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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거 (광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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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거는 전한 무제가 광천나라를 다시 봉하여 왕이 된 인물이다. 그는 역경, 논어 등에 능통하고 문예를 즐겼으나, 첩들의 살해 및 무덤 도굴 등의 행위로 폐위되어 자살했다. 유거는 총애하는 첩 양성소신의 모함으로 14명의 첩을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위 양왕, 진 영공 등의 무덤을 도굴하기도 했다. 이러한 죄상으로 본시 3년 폐위되어 상용으로 유배되었고, 가는 길에 자살했다.

2. 생애

유거는 역경, 논어, 효경에 능통했고 문사, 박혁, 노래, 연극을 좋아했다. 궁전 문에 용사 성경(成慶)의 그림을 그려두고 그 모습을 좋아해 칼을 차고 다녔다.[4]

첩 중 왕소평(王昭平)·왕지여(王地餘)에게 왕후를 허했다. 병이 들었을 때 다른 첩 양성소신(陽成昭信)이 극진히 모셔 그를 사랑했다. 왕지여와 함께 놀다 왕지여가 칼을 가진 것을 보고 문초하자 왕지여는 왕소평과 함께 양성소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그러자 왕소평을 문초했으나 시인하지 않자 철침으로 찔러 강제로 자백을 받아냈고, 첩들을 한데 모은 곳에서 자신은 왕지여를 찌르고 양성소신에게는 왕소평을 찔러 죽이게 했으며, 누설될 것을 꺼려 종비 세 명을 교살했다. 양성소신이 꿈 속에서 왕지여와 왕소평이 자신을 고발하는 것을 봤다 하자 둘의 시체를 꺼내 태웠다.[4]

이후 양성소신을 왕후로 세우고, 도망경(陶望卿)을 수미부인으로 삼아 증백을 주관하고 최수성(崔脩成)을 명정부인으로 삼아 영항을 주관하게 했다. 양성소신이 여러 차례 도망경을 중상하자,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도망경이 화공에게 옷을 벗어 어깨와 등을 드러내고 낭리를 드나든다고 하자 점차 총애를 줄였다. 연회 자리에서 유거는 도망경에게 분노했고, 이 틈에 양성소신이 도망경이 낭리들과 간통하는지 의심이 든다 하자 양성소신과 여러 첩을 거느리고 도망경의 거처로 들어가 첩들에게 달군 쇠로 도망경을 지지게 했다. 도망경이 달아나 우물에 뛰어들어 죽자, 양성소신이 시체를 꺼내 코와 입술을 베고 혀를 끊고 생식기에 말뚝을 박았다. 유거는 양성소신과 함께 도망경의 지체를 해체하고 큰 가마솥에 넣어 복숭아 재와 독약과 함께 삶아서 여러 첩들에게 그 광경을 보게 하고 밤낮을 지나 완전히 물크러지게 했다. 또 도망경의 아우 도도(陶都)도 죽였다.[4]

유거는 나중에 다른 희첩 영애(榮愛)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양성소신이 영애에게도 사통이 의심스럽다고 참언하자 영애가 지어 준 옷을 태웠다. 영애가 두려워 우물에 몸을 던졌으나 죽지 못하니 끌어올려 문초해 의사와 간통한 것이 아니냐 했다. 그러고는 나무 기둥에 묶어두고 달군 칼로 두 눈을 도려내고 납을 녹여 입에 부었다. 영애가 죽자 가시나무로 지체를 해체해 묻었다. 유거의 총애를 입은 첩들은 양성소신의 참언을 받아 죽었으니 그 수효가 14명이었고, 모두 태후가 거처하는 장수궁에 묻으니 궁인들은 이를 보고 감히 양성소신에게 거스르지 못했다.[4]

총애를 오로지하게 된 양성소신은 명정부인이 첩들을 잘 단속하지 못한다며 나이 많은 여종에게 복야를 맡겨 영항을 주관하게 하고 모든 집 문을 걸어잠가, 뒤에서 피리를 불되 주연에는 나오지 못하게 했다. 유거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래를 불렀고, 양성소신에게 북을 치게 하고 첩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했으나, 노래가 끝나면 다시 영항으로 돌려보내 문을 봉했다. 다만 양성소신의 언니 승화부인(乘華夫人)만이 조석으로 조현했다.[4]

유거가 열너덧 살 때 역경을 가르친 스승이 자주 간언하자, 유거는 스승을 내쫓았다. 내사가 스승을 불러들이자, 스승은 내사에게 자주 왕가에 금령을 내리게 했고, 유거는 사람을 시켜 스승 부자를 죽였으나 들통나지 않았다. 나중에 유거가 음악가와 배우를 불러 벌거벗고 즐기게 했는데, 광천 강(彊)이 음악가 난(蘭)을 묶고 조사에 들어갔다. 난은 왕이 도망경과 도도에게 가무를 가르쳤다 했고, 광천상이 도망경과 도도를 부르자 유거는 둘이 간통해 자결했다고 해 벌을 면했다. 그러나 도망경을 삶았기에, 다른 시체를 가져다가 도도의 시체와 함께 어미에게 줬고, 어미는 “도도는 맞지만, 도망경은 아닙니다!”라 하며 곡하고 그 시체를 구했다. 양성소신은 종을 시켜 도망경 자매의 어미를 죽였다. 그 종은 체포되어 이 사건을 진술했다.[4]

2. 1. 즉위와 통치

기원전 92년, 아버지 광천유왕이 죽자 유거는 광천왕에 즉위했다.[3][4] 조정에서는 아버지 광천유왕의 죄 때문에 광천나라를 없앴으나, 무제는 형의 종묘를 끊을 수 없다 하여 유거를 광천왕에 다시 봉했다.[3][4]

유거는 역경, 논어, 효경 등 유교 경전에 능통했고, 예술을 좋아했다. 궁궐 문에 용사 성경(成慶)의 그림을 걸어두고 칼을 차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다.[4] 재위 중에는 위나라 양왕, 진나라 영공, 원앙 등 수많은 인물의 무덤을 도굴했다.[2]

유거는 총애하는 첩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왕소평(王昭平)과 왕지여(王地餘)에게 왕후 자리를 약속했으나, 병이 들었을 때 간호한 양성소신(陽成昭信)을 총애했다. 왕지여가 왕소평과 함께 양성소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자, 왕소평을 고문하고 왕지여와 함께 서로를 찔러 죽이게 했다. 이 사실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종비 세 명을 목졸라 죽였다. 양성소신이 꿈에서 왕지여와 왕소평에게 고발당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자, 두 사람의 시체를 꺼내 불태웠다.[4]
  • 이후 양성소신을 왕후로 세우고, 도망경(陶望卿)을 수미부인, 최수성(崔脩成)을 명정부인으로 삼았다. 양성소신은 도망경을 모함했고, 유거는 도망경이 낭리들과 간통한다고 의심하여 첩들과 함께 도망경을 고문하고 살해했다. 시체를 훼손하고 독약과 함께 삶아 다른 첩들에게 보도록 했다. 도망경의 동생 도도(陶都)도 죽였다.[4]
  • 유거는 또 다른 첩 영애(榮愛)를 의심하여 고문하고 살해했다. 양성소신의 참언으로 총애하는 첩 14명을 살해하고, 장수궁에 암매장했다. 양성소신은 명정부인을 모함하고, 유거의 첩들이 뒤에서 피리를 불되 연회에는 나오지 못하게 했다.[4]


유거가 어렸을 때 역경을 가르친 스승이 자주 간언하자 내쫓았다. 내사가 스승을 불러들이자, 유거는 스승 부자를 죽였다. 광천 강(彊)이 음악가 난(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도망경과 도도의 죽음에 대한 진술이 나왔다. 양성소신은 종을 시켜 도망경 자매의 어미를 죽였다. 종이 체포되어 사건을 진술하면서 유거의 범행이 드러났다.[4]

본시 3년(기원전 71년), 선제대홍려, 승상장사, 어사승, 정위정을 보내 유거와 양성소신을 조사하게 했다. 유거는 폐서인이 되어 상용으로 유배되었고, 가는 길에 자살했다. 양성소신은 기시되었다.[4]

2. 2. 첩 살해 사건

유거는 총애하던 첩 양성소신(陽成昭信)의 질투와 모함으로 여러 첩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양성소신은 도망경(陶望卿)을 비롯한 여러 첩들을 모함했고, 유거는 이에 넘어가 첩들을 고문하고 살해했다.[4]

처음에는 왕소평(王昭平)과 왕지여(王地餘)에게 왕후 자리를 약속했으나, 병이 들었을 때 양성소신이 극진히 간호하자 그를 총애하게 되었다. 왕지여가 칼을 가진 것을 보고 문초하자 왕지여는 왕소평과 함께 양성소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유거는 왕소평을 고문하여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고, 첩들을 모아놓고 왕지여를 찌르고 양성소신에게는 왕소평을 찔러 죽이게 했다. 또한 이 사실이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종비 세 명을 목졸라 죽였다. 양성소신이 꿈에서 왕지여와 왕소평이 자신을 고발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둘의 시체를 꺼내 불태웠다.[4]

이후 양성소신을 왕후로 세우고 도망경을 수미부인, 최수성(崔脩成)을 명정부인으로 삼았다. 양성소신은 도망경을 여러 차례 모함했고, 유거는 도망경이 화공에게 옷을 벗어 몸을 보이고 낭리들과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총애를 거두었다. 연회 자리에서 유거는 도망경에게 분노했고, 양성소신은 도망경이 낭리들과 간통한다고 모함했다. 유거는 양성소신과 여러 첩들을 거느리고 도망경의 거처로 가 첩들에게 달군 쇠로 도망경을 지지게 했다. 도망경이 달아나 우물에 뛰어들어 죽자, 양성소신은 시체를 꺼내 코와 입술을 베고 혀를 자르고 생식기에 말뚝을 박았다. 유거는 양성소신과 함께 도망경의 시체를 큰 가마솥에 넣어 복숭아 재와 독약을 넣고 삶아 다른 첩들에게 보게 했다. 도망경의 아우 도도(陶都)도 죽였다.[4]

유거는 영애(榮愛)와 술을 마시던 중 양성소신의 참언을 듣고 영애가 지어 준 옷을 태웠다. 영애가 우물에 몸을 던졌으나 죽지 않자, 끌어올려 고문하고 간통을 의심했다. 나무 기둥에 묶어두고 달군 칼로 두 눈을 도려내고 납을 녹여 입에 부었다. 영애가 죽자 가시나무로 시체를 훼손해 묻었다. 유거의 총애를 입은 첩 14명이 양성소신의 모함으로 죽었고, 모두 태후가 거처하는 장수궁에 묻혔다.[4]

이 사건은 조정에 알려져 조사가 이루어졌다. 본시 3년(기원전 71년), 광천상과 내사가 이 일을 보고했고, 선제대홍려, 승상장사, 어사승, 정위정을 보내 거록의 옥사를 조사하게 했다. 유사와 조정은 유거와 양성소신을 체포하여 유거를 주살해야 한다고 상주하였으나, 선제는 왕을 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하여 유거를 왕 자리에서 내쫓고 처자와 함께 상용으로 옮겼다. 유거는 가는 길에 자살했고, 양성소신은 기시되었다.[4]

2. 3. 도굴

양왕, 진 영공, 원앙 등 여러 인물의 무덤을 도굴하였다.[2]

2. 4. 폐위와 죽음

본시 3년(기원전 71년), 첩을 살해한 사건이 드러나 전한 선제대홍려, 승상장사, 어사승, 정위정을 보내 거록군의 옥사를 조사하게 했다.[4] 유거와 양성소신을 사로잡아 심문했고, 유사는 유거를 주살하도록 청했다.[4] 황제는 열후와 중이천석, 이천석, 박사들과 이 일을 의논하게 했고, 그 결과 유거를 마땅히 주륙해 그 시체를 대중에 공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4] 그러나 선제는 차마 왕을 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하여, 유거를 왕 자리에서 내쫓고 처자와 함께 상용으로 옮겼다.[4] 또 탕목읍 1백 호를 주었다.[4] 그러나 유거는 가는 길에 자살했고, 양성소신은 기시됐다.[4]

3. 평가

유거는 첩 왕소평(王昭平)·왕지여(王地餘)에게 왕후 자리를 약속했다. 병이 들었을 때 다른 첩 양성소신(陽成昭信)의 간호를 받고 총애하게 되었다. 왕지여가 칼을 가진 것을 보고 문초하자 왕소평과 함께 양성소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유거는 왕소평을 고문해 자백을 받아내고, 첩들을 모아 왕지여를 찌르고 양성소신에게는 왕소평을 찔러 죽이게 했다. 또한 이 사실이 누설될까 두려워 종비 세 명을 교살했다. 양성소신이 꿈에서 왕지여와 왕소평이 자신을 고발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둘의 시체를 꺼내 태웠다.[4]

이후 양성소신을 왕후로 세우고, 도망경(陶望卿)을 수미부인, 최수성(崔脩成)을 명정부인으로 삼았다. 양성소신이 도망경을 모함하자, 유거는 도망경을 의심하고 분노했다. 양성소신은 첩들을 거느리고 도망경의 거처로 가 달군 쇠로 지지게 했다. 도망경이 우물에 뛰어들어 죽자, 시체를 꺼내 코와 입술을 베고 혀를 끊고 생식기에 말뚝을 박았다. 유거는 양성소신과 함께 도망경의 시체를 큰 가마솥에 넣어 독약과 함께 삶아 첩들에게 보게 했다. 도망경의 아우 도도(陶都)도 죽였다.[4]

유거는 영애(榮愛)와 술을 마시다 양성소신의 참언을 듣고 영애가 지어 준 옷을 태웠다. 영애가 우물에 몸을 던졌으나 죽지 못하자, 고문하고 달군 칼로 두 눈을 도려내고 납을 녹여 입에 부었다. 영애가 죽자 가시나무로 시체를 훼손해 묻었다. 유거의 총애를 입은 첩 14명이 양성소신의 모함으로 죽었고, 모두 장수궁에 묻혔다.[4]

유거가 열너덧 살 때 역경 스승이 간언하자 쫓아냈다. 내사가 스승을 불러들이자, 유거는 스승 부자를 죽였다. 음악가와 배우를 불러 벌거벗고 즐기게 했는데, 광천 강(彊)이 음악가 난(蘭)을 조사하자 난은 왕이 도망경과 도도에게 가무를 가르쳤다고 했다. 유거는 둘이 간통해 자결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도망경을 삶았기에 다른 시체를 도도의 시체와 함께 어미에게 줬고, 어미는 도망경의 시체가 아니라고 했다. 양성소신은 종을 시켜 도망경 자매의 어미를 죽였다. 이 사건이 진술되어, 본시 3년(기원전 71년), 조사가 이루어졌고 유거와 양성소신을 사로잡으라는 주청이 있었다. 유사가 유거를 주살하도록 청했으나, 선제는 결국 유거를 왕 자리에서 내쫓고 처자와 함께 상용으로 옮겼다. 유거는 가는 길에 자살했고, 양성소신은 기시됐다.[4]

유거의 잔혹한 행위는 당시 사회의 비뚤어진 여성관과 권력 남용의 문제를 드러낸다. 또한, 유거는 광천왕으로 있으면서 위나라 양왕·진나라 영공·원앙 등 수많은 인물의 무덤을 도굴했다.[2] 이는 문화재 훼손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현대 사회에서도 경계해야 할 문제이다.

참조

[1] 서적 선제기
[2] 서적 광천왕발고총(廣川王發古冢)
[3] 서적 제후왕표제2 https://zh.wikisourc[...]
[4] 서적 경십삼왕전제23 https://zh.wikisourc[...]
[5] 문서 유명 (제천왕)이 봉해진 진류군 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6]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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