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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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기(劉基)는 후한 말 오나라의 인물로, 전한 고조 유방의 후손이며, 아버지 유요는 양주자사였다. 손권의 총애를 받아 동조연, 보위교위, 건충중랑장, 대사농, 낭중령 등을 역임했다. 특히 손권이 우번을 죽이려 할 때 그를 말리는 등 손권의 측근으로서 활약했다. 49세에 사망했으며, 손권은 그의 딸을 아들 손패에게 시집보내고 유족을 예우했다. 육기는 유기를 강경한 간언으로 손권의 허물을 보완한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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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동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유기 |
원어 이름 | 劉基 |
자 | 경여 (敬輿) |
출생 | 184년 |
사망 | 233년 (50세) |
사망 장소 | 양주 단양군 건업현 |
아버지 | 유요 |
배우자 | 손파의 부인 |
관직 정보 | |
소속 국가 | 오 |
주요 직책 | 광록훈, 평상서사 |
광록훈 임기 시작 | 229년 |
광록훈 임기 종료 | 233년 |
이전 직책 | 대농령 |
대농령 임기 시작 | 221년 |
대농령 임기 종료 | 229년 |
주군 | 손권 |
2. 생애
후한 말의 관리이자 군벌이었던 유요의 아들이며, 전한 고조 유방의 장남 유비의 후손이다. 아버지 유요 사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동생들을 돌보며 성장했다.[1][4] 199년 손책이 예장군을 점령한 후 유기를 발탁하여 후대하였고,[2] 왕랑 역시 그의 인물됨을 인정하여 손책에게 잘 대해줄 것을 권했다.[3]
유기는 수려한 용모와 바른 품행으로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에게 깊은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6] 219년 손권이 표기장군에 임명되자 동조연(東曹掾)으로 등용되었고, 이후 보의교위(輔義校尉), 건충중랑장(建忠中郎將) 등을 역임했다.[6] 221년 손권이 오왕(吳王)에 봉해지자 대농령(大農令, 또는 대사농)에 임명되었으며,[7] 손권의 두터운 신임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9] 특히 손권이 연회 중 우번을 처형하려 했을 때 이를 간언하여 막아 신망을 얻었다.[7][8]
이후 낭중령(郎中令)을 거쳐 229년 손권이 황제에 즉위하고 동오를 건국하자, 광록훈(光祿勳)으로 승진하고 상서(尚書)의 업무 일부를 담당하는 분평상서사(分平尚書事)의 직책을 맡았다.[10]
233년 50세(만 4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11] 사후에도 손권은 그의 딸을 아들 손패와 혼인시키고 유족을 장소나 전종에 버금가게 대우하는 등 각별한 예우를 보였다.[12]
2. 1. 초기 생애와 가계
유기(劉基)는 명문가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전한의 창시자 유방의 장남인 유비였다. 그의 아버지 유요는 후한 말의 관리로 양주자사를 지냈으나, 원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예장군(豫章郡, 현재의 난창시, 장시성 일대)으로 물러났다가 198년(또는 197년) 그곳에서 사망했다.[1]아버지 유요가 사망했을 때 유기는 15세[1](『오서』에 따르면 14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예법에 맞게 치렀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한 아버지의 옛 관리들이 보내온 조의 물품을 일절 받지 않았다.[1] 1년 후, 손책이 예장군을 점령했을 때 유요의 유해를 수습하여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고 남은 가족들을 후하게 대우했다.[2] 일찍이 손책에게 패배하여 조조에게 의탁했던 왕랑은 손책에게 편지를 보내 유기를 잘 보살펴 줄 것을 당부하며, "정리(유요)의 장남은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니, 그를 잘 대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조언하기도 했다.[3]
유기는 아버지 사후 두 남동생 유삭(劉鑠), 유상(劉尚)과 함께 가난하고 힘든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4]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며, 동생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그는 매우 근면하여 늘 늦게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났으며, 심지어 그의 아내와 첩들도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동생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따랐다. 또한 그는 외부와의 교류를 자제하며 손님을 거의 맞이하지 않는 등 조용한 삶을 살았다.[5]
2. 2. 손권과의 만남
유기는 용모가 수려하고 교양이 있었기에, 훗날 주군이 되는 손권에게서 깊은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13][6]199년, 손책이 예장군을 점령한 후, 유기의 아버지 유요의 유해를 수습하고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유기와 그의 가족들을 후하게 대우했다.[2] 당시 회계태수였던 왕랑 역시 손책에게 편지를 보내 "유요의 장남은 큰 포부를 지녔으니, 지난날의 일은 잊고 그를 잘 대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며 유기를 높이 평가했다.[3]
유기의 뛰어난 외모와 인품은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19년, 손권이 후한 조정으로부터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막부를 열자, 유기를 동조연(東曹掾)으로 발탁하여 등용했다.[13][6] 이후 유기는 보위교위(輔義校尉)와 건충중랑장(建忠中郎將)으로 승진하며 손권의 신임을 계속 받았다.[13][6] 손권이 유기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한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어느 여름날 연회 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손권은 다른 신하들은 그대로 두었으나 자신과 유기에게만 비를 피할 덮개를 씌우도록 명했다.[13][9]
2. 3. 오나라에서의 관직 생활
219년, 손권이 표기장군이 되어 막부를 열자, 유기를 등용하여 동조연(東曹掾)으로 삼았다. 이후 보위교위(輔義校尉)와 건충중랑장(建忠中郎將)을 역임했다.[13][6]221년, 손권이 조위의 황제 조비로부터 오왕(吳王)으로 책봉되자, 유기는 대사농(大司農)으로 승진했다.[13] 손권은 신하들과 함께 축하 잔치를 열었다. 잔치 중에 손권의 신하 우번이 거짓으로 술에 취한 척하며 손권이 따라주는 술을 받지 않으려 하자, 손권은 크게 분노하여 칼을 뽑아 우번을 죽이려 했다. 이때 유기가 손권을 끌어안고 간언하여 우번의 목숨을 구했다. 유기는 손권에게 덕망 높은 군주로서의 명성을 지킬 것을 호소했고, 조조가 공융을 죽인 예를 들며 반문하는 손권에게 요와 순 같은 성군과 비교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손권은 유기의 말을 받아들여 우번을 살려주었고, 이후 술에 취해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더라도 따르지 말라고 명했다.[15][7][8]
손권은 유기를 매우 총애했는데, 이는 여러 일화에서 드러난다. 어느 더운 여름날, 손권이 배 위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갑자기 폭풍우가 쏟아졌다. 손권은 시종들에게 자신과 유기에게만 큰 덮개를 씌워 비를 피하게 하고 다른 신하들은 그 아래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13][9]
유기는 이후 낭중령(郎中令)으로 전임했다.[13][9] 황룡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고 오나라를 세우자, 유기는 광록훈(光祿勳)으로 승진하였고, 분평상서사(分平尚書事)의 직무를 맡아 상서(尚書)의 업무 일부를 처리했다.[13][10] 손권이 오군의 장온의 인물됨에 대해 묻자, 유기는 그를 전종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당시 태상이었던 고옹은 이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2. 4. 사망과 유족
233년에 50세로 사망했다.[11] 사후 손권은 유기의 딸을 아들인 손패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유기의 가족에게는 좋은 집을 하사하고, 계절마다 장소나 전종의 가문과 동등한 수준의 물품을 보내는 등[13] 각별히 예우했다.[12] 유기의 동생인 유삭(劉鑠)과 유상(劉尚)은 모두 기도위(騎都尉)를 지냈다.[13]3. 평가
육기의 《변망론》에서는 유기를 낙통과 함께 강경한 간언으로써 주군 손권의 허물을 보완하도록 도왔다고 언급했다.[16]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Wu Shu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삼국지
[14]
서적
오서
[15]
서적
삼국지
[16]
서적
변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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