기록되었다.[1][2]
2. 2. 유엔군의 후퇴와 해상 우위
중국군의 인해전술로 유엔군은 1951년 1.4 후퇴를 한다. 하지만 유엔군은 후퇴하면서도 다시 북한 지역으로 진격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특히 해군은 지상군의 후퇴와 상관없이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군의 재반격과 북진을 대비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전략적 요충지는 진남포 입구의 초도, 장산곶을 감시할 수 있는 백령도 등 원산만 일대의 여러 섬들이 지정되었다. 따라서 각 도서에 한국 해병을 1~2개 중대씩 투입하여 점령하고 유엔군이 재반격할 때까지 기다리며 지상군 작전을 지원했다.특히 원산항은 동부전선에서 유엔군이 다시 북진할 때 필수적인 보급항구였기 때문에 점령하여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유엔군은 원산을 오래 지킬 수 없었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인해 연합군은 1950년 12월 9일 원산 철수를 명령했고, 이 과정에서 7,009명의 피난민, 3,384명의 군인, 1,146대의 차량, 약 9083643.40kg의 화물을 수송했다. 맥아더 장군의 계획은 일본에서 재정비한 후 부산 교두보를 유지하며 다시 공세를 펼치는 것이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도시를 재탈환하자, 방어선은 더욱 강력하게 재건되었고, 해상 기뢰가 추가 배치되었으며, 새로운 포병대가 설치되었다.[1][2]
2. 3. 원산 점령 계획
UN군은 1951년 1.4 후퇴를 하면서도 북한 지역으로 다시 진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해군은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군의 재반격과 북진을 대비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산항은 동부전선에서 UN군이 다시 북진할 때 필수적인 보급항구였기 때문에 중요했다.원산은 북한 동남부 해안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대규모 항구, 비행장, 석유 정유 공장이 있었고, 75,000명의 인구와 여러 포병 부대를 포함한 최대 80,0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X 군단에게 원산에 상륙하여 서쪽으로 진격, 제8군과 연결한 후 북한의 수도인 평양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2]
북한 해군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각종 기뢰를 지원받아 원산을 방어했다. 소련의 군사 고문들도 더 효과적인 기뢰밭을 만드는 데 투입되었다. 작전의 첫 번째 목표 중 하나는 기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기뢰 제거함의 사용이 불가피해졌으며, 수십 척의 기뢰 제거함이 봉쇄 작전에 투입되었다. 원산 해역 제거 작전은 상륙 예정일 10일 전인 1950년 10월 10일에 시작되었다. 리처드 제독 제임스 H. 도일은 제90 기동전단을 지휘했다.[1][2]
10월 12일, 기뢰로 인해 기뢰 제거함 USS Pledge (AM-277)와 USS Pirate (AM-275)가 침몰하여[4] 12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으며, 북한 해안 포대의 정확한 사격을 받았다.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조선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기뢰 제거함 생산을 시작했다.[1][2]
테일보드 작전은 미국 육군의 원산 상륙 작전의 암호명이었으며, 불필요한 작전이었다. 작전 준비는 10월 15일, 인천에서 시작되었고, 수천 명의 미국 해병대와 병사, 총 30,184명이 수송선에 탑승하여 상륙 작전에 참여했다. 10월 20일 원산 해안에 도착했을 때, 기뢰 제거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X 군단과 제1 해병사단은 5일 동안 배에 대기해야 했다.[1][2]
10월 25일 상륙 시점에는 북한군이 이미 철수했고 영국군과 한국군이 해당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결국 상륙은 불필요했고, 맥아더는 X 군단을 인천 전선에서 퇴각하는 조선인민군 추격에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10월 19일, 한국군은 평양을 점령했고, 미군은 그곳으로 향하는 대신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여 함흥과 장진호 지역을 점령했으며, 제3 보병사단은 11월에 증원군으로 원산에 상륙했다.[1][2]
3. 봉쇄 작전의 전개
1951년 2월, 미군은 원산만 일대의 7개 도서를 점령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미 해군 구축함 2척이 원산항에 진입, 주요 시설에 함포 사격을 가하여 방해물을 제거하고 일주일 뒤인 2월 24일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2월 24일, 미 해군의 함포 사격 이후 한국 해병대는 신도를 시작으로 여도, 태도, 모도, 소토도, 황토도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원산항은 봉쇄되었고 항만 시설, 철도, 북한군 병영 등이 파괴되었다.
북한군은 소형 어선을 이용한 기습 상륙으로 섬 탈환을 시도했지만, 1951년 11월 28일 황토도 상륙을 제외하고는 미 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미군은 구축함 포격에 순양함을 추가하고, 3월 19일에는 USS 미주리가 16인치 주포를 발사했다. 북한군은 해안포대를 강화하고 기뢰를 부설하려 했지만, 기뢰부설선은 격침되고 설치된 기뢰는 미국의 소해함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러나 전선은 서울 이북에서 고착되었고, 원래 목표였던 지상군 북진 지원은 후방 교란, 항만 및 보급 봉쇄, 적 지상군 유인 등으로 변경되었다. 해병대는 장기 주둔하게 되었고, 미 해병대도 일부 가세하여 병력이 증강되었다.
미 해군은 점령지를 지키고 원산을 포격하기 위해 최소 구축함 2척을 원산만에 상주시키고, 여도에 탄약고, 등대, 탐조등을 설치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원산항 방어를 위해 1,000문 이상의 포를 배치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호도반도와 갈마반도의 북한군 해안포대를 제압했다.
원산만 도서 점령으로 북한군 동부전선의 동해안 루트가 차단되었다. 북한군은 섬 탈환을 위해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했고, 나중에는 원산 상륙에 대비하여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지 못하고 원산에 배치시켜 UN군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1953년 7월 7일 휴전협정이 발표되면서 주둔했던 한미 해병대는 철수했다. 미 해군은 마지막 날까지 원산항에 포격을 퍼부었다.
3. 1. 초기 상륙 작전 (1951년 2월)
1951년 2월, 미군은 원산만 일대의 7개 도서를 우선 점령하는 작전을 개시한다. 2월 16일, 미 해군 구축함 2척이 원산항에 진입하여 주요 시설을 함포 사격으로 제거하고, 일주일 뒤인 2월 24일부터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2월 24일 오전 7시부터 미 해군은 신도에 2시간 동안 함포 사격을 퍼부었고, 한국 해병대 200명이 상륙하여 섬을 점령하였다. 이후, 원산만에서 가장 큰 섬인 여도를 비롯하여 태도, 모도, 소토도, 황토도까지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 작전으로 원산항은 봉쇄되었고, 항만 시설, 철도, 북한군 병영 등이 파괴되었다. 북한군은 소형 어선을 이용한 기습 상륙으로 섬 탈환을 시도했으나, 1951년 11월 28일 황토도 상륙 성공을 제외하고는 미 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3. 2. 원산항 봉쇄 및 포격
1951년 2월 16일, 미 해군은 원산항 봉쇄를 시작했다. 미 해군 구축함 2척이 원산항에 진입하여 주요 시설을 함포 사격으로 파괴했고, 일주일 뒤인 2월 24일부터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1][2]2월 24일 오전 7시부터 2시간 동안 미 해군 함포가 신도에 집중 포격을 가했고, 이후 대한민국 해병대 200명이 상륙하여 섬을 점령했다. 신도를 시작으로 여도, 태도, 모도, 소토도, 황토도 등 원산만 일대의 섬들을 차례로 점령했다.[1][2] 이로써 원산항은 봉쇄되었고, 항만 시설, 철도, 북한군 병영 등이 파괴되었다.
북한군은 소형 어선을 이용한 기습 상륙으로 섬 탈환을 시도했으나, 1951년 11월 28일 황토도 상륙 성공을 제외하고는 미 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미군은 원산항 공격을 강화하여 구축함에 이어 순양함까지 포격에 가세시켰고, 3월 19일에는 USS 미주리가 16인치 주포를 발사했다. 북한군은 해안포대를 강화하고 기뢰를 부설하려 했지만, 기뢰부설선은 격침되었고 설치된 기뢰는 미군 소해함에 의해 제거되었다.[1][2]
하지만 미 해군은 지상군의 진격을 지원한다는 원래 목표 대신, 후방 교란, 항만 봉쇄, 적 병력 유인 등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전선이 서울 이북에서 고착되면서 해병대는 장기 주둔하게 되었고, 미 해병대도 일부 증강되었다.
미 해군은 점령지를 유지하고 원산을 포격하기 위해 최소 구축함 2척을 원산만에 상주시키고, 여도에 탄약고, 등대, 탐조등을 설치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원산항 방어를 위해 1,000문 이상의 포를 배치한 것으로 판단했으며, 이는 북한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북한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단 한 척의 함정도 잃지 않았고, 오히려 호도반도와 갈마반도의 북한군 해안포대를 제압했다.
원산만 도서 점령으로 북한군 동부전선의 동해안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북한군은 섬 탈환을 위해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했고, 나중에는 원산 상륙에 대비하여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지 못하고 원산에 배치해야 했다. 이는 UN군의 부담을 덜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1953년 7월 7일 휴전협정이 발표되면서 주둔했던 한미 해병대는 철수했다. 미 해군은 마지막 날인 7월 27일 오후 10시까지 원산항에 포격을 퍼부었다. 총 861일 동안 UN군은 원산항을 봉쇄하고 북한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데 기여했다.[1][2]

3. 3. 북한군의 저항과 유엔군의 대응
1951년 2월 16일, 미 해군 구축함 2척이 원산항에 진입하여 주요 시설을 함포 사격으로 파괴하면서 봉쇄 작전이 시작되었다. 2월 24일에는 대한민국 해병대 200명이 신도에 상륙하여 점령하였고, 이후 원산만 일대의 여도, 태도, 모도, 소토도, 황토도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다.북한군은 소형 어선을 이용한 기습 상륙으로 섬 탈환을 시도했으나, 1951년 11월 28일 황토도 상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 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북한군은 해안포대를 강화하고 기뢰를 부설하려 했지만, 기뢰부설선은 격침되었고 설치된 기뢰는 미군의 소해함에 의해 제거되었다.[1][2]
미군은 구축함 포격에 이어 순양함, 전함 미주리까지 동원하여 원산항을 포격했다. 미 해군은 원산만에 구축함 2척을 상주시키고, 여도에 탄약고, 등대, 탐조등을 설치하며 장기 주둔 태세를 갖추었다. 미군은 북한군이 원산항 방어를 위해 1,000문 이상의 포를 배치한 것으로 판단했지만, 북한군의 저항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미 해군은 호도반도와 갈마반도의 북한군 해안포대를 제압하며 피해를 입혔다.[1][2]
봉쇄 작전 기간 동안 미국 함선과 항공기는 해안 포대와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1951년 2월 19일, 구축함는 해안 포대의 공격을 받아 2발의 직격탄을 맞았지만, 항공모함에서 추락한 조종사를 구조했다.[1][2] 전함는 1951년 5월 20일 첫 해안 포격 임무 중 북한 포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1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1][2] 5월 24일에는 경순양함과 구축함 USS ''브링크리 배스''가 기뢰 부설함으로 개조된 북한의 삼판을 격침시키고 11명의 시신을 수습했다.[1][2]
3. 4. 전선 교착과 봉쇄 장기화
1951년 2월, 미군은 원산만 일대의 7개 도서를 점령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미 해군 구축함 2척이 원산항에 진입하여 주요 시설을 함포 사격으로 제거한 뒤, 2월 24일부터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한국 해병대는 신도를 시작으로 여도, 태도, 모도, 소토도, 황토도를 점령했다.[1][2] 이로 인해 원산항은 봉쇄되었고 항만 시설, 철도, 북한군 병영 등이 파괴되었다.북한군은 소형 어선을 이용한 기습 상륙으로 섬 탈환을 시도했지만, 1951년 11월 28일 황토도 상륙을 제외하고는 미 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미군은 구축함 포격에 순양함을 추가하고, 3월 19일에는 USS 미주리가 16인치 주포를 발사했다. 북한군은 해안포대를 강화하고 기뢰를 부설하려 했지만, 기뢰부설선은 격침되고 설치된 기뢰는 미국의 소해함에 의해 제거되었다.[1][2]
그러나 미 해군이 기대했던 지상군의 북진은 없었다. 전선은 서울 이북에서 고착되었고, UN군과 중국군은 대치전과 고지 점령전만 반복했다. 이에 따라 원래 목표였던 지상군 북진 지원은 후방 교란, 항만 및 보급 봉쇄, 적 지상군 유인 등으로 변경되었다. 해병대는 장기 주둔하게 되었고, 미 해병대도 일부 가세하여 병력이 증강되었다.[1][2]
미 해군은 점령지를 지키고 원산을 포격하기 위해 최소 구축함 2척을 원산만에 상주시키고, 여도에 탄약고, 등대, 탐조등을 설치하며 영구 주둔을 고려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원산항에만 1,000문 이상의 포를 배치한 것으로 판단하여 북한의 힘을 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의 노력은 실패했고, 미 해군은 호도반도와 갈마반도의 북한군 해안포대를 제압했다.[1][2]
원산만 도서 점령으로 북한군 동부전선의 동해안 루트가 차단되었다. 북한은 섬 탈환을 위해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했고, 나중에는 원산 상륙에 대비하여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지 못하고 원산에 배치시켜 UN군의 부담을 덜어주었다.[1][2]
1953년 7월 7일 휴전 협정이 발표되면서 주둔했던 한미 해병대도 철수했다. 미 해군은 마지막 날까지 원산항에 포격을 퍼부었다. 1953년 7월 27일 철수까지 총 861일 동안 UN군은 원산항을 봉쇄하고 북한군의 전력을 분산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1][2]

봉쇄 작전은 1951년 2월 16일부터 1953년 7월 휴전 협정 서명까지 861일 동안 지속되었다. 미국 해군 함선과 항공기는 해안 포대와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여러 척의 미국 함선이 피해를 입었지만 파괴된 함선은 없었다. UN 제95.2 기동부대는 봉쇄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1951년 2월 17일 원산을 처음으로 포격했다.[1][2]
2월 19일, 구축함 는 원산 지역 해안 포대의 공격을 받았다. 2발의 직격탄과 여러 발의 근접탄을 맞았지만, 기뢰밭에 표류하던 에서 추락한 조종사를 구조했다.[1][2]
2월 24일, 원산항의 신도는 대한민국 해병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3월 3일, 원산 해안 포대는 UN 군함과 교전했지만 명중 기록은 없었다. 전함 는 1951년 5월 20일, 첫 해안 포격 임무 중 북한 포대로부터 1발의 포탄을 맞고 약간의 피해와 함께 전사 1명, 부상 2명의 사상자를 냈다.[1][2]
1951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북한의 미 해군 함정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자 미국은 적 포대 파괴에 집중했다. 6월 28일, 구축함 는 원산항 포격 중 반격 사격을 받아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1][2]
7월 3일, 프리깃 는 포대 공격을 받아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은 기동 항공모함 부대의 공격으로 대응했고, 하루 동안 247회의 폭격 작전과 600명의 대한민국 해병대가 조도에서 본토를 급습했다.[1][2]
7월 6일, 구축함 USS ''Frank E. Evans''는 황토도에 병력을 상륙시킨 후 다른 두 척의 구축함과 함께 건물과 어뢰 기지를 포격했다. USS ''Blue''는 다음날 국도를 점령하고 관측 지점을 설치했다. 7월 11일, 여도 인근에서 USS ''Blue''와 ''Frank E. Evans''가 공격을 받았지만 명중된 포탄은 없었다. 이러한 공격으로 인해 미 해군은 킥오프 작전을 시작했다.[1][2]
1951년 7월 17일부터 매일 폭격 부대는 5kn로 항해하여 적의 위치를 포격했다. 작전 첫날, LSMR 와 는 갈마반도, 우미도, 호도반도의 적 포대로부터 강력한 사격을 받았다. 500발 이상의 포탄이 USS ''O'Brien'' 주변에 떨어졌고, 최소 두 발이 명중되었다. 와 중순양함 도 포격에 참여했다.[1][2]
8월 4일, 영국 해병대는 황토도에 박격포를 설치했고, 8월 11일, 는 해안 사격 통제반을 사용하여 원산 지역의 적 목표에 사격을 가했다. 기뢰 제거함 , 및 는 같은 날 호도반도 인근에서 소해 작전 중 해안 포대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Dextrous''는 2발의 직격을 받아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1][2]
8월 20일 에 대한 공격을 제외하고, 킥오프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날 7문의 적 포가 ''Uhlmann''에 발포했고, 오랜 교전 끝에 5문의 포가 파괴되었지만, ''Uhlmann''은 나머지 2문의 포를 침묵시키지 못한 채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1][2]
3. 5. 유엔군의 주둔 강화
미 해군은 점령지를 지키고 원산항을 포격하기 위해 최소 구축함 2척을 계속 원산만에 상주시켰고 여도에 대규모 탄약고 및 등대, 탐조등을 설치하며 영구 주둔을 생각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이에 대비하기 위해 원산항에만 최소 1000문 이상의 포를 배치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이는 북한의 힘을 뺐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의 노력은 실패하여 미 해군은 단 1척의 함정도 잃지 않았고 오히려 호도반도와 갈마반도에 제압 포격을 가하여 북한군 해안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1][2]이러한 원산만 도서 점령의 효과로는 북한군 동부전선의 동해안 루트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북한이 이들 도서들을 탈환하기 위해 수많은 병력을 투입해야만 했고 나중에는 원산 상륙전을 대비하여 병력들을 전선에 투입하지 못하고 원산에 배치시켜 전선의 UN군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1][2]
1951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북한의 미 해군 함정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는 것으로 보이자 미국은 적 포대 파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6월 28일, 구축함 는 원산항을 포격하던 중 반격을 받아 1발의 포탄에 맞아 경미한 손상을 입었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1][2]
- 7월 3일, 프리깃 는 포대 공격을 받아 명중되어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군은 기동 항공모함 부대의 공격으로 대응했다. 하루 동안 원산에 대한 247회의 폭격 작전이 수행되었고 600명의 대한민국 해병대가 조도에서 본토를 급습했다.[1][2]
- 7월 6일, 구축함 USS ''Frank E. Evans''는 병력을 황토도에 상륙시킨 후 다른 두 척의 구축함과 함께 건물과 어뢰 기지를 포격했다. USS ''Blue''는 다음날 국도를 점령하고 북한군의 위치를 감시하기 위한 관측 지점을 설치했다.
- 7월 11일, 여도 인근에서 USS ''Blue''와 ''Frank E. Evans''가 공격을 받았고, 함선 근처에서 약 50발의 물보라가 관측되었지만 명중된 포탄은 없었다. 이러한 공격, 특히 버즈 쏘우 전투로 인해 미 해군 지휘관들은 원산항 내 기동을 통해 포대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작전인 킥오프 작전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1][2]
1951년 7월 17일부터 매일 폭격 부대에 배정된 연합군 함대의 구성원들은 로 항해하여 알려진 적의 위치를 포격했으며 오후 3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이 작전을 계속했다.
- 작전 첫날, LSMR 와 는 갈마각, 우미도, 호도반도의 적 포대로부터 강력하고 정확한 사격을 받았다. 두 척의 선박 모두 포탄에 맞아 손상되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500발 이상의 포탄이 USS ''O'Brien'' 주변 해상에 떨어졌고 최소 두 발이 명중되었다. 1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피해는 경미했다. USS ''New Jersey''와 중순양함 도 포격에 참여했다.[1][2]
- 8월 4일, 영국 해병대는 북한 해안 포대에 대응하기 위해 황토도에 박격포를 설치했다.
- 8월 11일, 는 해안 사격 통제반을 사용하여 원산 지역의 적 병력 집중 및 수송 목표에 대해 직사 및 간접 사격을 가했다. 기뢰 제거함 , 및 는 같은 날 호도반도 인근에서 검사 소해 작전을 수행하던 중 해안 포대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Dextrous''는 2발의 직격을 받아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으며 중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1][2]
8월 20일 에 대한 공격을 제외하고, 킥오프 작전은 새로운 포대가 건설되기 전까지 봉쇄 중인 함선에 대한 공격 횟수가 감소하면서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날 7문의 적 포가 ''Uhlmann''에 발포했고, 오랜 교전 끝에 5문의 포가 파괴되었으며, 수병들은 117발의 물보라를 확인했지만 명중된 포탄은 없었다. ''Uhlmann''은 나머지 2문의 포를 침묵시키지 못한 채 공격을 중단해야 했는데, 이는 연합군 순찰대가 해당 지역에 진입했기 때문이다.[1][2]
4. 주요 교전 및 사건
1951년 2월 16일, 미국 해군은 원산항 봉쇄 작전을 시작했다. 이 작전은 195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861일 동안 계속되었다.[1][2] 봉쇄 기간 동안 미 해군 함정과 항공기는 북한 해안 포대와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여러 척의 미국 함선이 포격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파괴된 함선은 없었다.[1][2]
1951년 2월 19일, 구축함 USS 오즈번은 원산 지역 해안 포대의 공격을 받았다. 2발의 직격탄과 여러 발의 근접탄을 맞았지만, USS 밸리 포지에서 추락한 조종사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1][2]
2월 24일, 신도리 섬은 대한민국 해병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3월 3일, 원산 해안 포대는 UN 군함과 교전을 벌였지만,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전함 USS 뉴저지는 1951년 5월 20일 첫 해안 포격 임무 중 북한 포대로부터 1발의 포탄을 맞았다. 이로 인해 1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1][2]
1951년 5월 24일, 원산 유엔 기지선은 레이토 섬 남동쪽에서 여러 척의 북한 소형 선박을 탐지했다. 경순양함 USS 맨체스터와 구축함 USS 브링클리 배스는 야간 교전에서 레이더를 사용하여 사격을 지휘했고 적의 대형을 붕괴시켰다. 다음 날, M-26 기뢰 4개씩을 탑재한 기뢰 부설함으로 개조된 삼판 4척과 11구의 북한군 시신이 수습되었고, 1명의 북한군 부상자가 포로로 잡혔다.[1][2]
1951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북한의 미 해군 함정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자, 미국은 적 포대 파괴에 집중했다. 6월 28일, 구축함 USS 헨리 W. 터커는 원산항 포격 중 반격 사격을 받아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1][2] 7월 3일, 프리깃 USS 에버렛은 포대 공격을 받아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1][2]
1951년 7월 17일부터 연합군 함대는 매일 폭격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에서 여러 척의 함선이 피해를 입었지만, 킥오프 작전으로 인해 봉쇄 함선에 대한 공격 횟수가 감소했다.[1][2]
1951년 말과 1952년에는 포획했거나 항복한 북한군으로부터 얻는 첩보가 빈번해졌다. 미국은 적군이 기뢰 부설용 삼판을 건조하고 원산 주변 섬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미그 항공기도 더 많은 수로 운용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이는 UN 항공기와 봉쇄 전력을 위협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충분한 물자를 지원받은 북한군도 대규모 포격전을 벌여 탄약 비축량을 과시했다.[1][2]
1952년 1월 11일, 기뢰 제거함 USS 레드스타트와 USS 덱스트러스는 호도 판도에서 정확한 포격을 받았다. 덱스트러스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1][2]
봉쇄 1주년인 1952년 2월 16일, 원산은 매일 폭격을 받았다. 3월 13일, 적 해안 포대가 원산의 칼마각에서 UN군을 상대로 활동했다. USS 윌트시와 USS 브링클리 배스는 3월 20일 원산에서 해안 기반 감시를 이용하여 해안 포대와 교전했다.[1][2]
태풍 카렌이 며칠 동안 한국 해역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봉쇄 작전도 중단되었다. 폭풍이 지나간 후 USS 루이스는 원산 지역의 아군 섬에 포격을 가하던 칼마각의 적 포대에 약 12.70cm 포탄 7발을 발사했다. 적 포병은 제압되었지만,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1][2]
1952년 9월 11일, 우미도의 포대가 USS 루이스에 105mm 포탄 18발을 발사했지만, 피해나 사상자는 없었다. 9월 13일, USS 본험 리처드에서 출격한 항공기는 원산 근처에서 길이 약 39.62m의 해군 선박을 공격하여 격침시켰다.[1][2]
1953년 정전 협정 체결로, 861일간의 전투가 종료되었다.[1][2]
1952년 10월 7일 원산과 흥남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상 항공전이 벌어졌다. MiG-15기들이 제77기동부대 항공기를 세 차례 공격했고, 한 대의 MiG기는 두 대의 미국 AD기에 사격을 가해 반격을 받았다. 이후 MiG-15기 4대가 F4U기 편대를 공격했고, 다른 2대는 흥남 인근에서 AD기 8대를 공격했다. 이 교전에서 사상자는 없었지만, 그날 마지막 공격에서 단일 MiG-15기가 흥남 인근의 다른 작전에서 F4U기 4대 중 1대를 파괴했다.[1][2]


4. 1. USS Walke 사건 (1951년 6월)
1951년 6월 12일, 마셜 톰슨 대령이 지휘하던 미국 해군 구축함 USS Walke (DD-723)는 제77기동부대 (TF-77) 소속으로 원산항 근해에서 작전 중이었다. Walke는 북한 해안에서 약 6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어뢰 또는 기뢰밭에서 떨어져 나온 부유 기뢰로 추정되는 물체에 공격받았다.[2][6][7][8]이 공격으로 Walke 좌현 선체에 큰 폭발이 발생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승조원 26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입었다. 폭발 당시 많은 사상자가 배 밖으로 튕겨져 나가 물에 빠졌으며, 이들을 모두 구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2][6][7][8] 이 사건은 한국 전쟁 중 미국 해군이 겪은 가장 치명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9]
얼마 후, 근처에 있던 구축함 USS Harry E. Hubbard (DD-748)와 USS Bradford (DD-545)의 승조원들은 Walke 우현에서 유막을 발견하고, 잠수함 2척으로 추정되는 물체에 폭뢰를 투하했다. 추격전은 결국 중단되었고, Walke는 임시 수리를 받고 일본으로 향했다. 이후 조사에서 손상된 함선에서 작은 금속 디스크가 발견되었고, 분석 결과 어뢰 뇌관의 일부로 확인되었다. Walke는 이후 수리를 완료하고 다음 해에 한국 해역으로 복귀했다.[2][6][7][8]
4. 2. 버즈 소 전투 (1951년 7월)
1951년 7월, 미 해군은 북한군의 원산 봉쇄 해제 시도에 맞서 '버즈 소 전투'라고 불리는 작전을 수행했다. 7월 6일, 미 해군은 해상 포격을 통해 북한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2][8][10] 이에 북한군은 7월 17일 강력한 포격으로 보복을 시도했다.[2][8][10]4시간 반 동안, 미 해군 구축함 오브라이언, 블루, 알프레드 A. 커닝햄은 원산의 포대와 교전하며 2,336발의 5인치 포탄을 발사했다. 북한군은 500발 이상의 포탄으로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미 해군 함선에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다음 날 프랭크 E. 에반스는 포대와 교전 중 4발의 근접탄을 맞아 4명이 부상을 입었다.[2][8][10]
이후에도 양측의 교전은 계속되었다.
| 날짜 | 사건 내용 |
|---|---|
| 4월 1일 | 레너드 F. 메이슨 함미 뇌관 격실 폭발 (사상자 없음).[1] |
| 4월 2일 | 윌츠, 맥긴티, 콘도르 적 포격 받음 (피해 및 사상자 없음).[1][2] 같은 날, 윌츠는 칼마각 동쪽 해안 포대로부터 10발의 근접탄을 맞았지만 명중하지 않았다.[1][2] |
| 4월 10일 | 세인트폴, 핸슨 합동 공격, 실버스타인 30발의 적탄을 받았으나 피해 없음.[1][2] |
| 4월 11일 | 윌츠와 맥긴티 원산 해안 포대와 교전.[1][2] |
| 4월 17일 | 맥긴티와 매독스 반격으로 적 포대 파괴.[1][2] |
| 4월 29일 | USS Cabildo 적 포격으로 경미한 피해, 2명 부상.[1][2] 같은 날, 실버스타인과 매독스는 우미도(어미도) 철수를 엄호하던 중 적 포격을 받았으나 반격하여 제압. 밸리 포지 함재기들이 근접 항공 지원 제공.[1][2] |
| 4월 28일 | 실버스타인과 컨서버 호도 판도로부터 포격 받음.[1][2] |
| 5월 7일 | 왁스빌 12발 포격 받음.[1][2] |
| 5월 10일 | 머갠서, 레드헤드 칼마각으로부터 10발 적탄 받음. 같은 날, 매독스와 래피는 북한 철도 목표물 공격.[1][2] |
| 5월 11일 | 매독스, 래피, 허버트 J. 토머스, 에번즈빌 75mm와 155mm 포탄 206발 받음.[1][2] |
| 5월 17일 | 전날 체포한 포로 심문 결과, 북한군이 요도 공격 계획 중임을 파악.[1][2] |
| 5월 27일 | USS Cabildo와 오즈번 원산 해안 포대와 교전.[1][2] |
| 5월 29일 | 오브라이언 적 포대 제압. 오즈번, 래드포드, 헤론 교전.[1][2] |
| 6월 5일 | 오브라이언, 래드포드, 로프버그 호도 판도 남쪽 75mm 포대 공격.[1][2] |
| 6월 7일 | 북한군 황토도 포격.[1][2] |
| 6월 12일 | 앨버커키 적탄 포위, 1명 부상.[1][2] |
| 6월 19일 | 북한군 황토도 재포격. 파크스 원산 남쪽 철도 수리 중인 적군 300명에게 포격.[1][2] |
| 1952년 8월 10일 | 해도 판도 적 포대 바턴, 자비스 포격. 바턴 경미한 피해, 1명 사망, 1명 부상.[1][2] |
| 8월 12일 | 그래플 30발 105mm 포탄 표적, 수선 아래 피탄. 바턴 반격.[1][2] |
| 5월 12일 | FS-905 적 해안 포대 피격, 경미한 피해.[1][2] |
| 8월 16일 | 북한군 황토도 재포격.[1][2] |
북한군은 숨겨진 포를 사용하여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주로 한도 판도, 합진리(합진리), 칼마각 등에서 포격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4. 3. 오퍼레이션 파이어볼 (1951년 5월 ~ 9월)
오퍼레이션 파이어볼(Operation Fireball)은 1951년 5월부터 9월까지 원산항 봉쇄 작전의 일환으로 원산 지역에 대한 포격을 가하는 작전이었다.[2][5] 이 작전에는 제5공군의 해군 및 공중 자산이 합동으로 투입되었으며, 북한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5월 21일과 22일 밤, LSMR 2척은 경순양함과 구축함의 지원을 받아 35분 동안 4,903발의 로켓을 발사하여 도시의 방어 시설에 큰 타격을 주었다. 유엔(UN) 소속 항공모함의 항공기는 조명탄을 발사하는 데 사용되었고, 군함은 포격에 집중했다.[2][5]
LSMR이 원산 포위전에 투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북한 수비대에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6월부터 9월까지 LSMR은 총 12,924발의 5인치 로켓을 발사했다. 작전 중 구축함 USS 브링클리 배스(DD-887)는 포병 부대와 교전하다가 약간의 손상을 입었으며, 이 작전으로 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2][5]
4. 4. 북한군의 섬 공격과 유엔군의 반격
5월 24일, 원산 유엔 기지선은 레이토 섬 남동쪽에서 여러 척의 북한 소형 선박을 탐지했다. 경순양함 USS 맨체스터(USS Manchester)와 구축함 USS ''브링크리 배스''(USS Brinkley Bass)는 야간 교전에서 레이더를 사용하여 사격을 지휘했고 적의 대형을 붕괴시켰다. 다음 날, M-26 기뢰 4개씩을 탑재한 기뢰 부설함으로 개조된 삼판 4척과 11구의 북한군 시신이 수습되었고, 1명의 북한군 부상자가 포로로 잡혔다.[1][2]10월 7일 원산과 흥남에서 해상 항공전이 벌어졌는데, 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MiG-15기들은 제77기동부대 항공기를 세 차례 공격했고, 한 대의 MiG기는 두 대의 미국 AD기에 사격을 가해 반격을 받았다. 양측 모두 피해나 사상자는 없었으며, MiG기들은 서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MiG-15기 4대가 F4U기 편대를 공격했고, 다른 2대는 흥남 인근에서 AD기 8대를 공격했다. 이 교전에서 사상자는 없었지만, 그날 마지막 공격에서 단일 MiG-15기가 흥남 인근의 다른 작전에서 F4U기 4대 중 1대를 파괴했다.[1][2]
10월 16일, USS 톨레도(USS Toledo)는 75mm 및 122mm로 추정되는 포탄 4발을 맞았다. 모든 포탄은 선박에서 약 약 914.40m 떨어진 물에 떨어져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다. USS 맨스필드(USS Mansfield) 또한 약 40발의 75mm 포탄 공격을 받았다. 11월 20일까지 한 달 이상 포격이 오가지 않다가 USS 카이트(USS Kite)와 USS ''톰슨''(USS Thompson)이 120mm 포탄을 맞았다. ''톰슨''은 한 명이 부상을 입고 경미한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 USS ''카이트''는 다음 날 또 다른 교전을 벌였다. 그녀는 55발의 75mm 포탄을 맞았지만, 다시 사상자는 없었다.[1][2]
10월 21일 USS ''루이스''(USS Lewis)는 원산항에서 작전 중인 대한민국 소해정 두 척에 포격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적의 포격을 받았다. ''루이스''는 지원에 나서 반격을 가하고 연막을 살포하여 소해정을 가렸다. 그녀는 75mm 포탄 2발을 맞았다. 한 발은 갑판에 떨어져 경미한 피해를 입히고 한 명의 부상자를 냈고, 다른 한 발은 1번 기관실의 선체 외판을 관통했다. 포탄은 폭발하지 않았지만, 증기 폭발을 일으켜 즉사 6명, 치명상 1명의 사상자를 냈다. ''루이스''는 지원 없이 계속 반격을 가하고 연막을 살포했다. 그녀는 그 후 철수하여 일본에서 긴급 수리를 받았다. 10월 27일,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식이 함상에서 거행되었다.
11월 25일, ''톰슨''은 이번에는 적 항공기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제트기는 미국 선박 위로 6~8발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가장 가까운 곳은 약 274.32m 떨어졌다. 항공기는 ''톰슨''의 망원경에 감지되었지만,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12월 6일, USS ''머갠서''(USS Merganser)가 남청강 어귀의 포격에 의해 공격을 받자 USS ''윌리엄 시벌링''(USS William Seiverling)이 101발의 포탄으로 응사했다. ''윌리엄 시벌링''은 칼마각의 포격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1][2]
다음 날, ''머갠서''는 칼마각에서 75mm 포탄 30발을 더 받았지만 피해는 없었다. USS 쉴즈(USS Shields), USS ''윌리엄 시벌링'' 및 유엔 소해정은 12월 11일에 약 75발의 포격을 받았다. 작은 소해정들은 장비를 풀고 연막탄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가려야 했다. 같은 날, USS ''왁스빌''(USS Waxbill)과 USS ''마셜''(USS Marshall)이 여도 서쪽에서 충돌하여 ''왁스빌''은 선체 부속품에 갑판 손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운용 가능했으며 다른 피해는 없었다.[1][2]
12월 12일 ''마셜''은 다시 공격을 받아 20발의 포탄이 발사되었지만 모두 빗나갔다. USS 그래스프(USS Grasp)와 ''윌리엄 시벌링'' 또한 공격을 받았지만 무사했다. 12월 13일, 북한 포병의 포탄 약 40발이 남청강 어귀 근처에서 순찰 중이던 ''왁스빌''과 ''마셜''을 목표로 했다. 포격은 정확했지만, 명중탄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포탄은 ''왁스빌''에서 약 3.05m 떨어진 물에 떨어져 파편 피해를 입혔다. 반격으로 12발의 포탄이 발사되었다.[1][2]
''왁스빌''은 12월 19일에 다시 포격을 받았다. 세 발의 포탄이 그녀를 향해 발사되었지만, 배를 맞히지 못했다. 며칠 후, USS ''톨레도''는 도시를 폭격하는 동안 같은 공격을 받았지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2월 23일, 원산항에서 소해정을 위한 포격을 지원하는 동안, USS ''마셜'', USS ''맥고완''(USS McGowan)은 75mm로 추정되는 포탄 약 30발을 받았다. 포격 과정에서 4~9발의 공중 폭발이 ''맥고완'' 근처에, 60~70발이 ''마셜'' 근처에, 소해정 사이에 여러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교전 기간 동안 북한은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맥고완''은 이틀 뒤 해안 포대와 또 다른 교전을 벌였다.[1][2]
5월 15일, 제77기동부대 소속 항공기들이 요도 섬의 비행장을 공격했고, 미 해군 함정들은 섬의 포대를 제압했다. USS ''브러시''(USS Brush)는 그날 포탑에 피격되어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고, 9명이 부상당했으며 그 중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함 USS 뉴저지(USS New Jersey)는 5월 27일에 포격을 받았지만, 16인치 주포로 신속하게 제압했다. 한편, 섬들은 6월에도 매일 포격을 받았고, 중포 공격도 계속되었으며, 공산군은 모든 유엔 공격에 저항했지만, 피해는 거의 없었다. 6월 3일, 원산 해안 포대가 USS 존 A. 볼(USS John A. Bole)과 USS ''로프버그''(USS Lofberg)에 105mm 포탄 15발을 발사했으나 피해는 없었다. 반격으로 포대가 제압되었다.[1][2]
USS ''LSMR-409''는 6월 4일에 피격되어 식당 구획과 무선실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5명이 부상당했다. 적은 LSMR의 200발이 넘는 로켓 공격을 받기 전에 76mm 포탄 30발을 발사했다. USS ''PC-706''은 호도 반도의 북쪽 해변에 있던 북한 어선 5척을 파괴했다. 당시 날씨는 태풍 주디로 인해 매우 짙은 안개가 껴서 제77기동부대의 작전이 3일 동안 방해받았다. ''로프버그''와 ''존 A. 볼''은 6월 8일에 포대에 의해 공격받았지만, 이 역시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존 A. 볼''은 다음 날 적의 포대를 포격했다. 6월 11일, USS ''윌치''(USS Wiltsie)는 105mm 포탄 약 45발을 맞았다. 함선은 주 갑판 우현에 한 번 피격되었지만, 여전히 완전히 작동했다. 파편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갑판에 약 10.16cm 구멍이 생겼다. 미군 사상자는 없었다.[1][2]
이 사건 3일 후, USS ''브레머턴''(USS Bremerton), USS ''로프버그'' 및 USS ''존 A. 볼''은 포대와 교전하여 여러 문의 포가 파괴되었고, 아군 사상자는 없었다. ''로프버그'', ''존 A. 볼'' 및 USS 커런트(USS Current)는 다음 날 110발의 포격을 받았지만 피해는 없었다. 호도 반도의 해안 포대는 연합군의 봉쇄를 점점 위협했다. 6월 17일, 원산 항구의 구축함에 집중적인 포격이 가해졌다. USS 어윈(USS Irwin)과 USS 로완(USS Rowan)은 75발의 포격을 다시 받았고, USS ''헨더슨''(USS Henderson)은 75발을 피했으며, 가장 가까운 포탄은 ''헨더슨''에서 약 9.14m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1][2]
''어윈''과 ''로완''은 다음 날 또 다른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한 번의 교전에서 가장 많은 타격을 입혔다. USS ''어윈''은 칼마각에서 발사된 포탄 1발에 맞아 주 갑판에 약 0.91m 구멍이 났다. 미 해군 병사 5명이 부상당했다. ''로완''은 5발의 피격과 10명의 부상자를 냈고, 총 45발의 다양한 구경의 포탄을 맞았다. 구축함은 중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USS 세인트폴(USS Saint Paul)에는 36발의 포탄이 발사되었지만, 피격되지는 않았다.[1][2]
같은 날 소규모 해상 교전이 벌어졌다. 무장한 대한민국 육군 정보선이 북한 순찰정 1척과 교전했고, 10분 동안 교전이 벌어진 후 북한군은 포대의 엄호 아래 후퇴했다. 순찰정은 20kn의 속도를 냈고, 무전기를 탑재했으며, 로켓 발사기, 기관총으로 무장했으며, 승무원은 다양한 소형 무기를 휴대했다. 6월 19일, ''로완''과 ''브레머턴''이 포격을 받았지만, 피격되지는 않았다.[1][2]
USS ''맨체스터''는 7월 3일경 원산을 대대적으로 포격하던 중, 근거리 탄의 파편으로 후방 연통에 약 5.08cm 구멍이 생기고 탄약고 문을 관통했다. 7월 7일, 호도 반도의 북한 포병들이 봉쇄를 공격했다. 76mm에서 122mm에 이르는 300발 이상의 포탄이 USS ''로프버그'', USS ''토머슨''(USS Thomason) 및 USS 햄너(USS Hamner) 근처에 떨어졌다. ''토머슨''은 공중 폭발로 인해 상부에 구멍과 흠집이 생겼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미군은 작전이 종료되기 전에 880발의 반격 포격을 가했다.[1][2]
며칠 후, 북한 포병은 USS ''세인트폴''에 76mm에서 105mm에 이르는 포탄 48발을 발사했고, 포좌에 명중했다. 두 문의 포가 손상되었지만, 부상자는 없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북한군은 유엔 섬 공격에 집중했고, 7월 23일에는 ''세인트폴''에 155mm 포탄 12발이 발사되었고, 모두 함선에서 약 9.14m~약 45.72m 떨어진 해상에 떨어졌다. 7월 27일 ''세인트폴''은 해안 포대에 대한 전투에서 미군의 마지막 포격을 가했다. 정전 협정 체결로, 861일간의 전투가 종료되었다.[1][2]
5. 봉쇄의 결과 및 영향
원산항 봉쇄 작전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861일 동안 지속되었다. 이 작전으로 UN군은 원산항을 완전히 봉쇄하고 북한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2]
하지만, 이 작전은 초기 목표였던 지상군의 북진을 지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전선은 서울 이북에서 고착되었고, UN군과 공산군은 서로 대치하며 고지 쟁탈전만 반복했다. 이로 인해 원산항 봉쇄 작전은 후방 교란, 항만 및 보급 봉쇄, 적 지상군 유인 등으로 목표가 변경되었다.[1]
북한군은 원산항 탈환을 위해 지속적으로 UN군이 점령한 섬에 포격을 가했다. 1953년 1월부터 5월까지 원산 주변과 인근 지역의 해안포는 주로 황토도와 요도를 향해 수백 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거의 매일 포격이 있었지만, UN군 인원은 4명 사망, 15명 부상에 그쳤으며, UN 함정은 지속적인 반격 포격으로 대응했다.[1][2]
UN군 함정들도 지속적으로 북한군의 포격을 받았다. 1953년 3월 18일, USS 로스앤젤레스는 원산에서 포격 임무 중 적 포탄 1발을 맞았으나 경미한 피해만 입었고,[1][2] 4월 16일, USS 매독스는 76mm 포탄에 맞아 3명이 부상당했다.[1][2] 4월 19일, USS 제임스 E. 카이즈는 155mm 포탄에 맞아 4명이 부상당했다.[1][2]
UN 선박들은 원산에서 적대적인 영토를 상대로 오랫동안 봉쇄를 유지함으로써 중요한 목표를 달성했다. UN 해군 병력은 자체 피해는 비교적 적게 유지하면서 북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원산을 방어한 북한 포병들은 대부분 무력했으며, 수천 달러 상당의 포탄이 낭비되었다. 원산은 파괴되었고 전쟁 후 수년 동안 그렇게 남아 있었지만, 그 위치 때문에 결국 재건되었고 여전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1][2]
5. 1. 북한군 전력 분산
미 해군은 원산항 봉쇄를 통해 북한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북한군은 원산항을 탈환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투입해야 했고, 이는 전선의 UN군 부담을 덜어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북한군은 해안포대를 강화하고 기뢰를 부설하는 등 반격을 시도했지만, 미 해군은 효과적으로 대응했다.[1][2]1953년 4월은 미 해군이 3년간의 전투 중 가장 격렬했던 시기로 기록되었다. 북한군은 2,000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며 저항했지만, 미 해군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봉쇄를 유지했다. 북한군은 호도반도에 숨겨진 포대를 건설하여 미 해군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미 해군은 순양함과 전함, 해군 항공기를 동원하여 이를 제압했다.
미 해군은 원산만 도서 점령을 통해 북한군 동부전선의 동해안 루트를 완전히 차단했다. 북한은 원산 상륙전을 대비하여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지 못하고 원산에 배치해야만 했다. 이는 북한군의 전력 분산을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UN군의 작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5. 2. 유엔군 작전 지원
1951년 2월, 미군은 원산만 일대의 7개 도서를 점령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미 해군 구축함 2척이 원산항에 진입하여 주요 시설을 함포 사격으로 제거한 후, 2월 24일부터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1] 한국 해병대는 신도를 시작으로 여도, 태도, 모도, 소토도, 황토도 등 원산만 주요 섬들을 점령했다.[1] 이를 통해 원산항은 봉쇄되었고, 항만 시설, 철도, 북한군 병영 등이 파괴되었다.[1]북한군은 소형 어선을 이용한 기습 상륙으로 섬 탈환을 시도했으나, 1951년 11월 28일 황토도 상륙을 제외하고는 미 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1] 미군은 구축함 포격에 이어 순양함, USS 미주리의 16인치 주포까지 동원하여 원산항 공격을 강화했다.[1] 북한군은 해안포 강화와 기뢰 부설로 대응했지만, 기뢰부설선은 격침되고 기뢰는 미군 소해함에 의해 제거되었다.[1]
당초 지상군 북진 지원이 목표였으나, 전선이 서울 이북에서 고착되면서 후방 교란, 항만/보급 봉쇄, 적 지상군 유인 등으로 작전 목표가 변경되었다.[1] 미 해군은 원산만 점령 유지를 위해 구축함 2척을 상주시키고, 여도에 탄약고, 등대, 탐조등을 설치하며 장기 주둔을 준비했다.[1] 미군은 북한군이 원산항 방어를 위해 1,000문 이상의 포를 배치한 것으로 판단했으며, 이는 북한군의 전력 분산을 유도했다.[1] 북한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단 한 척의 함정도 잃지 않았고, 오히려 호도반도와 갈마반도의 북한군 해안포대를 제압했다.[1]
원산만 도서 점령으로 북한군 동부전선의 동해안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북한군은 섬 탈환을 위해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1] 또한, 원산 상륙에 대비하여 병력을 원산에 배치함으로써 전선의 UN군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를 가져왔다.[1]
1953년 7월 7일 휴전협정 발표 후 한미 해병대는 철수했다.[1] 미 해군은 마지막 날까지 원산항에 포격을 가했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861일 동안 UN군은 원산항을 봉쇄하고 북한군 전력을 분산시키는 데 기여했다.[1]
1953년 1월부터 5월까지 원산 주변과 인근 지역의 북한군 해안포대는 주로 황토도와 요도를 향해 수백 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나, UN군은 4명 사망, 15명 부상에 그쳤다.[1][2] UN 함정은 지속적인 반격 포격으로 대응했다.[1][2] 2월에는 USS 필리핀 시, USS 오리스카니, USS 키어사지 등이 참여한 미 해군 항공모함의 대규모 공격 작전이 수행되어 원산 지역 공산주의자들의 물류 시스템에 큰 피해를 입혔다.[1][2]
3월 5일, USS 미주리는 105mm 해안포대의 공격에 대응하여 신속하게 포대를 제압했다.[1][2] 3월 18일, USS 로스앤젤레스는 원산에서 포격 임무 중 적 포탄 1발을 맞았으나 경미한 피해만 입었다.[1][2] 3월 22일, USS 미주리는 또다시 포격을 받았지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1][2]

4월 2일, USS 로스앤젤레스는 원산 해안포대의 공격으로 13명이 부상당하고 주 돛대에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1][2] 4월 16일, USS 매독스는 76mm 포탄에 맞아 3명이 부상당했다.[1][2] 4월 19일, USS 제임스 E. 카이즈는 155mm 포탄에 맞아 4명이 부상당했다.[1][2]
5월 15일, 미 해군 함정들은 요도 섬의 포대를 제압했고, USS 브러시는 포탑 피격으로 9명이 부상당했다.[1][2] 6월 4일, USS LSMR-409는 피격으로 5명이 부상당했다.[1][2] 6월 11일, USS 윌트시는 주 갑판에 피격되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1][2]
6월 18일, USS 어윈과 USS 로완은 칼마곶 포대의 공격으로 각각 5명, 1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1][2] 7월 7일, USS 토머슨은 공중 폭발로 인해 상부에 피해를 입었지만, 사상자는 없었다.[1][2] 7월 23일, USS 세인트폴은 155mm 포탄 12발을 맞았으나 모두 빗나갔다.[1][2] 7월 27일, USS 세인트폴은 해안 포대에 대한 미군의 마지막 포격을 가했다.[1][2]
5. 3. 군사적, 전략적 한계
1953년 1월 2일, 조선인민군은 국제 연합이 점령한 원산항의 섬들에 대규모 포격을 시작했다. 이후 몇 달 동안 원산 주변과 인근 지역의 해안포는 주로 황토도와 요도를 향해 수백 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 작전은 5월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UN 정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해안 포대의 90%가 봉쇄 함대가 아닌 UN 섬을 대상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거의 매일 포격이 있었지만 UN 인원은 4명만 사망하고 15명이 부상당했다. 작전 중 UN 함정은 지속적으로 반격 포격을 가했다.[1][2]2월 14일, 조선인민군 포격의 일환으로 적 포탄이 미국 해병대를 포함한 두 명을 사망시키고 9명이 부상당했다. 이는 UN 지상군에 대한 조선인민군의 가장 성공적인 포격 공격이었다. 요도의 지휘소도 손상되었고, DUKW 1대가 파괴되었으며, 다른 2대가 선체에 손상을 입었다. 구호소, 텐트 2개, 통신선도 손상되었다. 황토도에서는 벙커 2개가 무너졌다.[1][2]
3월 5일, 원산항에서 대규모 UN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USS 미주리는 105mm 해안 포대에서 발사된 5발의 포탄에 대응했다. ''미주리''는 피탄되지 않았고, 신속하게 포대를 침묵시켰다. 5일 후 ''미주리''는 도시를 포격하는 동안 75mm~155mm 포탄 15발을 더 맞았다. 미국 함선은 다시 피해를 면했고, 가장 근접한 포탄은 약 457.20m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 USS ''Merganser''도 공격을 받았고, 가장 근접한 포탄은 그녀로부터 약 182.88m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1][2]
1953년 3월 18일, USS 로스앤젤레스는 원산에서 포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공중 폭발 2발과 표면 포탄 1발이 함선 근처에 떨어졌다. 3월 22일, 또 다른 대규모 포격 중에 90mm 공중 폭발 2발과 105mm 포탄 2발이 ''미주리'' 근처에 떨어졌지만 손상되지 않았다. USS 프리쳇과 ''Waxbill''도 포격을 받았지만 어떠한 공격에서도 피해는 없었다. [1][2]
USS ''Los Angeles''는 3월 27일 적 포탄 1발을 맞았지만 피해는 경미했고 부상자는 없었다. 4월 2일, USS ''Los Angeles''는 원산 해안 포대에서 또 한 번 피탄되었다. 이번에는 13명이 부상당했지만 주 돛대에 경미한 구조적 손상만 발생했다. 방탄복을 착용한 다른 14명도 맞았지만 부상당하지는 않았다.[1][2]
4월 16일, ''Maddox''는 10문 포대에 대한 40분간의 교전에서 발사된 156발 중 1발을 맞았다. 76mm 포탄은 갑판 좌현에 명중하여 16인치 구멍을 뚫고 3명이 부상당했다. ''Maddox''는 반격 포격을 가했지만 적 포를 침묵시키지 못했다.[1][2]
4월 19일은 원산 봉쇄 작전 중 활발한 날이었다. 그날 교전에서 손상된 유일한 함선은 USS ''James E. Kyes''였다. 155mm 포탄 1발이 ''James E. Kyes''를 관통하여 3피트 구멍을 뚫었고, 이 과정에서 4명이 부상당했으며, 그 중 1명은 중상을 입었다.[1][2]
국제 연합 선박들은 원산에서 적대적인 영토를 상대로 오랫동안 봉쇄를 유지함으로써 중요한 목표를 달성했다. 국제 연합 해군 병력은 자체 피해는 비교적 적게 유지하면서 조선인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원산을 방어한 조선인민군 포병들은 대부분 무력했으며, 수천 달러 상당의 포탄이 낭비되었다. 원산은 파괴되었고 전쟁 후 수년 동안 그렇게 남아 있었지만, 그 위치 때문에 결국 재건되었고 여전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1][2]
5. 4. 전후 원산의 재건
국제 연합 선박들은 원산을 오랫동안 봉쇄하여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원산을 방어하던 북한 포병들은 대부분 무력화되었고, 1000USD 상당의 포탄이 낭비되었다. 원산은 파괴되었고 전쟁 후 수년 동안 그러한 상태로 남아 있었지만, 그 위치 때문에 결국 재건되었고 여전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1][2]참조
[1]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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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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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istor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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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8
[3]
웹사이트
The Siege of Won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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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Naval Institute
[4]
간행물
Two U.S. Navy Minesweepers Sink After Striking Mines Off Korea
http://www.history.n[...]
United States Navy
1950-10-17
[5]
웹사이트
Korean War Educator: Memoirs - Jake Huffaker
http://www.koreanwar[...]
2020-10-2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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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2 1951
http://www.usswalke.[...]
2011-03-3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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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Walke DD 723 Photos
http://www.destroyer[...]
2011-03-3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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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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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War. Reference Information Paper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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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0]
웹사이트
The USS O'BRIEN DD-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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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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