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앙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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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앙은 전한 문제, 경제 시대의 인물로, 안릉 출신이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황제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주발의 변호, 회남왕 유장의 봉지 삭감 상소, 신부인의 자리 문제 등에서 소신 있는 행동을 보였다. 오초칠국의 난 당시 조조의 처형을 계책하고, 량왕 유무의 황태자 책봉을 반대하여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강직한 성품으로 정치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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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원앙 (전한) | |
---|---|
기본 정보 | |
![]() | |
성 | 원 (袁) |
이름 | 앙 (盎) |
자 | 사 (絲) |
시호 | 문 (文) |
작위 | 도후 (桃侯) |
생몰년 |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48년 |
출생지 | 기원전 202년 저성 |
사망지 | 기원전 148년 |
관직 | |
낭중 | 낭중 |
오상 | 오상 |
간대부 | 간대부 |
중대부 | 중대부 |
태중대부 | 태중대부 |
제나라 승상 | 제나라 승상 |
양나라 승상 | 양나라 승상 |
초나라 승상 | 초나라 승상 |
어사대부 | 어사대부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원생 (袁生) |
아들 | 원종 (袁種) |
기타 정보 | |
시대 | 전한 |
활동 시기 | 문제, 경제 시기 |
2. 생애
고황후 때 여록의 사인(舍人)이 되었고, 문제 즉위 후 형 원쾌(袁噲)의 임자(任子)로 낭중(郞中)이 되었다.[4]
여씨를 축출하고 승상이 된 주발은 개국공신인데다가 문제를 황제로 추대하기까지 한 인물이라서 문제 또한 조심스럽게 대하였는데, 원앙은 문제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원앙의 말을 옳게 여긴 문제는 이후 위엄을 보였다. 당시 주발은 원쾌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원앙을 나무랐지만, 원앙은 사죄하지 않았다. 훗날 승상을 사임하고 봉국으로 돌아간 주발은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참소를 받아 하옥되었다. 아무도 그를 변호하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원앙만이 변호해 주었고, 덕분에 주발은 사면되었다. 이후 원앙은 주발과 교류하였다.[4]
회남왕이 함부로 심이기를 죽이는 등 교만하게 행동하니, 원앙은 그의 봉지를 깎을 것을 상주하였으나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남왕은 더욱더 교만해졌고, 결국 반란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문제는 회남왕을 촉(蜀) 땅으로 유배시키려 하였는데, 원앙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그러나 회남왕은 유배지로 가던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문제는 이를 후회했다.[4]
문제가 황후와 총희인 신부인을 데리고 상림에 행차했을 때, 황후와 신부인이 동등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원앙은 신부인의 자리를 낮추었다. 신부인은 화가 나서 앉으려 하지 않았다. 이를 문제에게 책망받은 원앙은 "존비의 서열이 분명해야 상하가 화합합니다. 황후는 정실이고 신부인은 첩인데, 어찌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총애하신다면 상을 내리면 될 것이고, 지금 폐하께서 하시는 일은 신부인에게 재앙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태후의 '인저' 사건을 아시겠지요"라고 간언하였다. 문제는 기뻐하며 신부인에게 이 이야기를 했고, 신부인도 원앙에게 돈을 하사했다.[4]
원앙은 직간을 많이 했으므로, 오래도록 조정에 있을 수 없어 농서 도위가 되었다. 임지에서는 사졸들에게 인애로운 마음으로 대했으므로, 사졸들은 그를 위해 다투어 죽으려고 했다. 이어서 제국의 재상・오국의 재상을 역임했다. 오나라 재상 시절, 원앙은 자신의 애첩과 사통한 부하를 용서하고, 그의 애첩을 부하에게 주고, 원래 직위를 유지시켜 주는 파격적인 관용을 베풀었다.[4]
원앙이 다시 도성으로 돌아와서, 길에서 승상 신도가를 만났지만, 신도가는 수레 위에서 인사만 했다. 원앙은 신도가를 찾아가, 천하의 입을 막는 태도로는 몸을 망친다고 설득했다. 신도가는 실례를 사과하고, 원앙을 상객으로 대했다.
원앙과 조조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문제 시대에 조조는 군국제에 따른 제후왕의 권한을 점진적으로 삭감하는 법령을 적극적으로 진언했다. 그러나 원앙은 기본적으로 그 정책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유씨 일문이 분열되어 흉노에게 이롭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때문에 원앙과 조조는 서로 꺼리는 사이가 되었고, 서로가 앉아 있으면 그것을 피하고, 같은 堂에서는 대화를 거부할 정도였다. 경제가 즉위하자 조조가 어사대부가 되어 황제의 최측근이 되었다. 조조는 원앙이 오왕의 재물을 받았다는 것을 조사하게 하여, 유죄로 원앙을 처형하려 했지만, 경제는 서민으로 강등하는 데 그쳤다.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원앙은 경제에게 조조를 처형하고 오나라에 사죄할 것을 주장했다. 경제는 원앙의 계책에 따라 조조를 요참형에 처하고, 원앙을 태상에, 두영을 대장군에 임명했다.[4] 원앙은 유통과 함께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오왕은 원앙을 감금하고 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원앙은 과거 자신이 용서해준 부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경제에게 보고했다.[4]
오초칠국의 난이 종결된 후, 원앙은 초왕(楚王) 유례의 재상이 되었으나, 유례에게 직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고향 안릉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경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을 보내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4]
원앙은 안릉에서 극맹을 환대했다. 안릉의 어떤 부자가 극맹과의 교류를 문제 삼자, 원앙은 "인생에는 위기가 반드시 있다(人生一旦緩急有). 그럴 때 도와줄 사람은 그와 계포(계포의 동생) 정도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부자와 절교했다.[4]
양왕 유무가 오초칠국의 난에서 공을 세워 황태자가 되려 하자, 경제는 원앙에게 조언을 구했고 원앙은 이에 반대했다. 양왕은 원앙에게 앙심을 품고 자객을 보냈으나, 자객은 원앙의 인품에 감복하여 암살을 포기했다. 그러나 다른 자객에게 원앙은 암살당했다.[4]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고황후 때 여록의 사인(舍人)이 되었고, 문제 즉위 후 형 원쾌(袁噲)의 임자(任子) 제도로 낭중(郞中)이 되었다.[4]주발은 여씨를 축출하고 승상이 된 인물로, 개국공신인데다가 문제를 황제로 추대하기까지 하여 문제 또한 조심스럽게 대하였다. 원앙은 문제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원앙의 말을 옳게 여긴 문제는 이후 위엄을 보였다. 당시 주발은 원쾌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원앙을 나무랐지만, 원앙은 사죄하지 않았다. 훗날 승상을 사임하고 봉국으로 돌아간 주발은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참소를 받아 하옥되었다. 아무도 그를 변호하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원앙만이 변호해 주었고, 덕분에 주발은 사면되었다. 이후 원앙은 주발과 교류하였다.[4]
2. 2. 주발과의 관계
주발은 문제를 황제로 추대한 공신이었으나, 원앙은 주발이 진정한 사직지신(社稷之臣)은 아니라고 직언했다.[4] 문제는 원앙의 진언을 받아들여 주발에게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주발은 원앙을 질책했지만 원앙은 사과하지 않았다.주발이 모반 혐의로 하옥되자, 원앙은 주발이 여후 시대에 태위로 병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황제가 되려 하지 않았고, 영지로 돌아간 지금 반란을 일으킬 리 없다고 변호하여 석방에 기여했다.[4] 석방된 주발은 원앙에게 감사를 표했고, 이후 둘은 교류했다.
2. 3. 회남왕 유장과의 갈등
회남왕이 함부로 심이기를 죽이는 등 교만하게 행동하자, 원앙은 문제에게 그의 봉지를 깎을 것을 건의했으나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4] 회남왕은 더욱더 교만해졌고, 결국 반란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문제는 회남왕을 촉 땅으로 유배시키려 하였는데, 원앙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4] 그러나 회남왕은 유배지로 가던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문제는 원앙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4]원앙은 문제에게 회남왕의 자녀들을 잘 보살필 것을 조언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2. 4. 신부인과의 일화
원앙은 문제가 총애하는 신부인이 황후와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신부인의 자리를 낮추도록 하였다. 신부인은 화를 냈지만, 원앙은 문제에게 "존비의 서열이 분명해야 상하가 화합합니다. 황후는 정실이고 신부인은 첩인데, 어찌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총애하신다면 상을 내리면 될 것이고, 지금 폐하께서 하시는 일은 신부인에게 재앙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태후의 '인저' 사건을 아시겠지요"라고 간언하였다.[4] 문제는 원앙의 말을 옳게 여겨 신부인에게 이 일을 설명했고, 신부인은 원앙에게 감사의 표시로 돈을 하사했다.2. 5. 지방관 시절
원앙은 농서 도위로 부임하여 병사들을 사랑으로 대하였고, 사졸들은 그를 위해 다투어 죽으려고 할 정도로 신망을 얻었다.[4] 이어서 제국과 오국의 재상을 역임하였다. 오나라 재상 시절, 원앙은 자신의 애첩과 사통한 부하를 용서하고, 그의 애첩을 부하에게 주고, 원래 직위를 유지시켜 주는 파격적인 관용을 베풀었다.[4]2. 6. 오초칠국의 난과 조조 처형
오초칠국의 난 당시 어사대부 조조가 오왕의 재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원앙은 경제에게 조조를 처형하고 오나라에 사죄할 것을 주장했다.[4]경제는 원앙의 계책에 따라 조조를 요참형에 처하고, 원앙을 태상에, 두영을 대장군에 임명했다.[4] 원앙은 유통과 함께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오왕은 원앙을 감금하고 장군으로 삼으려 했다.[4] 원앙은 과거 자신이 용서해준 부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경제에게 보고했다.[4]
2. 7. 초왕 유례와의 갈등 및 은퇴
오초칠국의 난이 종결된 후, 원앙은 새로 초왕(楚王)에 봉해진 유례의 재상이 되었다. 유례에게도 직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병을 이유로 사임했다.[4] 고향 안릉으로 돌아가 은거했지만, 경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을 보내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4]안릉에 극맹이 찾아오자, 원앙은 스스로 나와 맞이하여 환대했다. 그 후, 안릉의 어떤 부자가 "극맹은 도박을 좋아하는 유협의 무리인데, 당신은 어째서 교류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원앙은 "그는 분명 도박을 좋아하지만, 그의 어머니 장례식에는 천 대의 수레가 줄지어 섰다. 이로써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인생에는 위기가 반드시 있다(人生一旦緩急有). 그럴 때 도와줄 사람은, 그와 계포(계포의 동생) 정도밖에 없다. 그대는 언제나 수레 몇 대를 거느리고 다니지만, 위기의 순간에 와줄 것인가"라고 말하고, 이 부자와 절교했다. 이것을 안 사람들은 더욱 원앙을 칭찬했다.[4]
2. 8. 양왕 유무와의 갈등 및 암살
양왕 유무가 오초칠국의 난에서 공을 세워 황태자가 되려 하자, 경제는 원앙에게 조언을 구했고 원앙은 이에 반대했다. 이 일로 양왕은 황태자가 되지 못했고, 원앙에게 앙심을 품고 자객을 보냈다.[4] 자객은 원앙을 찾아다니며 그의 평판을 물었는데, 모두가 그를 칭찬했다. 이에 자객은 원앙을 직접 만나 "저는 양왕에게 돈을 받고 당신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지만, 당신이 훌륭한 분이라 차마 죽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자객들이 많이 있으니 조심하십시오."라고 말하고는 경례를 하고 돌아갔다.[4]그 후, 원앙의 집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 원앙은 점술가 배생(棓生)의 집으로 가던 중 양왕이 보낸 다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4]
2. 9. 사후
유거(광천왕)는 원앙의 묘를 도굴하여 철저하게 파괴했는데, 훼손된 후에는 부서진 관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겨우 동경 한 개만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4]3. 원앙에 대한 일화
원앙은 문제를 섬긴 신하로, 정직하고 솔직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를 받던 환관 조담(趙談)은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원앙을 자주 비방했고, 원앙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4]
어느 날, 황제가 외출하려 할 때 조담이 어가에 동승했다. 궁궐 문에서 이를 본 원앙은 "폐하와 함께 어가를 타는 영광은 뛰어난 공적과 능력을 갖춘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환관이 옆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하십니까?"라고 말했다.
문제는 웃으며 조담에게 어가에서 내리라고 명했고, 조담은 모욕감에 눈물을 흘렸다. 이후 조담이 아무리 원앙을 비방해도 황제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4]
4. 평가
원앙은 강직하고 소신 있는 언행으로 황제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충신으로 평가받는다. 문제에게 주발에 대한 견해를 솔직하게 밝히고, 회남왕의 교만함을 경계하여 봉지를 깎을 것을 건의했으며,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 기여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4]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원앙은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추구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사회 통합을 추구하는 정책을 펼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군국제에 따른 제후왕의 권한을 점진적으로 삭감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씨 일문의 분열과 외적 흉노에게 이롭다고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다만, 량왕 유무의 암살 시도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강직한 성품은 때로는 정치적 반대 세력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漢書
[3]
서적
史記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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