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억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억겸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교육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1896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 부학감, 학감을 역임했다. 그는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했으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친일로 전향하여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학무국장과 문교부장을 역임했으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1947년 사망했으며,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로 선정되었다.
1896년 10월 23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한문을 공부한 뒤 1907년 사립 계산학교를 거쳐 1911년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 학관 중등과에서 수학했다. 1912년 일본 도시샤 중학교와 관립 제3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1]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교육부문의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유억겸기념관'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2005년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6]
[1]
서적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2. 생애
1922년 귀국하여 변호사 등록을 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24년에는 경신학교 교사, 1925년부터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겸하며 교육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기독교 신자로서 조선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사회 운동에 참여했고, 흥업구락부, 조선사정연구조사회 등에 가입했다.[1]
1925년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위원을 맡았고,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934년 연희전문학교 부교장을 맡았고, 1937년 조선체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특히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시절 체육 발전에 힘썼다.[1]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가출옥했으며,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했다. 변호사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변호사 등록이 취소되었다가 1943년에 다시 등록했다.[2]
중일전쟁 이후 윤치호, 정춘수 등과 함께 일제 통치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2] 1939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분회 제3분회장, 1941년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임전대책협의회 등에 참여했다.[3] 1941년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하여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債券)으로부터"를 외치며 활동했다.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3년 학도병 종로익찬회,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4] 1942년 조광에 '전필승 공필취'(戰必勝 攻必取)라는 글을 기고하여 대동아전쟁을 미화하고 후방 국민들의 보국(報國)을 강조했다.[4]
1945년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5]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 문교부 학무국장, 문교부장 등을 역임하며 미군정기 교육정책을 총괄했다. 1947년 조선체육회 부회장과 회장을 맡았다. 1947년 11월 8일 뇌일혈과 과로 등으로 사망했다.
2. 1. 생애 초기
1896년 10월 23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한문을 공부한 뒤 1907년 4월 한성 사립 계산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3월 졸업했다. 1911년 4월부터 1912년 5월까지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 학관 중등과에서 수학했다. 1912년 9월 일본 교토 도시샤 중학교 보통부에 들어가 1916년 3월 졸업했다. 1916년 7월 교토 관립 제3고등학교 제1부에 입학해 1919년 6월 졸업했다. 1919년 7월에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가 1922년 3월에 졸업했다.
2. 2. 교육 활동과 독립운동
1922년 4월부터 1923년 3월까지 도쿄 제국대학 대학원에서 법학을 연구하고 귀국해 경성지방법원에 변호사 등록을 했다. 1923년 4월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에 임용되었고, 같은 해 8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924년 4월 부학감, 같은 해 9월 학감을 맡았다. 1924년 1월에는 경신학교 교사를 지냈고, 1925년 4월부터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겸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조선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각종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 3월 흥업구락부에 가입했고, 같은 해 9월 김기전, 김준연, 이관용, 조병옥, 홍명희 등이 중심이 되어 '민족정신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조직된 조선사정연구조사회 발기인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1925년 11월 신흥우, 송진우 등과 함께 미국의 이승만과 사전 협의를 거친 끝에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조직하고 위원을 맡았다. 1927년 1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합한 좌우연합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4년 2월 연희전문학교 부교장을 맡았다.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시절 특히 체육에 관심이 깊어, 그의 주선으로 연희전문학교 주최 전국중학교체육대회를 매년 개최하기도 하였다. 1937년 7월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았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당시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1]
2. 3. 친일 전향과 활동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가출옥했다.[2] 출옥 직후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1937년에 변호사 사업을 등록해 일시적으로 변호사직을 겸임하며 활동했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938년 9월 변호사 등록이 취소되었다. 1943년 6월이 되어서야 다시 변호사 등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유억겸은 합법적으로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힘썼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게 된다. 흥업구락부 사건이나 수양동우회 사건 등이 발생한 이후, 유억겸 역시 윤치호, 정춘수 등과 함께 일제의 통치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여 활동했다.
1939년 12월, 김활란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 '이화전문학교후원회'가 결성되었고, 유억겸은 신흥우, 송진우 등과 함께 창립총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3] 이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3]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유억겸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7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경성분회 제3분회장이었고,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에는 형 유만겸과 같이 참여하였다. 같은 달 임전대책협의회에도 참여하였다.
유억겸은 "최후의 승리는 우리 일본제국에 있으므로 반도의 동포는 국책에 순응하여 영광의 적자로 천황폐하에게 몸을 바쳐야 한다"고 외쳤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1941년 9월 7일 '채권가두유격대'에 나서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債券)으로부터"를 외쳤다. 유억겸은 이성근, 박상준, 양주삼 등과 '광화문대'에 편성되어 활동하였다.
일제 말기 친일단체를 망라하여 대표하였던 단체가 조선임전보국단이었다. 유억겸은 흥아보국단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 단체의 이사였고 형 유만겸은 평의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유억겸은 직접적인 전쟁 고무 및 동원에도 참여하였다. 1943년 11월 학도병 종로익찬회에 관여하였고,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회장 최린)의 명예회원이기도 하였다. 또한 연희전문학교 부교장으로서 학생들을 전쟁터로 지원하도록 적극 권유했다.
1942년 2월, 유억겸은 조광에 '전필승 공필취'(戰必勝 攻必取: 싸워서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여 반드시 탈취하라)라는 글을 기고하여 선전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을 '대동아공영권 내 10여억 민중의 공존공영을 위한 대동아 해방의 성전(聖戰)'으로 규정하고, 후방의 국민이 평시와 같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전필승 공필취'의 신념에 불타는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육해공군 장병의 신고(辛苦)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후방의 국민들은 성전을 관철하고 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보국(報國)할 것을 강조하였다.[4]
2. 4. 광복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5] 그해 10월 미군정이 주둔하자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미군정을 환대하였다. 김성수, 김활란, 백낙준 등과 함께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 미군정청 문교부 학무국장에, 1946년 2월에는 문교부장에 임명되어 미군정기의 교육정책을 총괄했다. 1947년 5월 조선체육회 부회장을 맡았고, 같은 해 9월 회장을 맡았다. 1947년 11월 8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 9번지 자택에서 지병과 뇌일혈, 과로 등으로 사망했다.
3. 친일 논란과 비판
4. 가족 관계
관계 이름 출생 - 사망 비고 증조부 유치홍(兪致弘) 1800년 - ? 종조부 유진태 ? - ? 멕시코로 이민[7] 할아버지 유진수(兪鎭壽) 1825년 - 1898년 할머니 전주 이씨 ? - ? 이경직의 딸 숙부 유회준(兪會濬) ? - ? 사촌 형 유옥겸 ? - ? 숙부 유성준(兪星濬) 1860년 음력 9월 7일 - 1934년 양력 2월 27일 사촌 누이 유각경(兪珏卿) 1892년 - 1966년 9월 7일 아버지 유길준(兪吉濬) 1856년 양력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 1914년 양력 9월 30일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 ? - 1874년 아버지 유길준의 본처 어머니 충주 이씨(忠州李氏) ? - ? 형 유만겸(兪萬兼) 1889년 7월 13일 - 1944년 12월 13일 형수 이름 미상 ? - ? 함경북도의 중인 출신, 유만겸의 본처 형수 파평 윤씨 ? - ? 조카 유병덕(兪炳德) 1932년 - 2000년 6월 20일 감사원 제1국장[8], 제4국장, 감사원 심의실장 역임[9] 부인 윤희섭(尹喜燮) 1905년 11월 6일 - ? 아버지 윤택영 해풍부원군, 언니 순정효황후
참조
[2]
문서
[3]
서적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4]
뉴스
유성준·유만겸·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http://www.ohmynews.[...]
계명대학교
2009-11-06
[5]
서적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 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
[6]
뉴스
민노당 연대 학생위, 학내 친일인사 7명 명단 발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4-11
[7]
웹사이트
상투 자른 외교관 유길준, 고교 입학 석 달 만에 영어회화
http://sunday.joins.[...]
[8]
뉴스
갑오경장 세 주역의 문집 발굴
동아일보
1970-07-21
[9]
뉴스
감사원 인사
동아일보
1967-05-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