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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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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각경은 대한제국 개화파 거두 유길준의 조카로, 정신여학교 졸업 후 베이징 유학을 거쳐 유아 교육에 힘썼다. 1914년 귀국 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조직하고 신간회, 근우회에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한국애국부인단을 조직하고 이승만을 지지하며 자유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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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각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유각경
유각경
개인 정보
출생일1892년
사망일1966년 9월 7일
사망 원인알 수 없음
국적알 수 없음
직업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기독교 운동가
본관알 수 없음
가족 관계
부모알 수 없음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친척알 수 없음
활동 정보
관련 활동사회운동, 여성운동, 기독교 운동
활동 이념알 수 없음
경력알 수 없음

2. 생애

유각경은 대한제국 시절 개화파의 거두였던 유길준의 조카이자, 유만겸, 유억겸의 사촌 누이이다. 한성부의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 유성준을 따라 기독교에 입문했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에 유학하여 유아 교육을 전공했으며, 귀국 후에는 유치원을 운영했다.

1914년 귀국 후 모교 교사로 일하면서 김필례, 김활란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조직했다. 1927년에는 근우회(회장 김활란) 부회장을 맡았고, '근우회'라는 이름을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일제에 협력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광복 후 건국부녀동맹에 참여했으나 곧 탈퇴하고, 우익 여성 단체인 한국애국부인단을 조직했다. 1948년 남북협상론과 단정 수립론이 대립할 때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했으며, 이후 장로교 여성계를 대표하여 이승만을 지원하며 자유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2. 1. 생애 초기

유각경은 대한제국 시절 개화파의 거두였던 유길준의 조카로, 유만겸, 유억겸에게는 사촌 누이가 된다. 한성부에서 일찍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유길준의 동생인 아버지 유성준을 따라 기독교에 입문했다. 유성준은 양반 가문 출신으로 옥중에서 성서를 읽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며, 일제 강점기에 도 참여관과 중추원 참의를 지내 친일파로 분류된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장로교의 주선으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이징에 유학했다. 이때 그는 나중에 좌익 여성 운동가가 되는 유영준 등과 함께 협화여자전문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유아 교육을 전공하여 귀국한 뒤 유치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2. 2. 교육, 신앙 활동

1914년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김필례, 김활란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조직했다. 신간회에는 김활란과 함께 여성 대표로 참가하였고, 1927년 근우회(회장 김활란)를 설립하고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근우회(槿友會)'라는 이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유각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YWCA 회장과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여전도회 회장을 지내는 동안 일제에 협력한 의혹이 있다.

2. 3. 친일 행적 논란

1914년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김필례, 김활란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조직했다. 신간회에는 김활란과 함께 여성 대표로 참가하였고, 1927년 근우회(회장 김활란)를 설립하고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근우회(槿友會)'라는 이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유각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YWCA 회장과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여전도회 회장을 지내는 동안 일제에 협력한 의혹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이 명단에는 그의 사촌들인 유만겸, 유억겸과 아버지 유성준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유각경은 1938년 조선YWCA가 일본YWCA에 흡수 통합될 때 이를 주도하였고, 친일 단체 애국금차회(1938)에 간사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에 가담하여 각종 연설회에 초청받아 친일 연설을 했다. 여유있는 환경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명랑한 성격이었고 늘 자신감이 넘치는 연설을 해 명연설가로 꼽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2. 4. 생애 후반

광복 직후 근우회 출신들이 대거 포함된 좌우 연합 여성 단체 건국부녀동맹에 참가했으나, 사회주의 계열과의 의견 차이로 곧 탈퇴하였고 우익 여성 단체인 한국애국부인단을 조직했다. 그 뒤 1948년의 남북협상론과 단정 수립론이 나타났을 때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이후로 장로교 여성계를 대표하여 이승만을 측면에서 지원하면서 자유당에 참가, 자유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유치홍(兪致弘)
종조부유진태(兪鎭泰)
조부유진수(兪鎭壽)
조모전주 이씨, 이경직의 딸
백부유회준(兪會濬)
사촌 오빠유옥겸(兪鈺兼)
중부유길준(兪吉濬)
사촌 오빠유억겸(兪億兼)
사촌 오빠유만겸(兪萬兼)
아버지유성준(兪星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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