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씨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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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씨의 난은 전한 고조 유방 사후, 여태후가 섭정하면서 여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다가, 결국 유씨 왕조의 부활을 위한 정변으로 몰락한 사건이다. 여태후 사후 여씨 일족은 반란을 꾀했으나, 주발과 진평 등에 의해 진압되었고, 유씨 황족인 유항(문제)이 황위에 오른다. 이 사건은 황제 권력을 강화하고, 문제와 경제의 치세인 문경지치 시대를 열어 중국 역사상 황금기를 이룩하는 데 기여했다. 현대에는 여씨 일족의 반란 시도에 대한 기존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권력 투쟁의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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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씨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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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씨 정권 장악
기원전 195년 4월 25일, 한 고조 유방이 장락궁에서 사망하고[57][1] 황태자 유영이 즉위하니, 이가 전한 혜제이다. 황후였던 여치는 황태후가 되었다.[58][59][2][3] 여태후는 자신의 딸인 노원공주의 딸 장씨를 혜제의 황후로 삼았다.
고조는 생전에 후궁 척부인과 그 아들인 조왕 유여의를 총애하여 한때 태자를 유여의로 교체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조가 사망하고 혜제가 즉위하자, 여태후는 과거 후계자 다툼에 대한 보복으로 유여의를 독살하고 척부인을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했다.[4][5] 이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된 혜제는 큰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눕게 되었고, 이후 정무를 멀리하며 술과 여자에 빠져 지냈다.[60][61] 사실상 정권은 모후인 여태후에게 넘어갔다.
기원전 188년 8월 11일(양력 9월 26일), 혜제가 사망했다.[6] 장례식에서 여태후는 통곡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62] 당시 장량의 아들 장벽강은 좌승상 진평에게 여태후가 대신들을 경계하고 있으니, 여록, 여산 등 여씨 일족을 조정 요직에 등용하여 태후의 경계심을 풀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진평이 이를 여태후에게 건의하자, 여태후는 매우 기뻐하며 받아들였다.[63][7]
혜제의 사후, 여태후는 공식적으로 황제의 뒤에서 정사를 돌본다는 의미인 臨朝稱制|임조칭제zho를 선언하고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친족들을 왕으로 봉하려 했다. 우승상 왕릉은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는 고조의 유훈('백마의 맹세')에 어긋난다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좌승상 진평과 태위(太尉, 군사 최고 책임자) 주발은 여태후의 뜻에 동조했다.[64][8] 여태후는 왕릉을 명예직인 태부(太傅, 황제의 스승)로 승진시켜 실권을 빼앗았다. 왕릉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으며 불만을 표시했다.[64] 이후 여태후는 진평을 우승상으로 올리고, 자신의 심복인 벽양후 심이기를 좌승상으로 삼았다.[65][9] 심이기와 여태후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소문이 돌기도 했다. 또한 여태후는 혜제의 명의를 빌려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폐지하기도 했다.[66][10]
혜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인물은 전소제였다. 그는 본래 혜제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으나, 여태후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생모인 후궁을 살해하고 전소제를 황후 장씨의 아들로 위장시켜 황제로 즉위시켰다.[67][11] 전소제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출생 비밀과 생모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고, 여태후에게 원한을 품었다. 이를 두려워한 여태후는 기원전 184년 5월 11일(양력 6월 15일), 전소제를 폐위하고 유폐시킨 뒤 살해했다.[68][69][13] 그리고 항산왕(恒山王) 유의(劉義)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후소제이다. 후소제는 즉위 후 이름을 유홍(劉弘)으로 고쳤다.[70][14]
여태후는 임조칭제 기간 동안 본격적으로 여씨 일족을 왕이나 후(侯)로 봉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주요 봉작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인물 | 관계 | 봉작 | 연도 | 비고 |
---|---|---|---|---|
장언 | 외손자 (딸 노원공주의 아들) | 노왕(魯王) | 기원전 187년 | |
여태 | 큰오빠 여택의 아들 | 여왕(呂王) | 기원전 187년 | 기원전 181년 사망 |
여가 | 여태의 아들 | 여왕(呂王) | 기원전 181년 | 기원전 182년 사치 문제로 폐위 |
여산 | 여태의 동생 | 여왕(呂王) -> 양왕(梁王) | 기원전 182년 (여왕), 기원전 181년 (양왕) | |
여록 | 둘째 오빠 여석지의 아들 | 조왕(趙王) | 기원전 181년 | 북군(北軍) 통솔 |
여통 | 여태의 아들 | 연왕(燕王) | 기원전 181년 | |
여서 | 여동생 | 임광후(臨光侯) | 기원전 184년 | 여성 봉작은 이례적 |
이 외에도 여러 여씨 일족이 후(侯) 작위를 받았다. 여태후는 여씨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유씨 제후들에 대한 탄압도 병행했다.
인물 | 관계 | 지위 | 최후 | 연도 | 비고 |
---|---|---|---|---|---|
유여의 | 고조의 서자 | 조왕(趙王) | 여태후에 의해 독살 | 기원전 194년 | 혜제 재위 중 |
유우 | 고조의 서자 | 회양왕(淮陽王) -> 조왕(趙王) | 여씨 왕후의 모함으로 소환되어 아사 | 기원전 181년 | |
유회 | 고조의 서자 | 양왕(梁王) -> 조왕(趙王) | 여씨 왕후의 학대와 감시 끝에 자살 | 기원전 181년 | 여태후는 조나라 폐지 |
유건 | 고조의 서자 | 연왕(燕王) | 사망 후, 여태후가 서자를 살해하고 연나라 폐지 | 기원전 181년 |
고제 사후 혜제가 즉위하자, 황후였던 여태후가 황태후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58][59] 여태후는 과거 고제가 총애했던 후궁 척부인과 그 아들 조왕 유여의를 잔혹하게 살해했다.[60][61] 이 일로 충격을 받은 혜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병석에 누웠다.[60][61]
여씨 일족을 주살한 조정 대신들은 당시 황제였던 소제(유홍)와 그의 형제들이 혜제의 친자식이 아니라 여태후가 어디선가 데려온 신원 불명의 아이들이라고 주장하며 폐위시키고, 유씨 중에서 새로운 황제를 세우기로 결정했다.[91][35]
정변 이후, 주발, 진평 등 공모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여씨 일족의 음모로부터 소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씨 일족을 모두 숙청한 뒤, 이들은 소제와 그의 형제들이 실제로는 혜제의 아들이 아니며, 장씨 황후가 여태후의 사주를 받아 다른 아이들을 데려와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제와 그의 형제들이 성장했을 때 자신들에게 보복할 것을 두려워한다는 점도 인정했다. 결국 그들은 소제를 폐위시키고, 혜제의 혈통이 아닌 황족 중에서 새로운 황제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여태후는 고조의 유훈을 어기고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우고 유씨 제후들을 탄압하며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으나, 이는 기존 공신 세력과 유씨 황족들의 불만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3. 여씨 일족의 전횡과 몰락
기원전 188년 혜제가 붕어하자[62], 여태후는 임조칭제하며 본격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제가 생전에 유씨가 아니면 왕으로 삼지 않겠다고 한 약속(백마지맹)을 어기고 자신의 친족들을 왕으로 봉하려 했다. 우승상 왕릉이 고제의 유지를 내세워 반대했지만, 좌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은 여태후의 뜻에 동조했다.[64] 여태후는 왕릉을 명예직인 태부로 임명하여 실권에서 배제했고[64], 진평을 우승상으로, 자신의 심복인 심이기를 좌승상으로 삼았다.[65]
여태후는 오빠 여택의 아들 여태를 여왕(呂王)으로 봉했고, 여태 사후에는 아들 여가가 이었으나 사치를 부린다는 이유로 폐위하고 여가의 숙부 여산을 여왕으로 삼았다. 기원전 181년에는 여산을 양(梁)나라 왕으로 옮기고, 다른 조카 여록을 조(趙)나라 왕으로 봉했다. 또한 여동생 여수를 임광후(臨光侯)로 봉하고, 조카 여통을 연(燕)나라 왕으로 삼는 등[10] 여씨 일족을 요직과 왕위에 앉혔다.
여태후는 고제의 다른 서자들에게도 압력을 가했다. 회양왕 유우를 조왕으로 삼고 여씨 딸과 결혼시켰으나, 유우가 다른 여자를 총애하자 왕비 여씨는 여태후에게 유우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했고, 결국 유우는 소환되어 굶어 죽었다. 양왕 유회 역시 조왕으로 옮겨지고 여산의 딸과 결혼했는데, 왕비 여씨가 유회의 애첩을 독살하자 유회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연왕 유건이 죽자 여태후는 사람을 보내 그의 서자를 살해하여 후사를 끊었다.
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병으로 사망했다.[71] 그녀는 유언으로 여산에게 상국(相國)의 지위를, 여록에게는 북군(北軍), 여산에게는 남군(南軍)의 지휘권을 맡겼다. 여태후 사후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여씨 일족은 반란을 계획했으나, 주발이나 관영 등 고제의 공신들을 두려워하여 실행을 주저했다.[72]
한편, 제왕 유양의 동생이자 여산의 사위였던 주허후 유장은 아내를 통해 여씨 일족의 반란 음모를 알게 되었다.[73] 유장은 즉시 형 유양에게 연락하여 거병을 요청했다.[74] 유양은 낭야왕 유택을 속여 병권을 얻은 뒤 군사를 일으켜, 여태후가 소제를 죽이고 유씨 왕들을 살해했으며 여씨를 왕으로 봉한 죄를 물었다.[75][76] 여산은 관영에게 군대를 주어 진압하게 했으나, 관영은 여씨 타도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형양(滎陽)에서 진군을 멈추고 유양과 은밀히 협력하기로 했다.[77][78]
장안에서는 진평과 주발이 여씨 제거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먼저 곡주후 역상을 납치하고 그의 아들 역기를 시켜 여록에게 접근했다. 역기는 여록에게 군권을 반납하고 봉지로 돌아가면 유씨 제왕들의 의심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80] 여록은 잠시 흔들렸으나[81], 여태후의 여동생인 임광후 여수 등이 "군권을 잃으면 우리 일족은 설 자리가 없다"며 격렬히 반대하여 무산되었다.[82]
고후 8년 9월 26일 아침, 평양후 조줄은 여산과 회의 중이었는데, 여산의 친족인 낭중령 가수가 보낸 사자가 관영이 모반을 일으켰다는 거짓 보고를 전하자 여산은 황급히 미앙궁으로 향했다.[83] 조줄은 이 사실을 진평과 주발에게 알렸고, 주발은 양평후 기통의 도움과 위조된 황제의 명령으로 북군 군영에 들어가[84], 병사들에게 "여씨를 지지하면 오른쪽 어깨를, 유씨를 지지하면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고 명했다. 모든 병사가 왼쪽 어깨를 드러내 유씨 지지를 표명하자 주발은 북군을 장악했다.[85]
여산은 남군을 이끌고 미앙궁을 점거하려 했으나, 조줄의 지시를 받은 위병들에게 가로막혀 궁궐에 들어가지 못했다.[86] 이때 주발의 명을 받은 주허후 유장이 군사를 이끌고 미앙궁으로 진입했고, 궁지에 몰린 여산은 도망치다 결국 살해되었다.[87] 유장은 장락궁을 지키던 여경시(呂更始)마저 죽인 뒤 주발과 합류했다.[88] 주발은 "여산을 죽였으니 대세는 결정되었다"고 선언하며 여씨 일족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체포하여 처형했다.[89] 조왕 여록, 임광후 여수, 연왕 여통 등 주요 인물들이 참수되었고, 여태후의 외손자인 노왕 장언은 왕위를 박탈당했다.[90] 이로써 여씨 일족의 전횡은 막을 내렸다.
4. 새 황제 옹립과 문경지치
새 황제 후보로는 고조 유방의 손자인 제왕 유양(20여세), 고조의 아들인 회남왕 유장(19세), 그리고 역시 고조의 아들인 대왕 유항(24세) 세 명이 거론되었다.[35] 가장 먼저 고조의 서장자 유비의 아들인 제왕 유양이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외가인 사씨(駟氏) 일족의 사균이라는 인물이 포악하다는 평판이 있었고, 또다시 외척이 여씨처럼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결국 제외되었다.[92][36] 다음으로 고조의 일곱째 아들인 회남왕 유장도 외척 문제로 인해 옹립되지 못했다.[37] 최종적으로 선택된 인물은 고조의 넷째 아들인 대왕 유항이었다. 그는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후덕하다(仁孝寬厚)"는 평을 받을 만큼 인품이 뛰어났고, 그의 어머니 박희 역시 신중하고 선량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93][38]
유항이 차기 황제로 결정되자, 진평과 주발 등 조정 대신들은 즉시 사자를 보내 유항을 수도 장안으로 초청했다.[39] 유항은 이 제안을 신중하게 받아들여, 측근인 낭중령 장무와 중위 송창 등에게 의견을 물었다.[40] 장무는 이것이 함정일 수 있다고 경계했지만, 송창은 조정 대신들의 진심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1] 유항은 어머니 박희와 상의하고 점을 쳐보는 등 고심을 거듭하다가[42], 결국 외숙인 박소를 장안에 보내 진위를 파악하도록 했다.[43] 박소가 돌아와 조정의 뜻이 확실함을 보고하자, 유항은 마침내 황제 즉위를 결심하고 송창, 장무 등 6명과 함께 장안으로 향했다.[44] 장안 근교 고릉(高陵)에 도착하여 송창을 먼저 보내 다시 한번 상황을 확인한 뒤[44], 기원전 180년 9월 말, 진평과 주발 등의 추대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45] 그날 밤 미앙궁에 들어가 정식으로 정무를 시작했으니(청정, 聽政), 이가 바로 문제(文帝)이다.
한편, 문제가 즉위하던 날 밤, 동모후 유흥거와 여음후 하후영은 궁궐을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폐위된 소제 유홍을 그의 거처에서 소부(少府)로 옮긴 뒤, 그의 세 형제와 함께 살해하였다.[46]
문제가 즉위하고 4개월이 지난 후, 대신들은 황태자 책봉을 건의했다.[47] 문제는 처음에는 천하의 현명하고 덕 있는 인물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선양의 예를 따르거나[48], 숙부인 초왕 유교, 사촌 형인 오왕 유비, 동생인 회남왕 유장 등 가까운 종친 중에서 후계자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49] 그러나 대신들은 고조 유방의 전례와 황위 계승 원칙을 내세우며 황태자는 반드시 황제의 아들이어야 한다("입사필자", 立嗣必子)고 강력히 주장했다.[49] 문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당시 8세였던 아들 유계를 황태자로 책봉했다.[49] 문제에게는 대왕 시절에 맞이했던 정식 왕비(대왕비)가 있었으나 문제 즉위 전에 사망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도 문제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51] 따라서 당시 생존한 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유계가 사실상 장남의 자격으로 황태자가 되었다.
황태자 책봉 두 달 후인 기원전 179년 3월, 문제는 황태자 유계의 생모인 두의(竇漪)를 황후로 책봉했다.[52] 문제와 그의 아들 경제가 다스린 안정적인 치세는 후대에 문경지치로 불리며,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황금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정변의 사후 처리 및 역사적 의의
새로운 황제 후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부 공모자들은 고조의 장남인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자 고조의 장손인 제왕 유양을 추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요 대신들은 유양의 외삼촌인 사균(駟均|사균zho)의 세력이 강성하여, 만약 유양이 황제가 된다면 여씨 일족 때와 같은 외척의 발호가 반복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대신들은 고조의 아들 중 생존해 있던 당시 23세의 대왕 유항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유항은 효심이 깊고 관대하며, 그의 어머니 박씨 가문의 사람들이 신중하고 온화하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신들은 유항에게 은밀히 초대를 전달하여 그에게 새로운 황제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유항의 조언자들은 이 초대에 대해 의심했다. 그들은 여씨 일족의 학살이 정당화되지 않았다고 느꼈고, 대신들이 유항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자신들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라고 우려했다. 한 조언자 송창(宋昌|송창zho)은 반대했다. 그는 한나라의 지지자들이 찬탈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수도 외에 다른 여러 제후국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대신들이 원하더라도 황제의 권력을 찬탈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 유항은 숙부인 박소를 장안으로 보내 주(周) 원수를 만나 대신들이 초대에 진심이며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증하게 했다. 숙부는 이를 믿고 유항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유항은 이후 장안으로 향했다. 저녁 의식 동안 승상 진평이 대신들을 이끌고 유항에게 황위를 바쳤다. 유항은 관례대로 세 번, 그리고 이례적으로 네 번 거절한 후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황위에 올랐다. 그날 밤, 유흥거는 소제를 황궁에서 쫓아냈고, 대신들은 새로운 황제(사후에 문제(漢文帝))를 융성하게 맞이했다.
5. 1. 역사적 의의
여씨의 난은 신생 왕조였던 전한에 여러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을 통해 황제 중심의 권력 구조가 더욱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 이후 즉위한 문제는 유능하고 안정적인 통치를 펼쳤다. 문제와 그의 아들 경제 시대의 안정적인 통치는 이후 문경의 치로 불리며,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황금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또한 여씨의 난과 그 결과는 중국 역사에서 외척 세력이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황제 역시 외척에게 지나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게 만드는 교훈으로 작용했다.
5. 1. 1. 여씨의 난에 대한 현대적 연구
여후 사후, 여산 등 여씨 일족이 찬탈을 시도했으나 유씨 제후왕과 주발, 진평 등 원훈(옛 공신)들의 활약으로 저지되고 몰살당하여 유씨 왕조가 안정을 되찾았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며, 현재에도 이러한 시각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청나라 말기 이후의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여씨가 실제로 반란을 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원훈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역사학자 이개원은 당시 유방의 통일 전쟁에 공헌한 공신들이 강력한 정치 세력, 즉 '군공 수혜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분석한다.[56] 한 왕조 초기에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궁정 권력 기구와 관료 중심의 정부 권력 기구가 분리되어 있었는데(이는 훗날 내조와 외조의 형태로 발전한다), 정부의 최고 직책인 승상은 반드시 군공 수혜 계층에서 나와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여후는 이러한 군공 수혜 계층을 존중하는 한편, 그들 중에서도 진평이나 심이기처럼 자신과 가까운 인물들을 승상 자리에 앉힘으로써 황실 중심의 궁정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후가 죽은 뒤, 유방 시대에 별다른 공적이 없던 여산이 승상이 되자, 이는 기존 군공 수혜 계층의 큰 불만을 샀고 결국 정변으로 이어졌다고 이개원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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