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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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흥거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동모후에 봉해진 후 장안에서 숙위를 맡았다. 고황후 사후, 형 유장, 유양과 함께 여씨를 제거하고 유양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문제 시대에 제북왕으로 봉해졌지만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진압되어 자결했다. 그의 형제들은 23년 후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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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거 | |
---|---|
유흥거(劉興居) | |
개인 정보 | |
출생 | 기원전 2세기경 |
사망 | 기원전 177년 |
가족 | 유비 (형) |
생애 | |
작위 | 동모후 |
봉국 | 제나라 |
주요 활동 | 여후 타도 모의, 반란 |
사인 | 자살 |
2. 일대기
는 제애왕 7년 곧 고황후 6년에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져 장안으로 들어와 형 유장과 함께 숙위를 맡았다.[2][3]
고황후 8년에 고황후가 죽자, 유흥거는 형 유장 및 유양과 모의하여 여씨들을 제거하고 유양을 황제로 세우려 했다. 이들은 진평, 주발 등과 협력하여 여산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소제와 그 형제들이 혜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하려 할 때, 유흥거는 하후영과 함께 소제를 궁궐에서 내쫓고 소부에 안치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유양은 황제가 되지 못하고 대왕 유항이 황제가 되었다.[2][4]
문제는 유장과 유흥거의 공을 인정하여 각각 조나라와 양나라의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들이 유양을 황제로 세우려 한 것을 알고 문제 2년에 제나라를 분할하여 유장을 성양나라 왕, 유흥거를 제북나라 왕으로 삼았다. 이에 유흥거는 불만을 품었다.[2]
문제 3년, 흉노의 침입 소식과 문제가 친히 태원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흥거는 반란을 일으켜 형양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흉노 정벌군을 철수시키고 시무를 대장군으로 삼아 유흥거를 진압하게 했다. 결국 유흥거는 패배하여 사로잡혔고 자결했으며, 제북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군으로 편입되었다.[2][5]
2. 1. 초기 생애와 여씨의 난
는 기원전 182년,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져 장안으로 들어왔고, 4년 전에 장안으로 들어와 숙위를 맡고 있던 형 유장과 함께 숙위를 맡았다.[2][3]2년 후, 고황후가 죽자, 형 유장 및 유양과 함께 모의하여, 유양은 제나라에서 서쪽으로 출병하고 유장은 유흥거와 함께 내응해 여씨들을 죽이고 유양을 황제로 세우기로 했다.[2] 결국 진평·주발 등과 협력해 유장이 여산을 죽임으로써 여씨들을 주멸할 수 있었다. 대신들은 소제와 그 형제들은 사실 혜제의 아들들이 아니라며 폐위하고자 했는데, 유흥거는 여씨들을 죽이는 데 공이 적다며 자청하여 하후영과 함께 소제의 처리를 맡아, 궁궐에 들어가 소제를 폐위하고 소부에 안치했다.[2][4] 이후 유택 등 대신들의 반대로 유양은 황제가 되지 못하고 대왕 유항이 황제가 되었다.[2]
2. 2. 제북왕 즉위와 불만
劉興居|유흥거중국어는 기원전 182년,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져 장안으로 들어왔고, 4년 전에 장안으로 와 숙위를 맡고 있던 형 유장과 함께 숙위를 맡았다.[2][3]2년 후, 고황후가 죽자, 형 유장 및 유양과 모의하여, 유양은 제나라에서 서쪽으로 출병하고 유장은 유흥거와 함께 내응해 여씨들을 죽이고 유양을 황제로 세우기로 했다.[2] 결국 진평·주발 등과 협력해 유장이 여산을 죽임으로써 여씨들을 주멸할 수 있었다. 대신들은 소제와 그 형제들은 사실 혜제의 아들들이 아니라며 폐위하고자 했는데, 유흥거는 여씨들을 죽이는 데 공이 적다며 자청하여 하후영과 함께 소제의 처리를 맡아, 궁궐에 들어가 소제를 폐위하고 소부에 안치했다. 이후 유택 등 대신들의 반대로 유양은 황제가 되지 못하고 대왕 유항이 황제가 되었다.[2][4]
문제 2년(기원전 178년), 문제는 원래 유장과 유흥거의 공이 크다 하여 조나라와 양나라의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들이 유양을 황제로 세우려 한 것을 알자 공적을 폄하해 제나라를 갈라내어 만든 성양나라와 제북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제북왕 劉興居|유흥거중국어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2]
2. 3. 반란과 죽음
기원전 182년, 유흥거는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져 장안으로 들어왔고, 4년 전에 장안으로 들어와 숙위를 맡고 있는 형 유장과 함께 숙위를 맡았다.[2][3]2년 후, 고황후가 죽자, 형 유장과 유양은 사람을 보내 모의하여, 유양은 제나라에서 서쪽으로 출병하고 유장은 유흥거와 함께 내응해 여씨들을 죽이고 유양을 황제로 세우기로 했다.[2] 결국 진평·주발 등과 협력해 유장이 여산을 죽임으로써 여씨들을 주멸할 수 있었다. 대신들은 소제와 그 형제들은 사실 혜제의 아들들이 아니라며 폐위하고자 했는데, 유흥거는 여씨들을 죽이는 데 공이 적다며 자청하여 하후영과 함께 소제의 처리를 맡아, 궁궐에 들어가 소제를 폐위하고 소부에 안치했다. 이후 유택 등 대신들의 반대로 유양은 황제가 되지 못하고 대왕 유항이 황제가 되었다.[2][4]
문제 2년(기원전 178년), 문제는 원래 유장과 유흥거의 공이 크다 하여 조나라와 양나라의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들이 유양을 황제로 세우려 한 것을 알자 공적을 폄하해 제나라를 갈라내어 만든 성양나라와 제북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제북왕 유흥거는 불만을 품었고, 문제 3년(기원전 177년)에 흉노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한나라에서 대군을 내어 관영에게 맡겨 치게 하고 문제도 친히 태원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 반란을 일으켜 형양을 공격하려 했다. 문제는 흉노를 치기 위한 군대를 파하고 장안으로 돌아왔으며, 시무를 대장군으로 삼아 제북왕을 치게 하고 증하를 형양에 주둔시켰다. 제북왕은 패해 사로잡히자 자결했고, 제북나라는 폐해져 한나라의 군으로 편입되었다.[2][5]
기원전 154년에 유흥거의 형제 4명의 왕은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3. 평가
유흥거는 여후 사후, 형 주허후 유장과 함께 여씨 일족을 타도하고 제왕 유양을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1] 여씨의 난에서 여씨 일족이 제거되고 문제가 옹립될 때, 유흥거는 여후가 옹립했던 소제 홍 등을 궁궐에서 데리고 나와 문제를 맞이했다.[1]
유장의 공이 컸으므로, 한나라 대신들은 유장을 조나라 왕, 유흥거를 양나라 왕으로 봉하려 했다.[1] 그러나 문제는 유장과 유흥거가 제왕을 황제로 옹립하려 한 것을 알고, 기원전 178년에 유장을 성양왕, 유흥거를 제북왕에 봉했다.[1] 유장과 유흥거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1]
기원전 177년, 흉노가 변경을 침입하자 문제는 관영에게 흉노 토벌을 명하고, 자신도 태원까지 나아갔다.[1] 유흥거는 이를 기회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으나, 문제는 시무를 보내 유흥거를 토벌하게 했다.[1] 유흥거는 패배 후 사로잡혀 자결했고, 반란 가담자들은 사면되었다.[1]
유흥거의 형제 4명은 23년 후인 기원전 154년에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1]
4. 가계
劉興居|유흥거중국어는 기원전 182년에 동모후에 봉해졌다. 기원전 180년에 여후가 사망하자 형인 주허후 유장과 함께 한나라 대신과 내응하여 여씨를 타도하고 형인 제왕 유양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 했다.[1]
여씨의 난에서 여씨가 주발과 유장 등의 힘으로 타도되고, 문제를 옹립하게 되었을 때, 劉興居|유흥거중국어는 "여씨를 주살하는 데 있어서 저는 공적이 없으니, 태복 하후영과 함께 궁궐을 청소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후에 의해 옹립되었던 소제 홍 등을 궁궐에서 데리고 나와, 문제를 맞이했다.[1]
여씨를 타도할 때, 유장의 공적이 컸으므로, 한나라 대신들은 유장을 조나라 전체의 왕, 劉興居|유흥거중국어를 양나라 전체의 왕으로 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문제는 유장·劉興居|유흥거중국어가 형인 제왕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은상을 주지 않고, 기원전 178년에 유장을 제나라에서 분할한 성양왕, 劉興居|유흥거중국어를 마찬가지로 제북왕에 봉하는 데 그쳤다. 그 때문에, 유장·劉興居|유흥거중국어는 직을 잃고 공적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1]
그 1년 남짓 후, 성양왕 유장이 사망했다. 그 무렵, 흉노가 변경에 대거 침입했기 때문에, 한나라도 대군을 출동시켜, 승상 관영이 병사를 이끌고 흉노를 토벌하고, 문제도 태원까지 직접 나아가게 되었다. 劉興居|유흥거중국어는 문제가 직접 흉노를 토벌한다고 생각하고, 호기라고 여겨 거병하여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알고 병사를 돌려 장안으로 돌아와, 시무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제북왕 劉興居|유흥거중국어를 토벌하게 했다.[1]
기원전 177년, 劉興居|유흥거중국어는 격파되어 붙잡히고, 자살했다. 劉興居|유흥거중국어의 반란에 참여한 자들은 사면되었다.[1]
劉興居|유흥거중국어의 형제 4명의 왕은 23년 후 기원전 154년에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1]
참조
[1]
기타
[2]
서적
사기 (역사서)
[3]
기타
[4]
기타
사기 권9 여태후본기제9
[5]
기타
사기 권10 문제본기제10
[6]
기타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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