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하우저 브래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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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터 하우저 브래튼은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1902년 중국 푸젠성 샤먼에서 태어나, 휘트먼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오레곤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벨 연구소에서 연구하며, 1947년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와 함께 최초의 트랜지스터를 발명하여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반도체 표면 연구와 생체 물질 연구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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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하우저 브래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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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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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월터 하우저 브래튼 |
출생일 | 1902년 2월 10일 |
출생지 | 청나라 푸젠성 샤먼시 |
사망일 | 1987년 10월 13일 |
사망지 |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
국적 | 미국 |
형제자매 | 로버트 브래튼 (형제) |
학력 및 경력 | |
분야 | 물리학, 전자 공학 |
소속 기관 | 휘트먼 칼리지 벨 연구소 |
출신 대학 | 휘트먼 칼리지 오리건 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
박사 지도교수 | 존 토렌스 테이트 시니어 |
업적 및 수상 | |
주요 업적 | 트랜지스터 |
수상 | 스튜어트 발렌타인 메달 (1952년) 노벨 물리학상 (1956년) |
2. 생애
월터 브래튼은 미국인 부모에게서 청나라 푸젠성 샤먼(당시 아모이)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주의 목장에서 자랐다.[15][7] 그는 휘트먼 칼리지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고,[6] 오리건 대학교를 거쳐 192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6][9]
졸업 후 잠시 미국 표준국에서 근무하다가 1929년 벨 연구소에 합류하여 반도체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와 함께 1947년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를 발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공로로 세 사람은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6] 이외에도 1952년 스튜어트 밸런타인 메달, 1956년 리히트마이어 기념상 등을 수상했다.
1967년 벨 연구소를 퇴직한 후에는 워싱턴 대학교와 모교인 휘트먼 칼리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6] 말년에는 시애틀에서 지내다가 1987년 사망했다.[2][9]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월터 브래튼은 미국인 부모 로스 R. 브래튼(Ross R. Brattain)과 오틸리 하우저 브래튼(Ottilie Houser Brattain) 사이에서 청나라(清朝) 푸젠성(福建省) 아모이(현 샤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계였고, 어머니의 부모는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출신 이민자였다.[2][7] 아버지 로스 R. 브래튼은 중국 남학생들을 위한 사립학교인 팅웬 연구소(Ting-Wen Institute)의 교사였으며, 수학에 재능이 있던 어머니 오틸리 하우저 브래튼과 함께 휘트먼 대학교(Whitman College)를 졸업했다.[15][3][7][4] 1903년, 어머니 오틸리와 아기 월터는 미국으로 돌아왔고 아버지가 곧 뒤따랐다.[15] 가족은 몇 년간 워싱턴주 스포케인(Spokane, Washington)에 살다가 1911년 워싱턴주 토나스켓(Tonasket, Washington) 근처의 목장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15][7]브래튼은 워싱턴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시애틀(Seattle)의 퀸앤 고등학교(Queen Anne High School)에서 1년, 토나스켓 고등학교(Tonasket High School)에서 2년, 그리고 워싱턴주 베인브리지 섬(Bainbridge Island, Washington)에 위치한 모란 소년학교(Moran School for Boys)에서 1년을 보냈다.[5] 이후 워싱턴주 월라월라(Walla Walla, Washington)의 휘트먼 대학교(Whitman College)에 진학하여 물리학과 수학을 복수 전공으로 1924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6] 휘트먼 대학교 재학 시절, 브래튼과 그의 동급생이었던 워커 블리크니(Walker Bleakney), 블라디미르 로잔스키(Vladimir Rojansky), E. 존 워크먼(E. John Workman)은 훗날 "물리학의 네 기수(the four horsemen of physics)"로 불릴 만큼 뛰어난 경력을 쌓게 되었다.[7] 그의 형제인 로버트 역시 휘트먼 대학교를 졸업하고 물리학자가 되었다.[7]
브래튼은 1926년 오레곤주 유진(Eugene, Oregon)의 오레곤 대학교(University of Oregon)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29년에는 미네소타 대학교(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6][9] 미네소타 대학교에서는 존 하스브룩 반 블렉(John Hasbrouck Van Vleck) 밑에서 당시 새로운 학문 분야였던 양자 역학을 공부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존 T. 테이트의 지도 아래 작성된 "전자 충돌에 의한 여기 효율 및 수은 증기의 이상 산란(Efficiency of Excitation by Electron Impact and Anomalous Scattering in Mercury Vapor)"이었다.[7]
'''학력 요약'''
학위 | 학교 | 전공 | 졸업 연도 |
---|---|---|---|
학사 | 휘트먼 대학교(Whitman College) | 물리학, 수학 | 1924년 |
석사 | 오레곤 대학교(University of Oregon) | 문학 석사 | 1926년 |
박사 | 미네소타 대학교(University of Minnesota) | 물리학 | 1929년 |
2. 2. 결혼
월터 브래튼은 두 번 결혼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화학자 케렌 길모어(Keren Gilmore)였다. 그들은 1935년에 결혼하여 1943년에 아들 윌리엄 G. 브래튼(William G. Brattain)을 두었다. 케렌 길모어 브래튼은 1957년 4월 10일에 사망했다.[8] 그 다음 해에 브래튼은 세 자녀의 어머니인 에마 제인(키르쉬) 밀러(Emma Jane (Kirsch) Miller) 여사와 결혼했다.[6]2. 3. 벨 연구소 경력
1929년 8월, 브래튼은 벨 연구소에 연구 물리학자로 합류하여 조셉 A. 베커와 함께 산화구리 정류기에서 열에 의한 전하 운반자 흐름을 연구했다.[13][7] 그는 아놀드 조머펠트의 강연에 참석하고 열전자 방출 실험을 통해 조머펠트 이론을 검증했으며, 텅스텐의 표면 상태와 일함수, 토륨 원자의 흡착 등을 연구했다.[13][7] 산화 제일구리와 실리콘의 반도체 표면에서의 정류 및 광전 효과 연구 중 반도체 자유 표면에서의 광전 효과를 발견했는데, 이는 노벨상 위원회에서 그의 주요 공헌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2]당시 전화 산업은 비효율적이고 신뢰성이 낮은 진공관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벨 연구소는 대체 기술 개발을 모색했다.[11] 1930년대 초, 브래튼은 윌리엄 B. 쇼클리와 함께 산화구리를 이용한 반도체 증폭기 아이디어를 연구했으나, 이는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를 만들려는 초기 실패한 시도였다. 전쟁 전 게르마늄과 실리콘을 이용한 반도체 연구는 다소 체계적이지 못하고 이론적 기반이 부족했다.[12]
제2차 세계 대전 중 브래튼은 쇼클리와 함께 컬럼비아 대학교의 국방연구위원회에서 잠수함의 자기 탐지 연구에 참여했다.[6] 브래튼의 그룹은 잠수함으로 인한 지구 자기장 이상을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한 자력계를 개발했고,[15][13] 이 성과로 1944년 자력계 헤드 디자인 특허를 받았다.[14]
1945년 벨 연구소는 통신 기술 관련 고체 물리학 기초 연구를 위한 그룹을 신설했다. 머빈 켈리 부사장의 승인 하에 쇼클리와 스탠리 O. 모건이 공동으로 이끌었으며,[7] 곧 존 바딘이 합류했다.[12] 바딘은 브래튼의 형제 로버트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1930년대에 존과 월터를 소개했다.[15] 그들은 종종 함께 브리지와 골프를 쳤다.[7] 팀은 양자 물리학자인 바딘, 재료 과학 분야의 재능 있는 실험가였던 브래튼, 그리고 그들의 팀장인 쇼클리는 고체 물리학 전문가였다.[16]

당시 이론에 따르면, 쇼클리가 고안한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는 작동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브래튼과 바딘에게 그 이유를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11월과 12월 동안 두 사람은 쇼클리의 장치가 증폭되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수행했다.[11] 바딘은 뛰어난 이론가였고,[17] 브래튼은 그 못지않게 중요하게도 "반도체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12] 바딘은 전하 운반자를 가두는 표면 상태의 국소적 변화가 전도되지 않는 원인일 수 있다고 이론화했다.[18] 브래튼과 바딘은 결국 금속 점을 실리콘에 밀어넣고 증류수로 둘러쌈으로써 소량의 증폭을 생성하는 데 성공했다. 실리콘을 게르마늄으로 대체하면 증폭이 향상되었지만 저주파 전류에만 해당되었다.[11]
1947년 12월 16일, 브래튼은 게르마늄 표면에 두 개의 금박 접촉부를 가깝게 배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16] 브래튼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 이중 점 접촉을 사용하여... 한 점은 그리드로, 다른 점은 플레이트로 사용되었습니다. 증폭을 얻으려면 그리드에 대한 바이어스(직류)가 양수여야 했습니다."[18]
바딘의 설명에 따르면, "금 스폿을 사용한 초기 실험은 곧 게르마늄 블록에 정공이 도입되어 표면 근처의 정공 농도가 증가함을 즉시 시사했습니다. 방출기와 수집기라는 이름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쇼클리는 나중에 전하가 벌크 내의 전자에 의해 보상되고 접합 트랜지스터 기하학을 제안했습니다... 나중에 브래튼과 제가 수행한 실험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에서 두 가지 모두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18]
1947년 12월 23일, 월터 브래튼, 존 바딘, 윌리엄 B. 쇼클리는 벨 연구소 동료들에게 최초의 작동하는 트랜지스터를 시연했다. 소량의 전기 신호를 증폭하고 디지털 정보 처리를 지원하는 트랜지스터는 "현대 전자공학의 핵심 요소"이다.[19] 세 사람은 "반도체에 대한 연구와 트랜지스터 효과의 발견"으로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6]
1947년 시연을 통해 주요 돌파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얻은 벨 연구소는 이제 ''표면 상태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것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엄격한 비밀이 유지되었고, 벨 연구소 내에서 신중하게 제한된 내부 회의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었다.[18] 바딘과 브래튼이 점 접촉 트랜지스터를 발명했다는 내용을 기록한 특허가 등록되었다.[20] 랄프 브레이와 세이무어 벤저가 퍼듀 대학교에서 유사한 발견을 하고 벨 연구소보다 먼저 발표할 가능성에 대한 상당한 우려가 있었다.[12]
1948년 6월 30일, 벨 연구소는 기자 회견을 열어 그들의 발견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또한 새로운 지식을 다른 기관과 자유롭게 공유하는 개방 정책을 채택하여 연구를 군사 기밀로 분류하는 것을 피하고 트랜지스터 기술의 광범위한 연구 및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벨 연구소는 1951년 9월, 1952년 4월, 그리고 1956년에 대학, 산업 및 군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여러 심포지엄을 개최했으며,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참석했다.[18]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발견에 대한 모든 공로를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믿었으며,[20][21][22] 특히 쇼클리가 특허를 획득한 접합 트랜지스터와 같은 새로운 연구 분야에서 바딘과 브래튼을 적극적으로 배제했다.[24] 쇼클리의 접합 트랜지스터 이론은 미래의 고체 전자 제품의 길을 제시하는 "인상적인 업적"이었지만, 그 제작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지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12]
브래튼은 C. G. B. 개럿과 P. J. 보디와 함께 일하며 벨 연구소 내 다른 연구 그룹으로 옮겼다. 그는 반도체 동작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요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고체의 표면 특성과 "트랜지스터 효과"를 계속 연구했다.[7][23] 바딘은 이를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 묘사하며 1951년 벨 연구소를 떠나 일리노이 대학교로 갔고, 결국 초전도체 이론으로 두 번째 노벨상을 수상했다.[20] 쇼클리는 1953년 벨 연구소를 떠나 벡먼 인스트루먼츠에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했다.[24][25]
1956년, 세 사람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에 의해 "반도체에 대한 연구와 트랜지스터 효과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6] 월터 브래튼은 수상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는 이 영광을 진심으로 감사히 여깁니다... 제 행운의 대부분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고, 함께 일할 적절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31] 세 사람 모두 강연을 했다. 브래튼은 ''반도체의 표면 특성''에 대해,[26] 바딘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로 이어지는 반도체 연구''에 대해,[27]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기술이 새로운 물리학을 불러일으키다''에 대해 강연했다.[28]
브래튼은 벨 연구소 재직 중 1952년 스튜어트 발렌타인 메달, 1956년 리히트마이어 기념상을 수상했다. 그는 나중에 P. J. 보디와 P. N. 소여와 함께 생체 물질의 전기화학적 과정에 대한 여러 논문을 공동 집필했다.[7] 아들이 심장 수술을 받은 후 혈액 응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휘트먼 화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프라스코와 협력하여 인지질 이중층을 모델로 사용하여 생세포의 표면과 흡수 과정을 연구했다.[24] 1967년 벨 연구소를 퇴직하고 워싱턴 대학교로 옮겨 1972년까지 일했다.
2. 4. 트랜지스터 발명
1929년 8월, 브래튼은 조셉 A. 베커와 함께 벨 연구소의 연구 물리학자로 합류했다.[13] 두 사람은 산화구리 정류기에서 열에 의한 전하 운반자 흐름을 연구했다.[7] 브래튼은 아놀드 조머펠트의 강연에 참석하고, 열전자 방출 실험을 통해 조머펠트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 또한 텅스텐의 표면 상태와 일함수, 토륨 원자의 흡착 등을 연구했다.[7] 산화 제일구리와 실리콘 같은 반도체 표면에서의 정류 및 광전 효과 연구를 통해, 브래튼은 반도체의 자유 표면에서 광전 효과를 발견했는데, 이는 노벨상 위원회가 그의 주요 공헌 중 하나로 인정한 업적이다.[2]당시 전화 산업은 전자 흐름 제어와 전류 증폭을 위해 진공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공관은 신뢰성이 낮고 비효율적이었기에, 벨 연구소는 이를 대체할 기술 개발을 목표로 삼았다.[11] 1930년대 초, 브래튼은 윌리엄 B. 쇼클리와 함께 산화구리를 이용한 반도체 증폭기 아이디어를 연구했지만, 이는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를 만들려는 초기 시도로 실패로 끝났다. 다른 연구자들도 게르마늄과 실리콘 같은 재료로 반도체를 실험했지만, 전쟁 전 연구는 다소 산발적이었고 이론적 기반이 부족했다.[12]
제2차 세계 대전 중 브래튼과 쇼클리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국방연구위원회에서 잠수함의 자기 탐지 연구에 참여했다.[6] 브래튼의 연구 그룹은 잠수함이 유발하는 지구 자기장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한 자력계를 개발했고,[15][13] 이 성과로 1944년 자력계 헤드 디자인 특허를 받았다.[14]
1945년 벨 연구소는 조직을 개편하여 통신 기술과 관련된 고체 물리학 기초 연구를 전담하는 그룹을 신설했다. 이 그룹 설립은 연구 부사장 머빈 켈리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으며,[12] 쇼클리와 스탠리 O. 모건이 공동으로 이끌었다.[7] 곧이어 존 바딘이 그룹에 합류했다.[12] 바딘은 브래튼의 형 로버트의 절친한 친구였고, 1930년대에 존과 월터를 서로 소개해주었다.[15] 그들은 종종 함께 브리지 게임과 골프를 즐겼다.[7] 바딘은 양자 물리학 이론가였고, 브래튼은 재료 과학 분야의 뛰어난 실험가였으며, 팀장인 쇼클리는 고체 물리학 전문가였다.[16]
당시 이론상으로는 쇼클리가 고안한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실리콘 박막으로 코팅된 실린더를 금속판 가까이 둔 구조)가 작동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쇼클리는 브래튼과 바딘에게 그 이유를 규명하도록 지시했다. 11월과 12월 동안 두 사람은 쇼클리의 장치가 증폭 기능을 하지 못하는 원인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수행했다.[11] 바딘은 뛰어난 이론가였고,[17] 브래튼은 "반도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지닌 중요한 실험가였다.[12] 바딘은 전하 운반자를 가두는 표면 상태의 국소적 변화가 전도 방해의 원인일 수 있다고 이론화했다.[18] 브래튼과 바딘은 금속 점을 실리콘에 밀어 넣고 증류수로 둘러싸는 방식으로 약간의 증폭을 얻는 데 성공했다. 실리콘 대신 게르마늄을 사용하자 증폭률이 향상되었으나, 이는 저주파 전류에만 국한되었다.[11]
1947년 12월 16일, 브래튼은 게르마늄 표면에 두 개의 금박 접촉부를 매우 가깝게 배치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고안했다.[16] 그는 "이 이중 점 접촉을 사용하여 90볼트로 양극 산화 처리된 게르마늄 표면에 접촉을 만들고, 전해질을 H2O로 씻어낸 다음 금 스폿을 증착했다. 금 접촉부는 맨 표면에 눌러졌다. 두 금 접촉부 모두 표면에서 잘 정류되었다... 한 점은 그리드로, 다른 점은 플레이트로 사용했다. 증폭을 얻으려면 그리드에 양(+)의 바이어스(직류)를 인가해야 했다"고 기록했다.[18]
바딘은 이 현상을 "금 스폿 실험은 게르마늄 블록에 정공(hole)이 주입되어 표면 근처의 정공 농도를 증가시킨다는 것을 즉시 시사했다. '방출기(emitter)'와 '수집기(collector)'라는 용어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유일한 질문은 추가된 정공의 전하가 어떻게 보상되는가였다. 우리의 첫 생각은 전하가 표면 상태에 의해 보상된다는 것이었다. 쇼클리는 나중에 전하가 벌크 내의 전자에 의해 보상된다고 제안하고 접합 트랜지스터 구조를 제시했다... 나중에 브래튼과 내가 수행한 실험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에서는 두 메커니즘 모두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설명했다.[18]
1947년 12월 23일, 월터 브래튼, 존 바딘, 윌리엄 B. 쇼클리는 벨 연구소 동료들에게 최초로 작동하는 트랜지스터를 시연했다. 미세한 전기 신호를 증폭하고 디지털 정보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트랜지스터는 "현대 전자공학의 핵심 요소"로 평가받는다.[19] 이 세 사람은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 효과 발견"의 공로로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6]
1947년 시연으로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확신을 얻은 벨 연구소는 '표면 상태 프로젝트'로 명명된 이 연구에 집중했다. 초기에는 엄격한 비밀 유지가 이루어졌고, 벨 연구소 내 제한된 내부 회의를 통해서만 브래튼, 바딘, 쇼클리 및 관련 연구자들의 정보가 공유되었다.[18] 바딘과 브래튼이 발명한 점 접촉 트랜지스터에 대한 특허가 출원되었다.[20] 한편, 퍼듀 대학교의 랄프 브레이와 세이무어 벤저가 게르마늄 저항 연구에서 유사한 발견을 하고 벨 연구소보다 먼저 발표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12]
1948년 6월 30일, 벨 연구소는 기자 회견을 열어 트랜지스터 발명을 공식 발표했다. 또한 새로운 지식을 다른 기관과 자유롭게 공유하는 개방 정책을 채택하여, 연구가 군사 기밀로 분류되는 것을 피하고 트랜지스터 기술의 광범위한 연구 개발을 촉진했다. 벨 연구소는 1951년 9월, 1952년 4월, 1956년에 대학, 산업계, 군 관계자 등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참석하는 여러 차례의 심포지엄을 개최했다.[18]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발견의 모든 공로를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공공연히 주장했다.[20][21][22] 그는 특히 자신이 특허를 낸 접합 트랜지스터와 같은 새로운 연구 분야에서 바딘과 브래튼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했다.[24] 쇼클리의 접합 트랜지스터 이론은 미래 고체 전자공학의 길을 제시한 중요한 업적이었지만, 실제로 제작 가능해지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12]
브래튼은 C. G. B. 개럿, P. J. 보디와 함께 벨 연구소 내 다른 연구 그룹으로 옮겨 반도체 동작의 기초가 되는 표면 특성과 "트랜지스터 효과" 연구를 계속했다.[7][23]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여긴 바딘은 1951년 벨 연구소를 떠나 일리노이 대학교로 옮겼고, 그곳에서 초전도체 이론 연구로 두 번째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20] 쇼클리 역시 1953년 벨 연구소를 떠나 벡먼 인스트루먼츠 내에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했다.[24][25]
1956년, 세 사람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으로부터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 효과 발견"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6] 바딘과 브래튼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 발견으로, 쇼클리는 접합 트랜지스터 개발 공로로 함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월터 브래튼은 수상 소식을 듣고 "이 영광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이런 식으로 인정받는 것은 큰 만족입니다. 하지만 제 행운의 대부분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고, 함께 일할 적절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31] 세 사람은 각자 노벨상 강연을 했는데, 브래튼은 '반도체의 표면 특성'에 대해,[26] 바딘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로 이어진 반도체 연구'에 대해,[27]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기술이 새로운 물리학을 불러일으키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28]
이후 브래튼은 P. J. 보디, P. N. 소여와 함께 생체 물질의 전기화학적 과정에 대한 여러 논문을 공동 집필했다.[7] 아들의 심장 수술을 계기로 혈액 응고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휘트먼 칼리지의 화학과 교수 데이비드 프라스코와 협력하여 인지질 이중층을 모델로 생체 세포의 표면과 흡수 과정을 연구하기도 했다.[24]
2. 5. 노벨상 수상 이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후에도 브래튼은 학계와 연구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52년에는 스튜어트 발렌타인 메달을, 1956년에는 리히트마이어 기념상을 수상했다.교육 분야에서는 195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방문 강사로 활동했으며, 1962년과 1963년에는 휘트먼 대학교에서 방문 강사로, 1963년부터는 같은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7년 벨 연구소에서 정식으로 은퇴한 후에도 휘트먼 대학교에서 강의를 계속했으며, 1972년에는 겸임 교수가 되었다. 1976년 강의에서는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휘트먼 대학교의 컨설턴트로 활동했다.[6]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휘트먼 대학교에서는 월터 브래튼 장학금(Walter Brattain Scholarships영어)을 운영하고 있다. 이 장학금은 대학 준비 과정에서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인 입학생에게 수여되며, 4년간 갱신될 수 있다.[29]
2. 6. 은퇴와 죽음
1967년 벨 연구소를 퇴직한 후, 워싱턴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1972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1970년대에 시애틀로 이주했으며, 말년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다가 1987년 10월 13일 시애틀에서 사망했다.[2][9] 유해는 워싱턴주 포메로이의 시티 묘지(City Cemetery)에 안장되었다.[10]3. 과학적 업적
월터 브래튼은 물리학자로서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 발명에 핵심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국립표준국에서 압전 주파수 표준 개발에 참여했으며, 1929년 벨 연구소에 합류하여 조셉 A. 베커와 함께 산화구리 정류기 연구를 시작으로 반도체 표면 현상 연구에 집중했다.[13][7] 그는 열전자 방출, 텅스텐의 표면 상태, 일함수, 원자 흡착 등 다양한 고체 물리 연구를 수행했으며, 특히 반도체 표면에서의 광전 효과 발견은 그의 주요 공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7]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국방연구위원회 소속으로 잠수함 탐지를 위한 고감도 자력계 개발에 기여하여 관련 특허를 받기도 했다.[6][15][13][14]
전쟁 후 벨 연구소로 복귀한 브래튼은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와 함께 고체 물리학 연구 그룹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12][7] 이들의 공동 연구는 1947년 12월, 세계 최초로 작동하는 트랜지스터의 발명이라는 역사적인 성과로 이어졌다.[19] 트랜지스터는 현대 전자공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브래튼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바딘, 쇼클리와 함께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6]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브래튼은 벨 연구소와 휘트먼 칼리지 등에서 반도체 표면 특성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으며, 말년에는 생체 물질의 전기화학적 과정과 인지질 이중층 같은 생물리학적 주제로 연구 영역을 확장했다.[7][23][24]
3. 1. 트랜지스터 발명
1929년 8월, 벨 연구소에 연구 물리학자로 합류하여 조셉 A. 베커와 함께 산화구리 정류기에서 열에 의한 전하 운반자 흐름을 연구했다.[13][7] 이후 열전자 방출 실험을 통해 조머펠트 이론을 검증하고, 텅스텐의 표면 상태와 일함수, 토륨 원자의 흡착 등을 연구했다.[7] 또한 산화 제일구리와 실리콘 같은 반도체 표면에서의 정류 및 광전 효과 연구를 통해 반도체 자유 표면에서 광전 효과를 발견했는데, 이는 노벨상 위원회로부터 그의 주요 공헌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2]당시 전화 산업은 신뢰성이 낮고 비효율적인 진공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벨 연구소는 이를 대체할 기술 개발을 목표로 삼았다.[11] 1930년대 초, 브래튼은 윌리엄 쇼클리와 함께 산화구리를 이용한 반도체 증폭기, 즉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 개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게르마늄이나 실리콘 같은 재료를 이용한 반도체 연구는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지만, 체계적이지 못했고 이론적 기반도 부족했다.[12]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쇼클리와 마찬가지로 컬럼비아 대학교의 국방연구위원회에서 잠수함의 자기 탐지 연구에 참여했다.[6] 브래튼의 연구팀은 잠수함이 유발하는 지구 자기장 이상을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한 자력계를 개발했고,[15][13] 이 성과로 1944년 자력계 헤드 디자인 특허를 받았다.[14]
1945년, 벨 연구소는 통신 기술 관련 고체 물리학 기초 연구를 위한 특별 그룹을 신설했다. 연구 부사장 머빈 켈리의 승인 하에[12] 쇼클리와 스탠리 O. 모건이 공동으로 이끌게 된 이 그룹에[7] 곧 존 바딘이 합류했다.[12] 바딘은 브래튼의 동생 로버트의 친구로, 1930년대에 브래튼과 알게 되어 함께 브리지나 골프를 즐기던 사이였다.[15][7] 양자 물리학자인 바딘, 재료 과학 분야에 뛰어난 실험가였던 브래튼, 그리고 고체 물리학 전문가인 팀장 쇼클리가 함께 연구하게 되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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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클리가 고안했던 초기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실리콘으로 얇게 코팅된 실린더를 금속판 가까이 둔 형태)는 이론상 작동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쇼클리는 브래튼과 바딘에게 그 원인을 규명하도록 지시했다. 1947년 11월과 12월, 두 사람은 쇼클리의 장치가 증폭되지 않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11] 바딘은 뛰어난 이론가였고,[17] 브래튼은 "반도체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지닌 실험가였다.[12] 바딘은 전하 운반자를 가두는 표면 상태의 국소적 변화가 전도 실패의 원인일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18] 브래튼과 바딘은 금속 점을 실리콘에 밀어 넣고 증류수로 둘러싸는 방식으로 약간의 증폭을 얻는 데 성공했다. 실리콘 대신 게르마늄을 사용하자 증폭률이 향상되었지만, 여전히 저주파 전류에서만 작동했다.[11]
1947년 12월 16일, 브래튼은 게르마늄 표면에 두 개의 금박 접촉부를 매우 가깝게 배치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고안했다.[16] 그는 "이 이중 점 접촉을 사용하여... 금 접촉부를 맨 표면에 눌렀다... 한 점은 그리드로, 다른 점은 플레이트로 사용했다. 증폭을 얻으려면 그리드에 양(+)의 바이어스(직류)를 가해야 했다"고 기록했다.[18] 바딘은 이 현상이 게르마늄 블록에 정공(hole)이 주입되어 표면 근처의 농도를 높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방출기(emitter)'와 '수집기(collector)'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정공의 전하가 표면 상태에 의해 보상되는지, 아니면 쇼클리가 나중에 제안한 것처럼 벌크 내 전자에 의해 보상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후속 실험을 통해 두 현상 모두 점 접촉 트랜지스터에서 일어날 수 있음이 밝혀졌다.[18]
1947년 12월 23일, 브래튼, 바딘, 쇼클리는 벨 연구소 동료들에게 최초로 작동하는 트랜지스터를 시연했다. 작은 전기 신호를 증폭하고 디지털 정보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트랜지스터는 "현대 전자공학의 핵심 요소"로 평가받는다.[19] 이 업적으로 세 사람은 1956년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 효과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6]
트랜지스터 개발 성공 이후 벨 연구소는 '표면 상태 프로젝트'에 집중하며 초기에는 연구 내용을 비밀에 부쳤다.[18] 바딘과 브래튼이 발명한 점 접촉 트랜지스터에 대한 특허가 등록되었고,[20] 퍼듀 대학교의 랄프 브레이와 세이무어 벤저가 유사한 발견을 먼저 발표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12] 1948년 6월 30일, 벨 연구소는 기자회견을 통해 발견을 공식 발표하고, 군사 기밀 분류를 피하고 기술의 광범위한 연구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관련 지식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를 위해 1951년부터 여러 차례 대규모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국내외 학계 및 산업계와 연구 성과를 공유했다.[18]
그러나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발견의 모든 공로를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20][21][22] 특히 자신이 특허를 낸 접합 트랜지스터 연구에서 바딘과 브래튼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24] 쇼클리의 접합 트랜지스터 이론은 미래 고체 전자공학의 길을 제시한 중요한 업적이었지만, 실제 제작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12]
브래튼은 C. G. B. 개럿, P. J. 보디 등과 함께 다른 연구 그룹으로 옮겨 반도체 표면 특성과 "트랜지스터 효과"의 기초 연구를 계속했다.[7][23] 바딘은 이러한 상황을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 여기고 1951년 벨 연구소를 떠나 일리노이 대학교로 옮겼으며, 훗날 초전도체 이론으로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다.[20] 쇼클리 역시 1953년 벨 연구소를 떠나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했다.[24][25]
1956년 노벨 물리학상 시상식에서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은 세 사람에게 공동으로 상을 수여했다.[6] 브래튼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 발견, 쇼클리는 접합 트랜지스터 개발 공로를 인정받았다. 브래튼은 수상 소감에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고, 함께 일할 적절한 사람들이 있었던 행운 덕분"이라고 말했다.[31] 노벨 강연에서 브래튼은 ''반도체의 표면 특성''에 대해,[26] 바딘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로 이어지는 반도체 연구''에 대해,[27]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기술이 새로운 물리학을 불러일으키다''에 대해 발표했다.[28]
이후 브래튼은 P. J. 보디, P. N. 소여와 함께 생체 물질의 전기화학적 과정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으며,[7] 아들의 심장 수술을 계기로 혈액 응고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휘트먼 칼리지의 데이비드 프라스코 교수와 협력하여 인지질 이중층을 이용해 생체 세포 표면과 흡수 과정을 연구하기도 했다.[24]
3. 2. 반도체 표면 연구
1929년 8월, 조셉 A. 베커와 함께 벨 연구소의 연구 물리학자로 합류했다.[13] 두 사람은 산화구리 정류기에서 열에 의한 전하 운반자 흐름을 연구했다.[7] 브래튼은 아놀드 조머펠트의 강연에 참석했으며,[13] 이후 열전자 방출 실험을 통해 조머펠트 이론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 또한 텅스텐의 표면 상태와 일함수, 토륨 원자의 흡착을 연구했다.[7] 산화 제일구리와 실리콘의 반도체 표면에서 정류 및 광전 효과를 연구하며 반도체 자유 표면에서의 광전 효과를 발견했는데, 이는 노벨상 위원회로부터 그의 주요 공헌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2]당시 전화 산업은 진공관에 크게 의존했으나, 이는 비효율적이고 신뢰성이 낮아 벨 연구소는 대체 기술 개발을 모색했다.[11] 1930년대 초, 브래튼은 윌리엄 쇼클리와 함께 산화구리를 이용한 반도체 증폭기를 연구했는데, 이는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를 만들려는 초기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당시 다른 연구자들도 게르마늄과 실리콘 같은 재료로 반도체를 실험했지만, 전쟁 이전의 연구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이론적 기반이 부족했다.[12]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쇼클리와 함께 컬럼비아 대학교의 국방연구위원회에서 각각 잠수함의 자기 탐지 연구에 참여했다.[6] 브래튼의 연구팀은 잠수함이 만드는 지구 자기장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자력계를 개발했으며,[15][13] 이 연구 결과로 1944년 자력계 헤드 디자인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14]
1945년 벨 연구소는 조직을 개편하여 통신 기술과 관련된 고체 물리학 기초 연구를 전담하는 그룹을 신설했다. 이는 연구 부사장 머빈 켈리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다.[12] 이 그룹은 쇼클리와 스탠리 O. 모건이 공동으로 이끌었으며,[7] 곧 존 바딘이 합류했다.[12] 바딘은 브래튼의 형제 로버트의 절친한 친구로, 1930년대에 존과 월터가 서로 알게 되었다.[15] 그들은 종종 함께 브리지와 골프를 즐겼다.[7] 바딘은 양자 물리학자, 브래튼은 재료 과학 분야의 뛰어난 실험가였으며, 팀장인 쇼클리는 고체 물리학 전문가였다.[16]
당시 이론상으로는 쇼클리가 고안한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실리콘으로 얇게 코팅된 실린더를 금속판 가까이에 둔 형태)가 작동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쇼클리는 브래튼과 바딘에게 그 이유를 밝혀내도록 지시했다. 1947년 11월과 12월 동안 두 사람은 쇼클리의 장치가 증폭되지 않는 원인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11] 바딘은 뛰어난 이론가였고,[17] 브래튼은 "반도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지닌 중요한 실험가였다.[12] 바딘은 전하 운반자를 가두는 표면 상태의 국소적 변화가 전도 실패의 원인일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18] 브래튼과 바딘은 금속 점을 실리콘에 밀어 넣고 증류수로 둘러싸는 방식으로 약간의 증폭을 얻는 데 성공했다. 실리콘을 게르마늄으로 바꾸자 증폭 효과는 커졌지만, 저주파 전류에서만 작동했다.[11]
12월 16일, 브래튼은 게르마늄 표면에 두 개의 금박 접촉부를 매우 가깝게 배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16] 그는 "이 이중 점 접촉을 사용하여 90볼트로 양극 산화 처리된 게르마늄 표면에 접촉을 만들고, 전해질을 H2O로 씻어낸 다음 금 스폿을 증착했습니다. 금 접촉부는 맨 표면에 눌러졌습니다. 표면에 대한 두 금 접촉부 모두 잘 정류되었습니다... 한 점은 그리드로, 다른 점은 플레이트로 사용되었습니다. 증폭을 얻으려면 그리드에 대한 바이어스(직류)가 양수여야 했습니다."라고 기록했다.[18]
바딘은 이 현상을 "금 스폿을 사용한 초기 실험은 곧 게르마늄 블록에 정공이 도입되어 표면 근처의 정공 농도가 증가함을 즉시 시사했습니다. 방출기와 수집기라는 이름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유일한 질문은 추가된 정공의 전하가 어떻게 보상되는가였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생각은 전하가 표면 상태에 의해 보상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쇼클리는 나중에 전하가 벌크 내의 전자에 의해 보상되고 접합 트랜지스터 기하학을 제안했습니다... 나중에 브래튼과 제가 수행한 실험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에서 두 가지 모두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18]
1947년 12월 23일, 월터 브래튼, 존 바딘, 윌리엄 B. 쇼클리는 벨 연구소 동료들에게 최초의 작동하는 트랜지스터를 시연했다. 소량의 전기 신호를 증폭하고 디지털 정보 처리를 지원하는 트랜지스터는 "현대 전자공학의 핵심 요소"이다.[19] 세 사람은 "반도체에 대한 연구와 트랜지스터 효과의 발견"으로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6]
1947년 시연을 통해 주요 돌파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얻은 벨 연구소는 이제 표면 상태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것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엄격한 비밀이 유지되었다. 벨 연구소 내에서 신중하게 제한된 내부 회의를 통해 브래튼, 바딘, 쇼클리 및 관련 연구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의 연구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었다.[18] 바딘과 브래튼이 점 접촉 트랜지스터를 발명했다는 내용을 기록한 특허가 등록되었다.[20] 랄프 브레이와 세이무어 벤저가 퍼듀 대학교에서 게르마늄의 저항을 연구하면서 유사한 발견을 하고 벨 연구소보다 먼저 발표할 가능성에 대한 상당한 우려가 있었다.[12]
1948년 6월 30일, 벨 연구소는 기자 회견을 열어 그들의 발견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또한 새로운 지식을 다른 기관과 자유롭게 공유하는 개방 정책을 채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연구를 군사 기밀로 분류하는 것을 피하고 트랜지스터 기술의 광범위한 연구 및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벨 연구소는 1951년 9월, 1952년 4월, 그리고 1956년에 대학, 산업 및 군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여러 심포지엄을 개최했으며,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참석했다. 국내외 기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18]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발견에 대한 모든 공로를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20][21][22] 그는 특히 쇼클리가 특허를 획득한 접합 트랜지스터와 같은 새로운 연구 분야에서 바딘과 브래튼을 적극적으로 배제했다.[24] 쇼클리의 접합 트랜지스터 이론은 미래의 고체 전자 제품의 길을 제시하는 "인상적인 업적"이었지만, 그 제작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지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12]
브래튼은 C. G. B. 개럿과 P. J. 보디와 함께 일하며 벨 연구소 내 다른 연구 그룹으로 옮겼다. 그는 반도체 동작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요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고체의 표면 특성과 "트랜지스터 효과"를 계속 연구했다.[7][23] 바딘은 이를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 묘사하며 1951년 벨 연구소를 떠나 일리노이 대학교로 갔고, 결국 초전도 이론으로 두 번째 노벨상을 수상했다.[20] 쇼클리는 1953년 벨 연구소를 떠나 벡먼 인스트루먼츠에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했다.[24][25]
1956년, 세 사람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에 의해 "반도체에 대한 연구와 트랜지스터 효과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6] 바딘과 브래튼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의 발견으로, 쇼클리는 접합 트랜지스터의 개발로 포함되었다. 월터 브래튼은 수상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는 이 영광을 진심으로 감사히 여깁니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해냈고 이런 식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큰 만족입니다. 그러나 제 행운의 대부분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고, 함께 일할 적절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31] 세 사람 모두 강연을 했다. 브래튼은 ''반도체의 표면 특성''에 대해,[26] 바딘은 ''점 접촉 트랜지스터로 이어지는 반도체 연구''에 대해,[27]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기술이 새로운 물리학을 불러일으키다''에 대해 강연했다.[28]
브래튼은 나중에 P. J. 보디와 P. N. 소여와 함께 생체 물질의 전기화학적 과정에 대한 여러 논문을 공동 집필했다.[7] 아들이 심장 수술을 받은 후 혈액 응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휘트먼 칼리지 화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프라스코와 협력하여 인지질 이중층을 모델로 사용하여 생세포의 표면과 흡수 과정을 연구했다.[24]
3. 3. 생체 물질 연구
브래튼은 이후 P. J. 보디, P. N. 소여와 함께 생체 물질의 전기화학적 과정에 대한 여러 논문을 공동 집필했다.[7] 아들이 심장 수술을 받은 것을 계기로 혈액 응고 분야에도 관심을 두었다. 또한 휘트먼 화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프라스코와 협력하여 인지질 이중층을 모델로 삼아 살아있는 세포의 표면과 흡수 과정을 연구했다.[24]4. 수상 및 영예
- 수상
- 1952년: 프랭클린 연구소 스터어트 발랜타인 메달 (존 바딘 박사와 공동 수상)[30]
- 1954년: 존 스콧 메달 (존 바딘 박사와 공동 수상)
- 1956년: 노벨 물리학상 (존 바딘 박사, 윌리엄 쇼클리 박사와 공동 수상)[31]
- 1956년: 리히트마이어 기념상
- 1974년: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 헌액
- 회원
- 미국 국립과학원
- 프랭클린 연구소
- 미국 물리학회
-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 미국 과학 진흥 협회
- 국제 순수 및 응용 물리 연합(IUPAP) 반도체 위원회
- 해군 연구 자문 위원회
- 명예 박사 학위
- 1952년: 과학 박사, 포틀랜드 대학교
- 1955년: 휘트먼 대학교
- 1955년: 유니온 대학교 (존 바딘 박사와 공동 수상)
- 1957년: 미네소타 대학교
- 기타 인정
- USS ''Brattain'', 스타 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 에피소드 "나이트 테러스"에 등장하는 함선 이름으로 명명됨.
5. 기타
- 휘트먼 대학교에서는 월터 브래튼 장학금(Walter Brattain Scholarships)이 "대학 준비 과정에서 높은 학업 성취도를 달성한 입학생"에게 성적 우수 장학금으로 수여된다. 모든 지원자는 4년간 갱신될 수 있는 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29]
- USS ''Brattain''은 스타 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나이트 테러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우주선의 이름으로, 월터 브래튼의 이름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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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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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Nobel Prize in Physics Awarded to Transistor Inventors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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